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4일은 파이 데이. 파이는 그리스 문자 π이며 원주율을 뜻하는 수학 기호다원주는 원의 둘레를 뜻한다. 원주에서 원지름을 나누면 원주율이 나온다. 원주율은 끝이 없는 값이다. 3.14로 시작해서 숫자가 계속된다. 근삿값인 3.14가 원주율이다. 수학자들은 3.14와 숫자가 같은 314일을 원주율을 기념하는 날로 정했다.


1년이 12개월이 아니라 20개월이라고 상상해 보자. 우리는 1년이 금방 지나간다고 하소연한다. 시간이 빠르다. 다음 달이면 5월이다. 달 수가 많아지면 나이 한 살 먹는 속도가 덜 빠르게 느껴질까? 갑자기 궁금하긴 한데,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야 해서 상상의 나래를 ‘1년은 20개월’, 딱 여기까지만 펼치겠다.


1년이 20개월인 세상에서 ‘1729은 파이 데이와 더불어 수학자들을 위한 특별한 날이다1729. 언뜻 보면 평범해 보이는 수다. 하지만 이 네 자리 숫자는 수학자들에게는 뜻 깊은 수다1,729의 숨은 의미를 꿰뚫어 본 수학자가 라마누잔(Srinivasa Ramanujan)이다라마누잔은 인도에서 태어나 영국에서 활동한 수학자다. 당시 인도는 영국의 식민지였다. 정규 교육을 받지 않은 라마누잔은 스스로 수학을 공부했으며 복잡한 수식을 공책에 적어 가면서 계산했다
















* 로버트 카니겔, 김희봉 옮김 수학이 나를 불렀다: 인도의 천재 수학자 라마누잔(사이언스북스, 2000)




라마누잔은 자신이 직접 풀어서 증명한 수식과 정리들을 편지에 써서 영국의 수학자들에게 보냈다그의 비범한 능력이 영국에 알려지지만, 오만한 제국의 수학자들은 인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고드프리 하디(Godfrey Harold Hardy)는 생각이 달랐다. 당시 하디는 케임브리지대학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다하디는 생소한 증명 방식에 흥미를 느꼈고, 인도 청년을 영국으로 초청한다. 하지만 라마누잔은 단 한 번도 인도 밖으로 떠나본 적 없는 힌두교 신자였다. 우여곡절 끝에 라마누잔은 영국으로 가는 배에 올랐다. 라마누잔은 하디와 함께 연구했고, 하디는 그의 후견인을 자처했다. 그러나 영국은 여전히 오만했으며 유독 라마누잔에게 쌀쌀맞게 구는 제국이었다. 라마누잔은 채식주의자여서 영국 음식이 입에 맞지 않았다. 영국의 쌀쌀한 날씨는 라마누잔을 괴롭혔다. 몸은 얼어붙어 있어도 정신만은 건강한 상태를 유지했다. 수학을 좋아하는 열정은 수식과 기호로 가득한 라마누잔의 삶이 차갑게 식지 않도록 데워 주었다.
















* G. H. 하디, 정회성 옮김 어느 수학자의 변명: 수학을 너무도 사랑한 한 고독한 수학자 이야기(세시, 2016)




몸이 허약해진 라마누잔은 병원에 입원했고, 자주 병문안을 온 하디와 수학과 관련된 대화를 나누었다. 하디는 병원에 가기 위해 타고 온 택시 번호가 ‘1,729’였다고 말했다. 하디는 1,729를 평범한 택시 번호라고 했지만, 라마누잔은 매우 흥미로운 수라고 생각했다1,729서로 다른 두 개의 수를 세제곱 해서 더하는 방법이 두 가지인 가장 작은 수1,729를 눈여겨본 라마누잔에 대한 일화는 하디의 자서전 어느 수학자의 변명에 나온다. 수학자들은 1,729 하디-라마누잔 수또는 택시 수(Taxicab number)라고 부른다.

















* 스토 야스시, 전종훈 옮김 《최소한의 수식으로 이해하는 우주의 수학》 (플루토, 2024)


* 콜린 스튜어트, 오혜정 옮김 《숫자로 끝내는 수학 100: 100개의 숫자로 이해하는 수학!》 (지브레인, 2016)




1,729가 유명해지면서 라마누잔은 천재 수학자로 알려지게 된다. 그는 또 원주율을 구하는 수식을 발견했는데, 여전히 수학자들은 그가 어떻게 수식을 생각했는지 밝혀내지 못했다. 일본의 천체물리학자 스토 야스시(須藤 靖)의 책 우주의 수학에 라마누잔이 증명한 원주율 구하는 식이 나온다. 스토 야스시는 이 책에서 수식이 아름답다고 예찬하면서도 라마누잔이 풀이한 수식은 복잡해서 아름다움이 느끼지 않는다고 언급한다. 그러면서 라마누잔의 천재성을 극찬한다. 지금도 남아 있는 라마누잔의 공책에 온갖 수학 공식과 정리들이 채워져 있다. 수식을 푸는 과정이 생략된 채 결과만 적혀 있다. 라마누잔은 힌두교에 숭배받는 나마기리(Namagiri)라는 여신이 꿈속에 나타나 수학을 가르치고, 잠에서 깨고 나면 여신이 알려준 것을 공책에 적는다고 했다.


택시 수 1,729와 여신이 가르쳐준 것을 받아 적었다는 공책들. 라마누잔의 비범한 능력을 강조할 때 항상 언급되는 것들이다. 하지만 과학자의 천재성만 보여주는 과학의 신화화는 과학을 연구하는 과정 중에 발생되는 일들(측정 오류, 예상하지 못한 변수 등)을 생략한다. 미발표된 라마누잔의 공책은 총 네 권이다. 네 권의 공책 속에 한 번도 발표된 적이 없는 공식들이 있다고만 알려졌는데, 잘못 증명된 공식들도 포함되어 있다.


