[eBook] 지구를 구한다는 거짓말 - 환경을 생각하는 당신이 들어보지 못한 기후과학 이야기
스티븐 E. 쿠닌 지음, 박설영 옮김, 박석순 감수 / 한국경제신문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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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미래를 알 수 없다. 그래도, 미래를 알지 못하면 마음은 불안하다. 그래서 고래부터 거북이 등껍질로도 영매를 통해서도 신탁을 얻기를 원한다. 현대에 와서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불안을 해소하는 권위는 과학자에게 있다. 

학교에서 배울 때와 현장에서 일할 때 나의 불안한 마음이 커지는 것은 오차들 때문이었다. 숫자는 수학공식처럼 하나가 아니다. 단계마다 층층이 쌓이는 오차들 덕분에 내가 아는 것이 정확할 수 없다는 걸 받아들이는 것은 괴로운 일이다. 그래서, 나는 확신에 차서 말할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 


'지구를 위한다는 착각'(https://blog.aladin.co.kr/hahayo/12746420)을 읽었었다.

이 책이랑 제목이 너무나 비슷해서, 계속 헷갈렸다. 지구를 위한다는 착각,도 원서 제목은 그런 게 아니었다. 지구를 위한다는 착각, 은 'Apocalypse never'였고, 이 책의 원서 제목은 'Unsettled'이다. 원서의 제목 정도가 적당하다는 생각이 든다. 기후란, 언제든 변할 수 있는 확정되지 않은 미래의 일이다, 란 의미에서 그렇다. 

'지구를 위한다는 착각'이 종말론적인 전망으로 불안을 극대화시키는 방식의 언설에 저항하기 위한 말들이었다면, '지구를 구한다는 거짓말'은 그런 종말론적인 전망이 가능하게 하는 과학의 한계에 대한 말들이다. 


기후위기, 기후정의, 마지막 기회,같은 넘쳐나는 말들 가운데 피로했다. '나는 그럼 뭘 해야 해?'라는 질문에 '정치인이 기업이 변해야 한다'고 자신의 잘못은 없는 양 빠져나가는 말들이 싫었다. 그저 인지도나 호응을 얻기 위해 과격한 말들과 행동을 일삼는 것처럼 보였다. 기업이나 정치인이 그렇게 행동하는 데, 소비자나 유권자인 나의 민원이 작동하는 거라는 걸 알고 있다. 5%의 물가인상조차 감당하기 어렵고, 당장 전쟁이 터지면 탄소중립이 뭔지 싶은 선택을 하게 된다. 

'지구는 괜찮아, 우리가 문제지'(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285827587)라는 책 제목이 어쩌면 내 맘이다. 


책은 한참동안 통계와 방법에 대해 말한다. 기후를 예측하는 과학자의 방법이 무엇인가. 그 방법은 얼마나 많은 오차와 불확실성을 포함하고 있는가,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 부분을 읽는 것은 너무 어려웠다. 조건을 다르게 여러가지 모델을 설계하고, 다른 결과를 얻는다. 결과의 오차범위가 있고, 결과의 한계가 있다. 두꺼운 연필로 그린 그림을 가는 연필로 다시 그릴 때, 그저 우상향 추세선처럼 보이던 것은 요동치는 선으로 변하고, 인간의 삶은 우상향 추세선에 달린 게 아니라 요동치는 가는 선 위에 있다. 100년도 못 살면서 천년 후를 걱정하는 것처럼 당장 내일 벌어질 일에도 일관성을 유지하지 못하는 정책들을 가지고, 무언가 개선할 수 있을 것처럼 확신에 찬 말들을 하는 게 참기 어렵다. 

인간이 없을 때도 공룡은 멸종했고, 지구는 뜨겁기도 차갑기도 했는데, 인간인 우리 때문에 지구가 뜨거워지고 있으니 불편을 감수하라,는 말을 들으면 나는 삐딱해지는 거다. 불편을 감수하라,가 이미 누릴 만큼 누리는 선진국에서 선진국에 진입하려는 나라들에 하는 말이라면 더욱 삐딱해지는 거다. 

