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기독교를 논하다
이제열 지음 / 모과나무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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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기독교가 편애하는 신의 차별적인 사랑을 구하는 종교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기독교가 베이스인 서양의 문명은 함께 어울려 사는 삶에 오히려 장애가 된다고도 생각한다. (https://blog.aladin.co.kr/hahayo/13639264) 이미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서 이 책을 골랐지만, 또 이미 그렇게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책이 새삼스럽지 않았다. 

그런데다가, 나는 종교를 조금은 철학으로 접근하고 있어서, 종교적 방식으로 하는 설명에 삐딱한 태도도 있다. 나는 동서양의 인간이해,가 두 종교를 설명하는 방식이 좋았다. (https://blog.aladin.co.kr/hahayo/13903037 )

내가 싫어하는 친구긴 한데, 내가 보기에는 그래도 비슷한 애가 그 친구를 막 욕하는 걸 듣는 기분이 된다. 사실, 책에서 하는 말은 욕도 아니고, 기독교와 불교는 그리 가깝지 않다. 서로 이해하기 어려운 두 종교의 입장을 불교의 입장에서 듣는다. 그런데, 나는 여전히 종교를 실용적인 관점에서 생각하는 중이라, 천국이나 지옥, 전생이나 내세, 환생이나 이적에 대해 말하는 데에 전혀 관심이 없다. 


만약 세상에 완전한 자가 있다면 그는 몸과 마음이 청정하여 언제나 평화로워야 하고 구하고 원하는 바가 없어야 한다. 완전한 자는 세상에 대한 희로애락을 일으키지 않는다. 완전한 자가 어떻게 세상에 대하여 이렇게 되었으면 또는 저렇게 되었으면 하는 욕망을 일으킬 수 있겠는가? 욕망은 무엇인가 부족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고 부족하다는 것은 완전치 못하다는 증거이다. -p25


불교의 관점에서 인간은 신의 형벌이 있든 없든 생로병사를 비롯한 갖가지 고통을 받을 수밖에 없다. 인간은 애초부터 영생할 수 없는 존재이다. 죄의 삯은 사망이 아니다. '생으로 말미암아 사가 있는 것'이다. -p49


그러나 불교의 지옥은 그 본성에 있어 실제가 아니다. 마치 꿈의 세계가 진실이 아니듯 불교의 지옥은 미혹한 중생이 업으로 만든 환상의 세계이다. 꿈을 깨지 못한 상태에서는 꿈의 일들이 실재인 것처럼 보이지만 꿈을 깨고 나면 아무것도 없듯 지옥은 진리를 깨닫지 못한 중생이 업의 힘에 의해 꾸는 꿈이다. 지옥의 모든 형틀 기구와 참상과 전경 그리고 사자들의 모습은 그곳에 태어난 중생들의 마음이 만든 허상들이다. - p94


이 세상을 지배하는 것은 신이 아니라 법(法, Dharma)이고, 바로 그 법 속에서 중생들이 업을 지어 태어나기도 하고 죽기도 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숫타니파타》에 전하는 다음 말씀이 이를 뒷받침한다. "세계는 업에 따라 존재하고 사람 또한 업에 따라 존재한다. 수레바퀴가 쐐기에 얽혀져 돌아가듯 존재하는 모든 것은 업의 속박 속에 굴러간다." -p127 -128


혹 불교 경전에서 세상을 구제하기 위해 나타난다는 부처님이나 보살도 인간의 문제를 직접적으로 해결해준다거나 그들이 지은 죄를 씻어줄 수는 없다. 다만 그 길을 일러줄 뿐이다. 누가 누구를 대신해 문제를 해결해줄 수 있다는 방식을 불교는 애당초 부정하고 있다. - p161- 1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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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크는 좌파가 아니다 - 진지한 민주주의자를 위한 선언
수전 니먼 지음, 홍기빈 옮김 / 생각의힘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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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 읽히지 않는 날들이다. 겨우 마친 책은 늘 거슬리는 부분이 있다면서도 선택하는 서구 저자의 책이다. 

바댕테르의 책을 읽었던 때의 느낌( https://blog.aladin.co.kr/hahayo/15744499 ) 처럼, 그래도 저자는 좌파,를 버리지 못하는구나, 라면서 읽는다. 나는 그게 뭐 중요한가,라는 태도가 되어, 그래 워크 니들이 좌파 가져라, 나는 나의 믿음으로 움직이겠다,라는 입장이라서 이제는 모르겠다. 제목에서 나는 좌파고 좌파라는 명예로운 이름을 워크에게 빼앗기지 않겠다는 결의가 나는 없다. 

군자는 화이부동(和而不同),이고, 덕불고 필유린(德不孤 必有隣),이니, 굳이 옳고 그름을 따져서 분노할 건가, 싶은 날들이다. 

