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름 열심히 보고 있다. 열광하는 드라마가 없고,아무리 늦어도, 딸래미가 아홉시에는 잠이 드니까, 볼 수 있는 거다. 어제로 모든 시리즈 -총 여섯편, 1과 2이다-가 끝났다.
그런데, 뉘앙스때문에 의심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제인가는 한 남자를 입던 대로 입혀서 쇼윈도에 세우고 평판을 듣고, 양복을 쫙 빼 입혀서 평판을 듣는 걸 봤다. 보다가 물었다.
"그래서, 내가 창피해?"
"...이게 내가 요새 갈등하는 거지. 사람들이랑 얘기하다보면, 나도 그렇고, 밖에서 다른 사람들을 그렇게 평가하고 있으니까, 잘 입어야 겠다, 이런 생각을 하는 거지."
"알고 있었어."
"그러니까, 너도 좀 잘 입으라고. 아무거나 사지 말고."
"됐다 그래. 그런 생각을 할 수는 있지만, 그래도 이렇게 살겠다는데 어쩌겠어. 내비둬."

어제는 '긍정적인 착각이 성공으로 이끈다'면서 오바마 이야기까지 하는데, 나는 그걸 굳이 '착각'이라고 부르는 태도가 맘에 들지 않았다. 세상은 어떤 방식으로든 볼 수 있다. 누군가에게 세상은 무섭고 살벌하고 치열한 경쟁의 장소지만, 누군가에게 세상은 따뜻하고 아름답고 즐거운 장소일 수도 있다. 긍정적인 것도 '착각'이고, 부정적인 것도 '착각'일 수 있다. 내내, 60%, 70%, 80%가 이렇게 했습니다,라고 심리학 실험결과를 보여주면서, 40%, 30%, 20%의 사람은 긍정적인 착각을 하고 있다고 말한다. 순서 상으로 보자면, 심리학 실험결과조차, 문화적인 상황때문에 초래되었는데도 말이다. 다른 이름을 붙일 수 있다면 다른 이름을 붙이고, 문화적 상황을 다르게 한다면, 저런 심리학 실험 결과는 달라질 수 있는 거였다.

