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사람은 동경하게 되는 걸까. 자신이 가진 것, 자신이 하는 일에 뚱한 마음이 점점 커지고 다른 사람이 가진 것, 다른 사람이 하는 일을 보는 마음이 자꾸 커지는 걸까. 자신이 가진 것에 행복할 수 있다면 더 좋을 텐데. 

삼시세끼 어촌편6을 보는데, 엄마 아빠 생각이 났다. 엄마랑 늘 가깝다고 생각했었지만, 회사에 들어가면서 아빠를 이해했다. 내내 학생이었다가 직장인이었던 그 순간에 아빠의 수고를 이해하면서 엄마를 조금은 노는 사람처럼 생각도 한 거 같다. 아이를 낳고 나서야, 아이를 기르면서야 엄마의 수고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엄마랑 아빠가 얼마나 서로를 고마워했었는지도 떠올랐다. 가족들끼리의 원망이나 다툼이 없었다는 게 아니라, 그래도 그 안에서 서로의 역할을 존중했다. 

삼시세끼는 남자들만 나와서 그저 세 끼 밥을 먹는 거 뿐이지만, 보고 있으면 어떤 일이 더 가치있다 말하는 것이 얼마나 한심한가 생각하게 된다. 단순화시킨 하루의 일상이다. 무얼 먹을지 고민하는 삶. 고기를 잡았으면 그걸로 먹고, 못 잡았으면 다른 걸로 어떻게든 먹는다.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인데'라는 말이 가지는 그 단순함이 눈 앞에 펼쳐지고 내가 하는 일도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낚시를 나가는 유해진과 요리를 하는 차승원, 불을 피우고 요리를 보조하는 손호준은 서로가 서로에게 좋은 모습으로 서로의 일들을 존중한다. 낚시를 같이 나갔다 들어온 저녁, 유해진을 고생했다면서 토닥이는 차승원은, 자신은 못 할 일이라며 고마워한다. 하나도 낚지 못한 어떤 날이나, 큰 고기를 잡고 어깨를 쫙 펴고 들어온 어떤 날이나, 그 사람에 대한 고마움이 다르지 않다. 늘 끼니를 걱정하면서 종종거리면서 요리를 척척 해내는 차승원에게 유해진이 전하는 고마움도 다르지 않다. 자신이 하지 못할 일을 해내는 서로에게 전하는 감사함이 전해졌다. 저녁 먹은 다음에 나누는 이야기 속에서, 몸은 힘들어도 마음은 편하다고 말하는 손호준에게서도 도움이 되고 있어서 좋은 그 마음이 느껴진다. 어떤 자신의 수고도 다른 사람에게 원망이 되지 않는다. 

더 중하고 덜 중한 일이 있는 것은 아니고, 맡은 일 가운데 서로를 고마워하면서 함께 일할 수 있으면 좋다. 함께 살아가는데, 서로를 고마워하는 것처럼 중요한 게 어디 있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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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가지니 광고( https://www.youtube.com/watch?v=isIGE_tudCo )를 보고 있었다. 

"엄마 말은 안 듣는 얘가 기가지니 말을 듣네"라는 내 말에 남편이 "어이구, 좋댄다"라고 추임새를 넣어서 빵 터졌다. 

엄마 말을 안 듣는 아이가 기계가 하는 말은 듣는가? 애초에 그 자체에 의문이 드는데 이런 광고는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  


사람과 말할 때는 눈을 보고 말하고, 화가 나서 말이 안 나올 때는 숨을 깊이 들이쉬고, 상대가 반응하는 걸 보면서 말의 톤을 조정하고, 말의 투를 조정하고, 이 설명하기 어렵고 복잡하고 감각적인 것들을 아이들은 어디서 배운단 말인가. 엄마가 이렇게 말할 때는 다음에 무슨 일이 벌어질 거야,라는 다음의 예측이 일어나야 하지 않는가. 가족 안에서 배워야, 위험을 피하고, 위협을 감지하고, 상대를 분별하고, 가족 밖에서 살아남을 수 있지 않을까. 아직도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것이 피곤한 나는, 기가지니에게 예절을 배우는 어린이가 걱정스럽다.


