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난 사랑한 기억을 떠올리고 싶어"

 

 

 

영원한 행복이 없듯

영원한 불행도 없는 거야.

언젠가 이별이 찾아오고,

또 언젠가 만남이 찾아오느니

인간은 죽을 때,

사랑받은 기억을 떠올리는 사람과

사랑한 기억을 떠올리는

사람이 있는 거야.

 

 

 

난 사랑한 기억을 떠올리고 싶어.

 

 

 

일본 작가 쓰지 히토나리가 쓴 연애 소설 『안녕, 언젠가』한 대목이다. 만약에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산다면 과연 나는 ‘사랑받기’와 ‘사랑하기’ 중 어느 쪽의 인생을 마주하게 될까.

 

 

 

 

 

 

얼마 전 SNS에서 잔잔한 감동을 주는 사진을 보게 됐다. ‘노부부의 동심’이라는 제목이 달린 여러 장의 사진이다. 사진 속, 머리가 하얗게 센 노부부는 놀이터에서 그네와 회전 뱅뱅이 등 놀이기구를 함께 타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노부부의 표정은 잘 보이지 않지만 사진 속 상황만으로도 이들의 즐거운 마음을 느낄 수 있다. 노부부는 젊은 시절로 되돌아가 그 때 서로 사랑했던 기억을 떠올리고 있을 것이다. 노부부만의 행복한 시간을 몰래 촬영하는 건 좋지 않지만, 이 장면을 우연히 발견한 익명의 촬영자는 멀리서 지켜보는 내내 흐뭇했을 거다. 이런 아름다운 장면의 사진이라면 여러 사람이 보면 좋다. 노년의 사랑을 조명한 뉴욕타임스 기사에서 한 심리학자는 말한다. “젊어서의 사랑은 자신의 행복을 원하는 것이고, 황혼의 사랑은 다른 누군가가 행복해지길 바라는 것”이라고. 그 차이는 ‘사랑받기’와 ‘사랑하기’의 거리이기도 하다.

 

 

 

 

 ♣ 사랑은 언제나 오래 참고

 

‘황혼’에는 자연의 황혼과 인생의 황혼이라는 두 가지 뜻이 있다.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1. 해가 지고 어스름해질 때, 2. 사람의 생애나 나라의 운명 따위가 한창인 고비를 지나 쇠퇴하여 종말에 이른 상태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라고 정의한다.

 

 

 

 

이육사의 「황혼」이라는 시는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내 골방의 커튼을 걷고 정성된 마음으로 황혼을 맞아들이오니 바다의 흰 갈매기들같이도 인간은 얼마나 외로운 것이냐.’ 그가 노래하는 것은 인생의 황혼이다. 비록 한창 고비를 지났지만 아직도 정성된 마음으로 맞아들일 대상이 남아있다. 황혼이 곧 종말이라는 부정적인 관념, 특히 외로움으로 대표되는 골방의 커튼을 걷고 인생을 다시 보아야 한다. 모든 사물이 제자리를 지키고 있고 삶이라는 본질은 달라진 것이 없다.

 

딱히 몇 살부터를 황혼이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지만 ‘인생은 60부터’라는 말과 상관이 있어 보인다. 황혼기에 기죽지 말고 열심히 살라고 격려하는 뜻에서 생겨난 말일 것 같다. 이 황혼기가 머지않아 거의 30년 기간이 될 것인데 “이처럼 긴 시간들을 어떻게 아름답고 의욕적으로 보낼 것인가?”는 중요하고 의미 있는 질문이다.

 

 

 

 

 

 

 

 

 

정두영 목사 작곡의 성가 ‘사랑은 언제나 오래 참고’는 성경의 고린도전서 13장에 곡을 붙인 것이다. ‘믿음과 소망과 사랑 중에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모든 인간관계에서, 그리고 전 생애를 통하여 추구해야 할 것은 서로에 대한 믿음, 내일을 향한 소망, 그리고 서로를 아끼고 베풀며 따뜻하게 보듬는 사랑이다.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며 특히 황혼기에 가장 절실한 것이 바로 이러한 사랑이다.

 

 

 

 

 ♣ 사랑하면서 함께 늙어가기

 

 

 

청춘의 사랑이 활활 타오르는 장작불이라면 황혼의 사랑은 화롯불같이 불씨를 품고 안으로 타오르는 열정이다. 후반부에서의 사랑은 그저 만화나 소설에서 꾸며 낸 이야기라고 치부하는 이라면 앙드레 고르가 쓴 『D에게 보낸 편지』가 시각 교정에 도움이 된다. ‘당신은 이제 막 여든두 살이 되었습니다.…함께 살아온 지 쉰여덟 해가 되었지만, 그 어느 때보다도 더,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그는 9월에 불치병으로 고통 받아 온 아내와 동반자살로 삶을 마감해 전 세계를 울렸다. 죽을 때조차 타인의 시선을 의식해 ‘쇼’를 했다는 냉소적인 시각도 있겠지만, 어차피 인생이란, 삶이라는 무대에서 어떤 식으로든 연출할 수밖에 없는 숙명적인 감동의 드라마 아닌가. 83세의 앙드레 고르는 자다가 깨어나 82세의 아내에게 이렇게 속삭였다.

