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영리한 아이가 위험하다
에일린 케네디 무어 외 지음, 박미경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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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도 안 한 친구가 권했던가, 옛날 단정한 소년이 응시하는 파란 표지의 이북을 가지고 있었다. 다시 생각나서 봤는데, 이북 표지가 바뀌어 있다. 어떤 시스템인 거지. 궁금하네. 

처음 읽었을 때 그렇게 좋지는 않았다. 다시 읽으면서 왜 좋지 않았을까, 생각했는데, 모든 육아서가 가지는 함정, 서양이라고 해도 아이를 좋은 대학에 보내고 싶어서 학습을 도와주는 방식에 대한 이야기들이 한가득이라서 그랬나보다. 아니면, 나에게도 없는 능력을 키워주기 위해 아이에게 어떻게 하라는 그 조언들이 내 자신에 대해 반문하게 만들어서 껄끄러웠던 건지도 모르겠다. 사춘기 전에 필요하다는 그 모든 태도들,이 나에게 있는지 계속 반문하게 만든다. 결국 나에게 없다는 걸 깨닫고, 나에게 없는 걸 어찌 가르쳐야 하나, 싶었던 거다. 

부모의 열망에 부응하기 위한 저자의 어떤 태도,을 보아넘기기로 하고 다시 읽으니 저자가 하고 싶은 말들이 조금 더 와 닿았다. 많은 육아서가 그러하듯이, 부모의 변화가 필요하다는 이야기다. 추천의 말처럼 부모의 일은 '기다리는 일'이고,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는 일'이다. 

아이의 성취-대개는 학업적인-에 불만을 참을 수 없을 때라면, 동창회라도 나가 보라는 조언은 귀엽다. '보세요, 부모님, 학교에서 성적이 별로였던 당신의 친구가 저기 활짝 웃는 얼굴로 멋지게 나이들었잖아요. 지금 시험문제 몇 개 틀렸다고 그렇게 아이를 쥐잡듯 잡을 일이 아니예요.' 읽고 있는 독자에게 조심스러울 수 밖에 없는 말들을 전하기 위해 애쓰는 저자의 마음이 그러면서 독자의 바보같은 바람을 자신의 책이 들어줄 것처럼 묘사하는 태도가 책 속에 가득하다. 

아이가 자신의 흥미를 따라 걸어갈 수 있도록, 부모는 조금 멀찍이 서서 보아줄 수 있다. 말이 아니라, 부모가 보여주는 행동과 태도로 원하는 바를 설명할 수 있다. 그 가운데, 아이는 자신의 삶을 살아낼 수 있다. 해야만 하는 일을 좀 더 우호적인 태도로 감당하는 부모의 모습이 필요하다는 말은, 숙제를 대하는 아이와, 청소와 빨래와 식사준비를 대하는 내가 얼마나 가까운지 깨닫게 한다. 살아가는 중에 싫어도 어쩔 수 없이 하게 될 일,들을 아이가 어떻게 대하길 바라는지, 나는 어떤 모습을 보여주고는 있는지 모르겠다. 

