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집안일을 하는 딸, 집안일을 시키는 부모

 

KBS 2TV ‘대국민 토크쇼-안녕하세요’에 온 집의 집안일을 도맡아하는 딸의 사연이 공개됐다. 사연의 주인공인 딸은 중학교 2학년생인데 온 집안의 집안일을 도맡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아픈 날도 전혀 예외 없이 엄마의 심부름에 숨 쉴 틈 없이 일을 해야 한다고 털어놨다. 여섯시에 일어나 씻고 밥하고 동생 깨우고 엄마 식사를 준비한다. 학교 끝나면 집에 와서 저녁하고 청소하고 숙제한다. 주말에 부모님이 쉴 때도 끊임없이 혼자서 심부름과 집안일을 맡을 정도다.

 

딸의 부모님은 딸의 고민에 대해 반박했다. "우리는 자식을 상전처럼 모시지 않는다가 교육관이다. 가족이기 때문에 가족의 의무는 다 나눠서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라고 남다른(?) 교육관을 밝히기도 했다. 그런데 문제는 아버지였다. 어머니가 할 수 있는 집안일을 딸이 거의 맡다시피 하게 되고, 그 일을 어머니가 딸에게 시키는 횟수가 잦아지자 자신 또한 습관적으로 딸에게 집안일을 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딸의 고민에 대해 정찬우는 집안일을 시키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 일을 칭찬해 주지 않는 태도의 부모님이 문제라고 정확히 진단했다.

 

그의 말에 동의한다. 딸이 고민이라는 이름으로 방송에 직접 나와 집안일을 도맡아 하고 있는 본인의 일상에 대해 불만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딸은 가족을 생각하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집안일에 임했다. 자신이 청소를 안 하면 집은 돼지우리처럼 지저분하게 되고, 밥을 안 하면 동생이 밥을 안 먹는다고 한단다. 가족을 항상 먼저 생각하는 어머니의 마음을 중학교 2학년생은 집안일을 하면서 이미 터득하고 있었다. 또래 아이들보다 마음이 성숙하고 기특했지만, 부모는 딸의 진심어린 마음을 이해하지 못한 채 집안일을 시켰던 것이다.

 

 

 

 ♣ 칭찬 능력이 부족한 우리나라 부모

 

식물도 자살을 한다. 일명 ‘스트레스 생리’라고 부른다. 식물도 크고 작은 환경적인 요소로 스트레스를 받으면서 생장한다. 데어 죽을 수도 있고, 동사, 건조사 등과 같은 현상이 나타난다. 이런 경우는 환경이 회복되더라도 식물은 원래대로 돌아가지 못하고 죽게 마련이다. 요즘 사람도 스트레스로 인한 우울증이 늘어나 자살하는 사람들이 급증하고 있다.

 

만약에 집안일을 하는 딸이 자신의 불만과 고민을 털어내지 못한 채 살았더라면 사춘기 특유의 우울증에 의한 스트레스가 더 심각했을 수도 있었다. 식물이 햇빛을 받고 자란다면, 사람, 특히 아이들은 칭찬을 먹고 성장한다. 그러니 칭찬을 아끼지 말아야 행복해진다. 특히 가족과 동료들에게 하는 칭찬은 어떤 형태로든 되돌아온다. ‘칭찬의 보약’은 누구나 먹고 싶어한다. 만약 사람이 칭찬과 격려를 받지 못한다면, 사람들의 감성은 위축되고 시들어 버릴 것이다.

 

학생들은 왜 열심히 공부할까? 한창 또래 친구들과 어울려야 하는 중학교 2학년 여학생이 왜 집안일을 열중하는 걸까? 학교에서나 가정에서 칭찬과 인정을 받고 싶어서다. 다른 사람이 자신의 장점을 발견해서 인정해 줄 때 엔도르핀이 솟게 마련이다. 그리고 자신의 존재 가치를 확인할 때 삶의 의욕이 충만해진다. 그래서 칭찬은 가장 빠르게 자신감을 회복하는 것은 물론 행복감을 갖게 하고 자석처럼 서로 끌어 당겨 하나가 되는 마력이 있다.

