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은 부산물이다 - 문명의 시원을 둘러싼 해묵은 관점을 변화시킬 경이로운 발상
정예푸 지음, 오한나 옮김 / 378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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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의 발전은 우연인가, 필연인가? 영국의 역사가 에드워드 H. 카(Edward H. Carr)‘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는 정의를 내리면서 ‘과거를 해석하면 미래를 통찰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과거란 현재의 시점에서 보면 이미 지나간 시간, 즉 다시 되돌릴 수 없는 순간이다. 이러한 과거에 인간이 한 일과 생각을 밝히는 것이 역사다. 역사는 인과관계라는 시간의 실타래로 엉켜 있다. 역사를 연구하는 일은 ‘원인’을 알아내는 일이다. 그러나 역사적 사건이 단일한 원인만을 갖는 것은 아니며, 여럿인 경우가 많다. 역사가는 이것들을 파악해 내고, 단순하게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정리한 후 역사적 사건 속의 상호관계를 파악한다. 이것이 역사가의 해석이다. ‘원인(들)’을 탐구하면서 역사적 사건들을 인과의 계열 속에 배열하는 것이 역사가 고유의 기능이다.

 

오랫동안 사람들은 인류 문명의 발달을 인간을 중심으로 생각하는 데 익숙했다. 그들은 문명화되는 과정이 역사의 필연성에서 비롯된 것으로 생각했고, 문명이 번영으로 가는 길을 상승하는 계단처럼 매끄럽게 이어지는 단일한 경로로 간주하곤 했다. 이러한 필연성의 근저에는 모든 역사적 사건에는 원인이 있으며 같은 원인은 같은 결과를 이끈다는 믿음이 가정되어 있다. 80년대 대학가에서 카의 명저 《역사란 무엇인가》(까치, 2015)만큼 가장 많이 읽힌 역사책도 찾기 어렵다. 카가 이 책에서 보여준 역사적 필연성, 진보에 대한 확신, 그리고 역사를 주도해 나가는 인간의 주체성은 민주화를 열망하는 대학생들의 세계관에 부합되는 내용들이었다.

 

그러나 역사 속에서 원인과 결과 사이의 필연성을 찾는 일은 무의미하다. 90년대 들어 소련의 공산주의 체제가 무너지면서 역사에 단일한 지향점과 목적이 있고, 역사적 진보를 논증할 수 있다는 믿음이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문명의 발전이 지극히 우연일 수 있다는 생각이 받아들여지기 시작한 것은 극히 최근의 일이다. 중국의 사회학자 정예푸(鄭也夫)는 필연성을 찾으려는 문명사 연구에 비판적이다. 그가 쓴 《문명은 부산물이다》(37∞, 2018)는 문명사를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 책이다. 이 책의 결론부터 말하자면, 문명은 우연히 만들어진 것이다.

 

정예푸는 문명 발전에 기여한 여섯 가지 핵심 요인족외혼, 농업, 문자, 종이, 조판인쇄, 활자 인쇄 등이 역사의 필연인지, 우연인지를 분석한다. 이러한 여섯 가지 요인들은 인류가 필요해서 만들어진 산물인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그것은 작은 우연들이 겹쳐져서 생긴 산물이다.

 

원시 인류 사회까지만 해도 같은 부족 안의 근친상간이 대부분이었다. 부부의 개념도 없었다. 이후 부족들 간의 접촉이 활발해지면서 족내혼이 일반화됐다. 인류학자들은 부족사회 안에서 근친상간 금기가 형성되어 족외혼으로 발전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정예푸는 족외혼이 종족 퇴화를 막기 위한 목적에 의해서 생긴 것이 아니라고 반박한다. 그는 영국의 인류학자 웨스터마크(Westermarck)의 가설을 지지하면서 족외혼을 ‘외부에 대한 성적 취향’의 산물로 봤다. 웨스터마크는 같이 생활한 성장한 이성, 즉 가족 구성원에게 성적 매력을 느끼지 않기 때문에 족외혼이 보편화하였다고 주장했다.

 

수렵 및 채집 생활을 하고 있었던 인류는 야생 벼를 우연히 발견하여 그것을 땅에 심었다. 그들은 야생 벼를 수확하는 법을 습득했다. 그러나 식량이 부족해지는 비수확기는 이제 막 농업을 하기 시작한 인류가 겪는 시련이었다. 그것은 ‘농경사회’를 이룩하게 될 인류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하지만 인류는 한 곳에 정착하기 시작했고, 인구가 점점 늘어나고 있던 터라 변화에 적응하기 위해 농업을 선택했다.

 

문자의 발명과 종이의 탄생은 학문 발전과 지식 전달 수단으로, 인류의 문화 발달과 문화 형성에 아주 큰 공헌을 했다. 정예푸는 종이가 발명되기 이전의 시대에 주목하여 조판인쇄가 발달한 과정을 추적한다. 종이가 나오기 전에는 점토판에 도장을 찍는 관습이 있었다. 종이가 등장하면서 인류는 종이에도 도장을 찍었다. 종이에 도장을 찍는 행위는 조판인쇄의 기원인 셈이다.

