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혼을 넷플릭스로 1화부터 다시 보고 있다. 3화까지 보다가, 설연휴가 시작되는 바람에 연결이 끊어졌다. 

다시 보려니, 이야기 초반 내게 장애물이었던 게 무엇이었는지 다시 떠올랐다. 

그러니까, 나는 극 초반 장욱의 출생의 비밀에 계속 질문하고 있었다. 과연 저런 상황에서 장욱에게 선왕의 DNA가 나오려나. 몸이 장강의 몸인데, 그 아들은 장강의 아들이 아닐까, 같은 질문. 


극 말미에 진요원의 원장 진부연은 딸의 몸을 살려서는 몸이 자신의 딸 몸이기 때문에 그 몸을 이용해서 진씨가문의 후계를 얻으려고 한다. 오직 몸만을 도구로 삼아, 그 몸을 통해 나온 아이는 진씨가문의 후계가 된다고 생각한다. 시리즈의 끝에 딸의 몸에 들어온 낙수(조영)을 결국 받아들이면서, 이미 죽었을 아이의 몸이 그 덕에 살아갈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고 말한다. 


남자가 아이가 자신의 아이라고 자각할 수 있는 건 그 순간의 자각 뿐이다. 남자에게 중요한 것은 이렇게도 추상적이다. 

여자가 아이가 자신의 아이라고 자각하는 것은 길고도 긴 몸의 이야기다. 

그 순간은 어쩌면 긴 이야기 중 너무나도 짧은 순간일 뿐이고, 몸 속에서 기르는 그 과정을 통해서 아이는 여자의 아이가 된다. 


인간이 쌓았다는 문명이나 문화의 어떤 비유나 은유,의 많은 부분이 이런 동물적인 것들에서 비롯되었나 싶다. 오랫동안 여성의 몸이나 생식력을 터부시한 서양의 철학들이나, 남성을 하늘, 여성을 땅에 비유하는 동양의 사고나 은유는, 남성에게 영혼을 여성에게 육체를 부여하고 남자는 아이에게 영혼을 주고, 여자는 아이에게 육체를 부여한다는 사고를 진전시키는 식이다. 

신기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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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이 선이기 위해서는 그림자가 필요하다. 

너무 밝은 빛 만으로는 어둠을 감당하지 못한다. 

그림자를 품은 빛이라야, 악에 물들지 않을 수 있다. 

무슨 뜻일까. 


마지막화에서 부연이의 몸 속에 존재하는 두 개의 혼 중 진부연-진설란,이라고도-이 자신의 신력을 사용하기 위해 봉인했던 낙수 조영의 잠든 혼을 깨워서는 말한다. 세상을 구원한 빛에게 당신의 그림자를 돌려드리겠다고. 그림자를 품어 안은 빛은 절대 어둠에 들지 않을 거라고. 


돌봄과 작업,에서 '오염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조언한다는 것과 같은 거라고 생각했다.

흰 옷에 얼룩은 좋지 않지만, 작은 얼룩조차 참아내지 못한다면 지나치게 수고롭거나, 새 옷을 사는 수 밖에 없다. 지나치게 수고로운 것도, 새 옷을 사는 것도, 살아가는 것에 좋은 방식은 아니다. 지나치게 수고로운 것은 스스로를 괴롭혀서 지속할 수 없게 만들고, 새 옷을 사는 것은 결국 그걸 다른 누군가의 수고로 바꾸고, 지구를 더럽힌다. 


그림자는 어둠처럼 보이지만 빛이 없다면 그림자는 없다. 

그림자를 품어안은 빛이라는 말, 어둠에 들지 않을 거라는 말을 선이나 악에 대한 은유로 본다. 


결벽적인 어떤 주장들이 그렇게 치우치는 이유가 그런 것인가, 생각한다. 

결벽적인 주장들, 눈곱만큼도 용납하지 않는 얼룩에 대한 이야기들을 듣고 있으면, 그 의도에 대해서 의심하는 순간들이 많다. 그런 삶은 없는데, 삶은 아주 뒤죽박죽 엉망진창인데, 어떻게 저렇게까지 단정함을, 어떻게 저렇게 까지 완벽함을 요구할까 싶은 주장들에 의심한다. 

