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식의 강
올리버 색스 지음, 양병찬 옮김 / 알마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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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태어나면서부터 세상의 이치를 아는 사람이 아니라, 옛것을 좋아하고 부지런히 아는 것을 추구하는 사람이다.” (我非生而知之者, 好古, 敏以求之者也) [1]

 

 

공자《논어》 술이(述而) 편에서 자기 자신을 평한 말이다. 학문이란 배우고 실천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옛것을 자기 것으로 소화하고 새로운 것을 창조하기 위해 사색을 많이 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무엇을 하지 않기 위해서 어떤 일을 하는 것보다 무언가를 간절하게 하고 싶어서 하는 것이야말로 성공할 가능성도 높고 훨씬 즐겁다. 글쓰기도 마찬가지다. 글을 쓰기 시작하는 단계에서 흥미와 열정을 쏟지 않는다면 좋은 글이 나오기 힘들다. 그러나 흥미를 갖고 글을 쓰기 시작한다면 전혀 다른 의미가 된다. 마음에서 우러나 그 무언가에 이끌려 글을 쓰고 있다는 것이다.

 

빌 헤이스 올리버 색스가 삶을 마감하기 전까지 함께 했던 동성 연인이다(색스는 동성애자다). 빌 헤이스는 그 어느 때보다 자신의 인생을 마무리하는 글쓰기에 집중한 연인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2015년 8월, 어쩌면 그는 곧 죽을 수도 있었다. 나는 그날을 아주 생생하게 기억한다. 올리버는 갑자기 원기를 회복했다. 책상에 앉아 마지막 저서가 될 책의 목차를 불러줬다. 그 일은 ‘죽어간다는 것’의 ‘끔찍한 지루함’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반가운 기분전환거리였기 때문이리라. 올리버에게 지루함이란 그가 그동안 견뎌온 불편함보다 더 나쁜 것이었다. [2]

 

 

죽는 순간에 유난히 고운 소리로 운다는 백조. 색스의 마지막 책 《의식의 강》(알마, 2018)은 바로 그 아름다운 백조의 노래를 닮았다. 이 책은 색스가 세상을 떠나기 직전 언론에 발표한 열 편의 에세이를 선별하여 묶은 것이다. 색스는 자신에게 남겨진 길지 않은 삶을 가장 즐겁게 살기 위해 글로 자신의 인생을 정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의 글쓰기는 흥미와 열정을 동반한 행위이다. 세상과 관계를 청산하기 위해 노력하는 이 시간에는 약간의 재미를 위한 시간도 있을 것이다.

 

색스의 글은 과학 에세이면서도 독자들에게 각별한 감동을 준다. 늘 주변에서 일어난 일들을 바탕으로 어려운 과학 이야기를 쉽고 흥미롭게 풀어낸다. 《의식의 강》에서는 인간과 과학의 한계를 절감하면서 자연과 생명에 경외와 찬미를 바친 색스의 생전 모습을 만날 수 있다. 진화, 시간, 의식, 인간의 한계 등 심오한 주제를 응시하는 저자의 고독한 성찰은 ‘딱딱한 과학’을 ‘부드러운 문학’으로 바꾸어놓았다(그런데 이 책의 번역에 문제가 많다고 한다. 간혹 매끄럽게 읽혀지지 않은 문장들이 보인다).

 

『의식의 강』은 ‘인간’을 만든 ‘의식’이 과연 무엇인가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인간만이 시간에 대한 의식을 가지고 있다. 인간은 현재에 몰두하기보다는 보통 이미 흘러가 버린 과거에 연연한다. 그리고 아직 오지 않은 미래에 대한 공포에 사로잡히며 언젠가 닥쳐올 죽음 앞에서 불안해한다. 따라서 인간은 현재의 순간순간이 제공하는 삶의 풍요를 그냥 놓치고 만다. 색스가 『의식의 강』 도입부에 언급한 보르헤스의 말에 의하면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시간 의식’이라는 강에 몸을 맡기면서 살아가는 ‘시간적 존재’이다. 고독을 느끼는 외로운 인간이나 죽음 앞에 한없이 무력감을 느끼는 인간은 혼자, 따로, 분절되어 살면서 ‘잉여롭게’ 의식을 흘려보내면서 산다. 그러나 인간은 개인의 의식을 주체적으로 활용하여 사상, 믿음, 관습이라는 보이지 않는 세계를 창조할 수 있다. 따라서 인간이 의식을 어떻게 능동적으로 선택하느냐에 따라 삶의 방향은 달라진다.

 

죽은 영혼은 ‘망각의 강’ 레테(Lethe)의 물을 마시며 이전 삶을 잊어버리게 된다. 망각은 죽음과 연결되며, 기억은 삶과 동의어인 셈이다. 사실 인간은 기억함으로써 생존에 필요한 정보를 축적하고, 시행착오를 줄이고, 해야 할 일을 해낸다. 색스는 인간이란 ‘뇌 마음대로’가 아닌 ‘내 마음대로’ 기억하는 오류투성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기억을 때로 망각의 강에 흘러 보내는 것도 창의적인 기술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인간의 기억은 오류를 범할 수 있고 취약하며 불완전하지만, 굉장히 유연하고 창의적이다. 우리의 뇌는 ‘우리가 읽고 들은 것’과 ‘타인들이 말하고 생각하고 쓰고 그린 것’을 통합하여, 마치 1차기억인 것처럼 강렬하고 풍부하게 만든다. 덕분에 우리는 타인의 눈과 귀로 보고 들을 수 있고, 타인의 마음속에 들어갈 수도 있으며, 예술, 과학, 종교가 포함된 문화를 완전히 이해할 수 있다.[3]

 

 

유머는 단순한 웃음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거기에는 웃음의 대상에게 보내는 연민과 동정이 함께 들어 있다. 삶에 대한 애착과 반복되는 자기기만, 한 순간의 짧은 성찰 등이 뒤섞여 불안하고 부조리한 것이 인간의 천성이다. 그러나 건강한 유머에는 그것마저 여유롭게 관조하는 힘이 있다. 《의식의 강》 곳곳에는 건강한 유머가 배어 있다. 특히 『잘못 듣기』라는 글 후반부에 자신의 잘못 듣는 행위를 즐기는 색스의 긍정적인 태도가 눈길을 끈다. 저자의 낙관적인 모습은 좀 더 활기찬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마음의 근육을 튼튼하게 해주는 힘이 된다. 바로 그 유머 때문에 《의식의 강》은 독자에게도 낙관의 힘을 보태주고 있다.