 

《문명은 부산물이다》는 정독하기가 쉽지 않은 책이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필자는 이 책의 3장(문자), 4장(제지), 5장(조판인쇄), 6장(활자 인쇄)을 훑어봤다. 왜냐하면, 저자가 인용하면서 설명하는 한자의 구조, 중국의 종이문화 및 각종 용어가 생소했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으면 중국 문헌뿐만 아니라 서양 문헌들까지 참고하는 저자의 폭넓은 지식 편력에 깜짝 놀랄 것이다. 친절하게도 이 책의 역자는 독자들이 저자가 참고한 책들을 확인할 수 있도록 국역본 제목까지 알려줬다. 1장, 2장, 그리고 이 책의 결론에 해당하는 7장만 봐도 이 책에서 저자가 강조하려는 핵심 내용이 무엇인지 파악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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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2-13 16: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8-02-13 17:39   좋아요 1 | URL
인간이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것을 보면 인간은 ‘역사’ 속에 영원히 갇힌 존재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

페크pek0501 2018-02-14 10: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역사란 무엇인가》를 읽고 감탄하던 때가 떠오릅니다.
역사뿐만 아니라 모든 건 해석의 문제인 것 같아요.
˝사실은 없다. 해석만이 있을 뿐이다.˝(니체)라는 문장을 새삼 생각해 봅니다.

cyrus 2018-02-14 15:22   좋아요 0 | URL
역사를 바라볼 때 균형 잡힌 시각을 가지고 해석하면 좋은데, 이게 쉽지 않아요. ^^;;
 

 

 

 

 

 

 

 

 

 

 

 

 

 

 

 

 

 

 

 

 

오늘은 레드스타킹 독서 모임이 있는 날입니다. 선정 도서는 케이트 본스타인(Kate Bornstein)젠더 무법자(바다출판사, 2015)입니다. 케이트 본스타인은 미국의 트랜스페미니즘(Transfeminism) 운동가입니다. 그녀는 mtf(male to female) 트랜스젠더입니다. 태어날 때 의사가 지정한 성별은 남성이었지만 성전환 수술로 여성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녀는 또 레즈비언입니다. 그래서 LGBT(레즈비언, 게이, 양성애자, 트랜스젠더의 약자) 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습니다.

 

오늘 모임은 젠더 무법자를 같이 읽어보는 첫 번째 모임입니다. 모임 전에 3장까지 읽었습니다. 1(‘우선 말해 둘 것’)은 저자가 트랜스젠더 스타일, 즉 본인의 글쓰기 방식을 독자에게 전달하는 장입니다. ‘서론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저자는 자신의 정체성을 표현하는 것을 패션과 같다고 정의합니다. 그녀는 유동하는 정체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생물학적 성별인 남성여성이라는 이분법적 성적 규범에 억지로 들어가려고 하지 않기 위해 그녀는 콜라주(collage) 형식의 글을 선보입니다.

 

 

나는 패션을 선언이나 성명(聲明)으로 여긴다. 그러니까 정체성이 중요한 문제인 한 패션도 계속 중요할 거다. 내 정체성과 패션은 콜라주로 설명될 수도 있다. 그 왜, 여기서 조금 저기서 또 조금 가져다 합치는 것? 일종의 잘라다 붙이기다. (119, 20)

 

 

다양성을 표현할 수 있는 유동성을 반영한 표현 방식이 콜라주입니다. 그래서 그녀는 젠더와 여성 운동에 대한 자신의 솔직한 생각, 트랜스젠더인 자신을 바라보는 타인의 시선 등을 이것저것 가져다 글을 씁니다.

 

2(‘씨앗 추려내기’)태어나자마자 아기에게 성별을 지정하는 문화를 날카롭게 비판한 장입니다. 저자는 너는 '남자/여자'야라고 지정하고 강요하는 것에 대해 의문을 제기합니다.

 

 

문화가 너는 이러이러한 존재다.”고 말할 때 젠더가 지정된다. 거의 대부분 문화에서 우리는 출생 시에 성별을 지정받는다. 한 번 젠더를 지정받으면 당신은 바로 그 젠더다. 젠더를 지정해 주는 것은 대부분의 경우 의사이며, 이 사실은 젠더가 얼마나 철저하게 의료화되었는지를 보여 준다. (248)

 

 

젠더를 지정하게 만드는 요인은 무척 많습니다. 특히 생물학적 성별을 받아들이기 힘든 어린아이들은 또래 집단의 압박을 받으면 자신의 젠더 정체성에 혼란을 느낍니다. 학교는 젠더라는 규칙이 지배하는 사회화 기관입니다.

 

인형남(가명)은 인형을 가지고 노는 것을 좋아하는 남자아이입니다. 형남이는 인형은 여자아이의 전유물이라는 인식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학교에 다니는 남자아이들은 인형보다는 장난감 로봇을 더 선호합니다. 형남이는 인형도 장난감 로봇 못지않게 재미있는 장난감이라고 또래 남자아이들에게 친절하게 설명합니다. 하지만 남자아이들은 인형을 가지고 노는 형남이를 놀립니다. “남자가 인형을 가지고 놀다니. 너 여자구나.” 남자아이들은 인형을 가지고 노는 형남이의 모습이 생소해서 그와 친하게 지내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와 어울리면 자신도 여자처럼 행동하게 될까 봐 두려웠던 거죠.

