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하고도 사소한 기적
아프리카 윤 지음, 이정경 옮김 / 파람북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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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news.nate.com/view/20221114n12846 

'넌 너무 뚱뚱해'란 말을 하고, 자신이 산 빵을 봉지째 빼앗아 반납하는 할머니에게 화를 내지 않고, '그럼 나는 무얼 먹어야 하나요?'라고 묻는 여자의 이야기다. 그래서 살도 빠지고, 결혼도 했고, 이제는 한국음식전도사가 되었다는 그런 기사. 

이 기사를 보고 궁금해서 마침 SAM(교보 이북 구독서비스)도 되길래 받아서 읽어보려고 했다. 끝까지 못 읽겠더라. 내가 왜 서양 사람들 책을 못 읽는지 떠올렸다. 

말이 너무 많다. 호들갑스럽다. 자기 확신이 넘친다. 

예전에 이승기가 어떤 예능에서 몇 년 후에 사막같은 데 가고 싶다고 하는데, 옆에서 혼자 가지는 않고 카메라랑 같이 갈 거 같다고 했더니, 그냥 혼자 가면 '아깝지 않냐'고 했던 거 같은 거다. 아무도 보지 않아도 할 수 있는 게 강한 거라고 생각하는 나는 이 책의 사람이 아무도 보지 않는다면 계속 할 수 없는 사람처럼 보였다.  

직업적인 캠페이너,라는데, 하, 나는 참. 

장거리를 뛰고, 블로그나 SNS에 전시하고, 그걸로 기부금을 모아서 에이즈퇴치기금 같은 데 전달한다는 저자가 의심스러운 거다. 유명인을 만나고, 아는 걸 전시하고, 자신에게 고마운 사람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열거하는 걸, 정치가 없는 공간에서, 종교적 선의를 고양시키는 방식의 활동들을 의심한다.

기사에서 내가 좋았던 부분은 저런 말을 듣고 화내기보다 개선점을 묻는 태도다. 지금 고양시키는 세태는 우선 저런 말을 해서는 안 되고, 저런 말을 듣고 참아서도 안 된다. 타인에 대한 관심을 배척하는-한국 아줌마의 오지랖은 욕지기밖에 되돌아올 게 없다- 세태다. 어쩌면 개인화되고 파편화된 서양에서 한국을 보고 그리워하는 것과 다르게, 가족적이고 지나치게 얽혀있는 한국에서 조금씩 밀어내는 감정이다. 그런데, 한국인이 한국문화에 경도되었다는 카메룬이 고향인 미국여성의 책을 읽고 있는 것은, 서양인이 쓴 한국요리책을 보는 것처럼 재미가 없다. 한국의 문화 안에 사는 사람이 서양인이 본 한국문화에 대한 책을 보는 것이 재미가 없는 거다. 기사가 아닌 책에서 드러나는 이야기는 자신의 직업, 배경, 같은 것들이고, 서양에서 고양된 태도들이다. 좋은 사람이고, 스스로의 삶을 건강하게 꾸리고 있을 테지만, 책은 읽기에 좋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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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생은 해피 어게인 자음과모음 청소년문학 95
이은용 외 지음 / 자음과모음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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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골라서 산 책이다. 골라놓고 읽지도 않길래 내가 읽어봤다. 읽었고, 읽히고 싶지 않다. 

N번째 삶이라는 주제로 청소년 대상으로 쓴 소설 모음이다. 

내가 싫어하는 세태의 어떤 면들이 모두 모여 있다. 

리셋버튼이 있으면 안 누를거야?라는 질문을 본 적이 있다. 누구라도 누를 거라면서 고통이 문제지, 죽는 게 무슨 문제냐고. 고통없이 죽을 수 있다면 누구라도 버튼을 누르지 않겠냐는 그 글을 읽을 때, 버튼을 누르는 자아가 아니라, 서슴없이 버튼을 누른다는 그 사람의 친구나 부모, 자녀나 동료에 이입해서 화가 났다. 삶과 죽음 가운데 관계의 그물들이 버튼을 누를 수 없게 한다.