라마누잔은 1,729가 특별한 수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라마누잔의 공책에 1,729를 계산한 기록이 있다. 라마누잔은 자신이 직접 푼 계산 방식을 기억하고 있어서 하디에게 1,729를 설명할 수 있었다. 그리고 1,729를 하디-라마누잔 수라고 부를 수 없다. 영국의 천문학자이자 과학 해설자 콜린 스튜어트(Colin Stuart)의 견해에 따르면 1657년에 수학자들이 1,729를 연구한 기록이 남아 있다. 1,729특별한 수’일 뿐, ‘특별한 수학자의 수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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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4-04-22 12: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라마누잔. 낯설지가 않네. 언젠가 이 사람 전기영화를 본적이 있는 거 같은데 제목이 생각이나질 않는다. 영화 괜찮았는데.

카스피 2024-04-23 14: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라마누잔 이분 저도 어느 영화에서 본 것 같은데 너무 일찍 돌아가셨더군요
 




오늘 421과학의 날이다. 이 특별한 날을 맞아 오늘부로 담담 책방과학책방 담다로 새롭게 변신한다담다는 책방 이름 담담과 영국의 생물학자 다윈(Darwin)를 합쳐서 만든 이름이다서울 삼청동에 과학책방 갈다(갈릴레이+다윈)가 있다면, 대구 비산동과학책방 담다가 있다.


419다윈이 세상을 떠난 날이다. 지금으로부터 90년 전인 1934419일에 과학 대중화 운동 단체 발명학회 과학 데이를 정했다. ‘과학 데이는 우리나라 최초 과학 기념일이다.
















* 이오진 청년부에 미친 혜인이(제철소, 2023)




과학책방 담다를 책임질 주인장은 바로 나, 과학책에 미친 해성이나는 문과 남학생으로 살아왔지만, 어린 시절 과학자가 되고 싶은 꿈이 1.5g 정도 남아 있다과학자가 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아주 작은 꿈이다. 그래도 이 꿈은 내겐 매우 소중하다이 꿈이 다 녹아서 사라졌다면 과학책을 펼쳐 보는 일이 없었을 것이다.


현실적으로 이룰 수 없는 꿈은 개꿈으로 취급받는다. 제대로 펼치지 못한 꿈은 그 꿈을 소중히 간직했던 사람의 관심에서 멀어진다. 차갑게 식어 버린 꿈은 흐르는 시간에 씻겨서 사라진다. 이대로 방치할 수 없다. 꿈을 반쯤 펼쳐라. 내 수준에 맞게 꿈 이름을 바꾼다면 접힌 꿈을 반 정도 펼칠 수 있다. 나는 과학자가 되는 꿈’을 과학책방 주인장이 되는 꿈으로 바꾸었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 과학책방 담다를 만들었다. 내 꿈을 이루게 해준 담담 책방’ 책방지기 정의식 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린













과학책방 담다의 처음이자 마지막인 추천 도서 총 여섯 권이다. 까다롭게 책을 좋아하는 나의 추천 도서 기준은 다음과 같다. (1) 내가 산 책들. (2) 알라딘에 내가 쓴 서평이 있는 책. 나중에 언급하겠지만, 추천 도서 한 권만 서평을 쓰지 않았다. (3) 많이 알려진 책들은 제외했다. 모든 책방에 베스트셀러과학책이 한두 권 있다. (4) 독자들의 손길과 시선을 많이 받지 못한 책들. 언젠가 독자들에게 인정받을 가능성이 있는 책들(5) 그래서 출간된 지 얼마 안 된 신간 도서를 두 권 이상 고를 것. (6) 끝까지 읽지 않아도 되는 책들. 생각날 때마다 펼쳐 볼 수 있는 편안한(책방 주인장의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이다) 과학책이다. 책방의 넓은 책상에서 편안하게 읽어도 된다.



















* 칼 세이건, 홍승효 옮김 브로카의 뇌: 과학과 과학스러움에 대하여(사이언스북스, 2020)


<서평>

[새로운 지식을 만나는 회의주의자의 올바른 자세] 202122일 작성




과학이란 무엇인가?’ 누군가가 과학이 뭐냐고 물으신다면 나는 이 책을 추천하겠다. 미국의 천문학자 칼 세이건(Carl Sagan)의 대표작 코스모스가 책장에 꽂힌 책방은 많다. ‘담담책방코스모스가 두 권이나 있다. 그런데 과학책방 갈다를 제외한 다른 책방에 왜 브로카의 뇌, 이 책은 없는 것일까


브로카의 뇌코스모스(1980년 출간)보다 일 년 먼저 나온 책이다. 다양한 주제로 한 에세이를 모은 책이라서 틈틈이 읽기 좋다세이건과 친해지고 싶은데 많이 팔린 과학 벽돌 책’ 코스모스완독이 부담스러운 독자라면 브로카의 뇌를 만나면 된다.

 

과학자는 가설이 타당한지 검토하기 위해 관찰하고 실험한다. 가설이 진리로 확정되었더라도 새로운 오류가 발견되면 다시 한번 실험한다. 과학은 자연 현상을 차근차근 이해하려고 하는 상당히 느린 학문이다. 세이건은 이런 과학을 좋아하는 태도를 과학적인 마음가짐이라고 했다. 브로카의 뇌를 읽는다면 과학자가 아니더라도 누구나 과학(을 좋아)하는 마음한 움큼 쥘 수 있다.


[책 관련 주제] 과학, 사이비 과학(유사 과학), 회의주의

 

















[4월에 태어난 신간 도서]

* 텔모 피에바니, 김숲 옮김 《불완전한 존재들: 결함과 땜질로 탄생한 모든 것들의 자연사》 (북인어박스, 2024)


<서평>

[큰 그릇은 완성되지 않는다] 2024년 4월 5일 작성



완벽이라는 높은 벽을 넘어서기 위해 힘겹게 매달리는 사람들에게 위로를 주는 과학책. 불완전한 존재들은 완벽주의자의 지친 어깨 위에 손을 얹으면서 말한다. 모든 것은 처음부터 완벽하지 않았고, 전보다 더 나은 상태인 지금도 완벽하지 않아.” 이 책은 진화가 완벽한 상태에 도달하기 위한과정이 아님을 보여준다모든 존재는 진화를 통해서 자신의 결함을 인정한다. 그리고 불편을 감수하면서까지 결함을 안고 살아간다.