 

형남이는 남자라는 성별이 지정된 또래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했습니다. 느는 남자아이들이 자신을 놀렸을 때 했던 말을 잊지 못했습니다. 너는 여자야.” 그 말이 자꾸만 걸렸던 형남이는 자신의 젠더 정체성을 의심합니다. 자신을 남자아이 모습을 한 여자라는 생각을 하기 시작합니다. 외로운 형남이는 인형 놀이를 좋아하는 여자아이들에게 다가가기로 결심합니다. 그러나 여자아이들의 반응도 차가웠습니다. 여자아이들은 인형을 좋아하는 남자아이를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거죠. 형남이는 매일 학교 가기가 두려웠습니다. 학교 친구들은 형남이를 남자도 아닌 여자도 아닌 성별이 없는 아이로 대했기 때문입니다.

 

본스타인은 3(‘힘 되찾기’)에서 성별 없이 존재하는 것의 두려움을 느껴봤다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어린 시절의 공포를 추적하여 자신(트랜스젠더)을 두렵게 만든 젠더 규칙의 영향력을 분석합니다. 비트렌스섹슈얼은 한 번 정해진 젠더는 바꿀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자신이 부여받은 젠더에 맞는 규칙들을 따릅니다. 그리하여 비트랜스섹슈얼은 남자라면 남자답게”, “여자라면 여자답게 행동하는 것이죠. 하지만 트랜스젠더는 이 젠더 규칙에 순응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젠더 규칙을 거부합니다. 본스타인은 트랜스젠더를 젠더 무법자라고 부릅니다.

 

2장에는 트랜스섹슈얼에 반대하는 문화주의 페미니즘(Cultural Feminism)에 대한 내용이 나옵니다.

 

 

2물결 페미니즘(1960년대 말에서 1980년대 초까지 융성)의 한 갈래로, 급진 페미니즘의 영향을 받았다. 여성의 본질(nature) 혹은 정수(essence)를 재평가하고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며 생물학에 기반한 남성과 여성의 본질적 차이, 성차를 중요하게 여긴다.

 

(‘문화 페미니즘을 설명한 옮긴이의 각주, 285)

 

 

문화주의 페미니스트들은 여성 운동과 LGBT 운동을 병행하는 본스타인을 비판할 때마다 이런 말을 자주 했습니다. 당신이 아무리 여성이라고 말해도 죽는 날까지 당신은 남자로 남을 뿐이다.” 이 말, 어디서 많이 들어본 것 같죠? 문화주의 페미니즘은 ‘TERF(Trans-Exclusionary Radical Feminism)’와 유사한 진영입니다. 국내에서는 ‘TERF’를 지지하는 페미니스트를 가리켜 터프라고 부릅니다.

 

본스타인은 문화주의 페미니스트의 트랜스섹슈얼 공격을 또 다른 젠더 수호라고 비판합니다. 그녀는 문화주의 페미니스트들이 여성성의 본질을 강조하기 위해 젠더 규범을 이용하여 트랜스섹슈얼을 공격한다고 주장합니다. 2장의 핵심 내용은 트랜스페미니즘 대 문화주의 페미니즘간의 대립 양상입니다. 혹시 제 글을 보고 오해를 할까 봐 첨언합니다. 문화주의 페미니즘이 래디컬 페미니즘의 한 분류라고 해서 모든 래디컬 페미니스트들이 터프처럼 트랜스젠더를 공격한다고 생각하면 곤란합니다. 문화주의 페미니즘오늘 독서모임의 핫 이슈가 될 것으로 조심스레 예상해봅니다. 저는 트랜스섹슈얼을 인정하지 않는 문화주의 페미니스트에 대한 레드스타킹 회원님들의 생각이 무척 궁금합니다. 오늘 이 주제로 대화를 나누게 된다면 후기에서 자세히 밝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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섹스, 다이어트 그리고 아파트 원시인 - 70만 년의 진화를 거슬러 올라가는 위험한 추적기
마를린 주크 지음, 김홍표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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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인류의 초기 조상은 곡물, 유제품, 정제유나 설탕 등 농작물을 섭취하지 않았다. 250만 년 인류 역사에서 농업기술이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불과 1만 년도 채 되지 않는다. 원시 인류는 수렵과 채집 등을 겸하며 생선과 고기, 채소와 과일 등을 섭취했다. 지금은 시들해졌지만, 구석기 다이어트가 관심을 모았었다. 구석기 다이어트란 구석기 시대 원시 인류의 식생활을 응용한 다이어트 방법이다. 과일 및 채소류 중심의 식단을 섭취하는 대신 곡류, 우유, 설탕 등 가공식품 등의 식단을 될 수 있으면 피하는 것이 특징이다. 인류가 농경 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 곡류 중심의 탄수화물 섭취량은 급격히 늘어났다. 구석기 원시 인류와 같은 유전자를 가진 현대인들이 탄수화물을 원활하게 처리하지 못하기 때문에 비만과 당뇨병이 급격히 증가한 것이다.