 

N차 인생,이라는 이야기를 하면서, 무언가 의미있는 이야기를 '백만번 산 고양이'보다 더 잘 할 수 있을까. 

모든 이야기는 지금의 어떤 세태, 게임을 끝내듯이 죽음을 선택하는 세태(그 여름, 설아와 고양이)-반복되는 삶 가운데 리셋버튼을 누르는 소녀가 나온다. 리셋버튼을 누르지 않기로 하는 것은 설아와 고양이 덕분인데, 부모된 자로서 소녀의 부모에 이입한다, 게다가 그 리셋이 자신의 죽음만을 의미하지 않는 리셋이라서, 막 끝낸 육아서의 '스스로 전지전능하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라는 인상을 받는다-, 인간을 혐오하고 동물을 좋아하는 세태(저세상 탐정)-저승의 판사가 고양이다. 그 여름, 설아와 고양이, 나 북극곰의 사생활에도 그런 뉘앙스가 있다. 인간보다 고양이, 사람보다 돌고래나 북극곰-, 이성이나 이성애를 혐오하는 세태(강의대본)-이건 어린 아이나 청소년이 하는 어떤 말이나 태도를 인생 N차,야 할 때 그런 건가, 환생이라기보다 중학생 여자애가 인생 두 번째 산 사람처럼 기껏해야 스물 몇 먹은 남자 선생의 음흉함에 복수하는 이야기다. 화자의 관점이나 사건의 해결방식을 아이들에게 권할 수 없다. 나는 함정,을 좋아하지 않는다. 함정을 만들어놓고 함정에 빠졌다고 내 말이 맞지,라고 말하는 건 나쁘다고 생각한다.-, 좋은 것이라는 게 고정값이라고 여기는 어떤 세태(파란불이 켜지면)-끽해야 두 시간 뒤의 미래를 안다는 것이 언제나 좋은 선택을 할 수 있다고, 참 나-가 드러난다. 

이야기를 만드는 스스로의 전지전능함에 도취되어 트렌드를 조합하여 전시한다. 좋아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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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풍오장원 2022-11-02 08: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별족님의 글은 참 통렬합니다...^^

별족 2022-11-02 08:53   좋아요 0 | URL
좋은 성정이 아닌데, 고쳐질 거 같지가 않-_-;;;
 
[eBook] 영혼이 강한 아이로 키워라 - 대한민국 엄마 멘토 조선미 박사의 열린 부모특강
조선미 지음 / 쌤앤파커스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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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플에 육아 마니아가 되었다. '육아' 마니아라니, 부인하고 싶다. 

그런데, 읽고 있는 책이 육아서고, 그 전에 읽은 책이 육아서라서, 부인도 못하는 지경이다. 

육아'서'마니아,라고 해 주지, 싶다. 내가 그렇게 많이 읽는 건 아닌 거 같은데. 참. 


트라우마에 대해 말하는 것, 고통없는 삶이 가능한 듯한 어떤 말들과 같은 지금의 어떤 세태가 맘에 들지 않는 중에 유튜브 영상을 보고 골랐다. 


좋은 말들이 많지만, 관심은 논리로 설명하지 못하는 삶의 비밀들과, 부모의 권위에 대한 말들이다. 부모와 아이의 관계는 평등하지 않다. 가정 내 질서와 세상의 질서는 또 다르다. 미숙한 존재를 만들어, 세상에 내보내기 위해, 가족은 가정은 다른 원리로 작동하고, 그러면서도 다른 원리로 작동하는 세상을 준비시켜야 한다. 전적인 사랑만으로 작동하지 않고, 전적인 투쟁도 아니다. 부모가 균형을 잡지 못한다면 아이는 자랄 수 없다. 


