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널을 돌리다가, 영화당( https://www.youtube.com/watch?v=LWBM33mmx0c )을 봤다. '경계선'과 '포제서'라는 두 편의 영화를 소개해주고 있었는데, 나는 '경계선'을 소개할 때만 봤다. 보면서, 거슬리는 부분이 계속 생겼다. 인간이 아닌 트롤, 인간과 동물사이의 존재, 동물과 인간 사이의 존재인 트롤, 들로 계속되는 묘사가 거슬렸다. 

좋아해서 아무 말도 못 쓴 책 중에 하나인 산해경에서 사람의 범주들에 놀랐던 적이 있다. 인간,이라고 하지는 않지만, 이런 식 '이 곳 사람들을 보면 얼굴은 사람얼굴과 비슷하지만 새부리가 달려 있어 고기를 잡기에 좋다'-환두국 사람-, '이 곳 사람은 피부가 숯처럼 까맣고 장생불사한다'- 불사민국 사람-, '이 나라 사람들은 모두 이상하게 생겨서 몸은 하나인데 머리가 셋이나 달려있다.'-삼수국 사람-, '삼신국 사람은 머리가 하나에 몸통이 셋 달려 있다', '일비국 사람은 팔이 하나뿐이고 눈도 하나에 콧구멍도 하나다.' '반체국 사람은 비록 팔은 하나지만 2명이 몸을 나란히 붙이면 비목어와 비익조처럼 함께 걸을 수 있다'.... 산해경을 읽고 있을 때, 이비에스 지식채널 e- 이상한 쇼 (https://www.youtube.com/watch?v=iG-r37qH4cI - 가슴과 엉덩이가 큰 아프리카 부족의 여인이 프랑스의 쇼에서 전시되다가 사창가를 거쳐 해부되어 126년 만에 고국에 돌아가는 슬픈 서사가 있다)를 봤기 때문에 그 대비가 더 극명했던 걸 수도 있다. 

아이가 '인간도 동물이냐?'고 물으면 나는 '동은 움직일 동'이거든, 인간도 움직이니까 당연히 동물이지,라고도 대답할 거다. 모순을 가지고 있어서 과학적 발달을 더디게 했다는 동양의 한자문화권 안에 사는 나는, 서구인이 언어가 가지는 한계 때문에 human과 animal을 구분해내려고 지금도 노력하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짧은 영화 클립 안에 트롤은 왜 인간이 아닌가? 왜 살아있는 벌레를 먹어서? 얼굴이 못 생겨서? 후각이 예민해서? 동물과 교감해서? 도대체 왜? 계속 묻는 거지. 산해경 속에서 머리가 셋이어도, 몸통이 셋이어도 팔 하나에 눈 하나에 콧구멍이 하나여도 사람이라고 되어있던데, 도대체, 서양사람들은 저런 이유로 인간이 아니라고 하는 거야? 생각하는 거다. 

human과 animal 사이에 ape가 있었다가-지식채널 e 이상한 쇼,에서 서구인들은 그 여인을 진화한 유인원이라고 보고, 인간과 동물의 경계를 찾기 위해 해부했다고 한다-, 이제 트롤이란 걸 개발했나보네,라고 생각했다. 경계에 대해 질문하는 좋은 영화라는 소개가 무색하게도 나는, 전형적인 서구인의 태도 안에서 만들어진 영화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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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1-05-14 15: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서구인들의 기본 인식체계가 일단 분류하는데서부터 시작되는거 같아요. 동양적 세계관과는 차이가 많이 나죠. 움직이는건 다 동물이니 사람도 동물이라고 아이와 얘기하는 모습에서 아 그렇구나싶기도 하네요. 글 읽으면서 동의할 부분이 많아 잠시 인사하고 갑니다. ^^
 

이제 현대인은 자라지 않기로 결심한 건가.

서울우유 광고를 놀라면서 본다.

https://www.youtube.com/watch?v=BZug213xufI

링크를 찾아 유튜브를 검색했더니 댓글은 사용중지되어 있다. 