 

살 빼려면 자연, 아니 구석기 시대로 돌아가라? 섹스, 다이어트 그리고 아파트 원시인(위즈덤하우스, 2017)의 저자이자 진화생물학자인 마를린 주크(Marlene Zuk)는 구석기 식단으로는 절대로 건강해질 수 없다고 단언한다. 그녀는 구석기 다이어트의 열풍을 통해 드러난 진화에 대한 착각을 지적한다. 이 책에서 그녀는 진화에 대한 대중의 착각구석기 환상이라고 표현한다. ‘구석기 환상에 빠진 대중과 전문가들은 현재보다 과거가 더 살기 좋다는 착각을 한다. 그들은 과거와 현재를 비교하게 되고, 결국 현재의 문제를 잘 해결하기 위해선 과거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지금 이 세상을 살아가기가 어렵다고 느껴져서 과거에 대한 향수를 느끼는 것일까? 주크는 너무나도 뻔한 근거를 내세워 구석기 환상을 비판하지 않는다. 그녀는 식생활, 성생활, 양육, 질병 등 인간의 생활방식 및 생활환경이 어떻게 현재의 모습으로 이르게 되었는지 진화론적 관점으로 밝혀내고자 한다. 그리고 이 분석들을 근거로 그녀는 인류의 진화에 대한 순전한 믿음이 환상임을 증명한다.

 

다윈(Darwin)이 진화론을 내세운 이후부터 진화론자들은 적자생존을 바탕으로 한 미래 예측을 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인류사회는 수렵사회에서 농경 사회로, 다시 산업사회로 진화했다고 생각했다. 진화론을 통해 사회변화를 통찰한 사회학자들은 사회가 한 단계씩 발전해나간다는 믿음을 도출하기에 이른다. ‘진화의 틀에서 사회 발전을 설명하려는 열망과 맞물리면서 진화론은 서구식 진보주의적 세계관의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진보주의적 세계관은 역사의 거대한 물줄기를 단선적인 흐름으로 보게 했고, 인류의 진화를 진보의 역사로 해석했다.

 

주크는 진보발전과 연관 짓는 진화에 대한 인식을 거부하면서 인류의 진화 과정을 돌아본다. 그녀는 현대인을 최종 진화형으로 보지 않는다. 사실 그녀의 진화론은 낯설지 않다. 그것은 진화생물학자 스티븐 제이 굴드(Stephen Jay Gould)가 생전에 줄기차게 주장했던 진화론과 비슷하다. 그래서 주크는 자신의 논지를 전달하기 위해 굴드의 주장을 인용하기도 한다. 인류는 지금도 진화하고 있다. 구석기 원시 인류와 유전자 정보와 현대인의 유전자 정보는 서로 같을 순 없다. 인간은 단지 특정한 목적, 즉 과거보다 더 잘 살기 위한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 진화하는 것이 아니다. 눈 깜짝할 새 일어나는 인류의 진화는 우리에게 새로운 삶의 방향을 알려주지 않는다.

 

현대 인류는 과거 원시 인류들이 꿈도 못 꾸던 온갖 안락한 생활을 누리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구석기 시대의 원시 인류보다 과연 더 건강하게, 행복하게 잘 살고 있다고 확신할 수 있을까? 인류를 포함한 모든 생명체의 진화는 갑작스러운 시련들의 연속이다. 하지만 인간은 자신들이 꾸준히 발전해 왔으며, 미래에는 더 나은 모습으로 살아갈 것이라고 주문을 걸고 있다. 다윈의 진화론 이후로 인류는 지금까지 진화의 환상을 맛보면서 기분 좋게 취해 있었다. ‘진화의 환상에 취한 우리는 자신들이 과거 사람들보다 행복하게 살아왔다는 착각에 빠졌다. 과거 사람을 고대 유물수준으로 취급하는 우리는 세상 유일한 승리자인 것처럼 살고 있다. 자신들도 진화 중또는 예상치 못한 시련을 겪는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다. 인간은 발전한 것이 아니라, 그저 변화한 것이다. 단테(Dante)신곡에 나오는 지옥문에 적힌 경고문을 인용하여 이렇게 고쳐 쓸 수 있다. 시시각각 빠르게 변하는 세상에 들어온 자, 모든 희망을 버려라.” 원하지 않아도 어쩔 수 없다. 살아있는 한 계속 변화에 적응할 수밖에 없는 세상이 됐다.

 

 

 

 

Trivia

 

* 52: 호모 에르카스터’(X) 호모 에르가스터(Homo ergaster)

* 103: 드라마 <소프라노> (X) 소프라노스(Sopran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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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은 ‘단 하나의 사상’으로 볼 수 없다. 또, 페미니즘은 ‘단 하나의 정의(定義)’로 규정할 수도 없다. 페미니즘은 역동적으로 변화하고 경합하는 담론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페미니즘은 ‘페미니즘(들)’이다. ‘페미니즘(들)’에는 자유주의 페미니즘(Liberal Feminism)도 있고,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Marxist Feminism)도 있고, 사회주의 페미니즘(Socialist Feminism)도 있고, 급진적 페미니즘(Radical Feminism)도 있고, 에코페미니즘(Ecofeminism)도 있어 사상이 풍성하다. 이성애주의에 도전하고, LGBT(lesbian, gay, bisexual, and transgender) 등 각종 성 소수자 인권을 바탕에 둔 퀴어 페미니즘(Queer Feminism)도 주목받고 있다. 범세계적으로 본다면 제3세계 페미니즘(Third World Feminism)에 접근할 수 있다. 이 페미니즘을 이야기하는 주체는 흑인 여성, 아시아 여성, 이슬람 여성 등이다. 그리하여 젠더, 인종, 사회계급 모두를 아우르는 상호교차성 페미니즘(Intersectional Feminism) 또는 트랜스페미니즘(transfeminism)이 부상하고 있다.