나는, 이 시리즈물이 사람들에게 변명을 제공해준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쁜 사람에게 더 관대한 것, 가난한 사람에게 겁을 먹은 것, 명품에 열광하는 것, 다른 것들로 그 사람을 판단하는 것, 그 모든 뜨끔뜨끔 내 자신에 죄책감 느껴야 하는 행위에 대하여, '세상 사람 대부분이 그러니까 괜찮다'고 말해주는 느낌이 되었다, 점점 더.
게다가 세상을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성공하려고 그러는 거 아니다. 행복하고 싶지만, 그래서 성공하고 싶은 건 아니다. 다른 세상을 꿈꾸는 거고, 다른 세상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거지. 그걸 부를 말이 '성공'밖에 없는 거냐, 정말.(09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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깔깔대며 남편에게 드라마 중계를 했다.
말미에 깔리는 심리스릴러 같은 음악이 다른 음악으로 바뀌어 있더라. 그렇지만, 여전히 이 드라마의 목적은 '피임의 중요성을 남성에게 가르치는 것'이다.
A라는 잘 나가는 건축가는 대학 총장? 딸 B와 결혼을 앞두고, 미국 유학시절 동거했던 여자가 자신 모르게 키워오던 아들을 떠맡아 파혼당한다. 눈물로 호소하던 A는 B의 냉정함에 구질구질하게 슬퍼하면서, 한 동네 사는 마음 따뜻한 C의 동정과 배려로 위로받는다. A는 결국 B와의 파혼을 수용하고, C에게 마음을 열어간다. C는 여섯살 꼬마를 같은 미술학원에 다니는 자신의 두 조카와 함께 챙기고, 그런 C를 A는 더욱 더 좋아하고. 시간이 어느 정도 흘러, B가 자신의 냉정함을 후회하고, A를 다시 잡으려는 마음을 먹었을 때 A는 이미 B가 싫다. 그러나, B는 A의 아이를 임신한 상태인 것이다.
대개의 드라마가 이런 임신이 여성을 궁지에 몰아넣는 데 반해, 이 드라마에서 처절하게 궁지에 몰린 사람은 이 남자다. 처음 여섯살 먹은 자신의 아들을 만나는 상황도 그렇고, 지금 겨우 사랑하는 사람을 만났는데 이런 상황이 된 것도 그렇다. 게다가 B는 혼외 임신을 한 여자치고는 참 쎄다. 마음이 떠난 게 분명한 남자를 주저앉히는 데 임신을 이용하는 데 망설임이 없다. 그 여자가 극 중에서 사랑받을 만한 캐릭터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여자가 전화로 그 남자를 불러서,
"나 임신했어. 이것보다 중요한 일이 뭐가 있어?"
-그 남자는 새 여친과 영화를 보느라 전화를 꺼놓고 있었다-
"어떻게 할까, 당신이 정해."
라고 말할 때는 정말 통쾌했다. 야, 멋지구나. 낳기로 하든, 중지하기로 하든, 어떤 식의 생활고, 신체적 고통, 심리적 고통, 왜 여자 혼자 고심하겠는가 말이다. 못 본 전편에서 '내가 불행하니, 당신도 불행하면 좋겠다'고 말하던 여자니까-나는 예고편으로 봤다- 그런 방식으로 남자에게 알리는 것은 정말 멋졌다.
그 남자, 도덕적으로 우월하다고 스스로를 정의했을 그 남자, 그래서, 차라리 자신의 여섯살 된 아이를 맡고 파혼을 수용한 그 남자는, 지금 그 상황이 괴로울 게다. 세상에 몰랐던 편이 좋았을 그 문제를 그 앞에 던져놓은 그 여자는 '내가 임신했으니, 나랑 결혼하라'고 매달리는 게 아니라, '내가 임신했으니, 네가 정하라'라고 말하는 거다.
궁지에 처한 남자,를 보고 있자니 좋구나. 그러게, 항상 피임하시라구요~ㅋㅋ(090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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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는 딸래미를 재운다고 오매,아배가 먼저 잠든다. 그게 대략 아홉시 반부터 열시 반 쯤. 주중의 모든 드라마들을 볼 수가 없다. '태양의 여자'는 김지수 연기가 끝내 준다고 하고, '밤이면 밤마다'도 재미있다는데, 어쩔 수 없는 거 아닌가.

겨우 겨우 제시간에 보는 드라마는 '엄마가 뿔났다'뿐인가보다.
지난 주말, 김한자(김혜자)가 가족들 앞에서 '집을 나가 1년간 살고 싶다'고 말했을 때, 나는 '아, 이게 김수현이 이 드라마로 말하고 싶던 거구나'였다. 차례 차례 쌓아올린 이야기들이, 이 막 회갑이 된, 자식들 혼사 다 치른 이 시대의 어머니에게 '휴가'를 주기 위한 것이었구나 였다. 어이없는 신문사 기자들의 "주말 저녁, 시청자들 '엄뿔'보고 뿔난다"라는 제목의 기사를 보고 부터, 내 생각과 다른 이 기자의 사고방식을 의심하면서 기사들도 오고가는 말들도 좀 찾아보는 중이다.
어제는 드디어 엄마가 남편과 시아버지의 허락을 구해 집을 나갔는데, 인터넷에서 여기에 대해 말들이 많다. 왜 그 심정 모를까, 나도 알겠는데. 하는 마음이 되었다. 염치없다면서 눈물도 나지만, 좋아서 눈물도 난다는 이 엄마의 심정이 이해가 되는데, 왜 그 기자는 그런 기사를 썼을까. 왜 이 사람들은 엄마에게 뭐라고 하는 걸까.
엄마들의 휴가라, 정말 좋구나.