젊은 부부를 아이가 깨운다. 명랑하게 깬 아이는 아직 잠에서 깨지 못하는 부모를 깨운다. '일어나! 나 학교 가야지'라며 부모를 깨운 아이는 명랑하게 웃으며 우유를 내밀고, 셋은 함께 집을 나선다. 짧은 티비광고가 아니라, 30초짜리 풀버전에 부모는 모두 출근을 한다.

나는 출근을 해야 하는 부모가 아이가 깨울 때까지 자고, 아이가 건네는 우유를 마시는 데 놀란다. 아이가 건네는 우유를 마시면서 아이에게 고맙다고 가볍게 아이를 토닥이는 부모를 신기하게 본다. 그런데, 4초짜리 버전https://www.youtube.com/watch?v=wDp161f2h283 )에 달린 댓글에 또 한 번 놀란다. 아이가 '나 학교가야지'라고 짜증내면서 깨우는 목소리가 싫다면서 그렇게 깨우면서 달랑 우유를 내민다고 광고에 대해 말한다. 에????그럼 아이가 부모를 깨우고 한 상 차려 먹여야 하는 건가? 사람들은 도대체 아이가 뭐라고 생각하는 거지. 그저 내가 아니기만 하면, 되는 건가. 부모에게 돌봄을 받으며 자랐을 저 젊은 부부는 이제 아이를 낳아 아이의 돌봄을 받기를 기대하는 건가. 저 광고가 공감을 받는다는 건 무엇에 대한 것인가.


나는 어렸을 때 불교는 '삶이 고통의 바다'라고 해서 싫다고 했었지만, 이제 삶이 고통의 바다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내 몫의 짐들이 무거워져서, 아 그래서 어른들은 그렇게 생각한 거구나, 하루 하루 깨닫고 있다. 그 와중에 내 젊은 날의 많은 말들이 어른의 짐을 오해한 말들, 불가능한 말들,이었던 것 같아 후회되기도 한다. 나의 취향을 드러내어 요구하는 것이, 더 많은 낭비를 불러온다는 자각도 들고(https://blog.aladin.co.kr/hahayo/11946079) 정말 그게 옳았던가, 생각도 많다. 그래도 살아간다는 것에 책임이 따르고, 내가 그 책임을 어떻게든 감당해보겠다는 태도도 있다. 그런데, 저 광고 속의 부모들은 어떠한가. 뭔가 부모라면 늘 하는 상상이거나 바램, 헛되지만 혼자서 킬킬댈 수는 있는 그런 부끄러운 상상을 이렇게 만천하에 드러낼 만큼 자신이 받은 돌봄에 대해 '아이도 할 수 있는데 내가 하기는 싫은 것'으로 생각하는 것인가. 부모인 자신은 매일 매일 지쳐서 깨지 못할 만큼 힘들지만, 자신의 아이는 그렇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자라면서 감당할 수 있는 괴로움의 크기가 또 커지는 거라면, 아이에게는 아이 몫의 괴로움이 있을 텐데, 도대체 왜 저렇게까지 아이를 그리는 걸까. 부모가 깨우고, 부모가 주는 밥을 먹고, 부모가 챙겨서 옷을 입고 학교에 가도, 아이는 아이 몫의 괴로움을 감당하면서 살아가는 건데, 광고 속의 아이가 너무 예쁘게 웃어서 어른이 보고 싶은 아이가 저런가 싶어 슬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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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풍오장원 2021-04-28 09: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멋진 글 잘 읽었습니다.^^
 
나는 무얼까

각자의 화면을 따로 보다가도 차트를 달리는 남자를 티비에서 찾으면 5학년 아들 놈이 본다면서 폰을 내려놓는다. 오빠를 따라서인지 2학년 딸도 같이 본다. 그렇게 같이 보는 게 좋아서, 폰을 내려놓는 게 좋아서 나도 같이 본다. 그렇게 차트를 달리는 남자,에서 세기의 사기꾼 편을 보았다. 

