젠더 이반 일리치 전집
이반 일리히 지음, 허택 옮김 / 사월의책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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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에 대해 쌓인 불만을 가지고, 두 권의 책을 골랐다. 한국철학자가 쓴 표류사회와 이반일리치가 쓴 젠더다. 표류사회를 먼저 읽었고, 젠더를 읽었다. 

재미있게 읽었다. 이반 일리치는 누가 나를 쓸모없게 만드는가,를 읽은 적이 있다. 이반 일리치의 첫 책도 가능할까 싶지만 뭔가 애닲은 마음이 되면서 읽었는데, 이번 책도 그랬다.  (https://blog.aladin.co.kr/hahayo/7237597

가정을 꾸리기 위해 분업을 택하고 아이를 키우기 위해서 다른 가치로 작동하는 작고 견고한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애쓴다. 사회에서 경쟁하는 노동자가 아니라, 가족 안에서 공조하는 남자와 여자가 되어 다시 사회에서 다르게 해석되는 엄마와 아빠로 세상을 이해해나간다. 이전과 똑같을 수 없는 엄마가 되어, 이전과 똑같은 공정을 원하지 않는다. 서로 다른 짐을 지고 세상을 건너는 동지애를 느끼며 남편을 보고, 아이들에 대한 어떤 태도 가운데는 더 큰 공동체에 대한 기대를 가진다. 가정은 사회에 다른 가치관으로 작동하는 공간이라고, 남성과 여성이 사회를 보는 다른 시선을 알아차린다. 관계를 버거워하면서 고립되고자 하는 욕망들을 볼 때마다, 안쓰러운 마음이 되기도 한다. 가정이 사회로 확장되는 것이, 사회적 기준이 가정을 물들이는 것에 거부감을 가진다. 아이들이 속한 가장 작은 공동체인 가정에서 안주인으로서 권력을 행사하고 싶어한다. 아이들에게 가지는 나의 권력이 나의 수고 가운데 있는 거라는 걸 자각한다. 

내게 충고하는 이들의 말을 곰곰이 들어보니 그들이 내 강의에 왜 그렇게 불편해 하는지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내 논지가 그들이 꿈꾸는 것들에 걸림돌이 되기 때문이었다. 페미니스트는 성 역할을 강요받지 않는 젠더 없는 경제를 꿈꾼다. 좌파 운동가는 모든 인간이 평등하게 정치 경제의 주체가 되는 사회를 꿈꾼다. 미래주의자는 사람들이 마음만 먹으면 의사, 남자, 개신교도, 유전공학자 등으로 자신의 역할을 바꾸고, 무엇을 골라도 똑같이 대접받을 수 있는 사회를 꿈꾼다. 그러나 성의 관점으로 경제학을 들여다 본 결론은, 간단히 말해 이런 꿈들이 여지없이 무너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이 꿈꾸는 욕망은 모두 하나의 재료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젠더 없는 경제‘이다. - P22

하지만 서비스 전문가들이 정당성을 인정받으려면 그들의 전문가적 진단에 숨어있는 인종주의를 들키지 않도록 믿음직한 수사법을 구사해야 한다. 그래서 나는 조잡하기 짝이 없는 이 새로운 사회생물학에 대한 논쟁을, 인간의 ‘우열‘을 측정하는 일보다 인간에게 ‘필요‘를 심어주는 일에 있어 전문가적 풍모를 갖춘 내 동료들 곧 교사, 의료인, 산부인과 의사, 사회사업가에게 맡기려는 것이다. 이들은 나름 과학적이라고 하는 진단을 통해 타인을 자기가 제공하는 서비스의 소비자로 전락시키는 법을 잘 아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이런 자신감에 붙어있는 그들의 사욕으로 말미암아 그들의 교묘한 등급 매기기 능력도 타격을 입을 것이고, 그들 역시 조잡한 사회생물학적 성차별주의와 다를 바 없다는 점도 공공연하게 알려질 것이다. - P77

여자의 임무 중에는 세리로부터 집을 지키는 일도 있었다. 여자 혼자 집에 있다고 우기면 세리는 집안으로 들어올 수 없었다. 아이가 명백한 잘못을 저지른 경우에도 여자는 아이의 편을 들었다. 필요하다면 손톱과 이빨을 세워서라도 적에게 맞서라는 것이 여자에게 요구되는 도리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남자가 지켜야 할 도리는 정반대였다. 여자가 아이를 감싸더라도 남자는 아이의 잘못을 꾸짖고 때로는 가혹하게 벌을 주는 게 올바른 태도였다. - P115