계몽주의가 기독교에 저항하기 위해 겨우 세웠던 공통의 어떤 가치들이 얼마나 중요한지 말하는 저자의 책에서, 나는 다시 그 담론이 발 딛고 선 종교의 언어들을 느낀다. 


이렇듯 문화는 특수성을 가진 영역이지만, 정치는 그 핵심에 보편주의를 반드시 가지고 있어야 한다. 문화적 차이는 그것을 물화시키는 법 없이도 소중하게 다루는 게 가능하다. 문화적 차이가 존재하지 않는 세계란 아마 여러 해골을 모아 놓은 회의장만큼이나 무겁고 딱딱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정치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할 때는 문화적 범주를 중심 무대에 두어서는 안 된다. - p114


일부 권력 형태가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대해 푸코가 논의하는 바는 시선을 끌기도 한다. 그의 책을 읽는 독자는 필연적으로 그러한 분석이 단순히 흥미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모든 권력 비판과 마찬가지로 해방적인 모습을 보여줄 것이라는 희망을 품게 된다. 하지만 분석과 좀 더 일반적으로 말해서 지식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한 푸코의 생각을 알게 되면 그런 희망은 완전히 무너진다. 

모든 지식은 불의에 기반한다는 점(즉 인식활동에 있어서조차 진리 혹은 진리의 기초에 대한 권리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 그리고 그 지식을 원하는 본능은 악의적이라는 점(즉 인류의 행복과는 반대되는 살인적인 것이라는 점).

그러니 많은 이들이 이 푸코라는 인물은 한마디로 허무주의자라는 결론에 도달했던 것도 당연하다.-127p


만약 권력이 그토록 모든 곳에 속속들이 배어 있는 것이라면, 그 개념으로 이 세상을 분별하여 이해하는 데 무슨 도움이 되는지조차 의문스러워진다. 만약 모든 것이 다 권력이라면, 이 권력이라는 개념은 만사만물을 다 포괄하는 게 아닐까? 그렇다면 푸코의 권력 개념이란 너무나 폭넓은 것이라서 악의 없는 개념이라고 생각할 이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희망은 그의 설명을 들으면 사그라들게 된다. 

나는 우리 사유의 준거점을 언어와 기호의 거대한 모델이 아니라 전쟁 및 전투의 모델로 삼아야 한다고 믿는다. 우리를 낳고 또 지금의 모습으로 결정지은 역사는 언어가 아닌 전쟁의 형태를 띠고 있다. 즉 의미의 관계가 아닌 권력의 관계인 것이다.(...) 갈등으로 가득한 현실이란 언제나 끝이 결정되지 않은 위험천만한 것이건만, '변증법'이란 헤겔식 논리의 뼈대 위에서 그러한 실상을 회피하게 만드는 방식일 뿐이며, '기호학'이란 그러한 현실의 폭력, 유혈, 살상의 성격을 고요한 플라톤식 언어 및 대화로 환원하여 회피하는 방식일 뿐이다. 

푸코가 말하는 권력 개념은 전혀 부드럽지 않다. -p129-130 


푸코의 이 인용문에서 보듯, 이들은 모두 평서문을 피하는 경향이 있다. 의구심의 형이상학을 펼치려면 의문문을 쓰는 편이 훨씬 나으니까. 그리고 이들의 글은 몽롱하기 짝이 없다. 이들은 보통 니체 애호가들이지만, 니체가 자신이 경멸하는 자들을 까뭉개는 표현 중에서도 상급에 속하는 다음의 조롱을 들어 마땅하다. "그들은 연못에 흙탕을 쳐서 심연처럼 보이게 만든다."-p130-131


푸코는 자신의 관점이 인간 세상의 만사만물에 적용할 수 있는 힘을 가졌다고 말하면서도, 이를 가리기 위해 거짓 겸손을 떤다. 사르트르와 같은 "일반 지식인"의 시대는 끝났으니, 이제는 자신과 같은 "특정 문제의 지식인"이 발견해낸 이야기가 필요하다는 주장이었다. 그런데 그는 자신의 여러 정치적 판단에 대해 이유와 논리를 제시하는 것도 완고하게 거부했다. 이유와 논리란 그저 자기합리화의 자작극에 불과하다는 주장이었다. 

