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면서 대가를 치르지 않은 어리석음이 있던가. 


2월 16일 흥국생명과 IBK기업은행의 배구시합을 라이브로 봤다. 저격과 폭로로 이어지는 이슈들을 따라가고 있던 중이라, 안타까움 가운데 보고 있었다. 

1) 이다영선수가 자신의 SNS에서 주어와 대상이 모호한 공개저격으로 팀 내 불화를 드러냈다. 

2) 이다영선수의 피해자연하는 공개저격에 학창시절 이다영,이재영 자매의 학교폭력으로 배구를 그만 두었던 피해자가 피해사실을 폭로했다. 

3) 이다영 선수는 학교폭력에 대한 자필 사과문을 자신의 SNS에 올렸다.

4) 이다영, 이재영 쌍둥이 배구선수는 과거의 학교폭력 때문에 무기한 출장정지가 되었다. 


16일의 경기는 두 명의 주력 선수가 뛸 수 없는 두 번째 경기였다. 팀의 불화로 이미 두 번의 패배와 주력선수 둘이 빠져나간 세 번째 패배가 있었고, 나는 이 경기에서 네 번째 패배를 보았다. 일본에서도 터키에서도 우승컵을 들어올린 김연경이 잔뜩 굳은 얼굴로 3대0으로 패하는 경기를 보고 있자니, 이야기들이 저절로 살을 붙여 굴러간다. 


남편에게 흥국생명에서 벌어진 일들을 설명하고, 이다영이 과거의 일을 사과하는 걸로 충분하지 않다고 내 의견을 말했다. 다른 걸 사과해야 하지 않은가. 남편은 뭔 이상한 말이냐면서, 학생 때 가해자였다가, 지금 피해자일 수도 있는 거지. 그걸 어떻게 사과하냐,고 했다. 틀린 말은 아니다. 스스로를 피해자라고 생각하고 있다면, 현재의 일을 사과할 수도 없다. 그런데, 나는 과거의 일을 대하는 방법을 모르겠다. 눈에 띄는 일들을 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일파만파 번지는 학교폭력 폭로를 대하는 방법을 모르겠다. 가해자의 사정들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아직 어린 애들의 한 때의 잘못에 기회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https://blog.aladin.co.kr/hahayo/8308710) 사람이라서, 결국은 댓가를 치르는 게 아니겠냐고만 말할 수도 없다. 

나는, 십수년이 지나서 폭로하는 사람의 병든 마음이 너무 걱정스러운 거다. 그저 너는 트라우마에 갇힌 피해자라고 어서 폭로하라고 폭로가 잘못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지 않다. 잊고 싶은 건 잊으라고, 용감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서 잊는 거라고 말해주고 싶다. 나를 때린 애가 매일 티비에 나와서 웃는데 어떻게 잊어요?라고 말하면, 늙은 직장인의 심사로, 아 쟤도 돈 버느라 고생이 많네, 그러라고. 이다영의 학폭을 폭로한 사람의 심정은 나도 이해가 되고, 그 사람이 일상을 살아내지 못할 만큼 트라우마에 갇혔을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데, 당사자도 아닌 목격자들이 하는 폭로들은 뭐지 싶다. 이다영이 지금 피해자라고 생각했어도 여론의 심판을 청하지 않았다면, 과거의 피해자가 등장하여 자신이 심판대에 올라가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과거의 잘못을 기억하고 현재의 무언가를 참았다면, 지금 같은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거다. 그러니까, 어쩌면 이다영은 그럴 수 있다. 

그렇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럴 이유가 있나, 싶은 거다. 마구 터져나오는 폭로들,은 지나치다는 생각이 든다. 학교폭력의 댓가가 어때야 할까. 직업을 잃는 것, 기회를 잃는 것이 그 댓가여야 할까. 나라면 그 애가 내가 알던 그 상태로 변하지 않았다면 결국 오래가지는 못 할 테니까,달콤한 성공을 주고, 길고 처참한 하강이 더 나은 거 같기도 하고. 내가 보지 못하는 곳에서 보지 못하는 댓가를 치르고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더 큰 죄들에도 공소시효가 있는데, 이런 식의 처벌은 과연 옳은가. 기다렸다는 듯 터뜨리는 '트라우마'를 말하는 신문기사는  의미가 있는가. 지금 누군가 피해를 당하는 학생에게 의미가 있을까. 십대에 사십대를 상상하지 못하고, 미래의 일을 들어 지금의 나쁜 일을 교정하지도 못하는데, 새로운 삶의 기회를 없애야 하는 걸까. 