 

“당신의 숨소리를 살피고, 손으로 당신을 쓰다듬어 봅니다. 우리는 둘 다, 한 사람이 죽고 나서 혼자 남아 살아가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저무는 세밑의 끝자락, 다들 아쉽고 뜻대로 안 된 일도 많을 터다. 그래도 곰곰 생각해 보면 숨이 남아 있는 한,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바로 타인을 사랑하는 능력이 아닐까 싶다. 영혼이 굳어지지 않고 사랑하며 늙어 간다면 나이 먹는 것도 그다지 불평할 일은 아니다. 그렇다고 진정한 사랑을 경험하기 위해 꼭 늙을 때까지 기다릴 필요는 없다. 젊은 연인들은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유치환 「행복」)는 시 구절을 한번 떠올려 보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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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가 어려운데 소비라도 줄여야지, 하지만 턱없는 소리다. 우리는 살아가기 위해서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폴란드의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의 말처럼 문화는 이미 소비시장의 지배를 받고 있으며, 유행에 종속된 현대인들이 소비하는 사회에 살아가고 있으니까.

 

"오늘날 문화는 무엇보다도 이제 소비자로 전환된 사람들이 경험하는 거대한 백화점으로 변해버린 이 세상의 여러 매장 중 하나로 자신을 바라본다. 이 거대한 상점의 다른 매점들과 마찬가지로 선반은 매일 바뀌는 매력적인 상품으로 넘쳐나며, 계산대는 그들이 광고하는 한물간 참신한 제품들처럼 곧 쓸모없어질 최신 홍보물로 장식되어 있다. 계산대의 광고와 선반에 진열된 상품들은 선천적으로 억누를 수 없는 순간적인 충동을 불러일으키도록 계산되어 있다." (지그문트 바우만 『유행의 시대』중에서)

 

현대인은 소비를 통해 세상과 소통하고 소비를 통해 나를 발견한다. 현대인이 선택하는 건 상품이 아닌 이미지다. 현대인은 이미지에 열광한 나머지 이미지를 따라하고 이미지를 먹고 이미지를 차지하려고 서로 싸운다. 누가 이미지를 지배하는가를 놓고 벌이는 경쟁에 뛰어들지 않고서는 살아남을 수 없다. 이미지를 새롭게 해석하고 이미지를 통해 메시지를 전달하고 이미지를 통해 상품에 가치를 부여하기 위한 경쟁이 한창이다. 그렇다면 이미지란 무엇이고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 걸까.

 

 

 

 

 

 

 

 

 

 

 

다다이스트 마르셸 뒤샹이 소변기에 ‘R Mutt’라고 사인한 뒤 그걸 독립예술가협회전에 ‘샘’이라는 이름으로 ‘작품’으로 출품했다. 불경스럽고 비도덕적이고 표절이고 어떤 미적 대상도 될 수 없는, 현대미술에 대한 모욕이라는 이유로 출품되자마자 작가의 사전 동의 없이 작품은 사라졌다. 그러나 1964년에 다시 만들어진 복제본을 보고 그 누구도 “불경하다” “비도덕적이다” “표절이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또한 뒤샹이 직접 소변기를 만들었는지 아닌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그가 그걸 선택했다는 사실이다. 지저분한 소변기에 새로운 이름과 새로운 관점을 부여해 전혀 새로운 가치를 만들고, 사람들의 머릿속에 새로운 시각과 생각을 심어주었다. 발상의 전환이었다. 똑같은 이미지인데 사람들은 이제 그 앞에서 기념촬영하기 바쁘고, 콧대 높았던 미술관들은 전시를 하고 싶어 안달이다.

 

이미지는 사전적 의미로는 어떤 대상을 바라보는 관점이고 태도다. 그리고 이미지를 지배하기 위해서는 대상을 새롭게 해석하는 힘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소비자의 취향은 나날이 변한다. 싼 것을 찾다가도 기능과 디자인을 보고 또 친환경 제품인지를 따진다. 요즘 같은 불경기에는 에너지 효율이 어떤지 살핀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어떤 이미지를 보여주는가에 소비자들은 동전을 던진다. 이렇듯 소비는 수많은 이미지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는 특별한 행위다. 어떤 옷을 입고, 어떤 책을 읽으며, 어떤 음식을 먹고, 어떤 음악을 듣고, 무엇을 하며 여가를 보내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자신을 발견한다. 이는 소비대중문화 속에서 자신만의 정체성을 만들어내는 소비자의 특권이다. 이런 특권은 단순히 물건을 사고 점심을 사 먹는 일차원적인 소비를 넘어 특정 생각을 지지하고 특정 문화를 후원하는 소비에 이르러야 비로소 누릴 수 있는 즐거움이다.