권력이란 그저 맹목적 추동력일 뿐이라는 주장은 이성의 경멸과 손을 잡고 함께 이루어진다. 이성의 격하와 권력의 격상 중 어느 쪽이 먼저인지는 알 수 없다. 이 둘은 동전의 양면을 이루는 것들이니까. 푸코, 하이데거, 아도르노와 같이 서로 다른 20세기 사상가들이 공통으로 내거는 주장이 있다. 그들이 부르는 이름으로 "계몽적 이성"이라는 것은 사기의 자작극일 뿐만 아니라, 그보다 훨씬 나쁜 것이기도 하다고 했다. 이는 자연 그리고(그들이 자연적이라고 생각했던) 원주민들까지 복속시키는 데 혈안이 된 지배욕, 계산욕, 탐욕의 괴물이라는 것이었다. - p133


이성은 분명코 현실을 변화시키는 힘이 있다. 그런데 이성을 단지 권력의 한 형태로 본다면 폭력과 신념, 그리고 신념과 의식 조작의 차이를 무시하는 일이 된다. 이렇게 되면, 너는 이것을 해야 해. 왜냐하면 내가 너보다 덩치가 더 크니까 라는 말과 너는 이것을 해야 해. 왜냐하면 이것이 (a)옳기 때문에 (b)공동체에 좋기 때문에 (c)너에게 가장 이롭기 때문에 (d)네 스스로 선택한 정당화 논리 때문에 라는 말의 차이도 무시하게 된다. -p138


그 결과 진화심리학자들 또한 그들을 낳은 사회생물학자들처럼 이른바 이타심의 문제에 부딪히게 된다. 권력과 자기보존의 투쟁을 그럴듯하게 치장한 예를 역사를 뒤져 무수히 찾아낼 수 있다고 해도, 자기들 생명까지 희생해가며 벌거벗은 자기이익과 반대되는 일을 행한 사람들의 예 또한 무수히 찾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철학자 메리 미드글리는 이기심이 보편적이라는 주장은 모순을 담고 있다고 주장한다. "만약 남들을 배려하는 것이 정말로 불가능했다면, 그런 마음을 갖지 못한 상태를 가르키는 단어 자체가 애초에 생겨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러한 예는 진화심리학 이론에 심각한 타격을 주지만, 진화심리학자들은 이조차 자기들 도식에 끼워 맞추기 위해 아주 열심히 노력한다. 윌슨은 이 원리를 명쾌하게 말한다. 

이타주의란 궁극적으로 이기적이다. '이타주의자'는 사회가 자기 혹은 가까운 친족에게 보답할 것을 기대한다. 그의 선한 행동은 계산된 것이며, 전적으로 의식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질 때가 많다.(...) 그 심리적 도구는 거짓말, 위선, 기만 등이며, 심지어 자기기만도 들어간다. 행위자 본인이 자신의 행위가 진심이라고 믿을 때 가장 큰 설득력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윌슨의 일반적 주장을 스티븐 핑커는 훨씬 더 확장한다. - p164-165


진화심리학자들은 자신의 관점에 반대하는 주장은 곧 과학 자체에 반대하는 것이라고 넌지시 암시할 때가 많다. 이들은 자신의 비판자들이 몰래 창조론을 믿는 자들까지는 아니더라도 향수에 젖은 감상주의자라고 암시한다. 이타주의와 같은 도덕적 가치가 그 창조주와 함께 죽어버렸다는 니체의 관점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것이다. -p167


그런데 이러한 두려움이 아니더라도 '진보'라는 말로 옮겨간 것은 합리적이라고 볼 수 있다. 어차피 좌파라는 말도 1789년 프랑스 의회에서 의원들이 왼쪽이나 오른쪽으로 자리를 몰려서 앉다가 우연히 생겨난 이름이니까. 게다가 좌파와 우파의 여러 차이 중에서도 진보가 가능하다는 사상만큼 크고 깊은 차이도 없다. 이는 전통적인 보수 사상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생각이다. 그들은 역사를 기껏해야 머물러 있거나 순환적인 것으로 보며, 아주 나쁜 경우에는 신화 속 황금시대로부터 천천히 쇠퇴해가는 슬픈 이야기로 바라보기 때문이다. - p181


이 때문에 진보에 관한 표준적인 설명을 해체하는 가운데에서도 루소의 논리는 푸코와는 전혀 다른 톤을 지닌다. 푸코는 주장을 내세우기보다는 의문을(수사적 의문?) 던지는 쪽을 더 좋아하며, 위험을 무릅쓰고 주장을 내미는 것보다는 그저 슬쩍 암시하는 쪽을 더 즐긴다. 그의 책을 읽으면 어떤 하나의 입장을 가진 독자가 되기보다는 어떤 몽롱한 분위기에 빠진 독자가 될 가능성이 더 크다. - p193


그런데 나는 이러한 계몽주의 사상의 희화화에는 더 심층적인 근원이 있다고 생각한다. 볼테르는 비록 당대의 세상에 그득했던 온갖 야만성에 충분히 주의를 기울인 인물이었지만, 인간 본성이 근본적으로 타락한 것이라고 보지는 않았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악한 존재는 아니다. 인간이 사악해지는 것은 병에 걸리는 것과 같다"고 그는 《철학사전》에서 말한 바 있다. 만약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본질적으로 병에 걸려 있는 존재라고 말하는 의사가 있다면, 이들은 아무 병도 치료할 능력이 없다는 사실을 숨기고자 하는 구역질 나는 자들이다. 볼테르가 이렇게 바라보았던 이들은 바로 성직자였다. 볼테르의 목적은 우리가 모두 태생적으로 선한 존재라는 유토피아적 관점을 수호하려는 게 아니라, 우리가 모두 태생적으로 악한 존재라고 보는 기독교의 관점을 공격하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 p199


