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남행선,을 좋아했다. 기꺼이 책임지는 사람인 남행선이 훌륭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최치열,은 그저 그랬다. 어쩔 수 없이 하는 일이라고 해도, 일타강사,라는 직업은 입시지옥 없이 존재하기 어려운 일이고, 입시지옥에 대해 묘사하는 드라마의 끝 어딘가에서 다른 직업을 갖게 되기를 바랬다. 

남해이,는 나쁘지만 어리기 때문에 그럴 수 있다고, '엄마는, 엄마가 아니라 이모예요. 미혼이구요'라고 그래도 문제를 바로잡았기 때문에 되었다고 생각했다. 

애들도 재밌다고 같이 봐서 좋았다. 10화 즈음 서로의 사랑을 확인한 다음 로맨스가 동력을 잃고, 스릴러로 점프했다. 

학부모와의 스캔들 따위로 일타강사가 저렇게까지 굴러떨어질 일은 없다고, 고딩인 큰 애는 대한민국수험생을 너무 모르네,라고 했었다. 대한민국 수험생은 라이벌강사에게 명예훼손성 댓글로 실형을 살게 된 일타강사에게, 인강 찍어놓고 감옥가라고 한다고 했지. 

이상한 스릴러가 범인의 자살로 스리슬쩍 마무리되고, 뻔뻔한 엄마가 반성하고 떠나고, 딸을 채찍질하며 허영심을 채우던 엄마는 여전히 딸을 앞세우고, 학원 상담실장을 하고 있고, 여전히 일타강사는 일타강사인 26년의 미래는 싫었다. 

아이들에게는 말하지 못한 나의 불만은, 로맨스의 끝으로 택한 결혼을 대하는 행선이었다.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좋은 감정을 나누면서도, 이런 저런 문제들로 진전없던 둘이 다시 뜬 스캔들로 서로에게 청혼한다. 그 스캔들은 그저 오해라고 달려온 최치열앞에, 행선도 자신이 준비한 반지를 끼워주면서 청혼한다. 그런데!!!! 치열의 청혼까지 받은 다음, 결혼은 해이가 수능치르고, 자신이 스포츠지도자 합격한 다음에 하겠다고 한다. 에???? 내일 죽어도 이상할 게 없다고 생각하는 나의 어떤 태도는 저게 청혼에 대한 답으로 합당한가, 생각하는 거다. 뭐 사정이야 그럴 수 있지만, 청혼 순간의 대답은 언제나 빠르고 신속한 '그래!!'여야 한다고, 이런 저런 사정설명은 다음 장면에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데다가, 수능이나 스포츠 지도자 합격이 왜 결혼의 전제조건?따위가 되어야 하는지 납득이 되지 않았다. 

사내맞선,의 신하리,가 청혼에 하는 대답-봐서,라고 했지-도 정말 싫었는데 이건 뭐지, 싶다. 나의 불만을 들은 친구는, 요즘 세태가 남자는 결혼을 하고, 여자는 결혼을 해주는 거라면서 참 싫다고 했다. 

영주처럼, 혼인신고 먼저 하고 애부터 가졌어야지. 

답없는 남행선!!!!! 


사람많은 데서 키스하는 걸로 마치다니, 무슨, 궁도 아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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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행선,은 학원가 동네에서 반찬가게를 하고 있다. 고 2인 남해이는 언니의 딸이지만, 어린 나이에 맡겨진 조카는 이모를 엄마라고 부르고 싶어했고 지금까지 자신을 엄마라고 부른다. 남동생은 아스퍼거 증후군에 심장이 약하다. 고시식당을 했던 엄마는 어린 딸을 내던지듯 맡기고 가 버린 큰 딸을 쫓아나갔다가 차에 치어죽었다. 

규칙적이고, 집착적이고, 사회성 떨어지는 아스퍼거 증후군을 가진 남동생 재우는, 병원에서 일타강사 최치열 옷에 멋지게 새겨진 호랑이 자수를 촬영했다가 오해를 산다. 

재우는 또, 정해진 시간, 맛있는 와플을 먹기 위해 산책을 나간다. 와플을 더 맛있게 굽는 알바의 이름을 외우고, 그 알바의 근무시간에 맞춰서 와플을 사 먹는다. 그러다가 스토커라는 오해를 산다. 