 

 

 

 

 

[1] 김원중 역, 180쪽, 《논어》(휴머니스트, 2017)

[2] 《의식의 강》 뒤표지

[3] 『오류를 범하기 쉬운 기억』, 13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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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 준지 컬렉션 7화 첫 번째 에피소드

중고 레코드

 

 

 

 

 

나카야마는 친구 오가와가 들려준 레코드의 음악에 푹 빠진다. 레코드의 음악을 다시 듣고 싶은 나카야마는 오가와에게 레코드를 빌려달라고 부탁한다. 그러나 오가와는 부탁을 거절한다. 나카야마는 녹음이라도 할 수 있게 잠시만 빌려달라고 다시 한번 더 부탁한다. 두 번째 부탁마저 거절당하자 나카야마는 오가와를 살해하여 레코드를 손에 넣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레코드를 호시탐탐 노리는 사람들이 나카야마에게 서서히 접근하는데…‥. 살인을 부추길 정도로 소유욕을 불러일으키는 레코드. 놀랍게도 이 레코드에 취입된 노래는 가수가 죽은 뒤에 녹음되었다는 것.

 

 

 

 

 

 

 

 

 

 

 

 

 

 

 

 

 

 

* 이토 준지 《이토 준지 공포 박물관 4 : 허수아비》 (시공사, 2008)

 

 

 

소름끼칠 정도로 우울한 선율이 흐르는 레코드의 음악을 빼면 이야기는 평이하다. 설정은 다르지만, 자살을 유발하는 노래 ‘검은 일요일’이 생각나는 이야기다. 슬픈 선율의 ‘검은 일요일’을 듣고 자살하는 사람들이 속출했으나 자살을 유발하는 원인이 밝혀지지 않았다. 결국, ‘검은 일요일’은 백여 명의 사람들을 죽게 만든 저주의 음악으로 알려지게 됐고, 원곡 악보가 완전히 소실되면서 죽음의 행렬이 멈췄다

 

 

 

 

 

…‥고 하는데, 사실이 아니다. 이 이야기의 출처는 세상에 신기한 이야기들을 모아놓은 《아니, 세상에 이런 일이》다. 이 책에 수록된 이야기의 원 출처는 오직 ‘가짜 뉴스’만 보도하는 것으로 유명한 <위클리 월드 뉴스>이다.

 

 

 

 

 

 

이토 준지 컬렉션 7화 두 번째 에피소드

길 없는 거리

 

 

 

 

 

 

여고생 사에코는 가족의 스토킹을 견디지 못해 이모 집에 찾아간다. 그런데 이모 집으로 가는 길이 평소와 다르게 이상하다. 길이 있어야 할 자리에 커다란 집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 이야기의 제목이 ‘길 없는 거리’다. 길 없는 마을에 사는 주민들도 이상하다. 주민들의 집이 길이 돼 버린 셈인데, 마을 주민들은 거리낌 없이 남의 집을 드나든다. 그곳에는 프라이버시가 완전히 사라졌지만, 마을 주민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숨기기 위해 가면을 쓰고 다닌다. 사에코는 ‘의문의 남자’의 도움을 받아 이모의 집에 도착하지만, 프라이버시를 완전히 포기한 이모는 알몸으로 돌아다닌다. 이모를 포함한 마을 주민들의 이상한 행동에 불안감을 느낀 사에코는 마을을 탈출하려고 하지만 쉽지 않다. 설상가상으로 ‘의문의 남자’가 칼을 쥔 채 사에코 앞에 다시 나타난다.

 

 

 

 

 

 

 

 

 

 

 

 

 

 

 

 

 

 

* 이토 준지 《이토 준지 공포 박물관 5 : 뒷골목》 (시공사, 2008)

 

 

 

길 없는 마을, 그곳에서 가면을 쓰면서 남의 집을 길처럼 다니는 마을 사람들,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괴이한 생명체들. 카프카적인(Kafkaesque) 분위기가 이 이야기 전체를 관통한다.

 

 

 

 

 

 

이토 준지 컬렉션 8화 첫 번째 에피소드

조상님

 

 

 

 

 

슈이치의 약혼녀 리사는 거대한 유충이 등장하는 악몽에 시달린다. 슈이치 집안에 자손 대대로 내려오는 ‘끔찍한 풍습’이 있다. 슈이치는 가문의 풍습을 따르기 위해 리사와의 결혼을 재촉한다. 이 풍습의 정체는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므로 생략한다.

 

 

 

 

 

 

 

 

 

 

 

 

 

 

 

 

 

 

* 이토 준지 《이토 준지 공포 박물관 8 : 백사촌 혈담》 (시공사, 2008)

 

 

 

부조리하더라도 가부장적 권력을 그대로 이어받는 남성(슈이치)가문을 지탱해주는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희생되는 여성(리사)의 억압 상황을 그로테스크하게 묘사되었다.

 

 

 

 

 

이토 준지 컬렉션 8화 두 번째 에피소드

괴기 서커스

 

 

 

 

 

 

원제는 『서커스가 왔다』. 소년은 자신의 마을에 찾아온 ‘파피루스 서커스단’ 공연을 관람한다. 서커스 단원들은 ‘줄타기’, ‘칼 던지기’ 등 위험하기 짝이 없는 곡예를 펼치는데, 공연 도중에 일어난 불의의 사고로 단원들이 죽는다. 서커스 공연을 진행하는 단장은 단원들이 죽어가는 모습도 공연 일부라고 생각한다. 단원들이 줄줄이 죽어 가는데도 위험한 곡예는 계속된다. 단원이 부족해지자 단장은 관중들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한다. 서커스 단원이 되면 서커스단의 홍일점 렐리아와 결혼할 수 있다고. 렐리아는 줄타기를 하는 소녀이지만, 자신 때문에 남자 단원이 죽어가는 모습에 절망한다. 그녀는 위험한 곡예를 그만두고 싶어 하지만, 소심한 성격 탓에 도망치지 못한다.

 

 

 

 

 

 

 

 

 

 

 

 

 

 

 

 

 

 

* 이토 준지 《이토 준지 공포 박물관 4 : 허수아비》 (시공사, 2008)

 

 

 

파피루스 서커스단은 ‘남성 연대’를 상징한다. ‘남성 연대’에 속한 남성은 자신의 특출한 능력을 인정받으려고 ‘남성성’을 과시한다. ‘남성 연대’ 안에 갇힌 렐리아는 연약하고 소극적인 ‘여성성’을 드러낸다. 렐리아의 여성성은 남성 단원들의 보호 본능을 자극한다. 남성 단원들의 ‘남성성’이 반영된 곡예는 구애하는 렐리아 앞에서 뽐내는 매력으로 작용한다. 그러므로 남성 단원들은 렐리아와의 결혼을 위해 위험천만한 곡예를 한다.