 

 

 

 

 

 

 

 

 

 

 

 

 

“우리는 자녀가 학교에서 좋은 성적을 받아 왔을 때 칭찬을 게을리 하며, 아이가 과자를 굽거나 처음으로 새 집을 만드는데 성공했을 때도 격려해 주기에 인색하다. 아이들이 부모의 관심이나 칭찬보다 더 기쁜 것은 없는데도 말이다” (데일 카네기)

 

우리나라는 다른 나라보다 교육열이 강하다. 그래서 아이들이 국내외 일류대학에 들어가기를 갈망하고, 학원 수강이나 과외공부를 파김치가 되도록 시키는 부모들도 많다. 하지만 아이들의 능력이나 적성을 감안하지 않고 시키기 때문에 탈선하는 아이들도 가끔씩 발생한다. 무조건 시키는 것은 무관심만큼이나 문제가 된다.

 

가장 안 좋은 것은 열심히 아이가 공부를 했는데도 성적이 나쁘면 “누구는 잘 하는데 너는 무엇을 했느냐?” 하면서 비교를 담은 충고를 하고 화를 내는 것이다. 이런 충고를 귀가 아프도록 자주 들은 아이는 어떻게 될까? 아이는 자신에 대해 ‘나는 할 수 없어!’라는 부정적 이미지나 열등의식을 갖게 되어 소심한 아이가 되는 등 무서운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집안일을 열심히 하는데 조그만 실수했다고 부모가 딸에게 핀잔을 준다면 딸 입장에서는 얼마나 섭섭할까? 딸은 당연히 옳은 일(집안일)을 하고 있었고, 간혹 실수 한 두 번쯤은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모가 칭찬보다는 무관심으로 일관한다거나 꾸중만 한다면, 딸은 가사 일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가질 수 있다. 칭찬을 하는 경우에도 과정은 생각하지 않고 결과만 가지고 하는 경우가 많다. 사고능력이 성인보다 미숙한 아이들에게 격려나 칭찬을 할 때는 보다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다.

 

 

 

 ♣ 켄 블랜차드의 ‘칭찬 10계명’

 

 

 

 

 

 

 

 

사람은 장점과 단점으로 이루어져 있다. 어느 누구도 온전히 장점만, 혹은 단점만 가진 사람은 없다. 단점이 그 사람에게 없어져야 할 불순물이라면 이것을 걸러내기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칭찬이라는 약이다.

 

 

그렇다면, 칭찬은 어떻게 하면 좋은가? ‘칭찬 10계명’이 있다. 켄 블랜차드의 『칭찬은 고래도 춤을 추게 한다』는 책에서 추린 내용이다.

 

첫째, 소유가 아닌 재능을 칭찬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능력이다. 능력을 인정받는 순간 둔재(鈍才)도 천재가 되는 것이다.

 

둘째, 결과 보다는 과정을 칭찬한다. 올라온 높이보다 헤쳐 나온 깊이를 바라보고 그 가치를 높여주는 것이다.

 

셋째, 타고난 재능보다는 의지를 칭찬하는 것이다. “머리 하나는 타고 태어났네요”보다 “그 성실성을 누가 따라가겠어요”가 훨씬 낫다. 원석도 다듬어야 보석이 된다. 영혼을 자극하는 것이다.

 

넷째, 나중보다는 즉시 칭찬하는 것이다. 100번 하기보다 오늘 칭찬 한번이 더 낫다. 머리를 붙잡지 꼬리를 붙잡아선 안 된다. 칭찬도 늦으면 철 지난 옷처럼 어색할 뿐이다.

 

다섯째, 큰 것보다 작은 것을 칭찬하면 좋다. 별 거 아닌 일에도 ‘음’, ‘와우’가 훨씬 위력을 발휘한다.

 

여섯째, 애매모호한 것보다 구체적으로 칭찬해야 한다.

 

일곱째, 사적으로보다 공개적으로 칭찬하는 게 낫다. 혼자보다는 적어도 셋 이상의 자리에서 칭찬하는 것이 낫다. 칭찬의 옥탄가를 높이는 것이다. 특히 장본인이 없을 때 남긴 칭찬은 그 효용가치가 배가된다.

