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빠빠라기
투이아비 지음, 에리히 쇼이어만 엮음, 유혜자 옮김, 이일영 그림 / 가교(가교출판)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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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비를 보는데, '주접이 풍년'이었던가, 임창정이 나오고, 임창정의 팬클럽 '빠빠라기'가 나왔다. 빠빠라기,가 뭐지 싶어서 검색을 하고 '하늘을 찢고 나온 사람'이라는 원주민 말이라는데, 책도 검색에 걸려서 읽었다. 

태평양의 섬에 사는 원주민이 서양을 여행하고, 자신의 동족들에게 '경계하라'는 말을 하는 책이다. 자신들의 언어에 없는 말들로 서양인의 삶과 문명을 설명하기 위해 노력한다. 몸을 감추는 서구의 문명에 대한 의아함이 가득하고, 절대로 그들처럼 되어선 안 된다는 호소문이다. 

읽으면서,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무언가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없는 것 같았다. 

짧은 여행은 그저 기이하다,고 할 법하지만, 추운 겨울을 겪고 나면 좀 이해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뭐, 나도 몸을 죄악시하는 문명은 도대체 이해하기 어렵지만, 태평양 한가운데 섬보다는 춥고 먹을 것도 없는데 사람은 많으니, 벽돌로 궤짝을 만들어 층층이 쌓아놓고 걸어들어가는 게 아닌가, 싶은 거다.

내 생각인 것처럼 말하지만 나의 많은 부분이 내가 살고 있는 상황들 때문이 아닌가. 추운 겨울이 있으니, 두꺼운 겨울옷을 어디 잘 보관해둬야 하고, 곡식이던 돈이던 모아둬야 하는 게 아닌가. 

서구인의 자신들의 삶이 문명이고, 무언가 대단한 양 주장하는 것도 꼴 사납고, 원주민이 자신들의 삶이 아름답고 대단하다고 말하는 것도 듣기 괴롭다. 

서구인의 문제는 자기들만 그렇게 사는 게 아니라 남들도 그렇게 살라고 못 살게 군다는 거기는 하다. 게다가, 몸을 죄악시하는 태도로 자연을 대상화시키고, 매연을 쓰레기를 참으로 열심히 내다놓기도 했지. 자연이 손상당하면, 문명화되지 않은 방식의 삶이 또 위협당한다. 결국 문명화의 시도들이 성공했다는 것은 괴롭다. 우월한 게 아니라, 적응한 거였는데, 잘난 체 했더니 속는다. 사람이란 그렇게 팔랑거리는 존재인 건가. 

다른 시공간을 사는 사람들은 이상해 보일 수 밖에 없다. 

아마 이 책이 유럽에 소개된 1920년대에는 문명인의 높은 자부심 가운데, 야만인의 자부심이 이상했을 것이고, 한국에 소개된 1980년대에는 유럽을 쫓아 내달리는 스스로의 열망 가운데 이상했을 거 같다. 그 시대에 필요했던 작용에 대한 반작용,이었겠지만 시간이 지나 지금도 유효한가, 질문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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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내가 틀릴 수도 있습니다 - 숲속의 현자가 전하는 마지막 인생 수업
비욘 나티코 린데블라드 지음, 토마스 산체스 그림, 박미경 옮김 / 다산초당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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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동서양의 차이는 뭘까, 이런 생각을 계속 하면서 서양인 저자의 책을 보게 된다. 동양인이고 불교문화권 한자문화권에 살면서도 이런 책이 또 좋은 것은, 이미 많이 서구화되었기 때문인 것도 같다. 스웨덴에서 경제를 공부하고 기업의 임원이 되려는 순간에 일을 그만두고 숲속 승려로 수련하였다. 오랜 수련을 마치고 다시 고국으로 돌아가 승려가 아닌 삶을 살았다. 

어떤 이야기를 듣게 되는가, 뭐 그런 생각을 했다. 드라마틱한 변화라는 게 모두 다 선망하는 위치였기 때문에 더 많이 듣는다. 왕자였으면서도 그 모든 걸 버린 석가모니 부처에게 배움을 청한다. 현대라면 대기업 임원을 목전에 두고도 그 모든 걸 버렸다. 도대체 왜?라는 의구심으로 귀를 기울이게 된다. 인간이란 그런 존재인가, 싶다. 깨달음의 말들은 불교의 말들이라 그대로 좋다. 