우리 손에 있는 모든 데이터는 사실 우리 자신이 마음속에 품은 희망과 공포라는 필터로 한 번 걸러진 것들일 뿐이다. 전쟁이라는 행위는 루소가 보는 자연 상태에 따르면 참으로 변태적인 것으로 보이게 되지만, 홉스의 비전에 따르면 너무나 정상적인 것이 된다. 독재 체제를 확립하고 싶다면, 사람들에게 인간 본성은 야수적인 폭력성에 있으며 인류 스스로가 갈기갈기 찢겨나가는 사태를 예방하기 위해서라도 강력한 지도자가 필요하다는 확신을 심어주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다. -p202 


포스트잇을 떼면서 옮겨적으니, 내가 이 책에서 뭘 좋아했었는지 생각났다. 

다들 좋다는데, 나는 도무지 뭔 소리인지 모르겠고, 왜인지 음험해보이는 책들에 대해 대차게 씹어주고 있어서 좋아했다. 

푸코와 슈미트, 적과 적 아닌 자로 구분하는 단순한 저작,이거나 억압은 더 교묘하게 변했을 뿐 여전히 어디에나 있다는 몽롱한 저작들. 새 시대의 종교인 과학의 옷을 입고 다시 나타난 어떤 정치적 입장의 저작들. 

그런데도, 역시 저자는 자신의 지적 배경-정치가 분리되고 종교가 통일된 서구의-을 벗어나지는 못한다. 사자왕 형제의 모험을 읽을 때 느꼈던 어떤 이질감이 여기서도 드러난다. 서구 지식인은 기독교의 전횡에 대항하고 싶지만, 강한 국가권력은 역시 또 거부한다. 제도나 도덕의 목적에 대해 종교에 의지하는 태도가 여전히 드러난다. 저들의 모순은 어쩌면 거기에 있는가, 싶은 순간들이 있다. 저자는 정답이 있는 문제지-기후위기에 대한 저자의 태도가 그러하다-를 앞에 두고 다른 답을 쓰는 사람을 좌파와 우파라고 생각하는 것도 같고, 진보를 여전히 믿는 것도 같다. 나는 진보가 뭔지 모르겠다. 독재정권 시절보다 지금이 더하다,는 표현은 끔찍한데도, 이것이 진보인가는 역시 모르겠다. 세상을 바꿀 수 있는 믿음이 있고, 급하고도 빠르게 세상을 바꿔온 나라에 살면서도 역시 무엇이 진보인지 모르겠다. 풍요가 진보인가. 기술의 발전이 진보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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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풍오장원 2024-09-14 11: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푸코 읽는다고 나불거리는 사람을...전 결코 신뢰하지 않습니다. 그냥 같잖은 허세로 보이거든요.
 
잘못된 길 - 1990년대 이후 래디컬 페미니즘 운동에 대한 비판적 성찰
엘리자베트 바댕테르 지음, 나애리.조성애 옮김 / 필로소픽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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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마치고도 정리할 마음이 안 생겼다. 

난데없이 정리할 마음이 생긴 건, 이 아침에 파리 올림픽 개막식을 보고 올린 카스피님의 글( https://blog.aladin.co.kr/caspi/15727549 )에 댓글을 달고 나서다. 한 나라의 문화적 역량을 세계인에게 전시하는 올림픽 개막식에서 프랑스는 파리는 무엇을 했는가. 

그저 이 책 속의 태도 정도만 견지했어도 저런 소리를 안 들었을 텐데, 싶었다. 

이제 나는 페미니즘 자체를 버렸기 때문에, 자유주의 페미니스트가 지금 '남녀 임금격차가 여전한 데도 페미니즘이 잘못된 길로 가고 있다'는 책 속의 논조가 동의되지 않았다. 저자는 이 책을 쓸 때에도 여전히 페미니스트이고 페미니즘에 대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서구의 운동가다. 자신의 일생을 바쳐 여성운동을 통한 성취를 이뤄냈고, 59세가 되던 해에 페미니즘의 새로운 사조에 경계하는 마음을 담아 쓴 책이다. 2003년에 나온 책이니, 프랑스에서 20년도 더 전에 드러났던 문제라는 거다. 