 

완벽한 상태완전한 상태를 선호하는 인간은 결함과 오류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인간을 불편하게 만든 결함과 오류는 늘 환영받지 못한다. 다윈을 지지한 자칭진화론자들은 인간은 진화를 거쳐 지구상 가장 완벽한 존재라고 믿었다. 정작 다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는데‥…. 그들은 너무나도 단순한 믿음만으로 세상을 바꾸려고 했다. 세상을 바꾸기 위해 그들이 제일 먼저 한 일은 불완전한 존재를 완벽하게 제거하기.

 

자칭 진화론자들이 생각하는 불완전한 존재는 제대로 진화하지 못한 실패한 존재이며 완벽하지 않다. 또한 이 세상이 발전하는 데 전혀 유익하지 않다고 봤다. 자칭 진화론자들은 우생학이라는 학문을 만들어 반드시 제거해야 할 불완전한 존재일 순위로 장애인을 지목한다. 대중, 학자들, 정치인들 모두 우생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우생학에 열광한 사람들은 장애인을 이 세상에 쓸모없는 존재로 인식했다. 우생학을 지지한 정치인들은 장애인을 따로 격리하여 수용소로 보내거나 장애인 학살을 허용하는 국가 정책을 내세웠다. 우생학은 사라졌어도, 장애인을 불완전한 존재로 바라보는 시선은 일상 곳곳에 있다.







그러고 보니 어제가 장애인 차별 철폐의 날이었다. 그런데 달력에 왜 장애인의 날이라고 적혀 있지? ‘장애인을 위한 날은 아닐 텐데.

 


[책 관련 주제] 진화, 다윈


















[3월에 태어난 신간 도서]

* 레이철 E. 그로스, 제효영 옮김 《버자이너: 과학의 아버지들을 추방하고 직접 찾아 나선》 (휴머니스트, 2024)


<서평>

[내 이름은 버자이너 울프] 2024년 3월 13일 작성






 “말하지 않으면 우리는 그것을 보지 못하고, 인정하지 못하고 기억하지도 못합니다. 우리가 말하지 않으면 그것은 비밀이 됩니다. 비밀은 부끄러운 것이 되고 두려움과 잘못된 신화가 되기 쉽습니다. 나는 언젠가 그것이 부끄럽지도 않고 또 죄의식을 느끼지 않아도 되는 때가 오기를 바라기 때문에 입 밖에 내어 말하기로 했습니다.”

 

(이브 엔슬러의 희곡 버자이너 모놀로그 중에서, 류숙렬 옮김, 북하우스, 2009, 22)




버자이너(Vagina)’는 한 권의 과학책이 되어 말하기 시작했다. 내 몸을 사랑한다면 이름을 제대로 불러달라고. ‘거기’, ‘아랫도리가 아니라 ()이라고.



 “내가 자주 가는 책방들을 운영하는 분들 대부분은 여성이다. 그분들이 이 책을 읽었으면 좋겠고, 책방에 이 책 한 권이라도 있었으면 좋겠다. 모든 책방에 이 책이 있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담다주인장이 알라딘에 남긴 버자이너100자 평)

 


[책 관련 주제] , , 자궁, 출산, 의학, 건강, 페미니즘

 









 











* 여인형 《여인형의 화학 공부: 완전히 새로운 화학 입문》 (사이언스북스, 2023)


<서평>

[교과서 같지 않은 화학 교과서] 2024년 1월 24일 작성




여인형 교수는 대학생들을 위한 화학 교재를 쓴 이력이 있다. 하지만 그는 강의 시간에 학생들이 자신이 쓴 교재나 우리말로 번역된 어려운 외국 교재를 보면서 공부하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고민한다. 화학 전공 학생들과 과학 비전공자 모두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화학 교재를 어떻게 써야 할까? 저자는 우리 일상 곳곳에 흔히 일어나는 자연 현상을 예로 들면서 화학 법칙을 설명한다그리고 반드시 외워야 할 화학 지식을 오래 기억하기 위해 자신이 만든 암기법을 소개한다.

 

생긴 건 벽돌 책이지만, 이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지 않아도 된다(물론 화학에 관심이 있으면 완독해도 좋다). 알고 싶은 화학 용어가 있으면 책 뒤쪽에 있는 찾아보기를 먼저 보라. 화학 용어가 언급된 쪽수를 확인했으면 그 부분을 찾아서 읽는다. 분량이 얇든, 두껍든 간에 과학책을 무조건 완독해야 한다는 믿음은 버리시길.


[책 관련 주제] 화학, 원소, 주기율표



















* 레이 브래드버리, 조호근 옮김 《레이 브래드버리태양의 황금 사과 외 31》 (현대문학, 2015년)


<서평>

[우주를 가린 아름다운 환상의 커튼을 걷어라!] 2017921일 작성




레이 브래드버리(Ray Bradbury)는 미국의 SF(과학소설) 작가다. 그가 쓴 소설에 묘사된 과학은 상상력을 한가득 품은 과학이다. 레이의 소설을 처음 접하는 독자라면 당황할 것이다. “이 글, 정말 SF 맞아요?” 과학 법칙에 소재로 한 SF를 즐기는 독자는 레이의 글이 심심하게 느껴질 수 있다


실제로 칼 세이건과학스러운 과학소설을 높이 평가했다. 유사 과학을 비판한 학자답게 과학소설 속에 묘사된 유사 과학을 경계했다그의 견해는 브로카의 뇌에 수록된 SF 소설에 대한 개인적인 견해라는 글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SF라고 해서 무조건 과학적인 사실이 묘사되어야 하나? 이 견해에 동의하는 독자가 있으면 따지고 싶다. 그렇게 생각하면 사람들이 SF를 안 봐요‥….

 

과학을 음식으로 비유하면 한 입 깨물면 씹기 힘들 정도로 단단하다. 과학을 어렵게 생각하면 과학이 맛없어 보인다. 과학을 제대로 씹는다고 해도 그 맛은 엄청 맵다. 그래서 내가 과학의 매운 맛을 좋아해서 심각한 중독(中毒/) 수준에 이르렀다. 매운 과학책을 계속 눈으로 먹으면 지겨울 때가 있다. 이럴 때 달콤한 맛이 나는 레이 브래드버리의 소설을 읽으면서 뇌에 에너지를 보충해 보자. 단편 선집 레이 브래드버리: 태양의 황금 사과 외 31은 과학책이나 과학소설을 좋아하는 독자를 위한 아이스크림이다. 일명 레이 브래드버리 32’. 단편 선집은 골라 읽는 재미가 있다. 32편의 단편을 매일 한 편씩 읽는다면 당신은 레이 브래드버리 아이스크림의 다채로운 맛을 느낄 수 있다.