이때 부모가 나서서 원하는 것을 들어주고 아이를 대신해 문제를 해결해주면 아이는 '스스로를 전지전능하다고 느끼는 미성숙한 상태'를 유지하게 된다. 이 순간 부모는 나와는 분리된 대상이 아니라 내 요구를 들어주고 대신해주는 도구로서 존재하게 된다.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다른 사람의 존재를 자각하며, 상호작용을 통해 소통하려고 노력하는 게 아니고 귀를 닫고 요구만 하는 일방적 관계가 형성되는 것이다. (87/280)


기본적 신뢰감의 형성이 곧 전적인 신뢰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에릭슨의 발달 첫 단계는 '기본적 신뢰감 형성'이 아니라 '기본적 신뢰:불신'으로 되어 있다. 신뢰감과 불신감의 비율이 적절하게 발달해야 한다는 것이지 추호의 의심없이 이 세상을 바라보고 믿으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건강한 발달은 균형감이다. (89/280)


아이에게 세상의 현상이나 판단의 근거를 설명해주는 것은 친절한 일이고, 합리적인 태도다. 그렇지만 논리를 제시하고 동의를 구하면서 '우리가 내린 결론'이라고 강조하면 아이는 자기 자신이 그런 결정을 내렸다고 착각하고, 자신에게 그런 능력이 있다고 믿게 된다. 인지적으로 미숙하고, 부모에게 전적으로 의존하는 어린아이는 부모의 결론을 그대로 수용하지만 지적 능력이 성장하고 자율성을 추구하는 시기에는 이런 방식이 독이 될 수도 있다.(99/280)


이 둘의 가장 큰 차이는 권위는 따르는 사람이 자발적으로 인정하는 영향력이며, 권위주의는 힘을 발휘하려는 사람이 권한을 활용해 일방적으로 휘두르는 영향력이라는 점이다. 

권위주의에 대한 강한 혐오와 반발심은 정당하고 필수적인 권위조차도 부정적인 의미로 치부해버리게 만든다. 부모에게 권위가 있어야 한다고 하면 바로 일방적이고 강압적인 부모의 상을 떠올리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100/280)


어려운 일을 피하지 않고 견뎌야 할 이유가 무엇인지 묻는 아이들에게 세상은 썩 괜찮은 대답을 갖고 있지 못하다. 말로 설명한다고 이해할 수 있는 일도 아니거니와 이해한다 해서 그대로 따른다는 보장이 없다. 

논리로 세상을 배운 아이들은 논리로 설명되지 않는 삶의 진실을 받아들이기 어렵다. 세상이 나를 움직이려면 근거를 대야만 한다는 태도를 배운 탓이다.(102/280)


해야 할 일의 당위성을 알려주고,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것은 세상에 대한 아이의 이해를 돕는다. 그렇지만 논리로 이해되지 않아도 해야 하는 일이 있음을 함께 알려주어야 한다. 심지어 논리에 어긋난다고 느낄지라도 해야 하는 일이 있음을 아이는 반드시 배워야 한다.(103/280)


우리는 서로를 비춰주는 거울이다. 내가 상대를 존중해주면 상대방도 존중으로 나를 대하고, 내 생각만을 내세우면 상대도 지지 않고 자기를 내세운다. 내가 세상을 향해 보낸 존중과 감사, 신뢰는 결국 나에게 돌아온다. 타인과 세상으로부터 받은 존중은 자아의 밑거름이 된다.(110/280)


부모의 거울은 아이의 모습과 세상의 모습을 균형있기 담아야 한다. 그래야 아이들은 자신에 대한 긍정적 밑그림과 세상에 대한 정확한 지도를 갖고, 세상을 항해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112/280)


선과 악의 흑백논리에서 다양성에 대한 수용으로의 성장은 부모와 아이의 상호작용에서 시작된다. 부모가 합리적으로 아이의 요구를 거절하는 것, 어쩔 수 없이 아이를 기다리게 하는 것은 부모에 대한 관점을 '전적으로 좋은 사람'에서 '대부분 좋지만 항상 좋지만은 않은 사람'으로 전환시켜준다. 요구를 거부당한 아이는 일시적으로 실망하고 좌절하고 분노를 느낄 수 있다. 그러나 부모가 아이의 좌절감을 수용하고, 합리적인 규칙을 제시하며, 일관성 있게 같은 원칙대로 아이를 대한다면 아이는 부모를 '나를 거절하는 나쁜 사람'이 아니라 '도움이 되는 경계를 제시하는 사람'으로서 재조명하게 될 것이다. (114/280)