 

 

 

 

 

 

인간은 생각하는 동물이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다 보니 무엇을 소비할까 고민하는 동물이 되었다. 더 노골적으로 표현하면 쇼핑을 즐기는 유일한 동물이 바로 인간이다. 바바라 크루거의 작품 「나는 쇼핑한다, 고로 존재한다」(I shop therefore I am)는 이러한 인간의 모습을 풍자한다. 흑백 사진의 오른손이 마치 신분증이라도 제시하듯 ‘I shop therefore I am’이라는 하얀색 글씨가 쓰인 붉은색 사각형 명찰을 들고 ‘저는 쇼핑을 하기 위해 태어났는데요’라고 소개하는 것 같다. 쇼핑을 최고의 가치로 치켜세우고 쇼핑을 통해 자신을 과시하는 당대 여성을 비꼬는 동시에, 무엇을 소비하는가를 통해 한 사람의 정체성을 결정해 버리는 소비 자본주의의 한계를 드러낸다. 그렇다면 역으로 자신만의 독특한 이미지 소비와 해석을 통해 그 한계를 극복해낼 수 있지는 않을까. 그러면 이미지의 소비자에서 생산자로 변신해 볼 수 있지는 않을까. 그리고 이 방법이야 말로 앞서 이야기한 이미지를 지배하는 해법은 아닐까.

 

이미지와 텍스트의 조합을 통해 왕성하게 새로운 의미를 생산해내는 작가 바바라 크루거라면 그런 한계를 극복하지 않을까 싶다. 그녀는 이미지를 소비하며 동시에 새로운 이미지를 생산해내는 예술가다. 모든 예술가가 다 그런 건 아니다. 새로운 그림을 그렸다고 해도 기존의 틀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면, 그건 단순히 새로운 스타일을 선보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새로운 인식과 새로운 시점을 제시해 주는 이미지가 진정한 의미의 새 이미지다. 그리고 이 새 이미지야말로 새로운 가치를 제시하는 힘을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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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불평등을 감수하는가]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왜 우리는 불평등을 감수하는가? - 가진 것마저 빼앗기는 나에게 던지는 질문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안규남 옮김 / 동녘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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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불평등, 그 중에서 경제적 불평등은 전 세계적인 이슈다. 이는 그저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시장의 힘과 정치적 권모술수가 상호작용하는 가운데 생겨난다. 자본주의는 오랜 기간에 걸쳐 사회의 나머지 구성원들을 희생시키면서 상위 계층에게 이익이 되는 방식으로 움직여 왔다. 부자는 갈수록 부자가 되고, 부자 중에서도 최상층은 더 큰 부자가 되고 있다. 반면, 중산층은 공동화되어 가난한 사람이 갈수록 더 늘어나고 있다. 또한, 사회적 기회는 기득권자들이 독식하며 양극화의 심화와 승자독식이라는 불평등은 우리들이 해결해야할 공동의 숙제가 되었다.

 

조지프 스티글리츠는 『불평등의 대가』에서 미국의 부자들이 담장 공동체(gated community)에 살면서 호화로운 혜택을 받는 나라가 되어 가고 있다고 경고한다. 한국사회의 부자들 역시 ‘영훈국제중학교’ 입시 비리 사건에서 보았듯이 온갖 탈법으로 자신들만의 성을 쌓아가기에 바쁘다. 최근 ‘부유세’ 논란 속에서도 1%의 부를 소유하고 있는 사람들은 “자신의 이익이 나머지 다수의 약자에게도 이익이 된다”는 관념을 심어 주기 위해 여러 방법으로 우리를 설득한다. 이에 대해 지그문트 바우만은 이렇게 말한다.

 

부자들의 부의 증가는 부와 소득의 위계에서 아래쪽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고사하고 부자들과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에게조차 ‘낙수효과’를 발휘하지 못한다. 악명이 자자하지만 그나마도 갈수록 환상이 되어가고 있는 계층 상승의 ‘사다리’는 오늘날 점점 더 통과할 수 없는 수많은 격자들과 넘을 수 없는 장벽들로 바뀌어가고 있다. ‘경제성장’은 소수에게는 부의 증가를 의미하지만, 수많은 대중에게는 사회적 지위와 자존감의 급격한 추락을 의미한다. (59쪽)

 

 

