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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이 폭력이라면, 나는 공동체의 안위를 위해 폭력을 국가에 위탁한 셈이다. 

개인적으로 무기를 소유하지도 않고, 나의 자유를 국가가 제한할 때 보통은 따른다. 


국가는 나에게 제복으로 드러난다. 경찰의 제복, 군인의 제복. 공무원의 제복. 위기의 순간 제복의 명령에 따르려는 나의 어떤 의지는 이 공동체가 안전하기를 기대하기 때문이고, 그 제복이 국가 내에서 유일하게 허용된 폭력의 대리자이기 때문이다. 


아슬아슬한 폭력의 경계 가운데, 이야기들은 자라고 이야기들 가운데 사람들은 착각을 한다. 

조직은 무용하고, 무능하고, 무책임하다고. 

실상은 조직은 힘이 세고, 질문하지 않으면 타락하고, 리더 아래 살아남으려고 애쓰고 있는 중이다. 


1. 조직은 힘이 세다.

언니가 준 이 책을 읽고 조직은 힘이 세다(https://blog.aladin.co.kr/hahayo/9027162), 라고 서평을 썼다. 

조직이 저지른 멍청한 짓들에 대한 이야기고, 용감한 개인-변호사와 기자-이 조직과 싸워 결국은 바로잡은 이야기다. 이야기들의 특성대로, 이야기 안에서 과연 존재의 의미가 있는가 싶은 조직들이지만 이야기로 나오지 않는 것들 가운데, 본질들이 있다. 그 본질들을 잃을 때, 이야기들이 생겨난다. 

조직은 개인보다 힘이 센데, 조직에 속한 사람은 입이 없기 때문에 이야기는 개인에게 발화하고 결국 이야기 속에 사는 사람들은 조직보다 개인이 힘이 셀 수도 있다는 희박한 이야기들에 흔들린다. 

조직 속의 자신의 작은 위치를 쉽게 박차고 나가는 사람들, 개인으로 힘을 행사할 수 있을 거라고 착각하는 사람들-그게 이야기가 되는 이유는 신기하기 때문이란 걸, 잊는다-이 생긴다. 조직은 힘이 세고, 조직에 속한 개인은 조직이 존재하는 본질, 그 책임을 잃지 않도록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 



2. 국가는 무얼까

국가는 무얼까(https://blog.aladin.co.kr/hahayo/6986791), 라는 서평을 남겼다. 세월호참사가 벌어지고 얼마 안 지난 날이었고, 나는 억울한 민간인만큼 이해할 수 없는 군인에게도 이입하고 있었다. 왜 그렇게 움직였을까. 

조직은 어떤 논리로 움직이는가. 

왜 존재하는가, 에 질문하지 않는다면, 나라를 지키기 위한 군인이 자국민을 죽이기도 한다. 








3. 뒷 맛이 쓰다.

뒷 맛이 쓰다(https://blog.aladin.co.kr/hahayo/7608599)

작은 정부와 큰 정부가 충돌한다. 정부는 작을 수록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자유,를 말하면서 선택한다. 국가의 돈은 내 호주머니에서 나온 돈이고, 그 돈을 어디에 쓸지는 내가 권력을 준 사람들-대통령과 국회의원과 군수와 도지사와 등등-이 결정하고 있다. 


무얼 얼마나 할 지 균형을 잡기 어려운 문제고, 너무 큰 책임을 떠안고, 내 돈으로 생색내고 있는 정부를 보는 것도 좋지 않고, 아무 책임도 지지 않으려는 정부를 보는 것도 좋지 않다. 


내게 위임받은 권력으로 나와 공동체를 보호해주길 바라면서, 끊임없이 보고 있어야만 한다. 쉽지 않다. 


세월호 참사가 벌어진 다음, 당시 대통령은 해양경찰을 해체했다. 일을 제대로 하지 못했을 때 조직의 목줄을 쥐고 흔들면, 조직은 오히려 더 납작 엎드려 권력자를 살핀다. 


10월 29일 이후로 그래도 내게 인상적이었던 기사를 다시 보려고 링크를 남긴다. 