그 차트에서 흑인인 체 한 유대계 백인 이야기가 기억에 남는다. 그 여성은, 스스로를 흑인으로 꾸며서는 흑인에게 주는 장학금을 받고 흑인민권운동 관련 연구를 하고, 관련 상도 받았다. 

나는, 지금의 어떤 남성과 여성의 이야기들 안에 이 상황은 어떻게 해석될 여지가 있는가, 생각하느라 혼란스러웠다. 성별을 지칭하는 말들이 어느 나라에서는 스무 개 가까이로 늘고 있다고 한다. 양성평등,이라는 말은 두 개의 성을 지칭하기 때문에 옳지 못한 표현이라고도 한다. 남성, 여성 외에도 트랜스, 외에도, 얼마나 많은 성별 분류가 있는지 이제 나는 따라잡는 걸 포기했다. 그걸 다 알고 유식한 체 해야 하나 회의한다.

그 사람은 백인으로 태어났지만, 스스로 흑인이기를 원했다. 그래서, 흑인으로 살았다.

그 사람은 남성(또는 여성)으로 태어났지만, 스스로 여성(또는 남성)이기를 원했다. 그래서, 여성(또는 남성)으로 살았다.

둘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는가. 나는 모르겠다. 왜 전자는 세기의 사기꾼이 되어 티비에 등장하고 후자는 존중해주어야 하는가. 존중은 무엇인가. 


나는 눈에 보이는 검은 피부를 흑인이라고 하고, 눈에 보이는 하얀 피부를 백인이라고 하고, 흑인,이라는 말이 혐오표현이라는 데에도 판단을 유보한다. 

내가 나눈 분류들이 크고 엉성해서 어디선가 예외들이 조금씩 비어져 나오는 것도 결국 어쩔 수 없다고 수긍한다. 나누고 또 나누어 각각에 이름붙이는 서양의 방식보다 눈곱만한 공통점으로도 묶고 또 묶는 동양의 방식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되어서, 지금은 그 모든 말들을 따라잡지 않는다. 

다양한 사람들이 모두 다른 저마다의 고통으로 힘겹다. 

예전에 쓴 글(https://blog.aladin.co.kr/hahayo/10355147)도 다르지 않은 것 같아 보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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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면서 대가를 치르지 않은 어리석음이 있던가. 


2월 16일 흥국생명과 IBK기업은행의 배구시합을 라이브로 봤다. 저격과 폭로로 이어지는 이슈들을 따라가고 있던 중이라, 안타까움 가운데 보고 있었다. 

1) 이다영선수가 자신의 SNS에서 주어와 대상이 모호한 공개저격으로 팀 내 불화를 드러냈다. 

2) 이다영선수의 피해자연하는 공개저격에 학창시절 이다영,이재영 자매의 학교폭력으로 배구를 그만 두었던 피해자가 피해사실을 폭로했다. 

3) 이다영 선수는 학교폭력에 대한 자필 사과문을 자신의 SNS에 올렸다.

4) 이다영, 이재영 쌍둥이 배구선수는 과거의 학교폭력 때문에 무기한 출장정지가 되었다. 


16일의 경기는 두 명의 주력 선수가 뛸 수 없는 두 번째 경기였다. 팀의 불화로 이미 두 번의 패배와 주력선수 둘이 빠져나간 세 번째 패배가 있었고, 나는 이 경기에서 네 번째 패배를 보았다. 일본에서도 터키에서도 우승컵을 들어올린 김연경이 잔뜩 굳은 얼굴로 3대0으로 패하는 경기를 보고 있자니, 이야기들이 저절로 살을 붙여 굴러간다. 