과학적 방법론과 불확실성에 대해 말할 때 느릿느릿 나아가던 것은 공론장에서 왜 이런 말들로 흐르는지 설명하는 대목, 그러니까 정치와 의사결정에 대한 부분에서 빠르게 나아갔다. 책으로 읽을 때조차 불안을 감당하기 싫어한다. 


읽으면서 그래서 어떡할까요?라는 물음에 하는 저자의 대답 때문에 '누가 내 치즈를 옮겼을까'(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226139) 생각이 났다.  어린날 읽을 때는, 어른들 혹은 기득권자가 새로운 세대의 순응을 바라면서 만든 우화라고 삐딱했던 것도 같은데, 이 책을 읽으면서 떠올린 것은 세상의 변화를 그저 받아들여야 하는 순간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인 거 같다. 젊은 어떤 날 내가 파도라고 생각했던 어떤 자만심은 지금 나는 그저 파도 위의 나뭇잎이라는 자각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아무리, 탄소배출을 제로로 만든다는 대의명분에 동의한다 해도, 당장 난방조차 끄지 못하는데, 그저 우리는 그 때 그 때 달라지는 상황에 옮겨진 치즈를 따라 삶을 바꾸는 생쥐같이 살아가야 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인간은 그렇게 작고도 크고도 한심하다. 



과학자가 자신이 윤리적이라 믿는 것을 위해 정책 토론장에 고의로 잘못된 정보를 전달할지 말지를 고심하는 것조차 자만심의 극치다. - 7%


존 케리 당시 국무장관은 연설 도중 인간이 초래한 기후변화를 대량 살상 무기에 비유하면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과학은 명쾌합니다.(...) 오바마 대통령과 저는 '평평한 지구 학회'같은 모임에 신경 쓸 시간이 없습니다." 하지만 과학은 확정적이지 않다. 공개 토론은 과학적 절차의 핵심이다. 과학자가 토론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반과학적이라는 딱지가 붙을까 봐 두려워해야 한다는 건 말이 안 된다.- 10%


과학이 어떻게 정보 전달이 아닌 설득을 위해 사용되는지, 그리고 비전문가들이 그 설득에 어떻게 현혹되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불쾌한 사례다. -25%


미래에 어떤 상황이 벌어지든 평가보고서는 허리케인 데이터에 대한 설명을 누락시켜 대중을 속이고 있다. 이는 워싱턴 DC의 국립아카데미 건물 앞에 우뚝 서 있는 아인슈타인의 다음과 같은 유명한 격언에 반하는 것이다. "진리를 탐구할 권리에는 의무가 함께 수반된다. 사실이라고 인식한 것은 티끌만큼도 숨겨서는 안 된다." -41%


매우 불확실한 미래 예측으로 공포를 조장하는 헤드라인을 뽑는 것과 기존 데이터를 왜곡해 기후 관련 죽음의 공포를 조장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 55%


확실한 것은 언론, 정치인, 때론 평가보고서들마저 과학이 기후와 재앙에 대해 말하는 사실을 뻔뻔스럽게 잘못 전달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잘못은 해당 보고서를 작성하고 생각 없이 검토하는 과학자들, 보고서 내용을 무비판적으로 따라읊는 기자들, 이런 일들이 일어나도록 허락한 편집자들, 그러한 재앙의 호들갑을 부채질하는 활동가와 단체들, 그리고 대중의 침묵 하에 기만을 일삼는 전문가들이 만들어낸 것이다. 이러한 기후에 대한 수많은 인식 오류가 지속적으로 반복되면서 그것들을 합의된 '진실'로 바꿔 버린 것이다. - 59%