추모객이 된 대통령.. 재난에서 분리된 윤대통령에 대한 고찰(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2022110811425217201)


굉장히 안 좋은 시기에 국정 모르는 대통령 있다는 게 아프다(https://v.daum.net/v/202211090705123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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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풍오장원 2022-11-13 19: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도저히 읽어나가기 힘든 역겨운 글들이 넘쳐나는 알라딘에 보기 드문 멋진 글입니다...^^
멀리서 방관자로 올바른 말만 떠드는것만큼 쉬운일이 없지요.
조직의 존재를 인정하고 시작해야 합니다.

별족 2022-11-14 06:43   좋아요 1 | URL
조직은 참 신기합니다.
 

이런 생각을 벌써 쓴 적이 있지만https://blog.aladin.co.kr/hahayo/12689336 ), 한 번 더 말하기 위해 노력해보겠다.

나는, 여성문화와 남성문화가 있다고 생각한다. 동성끼리 함께 고양시키는 어떤 태도가 있다. 문화는 생물학적 성별에 귀속되는 방식이 아니지만, 생물학적 성별로 특징이 더 드러나는 식이다. 누군가를 천상 여자네,라는 식으로 말할 때, 여자,라는 말은 생물학적 성별이라기보다 어떤 성향이고, 동양의 모호한 문화 가운데서, 저 말은 생물학적인 남성에게도 쓰일 수 있다. 인간의 안에 존재하는 모순적인 태도들 가운데, 어떤 특질이 생물학적인 구분자를 은유로 쓰는 거다. 여성적이라고 표현되는 특질들이 있고, 남성적이라고 표현되는 특질들이 있다. 그리고 이것은 생물학적 성별그룹의 문화 가운데 우세한 어떤 특질들인 거다. 사람 하나하나는 묶지 못하지만, 무리지은 사람들로는 특질을 말하는 방식이 되는 것처럼 말이다. 나는 한국인이지만, 한국인의 어떤 특질을 들을 때 나는 안 그래,라고 말할 수 있는 것처럼. 흐릿하고 경계가 불분명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교한다면, 비교 가운데 굳이 어떤 말을 고른다면 선택되는 방식의 말들이라고 생각한다. 

개인은 그런 식의 말들에 억압을 느낄 수 있다. 

말하자면 나는 E만 가득한 세계에 속한 I 처럼 여자들의 문화에 불편함을 느끼는 사람이다. 그렇지만, 남자들의 세계에 속한다고 해도 역시 또 다른 불편함이 있다. 성향 상 대세가 되는 어떤 태도에 조금씩 핀트가 어긋난다. 그건 나뿐 아니라, 모든 개인들이 조금씩은 그렇게 느낄 것이다. 여성이란 말이, 동양인이란 말이, 한국인이란 말이, 딸이란 말이, 아내라는 말이, 엄마라는 말이, 나의 정체성이기는 하지만 그 모든 정체성들로만 나를 설명하지 못한다. 


젊은 나에게 주효했던 억압은 순결에 대한 억압과 성폭력에 대한 공포(https://blog.aladin.co.kr/hahayo/13052482)였다. 순결에 대한 억압이 강할수록, 성폭력에 대한 공포가 커진다는 면에서 나는 내 자신의 순결에 대한 억압을 해소하기를 원했고, 그런 말들을 페미니즘에서 찾으면서 해방감을 느꼈었다. 

그렇지만, 지금은 페미니즘의 말들이 고양시키는 태도들이 나의 태도들과 충돌한다고 느낀다. 


1. 성적인 고양

인간과 인간의 관계-남녀는 당연하고, 같은 성별까지도-를 성적인 것으로 해석하는 태도를 고양시킨다. 이건 남성적인 서양문화의 특성일 수도 억압적인 기독교문화의 특성일 수도 있다. 서양의 영화나 드라마나, 소설을 볼 때, "도대체, 섹스 못해 죽은 귀신이라도 들러붙었다니?"싶은 순간들 말이다. 애건 어른이건, 동성이건 이성이건, 단 둘이 있는 어떤 공간에 성적인 문제가 발생할 거라고 조성되는 긴장감, 더하여 삽입성교로의 귀결 말이다. 