김연경의 팀은 과거의 일만 반성한 두 명의 선수 없이도 다음 경기에서 이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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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를 학대하는 엄마들, 때문에 오래 전 이야기를 쓰고 싶어졌다. 

(시즌12, 에피소드 22)범죄수사물을 한참 볼 때, SVU도 꽤 봤었다. 여러 에피소드 중에 이 에피소드는 좀 기이해서 기억에 남는다. 정확한 에피번호를 적으려고 검색한 검색어는 'SVU 영아살해', 'SVU 콘돔 구멍' 따위였다. 콘돔 구멍,이라는 검색어에 나무위키가 걸려서 정확한 에피번호를 적을 수 있었다. 스텔스,라는 언어 풀이 중에 성적인 은어로 설명하면서 해당 에피를 써놓았더라. 이야기 속에서 남자는 여자들과 성교하면서 일부러 콘돔에 구멍을 냈다. 경찰서에 피해여성들 그러니까, 성교나 진지한 관계는 원했지만 아이는 원하지 않았던 여자들이 남자때문에 임신하고 아이를 키우는 중인 여성들로 가득 찰 지경이었다. 아이와 함께 자살한 여성이라든지, 아이를 살해한 여성도 존재하고, 그 많은 여성들은 그 남성을 범죄자로 처벌이 필요하다면서 모였다. 남자는 자신은 양육비를 보내고 있고, 잘못한 게 없다고 주장했다. 이야기는 뭔가 사적인 복수로 끝났다. 그 여자들을 상담했던 여자가 그 남자를 살해했거든. 그런데, 그 에피소드를 볼 때 이야기가 기이하다는 생각을 했다. 정말 저런 사건이 있을 수 있어? 남자는 여자의 죽음보다 아이의 죽음을 애석해하면서 자신을 고대 왕처럼 남자들은 많은 아이들을 원하는 게 당연하지 않냐면서 강변했거든. 나는 뭐, 그 남자가 사십명이 넘는 자신의 아이들의 양육비를 지불했다는 것에 놀라고!!!! 그 여자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남자를 독점하지 못한 것에 괴로워하면서, 그 남자가 더 이상 자신이나 아이를 돌보지 않는다고 원망한다는 것이었다. 합의한 성관계에 임신이 되었다고 범죄가 될 수 없다는 것이 그 남자가 법적 처벌을 피한 이유였다. 오래 전 일기를 뒤졌더니 그 때의 이야기가 있었다.(2011. 11. 30) 나는 광고의 '임신강간범'이라는 표현이 의아해서 부러 본 에피였고, 당시 드라마로는 천일의 약속,을 보고 있었다. 알츠하이머로 죽어가면서 아이를 낳고 싶어서 치료를 거부하는 수애를 보는 중이었어서, 더 그 여자들을 기이하게 생각했던 것도 같다. 피임을 전적으로 남자에게 의지하고 아이가 자신의 생을 망쳤다고 생각하는 여자들과 나란히 죽음이 닥치는 와중에 절박하게 아이를 원하는 여자를 보는 것은 그대로 대비가 되었다. 

남자에 대한 원망으로 아이를 죽인다,는 이야기는 또 있다. 이것도 대강의 얼개만 알고, 검색해서 찾았다. 왕이 왕비를 얻어 아들까지 얻었다. 먼 데서 시집 온 왕비는 자신의 여동생이 보고 싶어 왕에게 청해서 동생을 데려와달라고 한다. 왕은 왕비의 여동생을 데리고 와서는 강간하고 문제가 될까봐 혀를 잘라 감금한다. 나중에 왕비는 자신의 여동생을 만나고, 왕에게 복수하기 위해 아들을 살해해서는 왕에게 먹인다. (그리스로마신화 속의 테레우스와 프로크네와 필로멜라 이야기(https://100.daum.net/encyclopedia/view/b22t2568a)) 다른 엄마와 이야기하면서 왜 아이를, 이라고 이야기했다. 엄마인 우리는 아이가, 남자의 아이라고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 아이는 아이다. 