부모는 주고, 자식은 받는 관계가 명백하기 때문에 필요한 것을 받으면서도 아이들은 당당하고, 원하는 것을 들어주지 않을 때조차도 받아내려고 한다.(229/280)


상처를 받은 것과 상처받은 사람이 되기로 선택한 것을 구별하지 않으면 세상은 온통 가시밭이고, 주변 사람들은 모두 날을 세우고 이빨을 드러내며 나에게 달려드는 것 같은 삶을 살 수밖에 없다. (264/280)


가족 내에서 분화를 이루지 못한 아이들은 세상에 나아가서도 생각과 감정을 구별하지 못해 어려움을 겪는다. 혼자 힘으로 모든 걸 해결해야 한다는 걸 받아들이지 못하고 버림받았다는 감정에 휩싸인다. 인정받지 못한다고 느낄 때 어떻게 해야 인정받을 수 있는지 고심하는 대신 세상이 불공평하다는 불만에 사로잡힌다. 실패의 나락으로 떨어질 때 내 책임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세상과 다른 사람들에게 원인을 돌리며 담을 쌓고 스스로를 고립시킨다. 다른 사람이 내 마음을 알아주지 않는다고 느낄 때 각자의 삶이 분리되어 있음을 깨닫는 게 아니라 세상의 냉정함과 무심함에 위축되고 우울해진다. (271/2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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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분히 좋은 엄마 - 정신분석가 도널드 위니코트의 육아 강연집
도널드 위니코트 지음, 김건종 옮김 / 펜연필독약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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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게 읽히는 책은 아니라, 오래 걸려서 읽었다. 대상은 아이를 키우는 부모고, 주제는 아이를 키우는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아이는 완벽한 부모가 아니라 충분히 좋은 바로 당신을 통해서 어른이 될 수 있다는 이야기이들이다. 격렬한 육아의 시기는 어느 정도 지나간, 나의 어머니의 어떤 태도들 가운데, 어머니의 태도를 연마한 엄마인 나는, 특정한 대상이 아닌 보편의 대중적 어머니들을 위한 라디오 방송에서 조심스럽게 말들을 고르는 이 학자의 말들이 한계가 많다는 생각을 하면서 읽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따뜻해서 포스트잇을 잔뜩 붙였다. 

말미에 스스로 라디오를 통한 대중교육이 가지는 한계를 언급한다. 

똑같은 아이도 없고, 똑같은 엄마도 없고, 똑같은 상황도 없다. 아이를 키우면서 만나는 그 모든 다른 상황 가운데서, 내가 내 자신으로 아이와 관계맺으면서 부모가 된다.  


동화가 없었다면 '사악한 새엄마'라는 관념 자체가 없었을 거라는 이야기를 간혹 듣습니다. 하지만 저는 절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동화나 무서운 만화가 이토록 보편적 공감을 얻는 것은 어른과 아이 모두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무언가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라고 보는 게 더 진실에 가까울 것입니다. 동화는 진실하고, 두렵고, 받아들일 수 없는 어떤 것을 포착합니다. 그렇습니다. 진실한 동시에 두렵고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을요. 인간 본성의 받아들일 수 없는 측면의 일부가 이렇듯 대중화된 신화 안에 결정으로 맺힙니다. 그렇다면 새엄마 신화 안엔 무엇이 결정으로 맺혀 있는 걸까요? 그것이 무엇이든 증오와 공포 뿐 아니라 사랑과도 연관되어 있을 것입니다-p25