꽤 오래 전에 삼성의 패밀리 허브 광고를 보면서도 불편한 심사를 써놓은 게 있어서 퍼 놓는다. 기가지니와 대화하고 냉장고와 대화하는 것은 어쩌면 혼자 사는 쓸쓸함 가운데 필요할텐데, 아이와 엄마, 단란한 가족 가운데에서는 영 어색한 이야기만이 생긴다. 


삼성 패밀리 허브 광고, 가
- 사람들 눈에 저게 행복의 묘사인가, 이런 생각을
남편이 산 비싼 글러브가, 아내를 화나게 한다. 화난 아내를 살피며 분리수거도, 청소도 열심인 남편이 묘사된다. 남편이 아니라, 냉장고에게 말 거는 아내는 남편이 거의 포기할 즈음, '칼국수 먹을래'라고 질문한다. 냉장고가 아니라, 아이가 아니라, 자신에게 질문했다는 게 기쁜 남편은 자기가 하겠다며, 냉장고의 설명에 따라 요리를 한다. 칼국수를 끓여 아이와 아내가 함께 먹는다. 나는 묘사 하나하나가 다 무섭다. 남편도 아이도 있는데, 냉장고에 말거는 아내-라디오 좀 켜 줄래-, 비싼 가격이 찍힌 영수증을 보면서 문을 쾅 닫고 들어가는 아내, 혼자 노는 아이. 그저 저런 묘사를 못 보겠다. 냉장고라니, 요리를 보여주고, 속을 보여주고, 라디오도 나오는 냉장고가 '가족을 이어주는'이라니 끔찍해서. 아마도 사물 인터넷으로 다른 것들까지 연결했겠지만 역시 나는 아주 끔찍해서 못 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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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란 뭘까. 나는 내가 하는 말도 멀지는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조심한다. 정부를 비판하는 말들의 거울에 나를 비췄을 때, 내가 그러지 않는가. 회사를 비판하는 말들의 거울에 나를 비췄을 때 나는 그러지 않는가. 아이들을 아직 가정보육해야 했을 때, 회사에 다니는 다른 엄마가 '선배, 너무 페이 올리지 말아요, 우리가 힘들어요'라고 했다. '우리'라는 말이 가지는 무게 때문에, 나는 그 엄마와 나의 '우리'와 아이를 셋이나 계속 봐주고 계신 아주머니와 나의 '우리'를 저울에 달았다. 그 말을 듣고 '우리'의 무게를 가늠하면서 비약이 심한 나는, 그래서 아마도 사장님들은 노동자에게 그렇게 구는 거겠지,라고도 생각했다. 작은 회사라서 직원과 사장이 묶이는 우리,가 더 강경하다면, 사장님들끼리 모여앉아 가지는 '우리'라는 감각을 앞지를 수도 있겠지. 항상 노동자라고 내 스스로를 정의하면서 생각하던 방식이, 아이들을 맡기면서 어그러졌다. 나는 그 상황에서 고용한 사람이 되고, 내가 고용된 사람이었을 때 요구하고 주장하던 그 많은 걸, 나는 내가 고용한 사람에게 해 줄 수 없다는 걸 알았다. 그걸 원하는 아주머니였다면, 욕했을 거야. 뭐 이런 생각도 하고, 그러면서 나의 요구는 괜찮은가, 또 생각했다. 5인 이상 사업장,이라는 노동법의 많은 단서 조항이 약한 노동자를 보호하지 못한다는 말에 수긍했었는데, 지금은 모르겠다. 사업주,라는 이름 뒤에 가려진 사람이 보였다. 입장은 점점 흐릿해지고, 신문기사는 뭔가 잘못 말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고, 가끔은 큰 회사의 노동자들이 압력을 행사해서, 작은 회사의 이문이 줄어들고 있다고도 생각하게 되었다. 