 

여덟째, 말로만 그치지 말고 보상으로 칭찬하는 것이다. “한 턱 내세요”보다 “내가 쏠게요”가 훨씬 낫다. 때로는 선물도 필요하다. 언어적 수사에만 머물지 않고 물질적 보상이 따르는 순간 명품칭찬이 되는 것이다.

 

아홉째, 객관적인 것보다 주관적으로 칭찬하는 게 낫다. “참 좋으시겠어요”보다 “제가 다 신바람이 나더라니까요”가 낫다. 관계의 끈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열째, 남을 칭찬하기보다는 스스로 자신을 칭찬하는 것이다. “훌륭했어! 정말 멋졌어! 난 네가 자랑스럽다”는 말을 내 자신에게 자주해주는 것이다. 자신을 칭찬할 수 있는 사람만이 남을 칭찬할 수 있기 때문이다.

 

 

 

 ♣ 가족에게도 칭찬이 필요하다

 

대부분의 부모들은 자녀가 순종하지 않을 경우 먼저 아이들을 협박하거나 소리를 지른다. 이는 어린아이나 성장한 아이들 모두 불쾌감을 느끼게 한다. 일반적으로 부모는 아이들의 실수에 대해 비판하고 잘못된 행동을 고쳐주는 것이 아이들을 위한 자신의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옳은 일에 대해서는 칭찬과 격려의 말이 무색하다.

 

가족에게서 받은 무관심과 마음의 상처는 골이 깊고 오래간다. 사회적인 관계와는 기본적인 출발부터 다르기 때문이다. 아무리 가족이라고 하더라도 상대방의 마음을 배려하지 않고 서로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면 서로 타협하고 이해할 수 없다.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분위기가 조성되지 않기 때문이다.

 

칭찬의 기술을 타고 태어난 사람은 없다. 안하던 칭찬할 때 쑥스럽기도 하다. 그러나 내 아내, 내 남편, 내 자식을 칭찬하는 것이 창피할 일은 아니다. 자녀는 부모가 모범을 보인 데로 성장한다. 부모가 먼저 칭찬하고, 감사하고, 사랑할 때 가정에 행복이 가장 먼저 찾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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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부터 '올재 클래식스' 8번째 시리즈가 출간된다. 올재 클래식스는 비영리 사단법인 올재가 2011년 설립 이후 '지혜 나눔'을 표방하며 부담 없는 가격에 펴내는 인문 고전 시리즈로 유명하다. 한 권당 2900원을 구입할 수 있고 한정 판매다. 내일 오전 11시부터 인터넷 교보문고에서 온라인 주문할 수 있으며, 한글날인 수요일에는 전국 교보문고 매장에 구매할 수 있다.

 

올해 한글날은 23년 만에 공휴일이 되었다.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반포한 지 567돌이 되는 날이기도 하다. 이에 맞춰 이번에 나오는 올재 클래식스 시리즈 중 한 권은 한글과 관련된 아주 뜻 깊은 책이다.

 

국어학자 방종현(1905~1952) 선생이 쓴 『훈민정음통사』(1948년 작)다. 이 책은 훈민정음 창제 이전부터 20세기 초기에 이르기까지, 국어사와 국어학사를 집대성했다.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훈민정음』원문과 해석 또한 포함되어 있다. 일제 강점기를 이제 막 벗어난 광복 시절까지만 해도 국어학에 대한 연구가 아직 체계화되지 않았기에 방종현 선생의 책은 『훈민정음』을 본격적으로 연구하고 분석한 기념비적 연구서인 것이다. 그리고 훈민정음의 기원설을 다양하게 소개하고 있다는 점에서 상당히 독창적이다.

 

최근 한글날을 맞아 한글과 훈민정음의 우수성을 재조명하는 도서가 출간되고 있다. 567돌 한글날의 긴 역사를 생각한다면 너무 늦은 감은 있으나, 지식의 상아탑에 벗어나 우리말의 참된 의미를 대중에게 소개하려는 이번 출판을 긍정적으로 생각한다. 그런데 올재 클래식스도 한글날에 맞춰 정말 의미 있는, 그것도 오랜 변고의 세월 속에서 묻힐 수 있는 귀중한 문헌 한 권을 출간하는데, 이를 비중 있게 다루는 기사가 단 한 건도 없다. 달랑 ‘올재 클래식스 8번째 시리즈 출간을 알리는 짤막한 기사 하나만 있을 뿐이다. 역사적 가치가 높은 문헌의 출간 소식이 외면받는 점이 무척 아쉽기만 하다.