남편에게 흥국생명에서 벌어진 일들을 설명하고, 이다영이 과거의 일을 사과하는 걸로 충분하지 않다고 내 의견을 말했다. 다른 걸 사과해야 하지 않은가. 남편은 뭔 이상한 말이냐면서, 학생 때 가해자였다가, 지금 피해자일 수도 있는 거지. 그걸 어떻게 사과하냐,고 했다. 틀린 말은 아니다. 스스로를 피해자라고 생각하고 있다면, 현재의 일을 사과할 수도 없다. 그런데, 나는 과거의 일을 대하는 방법을 모르겠다. 눈에 띄는 일들을 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일파만파 번지는 학교폭력 폭로를 대하는 방법을 모르겠다. 가해자의 사정들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아직 어린 애들의 한 때의 잘못에 기회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https://blog.aladin.co.kr/hahayo/8308710) 사람이라서, 결국은 댓가를 치르는 게 아니겠냐고만 말할 수도 없다. 

나는, 십수년이 지나서 폭로하는 사람의 병든 마음이 너무 걱정스러운 거다. 그저 너는 트라우마에 갇힌 피해자라고 어서 폭로하라고 폭로가 잘못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지 않다. 잊고 싶은 건 잊으라고, 용감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서 잊는 거라고 말해주고 싶다. 나를 때린 애가 매일 티비에 나와서 웃는데 어떻게 잊어요?라고 말하면, 늙은 직장인의 심사로, 아 쟤도 돈 버느라 고생이 많네, 그러라고. 이다영의 학폭을 폭로한 사람의 심정은 나도 이해가 되고, 그 사람이 일상을 살아내지 못할 만큼 트라우마에 갇혔을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데, 당사자도 아닌 목격자들이 하는 폭로들은 뭐지 싶다. 이다영이 지금 피해자라고 생각했어도 여론의 심판을 청하지 않았다면, 과거의 피해자가 등장하여 자신이 심판대에 올라가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과거의 잘못을 기억하고 현재의 무언가를 참았다면, 지금 같은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거다. 그러니까, 어쩌면 이다영은 그럴 수 있다. 

그렇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럴 이유가 있나, 싶은 거다. 마구 터져나오는 폭로들,은 지나치다는 생각이 든다. 학교폭력의 댓가가 어때야 할까. 직업을 잃는 것, 기회를 잃는 것이 그 댓가여야 할까. 나라면 그 애가 내가 알던 그 상태로 변하지 않았다면 결국 오래가지는 못 할 테니까,달콤한 성공을 주고, 길고 처참한 하강이 더 나은 거 같기도 하고. 내가 보지 못하는 곳에서 보지 못하는 댓가를 치르고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더 큰 죄들에도 공소시효가 있는데, 이런 식의 처벌은 과연 옳은가. 기다렸다는 듯 터뜨리는 '트라우마'를 말하는 신문기사는  의미가 있는가. 지금 누군가 피해를 당하는 학생에게 의미가 있을까. 십대에 사십대를 상상하지 못하고, 미래의 일을 들어 지금의 나쁜 일을 교정하지도 못하는데, 새로운 삶의 기회를 없애야 하는 걸까. 


김연경의 팀은 과거의 일만 반성한 두 명의 선수 없이도 다음 경기에서 이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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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를 학대하는 엄마들, 때문에 오래 전 이야기를 쓰고 싶어졌다. 