 

 

 

 

 

 

 

 

 

 

 

 

 

 

 

 

 

* 주디스 버틀러 《젠더 트러블》 (문학동네, 2008)

* 에머 오툴 《여자다운 게 어딨어》 (창비, 2016)

 

 

 

파피루스 서커스단의 곡예는 관중을 즐겁게 해주는 공연(performance)이 아니다. 남성 단원이 여성 단원에게 ‘남자다운 용맹함’을 보여주기 위해 과시하는 수행(Performance)이다. 남성 단원들은 리허설 없이 곡예를 시도한다. 주디스 버틀러의 말을 빌리자면 남성이라는 젠더 자체가 ‘리허설을 거친 연기’이기 때문이다. 남성 단원들은 단장이 주선하는 ‘결혼(버틀러의 표현에 따르면 ‘강제적 이성애’)’을 달성하기 위해 ‘남성’으로 지칭된 존재가 되려고 한다. 남성 단원들과 여성 단원 렐리아는 남성성과 (남성들의 보호에 기대려는) 여성성을 수행하는 곡예를 계속하며 살아간다. 악순환이 펼쳐지는 것이다. ‘남성’, ‘여성’으로 구분되는 성의 이분법적 범주와 ‘강제적 이성애’ 관계 모두 전복하려면 서커스단에 탈출해야 한다. 그러나 탈출하기가 쉽지 않아 보인다. 단원이 줄어들면 단장은 새 단원을 모집할 거고, 렐리아를 차지하기 위해 서커스단원이 되고 싶어 하는 관중들은 계속 늘어날 것이다. 이야기가 시작되는 시점부터 서커스 공연을 지켜보는 소년도 예외가 아니다. 소년이 서커스단원이 되는 순간 ‘남성’으로 만들어진다. 젠더, 즉 ‘남성’이라는 옷을 입어 위험한 곡예를 하도록 길러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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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8-04-14 17: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Gloomy Sunday인가요... 오래전 비슷한 주제의 음악을 들은 것 같네요. cyrus님께서도 공포/스릴러에 관심이 많으신 것 같네요. 영화「곤지암」도 보셨을 것 같아요.^^:)

cyrus 2018-04-15 09:12   좋아요 1 | URL
‘글루미 선데이’도 ‘검은 일요일’ 도시전설과 조금 유사해요. 두 곡의 차이점은 ‘글루미 선데이’는 실제로 만들어진 곡이고, ‘검은 일요일’은 유명무실한 곡입니다.

영화 <곤지암>은 아직 안 봤어요. IPTV 마일리지로 구매해서 집에서 영화를 볼려고 합니다. 마일리지가 아깝지 않은 영화였으면 좋겠어요.. ^^
 
페미니즘을 팝니다 - 상업화된 페미니즘의 종말
앤디 자이슬러 지음, 안진이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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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 서점에 페미니즘 굿즈(goods)’를 사면 페미니즘 도서를 끼워 준다. 여성단체와 페미니즘 모임들은 티셔츠부터 에코백, 스티커, 배지 등 다양한 상품들을 판매한다(대구 페미니즘 북클럽 레드스타킹도 페미니즘 굿즈를 만들 예정이다). 페미니즘 도서가 주요 서점 베스트셀러 명단에 오르고, 여성단체 기부 · 후원 운동도 벌어지면서 페미니즘은 돈이 된다는 말이 나왔다. 반 페미니스트들은 과 손잡은 페미니즘을 조롱하기 위해 페미니즘은 돈이 된다고 말한다. 그런데 원래 이 말은 메갈리아가 먼저 쓴 것이다. 메갈리아는 이 구호를 사용하면서 여성들의 목소리를 내기 위해 페미니즘 굿즈 생산 및 후원 운동을 진행할 거라고 천명했다. 따라서 페미니즘은 돈이 된다는 페미니즘 구호이다. 페미니스트 문화평론가 손희정페미니즘은 돈이 된다자본과 같지 않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녀는 이 구호가 가부장제적 자본주의의 공모자가 되지 않겠다는 페미니스트의 선언이라고 평가한다.[1]

 

손희정은 페미니즘은 돈이 된다구호는 자본주의적 시장 논리로부터 시작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구호는 신자유주의적 시장 논리가 페미니즘을 흡수했을 때부터 시작되었다. 페미니스트라면 페미니즘을 팝니다(세종서적, 2018)을 반드시 정독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 사회에 유행하고 있는 페미니즘 열풍을 따져봐야 한다. 이 책의 저자인 미국의 페미니스트 문화평론가 앤디 자이슬러상업주의에 물든 페미니즘을 냉정하게 비판한다.

 

저자는 영화나 TV 프로그램, 언론, 광고 등 대중매체의 파급 효과가 불러온 오늘날의 페미니즘 열풍의 이면을 분석한다. 페미니즘 대중화에 힘입어 탄력받은 신세대 페미니스트들은 과거와 달리 세련되고 매력적인 여성 운동을 대대적으로 펼쳤다. ‘여권 신장을 표방하는 기업의 광고들이 등장했고, 할리우드에서는 여성 주인공을 내세운 영화가 제작되기 시작했다. 연예인들은 페미니스트라고 떳떳하게 선언한다. 엠마 왓슨UN 연설이 전 세계 페미니스트들의 주목을 받았다. 우리나라에서는 (연예인인지 불분명하지만) 한서희가 페미니스트임을 선언하면서 페미니즘 굿즈를 판매하는 사업을 시작했다. 지금까지 거론된 사례들은 시장 페미니즘(marketplace feminism)’이라고 부른다.

 

시장 페미니즘에 익숙한 신세대 페미니스트들은 1980~90년대에 등장한 포스트페미니스트이다. 시장 페미니즘은 신세대 페미니스트들의 정체성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신세대 페미니스트들은 개인을 우선시하는 여성 운동에 관심이 많다. 그녀들은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오늘날의 담배는 남성 흡연자들의 전유물이 아니다. 여성도 선택할 수 있는 기호품이다. 여성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옹호하는 페미니스트들은 섹스를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그녀들이 섹스하는 것도 여성 해방의 기치를 내건 페미니즘에 따른 선택이다. 신세대 페미니스트들은 여성이 사회적으로 성공하려면 여성의 외모를 부각하는 매력 자본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그래서 그녀들은 개인의 경제적 성공을 위해서 성형 수술을 선택한다.