다 큰 성인 여자가, 남성의 호의가 무엇을 원하는 것인지 알아차리지 못하다니 멍청하다는 식이라거나, 여자 둘이 한 호텔방에 들어갔는데 성인이고 정치적으로 올바른 당신은, 그 둘이 레즈인 걸 알아차리고, 다른 사람들이 동성연인을 혹시나 차별하고 억압할까봐 보호해야 한다는 어떤 뉘앙스를 만나는 순간같은 거다. 

둘이 무얼 하건, 분명하게 모르는 채라면 모르는 채로 내 맘대로 생각해도 상관없다. 드러내지 않았다면 호의는 호의, 내가 줄 수 있는 것처럼 상대도 줄 수 있다고 인간의 관계가 다 오해지 뭐,라는 태도로 남성의 호의를 받고, 내가 줄 수 있는 호의를 또 주면서. 

여자 둘이 한 호텔방에 들어갔다고 해서, 둘이 레즈라고 당연히 생각하는 게 이상한 거지. 드러내지 않았다면, 갔구나, 하고 말 일이지. 그 안에서 무얼 할 지 생각하면서 보호할지 혐오할지 입장을 정해야 할 일이냐 말이다. 나랑 아무 상관도 없는데, 그러거나 말거나.  

남성의 호의가 우정일 수도 있고, 여자 둘이 덕질하느라 호텔 방에 갈 수도 있지. 성적인 긴장들이 싫어서 일찌감치? 결혼하고 속 편한 나는 머릿속에 음란마귀가 들어앉았는지 모든 인간관계를 성적으로 고양시키는 지금의 어떤 페미니즘의 태도가 피곤하다. 


2. 위계의식의 고양

읽지도 않은 책들인데, 의문이 생긴다. 

어떤 일이 더 중한가?라는 질문에 서구 백인 페미니스트들은 남자들과 같은 저울을 사용하고, 그게 진리인 양 말한다. 

아이를 먹이는 일과 경제학 저술을 남기는 일. 

지금 당장 필요를 해소하는 일과 미래에 이름을 남기는 일. 

전자를 하느라 후자를 획득하지 못하는 것을 억울해한다. 

1세계 여성 페미니스트의 위계 피라미드는 1세계 남성을 향한다. 경중을 따져 세운 자신들의 위계가 세상을 엉망진창으로 만든다는 3세계 페미니스트의 말은, 어린 마음을 고양시키며 달려나가는 어린 페미니스트를 고양시키지 못한다. 

이런 태도로, 나의 말들은 서구 페미니스트 철학자의 말들로 반박된다. 공부를 더 하세요,라는 논쟁의 끝을 그렇게 만난다. 페미니즘 공부를 열심히 해서, 정밀한 위계를 스스로 만든다. 공적인 일과 사적인 일의 위계는 당연히 공적인 일이 위로 올라가고, 정치가와 간호사가 있다면 정치가가, 판매원과 엔지니어라면 엔지니어가, 어떤 식으로든 위계와 서열을 만들고, 그 위계 안에서 발언권의 가치를 부여하려 든다. 역시 금과옥조는 이름있는 페미니스트 학자, 나와 같이 공부한 사람들의 말, 자신이 가지는 그 태도에  위계가 고양되었으니, 상대의 말이 서구 이름있는 학자의 말과 대등하다고 사고하지 않는다. 

결국 누군가는 해야 하는 일들을 자본시장에 내어줄 뿐인 논리들을 강화시킨다. 그러고는 다시, 본질적으로 가지고 있는 그 위계는 직업들 사이에서도 강화시킨다. 애초에 위계가 문제고, 세상이 수직이 아니라 둥근 원과 같다는 좀 더 나은 태도는 고양되지 않는다. 