17년 동안 깨달음을 얻고자 수행에 매진한 결과,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을 다 믿지는 않게 되었습니다. 그게 제가 얻은 초능력입니다. - 4%

펀게시판,에서 문화권마다 특정한 정신병이 있다는 이야기를 본 적이 있다. 문화권의 특성 때문에 정신병의 양태가 달라진다. 무병이나 신병을 부르는 말이 서구문화에 있을까.  

기독교문화권은 결벽적인 신 때문에, 우리문화에서는 무병이나 신병이라고 부르는 것을 악마,라고 부르는 게 아닌가,라고도 생각한다. 


자신의 사고 과정을 한 발짝 떨어져서 바라볼 줄 알게 되고 다른 사람들도 자기와 똑같은 처지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 우리를 갈라놓는 것보다 우리가 공유하는 것을 더 쉽게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이든 어디에서 왔든 어떤 이력을 지녔든 간에 우리의 내면이 작용하는 방식은 대체로 닮았습니다. 그 사실을 깊이 받아들이고 잊지 않는다면, 더는 모든 것을 완벽하게 파악한 양 시늉하느라 기진맥진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 대신 다른 사람과 서로 돕고, 나누고, 진정으로 만날 수 있게 됩니다. 인공위성처럼 고독하게 홀로 부유하지 않는 대신, 다른 사람과 치열하게 경쟁하는 대신, 서로의 존재가 위안이 되는 관계를 맺을 수 있습니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서로 배우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남들의 아름답고 뛰어난 점을 발견하고도 그들만 못하다는 내면의 속삭임에 더는 시달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 17%

서양의 어떤 태도가 함께 살아가는 것을 배우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어서 이 서양인 스님이 공동체에 대해 배우는 과정은 더 극적인 것도 같다. 요새 나를 사로잡은 질문은 왜 미국은 총기규제를 못하나,이다. 코로나에 대응하는 서구선진국의 어떤 모습-마스크 규제를 반대하는 대규모 집회 같은 것-이나, 아이들이 죽어나가는 데도 총기규제를 하지 못하는 미국의 모습은 함께 살아가는 걸 어렵게 하는 문화의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사실상 아무런 제지도 받지 않은 채 쉼 없이 떠들고 울먹이고 비난하고 비판하고 독설을 날리고 의문을 제기하고 불평을 일삼는 내 생각과 홀로 마주하는 것, 그것을 참을 수 없었습니다. 제가 아무리 진정시키려 애써도 제 마음은 끊임없이 인신공격과 자기 회의로 반격을 가했습니다.- 18%


"저는 숲속 승려가 되고 싶어서 모든 걸 뒤로하고 왔습니다."- 22%

이 말은 특이하게 결핍이 드러나서 옮겨 놓는다. '모든 걸 뒤로 하고'가 필요한 말이었을까,라고 생각했다. 


"갈등의 싹이 트려고 할 때, 누군가와 맞서게 될 때, 이 주문을 마음 속으로 세 번만 반복하세요. 어떤 언어로든 진심으로 세 번만 되뇐다면, 여러분의 근심은 여름날 아침 풀밭에 맺힌 이슬처럼 사라질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스님의 손바닥 안에 있었지요. 잠시 침묵이 흘렀습니다. 다들 숨 죽이고 스님의 다음 말을 기다렸지요. 스님을 몸을 살짝 내밀더니 극적인 효과를 내려고 한 번 더 뜸을 들인 뒤 입을 열었습니다. 

"자, 다들 그 주문이 뭔지 궁금하시죠? 바로 알려드리겠습니다. 

내가 틀릴 수 있습니다. 

내가 틀릴 수 있습니다.