권력의 위계를 인정하고 그 위계 안에서 힘을 행사하려 한다면 엄마가 죽이는 아이들,이 얼마나 많을 것인가. 엄마라는 존재가 존중받는 이유는, 어쩌면 불가능한 일, 가장 약한 자를 보호할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엄마가 되는 순간 더 강해질 걸 기대받는 모성은 억압이기도 하고 책임이기도 하다. 오락을 위한 성교가 만연하고, 그 자체에 죄책감을 덜어내는 문화적 맥락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고리타분하게도 여전히 '남자는 성교를 원하고, 여자는 아이를 원하는 거 아닌가?'라고 생각하고 있다. 아이를 보호하지 않는 엄마, 여자이기만 한 여자들이 가득찬 세상에서 아이는 살아남을 수 있을까. 

나는 세상을 단순하게 인식하려고 애쓴다. 먹고 자고 아이를 기르고, 인간이 존재하는 단순한 이유들을 놓치지 않으려고 애쓴다. 그 위에 덧입힌 허명들은 허명이다. 사랑이든, 명예든, 아름다움이든, 그게 뭐든. 반드시 닥치는 죽음 때문에 삶이 간절하고, 이야기를 원하지만 본질은 달라지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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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퀴즈를 그래도 챙겨 보고 있다. 꽤 되었는데 유퀴즈에서 '담다' 특집을 했을 때, 광고부터 기분이 좋지 않았다. '의대 6군데 합격생'이 합격증을 담은 학생으로 출연한다는 거다. 결국 사람은 한 군데 밖에 못 가는데, 6군데 합격한 게 왜 이야깃 거리가 되는지, 비법따위가 있을 리가. 

"저게 무슨 자랑이라고 나온다니?"

"자랑이지, 6군데나 합격했는데."

"어차피 하나밖에 못 가는데, 게다가 저 사람은 과학고 나와서 의대 간 거잖아. 과학고는 국가에서 과학 육성을 위해서 많이 지원하는 학교고, 그런 학교를 중학생부터 의사 될 마음으로 가서는 지원할 수 있는 6개를 다 의대로 넣었다는 게 자랑이야?"

부끄러움이 없는 젊은이에 젊은이들이 열광한다. 입시와 교육이 산업이 되고 좋은 대학을 나왔다는 학원 강사들, 교육 컨설턴트들,이 큰 부를 이루고, 노력만 하면 갈 수 있고, 노력하지 못한 너는 너의 한계를 인정하라는 식의 담론을 퍼뜨린다. 애초에 노력한다고 갈 수가 없는데, 그런 말들에 속아서, 장사치들의 배를 불리고, 스스로를 채찍질하고, 삶에 대한 고민을 미루는 걸 참을 수가 없다. 

어차피 한 군데를 선택해서 가야 하는 과고생이 제도의 맹점을 이용해서 국가의 지원 아래 좋은 교육을 받고, 지원할 수 있는 대학 여섯 곳을 모두 의대를 지원한 걸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말한다는 게 싫다. 모두가 좋다는 대학에 모두가 좋다는 과를 갔고, 또래집단이 다들 대단하다고 말해 준다면 자신의 잘못을 모를 수도 있다. 선배도 그랬고, 후배도 그랬고, 그래서 나도 그랬는데, 무슨 잘못일까, 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좁은 주변만을 보고 생각해선 안 된다. 어른이라면, 공동체의 구성원이라면, 또래집단 안에서 허용될지라도 전체 사회 안에서 허용될지를 고민하게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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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로맨스의 끝이 결혼이 아닌 시대가 되었다. '사랑의 불시착'도, '검색어를 입력하세요 WWW'도 '날씨가 좋으면 찾아가겠어요'도 결혼으로 맺지 않았다. 그러고도 오래도록 사랑했습니다,로 끝이 났던가. 결혼도 없고, 아이도 없이, 심지어 늙지도 않은 채로 이야기는 닫혔다. 결혼의 이야기는 '부부의 세계'나 '나의 위험한 아내'처럼 스릴러 장르가 되거나, 시월드와의 전쟁으로 묘사되고 있다. 부부가 도의 처음 이라고 생각하고, 아이를 가지고 싶어서 결혼을 한 나는, 지금 이야기들이 어떤 미래로 흐를지 근심한다. 아이를 좋아하지만, 아이가 나에게 속했다는 감정을 누그러뜨리려고 끊임없이 노력하는 중이라서, 무언가 아이를 자기 자신에 속한 것으로 생각하는 태도나 말들에 또 근심한다. '나는 내 복으로 살지요'라고 말하고 쫓겨났다는 셋째 딸 이야기(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6691674) 를 좋아하는 나는, 준비 안 된 부모는 아이를 낳지 말라는 말에도, 결혼을 하지 않고도 낳을 수 있는 거 아니냐는 말에도 조금씩 조금씩 물러나게 된다. 아이는 내가 낳았지만, 나에 속하지 않았다. 나는 완벽한 엄마가 아니고, 어느 순간에도 완벽한 엄마가 될 수도 없다. 단지 존재하는 채로 그저 서로를 책임지고 감당하고 있을 뿐이다. 