3. 피해자 서사의 고양

남자와 여자가 다르다,라는 말을 반박한다. 물론 '문명사회에서'라는 '기술로 해결가능한'이라는 전제가 붙는다고 한다. 이 문명이라는 것이 어떤 비문명을 거쳐서 이루어진 것인지 못 본 체 하는 것 같다. 폭력을 억누르는 강한 문명의 힘이 어떤 이야기들로 이뤄진 건지 모르는 체 한다. 비문명의 바탕 위에서 겨우 서 있는 연약한 문명 안에 살면서, 비문명의 바닥을 부수려는 것처럼 군다. 

남자와 여자는 같으므로 같은 권력을 달라고, 여성은 피해자고 무언가 권력을 배분하는 존재라도 있는 양 말한다. 권력을 배분하는 존재에는 내가 포함되어 있고, 그 나라는 존재는 모순으로 가득 차 있다. 

여자는 물리적으로 남자보다 약하다. 그래서, 많은 특성들이 드러난다. 약함에도 불구하고 살아남기 위해서, 여자들의 세계에서 경쟁하고 남자들의 세계를 넘보지 않으려고 해 왔다. 약하기 때문에 치밀하게 반격해야 하고, 실패할 수 없어 조심스럽다. 살아남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래서 고양된 여성의 성정, 여성의 교활함, 여성의 치밀함이 있다. 여성만이 피해자,라고 할 수가 없다. 남성에게는 억압이 없는가? 남성은 피해가 없는가? 다른 방식의 다른 형태로 드러나는 피해일 뿐이다.

남자와 여자는 다르다. 여자는 물리적으로 남자보다 약하지만, 남자는 정신적으로 여자보다 약하다. 나는 남자들이 유리멘탈의 고릴라,라고 생각한다, 여자는 아마도 강철멘탈의 유리동물?이라고. 남자를 정신적으로 옥죄어 조종하는 여자들,에 대한 이야기들을(https://blog.aladin.co.kr/hahayo/12544871 ) 안다. 

여자는 물리적으로 약하기 때문에, 남자랑 나란히 걸을 때도 무서운 상상을 부풀릴 수 있다.(https://blog.aladin.co.kr/hahayo/9957536 ) 그 남자가 아무 것도 하지 않았어도, 여자는 그저 나란히 걸으면서 살해당할지도 모른다고 상상한다. 

인터넷을 돌아다니다가, 반려동물은 아픈 티를 낼 수 없으니, 주의깊게 관찰하고 병원에 데려가야 한다,고 조언하는 짤을 봤다. 물리적으로 약하기 때문에 가지는 한계는 당연히 있다. 개나 고양이도 안다. 그걸, 억울이나 부당이라고 생각할 수가 없다. 그건 문명 이전이기 때문에, 이걸 문명으로 교정할 수 있다는 것은 문명을 너무 과대평가한 게 아닌가. 

최재천의 아마존에서는 ( https://www.youtube.com/watch?v=YGDjMALcs7o ) 왜 여성살인자가 더 큰 형량을 받는지에 대해 말한다. 물리적으로 약하기 때문에 실패할 수 없기 때문에 치밀하게 계획하기 때문에 우발적 살인에 비해 더 큰 형량을 받고, 항소하지 않는다. 

남자는 어떨까. 사랑이 없으면 삶이 무가치하다는 이야기 가운데 리니지의 데포르쥬는 오웬의 기사가 되고, 결혼하면 월급을 아내에게 몽땅 맡기고, 사랑받을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내어주는 서사 가운데 자신을 내던진다. 

특정하여 어떤 성별을 피해자라고 할 수는 없는데, 할 수 있다고 여성이 피해자라고. 인정하라고 한다. 나는 인정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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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논어 세 번 찢다

 https://blog.aladin.co.kr/hahayo/10881133

읽고 인용도 했지만, 서양의 어떤 사고 중 내가 정말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은 정치 때문이라기보다 종교 때문일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중국의 전통과 서양의 전통은 사실 다‘구분‘을 말하고 있으나, 정치와 종교, 승려와 속인의 관계가 다르며 구조도 완전히 상반된다. 저들의 전통은 정치와 종교의 합일이다. 즉 종교는 통일되었고 국가는 다원화되었다. 반대로 우리의 전통은 정치와 종교의 분리이다. 즉 국가는 통일되었고 종교는 다원회되었다. 만일 기어코 천일합일을 논해야 한다면, 그 역시 저들의 것이지 우리의 것은 아니다. 우리의 전통은 정치를 부각시키는 것이고, 저들의 전통은 종교를 부각시키는 것이다. '




2.  예수와 함께 한 저녁식사

친구가 권해서 읽고, 뭐라도 쓴 줄 알았는데 쓰지 않았네. 