컵을 피라미드같이 쌓아놓고 위에서 물을 부으면 제일 위의 컵에 물이 다 찬 뒤에 그 아래에 있는 컵으로 물이 넘치게 된다. 이처럼, 대기업이나 수도권을 우선 지원하여 경제가 성장하게 되면 그 혜택이 중소기업이나 소비자, 지방에 돌아간다는 주장이 바로 낙수효과(Trickle Down)이다. 이런 논리라면 역사는 기득권이 영원히 보존되는 형국이 될 것이며, 아마 기득권자들은 이런 세상이 영구화되길 꿈꾸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바우만은 이런 현실을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오늘날 불평등은 자체의 논리와 추진력에 의해 계속 심화된다. 그것은 외부로부터의 도움이나 추진력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외적 자극이나 압력, 충격 같은 것은 전혀 필요 없다. 오늘날 사회적 불평등은 역사상 최초로 영구기관이 되어 가고 있는 것 같다. 수많은 실패 끝에, 인간들은 마침내 영구기관을 만들어 작동시키는 데 성공한 것처럼 보인다. (22쪽)

 

 

대기업이 잘 되면 덩달아 중소기업과 일반 소비자들한테도 혜택이 돌아간다는 이 ‘낙수효과’는 정부가 경제정책을 대기업 중심으로 가져가는 데 주요 근거가 됐다. 정부가 감세를 통해 대기업과 부유층의 부를 늘려주면 결국 총체적인 국가의 경기를 자극해 경제발전과 국민 복지가 향상된다는 것이다. 1990년 초 미국에서 시행된 이런 정책은 문제점이 드러난 지가 오래다. 하지만 한국사회에서는 여전히 이런 잘못된 믿음이 힘을 발휘하고 있다. 전면적인 경제 시스템의 교체 없이 박근혜 정부가 내세우는 ‘창조경제’, ‘경제민주화’가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 불평등 구조의 희생자들이 분노하기는커녕 부자 감세와 복지 예산 삭감에 동의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바우만은 잘못된 현상의 비밀을 우리가 암묵적으로 수용하는 거짓 믿음들에서 찾는다. 거짓 믿음은 '경제성장은 어떤 문제든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소비는 인간이 추구하는 행복을 충족시키는 유일한 길이다', '인간들 사이 불평등은 자연적인 것이다', '경쟁은 사회 질서의 재생산과 사회 정의의 필요충분조건이다'의 네 가지로 정리된다. 이런 믿음들 때문에 사회적 불평등은 자신을 스스로 영속화할 수 있는 능력에다 자신을 선전하고 강화할 수 있는 능력까지 갖추게 됐다.

 

그러나 바우만은 다시 자문한다. '길을 달리 하겠다고 마음을 바꾸기만 하면 될까, 우리가 길을 바꾸기만 하면 현실이 바뀌고 우리에게 행위를 명하는 현실의 냉혹한 요구들이 바뀔 것인가.' 결국, 사회적 불평등의 행진을 막을 방법은 거짓 믿음의 고리를 끊고 새로운 삶의 방식을 선택하는 것이다. 그는 '작가의 역할'을 예로 든다. 노벨상을 수상한 작가 엘리아스 카네티는 『말의 양심』에서 "진짜 작가로 만드는 요소는 말로 표현될 수 있는 모든 것에 책임을 지려고 하고 말의 실패에 속죄를 하려고 하는 갈망"이라고 썼다.

 

바우만은 "세계에 대한 책임을 자신에게 돌리는 것은 비합리적인 행위"라면서 "세계에 사는 주민들은 거주권을 매정하게 거부당하지 않는 한 예언자의 길로 들어서지 않는다"며 여전히 암울한 미래를 예견했다. 이어 "우리는 파국을 맞이해야만 파국이 왔다는 것을 인식하고 받아들이게 될 것"이라면서 "그러나 시도해보지 않는 한, 거듭해서 더욱 더 열심히 시도해보지 않는 한 그 생각이 틀렸는지는 결코 알 수 없다"는 다소 힘 빠진 결론을 맺었다. 경제학적인 관점으로 바람직한 미래를 위한 비전을 제시한 스티글리츠의 『불평등의 대가』를 먼저 읽은 독자라면 바우만이 대안으로 제시한 내용이 추상적으로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철학적 수사와 은유를 곁들여 ‘거짓믿음’의 실체를 분석하고 그것이 심화되는 과정을 분석한 데는 공감할 대목이 많다.

 

이제 불평등은 남의 나라 얘기가 아니라 바로 지금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현실이다. 특단의 대책이 없는 한 현재의 불평등 문제는 완화되기는커녕 악화일로를 걷게 될 것이다. 시장에 대한 맹신을 거두고 정부 및 시민사회가 보다 더 적극적이고 명확한 의지를 가지고 대처해나갈 때 비로소 희망이 생긴다고 말한다. 현실을 직시해야 미래를 내다볼 수 있다. 사회 공통적인 문제에 대해 공감하고, 책임의 범위를 넓혀 나갈 수 있는 미래를 위해서는 먼저 인식의 전환을 가로막고 있는 시장경제의 ‘거짓 믿음’에서 벗어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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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일
위화 지음, 문현선 옮김 / 푸른숲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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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독한 죽음

 

통계청 조사에 따르면 지난해 우리나라의 자살자는 1만2174명이다. 하루 33명, 42분마다 1명꼴로 스스로 목숨을 끊은 셈이다. 최근에는 지켜주는 사람 하나 없이 홀로 죽음을 맞이하는 ‘고독사’도 크게 늘고 있는 추세다. 어느 지역에 죽은 지 6개월이 지난 노인의 주검이 발견돼 충격을 안겨주기도 했다.