'한 번 다녀왔습니다'가 재밌다길래, 우선 짤들을 몇 개 보고, 지난 일요일에는 본방을 보았다. 오랜 물장사 이력을 접고 시장에 김밥집을 차린 이정은(극 중 이름을 모르겠다)이 문제적인 호객-헐벗은 여종업원을 동원해서 호객한다. 나는 그럴 수는 있지만, 맛도 없는 김밥을 그런 호객에 줄 서서 먹는다는 것이 남자들에 대한 모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벌써 문제삼는 사람들이 많았고, 정리되고 있다-을 해서 대립하는 장면 다음에 시장 상인회 장면이 나왔다. 상인회 가입조건으로 여러가지를 시정하려는 시장의 여자들이 등장하고, 그렇다면 상인회에 가입하지 않겠다는 장면이 나온다. 결국 시장 쓰레기장 아닌 먼 데 쓰레기장에 가야 하고, 상인회 발급 상품권 교환도 불가능해지고, 방역에 제외되면서 김밥집은 조건을 수용하고 상인회에 들어간다. 나는 공연히 사람들이 김밥집에 이입할까 걱정하면서 본다. 김밥집 여자들이나 대립하는 시장의 여자들이나 묘사되는 방식은 문제가 있다. 시장의 남자들은 여자들끼리 화해해야 할 기싸움으로 보고 뒤로 빠져있고, 여자들끼리 오직 여자들만 김밥집에 몰려가서 문제삼는다. 그건 흔히 하는 묘사처럼 여성혐오적이다. 김밥집의 호객행위가 시대에 뒤처진 묘사라고 생각하는 나도, 시장의 여자들처럼 굴었을 것도 같다. 그렇지만, 다시 내가 해 온 많은 말들을 생각해보면, 그걸 원한다고 해서 조건을 달거나 배척하는 것에 반대해왔다는 것도 알고 있다. '우리'라는 말 안에 단정한 사람을 원한다고 해서, 단정하지 않으면 '우리'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에도 찬성하지 않았다. 

'우리'라는 경계 안과 밖은 달라야 한다. 상인회 소속 상인들이 누리는 여러가지는 무엇때문에 가능한 걸까. 회비를 냈을 수도 있고, 회의에 참석해서 의견을 냈을 수도 있다. 상인회 바깥의 상인이 상인회에 들어가고 싶어하는 것은 자신의 필요에 의해야 하지만, 그 많은 것들이 그냥 주어지는 것일 수는 없는 거다. 정치란 그런 부분들에 있다. 모임이란 그런 용도로 만들어지고, 모임에 속한 사람이 지는 책임과 얻는 이득의 균형사이에 모임은 자란다. 모임에 속하면서 크고 작은 정치를 훈련하게 된다. 학교나 직장, 국가 수많은 우리의 경계에서 '우리'의 조건을 걸고 의무를 요구하면서, '우리'는 '우리'가 되는 거다. 속하고 싶지 않다면 감당해야 하는 불이익이 있고, 그건 어쩌면 당연하다. 누군가 선악으로 존재하는 게 아니다. 조건을 달고 상인회 가입을 찬성하느니 마느니 하는 것보다 나는 차라리, 상인회에 가입하면 이득과 손실에 대해 묘사해주기를 원했다. 가입할 때 내야 하는 회비가 있다면 것도 설명해주고, 이용할 수 있는 것들과 해야 할 책임들에 대해서 설명해주고 그런 과정에서 보는 사람들이 너무 부당하지는 않다고도 생각할 수 있게 했으면 좋았겠다 생각했다. 그렇다면 드라마가 아니라, 무언가 선전물 같았겠지. 드라마는 묘사하고 있지만, 전부를 묘사하지는 못한다.

삶은 드라마의 묘사보다 복잡하고, 매 순간 내가 속한 '우리'를 저울질한다. 저울질하는 순간마다, 마음이 나의 단단한 마음이 중심을 잘 잡고 있어야 자기 자신을 감당할 수 있다. 내 마음을 내가 감당할 수가 있으려면, 좀 더 단단한 나의 중심이 늘 내 안에 있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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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천도룡기2019를 보고 있다. 아주 열심으로 보고 있는데, 매번 중간에 그린피스의 북극곰 광고가 들어간다. 

그 광고를 볼 때마다 기분이 좋지 않다. 송유관에 새어나온 기름을 뒤집어쓴 바닷새가 있고, '거대 석유회사들은 당신이 북극곰에게 무관심하기를 기대한다'는 잔잔한 나래이션이 깔린다. 

왜 기분이 이렇게 나쁜지 설명하고 싶다. 

산업쓰레기가 훨씬 많으니 그걸 통제하는 편이 자연을 보호하는 처사라는 말에 언제나 고개를 끄덕였었지만, 스터프를 읽으면서(https://blog.aladin.co.kr/hahayo/7043654 ) 결국은 '나' 때문이라고 인정하게 되었다. 