책 속에서 신의 기준은 너무도 높기 때문에 마더 테레사와 히틀러는 종이 한 장 차이도 나지 않는다,는 대목이 있다. 나는 그대로 수긍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이런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잘 어울려 살기는 되게 어렵겠다, 생각했다.

믿고 있는 신이, 선에 대한 기준이 높고 결벽적인데-한순간에, 라는 소설을 읽고 그런 인상을 많이 받아서 남겼었다. 욥기얘기도 하면서(https://blog.aladin.co.kr/hahayo/12696791)-, 그 신의 기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을 믿는지 믿지 않는지라면, 음, 그런 종교를 가진 사람은 좀 이상할 거 같다는 생각이 드는 거다. 게다가 그 종교가 정치권력까지 가졌다면, 굉장히 위험하지 않나,라고도.



3. 코코

https://blog.aladin.co.kr/hahayo/10022361

어떤 사후세계를 믿는가. 

그래서 어떤 현실을 살려고 하는가. 

코코를 보면서, 코코의 사후세계를 믿는 사람들보다, '신과함께'의 사후세계를 믿는 사람들과 같이 사는 편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런 사후세계를 믿는다면, 악명도 유명이라는 말은 진실이 아닌가.

기억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이 자원이 되서 죽음 이후에도 영생을 누릴 수 있다면, 그게 어떤 방식이든지 기억되려고 하지 않을까.

기억,에는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있고 좋은 기억만큼 나쁜 기억도 오래가니까 말이다. 



4. 사자왕 형제의 모험

https://blog.aladin.co.kr/hahayo/9922625

어떤 사후 세계를 믿는가.

사자왕 형제의 모험, 을 아이들에게 권하지 못했다.

현실과 연결없는 목가적인 전원의 사후세계는 동양인이 상상하는 양심의 심판,이 이뤄지는 절대적인 위계의 공간이 아니다. 

나는 지나간 역사에 대한 기억 가운데, 여기 저기 권력을 휘두르는 작은 권력자들보다 차라리 한 명의 가혹한 권력자가 낫다고 생각하는 것도 같다. 더하여 나와 아이들의 안전을 위해 나는 어느 정도 복종할 마음을 먹는다. 태종 이방원(https://blog.aladin.co.kr/hahayo/13623739) 에서 권문세족의 무기와 사병을 혁파하는 것이 여성의 권한이 줄어드는 것보다 반가운 식. 

아나키즘적인 사후세계와 위계적이고 현실의 잘못에 대한 단죄가 기다리고 있는 사후세계. 어떤 믿음을 가진 사람과 같이 살기 좋을까.


5. 붓다순례

https://blog.aladin.co.kr/hahayo/11489172

영적 믿음을 추구하는 부처의 시대에 깨달음에 대한 터무니없는 믿음들도 휭행한다. 책 속에 이야기 속의 잘 생긴 수행자는 스승이 악의적으로 설파한 깨달음의 방식 100명을 죽인 다음 깨달음을 얻게 된다,를 실천한다. 자신이 깨닫기 위해 살인을 저지르는 이 수행자가 이제 그 스승을 버리고 부처를 따르기로 한 다음 질문하는 장면이 나온다. 자신의 죄는 씻을 수 있는가. 부처님은 모래알은 모래알이라고, 아무리 작다고 해도 물에 가라앉는 법이라고, 죄에 대한 댓가를 치르게 되어 있다고 대답한다. 100명을 죽이라고 그러면 깨달음을 얻게 될 거라고 말한 앞선 스승의 죄는 스승의 죄고, 죽인 너의 죄는 너의 죄이니 그 무게만큼 치러야 하는 댓가가 있다고 대답한다. 어리석거나 몰랐다고 해서, 죄가 죄가 아닐 수는 없다고 대답한다. 부처님을 따르기로 한 수행자는 유가족의 돌에 맞아 죽는다. 