옳다는 것은 굉장히 어렵고 다양하다. 시간에 따라, 사람에 따라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 

극단적인 양 끝은 주장을 저쪽은 이쪽으로 당기고, 또 이 쪽은 저쪽으로 당기고 있다. 


그림자가 없다면 빛은 어둠과 다르지 않다. 

밝기만 해서는 어둠처럼 눈을 가려서 여기가 어딘지조차 알아볼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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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마지막화를 봤다. 비극을 각오했는데, 해피엔딩으로 닫혔다. 

정말 해피엔딩이라고 할 수 있을까,는 지금 이 이야기에 한해서, 두 사람의 사랑에 한해서 라고 말해야지. 

장욱의 금패는 세자가 왕이 되는 데 쓰였고, 진무는 화조의 불길 속에 타 죽었다. 


진무는 약한 자였으면서, 강한 자가 되고 싶었다. 

자신보다 강한 자들이 명분이나 제도,로 그 힘을 자제하지 않았다면 그 힘을 축적하지도 못 했을 존재였으면서-진요원의 문을 열 수 없는 진씨가문 남자, 모계로 여성에게만 전해지는 힘을 가지지 못하는 명문가의 혼외자, 그래서 하잘 것 없는 약과 때문에도 마음이 상한다- 스스로 가장 강하기를 꿈꾸면서 세상의 혼돈이나 자신보다 약한 자의 어떤 괴로움이나 고통은 무시해도 된다고 생각해 버린다. 그러고는 세상의 혼돈과 약한 자의 고통을 무시하지 못하는 자신보다 강한 자에게 죽임을 당한다. 그래, 내가 바란 세상이지, 강한 자가 그 힘을 휘두르는,이라고 웃으면서 사라지는 진무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힘을 행사하는 장욱은 참으로 싫었을 거 같다. 환혼인을 처단하는 데에만 그 힘을 쓰는 힘을 스스로 봉인한 장욱이 만장회 술사들까지 불길 속에 태우면서, 환혼인 진무의 그 기이한 웃음을 듣는 것은 싫을 거 같았다. 

죽음조차 뛰어넘는 강한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은 행운이라기보다는 저주고, 이 이야기가 결국 모두의 죽음으로 닫힐 거라고 생각한 것은, 장욱의 얼음돌이 사라져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얼음돌이 있어서 죽음에서 살아 돌아왔다. 얼음돌이 있어서 살아 돌아온 진부연이 결국 얼음돌을 꺼내어 사라지게 해야 세상이 평화로워진다고도 생각했었다. 

얼음돌이 그저 비유나 은유라면, 사라지지 않는 것일 수도 있겠지, 싶다. 

 

세상은 평평하지도, 사람은 모두 똑같지도 않다. 모두 다른 사람들, 근력도 키도, 마음의 단단함도 모두 다른 사람들이 작게는 가족, 가문,으로 서로를 버티고 크게는 나라로 서로를 버티고 있다. 오랜 시간 동안 쌓인 것들을 무화시키고 시작할 방법은 없다. 

그저 받아들이고 시작해야 하는 세상의 울퉁불퉁함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 

세상의 울퉁불퉁함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살아낼 수 있나. 


가장 강하지는 않더라도, 나보다 약한 존재가 있음을 안다. 

힘은 나보다 세도, 마음은 나보다 약한 사람도 있다. 

서로 다른 존재에 기대면서, 나의 강한 면으로 상대의 약한 면을 돌보고, 상대의 강한 면에 나의 약한 면을 의지하면서, 그렇게 살아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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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덕이는 가난한 동네 사리촌에서 할머니와 살다가 일찍 죽었다. 

부연이는 고귀한 신녀가문 진씨 집안에 큰 딸로 태어나, 귀하게 살다가 아버지와 외삼촌 손에 죽임을 당했다. 물에 빠졌는데, 다행히 살아서, 가난한 할머니의 손녀 무덕이가 되어 자랐다. 