 

작가 이름에 브래드가 있지만, (bread)’은 아니다. 그래도 그의 소설을 빵으로 비유하면 허니브레드.


[책 관련 주제] SF, 우주

 


















* 후지하라 다쓰시, 박성관 옮김 《분해의 철학: 부패와 발효를 생각한다》 (사월의책, 2022년)




불완전한 존재들을 다 읽었을 때, 나는 이 책의 짝꿍이 될 만한 책 한 권이 생각났다. 그 책이 바로 분해의 철학이다. 이 책은 2022년에 샀다. 다 읽긴 했는데, 서평을 쓰지 못했다.


진화의 의미를 착각하는 사람들은 진화에 완벽히 성공한 유일한 존재가 인간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진화가 늘 항상 더 좋은 쪽으로 변하는 과정이 아니다. 퇴화도 진화의 한 과정이라 볼 수 있다. 따라서 진화를 거친 모든 존재는 절대로 완벽해질 수 없다.

 

불완전한 존재들결함을 인정하고, 결함이 주는 불편함에 적응하기 위해 땜질하는 진화를 강조한다면, 분해의 철학부패발효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우리는 결함이 있는 물건을 못 쓰게 되면 쓰레기라고 부른다. 시간이 지나면서 품질 상태가 좋았던 물건은 점점 낡아지고, 결국에는 분해된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나이가 들면 노화가 진행되고, 죽음을 맞이한다.


만약 지구에 쓰레기의 양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나게 많아지고, 그 많은 쓰레기 전부 썩지 않는다면 세상은 어떻게 될까? 더럽고 악취가 진동하는 디스토피아가 우리 눈앞에 펼쳐질 것이다(소설에서 일어날 법한 상황이 아니다. 썩지 않은 플라스틱이 지구에 너무 많이 남아 있다). 쓰레기를 버릴 줄만 아는 인간은 부패 현상 덕분에 지금까지 잘 살아 있다. 인간은 썩어가는 과정을 썩 좋아하지 않지만, 자연은 부패와 분해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 죽은 동물의 사체는 또 다른 동물들의 먹이가 된다. 미생물과 곤충은 사체의 부패 속도를 빠르게 해준다. 미생물과 곤충은 크기가 아주 작은 존재들이지만, 지구를 살리는 그들의 존재감은 크다.

 

분해의 철학이라는 제목만 보면 철학책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생태학을 다룬 책이다. 생태학의 정의를 쉽게 말하면 인간과 자연이 공존하는 관계를 지향하는 친환경적인 과학이다. 생태학은 부패와 발효를 지구의 모든 생명체가 번성하는 데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과정으로 바라본다. 그래서 분해의 철학을 추천 도서로 정했다. 이 책을 추천한 이유는 그것뿐만 아니다. 분해의 철학을 펴낸 출판사 이름이 사월의 책이다.


[책 관련 주제] 생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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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ient-guest 2024-04-21 1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짜 서점주인이 된 거에요?? 축하!!!!!!

cyrus 2024-04-22 05:47   좋아요 1 | URL
책방 주인이 된 건 아니구요, <담담 책방>에서 특별히 과학 도서 큐레이팅을 한 거예요. <과학책방 담다>라는 책방은 없어요.. ㅎㅎㅎ 장난스럽게 글을 썼는데 제가 오해를 불러일으켰어요. ^^;;

transient-guest 2024-04-22 06:15   좋아요 1 | URL
모두 비슷한 취지의 댓글이 ㅎㅎㅎ 큐레이팅도 응원합니다

cyrus 2024-04-22 06:28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어제는 21일에 ‘2’를 지운 만우절이라고 생각해 주세요.. ㅎㅎㅎ

blanca 2024-04-21 15: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 책방 여신 거예요? 진짜 축하드리고 정말 잘되기를 기원합니다. cyrus님의 전문적인 식견과 취향 등이 잘 반영된 과학 담당 책장, 대구 독서가들의 성지가 되기를....

cyrus 2024-04-22 05:48   좋아요 0 | URL
<과학책방 담다>는 과학 도서 큐레이팅 이름이고요, 책방을 연 건 아니에요.. ^^;;

stella.K 2024-04-21 21: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 소리없는 반전이군. 하지만 난 어느 정도 예견했다.
책을 그리 좋아하니 언젠가 서점 낸다고 하지 않을까 하는. ㅎㅎㅎ
그런데 그런 말도 있더군. 책 좋아해서 서점을 냈는데 오히려 책 읽을 시간이 없다나 뭐라나.
책을 좋아하는 거하고 독서를 좋아하는 거 하곤 좀 다르다고도 하던데
난 솔직히 책만 좋아했지 독서를 좋아하진 않는 것 같아. 그러니 나 같은 사람이 서점을
하는 게 맞는 것 같은데 말야. 요는 힘들면 언제든지 책 읽는 사람으로 돌아오라는 거지.
이거 뭐 신장 개업한 사람한테 할 소린 아니지? ㅋㅋㅋ
암튼 축하한다. 컨셉이 좋으네. 서점 내부도 보여주면 좋겠는데.
서점에서 독서토론도 하고 그러겠다. 기대되네.
가까우면 한 번 가 볼 텐데. 혹시 대구 갈 일 있으면 기별하마.
번창해라. 다시 한 번 축하해!^^

cyrus 2024-04-22 05:52   좋아요 1 | URL
누님, 죄송해요. 책방을 열지 않았고요, <담담 책방>에서 과학 도서 큐레이팅을 한 거예요... ㅎㅎㅎ 저는 책 파는 사람보다는 책 읽는 사람이 되는 게 좋아요. ^^

stella.K 2024-04-22 09:50   좋아요 0 | URL
ㅎㅎㅎ 너 주거써!!