6. 곰돌이 푸, 이야기전집

읽어보려고 했지만 읽지 못했다. 

이야기의 어떤 태도,를 받아들이지 못했다. 

어리석음을 칭찬하는 태도. 

재미가 없었다.  

아이였을 때도, 나를 아이취급하는 게 싫었는데, 어른인 지금 나를 아이취급한다면 나는 싫을 거거든.

내가 저지른 잘못을 나는 안다. 

나에게만 주어지는 특혜 따위를 바래서는 안 된다는 것도 안다. 

상대에게 무기를 빼앗으려면, 나의 무기도 내려놓아야 한다는 걸 안다. 국가를 썩 믿어서가 아니라, 방법이 그것 뿐이라서, 그런 식으로 심판을 이양했다는 걸 수용한다.




내가 정말 안다고 할 수 있을까, 싶은 믿음들인데도, 이해할 수 없는 마음 가운데, 생각이 많다. 

덱스터,의 설정- 연쇄 살인마를 죽이는 연쇄 살인마-을 듣기만 하고 보지 못하는, 여성이고 동양인인 나는, 내가 잘못을 저지른 사람을 단죄해야 한다는 일종의 책임감이 없다. 믿는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내가 굳이 현세에서 죄를 묻지 않아도, 결국 죗값은 치르게 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식인 거다. 내가 단죄하지 않아도, 심판하지 않아도, 결국 이루어진다,는 식의 속 편한 믿음 가운데, 총기를 가지고 스스로를 보호해야 한다는 태도가 없는 거다.



 


삶과 죽음을 대하는 근본적인 태도를 떠받치는 종교적인 믿음이 무언가 다르다는 생각을 계속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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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좋아하는 책이 새 옷을 입고 있는데, 나는 구판이 더 좋다. 


1. 인재시교(https://blog.aladin.co.kr/hahayo/9371196)














단 한 권의 육아서를 읽는다면 인재시교,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한 권으로 묶였던 책이 인성편과 공부편으로 나뉘어서 '좋은 엄마가 좋은 선생님을 이긴다'는 제목의 두 권만 살 수 있는 상태다. 

자질에 맞추어 가르침을 베푼다,라는 제목의 육아서는 직접적인 제목으로 분책되었다.

같은 내용인 데도 아이를 키우는 철학서 같던 책은, 아이를 키우는 엄마의 실용서처럼 보인다. 실용서는 권하기에 너무 노골적이라 일부러 구판을 찾는다. 


2. 상상의 초가교실














상상의 초가교실, 이 힘센 상상1,2 로 나뉘어져서 새로 나왔다. 

상상의 초가교실, 은 각각의 완결된 이야기들이 있고, 각각의 이야기 속에서 상상은 조연일 때도 주연일 때도 있다. 각각의 이야기가 가지는 관계는 상상의 초가교실,이라는 제목이 힘센 상상보다 자연스럽다고 생각한다. 

힘센 상상1,2보다는 상상의 초가교실,이 더 좋은데 다 절판이고 재출간 계획조차 없다니 슬프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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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랩 걸

https://blog.aladin.co.kr/hahayo/13372988

여기서 저자는 아이에게 엄마가 아니라 아빠가 되겠다고 결심한다. 

그럼 도대체 엄마란 뭘까? 엄마가 뭐길래, 아빠가 되겠다고 하는 걸까?

남자여서 아빠고, 여자여서 엄마인 게 아니라면, 과연 엄마는 뭘까?











2. 나는 내가 좋은 엄마인 줄 알았습니다. 

https://blog.aladin.co.kr/hahayo/13054698

완벽한 엄마는 아이에게 성장할 공간을 주지 못한다. 

엄마는 필요에 반응하되, 어리석음을 연기?하여 아이가 스스로 자랄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줘야 한다. 

아빠는 추상 세계-사회-에 존재하지만, 엄마는 아이와 함께-가정- 존재하는 어른이기 때문에 너무 완전한 어른은 아이가 어른이 되는 것에 두려움을 갖게 만든다. 