이 첫번째 단계는 부모의 태도에 달려 있으며, 아빠는 이러한 태도를 구축하고 유지하는 데 참여합니다. 이후 두 단계에 대해서는 나중에 말씀드리겠습니다. 뒤의 두 단계는 언어와 연관되어 있지만 첫 단계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처음엔 엄마가, 그리고 곧 엄마와 아빠 둘이 예기치 못한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주시하는 것이 임무입니다. 부모는 조심성 있게 이 임무를 수행하는데, 주로 이는 부모의 몸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부모의 행동 양식 전체에 정신적 태도가 반영될 때 아기는 안전함을 느끼고 엄마의 자신감을 젖을 삼키듯 흡수합니다. 이 모든 과정 내내 부모는 "안 돼"라고 말하는데, 그들이 '안 돼"라고 말하는 대상은 세상입니다. 부모는 "안 돼요. 저리 가세요. 우리에게서 떨어지세요. 우리는 무언가를 보살피고 있고, 어떤 것도 벽을 넘어 침입하게 내버려 두지 않을 거예요"라고 말합니다. 만약 부모가 겁을 먹고 두려워하면 뭔가가 벽을 넘어 침입하고, 아기는 상처를 입습니다. 마치 끔찍한 소음이 벽을 뚫고 들어와 아기에게 견딜 수 없이 날카로운 감각을 일으키는 것처럼요. 공습이 있었을 때 아기들은 폭탄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엄마가 두려워하기 시작하면 즉시 거기에 영향을 받았습니다. -p70~71


엄마 아빠는 차츰 아이를 현실에, 또 현실을 아이에게 소개합니다. 그 방법 중 하나는 금지입니다. "안 돼"라고 말하는 것이 '방법 중 하나'라고 말씀드려서 여러분은 반가우시겠죠? 금지는 두 가지 방법 중 하나입니다. "안 돼"라고 말하는 것의 기초는 "그래"입니다. "안 돼"에 기반해서 길러지는 아이들이 간혹 있습니다. 그 엄마는 아이에게 수많은 위험 상황을 가르치는 것만이 안전을 위한 길이라고 느끼는 거겠죠. 그러나 그런 식으로 세상을 알게 된다는 것은 슬픈 일입니다. 대다수 아이들은 다른 방법을 씁니다. 유아의 세계는 확장하는데 이는 대상 자체의 숫자가 증가할 뿐 아니라 엄마가 "그래"라고 말할 수 있는 대상들이 늘어나는 것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유아의 발달은 엄마가 금지하는 것보다는 엄마가 허용하는 것과 더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래"는 배경을 이루고, 그 위에 "안 돼"가 추가됩니다. "그래"만으로 해야 하는 것들을 다 이룰 수는 없습니다. 아이가 주로 어떤 노선을 따라서 발달하느냐의 문제인 거죠. 아기는 아주 어릴 때부터 의심이 많을 수도 있습니다. 세상에는 별의별 아기들이 다 있으니까요. 그러나 대부분은 적어도 잠깐 동안은 엄마를 신뢰할 수 있습니다. 대체적으로 아기들은 엄마가 허락한 물건이나 음식을 향해 손을 뻗습니다. 사실 첫 번째 단계는 하나의 커다란 "그래"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요? 엄마가 결코 아기를 실망시키지 않기 때문에 "그래"인 것입니다. 엄마는 전체 과업을 큰 실수 없이 해 나갑니다. 이는 아주 커다란 무언의 "그래"이며, 이는 세상에서 유아의 삶에 확고한 기반이 됩니다.-p72~73


하지만 어린 아이들이 "안 돼"라는 말을 듣는 걸 좋아한다는 사실을 상기해본다면 어느 정도 납득할 수 있을 겁니다. 아이들이 항상 부드러운 물건만 가지고 놀고 싶어 하는 것은 아닙니다. 돌멩이와 막대기와 단단한 마룻바닥도 좋아합니다. 아이들은 안기는 것만큼이나 저리 가라는 말을 듣는 것도 좋아합니다. -p75