 

현재 국내에 활발하게 활동 중인 페미니스트 대부분은 급진적 페미니스트에 가깝다. 메갈리아는 급진적 페미니즘을 표방한 온라인 커뮤니티였다. 메갈리아는 과거의 정제된 페미니즘 운동과는 확연히 다른 방식으로 여성 운동을 펼쳤다. 혐오의 언어를 미러링하며 혐오에 대항하는 방식이다. 온라인 커뮤니티, SNS를 중심으로 메갈리안들이 활동하게 되자 미러링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이 늘어났고, ‘메갈리안은 페미니스트가 아니다’라는 반응도 나왔다. 그런데 이러한 반응에 심각한 결함이 있다. 페미니즘을 ‘진짜, 가짜’로 구별하는 기준은 무엇이며 메갈리아를 부정하는 사람들은 페미니즘을 ‘감별’하는 것을 무슨 합당한 권리인 마냥 말하고 있는 것일까? 페미니즘을 제대로 공부했다고 보기 어려운 사람일수록 ‘페미니즘 감별사’로 행세하고 다닌다.

 

MtF(Male to Female, 의학적으로 지정된 성별이 ‘남성’이었으나 ‘여성’으로 전환한 것) 트랜스젠더가 여성 운동을 한다고 하면 콧방귀 끼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메갈리아가 사라진 후 일부 메갈리안들이 모인 워마드는 트랜스젠더를 포함한 성 소수자를 배제하는 성향을 드러낸다. 이들은 게이의 여성혐오에 맞서 미러링을 시도했다. 그러나 게이를 향한 워마드의 미러링은 방어적인 측면이 크다. 워마드는 성 소수자 인권 보호보다는 여성 인권 보호에 더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이다. 워마드의 부정적인 측면을 많이 본 사람들은 ‘워마드는 페미니스트가 아니다’라고 주장하고 싶을 것이다. 솔직히 말해서 나도 그렇게 생각할 뻔 했다. 하지만 ‘페미니즘(들)’의 광범위한 담론을 생각한다면 그런 입장도 옳다고 보기 어렵다. 워마드는 ‘성 소수자를 배제하는 급진적 페미니즘’이다. 미국에서는 그들을 가리켜 TERF(Trans Exclusionary Radical Feminism)라고 부른다. TERF는 ‘남성’과 ‘여성’으로 말하는 ‘생물학적 성별’과 ‘이성애’를 지향한다. 그래서 동성애자, 생물학적 성별을 거부하는 트랜스젠더를 받아들이지 못한다. 작년에 한서희가 ‘트랜스젠더는 여성이 아니다’, ‘성(性)은 바꿀 수 없다’라는 등의 발언을 해서 하리수가 비판한 일이 있었다. 두 사람 간의 설전이 벌어졌을 때 일부 네티즌들은 ‘한서희는 페미니스트가 아니다’라는 식으로 공격했다. 앞서 말했듯이 상대방의 페미니즘을 ‘가짜’로 몰아세우면서 비난하는 것은 ‘페미니즘 감별사들’이 선호하는 방식이다. 한서희의 발언을 ‘비판’하고 싶으면 성 소수자들도 여성 인권 신장에 기여한다는 사실을 근거로 내세워 반박하면 된다. 그런데 퀴어 페미니스트를 조롱하는 TERF의 호전적인 태도가 만만치 않다. TERF는 퀴어 페미니스트들, 트랜스페미니스트들, 심지어 자신들의 페미니즘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까지 멸시하는 의미로 ‘쓰까페미’라고 부른다.

 

 

 

 

 

 

 

 

 

 

 

 

 

 

 

 

 

 

* 슐라미스 파이어스톤 《성의 변증법》 (꾸리에, 2016)

* [개정판 절판] 로즈마리 푸트남 통 《페미니즘 : 종합적 접근》 (한신문화사, 2000)

* [구판 절판] 로즈마리 푸트남 통 《페미니즘 : 종합적 접근》 (한신문화사, 1995)

 

 

 

 

급진적 페미니즘 운동을 주도한 슐라미스 파이어스톤(Shulamith Firestone)성 구분을 아예 철폐하는 급진적 페미니스트 혁명을 지향했다. 그녀가 원했던 세상은 ‘남성’과 ‘여성’으로 나뉘는 문화적 구분이 사라지고, 남성과 여성이 결합하는 자연적 생식(임신)을 거부한다. 파이어스톤이 ‘급진적 페미니스트’로만 알려져 있다 보니 그녀가 자유주의 페미니스트,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스트들이 간과했던 인종차별 문제에 진지하게 접근했던 사실이 크게 부각되지 않는 듯하다. 《성의 변증법》 5장‘트랜스페미니즘’에 근접한 파이어스톤의 탁월한 분석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장에서 나는 인종차별주의는 성적 현상이라는 것을 보이고자 한다. 개인의 정신에 있어서 성차별주의처럼, 우리는 인종차별주의를 가족의 권력 위계질서와의 관계에서만 완전하게 이해할 수 있다. 성적 계급의 발달에서처럼 인종의 생리학적 구별은 불평등한 권력의 분배에 기인할 때에만 문화적으로 중요해진다. 그러므로 인종차별주의는 성차별주의가 확장된 것이다. (157쪽)