완벽한 어른이 존재하는 세상 속에 사는 아이는 어른이 되는 걸 두려워하고, 어른이 될 필요를 느끼지도 못한다. 평화로운 현대의 문명사회에서 점점 자라지 못하는 어른이 가득 차는 것은, 길어진 수명과, 직접 살아내기보다 이야기를 구경하기 때문은 아닌가 생각한다. 

책 속에는 역시 완벽한 존재가 되고 싶어 아이들을 비웃고 대신 해 주는 아빠도 등장하기는 한다. 부모란 역설인가 싶기도 하네.  



3. 젠더

https://blog.aladin.co.kr/hahayo/13206446

명백하게 아이의 잘못이라고 해도, 엄마는 아이를 감싸고 아빠는 아이를 야단친다,고 가족을 묘사한다. 

엄마인 나는 남편이 아이를 혼낼 때마다, 아이의 대변인 노릇을 하려고 한다. 엄마인 나는 내가 아이의 마음을 알고 있다고, 자만한다. 

엄마와 아이의 연결은 아빠와 아이의 연결보다 동물적이고 직접적이고, 감정적이다. 








4. 파친코

https://blog.aladin.co.kr/hahayo/13512685


선자는 노아를 결국 이해하지 못한다. 결코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생명을 주고, 먹이고 입히면서 물적 필요를 충족시키지만, 추상의 영역에서 엄마는 무력하다. 









5. 팡쓰치의 첫사랑 낙원

https://blog.aladin.co.kr/hahayo/10227225

엄마와 아빠,는 상징하자면, 

속과 성일까. 

자연과 문명일까. 

땅과 하늘일까. 

감성과 이성일까. 








읽지 않은 책 중에 '엄마됨을 후회함'이라는 책이 있고 이 책을 읽고 마립간님이 남긴 서평(https://blog.aladin.co.kr/maripkahn/8861264)에 댓글을 단 적이 있다. 엄마,라는 존재는 아이의 생존을 책임지고 있다,고 생각한다고.  


성범죄수사대SVU 에피소드와 아동학대 뉴스를 보면서 '여자이기만 한 여자들'(https://blog.aladin.co.kr/hahayo/12329640)이라는 글을 썼었다. 


역할로서의 '엄마'가 없다면 아이는 살아남기 어렵다. 엄마는 먹이고, 입히고, 보호한다. 아이가 절대적으로 약한 순간부터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을 때까지, 엄마는 아이를 보호하고 돌본다. 보호하고 돌보지만, 그 역할은 한정적이고, 완벽하지 못함으로써 세상에 나아갈 여지를 만든다. 지금 생존의 많은 부분이 돈에 의지하고 있기 때문에, 엄마라는 역할에는 이제 경제활동도 포함되고 있다. 

직장생활을 하기 전에 아빠를 이해할 수 없었고, 아이를 낳기 전에 엄마를 이해할 수 없었다,고도 썼었다.

엄마라는 역할은 추상성으로 구성되지 않았다. 추상성은 아빠다. 성공, 명예, 이상, 이 모든 추상성은 아빠,라는 추상적인 존재에게 의존한다. 랩걸의 저자가 어린시절을 추억하며 아빠만을 선명하게 그렸던 것에 삐딱해지던 심사는 '엄마말고 아빠가 되겠다'는 저자의 결심에 폭발해서 생각은 이어진다. 그 결심은 삶을 구성하는 어떤 부분들을 무시하는 말처럼 보였다. 


이렇게 쓰면서도, 이게 전부 딸인 나의 생각이라는 자각이 닥쳤다. 

보통은 여자에게 배정된 엄마의 수고를 알면서도 자신은 하려하지 않고 심지어 하찮게 생각하는 것이 추상성이 비대해진 문명세계의 어리석은 말이라고 생각하는 나는 남성인 아들은 어떤 입장일까 궁금해진다. 엄마에게 보호받으면서 아빠가 되어야 하는 아들에게 엄마와 아빠는 어떤 존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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