 

 

P.S) 『훈민정음통사』와 함께 올재 클래식스 8번째 시리즈로 출간되는 나머지 도서는 다음과 같다.

 

장 자크 루소의 『에밀』/ 앙드레 지드의 『땅의 양식』(‘지상의 양식’이라는 이름으로 민음사에서 세계문학전집 시리즈로 출간된 적이 있다) / 이이의 『격몽요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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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예술의 정의

 

 

 

 

 

 

 

 

 

 

 

 

 

 

 

 

 

국민 공통 기본 교육 과정으로서의 미술 교육은 다양한 미술 활동을 통하여 심미적 태도와 상상력, 창의력, 비판적 사고력을 길러 주고, 미술 문화를 이해하며 계승, 발전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전인적 인간을 육성하는 데 목적이 있다.

 

대입 논술 시험에 종종 예술, 특히 미술과 관련된 문제들이 출제된다. 그러나 대부분의 학생들은 예·체능 과목이 수능 필수 과목이 아니기 때문에, 실기평가나 수행평가 점수에만 신경 쓸 뿐, 미술 이론에 관심도 없고, 접할 기회도 거의 없다. 게다가 최근에는 미술, 음악, 체육 등의 과목을 내신 성적에서 제외하자는 의견도 제기되고 있다. 학생들의 부담을 줄이자는 취지라고 한다. 서열을 위한 점수 매기기가 아닌 서술형 평가를 도입하겠다는 시도는 일견 바람직하다고 볼 수 있겠지만, 우리나라의 교육 현실에 비추어 볼 때, 내신에서 제외되는 과목이 어떤 운명을 맞게 될지는 불 보듯 뻔하다.

 

미술에 대해서 이야기하려면 당연히, 다양한 의미를 담고 있는 ‘예술’이라는 포괄적인 개념을 간단히 정의해 둘 필요가 있다. 이 글에서 예술은 ‘심리적 변화를 일으키는 형식들을 창조하려는 모든 시도들’로 정의된다. 이는 허버트 리드의 예술에 관한 정의를 약간 변형시킨 것이다. 그는 예술을 ‘(마음을) 기쁘게 하는 형식을 창조하려는 어떤 시도’로 정의하였다.

 

그러나 그의 정의에서 ‘기쁘게’라는 부분이 영 탐탁지 않다. 모든 예술이 마음을 기쁘게 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어떤 작품은 우리를 슬프게도 하고, 흥분시키기도 하며, 의도한 바는 아니겠지만 짜증나게도 한다. 예술을 이처럼 포괄적으로 정의하는 것은 예술을 예술가 집단이나 평론가 집단의 전유물로 바라보는 매우 잘못된 관점을 바로 잡기 위해서다. 우리의 정의에 따르면, 학생들이 수업시간에 공책이나 책상 위에 그리는 낙서들도 모두 예술이 될 수 있다. 아니, 미술이다. 그리고 심지어는 일상적으로 흔히 볼 수 있는 사물도 미술이 될 수 있다.

 

 

 

 ♣ 예술은 무엇이든 될 수 있다

 

 

 

 

 

예술이 창조적 활동이라는 사실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텅 비어 있는 하얀 캔버스 위에 물감으로 그림을 그리는 것만이 창조는 아니라는 점에 주의해야 한다. 사물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것도 일종의 창조라고 할 수 있다. 이제는 너무나 유명해진 마르셀 뒤샹의 「샘」이라는 작품을 보라. 「샘」은 비평가들에게 지난 세기 최고의 작품으로 꼽힌다. 그러나 샘은 일반인들에게는 매우 당혹스러운 작품이다. 남자 화장실의 소변기에 불과해 보이기 때문이다.