(시즌12, 에피소드 22)범죄수사물을 한참 볼 때, SVU도 꽤 봤었다. 여러 에피소드 중에 이 에피소드는 좀 기이해서 기억에 남는다. 정확한 에피번호를 적으려고 검색한 검색어는 'SVU 영아살해', 'SVU 콘돔 구멍' 따위였다. 콘돔 구멍,이라는 검색어에 나무위키가 걸려서 정확한 에피번호를 적을 수 있었다. 스텔스,라는 언어 풀이 중에 성적인 은어로 설명하면서 해당 에피를 써놓았더라. 이야기 속에서 남자는 여자들과 성교하면서 일부러 콘돔에 구멍을 냈다. 경찰서에 피해여성들 그러니까, 성교나 진지한 관계는 원했지만 아이는 원하지 않았던 여자들이 남자때문에 임신하고 아이를 키우는 중인 여성들로 가득 찰 지경이었다. 아이와 함께 자살한 여성이라든지, 아이를 살해한 여성도 존재하고, 그 많은 여성들은 그 남성을 범죄자로 처벌이 필요하다면서 모였다. 남자는 자신은 양육비를 보내고 있고, 잘못한 게 없다고 주장했다. 이야기는 뭔가 사적인 복수로 끝났다. 그 여자들을 상담했던 여자가 그 남자를 살해했거든. 그런데, 그 에피소드를 볼 때 이야기가 기이하다는 생각을 했다. 정말 저런 사건이 있을 수 있어? 남자는 여자의 죽음보다 아이의 죽음을 애석해하면서 자신을 고대 왕처럼 남자들은 많은 아이들을 원하는 게 당연하지 않냐면서 강변했거든. 나는 뭐, 그 남자가 사십명이 넘는 자신의 아이들의 양육비를 지불했다는 것에 놀라고!!!! 그 여자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남자를 독점하지 못한 것에 괴로워하면서, 그 남자가 더 이상 자신이나 아이를 돌보지 않는다고 원망한다는 것이었다. 합의한 성관계에 임신이 되었다고 범죄가 될 수 없다는 것이 그 남자가 법적 처벌을 피한 이유였다. 오래 전 일기를 뒤졌더니 그 때의 이야기가 있었다.(2011. 11. 30) 나는 광고의 '임신강간범'이라는 표현이 의아해서 부러 본 에피였고, 당시 드라마로는 천일의 약속,을 보고 있었다. 알츠하이머로 죽어가면서 아이를 낳고 싶어서 치료를 거부하는 수애를 보는 중이었어서, 더 그 여자들을 기이하게 생각했던 것도 같다. 피임을 전적으로 남자에게 의지하고 아이가 자신의 생을 망쳤다고 생각하는 여자들과 나란히 죽음이 닥치는 와중에 절박하게 아이를 원하는 여자를 보는 것은 그대로 대비가 되었다. 

남자에 대한 원망으로 아이를 죽인다,는 이야기는 또 있다. 이것도 대강의 얼개만 알고, 검색해서 찾았다. 왕이 왕비를 얻어 아들까지 얻었다. 먼 데서 시집 온 왕비는 자신의 여동생이 보고 싶어 왕에게 청해서 동생을 데려와달라고 한다. 왕은 왕비의 여동생을 데리고 와서는 강간하고 문제가 될까봐 혀를 잘라 감금한다. 나중에 왕비는 자신의 여동생을 만나고, 왕에게 복수하기 위해 아들을 살해해서는 왕에게 먹인다. (그리스로마신화 속의 테레우스와 프로크네와 필로멜라 이야기(https://100.daum.net/encyclopedia/view/b22t2568a)) 다른 엄마와 이야기하면서 왜 아이를, 이라고 이야기했다. 엄마인 우리는 아이가, 남자의 아이라고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 아이는 아이다. 

권력의 위계를 인정하고 그 위계 안에서 힘을 행사하려 한다면 엄마가 죽이는 아이들,이 얼마나 많을 것인가. 엄마라는 존재가 존중받는 이유는, 어쩌면 불가능한 일, 가장 약한 자를 보호할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엄마가 되는 순간 더 강해질 걸 기대받는 모성은 억압이기도 하고 책임이기도 하다. 오락을 위한 성교가 만연하고, 그 자체에 죄책감을 덜어내는 문화적 맥락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고리타분하게도 여전히 '남자는 성교를 원하고, 여자는 아이를 원하는 거 아닌가?'라고 생각하고 있다. 아이를 보호하지 않는 엄마, 여자이기만 한 여자들이 가득찬 세상에서 아이는 살아남을 수 있을까. 

나는 세상을 단순하게 인식하려고 애쓴다. 먹고 자고 아이를 기르고, 인간이 존재하는 단순한 이유들을 놓치지 않으려고 애쓴다. 그 위에 덧입힌 허명들은 허명이다. 사랑이든, 명예든, 아름다움이든, 그게 뭐든. 반드시 닥치는 죽음 때문에 삶이 간절하고, 이야기를 원하지만 본질은 달라지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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