서니데이 2024-04-21 21: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cyrus님, 서점 시작하신 건가요. 본문 내용 읽을 때에는 서점 내에 부분 코너 시작하는 것 같았는데, 이웃분들 댓글을 보니까 서점을 여신 것 같기도 해서요.
어느 쪽인지 잘 알수 없지만, 잘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좋은 주말 보내세요.^^

cyrus 2024-04-22 05:55   좋아요 1 | URL
<담담 책방>에서 특별히 과학 도서 큐레이팅을 해봤어요. <과학책방 담다>라는 서점은 없어요.. ㅎㅎㅎ

카스피 2024-04-22 11: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 좋아하는 사람은 자신만의 서가나 책방을 갖는것을 누구나 꿈꾸는 것 같은데 cyrus님이 그걸 해내셨다니 넘 부럽습니다^^

책친놈 2024-04-22 2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과학책 읽어보려고 했는데 ㅎㅎㅎ 큐레이팅 해주신 책중에 읽어봐야겠네요! 글 잘보고 갑니다 ㅎㅎㅎ
 
도서관에는 사람이 없는 편이 좋다 - 처음 듣는 이야기
우치다 다쓰루 지음, 박동섭 옮김 / 유유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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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점  ★★★★  A-





이상하다. 분명히 예전에 빌려 읽은 책인데, 왜 없을까도서관은 내가 찾으려는 책이 없다고 말한다. “찾으시는 자료가 없습니다.” 오래전에 읽은 책이라서 내가 책 제목을 잘못 알고 있나? 다시 한번 책 제목을 입력한다. “찾으시는 자료가 없습니다.” 





책 제목의 띄어쓰기가 틀렸나? 붙어 있어야 할 두 글자 사이에 일부러 틈을 만든다. 억지로 띄어쓰기한 제목을 한 번 더 입력찾으시는 자료가 없습니다.” 도서관은 똑같은 답변을 반복한다. 그렇다면‥… 이번에 책의 저자 이름과 출판사 이름을 같이 입력한다. “저기요, 찾으시는 자료가 없다니까요.”


도서관의 무성의한 답변을 받아들이지 못한 나는 도서 대출 이력을 뒤적였다. 도서관에서 행방불명된 책은 찾으러. 눈을 크게 뜨면서 대출 도서 목록을 살펴봤다. 드디어 책 제목을 찾았다. 도서관이 없다고 했던 그 책을 만난 적이 있다내가 데려온 도서관 책들은 짧게는 이틀, 길게는 2주 정도 우리 집 책상에서 지냈다. 내가 책상에 앉으면 책은 온몸을 펼쳐서 그 속에 가득 담긴 이야기를 보여줬다. 한 번도 펼치지 못하고 도서관으로 돌려보낸 책들도 많다. 시간이 조금 지난 후에 제대로 만나지 못한 책을 다시 데려왔다. 유년기와 청년기에 도서관을 내 집 드나들 듯이 했다.


우치다 다쓰루(内田樹)도서관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활자 중독자. 우치다 선생이라면 있어야 할 책들이 사라지는 도서관에 일침을 가했을 것이다. 기업을 닮고 싶은 도서관은 사람이 책보다 더 많다. 민간 업체는 성과를 중시한다. 도서관을 관리하는 민간 업체의 목표는 도서관에 사람들을 많이 오게 할 것. 민간 업자는 베스트셀러를 잔뜩 구매한다. 베스트셀러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빌려 보는 인기 도서다. 독자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는 인기 도서를 최대한 많이 확보하려면 자리가 있어야 한다. 딱 봐도 재미없어 보이는 학술서, 사람들의 눈길과 손길을 한 번이라도 제대로 느껴본 적이 없을 것 같은 조용한 책들. 이런 책들은 대출 횟수가 적어서 깨끗한 편이다. 하지만 퇴출 대상 일 순위다. 새로운 책들이 들어오면 나이 많고 인기 없는 책들은 수용소 같은 서고에 보관된다. 서고에도 자리가 없으면 상태가 좋지 못한 낡은 책들은 헌책으로 분류되어 쫓겨난다. 쓰레기로 취급받아 무더기로 버려지고 폐기물 처리장에서 죽음을 맞이한다어쩌면 내가 찾지 못한 책도 그런 운명에 휘말렸으리라.


우치다 선생은 도서관에 사람이 없어야 한다고 주장한다도서관에 사람이 너무 많으면 책과 독서의 가치가 가려지기 때문이다. 생은 사람 소리 한 점 없는 한적한 도서관에 있으면 제일 먼저 책이 눈에 들어온다고 말한다. 그는 수많은 장서를 바라볼 때마다 자신의 무지함을 깨닫는다. ‘내가 몰랐던 책들이 엄청 많구나. 이 책들 다 읽을 수 있으려나?’ 선생이 좋아하는 도서관은 그곳에 책을 보러 온 독자들을 불편하게 만든다. 편안하지 않은 도서관은 사람들의 무지함을 넌지시 알려 준다. ‘넌 모르는 게 아주 많아.’ 도서관의 따끔한 목소리가 귀에 꽂힌 사람은 각성해서 진정한 독자가 된다. 무지한 독자는 알고 싶은 새로운 정보를 머릿속에 채우기 위해 책을 읽는다. 죽을 때까지 도서관에 있는 모든 책을 전부 다 읽을 수 없다. 그렇지만 애서가는 피할 수 없는 삶의 한계를 알면서도 도서관으로 직진한다그곳에서 닥치는 대로 읽는다.