안타깝게도 뉴스의 보도 주기는 미친 듯이 빨라지고 기자와 편집자는 그 어느 때보다 시간에 쫓기고 있다. 현대 미디어의 다양성과 보편성은 신선한 '콘테츠'에 대한 수요뿐 아니라 기사를 제일 먼저 게재하려는 경쟁도 증가시켰다. 과학자들과 마찬가지로 기자도 편견을 버려야 한다는 직업적 규범이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편견이 깨끗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 60%


물론 이는 기후에만 국한된 문제가 아니며, 정치적으로 회색 지대를 혐오하는 유권자들에게도 일부 책임이 있다. 불확실성으로는 지지 기반을 다지기 힘들다. - 60%


언론은 NGO에 권위를 부여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이들 또한 그들만의 기후 에너지 의제를 가진 이익 집단이다. 지지자를 결집하고 돈을 모으고 캠페인을 진행하고 정치적 힘을 휘두르는 강력한 정치행위자다. 많은 NGO에서 '기후위기'는 존재의 이유 그 자체다. 또한 더 공격적인 단체들에게 의제를 빼앗기는 것도 걱정해야 한다. - 62%


그리고 내 경험상 사람들은 자기 전문이 아닌 영역에 대해서는 자신이 선택한 미디어를 믿고 신뢰하는 경향이 있다. - 62%


"누가 개발도상국에게 탄소를 배출하지 않도록 돈을 지불할 것인가?"라고 묻는 것은 당연하다. 나는 이 간단한 질문을 많은 사람들에게 15년이 넘도록 했지만 아직 납득할 만한 답을 듣지 못했다. - 71%


절약을 장려하는 확실한 방법은 규제를 강화하거나 가격을 인상하는 것이다. 하지만 둘 다 정부가 추진하기에는 어려운 조치다. - 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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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안 하기 게임 일공일삼 65
앤드루 클레먼츠 지음, 이원경 옮김 / 비룡소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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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 원서에 붙은 서평을 보고 궁금해서 내 맘대로 주는 크리스마스 선물로 6학년인 아들 주려고 골랐다. 어차피 책은 환영받지 못하는 선물이니 내가 읽고 싶은 책을 사겠다며 사서 비밀리에 포장도 하고, 리본도 매서는 크리스마스 아침에 탁자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내가 먼저 읽었다. 

재미있다. 

초등학교 5학년 아이들이 남자 대 여자로 말 안하기 대결을 벌인다. 서로의 또래집단을 끔찍히 싫어하는 초등학교 5학년 남자애들과 여자애들. 주인공 남자애는 어느 날 침묵하기로 하고 혼자만의 실험을 하다가, 여자애들의 하릴 없는 잡담에 발끈해서 도발한다. 서로의 집단이 쓸모없는 말을 한다고 생각하는 남자들과 여자들이 말 안하기 게임을 하고, 시끄럽기로는 학교 내 최고였던 학년의 갑작스러운 돌변에 선생님들은 당황한다. 또래집단의 성 대결은 어른들과의 대결로 결국 무화된다. 


나는 동성을 좋아한다,보다 이성을 좋아하기가 어렵지 않나,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서구의 동성애 혐오가 무언가 필요에 의해 만들어졌다고도 생각한다. 

말은 자연스럽지 않다고 하지만, 자연스럽다는 건 뭘까, 라고도. 

동성을 좋아하는 자연스러움,은 이성을 혐오하게도 한다고도 생각한다. 

비슷한 존재를 좋아하고 다른 존재를 싫어하는 태도가 있지 않나,라고도 생각한다. 

이민족 혐오처럼, 이성혐오가 존재하다가, 살아가면서 다듬어지고 깎여서 그러구러 살아가는 게 아닌가,하고. 