내가 틀릴 수 있습니다." - 40%

이걸 읽고 딸아이에게 알려주려고, 먼저 스님이 꺼낸 도입부를 흉내냈다. 궁금하지?라고 물었더니, 안 궁금하다고, 화나면 싸우고, 지면 지고, 이기면 기분좋을 거라고 했다. 이긴다고 기분이 좋다니, 조금 기다렸다가 가르쳐줬다. 


사람들이 우르르 나가자 결국 아잔 수시토 스님과 저만 남았습니다. 그 순간 제 모습은 아마 언짢음과 짜증으로 가득했을 겁니다. 그때 아잔 수시토 스님이 저를 온화하게 쳐다보면서 말했습니다. "나티코, 나티코. 혼돈은 자네를 뒤흔들지 모르지만 질서는 자네를 죽일 수 있다네." 

그렇습니다. 저는 또다시 주먹을 너무 세게 쥐었던 것입니다. 세상이 마땅히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 다 안다고 상상한 것이지요. 그런데 세상의 모습이 제 생각과 맞지 않자 울컥한 것입니다. '세상이 이렇게 했어야 한다'는 생각은 늘 저를 작고 어리석고 외롭게 만듭니다.- 51%

이건 책을 덮고, 기록하기 전에 밑줄을 빠뜨린 거 같아서 열심히 찾았다. 어른이 되는 건 혼돈을 버티는 거라고 생각하고 있다. 불확실성이나 혼돈에 화를 내는 것이 쓸모없다는 걸 깨닫는 게, 세상에 확실한 건 없다는 걸 깨닫는 게 매일매일 살아가는 중의 깨달음이라서, 질서가 필요한 순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말을 남겨두고 싶었다. 


조금 덜 통제하고 더 신뢰하길 바랍니다. 뭐든 다 알아야 한다는 압박을 조금 덜 느끼고, 삶을 있는 그대로 더 받아들이길 바랍니다. 그래야 우리 모두에게 훨씬 더 좋은 세상이 되니까요. 우리가 원하는 방식대로 돌아가지 않는 일을 끊임없이 걱정하면서 살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우리 자신을 원래보다 더 작고 초라하게 만들 필요 또한 없지요. 우리가 선택할 수 있습니다. 목을 옥죄며 살 것입니까, 아니면 넓은 마음으로 인생을 포용하며 살 것입니까? - 52%


우리가 사는 우주는 모든 것이 임의로 이루어지는 차갑고 적대적인 곳이 아닙니다.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우리가 세상으로 내보내는 것은 결국 우리에게 고스란히 돌아오지요. - 75%


태국에는 멋진 속담이 하나 전해 내려옵니다. '부처의 등을 도금한다'라는 말이지요. 태국의 신도들이 정기적으로 절을 찾아 참선한 다음 금종이와 촛불, 향을 보시하는 전통으로부터 유래한 것입니다. 태국의 불상들은 대개 이 금종이들로 금박을 입히거든요. 이 속담은 자기의 선행을 다른 이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상관없다는 뜻입니다. 아무도 보지 못한 불상의 등에 금박을 입힌다는 생각에는 그야말로 멋진 구석이 있습니다. - 83% 


이때 다른 누군가가 아는지 모르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자기 자신만은 알 테니까요. 우리는 늘 자기 자신과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행동과 기억은 우리가 앉아 있는 목욕물과도 같습니다.  - 84%


세상은 세상 그 자체의 모습으로서 존재하지 않지요. 세상은 우리의 모습으로서 존재합니다. 그러니 그 안에서 보고 싶은 모습이 있다면 우리가 그런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 85%


"화가 나긴 하지만, 그 화는 아무 것도 차지하지 못합니다."라는 뜻이지요. 

