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에서 끝내지. 

이상한 엔딩이네. 

"야, 아빠가 애들을 패면 애들이 가출하고, 아빠가 다정하면 애들이 저 나이가 되도록 독립을 안 하는 거라니?"

아이들이 보는 드라마라 같이 봤는데, 아이들한테 이런 소리나 하게 되더라. 

무인도에서 15년을 버티고 살아남은 목하나, 폭력적인 친부로부터 도망쳐서 살아남은 기호나, 이제 아빠가 필요없을 나이인데도 왜 그렇게까지 하는 걸까. 애도 아닌데. 그렇게까지 했어야 할까. 


검사실의 대질신문 장면에서, "아, 솔로몬의 재판에서 아이를 찢어 달라던 여자가 생모일 수도 있었겠네." 그랬다. 희박하다고 해도 그럴 수도 있겠네. 아이를 보호할 사람에게 아이를 맡겨야 한다는 면에서, 솔로몬의 재판은 다른 이야기일 수도 있겠네. 싶었다. 


기이하게 다정한 새 아버지의 묘사 가운데, 그 아버지가 목하에게까지 다정한 아버지가 되어 주고, 드라마의 마지막이 목하와 기호의 새롭고 독립된 가족이 아니라, 목하까지 포섭한 그 아버지의 가족이라는 것에 놀랐다. 


친구에게 '너는 원가족에 유대가 약해?'라고 질문 받았을 때 '유대의 강약이 문제가 아니라, 거기서는 내가 쫄따구니까 대장이 하고 싶었다고!' 라고 대답했던 터라. 저 기이한 행복의 묘사에 좀 무서웠다. 

나는 이제 아이가 아니라 부모니까, 내가 아이들을 너무 다정하게 대해서 독립하지 않는다면 큰일인데,라는 생각을 했다. 내가 대장인 이 가정에서 아이들이 안정감도 만족감도 느꼈으면 좋겠지만, 그렇다고 아이들이 독립해서 대장이 되어 보겠다고 결심하지 않는다면 너무 무섭다.

다정한 부모도 폭력적인 부모도 답은 아니고, 적당한 부모가 되어야 하고, 아이는 자랐으면 어른이 되어야지!!! 무슨 아이처럼 이 행복이 영원했으면,으로 끝을 냈을까, 싶은 결말이었다. 


서목하의 공연무대로 끝내는 편이 나는 더 좋았을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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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랑캐에게 어깨를 잡힌 저는 정절을 잃은 것이옵니까?"라고 은애가 물었다. 

남연준은, 그렇다고, 어깨를 잡힌 여인은 자결했어야 한다고 대답한다. 아무 것도 속이지 않은 당신이 내게 그 얘기를 지금껏 숨겼다니 오랑캐를 용서할 수 없다고도 했지. 


남연준의 결벽적인 태도에 대해 생각하고, 젊은 유생들이 따르는 장철에 대해서도 생각한다. 


아빠는 너무 맑은 물에는 물고기가 살 수 없다,라고 내게 이야기했다. 

교양수업으로 들었던 행정수업에서인가 교수님이 너희들이 알아들을 리 없다는 표정과 태도로 '부패란 게 절대 악처럼 보이겠지만, 그렇지만은 않다'라고 이야기하셨던 기억이 있다.

오염되는 걸 두려워하지 말라,던 조언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던 엄마 연구자의 말(돌봄과 작업, https://blog.aladin.co.kr/hahayo/14235302)도 떠오른다. 

충분히 좋은 엄마,를 읽을 때는 아이들의 타고난 도덕성이 얼마나 결벽적인지에 대한 묘사에 밑줄을 그었다.(사실 아이의 타고난 도덕성은 날것의 공포로부터 발달하기 시작하기 때문에 엄마나 아빠의 도덕성보다 훨씬 더 강렬합니다. 아이에게는 오로지 진실되고 진짜인 것만이 중요합니다. 아이가 실제 감사함을 느껴서가 아니라 그저 예의로 감사하다고 말하게 하기 위해선 우리가 훨씬 더 많은 공을 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p187~188 (https://blog.aladin.co.kr/hahayo/14013722)


극단적으로 흐르는 의견의 흐름은, 젊은이에 부응하는 사람들 때문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아직 세상에 나서지 않았고, 스스로 모순된 상황에 처해본 적 없는 젊고 어린 사람들이 세상의 일들을 보면서, 타고난 결벽적 도덕성으로 단죄하려 든다. 젊은이들의 태도에 부응해서 자신의 입지를 높이는 장철같은 사람들이 또 있다. 