자라지 않는 사람들, 자라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저렇게 포장해서 스스로를 합리화시키면서 이성혐오를 길게 늘이는 세태를 보고 있으니, 필요한 건 기성세대의 억압인가,라는 어처구니 없는 생각도 든다. 또래집단 안에서 성 대결은 어떻게 완화될 수 있을까. 소설처럼, 세대대결 양상으로 넘어가야 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이삼십대 남녀가 싸우는데, 사오십대 기득권자들이 특정 성을 지지한다. 지금의 페미니즘 이슈가 그렇게 보인다. 

입맛이 쓰고, 답답한 마음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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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소녀를 아는 사람들
정서영 지음 / 팩토리나인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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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게 읽었다. 

무도덕의 악녀가 등장한다. 

자신의 도덕이 있지만 공동체의 도덕에는 관심이 없다. 

사랑과 관심을 원하지만 어떤 방법이 있는지도 모른다. 


법적인 금기나 공동체의 금기에 관심이 없다. 

밥을 주는 인간에게 자신의 장난감(쥐?)을 물어다주는 고양이같다. 

죽음을 가볍게 생각하기 때문에, 작은 배신에 큰 앙갚음을 한다.  

쓰려고 펼쳐놓고는 다시 읽었다. 무엇을 정말 했었는지 보려고. 직접 하기도 하고, 타인에게 조언하기도 한다. 슬지의 말들을 누군가는 실행하고, 누군가는 무시한다.

함께 살아가기에 슬지는 어떤 사람인가. 

슬지는 어떤 존재인가. 

슬지의 관점이 아니라, 소녀를 아는 사람들이 화자인 이야기들이다. 

슬지는 쥐를 죽였고, 개를 죽였고, 사람을 죽였고, 누군가를 죽게 만들었다. 

재미있어서, 누군가와 절친이 되고 싶어서, 사랑을 빼앗겨서, 감당할 수 없어서, 사랑해서, 죽음에 이르게 한다. 죽음이 무거운 게 아니고, 가벼운 거여서 슬지는 그럴 수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더하여, 슬지는 이기적이어서, 논리적이어서, 그러는 것도 같다. 


이게 재밌다면 어떤 면에서 그랬을까. 

슬지는 상상 속의 완전범죄자,고 이야기는 추리소설 같다. 탐정의 관점에서 범인을 잡는, 논리와 이성을 찬양해 마지 않는 추리소설의 얼개는, 뒤집어져서 범죄자가 설계한 사건에 대해 듣는 것으로 바뀐다. 홈즈를 읽었던 마음으로, 읽게 된다. 범죄자가 설계한 사건을 누구는 실행하고 누구는 실행하지 않는다. 슬지는 실행하는 범죄자로도, 조언하는 범죄자로도 등장한다.


재밌게 읽었지만, 지금의 어떤 세태가 이런 태도를 조장하는가, 싶어 무섭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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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반 무 많이 서해문집 청소년문학 16
김소연 지음 / 서해문집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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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는 일은 중요하다. 그런데, 왜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인데'라는 말은 어렸을 때 그렇게 하찮게 들렸던 걸까. 상황조차 따뜻한 어른들의 말인데, 끼니 거르지 말고 밥 먹고 합시다, 같은 말인데, 왜 그렇게 하찮게 생각했던 걸까. 어렸을 때는 뭔가 동물적인 일들, 생존을 위해 필수적인 일들을 하찮게 생각하는 태도가 있는 게 아니었을까. 그것보다 중한 게 있지 않을까,라고 생각했던 걸까. 시간을 건너고 난 지금, 먹고 사는 거 보다 중한 게 뭐가 있는지 대답하지 못하는 어른이 되어서, 그 마음을 이해하게 되는 거다. 

우리 역사의 순간들이 다섯가지 음식과 얽혀서 짧은 이야기들로 묶였다. 십대의 소년과 소녀가 겪는 음식과 관련된 순간들이다. 

6.25 피난길에 고구마 한 보퉁이, 전쟁 후 의정부에서 먹는 유엔탕(나중에 부대찌개가 된다), 평화시장 여공가족의 떡라면, 87 민주항쟁 가운데 떡볶이, 98년 IMF 시절의 치킨. 