이 이야기는 우리의 내면이 떠오르는 모든 감정을 품을 만큼 매우 깊고 넓을 때 삶이 어떤 모습일지 보여줍니다. 그렇다고 어둡고 부정적인 감정을 모두 피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다만 그런 감정이 곧 우리 자신이라고 믿지 않길 바랍니다. 그것이 내면을 전부 차지하고 물들이게 두지 말길 바랍니다. 그런다면 분노나 억울함도, 시기와 미움도 더는 우리를 해치지 못하고 곧 후회할 일을 저지르게 하지도 못합니다. - 92%


왜 우리 문화권에서는 죽음과 싸우고, 죽음에 저항하고, 죽음을 부정하는 것을 영웅적이라고 묘사할까요? 죽음은 왜 늘 무찔러야 할 적이나 모욕으로, 실패로 그려질까요? 저는 죽음을 삶의 반대라고 생각하고 싶지 않습니다. 오히려 탄생의 반대에 더 가깝지요. 증명할 순 없지만, 저는 늘 죽음 저편에 뭔가가 있다는 확신을 느껴왔습니다. 때로는 뭔가 경이로운 모험이 저를 기다린다는 느낌마저 들지요. - 95%

살아가는 게 혼돈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차례차례 논리를 쌓아서 계속 살아갈 동인을 찾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논리로는 삶을 설명할 수 없다. 삶이 삶이기 위해서는 죽음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데, 자살을 권장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내 마음의 어떤 태도는 논리적으로 설명이 안 된다.-그런데, 어디선가 곡기를 끊는, 행위도 자살로 묘사하는 걸 보고 의아한 기분이 되기는 했다. 나는 지금의 연명치료는 원하지 않는다.- 능동이기보다 수동인 삶이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어떤 마음의 노력 가운데, 죽음이나 질병을 격리시켜서 죽음이나 질병을 없앨 수 있다는 식의 은유적 믿음이 현대에 존재한다는 면에서 이건 서구문화권만의 문제는 아니라고도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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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2022 제5회 한국과학문학상 수상작품집 - 루나 + 블랙박스와의 인터뷰 + 옛날 옛적 판교에서 + 책이 된 남자 + 신께서는 아이들 + 후루룩 쩝접 맛있는
서윤빈 외 지음 / 허블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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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북으로 받아서 읽었다. 순서대로 읽으려다가 관심이 가는 대로 목차에서 골라 읽었다. 

루나를 읽고, 후루룩 쩝쩝 맛있는,을 읽고, 책이 된 남자,를 읽은 다음 블랙박스와의 인터뷰, 옛날 옛적 판교에서는 순으로 읽었다. 후루룩 쩝쩝 맛있는,까지는 작가의 말까지 읽었는데, 다음에는 뭐 굳이,라면서 읽지 않았다. 이렇게 다 읽었다고 김보영님 심사평을 읽었는데, 안 읽은 소설 이야기가 있는 거다. 뭐지 싶어서 다시 목차를 보고, 인터넷 서점에서 책 검색해서는 그 쯤 되는 페이지를 열어서 겨우 '신께서는 아이들을'을 읽었다.- 이북 목차에 빠졌다고 백자평에 올리고 나서, 알라딘 고객센터에서 출판사에 연락해서 수정해주셨다. 지금은 목차에 나오더라. 알라딘에서 받아 본 이북이 아닌데-_-;;; 무척 감사했다.- 나의 질문은 아닌 이야기들이었다.


루나,는 설정 자체가 신기했다. 바닷 속의 해산물을 채취하는 해녀와 같은 묘사로 우주에서 광물을 채취하는 공동체에 대해 묘사한다. 


후루룩 쩝쩝 맛있는,은 인간이 동물을 먹는 것의 역지사지 같이, 외계생명체가 인간을 먹는 것에 대한 이야기다. 무언가 그런 이야기기는 했지만, 뭔가 개그처럼 생각하면서 이야기를 읽고는, 작가의 말에 빈정이 상해서 다음부터는 작가의 말을 설렁설렁 읽었다. 


책이 된 남자,는 배경도 이야기도 여기는 아니다. 이야기는 두 가지 층위에서 굴러간다. 중세의 책 사냥꾼이 수도원에서 책을 필사하고, 그 책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뇌가 절편처럼 썰려서는 책 속에 갇힌 남자와 책을 통해 대화하면서 그 남자가 책이 된 과정에 대한 이야기도 전개된다. 테드 창의 '상인과 연금술사의 문' 생각이 많이 났다. 아예 모르는 세상 이야기라, 옛날 이야기 읽는 기분으로 읽을 수 있다. 