 

 

 

 

 

 

 

 

 

 

 

 

 

 

1917년 뒤샹은 평범한 가게에서 구입한 소변기에 ‘R. 머트(R. mutt)'라는 이름을 서명해 뉴욕 독립미술가협회 전시회에 출품했다. 공장에서 대량 생산되는 기성품(레디메이드)을 예술작품이라며 전시회에 출품한 것이다. 한국인들에게 가장 잘 알려진 명화로 꼽히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와 비교해보자. 「모나리자」는 작가의 창작물로서 유일하며 깊은 예술적 감동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샘」의 원형인 변기는 유일하지도 않고 작가의 창작물도 아니며 예술적 감성을 발견하기란 더욱 어렵다. 기성품에 변기 제조회사 이름을 대신해 자신의 사인을 넣는다고 해서 그것이 과연 예술품이 될 수 있을까? 동시대 사람들은 비웃었다. 기존 미술의 개념을 완전히 뒤집는, 듣도 보도 못한 예술품이었으니까. 그런데도 오늘날 비평가들에게 「샘」은 20세기 최고의 예술품이다.

 

이렇듯 예술가에게는 ‘역발상’과 ‘생각의 무한성’을 요구한다. 「샘」은 예술품의 의미를 재정의한 작품이다. 「샘」을 계기로 과거에는 예술품이라고 부르기 힘들었던 많은 작품이 예술품으로 불리게 됐다. 결국 뒤샹은 「샘」을 통해 예술의 범위를 광범위하게 확장한 셈이다. 미술사에 이만큼 강력한 영향을 끼친 인물은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다.

 

 

 

 

예술은 무엇이든 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예술'로 아는 경험의 범주는 매체나 생산수단이 아니라, 집단적 감각에 의해 정의된다.

 

 

 

그렇다면 뒤샹에게 예술품이란 무엇일까. 그는 예술품의 구성 요건을 예술품 밖에서 찾았으며 구체적으로 두 가지 요건을 제시했다. 첫째 작가가 예술품으로 선택ㆍ인정한 것으로, 둘째 올바른 장소와 맥락에 놓여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샘」처럼 작가가 예술품으로 제시하고, 미술관 같은 전시 공간에 놓이면 예술품이 될 수 있다는 뜻이었다.

 

뒤샹이 남성용 변기 같은 레디메이드를 통해서 진정 주장하려는 것은 사물의 성격과 내용이 가변적이며 환경과 맥락에 따라 변할 수 있다는 것이다. 흔히 보이며 아무렇게나 다루는 남성용 변기조차도 환경과 맥락에 따라 얼마든지 가치 있는 예술품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뒤샹은 샘을 통해 예술품이든 작가든 모두 가변적이고 불완전한 존재임을 일깨운다. 이 같은 철학을 가진 뒤샹이 스스로 제시한 ‘예술품의 두 가지 요건’을 절대조건이라고 주장하지 않은 것은 당연하다. 뒤샹은 절대조건을 제시하고 싶은 게 아니라 예술품을 둘러싼 관념적인 여러 시각이 의심받지 않고 있는 당시 현실을 문제 삼은 것이다.

 

 

 

 ♣ 창조 그리고 예술에 대한 잘못된 편견

 

만약 우리가, 창조는 좁은 골방에 틀어박힌 초췌한 예술가들이 머리를 쥐어 뜯어야만 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위의 작품들은 작품이라고 불릴 수 없을 것이다. 저런 것쯤은 누구라도 시도해 볼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지금 당장 주변에 있는 아무 물건이나 두 가지를 결합하여, 그럴싸한 이름을 붙여보자. 그 과정에 예술에 대한 우리의 정의가 고스란히 표현되고 있다. 그저 어떤 질료를 선택하여, 나름의 방식대로 배치하였다. 즉, 형식을 만들어 내었다. 그리고 거기에 의미를 부여하여 예전에는 그저 '물건'에 불과했던 대상을 '작품'으로 창조해낸 것이다.

 

우리 주위에 존재하는 평범한 생활용품을 선택하여 전시함으로써 물건의 실용성은 사라지고 그저 ‘사물’로 돌아가는 이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예술가의 선택행위 즉, 아이디어인 것이다. 눈에 보이는 사물이나 풍경을 그림으로 그리는 수공적 기술의 재현행위가 아닌 선택한다는 정신적 행위가 예술가의 본질이라는 그의 이론은 기존미술에 도전하는 개념미술의 기초를 이루었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버려진 폐품, 기계로 대량생산된 물체들을 그대로 작품에 사용하는 현대 개념미술가는 작품을 창조하는 대신 선택하는 사람인 것이다.