커다란 역사를 겪어내는 한 사람, 한 사람이 강하고 단단하게 살아남는 이야기들이다. 

떡볶이와 얽힌 이야기는 좀 더 아팠는데, 함께 겪는 고난,에 대한 이야기로 읽히기보다 대립의 이야기여서 그런 것도 같다.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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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돌봄과 작업 - 나를 잃지 않고 엄마가 되려는 여자들 돌봄과 작업 1
정서경 외 지음 / 돌고래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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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에게 "왜 경험없는 사람 이야기를 들어?" 라고, 질문한 적이 있다. 

나는 아이를 이미 키운 나이 든 아주머니 말들을 들었다. 하나보다 넷을 키운 엄마 말을 들었다. 3개월의 아기는 낯을 안 가려서 맡기기 좋다고, 1년을 키운 아기는 엄마와 떨어지려고 하지 않으니 사람도 구하기 힘들다,는 말을 듣고 3개월 휴가만 내고 출근했다. 

친구에게 "왜 출산이나 육아가 이런 거라고 말해주지 않았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나는 내 엄마의 태도를 보고 배웠기 때문에, 먼저 아이낳은 나의 친구들 말에 내가 얼마나 무신경했는지 기억하기 때문에 말할 수 없었다. 어떤 괴로움이든 내가 겪어야 할 문제고, 내 경험의 보편성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말할 수 없었다. 

직장의 후배에게 "선배는 말하지 마세요"라는 말을 들은 적도 있다. 

나는 내가 아이를 간절히 원했던 거라서, 출산 경험을 과장할 수도 없었고, 이미 지나간 일들이라 모든 순간들이 감사했다. 출산의 순간에는 항상 죽을 수도 있다면서 마음을 다 잡지만, 죽지 않았고 둘 다 건강하니, 그걸로 충분하다,였다. 후배는, 남자도 함께 듣는 출산 고생담을 엄마된 자가 저렇게 단순하게 묘사하는 걸 참지 못하는 거 같았다. 


젊은 엄마들이 만드는 책을 언니가 선물해서 받아 읽고 나랑 얼마나 다른지 쓴 적이 있다. 

(https://blog.aladin.co.kr/hahayo/11312880)


갯마을 차차차,를 보다가 덜컥 걸리는 게 있어서 쓴 적도 있다. 

(https://blog.aladin.co.kr/hahayo/13015445)


산후조리원을 보다가도 무언가를 쓴 적도 있다.

(https://blog.aladin.co.kr/hahayo/12151051)


어디에나 이야기는 있지만, 고양되고 독려되는 이야기는 있다. 지금은 여성이 얼마나 출산과 양육으로 착취당하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고양되고 있다. 하나나 둘을 낳은 엄마들이, 일과 양육을 함께 하는 게 얼마나 힘든지에 대해 말하는 이야기가 팔린다. 프리랜서,라는 위태로운 직업군이 늘어나고 있으니 그런 직업군의 엄마들이고, 아이없는 젊은 여자들이 스스로의 확신을 강화시킬 수 있는 이야기들이다. 출산과 육아가 스펙이 되지 않아 애석해하는, 가치를 다른 것과 거래하는 세태가 강화되는 이야기들이라고 생각하면서 읽었다. 타겟 독자는 지금 책을 주로 사는 2~30대 미혼이거나 기혼에 아이가 없거나 하나거나 둘인, 억울하고 괴로운 여성들인 거 같다. 이 책을 쓴 엄마들과 비슷하지만 다른 전통적인 피라미드 조직의 말단에 속해서 아이를 셋 건사하는 나는 시큰둥하게 읽는다. 결국 개인이 겪어내야 하는 삶의 국면들에서, 어떻게 조언하겠어?라고 생각하는 내가 하지 못하는 말들이다. 난다의 거의 정반대의 행복을 읽고 그런 말들을 남겼었다.(https://blog.aladin.co.kr/hahayo/10081387) 책 속에서도 그런 모순이 충돌한다. 먼저 아이를 키운 어른들의 말들에 '너도 당해봐라'라는 말이라고 생각하기도 하고, '당사자가 아니면 입을 닫아야 한다'라고도 한다. 그러고도, 무언가 말하고 싶어하는 것은 도움이 되고 싶어서일 것이다. 받아들일 마음이 없다면 받아들일 수 없는 말이다. 하는 사람보다 듣는 사람에게 달린 일이다. 이 책을 읽고도, 누군가는 아이를 낳기로 하고, 누군가는 낳지 않기로 할 것이다. 짧지만 강렬하게 나에게 다가온 조언들은 있지만, 이렇게 긴 말들이 필요하지는 않다. 그저 찰나, 이유도 없이 깨닫게 된다.