 

죽음은 모든 사람에게 언젠가는 찾아오는 삶의 마지막 단계다. 그렇기 때문에 죽음이라는 소재는 한편으로 사람들로부터 쉽게 왜곡되고 외면당한다. 그러나 그저 외면하고 덮어두기에 현대인들의 죽음은 너무나 다양하고 갑작스러우며 비참하기까지 하다. ‘인생은 원래 혼자다,’ 인간은 끊임없이 타인과의 관계 하에 존재한다는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란 말이 현대사회에서 점점 의미가 퇴색되고 있다. 사람들은 혼자 밥먹고, 혼자 놀고, 혼자 잠잔다. 심지어 죽음까지도 혼자서 맞기도 한다. 스스로 원했든, 상황이 만들었든 ‘홀로 살아가야 하는 이들’은 왜 우리 사회에서 늘고 있을까. 또 그들은 복잡한 사회 속에서 고립돼 가고 있지는 않은가.

 

 

 

 너무나도 슬프고, 외로운 7일 간의 여정

 

죽음 이후의 삶. 누구도 이 문제에 대해서 자신 있게 이야기한 사람은 없다. 오래 전에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 죽은 후의 세계를 얘기한다면 모를까. 혹시 그런 일이 벌어진다 해도 사람들은 믿지 않겠지만 말이다. 종교적 믿음을 배제한다면 미지의 사후 세계를 작가가 마음대로 상상하는 건 자유다. 그 허구의 세계가 얼마나 그럴듯하게 받아들여지느냐는 진정성의 몫이다.

 

위화의 새 장편 『제7일』은 사고로 버려진 양페이를 혈혈단신 총각의 몸으로 키우는 아버지 양진뱌오와 그들을 돌봐주는 아버지 친구 부부의 이야기, 산아제한 정책으로 강제 유산돼 시신마저 묘연히 처리된 태아들을 그리고 있다. 중국 사회의 부조리와 모순을 흡인력 있게 그려진 이야기는 신문이나 TV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우리 사회의 이름 모를 죽음의 한 장면들과 비슷하다. 양페이가 불의의 사고로 죽고 나서 7일 동안 연옥에서 이승의 인연들을 만나 그 동안의 앙금도 풀고 사랑을 재확인하는 과정이 담겨 있다. 양페이처럼 ‘죽었어도 매장되지 못한 이들’이 머무는 곳은 이승과 저승 사이 어느 자락에 따로 있다.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죽음은 자살에서 살인까지 다양하다. 그 중에서도 작가가 가장 무겁게 시선을 두는 죽음은 이른바 불행하게도 애도하는 사람 없이 고독하게 죽는 것이다. 지켜보는 사람 하나 없이 홀로 생을 마감하고 시체마저 뒤늦게 발견되고 안식을 누리지 못하는 죽음. 현대 도시문명의 그늘과 아픔이 짙게 배어있는 죽음이다.

 

"묘지가 있는 사람은 안식을 얻지만 묘지가 없는 사람은 영생을 얻습니다. 어떤 게 더 좋습니까?" (215쪽)

 

 

7일이라는 시간. 누군가에게 7일은 그리 길게 느껴지지 않은 기간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애도 받지 못한 채 묘지 없이 떠도는 양페이에게는 너무나도 슬프고, 외로운 여정일 것이다. 그의 쓸쓸한 뒷모습이 느껴지는 여정을 눈으로 따라가 보면 읽는 내내 마음이 시리다.

 

“나와 아버지는 영원한 이별 뒤에 다시 만났다. 아빠, 나랑 같이 가요, 하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아버지가 얼마나 일을 사랑하는지, 이 대기실에서의 일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았기에 이렇게 말했다. ‘아빠, 자주 뵈러 올게요.’” (299쪽)

 

양페이에게 죽음은 곧 살아야 할 모든 의미의 상실을 뜻한다. 자신의 아버지 양진바오와 한평생 사랑했던 리칭은 그에게 살아야 할 가치이자 의미의 전부였던 것이다. 안타깝게도 양진바오와 리칭 두 사람은 양페이보다 먼저 끔찍하고 불행한 사건으로 인해 생명의 에너지가 소진된 인물들이다. 망령이 되어서야 양페이는 짧게나마 이 두 사람과 함께하는 시간을 통해 진정한 사랑의 의미를 느끼고 확인할 수 있었다.