기쁨을 찾으려면 먼저 마음을 열어야 한다. 100퍼센트 완벽하게 긍정적인 경험은 거의 없다. 모든 게 완벽해야 행복할 수 있다고 믿는다면 확실히 불행하게 살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즐겁게 살려면 삶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어야 한다. 냉담하게 트집만 잡고 남을 책망해서는 절대로 즐겁게 살 수 없다. - P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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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마 탄 왕자들은 왜 그렇게 떠돌아다닐까 - 명작동화 속에 숨어 있는 반전의 세계사
박신영 지음 / 바틀비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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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게 읽었다. 그렇지만, 동양인 여성인 내가 서양인으로 동기화되어야 더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이야기 속에 드러나는 서양 중세와 근세 배경들을 설명하면서, 저자도 인식하고 있는 그 한계들을 매번 상기시킬 수 없어서 중간 중간 계속 버퍼링이 생긴다. 늑대에게 먹히는 빨간모자 이야기에서 달과 늑대인간, 마녀로 추방당한 노파에 대한 이야기는, 동양의 문화적 배경가운데 생소하기 때문에 들어야만 하는 이야기지만, 그걸 그대로 '문화'였다고 받아들이는 것은 서구 편향되는 것이다. 토막토막 주워들은 이야기도 많아서 처음부터 끝까지 후닥닥 읽었다고는 못한다. 기독교라는 편협한 종교로 봉합된 전쟁의 역사,인 서구문명의 이야기들은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이야기같아서 경계하는 마음도 생긴다. 양과 음의 위계적 우열이 없는 동양인들이 이해할 수 없던 서양 이야기 속의 서양사, 심정적 배경들이 드러난다. 

나는 이야기의 원형, 시대를 지나서, 지역을 가로질러서 살아남은 것들, 살아남은 이유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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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먼스플레인 - 모두가 평등하고 행복한 올바른 젠더의식을 위해
이선옥 지음, 김용민.황현희 도움 / 필로소픽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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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그래도 호응이 좋았던 글(https://blog.aladin.co.kr/hahayo/10914180)에서 나는 '애초에 공부가 필요한 사람'이라는 댓을 받았다. 이미 나는 알라딘에서 팍 찍혔고, 이제 점점 페미니즘에서 멀어지는 중이라는 자각도 있고, 외로운 와중에-저기서는 페미니스트,라고 했다가 공격당하고, 여기서는 페미니스트가 아니라고 공격당하고- 다들 아니라는데 내가 나를 정의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어, 라고 이제 더 이상 정의에 연연하지 않을 마음까지 먹은 차에 읽은 책이다.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합니다,(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74920380)가 그저 다 옳은 말이라 반박할 수 없는 것처럼, 우먼스플레인,에서 말하는 것들도 어쩌면 새롭지 않다. 오래 걸려 합의된 근대의 가치들, 국가와 개인의 긴장관계에서 지켜져야 하는 것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러면서 지금 여기에서 페미니스트,들이 주장하는 많은 것들이 그런 오래된 가치들을 훼손한다고 말한다. 반박할 수가 없다. 

선언적으로 이루어지는 여성주의의 언설들이 제도가 되려고 하고, 그 과정에서 특정 성에 편향하도록 제도화하려는 시도가 된다. 예를 들어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라는 언설은 캠페인으로 각성을 가져오지만, 제도로 들어오면서는 국가가 개인의 사적 생활에 개입하는 범위를 무한정 확장시키는 중이다. 그걸 누가 동의할 수 있을까. 페미니스트라는 그룹을 이미 대표하고 있는 극단적인 페미니스트들의 주장이 동의할 수 있는 공통의 가치들로 반박당한다. 약하기 때문에 권력을 원하고, 그 권력이 자신의 편이기를 주장하는 지금의 페미니스트들이 무섭다고 생각하는, 거부당한 페미니스트인 나도 동의할 수 있다. 


유튜브에는 계속 새로운 이야기들이 올라오는데, 나는 유튜브를 보는 사람이 아니고 책을 보는 사람이라서 책을 읽고 작가의 홈페이지(http://leesunok.com/)에 가서는 구독신청도 한다. 드문드문 찾아보는 유튜브 영상에서 작가는 '자신이 페미니스트라고 생각하던 때도 있었다'고도 말한다. 작가는 분명히 이제는 아니라고 말한다. 페미니스트 연하는 젊은 여성들의 한마디 한마디에 반박하고 싸우고 싶은 지금의 나도 '이제는 아니라'고 말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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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9-09-01 08:5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제가 남자라서 페미니스트가 될 수 없다고 들은 적이 있고, 페미니즘 이론을 비판하거나 의문을 제기하면 ‘남자‘라서 공부가 부족하다고 들은 적도 있어요.

