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낮에 딸아이가 보는 '놀라운 맞춤법 파괴 상황'을 정정해주고 그 저녁에 놀라운토요일을 보았다.

받아쓰기,하는 걸 보고 있자니 참 신기한 기분이 된다. 

사람은 듣고, 머릿 속에서 자신의 지식 안에서 정리한다. 들었더라도, 자신의 지식이나 경험 그 말의 발화 상황과 어긋나면, 들은 걸 기억하지도 못하고 가끔은 아닐 거라고 단정한다. 

김세정의 밤산책을 받아쓰기,하는 2라운드에서, 키는 김동현이 특별히 솔직하니까 이렇게 풀리는 구나,라고 말하면서 김동현이 들은 '이억받고'에서 '이어폰'을 유추해낸다. 

아는 게 많거나, 그런 것들에 사로잡히면, 밤에 산책을 나가는 기분에 대한 노래를 들으면서 '이억받고'처럼 들렸어도, 그렇게 쓰지 못한다. 

들리는 대로 쓴다, 쉬운 말처럼 보이지만 결코 쉽지 않다. 

보이는 대로 본다, 도 쉬운 일이 아니다. 

감각하는 모든 것은, 내 머릿속의 내 경험 안에서 정렬되고 선택되고 밖으로 나온다. 내 경험의 한계만큼, 내가 가지는 사고의 한계만큼 제약이 있다. 

문제를 해결하려면 시작은 언제나 담백하게 들리는 대로, 보이는 대로의 묘사여야 하는데 너무 많이 알거나, 너무 많이 생각하기 때문에 그것조차 제대로 하지 못한다. 

내가 아는 것에 의심을 가지고, 그대로 우선 받아들인 다음, 그런 다음에 같이 이야기나눠야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정답이 분명히 있는 문제를 대화를 통해 해결하는 과정을 보는 것은 정답을 알 수 없는 가운데, 서로를 오해하고 극단적으로 대립하는 현실을 잠시 잊게 해 준다.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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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스토랑을 보는데, 박솔미가 아이들을 등교?등원?시키고 아이들이 남긴 밥으로 자신의 밥을 만들어 먹는 장면이 나왔다. 아이들이 남긴 밥은 버리기 아까워요,라고 말하는 박솔미를 보고 있자니 기분이 묘했다. 화려한 삶을 전시해서 사람들을 한 방향으로 흐르게 하는 매체에서, 새 것을 보여주고 소비를 촉진하고, 위생과 청결을 설파해왔던 매체에서 그런 장면을 보게 되니 기이한 느낌을 받았다. 

나도 아이가 남긴 밥을 먹는다. 아깝다,는 말이 한국에나 존재하는 말이라고 자원이 풍족해본 적 없어서 하는 말이라고 그런 성정을 무언가 버려야 하는 태도처럼 말하는 걸 본 적이 있는데, 확신에 차서 써놓은 그 글에 나는 경계하는 마음이 된다. 식당에서 남는 밥이 아까워 쩔쩔 매는 나에게 '그걸 왜 뱃 속에 버리냐'는 말을 들은 적도 있다. 틀린 말은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깊은 거부감이 들었다. 

가난한 자의 정체성은 사라지지 않고, 더하여 그 가난한 자의 정체성을 변호한다. 

이렇게 쉽게 버린다면, 지구는 어쩌지, 같은 것. 내가 먹을 쌀을 짓기 위해 물고기가 살고, 잡초가 우거질 어떤 땅에서 쫓겨난 풀벌레들이 있는데, 내가 먹을 고기가 되기 위해서 죽어 간 동물이 있는데, 내가 그 요리를 앞에 두고, 그렇게 쉽게 버릴 수는 없다,는 각오 같은 것. 

집에서 먹는 밥은, 그런 것도 같다. 한 끼에 예쁘게 차려서 남는 반찬을 톡 털어서 버리는 게 아니라, 어차피 가까운 식구들이라고, 뚜껑을 덮었다가 다음 끼니에 다시 내오는. 식당이라면 비위생적이라 할 만한 어떤 것이 있다고도 생각한다. 

누가 남긴 밥을 먹고 싶어해? 그건 권력이 없다는 징표야,라고 누군가는 말할 것도 같다. 

아니, 나는, 아니라고, 대답하고 싶어한다. 

권력은 가장 좋은 것을 누리는 가운데 있는 게 아니라, 책임지는 가운데 있는 거고, 아이들을 먹이는 책임을 지고, 더하여 자연이나 지구를 돌보는 마음은 권장되어야 한다고. 