 

 

 

 사랑이 없는 한 삶도 없다

 

미국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는 “나는 지킬 약속들이 있고, 잠들기 전에 가야 할 길이 있다”고 노래한다. 망각에 저당 잡힌 채 살고 있지만, 우리 모두는 시시각각으로 죽어가고 있는 존재들이다. 삶의 부조리함은 죽음과 상실의 현존이라는 피할 수 없는 조건에서 생겨난다. 사람은 태어나는 시각부터 죽음을 향해 나가는 존재다. 우리는 날마다 조금씩 죽어간다. 죽음이 우리에게서 존재를 박탈하기 전에 우리에겐 지킬 약속들과 가야 할 길들이 있고, 그것이 공허와 무로 기우는 우리를 바로 세운다. 살아 있는 시간들은 죽음의 집행에서 유예된 시간들이다. 어쨌든 사람이 죽는다는 사실이 일으키는 공포감은 삶을 가난하고 누추하게 만든다. 그러나 죽음이 가난하고 누추하게 만든 삶을 풍요한 것으로 바꾸는 마법이 있다. 그것은 바로 절대의 사랑이다. 그 사랑이야말로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약속들, 그리고 가야 할 길의 전부다.

 

사랑이 너무 깊어 죽음의 세계에서도 ‘애도’라는 감정의 끈을 이으려고 하는 양페이와 그 밖의 망령들, 즉 ‘스스로 애도하는 자들’의 사연은 슬프면서도 감동 그 자체다. 감동 속에서 마음의 찌꺼기들, 불필요한 오해와 공허감을 지워버린다. 극심한 소외감과 단절감으로 조금씩 죽음에 다가서는 사람들과 이들을 구제하고 세상에 희망을 심으려는 망령들의 이야기를 통해 가족과 연인의 진정한 의미를 되돌아보게 한다. 작가는 협잡과 꼼수가 난무하는 현세와 서로를 죽인 원수임에도 매일 토닥토닥 싸우며 아옹다옹하며 살아갈 수 있는 연옥을 함께 보여주면서 우리가 지켜나가야 할 가치가 무엇인지를 독자들에게 묻고 있다. 하지만 망령들보다 더 좋은 세상에서 안식을 누리고 있는 우리는 중요한 삶의 가치를 잊은 채 살고 있다.

 

그런 안타까움에서일까. 7일 간의 쓸쓸한 여정을 마무리하면서 양페이는 의미심장한 말을 이승에 사는 독자를 향해 넌지시 던지고 있다. ‘저곳에는 가난도 없고 부유함도 없어. 슬픔도 없고 고통도 없고, 원수도 없고 원망도 없어... 저기 사람들은 전부 죽었고 평등해.’ (314쪽) 어두컴컴하고 서늘한 죽음의 세계에 사는 그들은 불쌍하고 우울한 존재가 아니었다.

 

이 소설을 읽는 동안 우리 내면에서는 정화 작용이 일어난다. 삶이 없는 한 풍요도 없다. 영국의 문필가 존 러스킨의 말이다. 나는 이 말을 이렇게 바꾼다. 사랑이 없는 한 삶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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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파 다비트 프리드리히 Taschen 베이직 아트 (마로니에북스) 20
노르베르트 볼프 지음, 이영주 옮김 / 마로니에북스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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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카스파 다비트 프리드리히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 1818년경

 

 

 "나 자신으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나를 둘러싸고 있는 것에 스스로를 맡기고, 구름과 바위와 합일되어야 한다.

자연과의 교감은 고독 속에서 이루어진다." (카스파 다비트 프리드리히)

 

 

 

 

 ♣ 고독하면서도 우아한 인물, 프리드리히

 

한 사내가 절벽 위에 올라 안개 자욱한 바다를 응시하고 있다. 그의 시선이 떨어지는 화면 중간에는 물 위로 삐쭉삐쭉 솟아오른 바위들이 도열해 있고 바위 위에는 나무들이 듬성듬성 고개를 내밀고 있다. 그 웅크린 듯한 모양새가 마치 인간 군상을 연상시킨다. 그 너머로는 멀찍이 거대한 산봉우리가 물안개 뒤로 희미하게 실루엣을 드러내고 있는데 마치 신성이 깃든 듯 신비로운 모습이다.

 

사내는 관조자로서의 침착성을 유지하고 있지만 그를 둘러싼 자연은 온통 격정으로 충만하다. 산과 바위는 마치 격렬하게 춤을 추는 듯한 움직임을 보이고 그 주변을 둘러싼 수파와 물안개는 좌우로 요동치며 화면에 긴장감을 불러일으킨다. 절벽 위에 두 다리로 단단히 무게중심을 잡은 사내의 머리카락도 거센 바람에 휘날리며 이런 격렬한 움직임에 호응하고 있다.