 

포스트페미니스트는 페미니즘을 선택하는 권리정도로 여긴다. 그녀들이 쟁취하고 싶은 여권(女權)’모든 여성이 가져야 할 권리가 아니라 개인의 권리이다. 저자는 공익보다는 사익에 초점을 맞춘 포스트페미니스트와 그녀들이 지향하는 시장 페미니즘의 문제점을 지적한다. 어쩌다가 페미니즘이 이 지경에 이르게 됐을까? 시장 페미니즘이 등장하게 된 것은 1980년대에 포스트페미니즘과 신자유주의가 손을 잡으면서부터다. 기업이 주도한 시장 페미니즘속 빈 강정이다. 기업은 페미니즘을 마케팅 수단으로 이용했고, 상품 판매를 유도하기 위해 여성 친화적인 홍보를 펼쳤다. 시장 페미니즘은 여성 운동 이후로 경제적 지위를 가지게 된 여성을 소비자로 격상시키는 데 일조했다. 시장 페미니즘은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라는 2세대 페미니즘의 정의와 정반대이다. 신세대 페미니스트들은 선배들의 여성운동을 구닥다리로 취급했으며 개인의 선택이 성공적인 것이라고 확신했다. 따라서 시장 페미니즘은 정치와 철저히 분리되어 있고, 개인의 자아실현 및 성공에 초점을 맞춘 ‘쉬운 페미니즘이다.

 

시장 페미니즘은 돈이 된다. 속상하지만, 현실을 냉정하게 봐야 한다. 페미니즘은 유행어가 아니다. 그런데 일부 페미니스트들은 여성 운동을 지지하거나 페미니스트라고 선언한 연예인, 심지어 협찬을 받아 페미니즘 굿즈를 사용하는 연예인에게 열렬히 환호한다. 저자는 이러한 페미니스트들의 반응을 페미니스트의 오류라고 말한다. 사실 오류보다 착각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린다. 인기 여성 아이돌이 저는 페미니스트예요!”라고 말한다면 아이돌 팬들도 페미니즘에 관심을 가질까? 천만에! 절대로 그런 일이 없다. 물론, 몇몇 팬들은 자신이 동경하던 연예인을 따라 하기 시작하면서 페미니즘에 관심을 가질 수 있다. 하지만 대중문화 속 페미니즘은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가볍기만 하다. , 연예인의 페미니스트 선언은 한낱 유행이 될 수도 있으며 연예인 페미니즘은 여성운동에 힘을 실어주지 못한다. 연예인 페미니스트에게만 몰리는 대중 및 언론의 시선은 심각하고, 지루한페미니즘의 문제들을 외면하게 만든다.

 

앤디 자이슬러는 페미니즘의 휘슬 블로어(whistle-blower)’. 그녀는 페미니즘에 문제가 있을 때 휘슬(호루라기)을 불어 잘못을 바로 잡아준다. 페미니즘을 팝니다는 페미니즘의 가치를 변질시킨 신자유주의를 비판하지 않는다. 신자유주의 시장경제의 공모자가 된 페미니즘도 비판한다. 따라서 이 책은 방만한 신세대 페미니즘, 그리고 그들의 행동을 방관한 2세대 페미니즘에 대한 내부 비판적 성격이 강하다. 페미니즘은 쉬운 학문이 아니다. 페미니즘은 페미니즘()’이기 때문이다. 페미니즘이라는 단수적인 이름 안에는 아주 복잡하고 다양한 페미니즘()’이 있기 때문이다. 너무나 쉽고 재미있는 시장 페미니즘은 페미니즘의 세계를 이해하는 데 하나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앞으로도 계속 페미니즘은 어려워져야 한다. 누구나 쉽게 받아들일 수 있을 정도로 재미있고 가벼운 페미니즘은 없다.

 

 

 

 

 

[1] 손희정, [청춘직설-페미니즘은 파워가 된다], 경향신문, 2016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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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4-13 17: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페미니즘이 어려워져야(공부해야하는)하는 이유가 하나 더 늘었네요.

cyrus 2018-04-14 13:47   좋아요 1 | URL
‘쉬운 페미니즘‘은 경계해야 합니다. 그런 페미니즘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페미니즘을 돈벌이로 볼 수도 있거든요.

2018-04-13 18: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4-14 13: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4-14 15: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sprenown 2018-04-13 18: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죽을 때까지 해야 하는 공부다‘새삼 느껴지네요! 사실 페미니즘은 우리의 삶에 모두 연결되어 있지요^^.

cyrus 2018-04-14 13:55   좋아요 0 | URL
‘책에 있는 페미니즘‘을 이해하는 일도 좋지만, 더 중요한 건 ‘세상에 있는 페미니즘‘을 이해하는 일입니다. 책 속의 세상과 우리가 사는 세상은 완전히 똑같지 않아요. 요즘 페미니즘 독서 모임을 하면서 다양한 경험을 해본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페미니즘‘을 이해하고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제각각 다르다는 걸 느낍니다. 또 사람들(페미니스트)을 만나 보면 책에 보기 힘든 페미니즘의 실체를 알게 됩니다.

AgalmA 2018-04-14 11:0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는 부정적으로만 보지 않습니다.
굿즈애호가로서;; 그런 상품들이 관심을 끄는데 조금이라도 일조한다고 생각해요. 어떤 운동이든 가벼움, 생각보다 행동이 앞서는 섣부름과 무모함 같은 반대급부는 있기 마련이지요... 자기 생각과 목소리를 크게 내는데 자신 없는 사람들은 그런 대체, 상징물로라도 표현하고 싶어 하는데서 출발이라고 생각해요. 누구나 다 명철한 지식과 생각으로 말하고 행동하기 어렵죠. 그런 요구는 자칫 엘리트주의식 운동이 될 수도 있고요. 오히려 이렇게 쉽게 오픈하는 환경이 조정하기 더 쉽다고 생각해요. 암묵적이고 경직된 분위기에서는 변화가 더 어렵고, 깊이와 행동이 같이 부응하기도 쉽지 않으니^^;

자본 시장이 페미니즘을 이용하고 있는 건 저도 인상 찌푸려지지만 양적인 저변이 확대되어야 질적 변화도 기대해볼만 한 거 아니겠습니까. 한국의 페미니즘 운동도 그러한 움직임에서 이만큼 성장한 거라고도 생각하고요.

cyrus 2018-04-14 14:02   좋아요 1 | URL
네, 맞습니다. 좋은 목적으로 페미니즘을 널리 알리는 일이라면 굿즈 제작하는 것에 찬성합니다. 이제 페미니스트는 페미니즘을 돈벌이 수단으로 이용하는 사람들, 즉 겉과 속이 다른 ‘자칭 페미니스트들‘의 실체를 알아야 하고 비판해야 합니다. 그런 사람들 때문에 페미니즘이 왜곡될 수 있거든요. 제가 페미니즘 독서 모임 멤버들과 함께 강연 홍보를 한 적이 있어요. 어떤 사람에게 페미니즘을 알고 있느냐고 물어봤는데, 그 사람은 ˝유아인이 말한 페미니즘이 아닌가요?˝라고 말했어요. 저는 이런 반응을 긍정적으로 생각하지 않아요. 제가 보기에 유아인은 페미니스트라고 말하기 어렵고, ‘연예인이 말한 페미니즘‘은 반짝 반응으로 그칠 수 있어요.