그 알바는 자신이 일할 때, 찾아오는 그 남자가 이상해서, 근무 시간을 바꾸고 그러고도 무서워서 남자친구와 함께 일을 했다. 근무시간을 바꿨는데도 그 이상한 남자는 바뀐 시간에 다시 찾아왔다. 자신의 남자친구를 옆에 세우고, 겁을 잔뜩 집어먹고 와플을 건네는 알바는 뭔가 긴장한 채여서 손이 닿았고 재우는 남자친구에게 맞는다. 재우가 한 일이라고는 와플을 사서 먹고 돌아간 것 뿐인데도 겁을 냈다. 경찰서에서 행선이 눈물을 흘리면서 사과했을 때, 그 여자는 카페에 다시 오지 않는 조건으로 사과를 받아들인다. 행선은 재우에게 와플기계를 사주기로 하고 사건은 마무리된다. 

재우는 와플을 먹고 갔을 뿐인데, 왜 그 여자는 무서웠을까. 

그럴 수 있다. 무서운 이야기가 많고, 이상한 사람도 많다.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나쁠 수도 당연히 있다. 

그러니까, 세상에 '뭘 봐?'로 시작하는 시비가 그렇게 많은 게 아니겠는가. 

뭘 봐?로 시작하는 그 많은 시비들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뭘 볼 수는 있지만, 눈빛으로는 나를 어쩌지 못하니, 뭘 봐?라고 묻고 싸움을 시작하지 말아야 하는 게 아닌가, 라는 게 나의 생각이다. 싸우자,는 눈빛이라고 단정하고 뭘 봐?라고 묻는 대신, 저 제게 무슨 문제라도?라고 물어볼 수도 있고 말이지. 

저 사람이 나를 보는 것 같아서 기분이 나쁜 것은 나의 기분이니까, 여기가 안전하고 열린 공간이라면 좀 더 겁내지 않아도 되는 거 아닌가. 그저 물어봐도 좋았을 텐데. 투명한 재우라면, 제일 와플을 맛있게 굽는다고 듣기에 기분좋을 진실을 말해줬을 텐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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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혼을 넷플릭스로 1화부터 다시 보고 있다. 3화까지 보다가, 설연휴가 시작되는 바람에 연결이 끊어졌다. 

다시 보려니, 이야기 초반 내게 장애물이었던 게 무엇이었는지 다시 떠올랐다. 

그러니까, 나는 극 초반 장욱의 출생의 비밀에 계속 질문하고 있었다. 과연 저런 상황에서 장욱에게 선왕의 DNA가 나오려나. 몸이 장강의 몸인데, 그 아들은 장강의 아들이 아닐까, 같은 질문. 


극 말미에 진요원의 원장 진부연은 딸의 몸을 살려서는 몸이 자신의 딸 몸이기 때문에 그 몸을 이용해서 진씨가문의 후계를 얻으려고 한다. 오직 몸만을 도구로 삼아, 그 몸을 통해 나온 아이는 진씨가문의 후계가 된다고 생각한다. 시리즈의 끝에 딸의 몸에 들어온 낙수(조영)을 결국 받아들이면서, 이미 죽었을 아이의 몸이 그 덕에 살아갈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고 말한다. 


남자가 아이가 자신의 아이라고 자각할 수 있는 건 그 순간의 자각 뿐이다. 남자에게 중요한 것은 이렇게도 추상적이다. 

여자가 아이가 자신의 아이라고 자각하는 것은 길고도 긴 몸의 이야기다. 

그 순간은 어쩌면 긴 이야기 중 너무나도 짧은 순간일 뿐이고, 몸 속에서 기르는 그 과정을 통해서 아이는 여자의 아이가 된다. 


인간이 쌓았다는 문명이나 문화의 어떤 비유나 은유,의 많은 부분이 이런 동물적인 것들에서 비롯되었나 싶다. 오랫동안 여성의 몸이나 생식력을 터부시한 서양의 철학들이나, 남성을 하늘, 여성을 땅에 비유하는 동양의 사고나 은유는, 남성에게 영혼을 여성에게 육체를 부여하고 남자는 아이에게 영혼을 주고, 여자는 아이에게 육체를 부여한다는 사고를 진전시키는 식이다. 

신기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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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이 선이기 위해서는 그림자가 필요하다. 

너무 밝은 빛 만으로는 어둠을 감당하지 못한다. 

그림자를 품은 빛이라야, 악에 물들지 않을 수 있다. 

무슨 뜻일까. 


마지막화에서 부연이의 몸 속에 존재하는 두 개의 혼 중 진부연-진설란,이라고도-이 자신의 신력을 사용하기 위해 봉인했던 낙수 조영의 잠든 혼을 깨워서는 말한다. 세상을 구원한 빛에게 당신의 그림자를 돌려드리겠다고. 그림자를 품어 안은 빛은 절대 어둠에 들지 않을 거라고. 


돌봄과 작업,에서 '오염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조언한다는 것과 같은 거라고 생각했다.