 

자욱하게 물안개가 피어오르는 초겨울의 이른 아침. 사내는 왜 절벽 끝에 아슬아슬하게 몸을 지탱한 채 바다를 응시하고 있는 것일까. 그의 발걸음은 대체 어느 곳을 향하고 있는 것일까. 보는 이의 궁금증을 자극하는 이 작품은 카스파 다비트 프리드리히(1774~1840)의'안개 속의 방랑자'로 독일 낭만주의 회화의 시각적 기념비다.

 

독일에서 화려하게 꽃을 피운 낭만주의는 지나치게 합리성에 얽매인 계몽주의와 고전적 규범을 맹신한 신고전주의에 대한 반발이 계기가 되어 일어난 운동으로 그 첫 포문을 연 것은 괴테와 실러가 중심이 된 '질풍노도' 운동이었다. 낭만주의자들은 전통과 규범에 얽매이기를 거부하고 오로지 자신의 감성과 내면의 움직임에 따라 진솔하게 자신을 표현하는 것을 지상목표로 삼았다.

 

이러한 시대정신은 자연스레 화가들로 하여금 내적인 성찰과 자유로운 상상의 세계에 빠져들게 만들었고 몇몇 진지한 화가들은 삶의 의미에 대한 철학적 사색과 종교적 명상으로 나아갔다. 특히 프리드리히는 종교적 명상을 바탕으로 자신의 회화에 정신적인 깊이를 쌓아갔다. 당시 독일 화가들이 이탈리아로 달려가 르네상스 이후의 고전적 규율에 발을 담그고 있을 때 그는 모국인 독일의 풍경을 진지하게 탐색, 안개와 구름이 자욱한 북구 특유의 자연을 신비롭게 묘사했다.

 

 

 

 ♣ 낭만의 성채를 지키는 고독한 파수꾼

 

프리드리히는 자연에 깃든 정신성을 다름 아닌 신이라고 보고 풍경화를 신을 향한 구도와 명상의 매개체로 보았다. 그의 작품에서 인물들은 ‘안개 위의 방랑자’처럼 자연의 힘 앞에서 어쩔 줄 몰라 하는 고독하고 나약한 존재로 그려진다. 그 인물들은 작가 자신의 자화상인 동시에 관람자 자신의 모습이기도 하다. 그 점은 등장인물을 뒷모습으로 묘사함으로써 감상자가 그림 속의 인물과 자신을 동일시하면서 우주 자연을 관조하도록 한 데서 잘 드러나고 있다.

 

 

 

 

 

카스파 다비트 프리드리히  「바닷가의 월출」  1821년경

 

 

프리드리히는 "화가는 눈앞에 보이는 외형만 그려서는 안 되며,자기 내면에 보이는 것도 그려내야 한다"고 말하고 심지어 "화가가 자기 내면에서 아무 것도 보지 못한다면 눈앞에 보이는 것도 그리지 말아야 한다"고 극언할 정도였다. 그의 이와 같은 태도는 낭만주의라는 시대정신과 어우러져 그를 확고부동한 대가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프로이센 왕의 후원을 받고 드레스덴 아카데미의 회원이 되는 등 그의 성공은 오래도록 지속될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시대는 언제나 제자리에 머무르는 법이 없다. 화가의 만년에 이르러 낭만주의자들은 점점 현실감각이 없는 기인으로 손가락질 받게 되고 후원자들의 손길도 싸늘하게 식어갔다.

 

그러나 프리드리히는 세상을 뜨는 날까지 결코 현실과 타협하지 않은 채 고집스럽게 낭만의 성채를 지키는 파수꾼으로 남는다. 자신이 평생 걷게 될 고독한 여정을 예상하고 있는 ‘안개 속의 방랑자’처럼 말이다.

 

 

 

 ♣ 바다 저편 무한성을 보다

 

 

 

 

카스파 다비트 프리드리히  「바닷가의 수도사」  1818~1820년

 

 

산이나 바다에서 우리는 제약되지 않은 느낌은 모든 것이 트여오는 듯한 체험을 한다. 심신이 트이는 것, 그것은 다른 말로 무한성의 체험이다. 내가 사는 공간이 내게 속하면서도 나를 넘어 저 먼 곳까지 이른다는 느낌은 광활함의 감각이다. 낭만주의는 가장 간단히 말해 이 무한성의 경험이고 그 그리움이다.

 

우리는 이 그림에서 하늘(공기)과 바다(물)와 땅(모래)을 본다. 이것은 자연의 기본요소다. 지구가 생명의 요람이 된 것은 물과 대기 덕분이다. 땅이 인간의 토대라면 바다는 그가 유래한 곳이다. 인간은 하늘의 대기를 매순간 들이켜고 내쉰다. 그림 속 인물은 한 점처럼 서 있다. 그는 이쪽-관찰자가 아닌 저쪽을 향해 있다. 낭만주의 회화의 인물에는 이처럼 등을 돌린 채 있는 경우가 많다. 이때 관찰자는 인물과 같은 시점을 갖게 된다. 그래서 우리도 자기 내면으로부터 외부의 현실로 시선을 돌린다.

