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장과 마르가리타 1
미하일 불가코프 지음, 박형규 옮김 / 문예출판사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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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공기에 빚지게 마련이다. 그래서, 그 시대의 공기가 지나가 버린 다음에는 무언가 다른 것으로 남는다. 그래, 풍자문학의 걸작이라는 '걸리버 여행기'는 내게 만화로 만나던 소인국, 거인국 이야기보다 더 상큼발랄한 감상을 주지 못했고, '거장과 마르가리타'도 조금은 그렇다.

우리가 '소련'이란 나라가 있었다는 걸 잊는데 아마 한 세대쯤 걸리지 않을까. 그런데, 그 나라의 빡빡한 풍경이나, "'작가'란 책을 쓰는 사람이 아니라, '작가 신분증'을 지닌 사람이었다"는 풍자는 그만큼 우습지 않다. 그보다 하등 나을 것 없는 나라에 살지만, 그래도, 여기는 좀 더 교묘하니까.  

아 그리고, 나는 '소련'에 대한 풍자가 유쾌하지 않다. 이건 '이관술 1902-1950'서평을 먼저 쓰고 난 여파이기도 하고, 무언가 나의 모자람에 대한 강변이기도 한데, 남한같이 편협한 땅에서 '소련이나 북한이 얼마나 경직된 사회인지 풍자'하는 것은 죄책감이 든다. 이 땅에는 그럴 듯한 '풍자'라는 게 없는데, '풍자'의 미덕이란 게 나폴레옹쯤은 밟아줘야 스릴있는 것인데, 여기서는 '소련이나 북한의 경직성을 풍자'하는 것은, 땅에 굴러다니는 낙엽을 밟는 것처럼, 아니 누가 시켜서 밟는 것처럼 재미도 스릴도 없다.

나는 이 책을 악마가 등장하는 소동극으로 읽었다. 그것으로도 나쁘지 않다. 해설까지 읽고 나니까, 그 시대를 살아낸 작가에게 이 얼마나 스릴있는 풍자였을지도 알겠다.

쓸데없는 죄책감이 없다면, 여기나 거기나 다를 바 없으니 웃으며 읽을 수 있다.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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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관술 1902-1950 - 조국엔 언제나 감옥이 있었다
안재성 지음 / 사회평론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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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마치자, 신랑은 "느낌이 어때?"라고 내게 물었다.

신랑의 택배상자에서 꺼내어, 내가 먼저 읽었다. 내가 이 책을 꺼낼 때 신랑은 "누군지 모르지? 해방 후에 설문조사하면 정치인으로 김구만큼 인지도가 있었던 인물이래. 그런데, 지금 아무도 모르잖아. 아예 존재조차 잊혀져서. 궁금해서 샀어."

느낌은 슬프고 안타깝다. 분단으로 '왜곡'되어버린 역사가 그저 안타깝다.

느낌을 묻는 말미에, "읽고 나니, 독립운동은 하면 안 되겠다, 이런 생각 들지 않냐?"

아, 나는 그런 생각이 들었던 게 아니다.

지금 중국이나, 베트남이나, 쿠바나, 북한이 개방을 모색하고, 가장 거대한 '소련'이라는 혁명의 실험이 '실패'라고 불린다고 해서, 애저녁에 눈도 귀도 틀어막았던 우리의 과거를 옳았다고 말한다거나, 여전히 보아서는 안되고 들어서는 안되고 생각해서는 안 되는 것으로 '우기는' 우리의 현재가 슬픈 것이다. '여기가 싫으면 저기 가면 되잖아'라고 말할 수 있었던 분단의 나라라는 게 슬프고, 사실 더 끔찍하게도 기득권의 이익에 반하는 거라면 아니어도 '저기'라고 '우기고' 몰아내 온 것이 슬픈 것이다.

소설에선가, 어디선가 "말 잘 하고 똑똑하던 사람들은 전쟁통에 모두 죽었지"라는 노인들의 말처럼, 오래도록 '들어서는 안되고 생각해선 안 되고 보아서는 안 되는', 그걸 했을 때 어떤 대가가 기다리는지 학습되어 온 지금의 사람들만 남은 듯한 현재가 슬픈 것이다. 전부를 보아 여기 혹은 저기에 서 있는 사람과 여기만을 보고 여기에 서 있는 사람은 세상의 크기가 다를 것이다.