너무 맑은 물에는 물고기조차 살지 못해서, 장철은 자기 아버지의 죄를 인정하고 스스로 오염되는 대신, 무고하게 노비가 된 정적의 자식을 때려죽이고, 자신의 딸을 스스로 죽도록 명령하고, 자신의 아들이 아비와 절연하도록 만들고, 결국 아들조차 죽게 한다. 

어깨를 잡히는 것조차 정절을 잃은 것이라 자결을 택했어야 한다고, 흔들리는 눈으로 질문하는 아내에게 답하는 남연준은 아내가 떠난 집에서 목을 멘다. 다시 돌아온 아내 품에서, '나는 여전히 당신의 남편이냐'고 묻는 남연준은 안쓰러웠다. 

겁에 질린 사람들은 잔인해져서 결벽적인 기준으로 사람들을 밀어낸다. 

겁에 질린 사람들의 결벽적인 기준은, 세상을 잔인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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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인 가족 가운데, 유일한 청인 인 하은결은 모범생으로 가족들의 통역사로 살아가는 중에, 기타를 배운다. 자기만의 비밀로 기타를 배우고, 거리공연을 하다가 정식으로 밴드멤버가 된다. 하은결의 아버지는 아직 고등학생인, 공부를 잘 해서 자랑스러운 자신의 아들이 다른 직업을 갖기를 바라면서 반대한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면서 아버지와의 갈등이 폭발-폭발이라 하기에는 소리가 없지-하는 와중에 타임슬립해서 하은결은 지금 자신과 같은 나이의 아버지가 사는 시대로 이동한다. 2023년의 하은결인 채로, 1995년의 아버지 하이찬을 만나서 같이 밴드를 한다. 사고로 청력을 잃은 후천적 농인인 아버지의 청춘이 어땠는지, 선천적 농인이었던 어머니는 어땠는지 만난다.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데, 계모에게 말하기를 강요받는 어머니의 애달픈 삶을 개선하고, 아버지의 사고를 막겠다는 아무도 주지 않은 미션을 스스로 부여해서는 1995년의 모험을 한다. 돈 번다고 자신의 딸은 학대하는 계모 아래 두고 밖으로만 도는 어머니의 부자 아버지, 그러니까 있었던 미래에는 존재를 몰랐던 연락도 없던 외할아버지를 1995년 아직 들을 수 있는 하이찬(아버지)이 미래의 어머니 윤청아와 함께 만나서 이야기한다. 


"아버지는 세상 풍파를 막는 방패라고, 나에게는 그런 아버지가 없었지만, 청아(미래의 부인이고, 하은결의 어머니)에게는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한 말은 아니고 헤밍웨이가 한 말이라고 합니다."

"헤밍웨이, 아니고 스탕달. 아버지 아니고 어머니. 무슨 뜻인지는 알아들었어"


타임슬립물에서 미래를 해피하게 바꾸는 설정,에 거부감을 갖는다. 기존의 미래?라는 것과 너무 멀어지지 않아야, 이 타임 슬립 자체가 유효한 게 아닌가, 생각하는 거지. 같은 과거를 거치지 않고, 같은 존재의 사람이 과연 될 수는 없는 게 아닌가, 생각하는 거다. 바꿀 수도 없는데 여행을 왜 하겠어?라고 뭔가 목적론자 같은 태도가 있을 수는 있지만, 여행 후에 달라진 게 나 뿐이어도, 삶은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나는, 즐겁게 따라온 청량한 드라마의 엔딩에는 실망한다. 


그대로 옮겨놓고 싶었던 저 대화는 즐거웠고, 미래에서 온 아들이라고 주장하는 동년배 소년에게 아버지에게 받을 만한 느낌을 받았다는 외로운 소년은 좋았다. 