여성원자력인모임같은 게 있는데, 메일로 설문조사 요청을 했다. 세계 여성원자력인모임에서 업계의 성차별을 조사한다는 설문을 포워딩한 거였는데, 설문의 첫번째는 '나는 내 자신을 여성 또는 여성에 가깝다고 느낀다'였다. 설문하는 내 자신에 대한 그 질문을 받아들고, 나는 설문 자체를 닫았다. 원자력계에 여성인력이 적다,라는 말은 여성이라는 정체성에 대한 질문을 해야 하는 건데, 질문의 시작이 그 시작을 흔든다. 이게 현대 성과 관련한 다양한 운동가들의 발언이 제도에 들어와 벌인 일들이다. 여성,에 대한 정의부터 해야 하는 상황,에 처해서 파리의 링에서 XX염색체의 여성복서는 XY염색체의 여성?복서 주먹 한 방에 무릎을 꿇고 기권을 선언했다. 여성주의,라는 운동이 발 딛고 선 이분법의 세상이 흐려지고 있는데, 그래도 여성주의가 남아 있을 수 있을 것인가. 여성운동이 유지될 수 있을 것인가. 

생물학적으로 여성인 나는, 남자 여자 화장실이 분리되어 있으면 좋겠다. 성소수자를 위한다면서 만들어지는  공용화장실이 싫다. 누구에게나 아무런 불편이 없는 시스템, 따위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지금 여성주의는 극단적이고 모순적이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이상한 말들을 하고, 사람들은 자신의 상황에서 가장 유리할 법한 말에 가져다 붙인다. 



이처럼 불운을 당한 '희생자로 자처하기'가 사회에 만연하게 되면서 이들 희생자를 보호하기 위한 법정의 위력은 더욱 강력해졌다. 이제 사람들은 가해자들에게 어떤 형벌과 제재를 가할 것인가만을 화젯거리로 삼게 되었다. - 20p


모성애의 개념으로 여성을 정의하는 것은 사실 여성을 보호하기 위해 헌법에서 성의 차이를 인정받는 것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 28p


이런 식으로 통계 수치를 부풀려 가면서 여성운동을 진행하다 보니, 결과적으로 '여성은 피해자, 남성은 가해자'라는 생각이 일반화되었다. 드워킨이나 매키넌처럼 극단까지 가지 않더라도 결국 여성은 정치적으로 '아동'과 같은 사회 신분으로까지 떨어지게 된다. 연약하고 무력한 어린 아이의 신분 말이다. - 72p


아동이 부모에게 보호를 요청하듯이, 아동과 같은 신분을 갖게 된 여성은 법에 호소해야 한다. - 73p


생리학적 차이를 미덕과 역할 수행의 기본 요소로 보는 이런 접근 방식은 모성애를 알지 못하는 남성과 여성을 동시에 단죄하는 것이다. - 89p


(동성 또는 이성이) 함께 하는 삶은 심리적 억압이나 긴장을 피할 수 없다. 경우에 따라서는 그것을 침묵 속에 묻어 두거나 분노를 자아낼 수도 있는 극도의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말로 표현해야 할 때도 있다. 그러나 언어폭력을 육체적 폭력과 동일시하면서 폭력을 근절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오산이다. 누가 뭐래도 말로 인한 상처는 육체에 가해진 상처와는 다른 성질의 것이다. 그것은 물리적 폭력을 피할 수 없는, 남녀 모두 똑같이 사용할 수 있는 무기이다. 

언어폭력이 부당하다고 하면서 침묵을 강요하는 것은 결국 분노의 표현을 금지하는 것이다. - 160p


마지막으로 우리가 아주 조심스럽게 다뤄야 하는 권력 남용의 또 다른 예가 있다. 30년 전부터 여성들은 임신 출산의 권리를 독점하고 있다. 여성이 결정적으로 임신 여부를 결정한다고 보는 것이 당연한 듯하지만, 만일 남자가 아이의 출산을 원하지 않는 경우 이는 남자의 정액을 이용하는 '권력 남용'이라고 할 수 있다. 무관심해서, 혹은 여자의 생각에 동조하지 않아서, 한 남자가 아이를 낳지 않을 수 있게 된 것은 상당한 진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만일 남성이 원하지 않는다고 분명히 밝혔는데도, 여성이 자신의 의지에 의해 출산한 후 남성에게 부성애를 강요하는 것은 '정신적 침해'라고 할 수 있다. - 164p 


소비된 성[性]에 대한 비판에 이어, 성의 상품화에 대한 비판이 이어졌다. 순식간에 이 페미니즘의 어투는 오래된 유대 기독교의 권선징악적 어투를 닮아갔고, 그렇게도 힘들여 없애려 했던 성에 대한 상투적 개념을 되살려내는 데 성공했다. - 175p