젠더가 다스리는 곳에서는 남자와 여자가 집단적으로 서로에게 의존하므로 서로 싸우고 빼앗고 물리치더라도 어느 선을 넘을 수 없다. 토박이 문화란 간혹 비정할 때도 있지만 양쪽 젠더 사이의 휴전이다. 남자들이 여자들의 몸을 망가뜨리는 문화에서도 규방에서는 남자의 감정에 극심한 고통을 가해 앙갚음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이러한 휴전과 달리 희소성이 지배하는 사회에서는 남녀 간 전쟁이 끊이지 않고, 여자들은 늘 새로운 패배를 당한다. 물론 젠더가 다스리는 곳에서도 여성은 종속적일 수 있다. 그러나 경제가 통치하는 곳이라면 어디든 여성은 오로지 제2의 성일 수밖에 없다. 여자들은 젠더 없는 판돈을 건 이 도박에서 이기든 지든 영원히 불리한 위치에 선다. 이 도박판에서 양쪽 젠더는 발가벗은 채 중성을 하고 있지만, 결국 승리하는 자는 남자다. - P184

지금까지 나의 논의는, 젠더에 기초한 자급자족적 사회가 희소한 생산품에 의존하는 사회로 역사적 이행을 했다는 데 기초한 것이었다. 희소성 역시 젠더나 성처럼 역사적인 것이다. 희소성의 시대는 오로지 다음과 같은 가정 위에서만 출현할 수 있다. 인간이란 개별적으로 살아가는, 소유하는 존재이며, 물질적 생존의 측면에서 젠더 없는 존재라는 가정이 그것이다. 즉 인간이란 탐욕스런 경제적 중성이라는 가정이다. - P1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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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더 이반 일리치 전집
이반 일리히 지음, 허택 옮김 / 사월의책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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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계를 인지하고 조심스럽게 이어오던 자급자족 경제가, 한계없는 소비주의 경제로 이행하기 위해서는 젠더 경계가 무너진 인간, 가치를 기꺼이 돈으로 거래할 인간이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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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류사회 - 한국의 여성 인식사
이소정 지음 / 아이필드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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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린 책이고, 재미나게 읽었다. 

한국철학-인내천(人乃天)이나 홍익인간(弘益人間)-에 대한 설명은 동의하거나 공감하면서 읽었다. 음과 양은 우열의 문제가 아니고, 음이 양 위에 있어야 자연스럽게 순환하면서 가장 좋은 상태가 된다는 주역의 설명은 마음이 편해진다. 둥글게 순환하는 사회의 묘사, 여성과 남성의 우열없는 태도. 내가 살고 있는 이야기의 세상은 사람은 모두 그 안에 하늘을 품고 있다. 사람이 그대로 보살이 될 수 있는 누천년 불교의 나라였고, 기운이 모였다 흩어지는 마음이 중한 유교의 나라다.  

그렇지만, 세태에 대한 이야기는 물음표가 생기고, 고대사회부터 조선시대, 그리고 지금까지의 여성인권이 떨어지는 상황의 묘사는 그게 무슨 소용인가? 싶다. 지나간 과거가, 과거에 그랬던 게 지금 뭐?라는 식. 중국 역사에 '동이족'으로 묘사되는 것이 우리 민족,이라는 말이나, 고대사 상나라가 우리 민족의 나라라거나, 하는 말들은 의미가 있는 말인가, 생각했다. 

책 속에서 우리가 상나라의 후손이고, 공자도 그러하다는 대목에서는 좀 많이 놀랐다. 그게 뭐 중요해? 라는 태도에 더하여, 유사역사학에 대해 내가 배우는 초록불의 잡학다식(http://orumi.egloos.com/),이라는 사이트도 떠오르고, '한국인들이 공자도 자기 조상이라고 한다'고 분개하던 중국의 애국청년 생각도 났다. 

내가 느끼는 '우리'는 무엇일까? 민족인 걸까? 생각이 많다. 내가 생각하는 우리,는 같은 말을 쓰고 여기 한반도에서 함께 살고 있는 사람들이다. 여기 지금 함께 살고 있는 사람들, 그럼 내가 가지고 있는 어떤 생각들의 뿌리는 무엇일까, 역시 대답하기 쉽지 않다. 아마도 그래서 저자는 상나라부터 시작한지도 모르겠다. 남편이 왕이고, 아내는 장수인 고대의 어떤 사회를 묘사하면서, 여성의 지위가 낮지 않았다고, 다시 고려와 신라와 조선을 말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주자의 교조적인 성리학이 들어와서 조선의 여성지위가 떨어졌다고, 일제의 수용적인 태도나 성적으로 개방적인 태도 가운데 여성지위가 떨어졌다고 묘사한다. 가끔 이게 일관성은 있는 건지 의심도 한다. 옛날에 그랬던 게 무슨 소용이냐, 싶고, 그래서 모든 악덕이 외부로부터 들어왔다고 하면 되는 것인가, 싶기도 하다. 여성이 우위에 섰던 고대 사회는 남성이 우위에 선 부계사회에게 결국 주도권을 빼앗겼고, 성적으로 결벽적이고 여성에게 억압적이던 조선 사회는 일제에 무너졌다.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의 이야기가 좀 더 좋은 이야기라고 해도, 수직으로 위계지워진 서양의 철학들이 둥글게 순환하는 동양의 세계를 무너뜨렸다면, 어떡해야 하는 걸까 생각이 많다. 동양의 세계가 과연 무너졌다고 할 수 있는가, 생각하고, 지금의 문명이 계속 나아갈 수 있을까 의심하지만, 나는 사람이 곧 하늘이고,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라,는 태도를 내가 선택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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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프로젝트 헤일메리 앤디 위어 우주 3부작
앤디 위어 지음, 강동혁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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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립된 우주에서 자신이 누군지도 모른 채 깨어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그 부분은 재미있었다. 그럴 듯 해,라면서 읽었다. 그렇지만, 해결하는 과정이, 문제라는 것이 재미있지 않았다. 전 지구적 협력?에 대해서 의심하고-그런 건 불가능하다고, 지금 지구 온난화 대응을 보라고 말하고 싶다-, 엄마와 무인도에 가서 살고 싶다던 시동(https://blog.aladin.co.kr/hahayo/11410841) 속 택일이같은 마음을 본다. 관계를 어려워하고, 혼자서 해 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마션이랑 비슷한데, 라면서, 다 늦게 저자가 같다는 걸 알았다. 고립된 우주에서 알고 있는 과학 지식을 이용해서 문제를 해결해낸다. 이 책을 사람들은 왜 좋아하는 걸까. 