페크pek0501 2018-04-15 00: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끝문장 - ˝누구나 쉽게 받아들일 수 있을 정도로 재미있고 가벼운 페미니즘은 없다.˝
진실에 담겨 있는 아픔을 함께 공유함으로써 공부해 나간다면 깊은 공부가 될 것 같아요.

말로만 페미니즘을 강조하고 행동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많아서 문제입니다.

cyrus 2018-04-15 11:38   좋아요 0 | URL
제가 행동을 안 해서 페미니즘 독서모임에 활동하게 됐어요. 대구에도 각종 페미니즘 관련 강연이나 집회가 펼쳐져요. 강연이나 집회에 가면 페미니즘을 피부로 느낄 수 있습니다. 확실히 책에서 느끼는 페미니즘과 비교하면 느낌이 다릅니다.

꽃다지 2018-04-22 12:4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20대 딸이 페미에 빠져 있는데, 이론적 바탕없이 SNS 상에서 들은 이야기가 전부인 양 말끝마다 토를 달고 지적질입니다. 집에 있는 또하문이나 이프 등 책들을 좀 읽어보라고 해도 들은 척도 안 합니다. 자기가 아는 게 진리라는 듯, 하지만 생각과 행동은 너무 이기적이고 공감 능력 없고,한숨 나오게 합니다. 개인주의를 넘어 이기적으로 자기에게 유리한 것만 받아들이고 나머지는 귀막고 입닫고 하는 모습이 너무나 걱정스럽습니다. 페미니즘이 하나의 유행이 아니라 삶의 자세이고 더 나아가 우리 사회의 약자와 소수자와의 연대의식으로 발전하길 바랍니다.

cyrus 2018-04-25 14:12   좋아요 0 | URL
답글이 늦어서 죄송합니다. 이제야 바우솔님의 댓글을 확인했어요. 90년대부터 여성 운동에 헌신한 여성주의 운동가의 페미즘과 소위 ‘영 페미니스트’라고 부르는 젊은 세대의 페미니즘은 차이점이 있습니다. 세대 차이가 있듯이 페미니스트 사이에서도 세대 차이가 느껴집니다. 그래서 특정 여성 문제를 바라보는 구세대 페미니스트와 신세대 페미니스트의 시선과 입장이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세대 차이의 간극을 조금씩 좁혀나가는 것도 페미니스트들이 함께 고민해야 할 문제입니다.
 

 

 

 

이틀 전 월요일에 카페 스몰토크에서 상영된 <위로 공단> 공식 후기입니다. 후기 작성자는 바로 접니다. 상영회에 오신 분들이 많지 않아서 그분들 각각 말씀했던 내용을 기록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쓰다 보니 내용이 많군요. 또 후기 대부분이 영화를 비판한 내용입니다. 영화를 먼저 본 후에 이 후기를 참고하시기를 권합니다.

 

멤버들의 의견에 반박하고 싶으면 댓글로 남겨주셔도 좋습니다. 하지만 멤버들은 이 조용한 블로그에 찾아오지 않아요. 그렇다고 블로그 주인장인 제가 그분들의 의견을 대신해서 말할 수 없어요.

 

정말로 이 후기 속 내용에 대해서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매주 월요일 저녁에 레드스타킹 독서 모임이 진행되는 카페 스몰토크를 방문해주십시오. 해치지 않아요!

 

 

 

 

 

 

 

 

새로운 한주가 시작되면 불청객처럼 ‘월요병’이 찾아옵니다. 월요일만 되면 무기력하고 피곤해집니다. 레드스타킹도 월요병의 습격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몸이 아파서 월요일 모임에 오지 못한 분들이 많았어요. 어제는 모임에 자주 오시는 분들과 함께 임흥순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위로 공단>을 봤습니다. 영화 보기 전에 멤버들은 ‘꽃보다 페미니즘’ 강연 준비 및 홍보 방식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었어요.

 

 < 위로 공단 >은 저마다의 꿈을 위해 열심히 묵묵히 일해 온 여성 노동자들의 삶을 조명한 다큐멘터리 영화입니다. 이 영화는 한국 산업화의 빛과 그림자가 집약된 1970년대 공장을 배경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기 시작합니다.

 

 

 

 

 

 

 

 

 

 

 

 

 

 

 

 

 

* 김진숙 《소금꽃나무》 (후마니타스, 2007)

 

 

 

영화는 평화시장 여공, 1979년 YH무역 사건, 1985년 구로공단 동맹 파업, 2005년 기륭전사 사태 등 우리가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될 노동 운동의 역사를 언급합니다. 이 과정에서 실제 노동 현장에서 악전고투하면서 싸웠던 수십여 명의 여성 노동자들의 인터뷰 장면이 나옵니다. 영화 중반부에 2011년 한진중공업 크레인에서 309일간 고공농성을 했던 김진숙 님의 인터뷰 장면도 나옵니다.

 

 

 

 

 

 

 

 

 

 

 

 

 

 

 

 

 

 

 

 

 

 

 

 

 

 

 

 

 

 

 

 

 

* [절판] 전순옥 《끝나지 않은 시다의 노래》 (한겨레출판, 2004)

* 김원 《여공 1970, 그녀들의 反역사》 (이매진, 2006)

* 조영래 《전태일 평전》 (아름다운전태일, 2009)

* 신순애 《열세살 여공의 삶》 (한겨레출판, 2014)

 

 

 

 

여성 노동자들은 한국 노동운동 역사의 큰 축이었습니다. <위로 공단>은 노동에 관한 영화로 볼 수 있어요. 하지만 그동안 ‘노동’은 남성 노동자 중심의 일터에 어울릴만한 단어로 쓰였어요. 하지만 일터에는 여성 노동자들도 있었습니다.