성 정체성을 배우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일이며, 이런 주장이 어떤 이들에게는 마음에 들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성 정체성은 대립적 개념과 희화화, 그리고 상투적 표현들을 통해 습득된다. 성 정체성이 남자아이들에게 고통이 되어서는 안 되며, 오히려 습득된 성 정체성은 차후 이성과 맺게 될 관계에서 필요한 조건이 된다. 남성적 정체성에 대한 자각이 더 이상 문제 되지 않을 때 비로소 경계가 무너지고 합의가 태어날 수 있다. 남성과 여성의 유사성은 도착점에 가서야 생기는 것이지 출발점에서 생기는 것은 분명 아니다. - 245p 


이슬람교도 다른 모든 종교와 똑같이 취급되어야 한다. (...) 학교에서는 머릿수건을 금지해야 한다. - 276p


상반되는 두 가지 페미니즘 이론이 잇따라 나타나면서 혼란이 가중되고 있다. 삼사십 대의 요즘 남녀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첫 번째 페미니즘의 특혜를 누렸다. 그들은 원하지도 않았는데 두 번째 페미니즘 속에 몸을 담그고 있다. 여성들은 자신들의 성생활의 자유, 평등이라는 이상, 역할 분담을 굳건히 지지하지만 이 세 가지를 요구할 때는 예전의 믿음과는 철저히 단절되어야 함을 깨닫지 못한다. 십여 년 전부터 생리학이 다시금 대두되고 있지만 페미니스트들은 진화할 생각조차 하지 않는 가운데, 평등을 향한 행진은 어렵거나 불가능해지고 있다. 사랑이라고 말하는 대신 모성 본능을 내세우면서, 남자를 육아와 가사에 끌어들이고 싶어하는 것은 동시에 할 수 없는 일이다. - 286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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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풍오장원 2024-08-03 11: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지금의 극단적 페미니즘의 지적 천박성이나 저열함에 대해서는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을 정도라는 생각이 듭니다...
 
[eBook] 지금 이 순간이 나의 집입니다 - 틱낫한 스님의 생애와 가장 심오하고 본질적인 삶의 가르침
틱낫한 지음, 이현주 옮김 / 불광출판사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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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는 왜 발명되었을까. 사람들은 왜 종교가 필요했을까. 

신이 있다고 생각해?라는 질문에 이렇게까지 믿는다면 있는 거지,라고 대답한다. 믿음들이 쌓여서 만들어진 존재로의 신에 대해서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스스로 붓다가 되라는 불교의 가르침은 나에게 적당하게 온다. 불교와 유교를 배경으로 가지는 동아시아의 믿음에 공감한다. 책 한 권이 하나의 주제로 달려드는 책들을 보던 때가 있었다. 그럴 듯하게 현학적인 글들에 이해하려고 애쓰면서 읽을 때도 있었는데, 지금은 그러는 때가 아니다. 


지금 이 순간은 기쁨과 행복으로 가득 차 있다. 당신이 주의를 기울이면 그게 보일 것이다. - 8%(34p)


나에게 일어난 일을 다른 누구와 나눌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그것을 내 가슴에 그냥 담아 두고 싶었다. - 13%(54p)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동떨어진 존재르는 관념에 사로잡히지 않을 때, 그 때 우리 사이에 하모니가 이루어질 수 있다. - 16%(70p)


알아차림의 햇빛 안에서 하는 모든 생각, 모든 행동이 신성하다. 이 빛 안에서는 성 聖과 속 俗 사이에 경계가 없다. 설거지를 그렇게 하면 많은 시간이 걸리긴 하지만 나는 매 순간을 충실히 살고 그래서 행복하다. -19%(83p)


누구를 사랑할 때 당신은 그가 행복하기를 바란다. 그가 행복하지 않으면 당신은 행복할 수 없다. 행복은 개인적인 것이 아니다. 참 사랑은 깊은 이해가 바탕이 되어야 한다. 실제로, 사랑은 이해의 다른 이름이다.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제대로 사랑할 수 없다. 이해 없는 사랑은 다른 사람을 괴롭힐 따름이다. - 21%(89p)


젊은이라면 조국을 위해서 뭔가 하고 싶은 게 당연하다. 많은 청년 수도승들이 마르크시즘에 매료당하여 절 밖으로 나가서 그들의 운동에 가담하고 싶은 유혹을 받았다. 

불의에 저항하는 행위, 그것만으로는 충분치 못하다. 우리는 행동이 마음챙김을 구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깨어서 알아차리지 않으면 행위가 더 많은 고통을 초래할 따름이다. 우리는 마음 챙겨 행동하기 위해서는 명상과 행동이 결합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 21%(90p)


절로 돌아오면서 나는 울었다. 나중에 나는 스님들 가운데 한 분이 큰 쌀독 하나를 마당 구석에 몰래 묻어 두었다는 걸 알았다. - 23%(98p)


이 모든 것을 가능케 한 것은 잠시 하던 일을 멈추고, 침묵이라 불리는 기적의 바다, 강력한 치유 능력이 있는 바다에 자기를 열어 놓는 순간이었다. - 26%(432p)


"친구들, 모든 것이 무상 無常 하다고 붓다께서 말씀하셨소. 언제고 전쟁은 끝나게 돼 있어요." 