 

사람들은 현대미술이 어렵다고 생각하고 전시장의 작품들을 보며 이것도 작품인가 의아해한다. 그러나 우리 주위의 일상용품을 상식의 눈으로 바라보면 그저 의자, 병, 바퀴 등등일 뿐이지만 소변기조차도 일상적 사물로서의 인식을 단절하고 순수한 형태적 의미만으로 바라본다면 대칭적이며, 부드러운 곡선을 가졌고, 우아한 기하학적 오브제로 새로운 모습을 갖게 되는 것. 이것이 뒤샹이 우리에게 보여준 역발상의 미학이다.

 

이렇게 보면, 예술이란 예술가라고 '규정된' 집단의 전유물이 아니다. 우리 모두가 위대한 예술가가 될 수 없을지는 몰라도, 누구나 예술가가 될 수 있다. 예술이 뭔가 대단한 것이라는 믿음이나 예술가는 우리와는 전혀 다른 재능을 타고 난 사람들일 것이라는 믿음은 예술에 대한 편견이 낳은 일종의 신화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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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학 혁명의 구조』 토머스 S. 쿤 / 까치글방  

 

흔히 식자들은 '명저'에 대한 조건을 말할 때 "그 책이 세상에 나오기 이전과 이후를 뚜렷하게 이분해버린 책이 곧 명저"라고 정의한다. `과학혁명의 구조`는 이 조건에 딱 들어맞는 책이다. 1962년 쿤이 『과학혁명의 구조』를 출간하자 과학계는 최악의 서평을 선사한다. 과학사적 변화가 논리적인 논증이 아니라 개종(改宗)과 같은 혁명을 통해 가능하다고 했으니 합리주의로 무장한 과학자들이 기분이 좋았을 리 없다. 격렬한 찬사가 들려온 건 뜻밖에도 비과학 분야에서였다. 책 출간 이후 '패러다임'이라는 말은 철학계를 비롯해 사회, 정치, 역사, 예술 분야에서 유행병처럼 퍼져나갔다. 내가 수학하고 있는 전공인 행정학과에서 '패러다임'이 많이 사용한다.

 

『과학혁명의 구조』출간 50주년을 맞아 과학철학자 이언 해킹이 쓴 서론이 추가되었고 서울대학교 홍성욱 교수가 공동 역자로 참여했다. 구판에는 김명자 전 환경부 장관이 번역했다. 그동안 이 책이 몇 차례 개정을 거듭해서 번역했는데 여전히 읽기가 무척 어렵다는 독자의 지적이 있었다. 나는 두 달 전에 알라딘 중고매장을 통해서 구판을 구입했는데 하필 50주년 기념으로 새롭게 번역한 개정판이 나오고 말았으니 만약 이 책이 선정된다면 비교하면서 독서해볼 수 있겠다.

 

 

 

 

 

 

 

 

 

 

 

 

 

 

 

 

 

 

 *『경제 이론으로 본 민주주의』 앤서니 다운스 / 후마니타스  

 

이 책은 브루킹스 연구소 선임연구원인 다운스가 50여 년 전인 20대 중반에 쓴 박사학위 논문이다. 저자 앤서니 다운스는 ‘합리적 행위자’라는 경제학의 가정을 정치학에 적용해 민주주의에서 정당정치가 어떻게 이뤄지는지, 정당과 유권자의 행위와 그 결과는 무엇인지와 같은 복잡한 문제를 명쾌하게 설명하고 예측한다. 비록 그의 이론은 오늘날에 보면 한계가 있지만 합리성을 전제로 경제학적 관점에서 민주주의를 설명하려고 한 정치학의 고전으로 평가받고 있다.