모두 다 같은 부위를 먹고 싶어한다면 소 한마리를 잡아도, 더 많이 버려지겠지. 그런 세상을 원하는 게 아니라면, 무엇을 먹느냐에 계급이나 권력같은 의미를 부여하면 안 된다고도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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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류사회,를 읽을 때, 고려시대는 여성의 지위가 높았는데 조선시대에 여성의 지위가 떨어졌다고 말한다.(https://blog.aladin.co.kr/hahayo/13163847지금 내 지위가 낮은지 잘 모르겠어서, 여성의 지위가 높은 세상은 과연 어떤 사회인지 상상이 잘 안 됐다. 

드라마는 오랜만에 시작한 정통사극이었고, 진행속도가 굉장히 빨랐다. 어쩌다 한 번씩 토막난 드라마를 보면서 나라가 되는 가문과 여성들을 본다. 고려의 마지막을 보던 공민왕의 비, 이성계의 경처였고 조선 최초의 왕비가 된 강씨, 이방원의 아내 민씨.

강씨는 이미 장성한 향처의 아들들 대신, 자신의 아들을 세자로 앉힌다. '당신을 어머니로 생각했다'는 이방원에게 핏줄에 대해 말한다. 어미없는 자식의 위치는 그런 거라면서, 자신은 너의 배경이 되지 않을 거라고 말한다. 그런 태도는 오히려, 자신의 죽음 뒤에 자신의 아이들이 살아남지 못하게 만들고, 조선왕조 내내 극심한 서얼차별을 만들었다. 

민씨는 자신의 남편과 함께 권력을 잡은 순간, 자신의 가문이 권력을 분점할 수 있기를 바랬다. 왕이 된 남편의 신하되기를 거부한 아내는 자신의 오라비들이 죽고, 며느리의 아비가 죽는 걸 본다. 

이미 지나간 날들인 데다가, 주인공이 주인공이니만큼 나는 이방원에 이입해서 보았다. 국가도 결국 환상이지만, 이방원의 행동들에 당위가 있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고려 말에 가문이 살아남기 위해 선죽교의 살인자가 되는 순간부터,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나라의 처지를 알게 되고, 결국 왕이 되어 아버지와 형제와 전쟁을 벌일 때에도, 정치가 이방원의 행동은 그럴 수 밖에 없었다고 인정하고 있다. 이미 벌어진 일들이고, 그 다음을 알고 있으니, 세종대왕의 아버지고. 죽임을 당한 세자가 항변했듯이 좋은 왕이 될 수도 있었겠지만, 그 세상은 내가 알지 못하는 거고, 혼란한 정치상황이 얼마나 피로한 지 아는 국민이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해버리는 거다. 무기를 숨겨 자신을 지킨 처가부터 무기를 거둬들이는 정치가 이방원을 나는 지지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경처였던 강씨가 죽고 그녀의 자녀들이 실권하는 과정이, 이방원이 권력을 잡도록 도왔던 민씨가 내처지는 과정이 여성의 지위가 떨어지는 것으로 보였다. 경처와 향처의 지위에 대한 차별이 없어 자신의 아들을 세자로 세운 강씨나, 남편의 신하가 되기를 거부하고 자신의 가문에도 나라의 권력을 나눠야 한다는 민씨는 강한 여성들이지만, 내가 동의하기 어려운 의견들이다. 강씨에 대해서는, 이미 사라진 일부다처제가 과연 남성에게만 유리한 제도였던가 의심하고 있지만-자원이 부족한 상황에서 충분히 부유하고 강력한 남자란 희소자원이 아닌가, 싶은 거지. 여자들은 못생긴 남자의 단 한 명의 부인보다, 잘생긴 남자의 백 번째 부인이 되고 싶어 하는 게 아니냐는 우스개처럼-, 다시 일부다처제인 사회를 원하지 않는다. 사회적 억압 가운데, 일부일처제인 사회를 나는 선택하고 싶다. 민씨에 대해서는, 권력자 가문이 아닌 국민의 입장이 되어, 왕이 있는데, 왕의 부인까지 국가를 갖겠다고 해서 동의가 안 된다. 보면 여성 지위가 떨어진 게 맞는 것도 같은데, 그게 나쁜 방향이라는 생각이 안 들고 다행이네, 싶었다. 일개 국민의 입장에서는 국가가 된 가문이 모계든지 부계든지 하나인 편이 차라리 낫고, 현대 여자의 입장에서는 권력을 위해 결탁하는 결혼의 선택지가 하나 뿐인 일부일처제가 다행이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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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굉장히 오글거리고 어이없는 드라마를 볼 거니까, 먼저 들어가서 자라고 남편에게 말하고 봤다. 완전 클리셰 폭탄인데, 왜 재미있을까, 생각이 많다. 