옛날에 중학생이었는지, 내가 어렸을 때, 그런 상상을 한 적 있다. 엄마가 아프면 어쩌지, 갑자기 안 계시게 되면 어쩌지, 그러다가 이성적으로 생각할 여유도 없이 튀어나오는 나의 반응이 '그럼 빨래는, 밥은?'이어서 내자신이 너무 싫어졌었다. 엄마가 내게 소중한 이유가 정말 그거 뿐인가, 하는 마음이 생겨서 엄마가 내게 해주는 어떤 일도 당연한 것은 없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고등학교를 유학 가면서, 엄마에게 밥과 빨래를 의지하는 걸 그만 둔 이후로, 오늘에 이르기까지-지금 나는 김치를 엄마에게 전적으로 의지한다- 엄마의 어떤 노동도 당연하지 않고 감사하려고 노력한다.(080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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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어쩌냐, 이거 끝나면"

어제 광분하여 닥본사하는 나에게 남편이 한말이다.
그렇게 보였나. 그래, 정말 열심히 보고 있다. 무엇때문일까, 계속 생각한다. 무엇때문에 쾌도 홍길동을 좋아하는지.

아, 훌륭하다. 이 이상 어떻게 정치에 대해 이야기하는가, 말이다. 지금까지 우리나라에서 재미있는 것들은 정치에 대한 무관심을 불러왔지만, 홍길동은 왜 정치에 무심하면 안 되는지 노골적이거나 우회적으로 계속 말한다.
1.
대학 때 갓 입학한 후배가 나에게
'누나, 운동은 왜 해요?'
'뭐 별 이유없어'
'내가 아는 누나는 그래서 인생 말아먹었잖아요'
독재의 기억을 가진 이 땅에서 가장 약하고 낮은 자가 정치를 한다는 것은 이런 것이었나, 싶은 그 약한 마음에 대해 드라마가 말해주었던 것이다.
그래, 길동이도 거창한 이유에서 출발한 게 아니었다. 길동이가 의적이 되게 한, 알고 보게 되면 어쩌지 못하는 그 마음들이 나에게도 있었던 것이다. 그저 자신의 억울을 풀려다가, 알아버린 타인의 억울이, 그 보아넘길 수 없는 다른 이의 죽음이 결국 자신의 죽음과 새로운 삶을 열었던 거고. 약한 마음을 이해하지만, 변호하지는 않고, 결국은 그들이 움직이게 하던 그 힘이 좋은 것이다.

2.
이기적인 사랑에 대해 사람들은 말한다. 그런데, 길동이와 이녹이와 은혜와 창휘를 보고 있으면 왜 길동이는 이녹이여야 하는지 알게 된다. 사랑은 이기적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사랑은 서로를 지키는 것이고, 존경하는 것이고, 응원하는 것이다. 옥에 갇혀 피흘리는 길동 앞에서 '너의 목숨만은 내가 살릴 테니, 모두 말하라'는 은혜를 그래서 길동이는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 길동이의 사랑은 길동이 곁에서 같이 싸우는 사람, 힘든 길을 지켜보는 사람, 지지하고 존경하는 사람, 이녹이인 것이다. 사랑은 그런 것이다. 그걸 통해 강해지는 것, 혼자라면 못할 일도 둘이라면 가능한 것, 그래서 무섭지 않은 것, 그래서 이기적이지 않은 것.

3. 
이 치밀한 정치의 구조와 이야기들에 감동한다. 촘촘하다. 아버지의 세계와 길동이의 세계, 창휘의 나라와 길동이의 나라. 서자인 길동이와 적자인 창휘, 함께할 수도 피할 수도 없는 관계들이 놀랍다. 의미를 알 수 없던 '쾌도'라는 수식이 '사인검'과 나란히 있을 때, 서자이자 의적인 길동이가 적자이자 반정을 모의하는 창휘와 나란히 있을 때, 광휘가 창휘를 죽이려던 이유와 창휘가 왕이 되려는 이유, 권력이 작동하는 방식, 적과 적 아닌 자를 알 수 없는 모호함,
장화홍련전은 계급사회의 비극이 되고, 심청전은 자본주의 사회의 비극이 된다.

4.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미!있!다!

아, 다음 주 수요일 막방이다.(080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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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verjinny 2009-08-03 18: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쾌도 홍길동을 볼때는
"지켜보는 국민이 되겠습니다.."라고 생각했는데..지금의 사태에서
방관자로 있는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고 있어.


별족 2009-08-04 13:22   좋아요 0 | URL
그게 참 어려운 일이라 그런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