흰 옷에 얼룩은 좋지 않지만, 작은 얼룩조차 참아내지 못한다면 지나치게 수고롭거나, 새 옷을 사는 수 밖에 없다. 지나치게 수고로운 것도, 새 옷을 사는 것도, 살아가는 것에 좋은 방식은 아니다. 지나치게 수고로운 것은 스스로를 괴롭혀서 지속할 수 없게 만들고, 새 옷을 사는 것은 결국 그걸 다른 누군가의 수고로 바꾸고, 지구를 더럽힌다. 


그림자는 어둠처럼 보이지만 빛이 없다면 그림자는 없다. 

그림자를 품어안은 빛이라는 말, 어둠에 들지 않을 거라는 말을 선이나 악에 대한 은유로 본다. 


결벽적인 어떤 주장들이 그렇게 치우치는 이유가 그런 것인가, 생각한다. 

결벽적인 주장들, 눈곱만큼도 용납하지 않는 얼룩에 대한 이야기들을 듣고 있으면, 그 의도에 대해서 의심하는 순간들이 많다. 그런 삶은 없는데, 삶은 아주 뒤죽박죽 엉망진창인데, 어떻게 저렇게까지 단정함을, 어떻게 저렇게 까지 완벽함을 요구할까 싶은 주장들에 의심한다. 

옳다는 것은 굉장히 어렵고 다양하다. 시간에 따라, 사람에 따라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 

극단적인 양 끝은 주장을 저쪽은 이쪽으로 당기고, 또 이 쪽은 저쪽으로 당기고 있다. 


그림자가 없다면 빛은 어둠과 다르지 않다. 

밝기만 해서는 어둠처럼 눈을 가려서 여기가 어딘지조차 알아볼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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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마지막화를 봤다. 비극을 각오했는데, 해피엔딩으로 닫혔다. 

정말 해피엔딩이라고 할 수 있을까,는 지금 이 이야기에 한해서, 두 사람의 사랑에 한해서 라고 말해야지. 

장욱의 금패는 세자가 왕이 되는 데 쓰였고, 진무는 화조의 불길 속에 타 죽었다. 


진무는 약한 자였으면서, 강한 자가 되고 싶었다. 

자신보다 강한 자들이 명분이나 제도,로 그 힘을 자제하지 않았다면 그 힘을 축적하지도 못 했을 존재였으면서-진요원의 문을 열 수 없는 진씨가문 남자, 모계로 여성에게만 전해지는 힘을 가지지 못하는 명문가의 혼외자, 그래서 하잘 것 없는 약과 때문에도 마음이 상한다- 스스로 가장 강하기를 꿈꾸면서 세상의 혼돈이나 자신보다 약한 자의 어떤 괴로움이나 고통은 무시해도 된다고 생각해 버린다. 그러고는 세상의 혼돈과 약한 자의 고통을 무시하지 못하는 자신보다 강한 자에게 죽임을 당한다. 그래, 내가 바란 세상이지, 강한 자가 그 힘을 휘두르는,이라고 웃으면서 사라지는 진무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힘을 행사하는 장욱은 참으로 싫었을 거 같다. 환혼인을 처단하는 데에만 그 힘을 쓰는 힘을 스스로 봉인한 장욱이 만장회 술사들까지 불길 속에 태우면서, 환혼인 진무의 그 기이한 웃음을 듣는 것은 싫을 거 같았다. 

죽음조차 뛰어넘는 강한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은 행운이라기보다는 저주고, 이 이야기가 결국 모두의 죽음으로 닫힐 거라고 생각한 것은, 장욱의 얼음돌이 사라져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얼음돌이 있어서 죽음에서 살아 돌아왔다. 얼음돌이 있어서 살아 돌아온 진부연이 결국 얼음돌을 꺼내어 사라지게 해야 세상이 평화로워진다고도 생각했었다. 

얼음돌이 그저 비유나 은유라면, 사라지지 않는 것일 수도 있겠지, 싶다. 

 

세상은 평평하지도, 사람은 모두 똑같지도 않다. 모두 다른 사람들, 근력도 키도, 마음의 단단함도 모두 다른 사람들이 작게는 가족, 가문,으로 서로를 버티고 크게는 나라로 서로를 버티고 있다. 오랜 시간 동안 쌓인 것들을 무화시키고 시작할 방법은 없다. 

그저 받아들이고 시작해야 하는 세상의 울퉁불퉁함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 

세상의 울퉁불퉁함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살아낼 수 있나. 


가장 강하지는 않더라도, 나보다 약한 존재가 있음을 안다. 

힘은 나보다 세도, 마음은 나보다 약한 사람도 있다. 

서로 다른 존재에 기대면서, 나의 강한 면으로 상대의 약한 면을 돌보고, 상대의 강한 면에 나의 약한 면을 의지하면서, 그렇게 살아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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