로맨스의 환상이 응축되어 드러난다. 

직장에 다니는 여자주인공은 친구의 맞선자리에 대신 나가서는 자기가 다니는 회사의 사장과 만난다. 적당히 떼어내는 게 목표였던 맞선에서, 일은 꼬여버렸다. 

직장 내 괴롭힘 방지법이 있는데 저래도 되나 싶은 설정도 보이고, 스토킹방지법도 있는데 좋아한다고 할 때까지 고백한다는 장면도 있다. 드라마 유튜버도 요즘 남자는 저렇게 고백 안 하니까, 잘 생각하고 대답하라고 조언하더라. 

시대에 뒤떨어진? 이제는 한 물 간 줄 알았던 신데렐라 설정에, 법적으로 문제삼을 수 있는 지뢰같은 설정도 많고, 완전 클리셰 폭탄인데 말이지. 그걸 재밌다고 보는 나는 뭐란 말인가. 

클리셰들에도 불구하고, 왜 좋았던 걸까. 카카오페이지까지 깔고, 원작웹소설과 웹툰도 보고 있다. 처음 깐 카카오페이지라서, 도대체 기다무는 누군데, 이 많은 소설과 웹툰을 쓸 수 있을까, 오해했다. (기다리면 무료,의 준 말이었다.) 인스타에 김세정과 안효섭과 설인아와 김민규를 팔로우 추가도 했다. 

그걸 다 보고 뭔가 분석적인 글을 쓰려고 했으나, 내가 무슨, 싶어서 그냥 쓴다. 


읽으려고 쌓아둔 책 중에 '충분히 좋은 엄마' 본문은 '새엄마에 대한 이야기들이 사라진다면, 새엄마에 대한 편견이 사라질 거라는 사람이 있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로 시작한다. 정확한 인용은 다음에 기회가 되면 하고 싶다. 사람들이 이렇게까지 새엄마 이야기를 만들고 이야기하는 것에는 그 이야기가 어떤 면을 비추고 있기 때문이라고. 

나는, 내가 좋아하는 이 신데렐라 스토리의 클리셰도 무언가 그런 게 있어서일 거라고 생각한다. 클리셰 안에, 무언가를 담고 있다. 그건 사랑의 본질일 수도 있고, 사람들이 추구하는 무엇일 수도 있다. 


드라마와 웹소설을 비교하다가, 둘 다 뭐가 좋았던가 생각하다가, 여성과 남성의 전형적인 어떤 태도들에 눈이 간다. 현대인들은 수동성보다 능동성을 선호한다. 능동성을 고양시키라고 그게 강한 거라고, 그런데 나이먹고 늙어가는 중인 나는 수동성이 더 강할 수 있는 순간들이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애초에 태어난 건 자체가 나의 선택이 아니고, 나의 가족이 나라가, 고향이, 시대가 나의 선택이 아닌데,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그 삶은 얼마나 가능할 수 있겠나, 싶은 순간들이 있다. 살아간다는 것의 수동성 가운데서, 일찌감치 마음을 정하고 돌진하는 남자 주인공과, 상황에 떠밀려 휩쓸리는 여자 주인공의 이야기를 보는 거다. 나쁘지 않아, 삶의 파도에 휩쓸리는 것이,라는 마음이 된달까. 휩쓸리는 파도 속에 사랑이 꽃피는 로맨스의 세계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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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nkIU 2022-04-29 11: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기다무는 누군데 ㅎㅎㅎ 넘 귀여우셔요
사내맞선, 저도 넘 잼나게 읽고 봤어요. 클리셰 범벅도 캐릭터, 스토리가 좋으면 충분히 즐길수 있는거죠

별족 2022-04-29 11:34   좋아요 0 | URL
웃어주셔서 감사^^. 웹소설과는 많이 달라서 실망하는 원작 팬들도 많다던데, 드라마도 재밌게 보셨군여.
 

딸아이가 보기 시작했다. 큰 딸-스물다섯스물하나-과 막내딸-아는형님-이 채널을 가지고 싸우는 토요일 밤, 막내가 그래도 일찍 잠들면 다음에 돌려서 큰 딸과 같이 보기 시작했었다. 너무 청량한 일본만화재질이라서 어색하게 보기 시작했지만, 김태리가 너무 귀여워서 미스터션샤인 짤을 찾아보게 되더라. 그러다가, 점점 멀어졌다. 