SF를 과학지식을 얻자고 보는 게 아닐 텐데, 정작 뭐든 잘 돌아가는 게 과학이긴 한가 싶고, 혼자서 과연 뭔가를 할 수는 있나 싶은데 책 속의 살아남는 마음을 좋아하는 건가. 관계가 사라진 텅 빈 이야기를 왜 보는 걸까. 책은 소용돌이 한 가운데 존재하는 영웅서사이고, 스스로를 이렇게 믿고 싶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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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자를 버린 논어
공자 지음, 임자헌 옮김 / 루페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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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 책을 읽었다고 할 수가 없다. 

논어의 원문에 한자 음을 작게 달고, 검은 글씨로 원문의 번역을 했고, 파란 글씨로 현대인인 역자의 생각을 덧붙였다. 원문에는 훈이 없어서 뜻을 유추하기 어렵고, 검은 글씨의 번역은 지나치게 현대어로 해석해서 원문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알 수 없었다. 파란 글씨는 처음에 몇 번 읽다가, 지나치게 현대인의 생각이라 못 읽겠어서 아예 읽지 않았다. 

저녁마다 따라 쓰기,를 했는데, 한자만 따라 썼다. 이렇게 따라 썼으면 한자를 알 법도 한데, 훈이 안 달려 있어서 그냥 모르는 채로 쓴 데다가, 검은 글씨 번역은 군자,라는 말을 안 쓰고 좀 더 현대어로 번역하려고 노력하다보니 한자어랑 연결을 아예 모르겠는 지경이었다. 말들이 가지는 시대성을 드러내지 않으려니, 더 뒤죽박죽이 되었다. 좀 더 전통적인 책을 살 걸 그랬다. 

저녁에 아무 것도 모르는 채로 한자를 그리고, 아침에 정리하면서 생각이 하나도 안 나서 인터넷으로 검색해보는 식이었다. 그냥 끝까지 쓴 데 의의를 두자, 싶다. 

그래도 끝까지 가 보니, 지금까지 논어가 왜 원문 위주가 아니었는지 알겠다. 부족한 자원에 토막난 글귀들을 그러모은 책이라 한 권으로 엮을 만한 연결이 부족하다. 사자소학처럼 배운데도 어색하지는 않다. 일면 모순되어 보이는 말들이 하나의 단어에 대한 답으로 열거되기도 한다. 논리성이나 일관성의 눈으로는 한 권의 책으로 볼 수만은 없는 책이다. 언어의 눈으로 인간의 눈으로 봐야 하는 책이라서, 현대인의 언어로 번역하는 것도, 원문을 빼고 번역만으로 엮는 것도 불가능하다. 다른 많은 책들이 왜 그 배경들에 많은 설명을 할애했는지 이해할 수 있다. 천자문을 읽었을 때, 이게 아이책이 아니네, 싶었던 그 배경들, 춘추전국시대의 혼란한 사회상이 거대한 나라의 다양한 문화가 충돌하는 배경을 모르고는 짧은 한 줄도 이해하기 어렵다. 논리정연하게 정리한 글이 아니라, 여러 사람에게 한 각기 다른 말들이 남은 거라서, 결국은 토막난 이해 뿐이다. 

논어를 읽은 백 사람이 각기 다른 백 가지 견해를 밝힌 데도 이상할 게 없는 열린 텍스트를 누군가의 꽉 찬 해석으로 읽는 것은 오히려 좋지 않은 거 같다. 원문에 간단한 배경 설명이 있는 좀 더 전통적인 해설서가 나한테는 더 좋았을 거 같다.

늘 시작만 알고 있었는데, 이제 끝을 안다. 

不知言, 無知人也. (말을 모르면, 사람을 알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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