블랙박스와의 인터뷰,는 전뇌화라는 설정으로 우주 식민지에서의 삶에 대한 이야기다. 미래의 인간은 이렇게까지 죽음이나 이별을 견디지 못할 것인가, 생각했다. 나는 인간이란 전인적 존재를  믿고 있어서 전뇌화한 존재들에 대한 묘사가 싫다. 뇌만이 살아있으면 나란 존재는 살아있다는 식의 어떤 묘사, 유심칩을 갈아끼우 듯이, 온 몸을 대체하는 미래가 무언가 싫어서 계속 화를 내고 있다. 타인과의 관계는 어디에 있는가, 싶은 이런 기술의 개발들은 누구에게 필요한가,라고 질문하기도 한다.


옛날옛적 판교에서는,은 뭐지 싶다. 


신께서는 아이들을,에 대해서도 뭐지, 싶었다. 작가의 말을 스치듯이 읽고는 아마도, 아이들에게는 심판이 기다리는 어른들의 저승말고 다른 저승을 주고 싶었나보다, 생각했다. 과학소설이라기 보다 환상소설이고 나는 무언가 내가 공격받는 인상을 받는다.  


내가 이야기의 쓸모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라서, 이야기를 쓰는 사람이 마음 속에 품은 질문은 뭔지 열심히 찾는 사람이라서, 모든 이야기가 하고 싶은 말이 뭔지 모르겠어, 에 더하여 특별히 내가 싫어하는 주제들이라 그랬다. 블랙박스와의 인터뷰,나 후루룩 쩝쩝 맛있는,은 잘 읽히고 주제가 뭔지도 알겠는데 싫은 이야기였다.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해서 영생을 추구하는 것은 끔찍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후루룩 쩝쩝 맛있는,은 이야기에서는 노골적으로 드러난다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작가의 말이 노골적이라 싫었다. 그 이야기는 우주 유머 같았다. 혈관만 교체해주겠다는 꽤 괜찮은 조건이 아닌가, 좀 키들거렸었거든. 그런데, 작가는 동물권에 대해서 말하면서 바꾸자고 덧붙였다. 아, 이야기는 그런 인상을 주지 않는데, 자신은 그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고 왜 쓰는 거야, 라는 생각이 들었다. 

똑같이 영생,에 대한 이야기인데도 왜 나는 '책이 된 남자'에는 싫다는 감상이 덜할까 생각했다. 아마도 후회에 대한 말이라서 그런 걸 수도 있고, 배경이 이국적이라 그런 걸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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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제5회 한국과학문학상 수상작품집 - 루나 + 블랙박스와의 인터뷰 + 옛날 옛적 판교에서 + 책이 된 남자 + 신께서는 아이들 + 후루룩 쩝접 맛있는
서윤빈 외 지음 / 허블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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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북 목차에 신께서는 아이들을,이 빠져 있었습니다. 관심가는데로 목차를 클릭해서 다 읽었다고 생각하고, 심사평을 읽는데 내가 하나 빠뜨린 걸 뒤늦게 알고, 겨우 페이지를 밀어서 읽었습니다. 어디에다 말해야 할 지 몰라서 여기에-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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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고객센터 2022-06-17 16: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불편드려 너무 죄송합니다. 출판사 전달하여 수정 파일로 교체되었습니다. 번거로우시겠지만 기존 파일 삭제 후 재다운로드 이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후 이용하시면서 불편하신 부분은 나의계정>1:1고객상담으로 연락주시면 신속하게 안내 드리고 있으니 참고해주십시오. 편안한 시간 보내세요. 감사합니다
 
붓다 순례 - 현대적으로 새롭게 해석한 인간 붓다의 위대한 발자취
자현 스님 지음, 하지권 사진 / 불광출판사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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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https://blog.aladin.co.kr/hahayo/11489172) 을 머릿 속에 담은 인상대로 남기고, 역시 또 머릿속에 남은 대로 페이퍼(https://blog.aladin.co.kr/hahayo/13639264) 에도 남겨 놓고는 정말 책 속에는 뭐라고 써 있었는지 다시 읽었다. 

읽으면서 내가 좋았던 이야기를 뒤섞었다는 걸 알았다. 