제가 계속 강조하고 싶은 것은, 어린아이들의 이러한 발달은 부모가 제공할 수 있는 무엇이 없다면 충분히 만족스럽게 일어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바로 부모와의 생생한 관계인데요. 그 안에서 아이는 살아 있는 신뢰를 발견할 수 있으며, 이는 부모가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느냐 여부에 달려 있습니다. -p105


다들 아시겠지만, 엄청난 감정들이 거기 관여돼 있고, 사실 어린아이들은 우리보다 결코 더 적게 느끼지 않습니다. 어쩌면 우리보다 더 많이 느끼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우리 어른이 초기 유년기에 속하는 강렬한 경험들에 계속 접촉할 수 있는 방법을 발견한다면 운이 좋은 거겠죠. 어린아이들은 최대치의 강도로 세상을 느낄 뿐 아니라, 자신을 괴롭히는 실제 사물로부터 주의를 돌릴 수도 없습니다. 아이들은 지나치게 고통스러운 감정들을 다루고 밀쳐내는 개인적인 방법을 구축할 시간이 아직 부족합니다. 그래서 아이들은 비명을 지릅니다. 일상에서 벗어난 이 같은 일이 일어날 때 그걸 예상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면 이는 아이에게 아주 큰 차이를 만듭니다.-p109 


질투가 많은 사람들을 보면, 어린 시절에 한 번쯤은 질투를 할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불운하게도 그들은 질투를 느끼고 조절할 수도 있었던 시기에 충분히 화내고. 질투하고, 공격성을 드러낼 뚜렷한 기회를 갖지 못했습니다. 만약 그런 기회가 있었다면 대부분의 아이들이 그렇듯 그들도 질투하는 시기를 지나 거기서 빠져나올 수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질투가 마음 속으로 숨어 들어가고 질투의 진짜 이유가 사라져버렸기 때문에, 질투를 하는 잘못된 이유가 끊임없이 전면으로 나서고 현재 이 질투가 정당하다고 자꾸 주장하게 됩니다. 이러한 왜곡을 방지하는 방법은 아이를 어릴 때부터 충분히 잘 보살펴 적절한 순간에 질투할 수 있게 해주는 것입니다. 건강하다면 질투는 경쟁심과 야망으로 바뀝니다. -p112~113


엄마가 되는 일이 왜 짜증을 일으키는지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물으실 수도 있을 텐데요. 고통스러운 시기에 그 고통을 표현할 수 있다면, 이는 엄마들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억눌린 분노는 그 분노 뒤에 존재하는 사랑을 손상시킵니다. 우리가 욕을 하는 이유가 여기 있는 것 같습니다. 적절한 순간에 분노를 말로 모아 표현하고 나면, 하던 일을 새롭게 다시 이어갈 수 있습니다. 일상에서 저는 엄마들이 자신의 쓰라린 분노에 가 닿을 수 있을 때 위로받는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뭐, 대부분의 엄마들은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만, 정말 도움이 필요한 분들을 위해서 저는 엄마가 아이를 미워하는 수많은 이유의 목록을 적어본 적이 있습니다. 잘 알고 계시겠지만 저는 아이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엄마들, 그러면서도 사랑 이외의 다른 감정을 들여다보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엄마들에 대해서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p130 ~p131


아이들이 성장할 수 있는 건 환경 덕분입니다. 적절하고 신뢰할 수 있는 환경이 없다면 아이의 개인적 성장은 일어날 수 없으며, 일어나더라도 왜곡될 것입니다. 그리고 완전히 똑같은 아이는 없기 때문에 우리는 아이 각각의 요구에 구체적으로 부응해야 합니다. 이는 누구든 아이를 돌보는 사람은 그 아이를 알아야 하며, 돌봄은 배운 것을 기계적으로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와의 생생한 관계에 기반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이 곁에서 든든하게 함께하고, 일관되게 나 자신으로 존재함으로써 우리는 경직되지 않은 생생하고 인간적인 안정감을 아이에게 줄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아이는 안전하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그 관계 속의 안전감이 아이를 성정시키며, 아이는 안전감을 흡수하고 모방할 수 있습니다.- p154~155