 

개별적인 백인 가정은 개별적인 흑인 여성을 성적으로뿐만 아니라 평생 가사노동으로 착취함으로써 유지된다. (169쪽)

 

 

 

파이어스톤은 이분법적 성별이 사라진다면 여성을 억압하고 종속하게 만든 ‘생물학적 가족’, ‘(남성)문화’도 사라지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렇게 되면 인간은 정형적인 ‘남성성’, ‘여성성’이라는 틀에 갇혀 생활할 필요가 없어진다. 지금 그녀가 살아있다면 이분법적 성별을 지지하는 급진적 페미니스트들을 보면서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하다. 파이어스톤은 자신이 꿈꿔왔던 ‘페미니스트 혁명 국가’가 당장 실현되기가 어렵다고 판단했다. 그녀는 인간이 자본주의적 생산 관계와 가부장제의 재생산을 포기하지 않는 한 ‘급진적인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고 확신했다(로즈마리 푸트남 통 《페미니즘 사상 : 종합적 접근》 구판, 114쪽). 그녀의 급진적 생각은 마르크스주의와 유사하다.

 

급진적 페미니즘 역시 ‘단 하나의 페미니즘’으로 볼 수 없다. 역사적으로 볼 때 급진적 페미니즘과 사회주의적 페미니즘은 서로 다른 여성운동 전략을 구사했다. 그렇지만 파이어스톤의 책을 읽으면서 급진적 페미니즘과 사회주의적 페미니즘을 명확하게 구분하는 일은 무의미하는 생각이 든다. 두 진영 간의 차이점을 지나치게 부각시켜 구분하는 일도 편향적으로 비교하는 ‘감별’의 오류로 빠질 수 있다. 물론, 이 두 가지 페미니즘에 입장 차이는 있다(다양한 페미니즘의 특징, 문제점까지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책이 많지 않다. 시의성이 떨어지지만 로즈마리 푸트남 통의 《페미니즘 사상 : 종합적 접근》 훌륭한 ‘페미니즘 종합 참고서’다). 그러나 아주 꼼꼼하게 살펴보면 미묘한 유사점을 발견할 수 있다. 파이어스톤은 급진적, 사회주의적 페미니즘의 교차성을 잘 이용하여 두 진영의 한계를 뛰어넘는 동시에 두 진영을 상호 보완한 독창적인 여성운동론을 제시했다.

 

사회주의 페미니즘이 있었기에 급진적 페미니즘이 나올 수 있었다. 당연히 급진적 페미니즘은 좌파 성향이 강하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페미니즘 역사는 미국이나 유럽과 비교하면 짧은 편이고, ‘페미니즘(들)’끼리 서로 경합하면서 논쟁을 진행하는 기회가 많지 않았다. 특히 우리나라는 아직도 ‘마르크스’, ‘좌파’를 편협하게 보는 이데올로기적 도그마가 남아 있다. 그래서 페미니즘에 대한 대중의 호의적 반응이 늘어나는데도 사회주의 페미니스트들의 활동이 부각되지 못하는 실정이다. 누군가가 ‘나는 사회주의 페미니스트다’라고 말하는 순간, 네티즌들은 그 사람에게 ‘욕을 부르는 좌빨과 꼴페미의 환상적인 조합’이라고 조롱할 것이다. 사회주의 페미니스트들이 음지에서 벗어나서 급진적 페미니즘과 사회주의 페미니즘의 접점을 찾아 여성 문제를 접근하는 시도를 해봤으면 좋겠다. 퀴어 페미니스트들의 활동도 더 많이 알려져야 한다. 그들에게 더 분발하라고 말해선 안 된다. 어느덧 ‘주류’로 자리 잡은 급진적 페미니스트들이 음지에 있는 페미니스트들에게 다가가서 먼저 손을 내밀어야 한다. 상대 진영의 페미니즘이 나의 페미니즘과 다르다고 해서 ‘너의 페미니즘은 틀렸어!’고 규정해선 안 된다. 이런 의미에서 ‘페미니즘(들)’이 건강하게 유지하려면 관점의 차이를 인정하면서도 그 차이를 교섭하고, 보완해야 한다. ‘페미니즘(들)’끼리 서로 “내가 잘 낫다‘는 식으로 싸우는 것은 페미니즘에 부정적 영향을 주는 소모적인 투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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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립간 2018-02-09 19: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페미니스트입니다. 그리고
자유주의 페미니즘 Liberal Feminism,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 Marxist Feminism, 사회주의 페미니즘 Socialist Feminism, 급진적 페미니즘 Radical Feminism, 에코페미니즘Ecofeminism, Queer Feminism, 제3세계 페미니즘 Third World Feminism, 상호교차성 페미니즘 Intersectional Feminism( 또는 트랜스페미니즘 transfeminism)
중에서 *** 페미니즘의 페미니스트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몇 사람이나 될까 생각해 봅니다.