살인자 제자의 이야기는 뒤 쪽에, 무거운 것은 가라앉고 가벼운 것은 뜨는 인과론에 대한 이야기는 앞에 있었다. 그저 내 마음대로 섞어서, 페이퍼에 썼던 것이라, 다시 책 속에 있던 대로 써놓으려고 펼친다. 


어느 날 붓다가 갠지스 강변을 걷고 있을 때였다. 한 브라만교 사제가 신에게 올리는 기도를 통해 죽은 사람을 천상에 태어나게 할 수 있다고 하며, 그 당위성을 붓다에게 역설한다. 그러자 붓다는 주변의 조약돌을 갠지스 강에 던지며, 신에게 기도하면서 그 돌을 '떠올라라, 떠올라라' 외친다고 해서 돌이 떠오르겠냐고 묻는다. 사제가 안 된다고 하자, 붓다는 무거운 것은 가라앉고 가벼운 것은 떠오르는 것이지 신에게 기원한다고 바뀌는 것이 아님을 말해 준다. 

신을 숭배하며 자신의 기대를 충족시키려는 행동은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범하는 오류 중 하나이다. 그러나 붓다는, 인간은 그 사람이 살아 있을 때 행하던 업에 의해 선업이 많으면 가벼워서 하늘로 가고, 악업이 많으면 무거워서 지옥에 간다고 할 뿐이다. 이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선인낙과 악인고과'의 인과법이다. - p23~24


이 대목을 겨우 찾아서 읽으면서, 이런 믿음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불자들의 강인함을 존경한다. 어차피 확인할 수 없는 죽음 뒤의 일들에 대해, 쉽게 위로하는 말들을 하지 않는다. 나는 사람들이 그걸 알면서도, 종교를 통해 위안을 받고 싶어하는 게 아닌가, 종교에 삐딱한 태도가 있는데, 불교는 그런 태도가 없는 거다. 그래서 아마도, 토속종교의 관점에서 석가를 악신이라고 하는 건가 싶기도 하다.(https://blog.aladin.co.kr/hahayo/13277966) 무언가 신이라기에 냉정한데, 마음에 든다. 


살인마 앙굴리말라를 굴복시키다. 

사위성은 신통을 통한 타 종교와의 충돌 극복 이외에도, 앙굴리말라와 관련된 '기쁜 비극'이 서려 있는 곳이다. 앙굴리말라는 젊고 준수한 수행자였는데, 스승의 젊은 부인이 그의 외모에 반하면서 문제가 발생한다. 결국 젊은 부인의 유혹을 앙굴리말라가 거절하면서 상황은 극단적으로 치닫게 된다. 

부인의 입장에서는 앙굴리말라가 먼저 스승에게 자신의 행실을 말하게 될 경우, 당시의 법률상 죽음을 감수해야 했다. 그래서 남편에게 오히려 앙굴리말라가 자신을 유혹했다고 누명을 씌웠고, 스승은 제자의 행동에 분노하게 된다. 그 결과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는 100명을 죽여서 그 손가락으로 목걸이를 만들면 된다는 기형적인 비방을 가르쳐 준다. 그러나 스승을 의심하지 않았던 앙굴리말라는 이를 신뢰해서 무차별 살인을 하기에 이른다.(중략)

극적인 상황은 마지막 살인을 앞두고 앙굴라말라의 어머니가 아들을 말리기 위해서 오면서 발생한다. 그때 붓다께서 신통으로 이러한 내용을 아시고, 어머니를 해치려는 앙굴리말라의 앞으로 나서게 된다. 그러자 앙굴리말라는 어머니 대신 붓다를 쫓게 되는데, 여기에서 걸어가는 붓다를 뛰는 앙굴리말라가 따라잡지 못하는 이적이 발생한다. 

이때 뒤쫓던 앙굴리말라가 "사문아, 게 섰거라."라고 하자, 붓다는 "나는 멈추어 있는데 네가 오히려 멈추질 않는구나."라고 답하신다. 이는 붓다는 고요의 깨달음에 멈추어 있는데, 앙굴리말라는 혼란 속을 방황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붓다의 이 말은 앙굴리말라의 어리석음을 자각시켜, 결국 그가 불교로 들어와 진정한 수행자가 되어 깨달음에 이르도록 한다. 