문제는 그 무상함을 촉진시키기 위하여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냐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들이 있다. 각자 자기 집으로 돌아가서 현재 상황에 도움을 주기 위하여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깊게 들여다보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행동하는 것 자체가 우리를 절망에 빠지지 않도록 도와준다. - 23%(126p)


일단 해야 할 일이 보이면 행동을 취해야 한다. 보는 것과 행동하는 것이 함께 간다. 그러지 않으면 본다는 게 무슨 소용인가? - 30%(129p)


위험은 자주 안에서 온다. 미리 막을 수 없는 돌발 사태가 벌어져도 침착하게 깨어 있으면 잠재된 위험이나 치명적인 사태를 조용히 가라앉힐 수 있다.  - 31%(133p)


"네가 평화를 원하는 즉시 너에게 평화가 있다"는 뜻이다. 몇 년 세월이 흐른 1976년 싱가포르에서 그 말을 실천에 옮길 기회가 있었다. - 32%(139p)


이런 일을 하면서 겪어야 하는 고통이 너무 심해서 우리는 일을 계속할 수 없을 만큼 영적으로 기운이 소진되었다. 그래서 앉기 명상과 걷기 명상을 끊임없이 실천했고 식사시간이면 몸과 마음을 집중하여 말없이 밥을 먹었다. 이런 수련을 병행하지 않으면 지금 하는 일이 실패할 것임을 우리는 알았다. 숱한 사람들 목숨이 우리의 마음챙김에 달려 있었다. - 33%(143p)


곤경에 처하여 평화롭지 못하면 진정한 평화를 끝내 모를 것이다. - 34%(145p)


마음챙김 수련은 한 척의 보트와 같다. 마음챙김 수련을 하는 것은 당신에게 보트를 주는 것이다. 수련을 계속하면, 보트에 타고 있으면, 당신은 고통의 강물에 가라앉거나 빠져 죽지 않을 것이다. 

그 퇴역군인은 이 말을 천천히 받아들였다. 결국 아이들 돕는 일에 자기 삶을 바쳤고 그 과정에서 스스로 치유되었다. 지금 이 순간은 과거를 담고 있다. 지금 이 순간에 깊이 들어감으로써 당신은 과거를 치유할 수 있다. 다른 무엇을 기다릴 필요가 없다. - 45%(200p)


모든 것이 엉망일 때 당신이 닫아야 하는 여섯 문이 있다. 눈, 귀, 코, 혀, 몸 그리고 마음이다. 우리의 여섯 감각은 마음으로 통하는 문이다. 거센 바람이 들어와서 당신 방을 어지르지 못하도록 그것들을 모두 닫아라. - 40%(211p)


잠시 명상하면서 가만히 있으면 우리도 맑아진다. 그 맑음이 우리를 신선하게 해 주고 힘과 명징明澄함을 우리에게 선물한다. - 55%(239p)


그들에게는 부모 말고도 몸을 숨겨 줄 사람들이 많았다. 

부모와 소수 자녀들로 이루어진 핵가족은 상대적으로 최근의 발명품이다. 그 작은 가정에서 숨 쉴 곳이 없을 때가 있다. 부모 사이에 문제가 발생하면 온 가족이 피해를 입는다. 집 안 공기가 무거워지고 어디 도망갈 곳이 없다. - 90%(432p)


밑줄을 치다가, 어디부터 칠 지 고민하게 만드는 쪽글들이다. 쪽글 하나하나가 밑줄 친 말의 상황들을 전한다. 베트남에서 태어나서 승려가 되고, 전쟁을 반대하면서 망명-엄밀히 말하자면 귀국할 수 없게 되었다-해서 살게 된 스님이 불교의 가르침을 전 세계인에게 전하는 글들이다. 프랑스와의 전쟁과 베트남전을 연달아 겪으면서 이념이 물결치는 시대를 가로지르면서도 불교의 가르침으로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라는 이야기들이다. 사람은, 생명을 가진 모든 것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말한다. 

프랑스 병사가 겪는 어떤 침묵의 순간, 비행장에서 만난 군인과의 짧은 순간, 절망이 가득 차오르는 순간 자신을 달래는 말들. 각각의 이야기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품고 있고, 모든 가르침은 그 시대에 맞도록 다시 전해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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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개의 설계사
단요 지음 / 아작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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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로 배운다. 

AI, 대형언어모델, 퍼지이론이니 소설과 소설 말미에 붙어있는 네 개의 에세이. 아직은 일어나지 않은 소설의 이야기가 뒤에 붙어있는 실제 과학적 성취에 대한 이야기들과 겹쳐서 불안이나 걱정은 조금 더 커진다. 