영이는 별을 보는 아버지의 귀한 딸로 살다가 환혼인이 되어 폭주하는 아버지가 가문의 사람들을 도륙하다가 결국에 죽임을 당하는 걸 목격한다. 아버지의 폭주는 알지 못하고, 아버지를 죽인 사람들을 원수로 삼아 잘못된 사람을 따라 살수가 되어 꽃처럼 목을 떨어뜨린다고 낙수,라는 별명을 얻는다.

부연이로 태어났으나, 무덕이로 십년을 산 이 소녀는, 낙수라는 별명을 얻은 영이가 죽음을 앞에 두고 환혼하는 순간 그 영혼을 잡아 자신의 몸에 가둔다. 무술을 하는 강한 낙수는 눈 먼 약한 몸에 들어가 다른 존재가 된다. 

내가 아는 무덕이는 부연이의 얼굴을 하고, 가난한 집의 눈먼 소녀 무덕이로 십년을 살다가, 이제 영이의 영혼을 잡아 가두면서 눈을 뜬 무덕이다. 보통은 강한 낙수의 영혼이 우세하고, 낙수의 영혼을 잡아두느라 부연이의 영혼은 잠깐씩 나타난다. 

부연이의 얼굴로 낙수의 영혼을 품고, 낙수의 태도로 살아가는 무덕이가 욱이를 만나고 사랑하고, 그러다가 폭주했다. 욱이를 칼로 찌르고, 돌이 되어가는 몸을 던져 잠기던 무덕이는 뒤늦게 부연이임을 알아차린 신녀가문에 의해 건져졌다. 돌이 되어가는 몸을 고치면서 이제 무덕이는 낙수의 얼굴을 하게 되었다. 

좀 더 크고, 좀 더 강하던 낙수의 몸 대신에, 여전히 작고 약하지만 얼굴은 낙수의 얼굴이 되어 기억을 모두 잃고 살아났다. 

부연이의 얼굴로 자신을 낙수라고 생각했던 시즌 1의 무덕이는 이제 없다. 

이제 낙수의 얼굴로 스스로를 부연이라고 생각하는 시즌 2의 무덕이가 있다. 

관계는 달라지고, 이야기는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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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얼업,을 본방으로 보고 있다. 뭘 그렇게 좋아하는지, 생각하고 있다. 엊그제는 본방을 보고, 알고리즘이 안내한 연고전 응원전까지 보고, 으잉, 16부작 대학광고인가 싶다가도, 그런데도 역시 좋은 건 뭔지 생각하는 거다. 삼각관계. 엇갈린 짝사랑. 이런 것도 좋은데, 뭘까. 

저 떼샷들이 아련한 과거처럼 그립다. 

이제 나는, 딸을 보듯이 여주인공을 보고, 저 청량한 색감에 '좋을 때다'라고 말하는 엄마가 되어, 으이구, 술 좀 작작 마셔라. 좀 경계하는 마음을 가지라구! 그런다. 

그러면서도 부럽다. 같이 뛰고 같이 공부하고, 같이 먹고, 같이 놀고, 그렇게 시간을 함께 보내는 한 무리의 또래집단. 무한한 가능성이라는 불안한 미래를 같이 지고, 함께하는 청춘. 성균관스캔들에서 재신(유아인)이 선준(박유천)에게 하던 말 그대로, '그러라고 있는 거다, 어울리라고'. 그런 거 같다. 

한국의 입시문화가 N수,라는 이상한 문화를 만든다는 비판을 듣기도 하고, 고등학교를 마치고 취직한 동료에게 아니예요, 좋아요, 어차피 대학 졸업하고도 취직하려고 애쓰는데, 공부야 나중에 하면 되지요, 했지만, 치얼업을 보고 있으니, 부모가 공부하라고 대학에 보내는 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을 겪은 부모는 세상을 좀 늦게 알았으면 하고 바라는 것도 같다. 할 수 있는 한 보호하고 싶다, 할 수 있는 한 미뤄주고 싶다,라는 부질없고 안타까운 어리석은 마음이다. 

지나치게 사랑하는 부모들의 나라에서, 사랑받는 아이들이라 넘치는 부는 언제나 교육으로 흐르게 되는 것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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