산후조리원,을 가끔 짤들로, 가끔 재방송 토막으로 보고 있다. 이제 이야기의 세계로 진입했으니, 진실은 어디론가 사라질 거라는 생각이 든다. '슈퍼맨이 돌아왔다'를 보고 있을 때 엄마는 왜 집에 애를 안 보고, 남의 집 애를 보냐고 그랬었는데, 이제 출산과 양육이 내가 겪기보다 구경하는 이야기가 되어가고 있다. 대하소설이나 드라마에서 짧게 으랏차차 지나가는 인생의 한 장면이 아니라, 그 자체로 그대로 구구절절 장황한 이야기가 된다는 것은, 겪은 사람보다 겪지 않은 사람들, 그래서 구경하고 말 사람이 많다는 이야기인가도 싶다. 아니면, 이야기로도 충분해서 실상 겪지 않기로 결심하는 사람이 많아질거란 이야기일 수도 있다. 

이야기,라는 게 정말 신기한 게 이야기되는 순간 달라지는 게 있다. 행복하다,는 말도 그 자체로 진실이 아닌 거 같고, 슬프거나 어렵다,는 말도 그 자체로 본질은 아닌 거 같다. 직접 겪었을 때의 그 복잡한 감정을 단지 구경하는 것으로 알 수 없는데도, 구경하는 것으로도 안다고 느끼고 알아버렸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어쩔 수 없이 과장되는 이야기들 가운데, 나는 이렇게 점점 아이가 사라지는 미래가 올까봐 무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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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건에 대해 잊히지 않는 장면의 기억이 있다. 갓 시집온 며느리(이승연)가 시댁에서 설거지를 하고 있다. 설거지를 하는 며느리가 낡은 후라이팬을 닦는데, 많은 홈드라마가 그러하듯이 나이 든 어른 여자(이모할머니였던가, 시어머니였던가)가 숟가락으로 기름때를 긁어서 떼어내면 된다고 알려준다. 그렇게 닦던 며느리가 '버리고 새로 사요'라고 말하는데, 그 어른 여자가 '나도 늙고 쓸모없으면 내다 버리겠구나'라고 응수하는 장면이다.(https://ko.wikipedia.org/wiki/%EB%82%B4%EC%82%AC%EB%9E%91_%EB%88%84%EA%B5%B4%EA%B9%8C)
날카롭게 콱 박힌 기억이라 언젠가 한 번은 쓰고 싶었다.
왜 그렇게 콱 박혔을까. 그 연결이 생경해서, 혹은 그 말이 너무 공격적이어서, 내가 그 젊은 며느리와 다를 바 없어서? 

버리는 일을 힘들어하는 지금의 나는 그 할머니 같다. 물건을 나 자신처럼 생각하고 있다. 스터프를 읽고 (https://blog.aladin.co.kr/hahayo/7043654) 만든 많은 변명들을 더하기 까지 해서, 더 못 버리는 지경이기도 하다. 철학책을 읽는 중에 물건을 대하는 태도가 결국 자신을 대하는 태도가 되어서, 현대인이 좀 더 결핍을 많이 느낀다는 대목을 읽고도 또 고개를 주억거리는 거다. 

청소하기 싫다,는 말을 청소가 도대체 뭐야, 여기서 저기로 옮겨놓는 것 뿐이잖아?라고 궤변을 늘어놓는 나는 버리기보다 태우고 싶다. 완전히 사라지게 할 수 있다면 더 쉽게 버릴 수도 있을 거 같다는 생각마저 든다. 

신박한 정리를 보고 있다. 어디 있는지, 어디에 쓸지, 과연 쓸지 알 수 없는 물건들로 가득 찬 집들이 버리고 버리고 버린 와중에 집 꼴을 갖춘다. 버려야만 가능한 일이다. 그런 집에서 울컥한 사람들을 보고 있다. 인생의 어떤 순간들을 흘러가게 둘 수 있어야 가능하다. 아직도 흘려보내지 못한 어떤 순간들이 쌓여 있다. 마음과 집, 나와 물건, 나와 자연, 나와 지구, 그 무엇도 칼로 자르듯 베어낼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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