전기를 만드는 회사에 다니는 나는, 챗지피티에 질문 하나를 던질 때마다 500미리 물 한병이 필요하다는 말을 듣고는 놀라서 한 번도 질문한 적이 없다. 대신 이렇게 질문하고 대답을 듣고 소설을 쓴 소설가의 책을 읽으면서 무언가 아는 척, 기술이란 참으로 무섭다고 생각한다. 

세상의 모든 정보를 통해 배우는 AI가 진실과 거짓을 구분하지도 못하고, 도덕적 감각도 없이, 잘 꾸며진 맥락 가운데, 사람처럼 섞인다. 사실, 사람이 어떤 존재인지도 모르는데, 그럴 듯하게 맥락을 파악하지만, 무언가 비어버린 대화란 사람 사이에도 벌어지는 일이니, 많은 만남이 채팅과 인터넷에서 이뤄지는 어떤 세상에서 상대가 사람인지 아닌지 알 게 뭔가 싶기도 하다. 

점점 더 많이 요구되는 건 가치관에 대한 거라는 생각이 든다. 


거부할 수 없을 만큼 강력하고 압도적인 힘이 무언가를 대신 결정해주는 상황은... 아주 매력적이거든요. 기술적으로 말하자면 결괏값은 무작위일지라도 경로 비용은 0으로 고정된 선택지라고 할 수 있겠죠." - 17%


다들 불합리한 균형 맞추기 게임에 중독된 상태로 태어난다. 밀어내는 사람에게 이끌리고, 너무 쉽게 풀리는 관계는 시시하고, 상대를 어떻게 해보려다가도 정신을 차려보면 즐겁게 내 갈비뼈를 빼내어 바치는 중이고.... - 25% 


게다가 설정값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 건 피차일반이다. 가치관이 합의된 허상에 불과할지라도, 모두의 꿈에 발맞추기 위해서는 갖가지 허상 중 하나를 받아들여야만 한다. - 30%


그래도 어쨌든, 면허가 박탈당하더라도 수많은 사람 앞에서 떠드는 값으로는 충분하다고 봐요. - 37%


하지만 아무리 곱씹어도 슬픔이건 죄의식이건 다가오지 않았으므로 나는 느끼지 않았다. 애당초 내가 그 뉴스를 본 건 가을에 접어들고서도 한참이 흐른 뒤였다. 정리된 의혹을 찾아 읽기는 편해도 흥미진진한 분위기를 만끽하기에는 늦은 시점이었다. - 56%


자신 바깥의 것들에 바쳐지는 맹목성이란 고결한 만큼 자기 본위다. 스스로의 몫이 아닌 것을 감히 자신의 일부로 여기기 때문에, 그 오만한 착각 때문에 몰락마저 기쁘게 봉헌하는 것이다. - 58%


"현존하는 것들이 존재하지 않는 것에 우선합니다."

박사는 그렇게만 답했다. 감정형 인공지능을 설계할 때 가장 먼저 주입하는 대원칙이었다. -64%


기호들의 관계로만 환원되는 이해도 여전히 이해입니다. - 76%


더 많이 학습했는데도 더 모르는 역설적인 상황을 빚어내지 않나 생각해봅니다(여전히 가설이라는 점을 다시 언급해둡니다). -82%


유연성을 발휘하는 친구와 악질적인 선동가를 구분하기가 어렵다는 겁니다. - 87% 


결국 인식을 약간만 왜곡시킨 다음 자기 본위로 끌어 오기만 하면 윤리학의 도구들을 사용해 묘한 일들을 정당화할 수 있게 됩니다. - 90%


그런 이유들은 곧잘 타인의 이유와 경합하므로, 인간이 맺는 상호관계란 '상대에게 자신의 이유들을 정당화하거나 상대의 정당화를 받아들이는 절차'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런 종류의 수용과 거부가 행위의 도덕적 성격을 결정하고요. - 91% 


헌신과 애정과 자아도취를 혼동하고 그것을 믿어버리는 태도는 몹시도 인간적이기 때문입니다. - 94%


참, 소설의 이야기는 이북으로 67%에서 마친다. 뒤에 붙은 건 소설에 덧붙이는 말, 아마도 작가가 소설을 쓰면서 여러가지 생각했을 기술적 발달의 현재 상황인데, 읽어볼 만 하다. 


뇌, 인공 뇌, 뇌에 생긴 병, 같은 것에 나는 저항하는 마음이 있다. 이야기가 그럴 듯함에도 불구하고, 한참이나 이야기에 끌려들어가지 못한 건, 설계사의 성정이나 상황이었다. 아마도 사이코패쓰일 수 있는 약으로 다스리는 중인 설계사의 어떤 상황이 설계사를 가장 비중있는 화자, 내가 이입해야 하는 책의 화자로 받아들이기 어렵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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