요즘 제가 교차성 페미니즘을 독서모임 멤버들(페미니스트)과 함께 공부하고 있는데요, 워마드로 보이는 트위터리안이 우리 멤버들을 공개적으로 비난했어요. 그 사람 말로는 우리 멤버들이 교차성 이론을 래디컬 페미니즘 계보에 끼워 넣으려는 시도를 한다네요. 그런 시도를 저도 그렇고, 멤버들은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는데 말이죠. 그 사람이 우리 멤버를 단정적으로 판단하면서 래디컬 페미니즘 계보를 언급하는 발언 형식이 마치 맨스플레인을 보는 것 같았어요.

별족 2019-09-02 06:33   좋아요 2 | URL
페미니즘에는 정말 다양한 것들이 있는데, 지금 공론의 장에서 살아남은 것들이 묘하게 이상한 것들만 남은 거 같아요.
 
시사IN 제624호 : 2019.09.03
시사IN 편집국 지음 / 참언론(잡지)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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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호 불편할 준비,의 제목은 '범인은 왜 항상 남자인가'이다. 

지면으로 나온 글이고, 나는 독자라 그 위계성 가운데 나는, 세상 의미없는 말이라는 생각이 드는 내가 이상한가, 질문한다. 우먼스플레인,에서 극단적인 페미니스트,들만큼 비난받는 존재는 극단적인 발언들에 지면을 내어주는 진보,연하는 언론들이다. 


나는 내가 페미니스트라고 생각했었다. 지금은 모르겠다.

나는, 미친 놈을 막을 방법은 없다고 생각한다. 

할 수 있는 것은, 너도 살아야 하고, 나도 살아야 하니, 우리 무얼 해야 할까,다.


'범인은 왜 항상 남자인가'는 남성일반을 범죄자화시키는 말이다. 

글쓴이는 개빈 뉴섬이라는 캘리포니아 주지사가 총기난사사건에 대해 한 발언을 인용했을 뿐이지만, 그게 의미있고 중요한 말이라고 스스로 생각했으니 가져왔을 것이고, 글이 되었을 것이다. 그 질문이 나오는 맥락과 그 질문을 다시 하는 사이에는 서양과 동양이라는 문화적 차이가 있다. 

나는 동양의 철학이 해온 일이, 문화를 구성한 것들이 폭력을 억제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서양의 문명에게 동양은 그대로 '여성'이거나 '자연'이어서 참혹하게 정복당한 거라고도 생각한다.-다음 펀게시판을 보다가 굉장히 보수적인 미국의 시골마을에서 케이팝을 듣는 소녀들이 '아시안 페티쉬'냐고 질문받는다는 짤을 보았다- 서양의 페미니즘 서적에서 드러나는 울분-학문이 여성을 배제한다,라던지, 자연과 여성을 묶어서 배척한다,라던지, 이분법적이고 상호대립하는 은유들이 서양의 학문적 전통 안에 있다-은 서양의 전통 안에서 유효하다. 어쩌면 급격한 근대화로 대학교육까지 학교 안에서 서양식 교육을 받은 나에게도 있었기 때문에 스무살의 나는 페미니스트임을 스스로 확신했을 것이다. 지금의 나는, 이렇게 확 트인 지구적 공론의 장에서 지역적 특수성을 배제하고 그대로 말을 따서 옮기는 것이 무가치하다고 생각한다. 


'친구로 대하면 친구가 되고, 적으로 대하면 적이 된다'는 동양고전의 명구(https://shb.skku.edu/ygmh/menu4/sub_04_01.jsp?mode=view&article_no=3255614&board_wrapper=%2Fygmh%2Fmenu4%2Fsub_04_01.jsp&pager.offset=0&board_no=63) 가운데, '범인은 왜 항상 남자인가'가 해결의 실마리가 될 수 없다. 