채널다툼으로 초반부를 못 보다가, 보게 되면 늘 도입의 현재가 판타지에 낀 먼지같이 거슬렸었다. 그러다가 점점 더 현실과 가까워지면서 뭔가 심한데, 싶은 장면들을 만나게 되더라. 

7화에서 내내 나희도가 처음 펜싱을 시작하고 지금까지 아빠와의 애틋한 이야기들이 나왔다. 아빠를 통해 처음 만난 펜싱, 아빠를 통해 배우는 어떤 마음. 

11화에서 희도는 내내 엄마에게 원망을 토한다. 드라마 설정의 기이함에 더하여 양립불가한 삶의 어떤 면에 대해 생각한다. 장례식 형태로 존재하지 않는 우리 문화에서-여러 날을 두고 밤을 지내면서 보내지- 아빠의 장례식?에 오지 않고 특종을 알리는 엄마 설정은 기이하다고 생각했다. 보면서 나는 임종을 지키지 못한 거겠지, 라고 생각했는데, 정말 장례식장 묘사가 있었다. 어른은 엄마 뿐인데, 저게 뭐지, 싶은 장면이었다. 저럴 필요가 있어?라는 의구심에 이어, 조직 내에서 스스로를 약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기준이 높고 기준이 높기 때문에 더 희생하고, 기준이 높기 때문에 스스로를 더 질책하다가 회사를 그만 두는 여자들 생각이 났다. 

드라마에 멀어지는 순간들이다.

14화에서 유림이가 귀화하는 장면들은 도대체, 부모가 뭔가 싶었다. 명탐정 코난(https://blog.aladin.co.kr/hahayo/10888839)을 볼 때 들던 위화감같은 게 느껴졌다. 열심히 사는데, 망해버리기만 하는 부모의 묘사가 가혹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 상황에서 '가족이 없다면 내가 왜 펜싱은 하겠냐'며 국적을 버리고 귀화하는 것은, 도대체 뭐지, 싶었다. 어차피 가족도 국가처럼 허상인데, 싶기도 하고, 그렇게까지 책임지려는 태도는 과연 부모가 바라는 태도인가 싶었다. 유림이가 너무 기이해서 나는 다음을 다음을 기대하지 않게 되었다. 

애초에 청소년인 딸이, 엄마의 젊은 날 일기를 꺼내 보는 설정이 기분 나쁘다고. 서치의 장면들이 끔찍하다시는 자녀분들, 부모들도 자신의 젊은 날들을 들키고 싶어하지 않는답니다. 

반짝반짝 빚나던 희도가 저런 어른이 된다는 것도 싫고, 희도 엄마가 딸과 함께 아빠의 이야기를 나누지 않고 자신의 직업적 성공에 매진한다는 것도 싫고, 유림이 부모가 저렇게 젤리처럼 물렁해서 딸이 그런 선택을 하게 둔다는 것도 싫었다. 그래서 15, 16화는 정말 잠깐 봤는데, - 좋을 때만 사랑이고, 어려울 땐 짐이야, 따위의 말들로 상처를 준 다음, 연습하다 쓰러지고, 일기장에 그건 진심이 아니라고 하다가, 다음에 다시 울면서 헤어지는 장면들을 봤다- 디씨갤 보고는 안 봐도 되겠다, 싶었다. '나쁘다는 말이 많아서 좋아요'라고들 썼더라. 

첫사랑이 이어지기 보다 멀어지는 게 더 많겠지만, 내가 왜 드라마를 보겠냐고, 나 좋으라고 현실과는 너무 다른 이야기를 그냥 꾸며내는 것이 낫겠냐고 혹시 묻는다면, 현실과 같은 이별로 하고 싶은 이야기가 뭐냐고 묻고 싶달까. 설득하라고, 인생은 달고도 쓰고도 짜고도 시고도 맵겠지만, 사랑만큼 강경하게 이별도 설득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반짝, 하는 좋은 순간들은, 아마도 나중에도 기억이 나기는 할 거다. 

우리 관계는 무지개,라고 희도가 말하고, 나는 사랑,이라고 이진이가 말한다. 사랑은 품이 넓고, 사랑이란 말들에 많은 관계들이 들어간다. 그래서 나는 그 장면이 그 말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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