정서경작가의 글은 최재천 교수의 유튜브처럼, 전하고 싶은 마지막 말이 전해지지 않을 것 같다. (https://blog.aladin.co.kr/hahayo/13686633) 아이가 살고, 내가 죽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짧은 순간 사랑을 알게 되었다는 말보다, ''이제 네 차례다'라는 음모'라던가 '보이스피싱에 낚여 나도 모르게 무시무시한 물건을 주문해버린 것 같았다'라는 말, 아이없는 여자들의 두려움을 고양시키는 말들이 남을 거 같다. 감정의 롤러코스터를 즐기는 사람의 글이다. 슬픔도 잔잔히, 기쁨도 잔잔히를 추구하는 나같은 사람은 '모두 지나가는 날들'이라고, 짧고 격렬하기 때문에 즐기라고 말해 줄 수 있을 뿐이다. 


임소연연구자가 선배 학자에게 듣는 '나는 타협을 잘 했을 뿐이야'라는 조언이 와 닿는다. 젊고 선명하기 원하는 새로운 세대에게, '오염되기를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는 조언이 절절하다. 


아티스트 전유진은 자기 공간에 대한 이야기는,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내 방,이라는 아이의 요구를 거절하는 나 자신이 보이는 말들이다. 그렇지만 '출산과 육아를 하는 것에 관해 당사자가 아니면 그 어떤 말도 보태지 말자'라는 말은 너무 강경해서 물러서게 된다. 당신이 지금 하는 말은 무엇인가요?라고 질문하게 된달까. 더하여 다음 장에 '하지만 그게 뭔지 제대로 알려주지도 않으면서'라는 말이 붙는다. 양가성과 모순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는 전제 뒤로 이런 글들이 따라 붙는다. 어른들은 언제나 말해주고 있었다. 듣는 내가 미숙해서 알아듣지 못했다. 그 말 뜻을 몰랐고, 실감하지 못했다. 겪어보고서야 뒤늦게 그 의미를 알아차렸다. 제대로 알려주지 않았다는 원망도 아무 말도 보태지 말라는 당부도 기이하다.


또래집단의 말들이 더 잘 들린다.  

또래집단의 감수성과 조응할 말들이 더 잘 들린다. 

세상의 진실과 거리가 멀더라도, 또래집단의 말들의 파도 위에 올라탄 말들이 더 잘 전해진다. 

어쩌면 그래서, 모두 개별적일 수 밖에 없는 경험 가운데-누군가는 아이를 낳다가 죽을 뻔 하기도 하지만, 누군가는 두 시간 진통에 가뿐하게 낳을 수도 있는 거니까- 슬프고 억울하고, 쓸쓸하고 괴롭다는 이야기만 더 많이 돌아다니는 것도 같다. 


엄마이기 전에 아이였으면서, 아이였을 때, 엄마의 감정을 느꼈을 거면서, 왜 그러는 걸까.

어쩌면 엄마가 되기를 거부하는 아이의 마음이 이런 이야기들을 점점 더 커지게 하는 것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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