관계 가운데 기대하는 바가 결국 상대에게 반영된다. 남자던 여자던 사람이고, 사람으로 대해야 사람 노릇을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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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래가 그랬어 189호
고래가그랬어 편집부 지음 / 고래가그랬어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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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생이 조카를 위해 정기구독해주는데, 나만 읽고 있다. 

가족호칭을 싫어하는 나는, 이모나 삼촌으로 자신을 지칭하며 어린이를 대상으로 말하는 어른들의 글쓰기에 삐딱하고, 이미 알지만 살면서 더 복잡해서 어려운 문제들이 단순화된 글들이 또 그렇게 삐딱한 채로 읽고 있었다. 

이번 호 '고래가 그랬어'에서 좋았던 글은, '운동할 팔자'라는 글이었다. 트레이너인 삼촌이 자신의 과오에 대해 반성하는 글이다. 언제나 옳음을 주장하는 글들 가운데 반짝반짝 빛이 났다. 

어머니의 생신에 헬스장 이용권을 끊어드렸다가 불같이 화를 내시는 어머니를 마주한 아들이었던 거다. 

'지금껏 헬스장에 단 한 번도 가본 적 업지만, 일주일 이상 병원 신세를 질만큼 건강이 안 좋았던 적이 없었다고 하시면서, 식당에서 하루 열 시간 뼈 빠지게 일하는 사람에게 운동까지 시켜서 쓰러지게 만들 셈이냐고, 당장 회원권을 환불하라고 다그쳤어요. 그리고 한 마디 더 하셨어요. 운동은 팔자 좋은 사람들이나 하는 거라고, 나는 운동할 팔자가 아니라고요. 엄마는 지금도 헬스장은커녕 뒷동산도 한번 오르지 않으세요. 병원에 입원할 일도 역시 없고요.' 

이런 글을 쓰는 건 부끄럽다. 어머니의 삶을 모르는 자신이 부끄럽고, 가끔 나이들어 보호자임을 자처하는 자식들에게 일하는 부모는 또 부끄러울 수도 있다. 그렇지만, 그러지 않았다. 부끄러워 하고 반성한다. 

'그러니 다짜고짜 왜 운동을 하지 않느냐고, 건강에 좋으니까 무조건 하라고 말하기 보다는, 어떤 이유로 운동을 하지 않는 건지 먼저 물어보기로 해요. 어쩌면, 이런 대화를 나누는 것이 직접 몸을 움직여 운동하는 것만큼 건강에 이로울 수도 있어요.'라고 맺는다. 계급의 문제나, 빈부의 문제로 가지도 않는다. 그저 좀 더 대화하라고, 귀 기울여 타인의 삶에 관심을 가지는 게, 내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그 무엇보다 더 중요하다고 말해준다. 

나는 운동을 하기 위해 헬스장에 가는 게 한심하다고 생각한다. 촌에서 자라서 그런 걸 수도 있다. 몸을 써야 하는 농부의 삶을 보아왔기 때문에, 끊임없는 움직임으로 이어지는 삶을 보아왔기 때문에 차로 이동해서 헬스장에서 뛰는 삶을 이해하지 못한다. 걷는 걸 부끄러워하는 걸 또 이해하지 못한다. 그렇지만, 그저 나름의 이유가 있겠지, 생각하고 만다. 나와 다른 사람이니까. 

나는 멀미를 했었다. 아마도 그래서? 나는 여행을 즐기지 않는다. 선후는 바뀌겠지만, 비행기는 이산화탄소 배출이 많고, 짧은 이방인의 삶 사이를 건너뛰는 게 나의 진지한 깊은 삶을 훼손한다는 그럴 듯한 변명도 준비는 해 두었다. 

모두 각자의 사정이 있다. 

강경한 원칙 따위는 자신에게만 유효하다. 

다른 사람에게 할 수 있는 것은 진지하게 묻는 것, 그리고 듣는 것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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