그래서, 서로를 믿지도 못하고, 더 좋은 세상도 꿈꾸지 못하고, '여기가 싫으면 떠나면 되지'인 많은 사람들이 슬픈 것이다.

표지의 남자는 웃고 있다, 고 느껴진다. 배신당하면서 끊임없이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부러운 것처럼, 지금 두려운 게 너무 많은 나는 자전거에 전단지를 싣고 전국을 누볐다는 낙천적인 혁명가가 부럽다. 명예롭게 죽을 수 없었던 우리의 역사가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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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이골 외딴집 일곱 식구 이야기 - 2004년 우수환경도서
김용희 지음, 임종진 사진 / 샨티 / 200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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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가 왔다. 어떤 부모가 될지, 어떤 삶을 줄지, 궁리한다. 그래서, 신랑은 이런 책을 사는 걸 거다.

뱃 속에 있을 때, 나는 우리는 아이가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자립하게 하겠다고, 혹은 대학교까지는 보내줘야 하는 거 아닌가, 하는 이야기를 나눴다. 그런 대화를 하면서, 내가 한 생각은 내가 나의 부모님에게 받은 정도로 나의 아이에게 주고 싶다는 것. 그건 물질적으로 주는 풍요가 아니라, 마음으로 가득한 사랑이다. 그러나, 시대가 달라, 내가 그만큼 주는 것은 나의 부모님이 '당신이 가진 전부'를 주신 만큼의 풍요로운 사랑을 느끼게 하지 못할 것이다. 나는 나의 아이가 물건들 하나하나에 의미를 부여하고, 소중하게 여길 줄 알고, 아끼는 사람이었으면 하고 바라는데, 그래 무엇이든 척척 사주고 싶지 않은데, 가난하여 그러지 못한 나의 부모님을 내가 이해한 만큼, 나의 아이는 나를 이해할까.

이 책을 읽을 때 공감한 부분은 그런 것이다. 나의 부모가 가난했기 때문에 나에게 줄 수 있는 것을, 나는 줄 수가 없었다,던 대목. 각각의 것들에 소중한 의미를 부여하고 아끼던 삶에 대한 선망.

이 책을 읽으면서 분노한 부분은 이런 것이다. 간단하게 말하는 '아이들이 무슨 죄인가?'하는. 그런데, 계속 생각한다. 계속, 생각하게 된다. 나의 어머니는 나에게 '이뻐도 이쁘다는 말 아끼고, 아무리 좋은 거 해주고 싶어도 너무 티나지 않게, 남들처럼, 남들만큼만, 키우라'고 말했다. 내가 '아이들이 무슨 죄인가?'라고 이 책의 삶에 토를 달고 싶어하는 것은 나의 어머니가 나에게 한 그 가치들 때문이다. 나는 내 아이가 소중한 걸 소중하게 여길 줄 알기 원하지만, 너무 다른 사람과 다르게 키우고 싶지 않아서 갈등하는 것이다. 게다가, 나는 내내 '학교도 안 보내고, 집에서 장작이나 패게 하는 부모'가 고등교육을 받았다는 이유로 자신을 변명하고 있는 거라고 까지 분개했다.

그러나, 계속 생각하게 되었다. 이 책에서 가난한 삶을 부모는 '선택'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의 분노는 사그라졌다. 부모가 자신의 생활을 서울에서 유지할 수 있었다면, 선이골로 가지 않았을 것이다. 어차피 가난하자면, 시골에 가는 게 낫다. 서울에서, 지나치게 부유한 사람들 가운데서, 가난은 비참하지만 적당한 가운데서 가난은 참을 만하다. 아이들은 자신의 부모를 자신의 조건을 선택할 수 없다. 자신의 삶에 만족한 가족의 이야기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아이에게 '남들만큼'의 환경을 제공하는 것보다, 자신의 삶에 만족하며 그 하나하나에 감사하도록 하는 것이 훨씬 어려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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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끼리는 생각하지 마 - 미국 진보 세력은 왜 선거에서 패배하는가
조지 레이코프 지음, 유나영 옮김 / 삼인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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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가 '명품을 사 모으다가' 신용불량자가 된 사람에 분개하면서, 카드사나 정부 정책을 비난하는 대신 개개인의 무책임 무신경에 열을 낼 때, 이게 과연 바람직한 태도일까 의아해한다.