부유하고 화려한 미래,라는 나의 불편한 엔딩은 이 이야기를 보는 사람이 사십대 자아가 없다는 나같은 사람이 아니라, 아직 청량한 젊은이들이길 기대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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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토요일(2023년 9월 9일, ep280) 놀라운 토요일, 을 보고 있었다. 

빽가, 전소미, 정동원이 게스트로 나왔다. 게스트소개를 하고, 시장을 한 바퀴 돌고, 1라운드 음식으로 얼큰해물수제비가 소개되었다. 

빽가가 "작가들이 너무했네. 나는 해산물을 못 먹는데"라고 투덜거리니까, 

문세윤이 잽싸게 "귀인이로구나!!!"라고 말했다. 

그 짧은 순간, 확 변하는 분위기가 좋았다. 

엄마라서 그런가, 어릴 때라면, 빽가에 이입했을려나. 나는 빽가가 그렇게 말했을 때 좀 미운 마음이 생겼고, 내가 그 작가라도 된 듯 불편한 마음이 되었다. 그런데, 문세윤이 "귀인이로구나!"라고 말하는 순간, 조그맣게 뭉치던 미운 마음이 훅 풀어져서는 픽 웃음이 났다. 열명 넘는 사람들 입맛을 모두 다 맞출 수 없다. 누구는 샐러드가 좋고, 누구는 국물이 있어야 한다. 해산물을 못 먹는 사람이 손님으로 오면 그 사람이 못 먹는 걸 내가 먹을 수 있으니 그 사람은 나에게 귀인이 된다,고 문세윤은 말할 수 있는 거다. 뒤에서 태연은 열무비빔밥이 같이 나온다고 그걸 드시면 된다고 빽가에게 말해주고 있다.

분위기,라는 게 있다. 좋은 분위기라야 좋은 장면을 만들 수 있다. 드러내어 말할 수 없는 미운 마음,은 분위기를 다르게 만든다. 생각해보면 내가 말은 못하고 뒤에서 미운 마음을 뭉치곤 하는 사람이라서, 그런 것도 같다. 상황에는 언제나 좋은 점도 나쁜 점도 있고, 모든 면을 완벽하게 누구나를 완전히 만족시킬 수 없다. 그런데, 그런 상황에서도 다른 해석을 빠르게 낚아채서 웃을 수는 있다. 빽가는 자신에 대해 알아주지 못한 작가가 서운했을 수 있고, 발언권 없는 작가는 그저 미운 마음을 뭉치고 있을 수도 있었는데, 문세윤은 날렵하게 상황을 눙쳤다.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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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회인가를 보고 거울을 볼 수 없었다. 너무 무서워서 그만 보려고 했는데, 어쩌다보니 마지막화까지 봤다. 

악귀,라는 제목이지만, 악귀가 정말 악귀인가 싶은 사건들 가운데, 이입하기 힘든 이야기에 숨쉴 틈이 없이 진지하다고 생각하면서 봤다. 

끝까지 보고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은 젊은이를 타깃으로 할 수 밖에 없어서 이야기가 이런가, 생각했다. 

무능한 엄마에 대한 묘사를 나는, 싫어한다. 구산영의 엄마는 산영이가 아기였을 때 이혼하고 그 집을 벗어났고, 친정엄마를 그런 식으로 잃고 나서, 미혼모나 다름없는 상황에서 구산영이 성인이 될 때까지 키웠는데, 왜 저런 식으로 묘사할까 생각했다. 구산영의 엄마가 그렇게 무능했다면, 도대체 무슨 수로 구산영을 키울 수 있었을까. 고등학생 때부터 운동장의 동전을 줍고, 엄마가 친 사고를 수습하는 딸로 묘사되는 구산영은 살고 싶지 않을 만큼 괴로운 것으로 묘사된다. 

나는, 이런 식으로 서로가 서로를 얽매는 관계에서, 일방적으로 상대를 묘사하는 무능은 진실이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구산영의 자기 확신이 엄마의 무능을 강화하는 관계였겠지- 이야기는 타깃이 젊은이고, 젊은이의 눈에 구산영의 불운은 엄마의 무능에 있는 것이어야 했을까.