 

 

 

 

 

 

 

 

 

 

 

 

 

 

 

 

 

 

 * 『시적 정의』 마사 누스바움 / 궁리  

 

미국의 법철학자 마사 누스바움은 시카고대학 로스쿨의 방문교수로 지내면서 법학과 문학의 접목을 시도했다. 그녀의 수업방식은 독특하다. 학생들에게 전문적인 지식이나 합리적 추론의 방법론을 강의하는 대신 학생들과 함께 소포클레스, 플라톤, 세네카, 디킨스를 읽고 토론했다. 법학 강의 시간에 문학 읽기라, 생각만 해도 수강신청하고 싶은 수업이다. 문학이 우리에게 불러일으키는 공감, 상상력, 연민의 감정이 합리적인 공적 판단을 내리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봤다. 궁극적으로는 문학이 더 나은 세상을 위해 기여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대학 내 인문학의 입지가 줄어들고 있는 요즘, 누스바움의 책이 그 해결책의 단서를 찾을 수 있을 거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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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지를 쓰고 싶은 그리운 이름 하나 없을까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바람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매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 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 보리라.

 

 

진실로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내 나의 사랑을 한없이 잇닿은 그 기다림으로 바꾸어 버린 데 있었다.

밤이 들면서 골짜기엔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

내 사랑도 어디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다만 그 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뿐이다.

그 동안에 동안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할 것을 믿는다.

 

(황동규 '즐거운 편지')

 

 

 

가을이 오면 ‘편지를 쓰고 싶은 그리운 이름 하나 없을까’하고 감상적인 행동을 해보고 싶은데 시간을 먹어 갈수록 편지를 쓰고 싶은 간절한 이름 하나 없다는 것이 아쉬울 때가 있다. 주위를 둘러보면 편지를 보낼 수 있는 지인이 몇 명 있음에도 불구하고 손수 쓰지도 않겠지만. 요즘은 스마트폰만 있으면 저 멀리 있는 지인에게 간단한 인사나 안부 정도 할 수 있다. 오히려 손글씨로 정성스럽게 편지를 보낸다면 받는 사람은 어안이 벙벙할 것이다. 스마트폰으로 문자 메시지를 보낸 것처럼 옛날에는 편지를 주고 받는 것 또한 당연한 건데 말이다. 그만큼 삭막해지고 마음의 물기가 말라 있다는 의미이기도 할 것이다. 편지는 또한 공감 할 수 있는 대상이 있어야 가능한 것이다.

 

 

 

 ♣ 누군가에는 정말 간절한 편지

 

 

 

 

 

 

마음과 마음의 소통이 있고 무엇인가 서로가 나눌 수 있는 공통점이나 발전이 있을 때 지속되게 만들 수 있다. 소통할 수 없는 편지는 독백이며 메아리와 같다. 각자 수녀원과 수도원에 들어가 살았던 중세의 연인 아벨라르와 엘로이즈는 편지를 주고받는 것으로써 그리움을 달래며 신앙에 정진했다고 전해진다. 엘로이즈가 처음 아벨라르에게 보낸 편지는 ‘무엇이든 나에게 위로가 될 수 있는 편지를 써 보내 주세요’라고 보낸 편지였다.

 

 

 

 

 

 

 

 

 

 

 

 

 

 

 

 

 

 

 

 

 

 

 

 

 

 

 

시인 김남조는 '편지'라는 시에서 '한 구절을 다시 쓰면, 한 구절을 읽는 당신, 그래서 이 편지는 한 번도 부치지 않는다'라고 쓰고 있다.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쓰게 된 계기는 괴테가 이미 약혼자가 있는 ‘샤를로테 부프’를 사랑하게 되어 고민 하다가 우연히 끔찍한 사건(유부녀를 사랑한 남자가 괴로움을 견디지 못해 권총 자살)의 소식을 들었던 것에서 시작된다.

 

그는 거기서 소설의 실마리를 찾고 영감을 얻어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3개월 만에 썼다. 그 소설을 샤를로테한테 편지와 함께 보낸다. 하지만, 그들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그토록 많은 독자들이 볼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권총 자살 유행까지 만들어낸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서간체 소설이다. 처음, 괴테가 자기가 쓴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과 함께 띄운 편지는 '잘 있어요. 사랑하는 로테, 당신에게 나와 많은 점에서 비슷한 친구 한 사람을 보내 드립니다. 당신이 그를 잘 받아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의 이름은 베르테르라고 합니다'였다.

 

1774년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 출간 되자 유럽은 물론 온 세상 사람들이 열광하며 달려들었다. 어쩌면, 모든 문학 즉, 시, 소설 등은 누군가에게 띄우는 공개된 편지인지도 모른다. 누군가의 간절한 이름 하나에게 닿기를 바라는 연서(戀書)이다.