 

그림 속 수도사는 땅의 끝에 서 있다. 이 모래언덕 위에는 아무 것도 없다. 대기와 땅과 바다뿐. 이 광대한 우주에서 인간은 하나의 얼룩처럼 자리한다. 그래서 외롭다. 황량함과 고독은 자연의 전체, 즉 우주 앞에 선 인간의 필연적 조건이다. 이것은 화면의 5분의 4를 채운 하늘에서 잘 암시된다. 물과 땅과 대기는 그가 오기 전처럼 그가 떠나간 후에도 남을 것이다. 그래서 근원적이다.

 

근원적인 것은 이렇듯 단조롭고 무한하다. 그러면서 순환한다. 물이 증발하여 구름이 되고, 이 구름이 농축되어 비로 된다. 그 사이에 어떤 것은 굳어져 물질이 되고, 이 물질은 바람에 날려 모래가 되며, 모래는 먼지로 떠돌다가 물에 씻겨 내려간다. 이것은 자신을 쉼 없이 비워내는 탈세속화의 과정이다. 인간의 생애는, 그 육체는 먼지와 바람과 물 그 어디쯤에 있을 것이다. 뭉쳐있는 고체가 모래언덕이라면, 모여 있는 이 물질도 바람으로 물로 언젠가 소진될 것이다. 쉼 없이 출렁이는 바다 물결이 그것을 말해주지 않는가. 자연의 근본요소는 인간의 성취를 무시한다.

 

 

 

 

 

카스파 다비트 프리드리히  「뤼겐의 백악 절벽」  1818년

 

 

자연의 무한한 모습은 우리의 정서를 압도한다. 이것은 두 가지 모순된 정서적 효과, 절망과 활력을 동시에 일으킨다. 절망은 자연의 파괴적 힘에서 온다. 가늠할 길 없는 자연 앞에서 우리는 자기 몸이 보잘것없으며 그 삶도 하찮게 여기게 된다. 그러나 이 무기력은, 무시간적 우주에서 우리가 그 나름의 삶을 꾸려간다는 사실로 하여, 활력의 이유가 되기도 한다. 사실 프리드리히는 자신의 그림이 단순한 풍경 모사가 아니라 진실에 대한 욕구의 표현이길, 그래서 이지러진 시대의 영혼을 정화하길 바랐다.

 

 

 

 ♣ 고독과 명상이 필요한 시간

 

 

 

 

카스파 다비트 프리드리히  「떠오르는 태양 앞의 여인 (지는 태양 앞의 여인)」  1818~1820년경

 

 

프리드리히의 풍경화는 무엇보다 무한성의 경험이다. 이 무한성은 진실하고 영원하며 신적이다. 그러므로 좋은 풍경화는 단순한 풍경화가 아니다. 그것은 명상이면서 꿈꾸기이며, 기도이고, 비전이다. 참된 자연의 체험은 성스럽고도 장엄한 종교의식과 같다. 그래서 믿음은 회의와 만나고, 우울은 희망과 짝한다. 세계의 전체를 어루만지게 된다고나 할까. 삶의 이곳은 그 둘레와 너머까지 가늠할 때 온전해진다. 우리는 우리의 여분을 허용하고 그 나머지를 돌볼 때 본래성에 다가선다.

 

그의 풍경화를 제대로 보려면 우리는 홀로 있어야 한다. 그림 속 방랑자나 수도사처럼 혼자 서서 느끼고 생각하며 돌아보아야 한다. 정신의 내면적 눈은 이때 생긴다. 생명은 지워지고 있는 하나의 점이면서 무한의 우주로 이어진 고리다. 이 무한성 앞에서 우리는 우리가 알아왔던 세계가 세계의 일부일 뿐이며, 이 일부의 세계 너머에 알 수 없는 무엇이, 또 다른 광활함이 있음을 감지한다. 그러면서 여기 이곳이 저편과 어떻게 얽혀 있는지, 부분은 어떻게 전체로 이어지는지 깨닫기 시작한다. 그러나 오늘의 삶에서 이런 생각은 하기 어렵다.

 

고독한 낭만주의자가 바라보는 풍경은 숭고함을 불러일으킨다. 덧없이 스러지며 순환하는 영원하고 무한한 자연 현상을 고독하게 바라보는 작지만 커다란 인간 존재를 보여준다. 그것에서 ‘나’란 주체, 개체는 무의미해 보인다. 영원과 무한 속에서 유한한 인간 존재는 그만큼 슬프고 남루하다. 그러나 우리는 프리드리히의 그림을 보면서 저 신비스러운 자연 앞에서 세계에 대한 성찰과 자기 존재에 대한 반성을 통해 새로운 삶을 꿈 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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