건강한 아이들은 사람들이 계속 통제해주기를 바랍니다. 단 그 규율은 아이가 사랑하고, 증오하고, 거부하고, 의지할 수 있는 사람에게서 제공되어야 합니다. 물리적 통제는 소용이 없으며, 두려움이 순응을 위한 좋은 동기가 될 수도 없습니다. 진정한 성장을 위해 필요한 여유 공간을 만들어주는 것은 늘 사람들 사이의 살아 있는 관계입니다. 진정한 성장은 아이와 청소년들을 어른스러운 책임감으로 이끌어줍니다. 특히 새로운 세대의 어린아이들에게 안전한 환경을 제공하기 위한 책임감 말입니다. -p158~159


저는 그 두려움이 흔할 뿐 아니라 오히려 정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세상엔 참으로 다양한 사람들이 있고, 있어야 하며, 그렇다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물론 아기를 갖는 것과 자기 삶의 다른 부분을 상당한 정도로 분리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게 꼭 정상이라고 말하기는 힘들지요. 사람들 대부분은 아이가 생기면 아이를 갖는 일에 대한 모든 환상들이 여기 며여듭니다. 어린 시절 엄마아빠 놀이를 할 때 떠올렸던 환상과 관념 속의 환상들 모두요. 사랑과 증오 그리고 공격성이 다정함과 다양한 비율로 섞이고 또 환상 속의 그 모든 것들과 뒤엉키지요.- p171


사실 아이의 타고난 도덕성은 날것의 공포로부터 발달하기 시작하기 때문에 엄마나 아빠의 도덕성보다 훨씬 더 강렬합니다. 아이에게는 오로지 진실되고 진짜인 것만이 중요합니다. 아이가 실제 감사함을 느껴서가 아니라 그저 예의로 감사하다고 말하게 하기 위해선 우리가 훨씬 더 많은 공을 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p187~188


중요한 것은 울타리 밖으로 나오는 일이 아주 흥미롭고도 두려운 일이라는 것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되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 또 삶이라는 것이 울타리 밖으로 나와서 새로운 위험을 감수하고 새롭고 설레는 도전을 맞이하는 일의 긴 연속이라는 사실은 아이 입장에서 끔찍하게 두려운 일입니다. -p199


그러나 아이가 움츠러들 때, 완벽하게 좋은 엄마인 여러분에게 문제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여러분은 제가 대충 이야기하고 넘어가기를 원하지는 않으실 텐데요.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이런 것입니다. 어떤 엄마들은 두 층위에서 행동합니다. 한 층위에서(겉층이라고 부르겠습니다) 엄마들은 단 한 가지를 바랍니다. 아이가 성장하여 울타리를 벗어나고, 학교에 가고, 세상과 마주하기를 바라죠. 또 다른 층위에서, 아마 더 깊은 층위일 텐데, 실제 의식하진 못하지만 엄마들은 아이를 놓아줄 생각을 도저히 할 수가 없습니다. 논리가 그리 통하지 않는 그 깊은 층위에서 엄마는 이 가장 소중한 대상을, 그리고 엄마라는 역할을 포기할 수가 없습니다. 이런 엄마는 아이가 자라서 엄마로부터 분리되어 독립적이고 반항적인 걸 즐길 때보다, 아이가 자신에게 의지할 때 더 쉽게 스스로를 엄마라고 느낍니다. 아이는 이를 아주 쉽게 감지합니다. -p199~200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알고 있으면 이러한 일들은 그다지 어렵지 않습니다. 성장이라는 것은 아이들에게 항상 꿀처럼 달콤하지만은 않습니다. 그리고 엄마에게도 이는 종종 씁쓸한 일입니다.-p206