 

 

 

 

 

 

 

평화시장 방직공장에서 일하는 어린 여공들은 ‘공순이’라고 불렸습니다. 중학교도 제대로 마치지 못하고 상경한 어린 여공들은 대부분 ‘시다(수습생)’로 취직했습니다. 사실 ‘공순이’는 좋은 의미의 말은 아닙니다. 그녀들은 ‘공순이’ 소리를 들으면서 아침부터 밤 10시까지 일을 했습니다. 여성 노동자들은 한국의 경제발전을 이루는 데 중심축이 돼왔지만, 그로 인해 억압과 희생을 강요당하기도 했습니다. 1970년대 중반 구로단지 근로자의 60%가 여성 근로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은 대부분 오빠나 남동생의 학비를 벌기 위해 가난을 피해 전국 각지에서 상경한 15~16세 전후의 미혼여성들이었습니다. <위로 공단>은 묵묵히 일해 온 여성 노동자들의 눈물과 땀방울을 보여줍니다. 따라서 정확히 말하자면, <위로 공단>은 여성 노동자들을 위한 영화로 볼 수 있어요.

 

여성 노동자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라 너무 기대를 많이 한 탓일까요? <위로 공단>은 여성 노동자 이야기를 생생한 인터뷰와 감각적인 영상으로 풀어낸 뛰어난 작품인데도 불구하고, ‘여성 영화’라는 기대에 크게 미치지 못한 한계가 보였습니다. 레드스타킹은 <위로 공단>을 비판적으로 분석하는 방향으로 토론을 시작했습니다. 소재는 좋았으나 전체적으로 영화가 실망스럽다는 반응이 많았습니다.

 

이 영화 중간중간마다 얼굴에 하얀 천 또는 눈가리개를 쓴 두 명의 여성(여공 또는 자매)이 등장합니다. 그녀들은 말없이 녹색이 우거진 숲을 걷거나 황량한 장소(공장 옥상, 여공들이 묵었던 오래된 여인숙) 한가운데서 우두커니 서 있기도 합니다. 이 두 명의 여성은 꿈과 행복에 눈이 멀어 일만 했던 여성 노동자들을 상징할 수 있습니다. 감독은 여성 노동자의 삶을 미술적 장치들과 결합하여 영화의 완성도를 높였습니다. 관객은 이 영화 속에 삽입된 감독의 의도적인 미술적 장치를 해석합니다. 하지만 환상(또는 공포감)을 불러일으키는 영화 속 미술적 장치에 거부감을 느낀 분들이 많았습니다. 진○ 님은 영화가 시작되는 장면이 무섭게 느껴졌다고 말했습니다. 마치 한 편의 ‘공포영화’를 본 듯한 느낌이었다는군요. 히피 님은 미술적 연출에 치중한 감독의 연출 방식을 비판했습니다. 그리고 예술적 감수성이 엿보인 연출 방식에서 ‘감독의 자아도취’가 느껴졌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얼굴에 하얀 천이 덮인 두 여성의 모습을 보고, 감독이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에 영감을 받았다고 생각했습니다. 영화 속 여성의 모습과 마그리트의 그림을 비교해보시죠.

 

상○ 님은 노동운동 관련 사건들을 간략히 언급한 영화의 연출 방식이 아쉽다고 말했습니다. 기○ 님은 노동 운동가, 대중 모두가 불만족을 느낄 수 있는 영화라고 평했습니다. 관객이 한국노동운동사에 관한 배경지식 없이 영화를 본다면 영화를 이해하기 어려울 수도 있겠습니다. 히피 님은 이 영화가 여성노동자의 수난을 훑어 내리는 데 급급했다고 비판했습니다. 그리고 영화가 ‘여성 노동’이 어떤 구조적인 문제에 놓여 있는지 어떤 권력과 위계 관계 속에서 차별받고 있는지 짚어내는 것을 교묘하게 피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영화의 보여주기식 연출에서 감독이 생각하는 위로가 무엇인지 의문이 들었다고 말했습니다.

 

영화에 세상을 떠난 노동자들을 추모하기 위해 굿(무속의 종교 제의)을 치루는 장면이 나옵니다. 은○ 님은 이 장면도 비판했습니다. 아마도 감독은 무당 굿 장면을 통해 노동자들의 죽음을 애도하는 메시지를 보여주려고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은○ 님은 노동자들의 ‘한’을 풀어주는 무당 굿이 ‘한국적인 정서’에 잘 들어맞는 ‘한국적인 위로’에 그쳐서 아쉽다고 말했습니다.

 

혜○ 님은 여성 노동자들의 인터뷰가 여성 노동자들의 감정 표출에 치중되는 바람에 여성 노동자들의 투쟁 의식이 눈물에 의해 희석된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은○ 님은 이 영화에서 진취적이고 주도적으로 보여야 할 여성 노동자들이 ‘패배와 좌절’을 겪은 것만 보여준 것에 불만을 드러냈습니다. 또, 이 영화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두 명의 여성’이 ‘치마를 입은 여성’으로 묘사된 장면을 지적했습니다. 이는 남성의 시선에 의해 ‘박제화된 여성성’입니다. 젠더 인식이 부족한 남성 감독의 한계를 확인할 수 있는 문제의 장면이었습니다. ○정 님은 영화 엔딩 자막에 공개된 감독의 헌사를 비판했습니다.

 

 

“40년간 봉제공장에서 일한 어머니, 백화점 의류매장과 냉동식품 코너 판매원으로 일한 여동생에게 이 영화를 바친다.”

 

 

○정 님은 여성 노동자를 ‘어머니’, ‘여동생’으로 일반화한 감독의 표현이 거슬렸다고 말했습니다. 파업 시위 도중에 큰 부상을 입어 세상을 떠났거나 직업병으로 일찍 세상을 떠난 여성 노동자들이 있습니다. 이분들 모두 결혼을 했을까요? 개인의 건강권과 생명권에 달린 파업에 동참한 여성 노동자를 여성의 주체적인 목소리와 삶 자체를 희미하게 만드는 ‘어머니’와 ‘여동생’으로 한정해서 표현한 헌사에 젠더 고정관념(gender stereotypes)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레드스타킹은 여성 노동권 문제를 환기할 수 있는 여성 영화가 많이 만들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위로 공단>처럼 이런 식으로 영화를 만들면 안 됩니다! 여성 노동권 문제를 제대로 건드린 여성 영화를 만들려고 했다면 남녀 노동자 간의 경제적 불평등을 일으킨 구조적 문제를 보여줘야 했습니다. <위로 공단>은 여성 노동자들의 눈물 섞인 하소연을 보여주는 데 치중했습니다. 스크린을 구경한 관객들은 여성 노동자들이 처한 암울한 현실에 일시적으로 공감하고, ‘위로’를 합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잊히죠. 여성 노동권 보장은 (남성 중심) 노동 운동가나 좌파 정치 운동가들만이 다룰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페미니스트들이 여성 노동운동사와 여성 노동자 인권 문제에 관심을 가진다면 여성 노동에 대한 기존의 (남성 중심) 시각을 개선할 수 있는 중요한 전환점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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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애니비평 2018-04-11 12: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위로공단과 소금꽃나무를 보면서 참 마음이 아팠습니다.

cyrus 2018-04-12 12:22   좋아요 0 | URL
<위로공단>에 나온 김진숙 님 인터뷰가 슬펐습니다.