언제나 한나라당보다는 열린 우리당 후보를 찍고, 여기서도 민주노동당 후보가 있다면 고민하지 않을 텐데, 하면서도 가끔씩 신문이나 뉴스에 등장하는 민주노동당의 논리에 내가 저러한가, 갸우뚱하는 나의 태도를 조금이나마 설명할 수 있게 된다. 

이 책은 미국의 정치현실에서 왜 허구헌날  민주당은 깨지는가,를 고민하는 언어학자가 언어적 프레임이란 것으로 그 상황을 설명하는 책이다. 진보세력이 실수하는 것은 무엇인지, 거짓말이나 실질적 이해관계로 투표하는 대신, 자신의 프레임-그건 언어적 논리이기도 하고, 허구의 이미지에 맞춰진 나름의 어떤 그러니까 프레임-과 잘 맞는 쪽을 선택하는 애매한 유권자에게 접근하는 언어적 방식에 대한 설명서이다.

내가 지지한다고는 했지만 언제나 '왜 저렇게밖에 말할 수 없나' 화딱지가 나는 운동권 사투리를 듣는 나의 심사처럼, 이 책을 쓴 저자도 자신이 지지하는 진보세력에게 쌓인 불만을 자신의 학문적 연구를 토대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책은 현장 밀착형이고, 이야기는 '미국에 대하여만' 딱 들어맞는다. 자극적인 몇마디 말이면 충분히 요약이 되겠지만, 그래도 끝까지 읽게 된다.

작명으로 이미 판가름나는 정치적 주도권 싸움이 각각의 실례들로 흥미진진하다.

시작한 말로 끝내자면 나는 신용불량자가 되는 그러니까 가족의 병원비로 카드빚에 내몰린 사람이 더 많을 텐데도, '명품을 사 모으다가'에 집중하는 바람에 결국 애매한 입장으로 선회하는 것이다. 나에게 개개인은 책임감을 가진 개인이라서, 개인의 잘못을 국가가 책임질 필요는 없다는 프레임을 가지고 있고, 이런 나의 프레임 안에서 '명품을 사 모으다가'라는 개인은 벌받아 마땅한 사람이 되어 버린다. 그러나, 그러나, 현실에서 그런 사람은 얼마나 될까? 언론에 노출되는 개인인 나는, 그래서 쉽게 휘둘리고 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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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하던 새들도 지금은 사라지고 행복한책읽기 작가선집 2
케이트 윌헬름 지음, 정소연 옮김 / 행복한책읽기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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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참으로 편협한 인간인 게다. SF든 미스터리든, 스릴러든, 무언가 고정형이 있어서, 조금만 달라져도 거부하고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하는 생각은 SF는 어쩌면 사회학이로군이다. 사이언스 픽션이라는 그 자체의 정의보다, 지금까지 읽은 많은 SF들이 보여준 '기술의 미래에 대한 공포'보다도 더 강력하게.

르귄의 '빼앗긴 자들'을 읽고 '감성보다 이성'이라고 말한 것에도, 기존 SF에 대한 어떤 편견이 저항하게 만들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관계에 대한 첫번째 책에는 저항하지만, 두번 세번이 되자니, -생각해보니 테드 창의 '당신 인생의 이야기'도 어쩌면 관계에 대한 것이다- 아예 그 편협한 정의가 뒤집어져 버린다. 혹은 이것도 SF라는 것은 인정하고 넘어가는 게다.

제목으로 유추한 소설에 대한 얼개는 아마 '침묵의 봄'이었나보다. 기술에 대한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종류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기술이 무섭다기 보다, 다른 생각을 하게 된다.

물론 그런 미래는 무섭지만, 결말은 희망적이고, 떠오르는 질문은 '어떻게 그러한 미래를 피할까?'나 '기술의 진보가 언제나 최선은 아니야'가 아니라, '인간에게 인간다움이란 무엇일까'와 같은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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