모든 것을 책에서 찾아보거나 방송으로 들어야 한다면, 옳은 일을 할 때조차 항상 너무 늦을 것입니다. 올바른 행동은 그 순간 즉각적으로 행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적절한 순간에 행동하기 위해서 행동은 직관적으로, 흔히 말하듯 본능적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 이후에야 문제에 대해 마음 써서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이고, 이때 우리가 할 일은 이들이 생각할 수 있도록 돕는 것입니다. 우리는 부모들이 어떤 문제에 직면했고, 그래서 어떻게 행동했고, 그로부터 어떤 효과를 기대하는지 이야기 나눌 수 있습니다. 이는 그들에게 무슨 행동을 해야 한다고 이야기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p232~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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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우 2022-10-16 08:4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엄마가 되는 건 참 쉽지 않은 거 같습니다. 한 생명을 책임지는 일이라~~ 기르는 일도 힘들지만 때가 이르렀을 때 잘 놓아주는 일은 더 힘든 거 같아요. 내 아이가 아니라 세상을 혼자 살아 갈 독립 된 인격이란 것을 받아들여야 해요. 내가 충분히 좋은 엄마인지는 늘 숙제로군요.

별족 2022-10-19 13:37   좋아요 2 | URL
아이를 키울 때 자기자신의 양가감정을 알아차리는 게 중요한 거 같습니다. 자기자신의 양가감정을 알아차리지 못하면, 뭔가 가혹하게 대처하는 거 같거든요.

추풍오장원 2022-10-19 07: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리나라에서 요즘 나오는 아이들에 대한 책보다 훨씬 나은 책 같습니다...

별족 2022-10-19 13:39   좋아요 0 | URL
육아서,는 가끔 읽는 거라서^^, 뭔가 나쁜 인상이었다고 맞장구를 쳐드릴 기억이 없-_-:;;;
 
[eBook] 친밀한 이방인
정한아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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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안나는 안나가 되었나, 생각한다. 안나는 늙은 부모가 예측하지 못한 순간에 태어난 예쁜 여자아이였고, 언제나 원하는 걸 가질 수 있는 귀한 아이였다. 안나의 아버지는 지나치게 아이를 귀히 여겼다. 안나의 어머니는 무지하고, 무력하게 묘사된다. 벙어리에 발달장애?로 묘사되는 어머니는 안나를 임신했을 때조차 안나의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하다가 어느 순간 벼락치듯 출산한다. 책 속 묘사에서 어머니는 경제적으로 아버지에 종속되었고, 어떤 면에서도 안나에게 영향력이 없는 듯 하다. 안나를 돌볼 힘이 부족했던가. 부모의 돌봄 가운데 자라서, 세상밖으로 나아갔을 때 안나의 욕망들은 제어되지 않았고, 안나는 원하는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는 가운데 자라서, 원하는 모든 것을 얻을 수 없는 상황에서 거짓을 택한다. 작은 거짓이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걸, 방치한다. 어린 안나의 모든 것이 가능하게 했던 아버지가 죽고 어머니가 남자, 안나는 계속 거짓을 선택하고 그 삶을 살아가다가 이야기 속에서 사라진다. 이야기의 결말에서 나는 과연 안나는 존재했을까 의심한다.  

수지가 주연한 안나,의 원작소설이라 궁금해서 받아 읽었다. 소설가의 추적 가운데, 안나의 삶은 소설적이고 이야기는 빠르게 읽힌다. 그런데, 나는, 안나의 이야기에 공감하지는 못한다. 신기하고 재미있는 이야기에 호응하는 정도고 반면교사처럼 내 앞에 있다. 게다가 난 부모라서, 모든 게 가능하지 않다는 걸 아이에게 어떻게 가르칠지 생각한다. 빈부의 차이를 그 가운데 너무 비교하면서 열패감에 빠지지 않고, 어느 정도 받아들이도록 어떻게 가르칠 수 있을 지 생각한다. 내 아이가 비교 가운데, 스스로의 중심을 툭 놓치기를 원하지 않는다. 스스로의 단단한 중심이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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