그래서, 내 자신을 그대로 두고 돈을 던져서 죄책감을 덜어내는 일들에 회의적이 된다. '거대 석유회사들은'으로 시작하는 그 나래이션은 '나'의 책임없음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월 만원,은 쉬울 수도 어려울 수도 있지만, 삶 전체에서 내내 싼 전기, 싼 물건, 새 집, 새 옷, 예쁘고 멋진 자기 자신을 원하면서 월 만원으로 죄책감을 덜어내는 태도는 무책임하다고 생각한다. 

아니야, 월 만원을 그린피스를 위해 쓸 수 있는 사람은 그런 삶을 살고 있지 않아, 라고 말한다면 내 자신이 그런 식으로 균형잡으려고 한다는 걸 자각하는 때가 꽤 많아서 나는 정말이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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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이 공부를 한다. 미리 한 학기씩 두 학기씩 앞서서 문제집을 풀고 내년에 겨우 중 2인데, 스톱워치를 책상에 올려놓고 시간을 재면서 공부를 한다. 방학을 하고는 밤 열두시까지도 잠도 안 자고, 아침에 깨지도 않고 점심무렵에나 깬다. 그러지 말라고 건강하고 좋은 습관을 가지는 게 중요하다고 자꾸 자꾸 말하는데, 내가 혹시 행동으로는 그러고 있지 않나 생각한다. 칭찬을 한 적도 야단을 친 적도 없는데, 그래서 그러는가도 생각한다. 학교에서는 시험도 성적표도 보내주지 않는데, 학원에서는 벼라별 말을 듣고 현대의 또래집단 학생이 된다. 과학공부를 앞서 하려니 지난 학원 방학 중에는 나에게 가져와서 뭘 물어본다. 원자핵에 양전하가 핵의 주위를 도는 전자에게 음전하가 있다는 설명을 하면서, 이해할 수 있을 만큼 단순화시켜서 가르치는 각 단계에 대해 의구심이 생긴다. 처음 핵과 전자에 대해 배울 때는 이렇게 배웠지. 그림으로 그릴 수 있는 것처럼, 양성자와 중성자와 전자의 모습들을, 이러면서 보았다. 그러다가, 태양을 중심으로 도는 행성처럼 묘사되던 핵과 전자가, 구름처럼 묘사되고, 결국은 알 수 없는 어떤 것이 되기까지 결국 이해하지 못 했던 현대물리의 어떤 순간까지가 떠올랐다. 그러면서, 저 가르침은 옳은가, 이런 생각도 했나 보다. 

지난 블랙독,에서 학생은 자신이 틀렸다는 시험 문제가 현대 물리의 관점에서 오답이 아니라고, 학교 내에서 문제제기 하는 대신 학교 밖에서 문제제기해서 결국 정정을 받는다. 교과과정을 통해서는 오답이고, 교과과정을 벗어나 학문적으로는 오답이 아닌 그 상황에 내가 딸의 과학 요약집을 보던 기억이 떠올랐다. 서양의 학문이 나아가는 방식과 동양의 학문이 나아가는 방식이 이렇게 다른 건가, 싶기도 했다. 내가 교사고, 그 다음을 알고 있는데, 이해하기 쉬우라고 단순화시켜 가르치는 것은 어떤 불편한 느낌을 주지는 않을까, 같은 생각도. 동양의 학문이 그래서 신기한 말들을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 계속 읽도록 한다면, 서양의 학문이 온갖 것들로 쪼개놓은 온갖 학문을 초보적인 형상화부터 시작해서 점점 점점 기존의 관념을 부정하면서 나아간 게 아닐까도 생각한다. 서양의 학문을 배우는 방식의 지금 학교는, 그러니까 초등학교의 어떤 배움이 중학교에서 부정되고, 중학교의 어떤 배움이 고등학교에서 부정되고, 고등학교의 어떤 배움이 대학교에서 부정될 수 밖에 없는 게 아닐까, 라고도. 동양의 배움이 결국 알 수 없는 상태를 인정하게 되는 그래서 기이할 수밖에 없는 게 아닐까, 라고도 생각했다.

가르치는 것이 어렵구나, 배우는 것도 역시 어렵다. 점점 모르는 것이 늘어나는 그 각각의 단계에서 어떻게 배우고 어떻게 가르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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