예전에 어느 알라디너가 마립간 님도 페미니스트이고 페미니스트임을 선언했으면 좋겠어요라는 댓글을 받았는데, 제 가치관이 이 중 어디에 가까울까 생각했습니다. 상호교차성 페미니즘 Intersectional Feminism?

cyrus 2018-02-10 10:07   좋아요 0 | URL
‘나는 페미니스트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많지만, ‘나는 OOO 페미니스트다’라고 말하는 페미니즘 정체성을 뚜렷하게 밝히는 사람들은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저 같은 경우는 페미니즘 정체성을 밝히기보다는 여성문제를 바라보는 저의 관점에 근접한 ‘페미니즘(들)’을 알려고 노력합니다. 원래 처음에는 자유주의 페미니즘(J. S. 밀, 베티 프리단)으로 시작했다가 제3세계 페미니즘(벨 훅스, 김미덕)을 알게 됐고, 최근에 급진적 페미니즘(파이어스톤), 사회주의 페미니즘(아우구스트 베벨, 클라라 채트킨)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습니다.

2018-02-09 20: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2-10 11: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sprenown 2018-02-09 2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성들인글 잘봤습니다 폐미니즘 공부 해야겠네요!

cyrus 2018-02-10 11:12   좋아요 0 | URL
페미니즘을 공부하면 여성들이 살면서 말하지 못했던 고충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안심판매 2018-02-12 11: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처음엔 페미니즘이라는 말을들었을때는 ˝뭐, 이런 이기적인 집단들이 다 있나?˝ 였는데 이것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본 결과 현대사회의 공동체 분화현상 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기존의 가부장적인 가족중심 공동체에서 분화된 사람들이 만든 공동체인거죠. 부모세대를 돌아보며 절대 이런 공동체는 만들지 말아야겠다라는 사람들이 힘을 합쳐 만들어낸 공동체 같아요.
그런 공동체를 보면서 제가 할 수 있는건 응원과 비판이라고 생각해요.
개별의 공동체라는것을 존중하고 그들의 말에 귀기울이기도하고 불필요한것들은 걸러서 듣는 정리정돈이 필요하다 생각해요. 그들의 말을 듣다보면 몇몇은 괜찮은 내용도 있는데 가끔 몇몇은 (제기준에서) 말도 안되는 미숙한 생각의 내용도 있어 보여요.
이럴때일수록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건 서로를 존중하는 ˝해체주의˝가 아닐까해요.
각자 자신들의 이익을 주장할 자유는 언제나 어디서나 있으니까요.
있는 힘껏 자신들의 생각과 주장을 이 인터넷이라는 공간에 마음껏 쏟아 냈으면 해요.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이 더이상 없을때까지...
그러면 지금과 같은 가끔은 생기는 볼 성 사나운 모습은 없어지지 않을까해요.
천만 다행인것은 제 귀에 바로 대고 육성으로 자신의 주장을 말하는 사람은 없다는거에요.

cyrus 2018-02-12 13:37   좋아요 0 | URL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페미니즘이 여러 갈래의 분파로 나뉜 건 페미니즘은 다양한 학문 및 사상과 결합할 수 있는 학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페미니스트들마다 가부장제의 문제점을 보는 시선, 그것을 해체하는 관점들이 다릅니다. 저는 이러한 흐름을 긍정적으로 생각합니다. 페미니스트들은 자신들의 생각을 마음껏 펼칩니다. 물론, 페미니스트들 내부에서도 비판과 성찰이 이루어집니다. 페미니즘을 비판하는 것도 표현의 자유입니다. 합당한 비판은 경청하고 존중해야 합니다. 하지만 페미니즘을 악의적으로 비난하거나 페미니즘의 문제점을 꼬투리 잡아 페미니즘 자체를 부정하려는 입장에 반대합니다.
 
공포증 - 사이코 북스 03
이반 워드 지음, 태보영 옮김 / 이제이북스 / 2002년 11월
평점 :
절판


 

 

 

공포는 진화에 핵심적인 생존의 필수 요소이다. 진화론적으로 볼 때 공포 자극에 대해 불안을 느끼지 않는 사람보다 여기에 과잉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의 생존 가능성이 높다. 대부분 사람은 뱀에 공포를 느낀다. 뱀에 대한 공포는 진화론적 접근 방식이 통용된다. 오랜 야생 생활을 한 원시 인류는 뱀을 위험 대상으로 인식했다. 따라서 뱀에 대한 공포는 원시 인류가 위협적인 존재에게 대항하며 야생에서 살아남기 위해 체득한 습성이라는 점에서 진화의 산물이라 볼 수 있다.

 

고소공포증이나 광장공포증처럼 실질적인 위험이 실재하지 않는 상태에서 느끼는 공포를 ‘공포증(phobia)’이라 부른다. 공포증이 신체적 반응(경직된 몸, 식은땀, 두근거림 등)을 일으키는 원인에 대해선 아직 명확한 과학적 근거가 없다. 프로이트(Freud)의 제자인 어니스트 존스(Ernest Jones)는 공포증을 부조화, 모순의 요소들이 포함된 감정 상태라고 규정했다. 그리하여 정신분석학적 측면에서 공포증을 바라본다면, 공포증은 ‘비합리적인 두려움’[1]이다. 왜냐하면 앞서 언급한 진화론적 측면만으로 공포증이 발생하는 원인을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공포증을 진화의 산물로 보는 관점이 ‘생물학적 이론’이라면, 정신적 외상(trauma)이라는 자극이 가해져서 공포증이 유발된다고 설명하는 것은 ‘외상 이론’이다. 앨프레드 히치콕(Alfred Hitchcock)의 영화에는 정신적 외상에 시달려서 극심한 공포에 시달리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히치콕은 이런 인물들의 동기를 설명하거나 극적인 결말을 유도하기 위해 외상 이론이 반영된 장면을 연출했다. 이반 워드(Ivan Ward)《공포증》(이제이북스, 2002)은 히치콕의 영화 <새>에 반영된 외상이론과 영화에서 표현된 등장인물의 공포증을 분석한다.