책을 상품으로 여기는 사람들은 도서관에 절대로 들어올 수 없다. 그들은 상품성이 있는 책들, 즉 잘 팔리는 책이나 실생활에 쓸모 있는 책들을 고른다. 도서관에 이런 사람이 너무 많으면 책은 도서관 방문자를 유혹하는 상품으로 전락한다. 내용이 좋은데도 인기 없는 책은 도서관이 자랑하고 싶은 상품이 아니다. 조용한 책은 독자를 만나지 못하고 어느 순간 사라진다좋은 책을 내다 버린 도서관은 나쁘다. 심지어 머리도 나쁘다. 자기가 가지고 있었던 책을 기억 못하다니저기요, 내가 찾으려는 자료가 있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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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4-04-15 12:4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딜레마다. 난 아무리 책 좋아하는 사람도 독서의 한계는 있을테니 손이라도 타 보는 책이 차라리 낫지 않나 싶기도 해. 도서관도 분명 조용하고 한가하면 좋긴한데 그만큼 책을 안 읽는다는 걸 반증하는 것 같아 아주 환영할 일은 못되는 것 같기도하고. 뭐는 반반이 좋지않나 싶기도 하다. ㅋ

cyrus 2024-04-21 11:50   좋아요 2 | URL
저, 이 책을 독서 모임 도서로 선정했는데, 모임에 오는 사람이 한 명뿐이에요. 그 한 분은 다른 독서 모임을 통해 알게 된 분인데, 독서 모임에 새로운 분들이 왔으면 좋겠어요. 이 책의 관점을 다르게 보는 독자가 분명히 있을 거예요. 이런 분들이 독서 모임에 와야 해요. ^^

서랍안에바다 2024-04-22 1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입수되는 책은 늘어나고 서가 공간은 부족하고. 책이라는 매체는 부동산의 규모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어요. 이용률이 낮은 책들은 보존서고에 내리거나 제적하는 수밖에요. 지역 공공도서관은 국립중앙도서관만큼 규모가 크지 않잖아요. 국립중앙도서관이 자료보존 역할을 대표로 하고있고 지역공공도서관은 잘 이용되는 자료를 잘 활용해야해요. 이 책은 폐가제를 주장하는데 애초에 그건 공공도서관이 지향하는 문화민주주의와도 맞지 않아요. 공공도서관은 책바다라는 상호대차서비스가 전국 네트워크로 잘 되어있어요. 그걸 활용하심 되겠네요. 현직 사서로서 지나가다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댓글 남깁니다.
 





두루미(Me)



No. 4








<Thomas Ruff: d.o.pe>

장소: PKM 갤러리

전시 기간: 2024221~ 413

202431일 오후 12시경에 만남









내 마음에 주단을 깔고 그대 길목에 서서

예쁜 촛불로 그대를 맞으리

향그러운 꽃길로 가면 나는 나비가 되어

그대 마음에 날아가 앉으리

 

아 한 마디 말이 노래가 되고 시가 되고

내 마음에 주단을 깔고 그대를 위해 노래를 부르리

 

그대는 아는가 이 마음

주단을 깔아놓은 내 마음

사뿐히 밟으며 와 주오

그대는 아는가 이 마음

 


- 산울림 <내 마음에 주단을 깔고>(1978) 노랫말 1-

 



나는 예술 사진(fine-art photography)을 볼 줄 모른다. 나는 독일의 철학자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이 아주 오래전에 예언했던 미래의 문맹자에 속한다. 미래의 문맹자는 글자를 읽을 줄 모르는 사람이 아니라 사진을 읽지 못하는 사람이다.


















* 발터 벤야민, 최성만 옮김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 / 사진의 작은 역사 외(도서출판 길, 2007)

 

* [절판] 발터 벤야민, 에스터 레슬리 엮음, 김정아 옮김 발터 벤야민, 사진에 대하여(위즈덤하우스, 2018)




사진도 예술작품이 될 수 있는 시대가 왔지만, 나는 여전히 예술 사진이 낯설다. 예술작품을 감상하면 습관처럼 그 작품에 담긴 내용을 찾으려고 한다. 나는 예술작품 앞에서 술래가 된다. 술래는 예술가가 작품을 만든 의도를 찾거나 작품 속에 있는 알레고리(allegory)를 해석하려고 시도한다하지만 요즘은 특별한 내용이 없는 예술작품들이 나오고 있다. 예술 사진도 마찬가지다이런 유형의 예술작품은 아름다움과 거리가 멀다전혀 아름답지 않고,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는 예술작품은 낯설면서도 어렵다


벤야민이 경계하는 상업 사진은 사람들에게 항상 행복하고 아름다운 세상만 반복해서 보여주기만 한다. 예술 사진의 가치를 알아본 벤야민은 사진작가들이 사진만 찍어서는 예술가가 될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는 사진작가들에게 글을 쓰라고 조언한다. 상업 사진에 반기를 든 사진작가는 자신의 예술 사진에 대한 설명글을 쓸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벤야민과 같은 나라에서 태어난 사진작가 토머스 루프(Thomas Ruff)는 사진을 글로 설명하는 행위를 거부한다사진에 붙은 설명글은 감상자가 편안하게 해석할 수 있게 깔아놓은 푹신한 매트리스다. 하지만 루프의 사진 작품에 감상자를 위한 매트리스가 없다루프는 현실을 묘사하는 사진이라는 익숙한 정의에 타협하지 않는 사진작가. ‘현실을 묘사하는 사진은 감상자에게 끊임없이 말을 걸어온다내가 찍은 세상이 어때? 멋지지?” 멋짐이 흘러넘치는 사진은 감상자 앞에 매트리스를 펼친다. 경계심을 누그러뜨린 감상자는 사진을 해석한다


루프의 사진 작품에 감상자가 보고 싶은 어떤 형상이나 내용이 없다. 오로지 이미지만 있을 뿐이다. 지금까지 루프는 컴퓨터로 합성하거나 일부러 형상을 흐리게 한 사진 작품들을 선보였다그는 현실을 찍기보다는 현실을 재조작했다.


서울 삼청동의 PKM 갤러리에 전시된 <d.o.pe> 연작현실을 묘사하는 사진이 아니며, 감상자를 만족시켜 주는 작품도 아니다<d.o.pe> 연작이 만들어지는 과정은 독특하다. 루프는 벽에 거는 대형 카펫을 만드는 회사에 자신이 컴퓨터로 만든 이미지가 들어 있는 카펫을 만들어달라고 주문했다. 완성된 여러 장의 카펫 중에 본인이 마음에 드는 이미지를 골라서 설명글 대신에 ‘d.o.pe’라는 표제를 붙였다.