목나무 2018-04-12 09: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영화를 개봉했을때 감독과의 토크도 함께 했었는데요. 저역시 뭔가 찜찜했던 터라 감독의 의도가 궁금했었던 기억이 나네요. 근데 그 자리에서는 제대로 된 답을 듣지 못했던 기억도. . . ㅡ.ㅡ

cyrus 2018-04-12 12:23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이 영화가 뚜렷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의도로 만들어졌으면 작품성이 더 좋았을 것입니다. ^^;;
 
우리의 의지에 반하여 - 남성, 여성 그리고 강간의 역사
수전 브라운밀러 지음, 박소영 옮김 / 오월의봄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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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남자와 여자가 있다. 남자는 평소 사랑하는 여자와 데이트를 하던 중 진한 스킨십을 시도한다. 그는 너무 흥분한 나머지 강제로 삽입 섹스를 한다. 남녀 간의 삽입 성교는 상호 동의하에 이루어지지만, 남성이 강제로 여성의 몸속으로 들어왔다면 ‘데이트 강간’이다. 어떤 남성들은 ‘데이트 강간’이 페미니스트들이 남성을 혐오하기 위해 만든 것이라고 말하며 과민반응을 보이기도 한다. 이 용어는 데이트 중 생기는 강간의 개념으로 부부강간만큼이나 생소하게 느껴지게 된다. 하지만 단지 낯설다고 느끼며 외면하기엔 그 심각성이 만만치 않다. 상대방에 대한 믿음이 깨지는 것은 물론이고 자칫 이런 상황을 비관하면서도 벗어나지 못한 채 지속적인 피해자로 남게 되는 여성들이 적지 않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 강간 피해자는 죄인 취급을 받는다. 가해자에게 상처를 입은 강간 피해자는 두 번 세 번 운다. 검찰과 경찰 수사 과정에서 또 상처를 입고 재판 과정에서 또다시 모욕을 당한다. 수사와 재판 과정에서 자존심은 짓밟히고 인권은 파괴당한다. 심지어 가해자에게 협박까지 당한다. 강간 피해 여성은 보호받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이 계속 지속한다면 ‘강간 문화’라는 위험하고도 왜곡된 편견이 횡행하는 세상이 된다.

 

수잔 브라운밀러《우리의 의지에 반하여》(오월의봄, 2018)는 강간 피해 여성들의 참혹한 실상을 증언하기만 하는 책이 아니다. 이 책은 강간이 ‘성적 본능’ 때문에 발생하는 ‘우발적’ 사건이 아니라, 폭력성’과 ‘권력’에 의해 매개된 가해자의 고의적인 행동임을 입증한 책이다. ‘남성 연대(male bonding)는 물리적 폭력과 가부장제 이데올로기를 동시에 실행하는 장이다. 여성을 강간하고 학대함으로써 남성은 ‘남성성’을 확인하고, 가부장적 권위를 확고부동한 것으로 만든다. 그 폭력 행위가 여성을 유린하는 행위였던 만큼, 남성들은 그 행위를 실행하여 우월성을 가진다.

 

진화생물학인간의 행동을 진화의 관점에서 생각하는 학문이다. 진화생물학에서 특히 논쟁이 격렬한 주제는 남녀관계 또는 섹스다. 대부분 진화생물학자는 “남성의 강간 본능은 진화의 산물이다”, “남성이 여성을 겁탈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행동이다”라고 주장한다. 프로이트와 그의 정신분석학을 이어받은 심리학자들은 강간 피해 여성의 심리상태를 진지하게 연구하지 않았다. 그들의 관심사는 강간범이다. 프로이트주의자들은 강간범을 ‘성적 사이코패스’로 규정했고, 강간범이 심리치료를 받으면 과도한 성적 욕구가 제거된다고 믿었다. 마르크스와 남성 사회주의자들은 여성을 억압하는 사회구조를 지적하고 여성해방을 위한 전략을 모색했으나 여성을 불리하게 만드는 강간 문화를 문제 삼지 않았다.

 

《우리의 의지에 반하여》는 강간과 섹스를 구분하지 못하고 성폭력을 정당화하는 강간 문화를 폭로한다. 강간은 ‘누구’의 문제가 아니라 ‘권력과 폭력’의 문제임을 밝히는 것이 바로 이 책의 목표이다. 저자는 성경(2장), 전시 강간(3장), 19세기 미국에서 일어난 백인 남성의 흑인 여성 · 인디언 여성 강간(4장, 5장, 7장), 동성 간의 감옥 강간(8장) 등 생생한 사례들을 해석하면서 이 문제들이 여성에 대한 폭력이 권력의 문제이며 국가 · 민족 · 인종 등과 결합된 예상보다 훨씬 복잡한 난제임을 드러낸다. 각종 강간 사건의 진행과정을 통해 가해자의 권위적 위치에 억눌려 피해와 비난을 감수하는 피해 여성들의 현실을 보여준다.

 

1970년대 미국에서 강간 반대 운동이 확산하기 전까지 강간은 당연한 일상 문화(!)이거나, ‘남녀상열지사’로 미화되었다. 성경에서 묘사한 강간은 피해 여성을 소유한 가족, 국가에 대한 공격으로서, 남성 가부장의 재산권 침해를 의미했다. 여성의 몸이 남성의 소유라는 인식 때문에 강간은 범죄로 인식되기 어려운 것이다. 강간은 대개 가해자와 피해자 두 사람만이 있을 때 발생하는 사건의 특수성(강간 사건의 증거는 대부분 형태가 없다)과 재판부의 남성(가해자) 중심적인 태도로 인해 강간 사건을 법에 호소하는 경우 승소율이 매우 낮다. 경찰과 법원은 강간 피해 여성을 ‘방탕한 자’로 간주하여 이들을 의심하고 추궁한다. 심지어 피해 여성의 취약점을 노려 강간을 시도한 경찰들도 있다. 경찰은 ‘법의 권위를 대행하도록 사회가 인정한 직업’이다. 그런데 인권의식이 낮은 경찰은 가해자를 엄벌하기는커녕 피해자에게 진술을 강요하고 수치심을 들게 하는 질문을 한다. 이 과정에서 피해자들을 절망에 빠뜨리는 ‘2차 가해’가 벌어진다.