 

 

 

 ♣ 가을에 도스또예프스끼를 읽어보자

 

소통 부재의 시대를 사는 이들이 그 누군가를 만나 마음과 영혼의 진정한 소통을 할 수 있는 공개된 연서인 것이다. 끊임없이 그 마음의 문을 노크하고 있는 것이다. 완전한 공감, 완전한 소통, 완전한 사랑을 위해 끊임없이 시와 소설이 나오고 있는 것이다. 거대한 도서관의 장서에 들어있는 책들은 아직 도착하지 않은 편지이다. 흐르는 시간 속에 먼지 쌓여 가면서 소통 할 수 있는 그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

 

바야흐로 가을이다. 진정한 소통 부재의 현실 속에서 이 가을에 마음의 문을 조심스레 열며 소통의 통로를 마련해 주는 이에게 편지를 쓰고 싶다. 연서를 띄우고 싶다. 열린 문과 닫힌 문 사이에서 나는 조심스럽게 이 가을에 누군가에게 보낸 연서(책)를 발견하고 가슴 떨리는 감동을 가지고 읽으며, 또 누군가에게 닿을 연서를 띄운다. 글을 쓴다. 책 즉, 연서는 고독한 영혼이 고독한 영혼을 향한 선물이며, 문을 두드림이며 진정한 소통에의 갈망이다.

 

이 가을에 기억의 창고에 아직도 남아 있는 그리운 이름 하나에게 편지를 띄워보자. 오래된 수첩 속에 빼곡하게 적힌 이름들 중에 소통의 이름 하나 찾아보자. 그리고 누군가에게 띄웠을, 혹시 당신에게 띄웠을지도 모르는 책 한권을 읽어보자.

 

혹시 나처럼 ‘편지를 쓰고 싶은 그리운 사람’ 하나 없다면 책을 읽음으로써 감성으로 마음을 살찌워보는 것도 좋다. 과학저널 ‘사이언스’ 최신호에는 ‘어떤 글’을 읽는 것이 지적 능력과 감성 능력, 주변 사람들과의 사회적 관계 등을 발달시키는데 좋은지에 대한 흥미로운 연구 결과가 실렸다. 여기서 말하는 ‘그 어떤 글’이 뭔지 아시는가. 그것은 바로 러시아 출신 소설가 표도르 도스또예프스끼와 극작가 안톤 체호프다.

 

 

 

 

 

 

 

 

 

 

 

 

 

 

 

 

심리학자들은 이번 연구를 위해 독자들을 두 그룹으로 나눠 다른 글을 읽게 했다. 한쪽에는 체호프, 도스또예프스끼 등 유명작가의 작품을 읽게 했고, 다른 쪽은 최신 베스트셀러 등을 읽도록 했다. 이후 두 그룹은 얼굴 표정 사진을 보고 이 사람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어떤 행동을 할지를 예측하는 등의 테스트를 거쳤다. 지능·감성·사회관계 정도를 측정하기 위해서다. 그랬더니 유명 문학작품을 읽은 그룹의 점수가 압도적으로 높았다. 서로 읽은 작품의 특성이 완전히 달랐기 때문이다. 신작 베스트셀러는 대부분 작가가 흥미를 더하기 위해 작품 내용을 특정방향으로 통제해 독자의 상상력이 개입할 여지가 적다는 특성이 있다. 반면에 유명 문학작품은 등장인물 고유의 특성에 따라 작품이 전개되는 다양성을 띠고 있어 실생활과 유사하다는 특징이 있다. 따라서 유명 문학작품을 읽은 독자는 자신의 상상력을 통해 작품에 몰입하게 돼 감성, 지성, 사회관계의 정도가 발달된다는 것이다.

 

연구 결과만 따져놓고 본다면 모든 ‘신작 베스트셀러’가 우리의 감성 범위를 제한시키는 건 아니다. 어차피 ‘베스트셀러’에도 도스또예프스끼에 꿀리지 않은 좋은 작품이 있으니까. 그러니까 먼지 앉은 채 당신의 손길이 닿기를 기다릴 지도 모르는 책을 찾아보자. 이 가을날에. 잠시 잊고 있었던 도스또예프스끼 전작 독서를 시작해볼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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