 

 

 










[절판] 올더스 헉슬리, 권정기 옮김 《지각의 문. 천국과 지옥》 (김영사, 2017)


* 윌리엄 블레이크, 서강목 옮김 《블레이크 시선》 (지만지, 2012)


[절판] 윌리엄 블레이크, 김종철 옮김 《천국과 지옥의 결혼》 (민음사, 1990)





‘d.o.pe’올더스 헉슬리(Aldous Huxley)의 자전적 에세이 지각의 문과 관련이 있다. ‘d.o.pe’지각의 문(The Doors of Perception)의 약자. 작품 제목에 두 개의 점을 빼면 마약을 뜻하는 단어(dope)가 나온헉슬리는 1953년에 메스칼린(Mescaline)이라는 환각제를 복용하기 시작한다. 1963년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는 메스칼린뿐만 아니라 LSD도 복용했다. LSD는 당시 기성세대의 문화를 거부한 히피족들이 즐겨 찾은 환각제였다. 헉슬리는 지각의 문천국과 지옥, 이 두 권의 책에서 환각에 빠진 상태가 되면 현실을 뛰어넘은 다른 세계로 갈 수 있다고 주장한다. 두 권의 책 제목은 영국의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William Blake)의 시에서 따왔다. 블레이크는 어린 시절에 환영(幻影)을 보기 시작한 이후로 자신의 환각 상태를 시와 그림으로 표현했다. 


































발터 벤야민최성만 옮김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 / 폭력 비판을 위하여 / 초현실주의 외》 (도서출판 길, 2008)


* 제임스 글릭, 박래선 옮김, 김상욱 감수 《카오스》 (동아시아, 2013)


* 필립 볼, 조민웅 옮김 《자연의 패턴》 (사이언스북스, 2019)


* [절판] 에드워드 로렌츠, 박배식 옮김 《카오스의 본질》 (파라북스, 2016)




루프의 <d.o.pe>에 나타난 이미지는 우연히 부서진 현실이다. ‘우연히 부서진 현실프랙털(fractal)이다. 프랙털은 우연히 부서지다라는 뜻의 라틴어 ‘fragere’에서 파생된 형용사 ‘fractus’에서 유래된 단어다수학자들은 프랙털을 부분이 전체와 비슷한 형태로 끝없이 되풀이되는 형태로 본다






토마스 루프

d.o.pe 15

2023









루프가 만든 이미지는 프랙털 패턴이다. <d.o.pe>는 초현실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예술 사진을 옹호한 벤야민은 초현실적 사진에 회의적이다. 1929년에 쓴 <초현실주의>라는 글에서 그는 유령을 부르는 모임, 신비주의, 최면술을 선호하는 초현실주의자들을 비판한다. 루프의 초현실적 사진은 벤야민이 비판한 비현실성과 무관하다. 우리는 프랙털을 인식하지 못한 채 살아가지만, 주변을 자세히 보면 프랙털을 발견할 수 있다구불구불한 해안선에서 일부 지역을 확대하면 전체 해안선과 유사한 형태를 확인할 수 있다. 고사리의 커다란 잎은 작은 고사리 잎과 똑같이 생겼다.






토마스 루프

d.o.pe 10

2022




<d.o.pe> 연작은 익숙하면서도 아름다운 현실을 해석하게 만드는 매트리스가 깔려 있지 않은 작품이다. 루프가 갤러리 벽에 깔아놓은 것은 이상한 프랙털 주단이다. 카오스의 저자 제임스 글릭(James Gleick)은 프랙털을 마음속에서 무한을 보는 방법이라고 말했다. 프랙털 주단은 무한한 이미지의 황홀경을 느낄 줄 아는 관람자를 맞이한다. 처음에 관람자는 낯선 이미지를 주시한다. 이미지에 익숙해진 관람자는 말없이 프랙털 주단을 사뿐히 밟는다. 관람자 한 사람의 눈빛에 밟힌 프랙털 주단은 예술 사진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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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은 예민하다. 민감한 식물은 잘 자란다. 도종환 시인은 흔들리며 피는 꽃이라는 시에서 세상 모든 아름다운 꽃은 흔들리면서 핀다고 했다. 햇볕을 쬔 식물 줄기는 흔들면서 햇볕이 있는 쪽으로 자란다. 땅속에 있는 뿌리도 가만히 있지 않는다. 뿌리 역시 흔들면서 자란다. 중력을 느낀 뿌리는 중력이 잡아당기는 아래쪽으로 뻗는다. 식물이 외부 환경으로부터 자극 받으면서 성장하는 현상을 굴성(屈性)’이라 한다.

















* 나탈리 사로트, 이광호 · 최성연 옮김 아무것도 아닌 일로(지만지드라마, 2023)




인간은 예민하다. 주변 상황에 따라 감정이 흔들리며 행동이 달라진다. 우리 삶의 방향은 크고 작은 굴곡들을 지날 때마다 바뀐다. 프랑스 작가 나탈리 사로트(Nathalie Sarraute)는 첫 소설을 쓰는 데만 7년이나 걸렸다. 1932년부터 쓰기 시작해서 1939년에 발표한다. 소설 제목은 <트로피즘>(tropismes)이다. 제목의 뜻은 굴성이다사로트는 식물학 용어인 굴성을 자신의 문학 세계를 정의하는 용어로 사용했다. 사로트가 묘사한 작중 인물들은 외부 상황에 흔들리면서 살아가는 예민한 존재. 사로트는 인간이 예측 불가능한 외부 환경을 마주할 때 감정과 행동이 어떻게 달라는지 주목한다.


사로트가 쓴 마지막 희곡 아무것도 아닌 일로는 트로피즘 드라마(tropism drama)’다. 희곡에 나오는 인물은 두 명의 남자. 두 남자는 이름이 없다. 희곡은 오직 두 남자의 대화로만 채워져 있다. 사실 대화라기보다는 말다툼에 가깝다. 두 남자는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계속 말다툼한다.



남자 1: , 그래 알겠어, 그래도 얘기해 봐.

 

남자 2: 그러니까그건 그냥 말에 관한 건데

 

남자 1: ? 우리가 했던 말? 설마 우리가 무슨 말다툼이라도 했는 거야그럴 리는 없어. 그랬다면 내가 기억을 했겠지.