 

악귀,의 존재에 대한 연민을 일으키는 과거 사건의 묘사는 이야기의 카타르시스를 많이 혼란스럽게 한다. 왜 이런 연민을 불러일으키고도 평화롭게 보내줄 수 없었을까. 악귀의 악행은 자신의 의지가 있었던 걸까. 악귀의 의지는 무엇으로 어디로 향하는 건가. 

이용당하는 악귀, 이용하는 무당과 염해상의 할머니 사이에서는 악귀가 불쌍해 보이다가, 다시 구산영과 악귀 사이에서 구산영이 불쌍해지는 거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이라는 댓가가 악귀에게 무슨 소용이 있을까. 어머니도 죽고, 아버지와 오빠도 죽고, 그 순간 자신만을 생각했다면 살 수도 있었던 향이가 그 돈들을 보따리에 싸가지고 가서 동생을 살려 달라고 내밀 때, 악귀,라고 부르기에 불쌍한 향이가 왜 어느 순간 '자신만을 위해 살기 원하는' 악귀가 되었을까. 이미 무당은 향이를 그런 존재라고 설명할까. 산영이 마음 속에 작게 솟은 누군가를 죽이고 싶은 마음을 꽉 잡고 실행에 옮길 때, 무엇을 이용하고 있는 걸까. 라이토의 데쓰노트, 같은 걸 젊은이에게 준 걸까, 싶은 생각도 든다. 

악귀,의 존재가 그저 증명하지 못하는 어떤 죽음들에 대해 법이나 제도의 한계를 드러내기 위한 것인가,라는 생각도 한다. 법으로는 방법이 없고, 세상에는 그런 일이 있어, 라는 걸까. 싶기도 하다. 이제 무엇이든 할 수 있고, 해결할 수 있다는 확신에 찬 한 시대를 떠나보낸 것인가,라고도 생각했다.

 

마지막화를 보면서는, 젊은이가 죽고 싶어하는 이유가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아서'라고 생각하는가 의문을 품었다. 나는, 젊은이가 '완벽한 삶을 살 수 있다고 상상하기 때문에'https://blog.aladin.co.kr/hahayo/13054698 사는 걸 버거워하는 거라고 생각한다. 사는 건 즐거움의 축제,라기 보다는 고통의 바다,인데, 나도 젊었을 때는 즐거움의 축제일 수 있다고 생각했었다. 나를 착각할 수 있게 한 부모의 보호 아래서 내 자신을 거대하게 상상하면서 인생의 어느 단계 어떤 성취만으로 다음 순간의 평안이 보장된다고도 생각했다. 인생에 무언가를 보장하는 성취 따위는 없고, 매 순간 나의 선택이 다음을 만들고, 다음 순간에는 다른 고통이 있다는 걸 살아가면서 매 순간 느낀다. 스스로를 책임져야 하는 순간이 점점 커지고, 어느 순간 부모조차 너무 작아져서, 삶이 버거운 순간들에 이게 삶이라는 걸 알고 있다. 

게다가 보기에 아쉬울 것 없는 삶들도 나름의 고통으로 괴롭다는 걸, 또래의 죽음들 가운데 안다. 자아라는 게 환상에 불과하고, 삶의 어느 순간 자아는 없는 거라는 걸 깨닫게 된다고 생각하는 나는, 나 자신을 위해 살고 싶다,는 산영이의 말은 스스로를 죽여왔던 자신에 대한 다른 말인 건 알지만, 지금 젊은이들이 산영이처럼 자신을 억눌러야 하는 순간들에 그렇게 억울해 해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 함께 살기 위해 필요한 참음,을 그렇게까지 억울해하면 어떻게 같이 살 수 있어, 싶은 순간들,이 있어서. 

이야기의 어떤 면에도 불구하고, '내가 그 동안 너무 나를 억누르고 참기만 했어. 앞으로 안 그럴래'라는 말이 현실의 어떤 세태와 맞물려서 무섭네,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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