 

프로이트는 공포증을 어떻게 봤을까? 그는 공포증을 ‘마음속에 있는 공포의 근원’으로 가정했다. 아이들이 등교를 거부하는 증상을 ‘학교 공포증’이라고 한다. 학교 공포증이 있는 아이는 자신을 괴롭히는 친구들을 만나기 두려워서 등교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다. 프로이트는 아이의 등교 거부가 아이의 내면에 있는 ‘불안’과 관련되어 있다고 봤다. 학교 공포증이 있는 아이의 애착 대상은 엄마다. 아이가 엄마와 떨어져 있으면 불안해지고 안정감을 찾지 못한다. 따라서 프로이트는 ‘유년기의 병적 불안’이 공포증 형성의 전제 조건이라고 주장했다.

 

《공포증》은 문고본 형태로 만들어진 책이라서 깊이 있는 내용이 부족한 편이다. 이 책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에 의존하다시피 공포증을 설명하고 있어서 공포증에 대해 다층적으로 접근하지 못했다. 저자는 멜라니 클라인(Melani Klein)의 이론을 인용했지만, 그녀는 프로이트 이론을 비판적으로 계승한 정신분석학자이다.

 

불안에서 비롯된 공포증은 친숙하지 않은 환경(또는 대상)에 적응하고자 나타날 때 나타나는 인체의 가장 기본적인 반응이다. 그러므로 공포증은 꼭 병적인 상황에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며 정상적인 사람들도 얼마든지 경험할 수 있는 증상이다. 정상적인 사람들은 위험이나 고통이 예견될 때, 또는 예기치 않은 상황에 직면했을 때 공포증을 경험하게 된다. 공포증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필요하다. 공포증은 내 몸에 위험한 것이 아니라 나를 보호하기 위한 반응이다. 그렇기 때문에 공포의 대상을 피하지 말고 맞서는 태도가 중요하다. 불확실한 세상에 사는 우리에게 공포증은 가까워서도, 멀어서도 안 되는 어정쩡한 동반자다.

 

 

 

[1] 《공포증》 14쪽

 

 

 

 

 

 

※ Trivia

 

 

 

* 사자, 마녀, 의상(衣裳) : 가상의 위험들

* 그들은 말을 쏘았다, 그렇지 않은가? - 상징으로서의 공포

* 공포, 공포 : 에드거 앨런 포

 

 

 

이 책의 목차 제목이다. 밑줄이 친 목차 제목은 유명한 소설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자, 마녀, 의상’C.S. 루이스(Clive Staples Lewis)《나니아 연대기》(시공주니어, 2005)의 1부 제목(The Lion, the Witch and the Wardrobe)이다. 원제의 ‘Wardrobe’을 ‘옷장’, ‘옷(의상)’으로 번역할 수 있는데, 《공포증》의 역자는 루이스의 소설을 잘 몰라서 그런지 ‘옷’으로 번역했다.

 

 

 

 

 

 

‘그들은 말을 쏘았다, 그렇지 않은가?’호레이스 매코이(Horace McCoy)가 1935년에 발표한 소설의 제목(They Shoot Horses, Don’t They?)을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이 작품은 아미티지 트레일(Armitage Trail)의 소설 『스카페이스』와 함께 동명의 번역본에 수록되어 있다. 이 책의 역자는 러브크래프트(Lovecraft)의 작품을 번역한 정진영 씨로 ‘정탄’은 그의 필명이다. 아미티지 트레일과 맥코이의 소설 모두 1930년대 미국의 대공황 시기를 배경으로 한 작품이고, 두 작품 모두 영화화되었다.

 

 

 

 

 

 

 

‘공포, 공포’는 에드거 앨런 포(E. A. Poe)의 소설에 나오는 명대사를 패러디한 것으로 추정된다. 포의 미완성 장편소설 《아서 고든 핌의 이야기》(창비, 2017)의 주인공은 정체불명의 생명체를 만나는 순간 두려움에 떨면서 ‘테켈리 리, 테켈리 리(Tekeli-li, Tekeli-li)’라고 외친다. 주인공이 엄청난 공포를 느끼면서 외치는 알 수 없는 말을 이반 워드가 ‘공포, 공포’로 패러디했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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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2-09 12: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8-02-09 17:43   좋아요 0 | URL
이것저것 주워들은 정보를 취사선택해서 정리하는 것뿐입니다. 그렇게 대단한 일이 아니고요, 책과 공부에 대한 애정이 많으면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일입니다. 단, 이게 너무 과도하게 지식을 표출하면 잘난 척하는 사람으로 보일 수 있어요. 그런 사람이 되지 않으려고 글을 쓰면 내용 조절을 하는데 쉽지 않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