 

남자 2: 아니, 그런 말다툼이 아니고다른 말했던 말 때문이라기보다는사실 하지 않은 말 때문이지너 같은 사람들은 몰라. 그게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남자 1: 무슨 말인데? 어떤 말이었는데? 진짜 미치겠다. 사람을 왜 이렇게 괴롭혀?

 

남자 2: 너 괴롭히려는 거 아냐. 하지만 내가 만일 너한테 얘기하면

 

남자 1: 얘기하면 뭐? 무슨 일이 일어나는데? 아무것도 아니라며?

 

남자 2: 그래, 맞아. 아무것도 아니야. 아무것도 아닌 일 때문에 이렇게 된 거지.



(10~12)

 


말다툼하는 두 남자는 정말 아무것도 아닌 말 한마디에 예민하게 반응한다. 두 남자는 발화자인 동시에 발화자가 한 말을 듣는 자다. 하지만 듣는 자는 발화자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 말을 처음 꺼낸 발화자는 듣는 자가 알아듣기 쉽게 설명하지 못한다두 남자는 정말 대화를 못 하는 바보인가 아니면 일부러 서로 괴롭히려고 대화를 계속 비비 꼬는 것인가?

















* [개정판] 롤랑 바르트, 김희영 옮김 《텍스트의 즐거움》 (동문선, 2022)




텍스트는 예민하다. 우리는 예민해진 텍스트를 즐겨야 한다텍스트가 예민해지려면 독자는 저자가 텍스트에 담은 본래 의미에서 완전히 벗어나야 한다독자의 관점에 따라 텍스트가 다르게 읽힐 수 있고, 텍스트 속 의미도 달라진다. 괜찮아, 틀리면 어때.’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텍스트의 즐거움에서 저자의 권위에 눌리지 말고 적극적으로 텍스트를 읽으라면서 독자를 독려한다. 텍스트에 독자의 관점이 뚫고 지나가면 저자는 죽지만, 오히려 텍스트가 살아난다.





















* 존 그리빈, 김상훈 옮김 《시간의 물리학: SF가 상상하고 과학이 증명한 시간여행의 모든 것》 (휴머니스트, 2024)


콜린 스튜어트김노경 옮김지웅배 감수 시간여행을 위한 최소한의 물리학세계적인 과학 커뮤니케이터가 알려주는 시간에 대한 10가지 이야기》 (미래의창, 2023)


* 스티븐 베리, 신석민 옮김 《열역학: 열과 일, 에너지와 엔트로피의 과학》 (김영사, 2021)





과학이 뚫고 지나간 아무것도 아닌 일로를 읽는다면, 낯선 관점을 만나서 예민해진 이 작품은 엔트로피 드라마(entropy drama)’가 된다엔트로피는 모든 물질과 환경의 무질서 정도를 나타내는 용어다. 모든 것은 질서가 있는 안정적 상태다. 그러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해체되고, 산산이 흩어진다. 질서가 사라지면 무질서가 나타난다. 이 상태를 엔트로피가 증가한다(높아진다)’라고 표현한다. 항상 엔트로피는 증가한다. 모든 것이 변하는 이유도 엔트로피가 증가하기 때문이다.


희곡에 묘사된 두 남자의 끝없는 말다툼은 불안정하다. 그들의 혼란스러운 대화 분위기와 감정 상태는 계속 상승하는 엔트로피다엔트로피가 작으면 모든 것이 질서를 유지하게 되고, 안정적인 상태가 된다. 하지만 높아진 엔트로피는 거꾸로 낮아지지 않는다. 우리가 과거로 되돌아갈 수 없듯이 무질서한 엔트로피를 예전의 질서정연한 상태로 되돌릴 수 없다이를 열역학 제2법칙이라 한다.


















* 강양구, 김상욱, 이권우, 이명현, 이정모 살아 보니, 시간: 바로 지금에 관한 이야기(생각의힘, 2024)

 

* 카를로 로벨리, 이중원 옮김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우리의 직관 너머 물리학의 눈으로 본 우주의 시간(쌤앤파커스, 2019)


 


아무것도 아닌 일로는 두 남자가 말다툼하는 시점이 언제인지, 또 그들이 있는 장소도 알려주지 않는다. 하지만 엔트로피 희곡의 주인공은 시간이다. 희곡 속의 시간은 계속 흐른다. 희곡이 끝나도 시간은 하염없이 흐른다시간은 영원히 흐르고, 엔트로피가 높아지면 살아 있는 모든 존재는 죽는다텍스트에 나온 인물도, 텍스트 밖에 있는 인간 모두 죽는다엔트로피는 멈추지 않는다. 무질서 상태의 우주에 별과 행성은 없다. 완전한 ()’의 세계가 되는데, 이 시점에 도달하려면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린다.


시간은 우리 삶에 아주 가까이 있지만, 여전히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시간이라는 개념 자체를 부정하는 과학자들이 있다. 그들은 과거, 현재, 미래로 이어진 시간 자체가 없다고 주장한다. 김상욱 교수는 시간이 흘러간다고 생각하는 인식 자체가 착각이며, 변하는 건 시간이 아니라 라고 말한다.[주1] 사실 김상욱 교수의 견해는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이 이미 언급했다. 그는 동료 학자의 죽음을 언급한 편지에서 물리학을 믿는 사람들은 과거와 현재, 미래의 구분이 집요하게 계속되는 착시일 뿐이라는 사실을 안다[주2]라고 썼다. ‘시간 없는 우주를 지지하는 이탈리아의 이론물리학자 카를로 로벨리(Carlo Rovelli)는 과거, 현재, 미래를 구분하는 인식을 일시적인 시간 구조로 본다시간 개념을 허상이라고 생각하는 독자라면 아무것도 아닌 일로의 주인공은 시간이 아니라고 주장할 수 있다


영화 <돌이킬 수 없는>에 나온 문구 시간은 모든 것을 파괴한다(Le Temps Détruit Tout)는 새로 써야 한다속절없이 흐르기만 하는 시간 위에 모든 것을 서서히 파괴하는 엔트로피가 있다. 무작정 흘러가는 시간을 애써 무시할 수 있어이 세상이 계속 변한다는 사실은 그대로다



 


[1] 살아 보니, 시간, 39쪽.


[주2]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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