그러나 앙굴리말라가 마음을 고쳐먹었어도 그의 살인 행위는 지워지지 않아, 탁발을 나가면 사람들의 모진 돌팔매를 당하곤 하였다. 그러나 진정한 깨달음을 얻은 앙굴리말라는 분노하지 않고 자신의 잘못을 받아들여 얼마 뒤 죽음에 이른다. -p277~278


여기까지가 내가 페이퍼에 이상하게 합쳐놓은 두 개의 이야기다. 부처님은 인과율을 말씀하시고, 깨달았다고 해도 깨달음은 오직 나에게만 미친다.  


비유리와 만난 마하남은 최대한의 저자세로 인근의 연못을 가리키면서, 자신이 물에 들어갔다 나오는 시간만 포위를 풀고 도망치는 사람을 살려 달라고 부탁한다. '사람의 잠수 시간이 뭐 대단하랴'고 생각한 비유리는 외할아버지의 부탁을 수용한다. 그러나 마하남은 연못으로 들어간 직후 곧장 머리칼을 풀어서 물풀에 묶어 익사하는 방법을 택한다. 이로 인하여 상당히 오랜 시간이 지체되면서 많은 석가족들이 탈출하게 된다. 이때 도망 나온 석가족들이 다시금 건립하게 되는 것이 인도의 가비라국, 즉 '피프리하와'이다. 두 개의 가비라국 문제는 바로 이러한 비극적 사연은 안고서 존재하는 것이다. -p316


석가족의 나라가 망하는 풍경이다. 나는 왜 이 이야기가 좋을까. 석가족은 교만하여, 공주를 원하는 대국에 첩의 딸을 속여 시집보냈다. 그 딸의 아이가 왔을 때 석가 귀족의 아이들은 그 아이를 피가 천하다 모욕해서 원한을 사고, 왕이 된 그 아이는 석가족의 나라를 침공해 온다. 그 아이가 비유리이고, 비유리의 외할아버지가 마하남이다. 깨달음을 얻은 부처라해도 악업이 쌓여 벌어지는 일을 막을 수 없다. 악업이 쌓여 벌어지는 비극 앞에서 스스로 물 속에서 죽기를 택하는 왕을 보는 것은 무언가 비장하다. 


실제로 이 기록에는 깨달아 아라한이 되고도, 다른 이를 위해서 단 한 차례도 설법하지 않은 박구라 존자의 부도에 대해서도 나온다. 여기에 아소카왕은 단지 1전만을 공양한다. 이를 보고 신하들이 동일한 깨달음을 얻은 분인데 왜 그렇게 하느냐고 묻자, 왕은 "이 분은 세상에 무슨 이익을 주셨는가?"라고 대답한다. 이는 불교의 사회 포교와 관련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시사한다. 개인의 수행과 이익만을 위한 불교는 불교가 아닌 것이다. 

그런데 왕이 떠나기 전 그 동전은 다시금 튀어 올라 왕에게로 되돌아간다. 1전도 받지 않으려는 청정한 원칙이 박구라에게는 존재했던 것아다. -p319


이 이야기도 왜 좋은지 모르겠다. 깨달음을 얻고 세상에 도움이 되는 가르침을 주는 일이 불교에서 중요하지만, 가끔 너도 나도 가르치는 세상 가운데서 박구라 존자같은 사람이 있어도 좋지 않은가 싶어서 좋아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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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돼지 2022-06-15 09: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런 이야기들 너무 좋습니다. 예전에 <죽음의 한 연구>를 읽을 때 내용을 잘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너무 흥미가 당겨 열심히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일단 장바구니에 ㅎㅎㅎ

별족 2022-06-15 09:51   좋아요 1 | URL
책에는 이 이야기들 말고도 많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재밌어요!

별족 2022-06-16 08:24   좋아요 0 | URL
참 갑자기 저도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열심히 읽었던 책이 생각났습니다. 카자르 사전-검색했더니 하자르 사전이라고 있는데-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