 

《우리의 의지에 반하여》가 나온 지 삼십여 년이나 지났으나 강간 범죄는 제대로 처벌되지 않고 피해자들은 ‘가해자’로 몰린다. 최근 미투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면서 우리 사회에 남아있는 강간 문화에 대해 질타하는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다. 그런데도 페미니스트들이 지지하는 미투 운동을 깎아내리는 남성들이 있다. 그들이 페미니스트와 미투 운동에 예민하고 유난스럽게 구는 이유는 다양할 것이다. 따라서 그들의 입장을 단순히 페미니즘에 반기를 드는 일탈 문제로만 접근할 것이 아니라 그들을 그렇게 만든 사회구조도 살펴봐야 한다. 한국은 강간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이 사실을 알리겠다’고 협박할 수 있는 아주 부조리한 사회 구조가 형성된 곳이다. 가해자가 피해자를 협박하거나 고소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지금도 일어나고 있다. 이 부조리리한 상황이 발생하는 이유는 성폭력 피해자를 모욕하는 강간 문화와 왜곡된 남성 우월주의 때문이다. 가해자의 죄의식을 무뎌지게 하는 이 몰상식한 강간 문화는 ‘성폭력 피해자에게 아무런 책임이 없다’는 아주 기초적인 상식이 받아들여지지 않는 한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의지에 반하여》는 1975년에 나온 책이다. 그렇다 보니 시대적으로 맞지 않거나 잘못 알려진 내용이 여럿 등장한다. 저자는 1장에서 ‘야생 상태에서 강간하는 동물’이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우리의 의지에 반하여》가 출간된 이후부터 동물도 강간한다는 사실이 밝혀졌고, 이에 비판받은 저자는 서문에 진화생물학을 비판하는 내용을 추가했다. 저자는 아우구스트 베벨《여성론》(까치, 1990)을 참고하면서 중세 시대의 초야권(신부의 결혼 첫날밤을 소유하는 영주의 권리)을 언급한다. 그러면서 저자는 초야권은 ‘일종의 강간’이며 유럽 일부 지역에서는 비정기적으로 초야권이 이루어졌다고 주장한다. 그동안 초야권은 ‘중세 유럽의 악습’으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지금은 초야권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반박 입장에 더 힘이 실리고 있다.

 

책 304쪽에 ‘방관자 효과’를 설명할 때 가장 많이 언급되는 ‘키티 제노비스 사건’ 이야기가 나온다. ‘38명의 사람’이 끔찍한 사건을 목격하고도 아무도 신고를 하지 않았다고 알려졌다. 하지만 사건이 벌어진 50년 후, 이 사건이 모두 ‘언론의 왜곡 보도’로 조작됐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실제로 제노비스가 살해당하던 당시의 목격자 수는 6명이었으며 그중 2명이 신고를 했다.

 

책 306쪽에 잠깐 언급된 ‘로젠버그 사건’에 대한 역자의 설명이 빈약하다. 1953년 미국의 로젠버그 부부는 소련에 미국의 원자폭탄 제조관련 비밀을 넘긴 혐의로 체포되었다. 부당한 재판으로 부부는 사형선고를 받았고 전기의자에 앉아 숨을 거두었다. 아인슈타인, 사르트르 등 진보적인 지식인들과 교황까지 나서 구명운동을 벌였으나 부부의 정해진 운명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이게 지금까지 그렇게 알고 있었던 로젠버그 사건에 대한 설명이다. 역자는 주석에 ‘죄를 입증하는 명확한 증거 없이 부부는 간첩죄로 사형당했다’라고 썼다. 후일 전직 KGB 요원의 증언에 따르면 남편은 산업정보를 제공한 간첩이었음이 확인되었다. 하지만 그가 넘긴 정보가 원자폭탄을 만들 만큼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아내는 이 사건과 전혀 관련이 없었다. 2016년에 로젠버그 부부의 자녀들은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에게 모친이 무죄임을 증명해달라고 청원하는 서한을 전달했다.

 

저자는 동성애자들이 동성애를 ‘마조히즘’으로 연관시키는 것에 반대하는 입장을 드러낸다(406쪽). 그녀는 동성애자들이 강조하는 ‘마조히즘’이 동성 간 강간 문제의 본질을 회피할 수 있다고 봤다.

 

 

마조히즘적 요소 자체가 문제라는 것이 아니라, 모든 남성 동성애자들은 강제로 당하기를 원한다는 식의 믿음이 그렇듯, 경우를 가리지 않고 마조히즘을 가정한다는 것이 문제이다. (406쪽)

 

 

‘모든’ 남성 동성애자들이 강제적 성행위를 선호한다고 볼 수 없다. 저자의 주장을 곧이곧대로 해석하면 동성애자는 ‘상대방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일방적인 성행위를 강요하는 성적 취향을 가진 사람’이다. 그렇게 동성애자를 바라보는 인식은 반동성애를 주장하는 일부 근본주의적 기독교의 입장과 유사하다.

 

282쪽에 오식이 있다. “범행 시간대는 보통 낮보다 밤히 선호된다.” ‘밤히’는 ‘밤이’의 오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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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4-10 17: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8-04-11 10:05   좋아요 1 | URL
네, 성폭력은 피해자의 몸뿐만 아니라 피해자의 삶, 그리고 피해자 가족들의 삶까지 송두리째 파괴하는 잔인한 범죄입니다.

서니데이 2018-04-10 17: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키티 제노비스 사건‘은 많이 알려진 내용이어서 간략하게는 알고 있지만, 그것이 언론의 왜곡보도에 의해 실제와 다르게 잘못 알려졌다는 것은 잘 몰랐습니다. 리뷰를 읽고 검색을 통해 찾아보니 그러한 새로운 사실이 알려진 것은 최근의 일이네요.
cyrus님, 리뷰 잘 읽었습니다.
편안한 저녁시간 보내세요.^^

cyrus 2018-04-11 10:07   좋아요 1 | URL
저도 최근에 ‘제노비스 사건의 진실’을 알았어요. 로젠버그 부부 사건도 그렇고요. 두 사건 모두 책에서 본 내용입니다. 독자가 책에 적힌 내용을 의심하지 않으면 알려지지 않은 진실을 알 수 없게 됩니다. ^^

붕붕툐툐 2018-04-10 20: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cyrus님의 리뷰는 정성과 지식이 넘치네요. 존경스럽습니다.

cyrus 2018-04-11 10:10   좋아요 0 | URL
제 글에 쓸데없이 넘치는 게 너무 많아서 글 내용이 길어져요. 그래서 글을 읽기가 힘들어요. 솔직히 저도 제가 쓴 글을 읽지 않아요.. ㅎㅎㅎ

이하라 2018-04-11 09: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강간에 문화라는 단어가 더해지니 말도 아니게 섬찟해지는군요. 게다가 역사가 증거하기까지 하니... 데이트강간이라는 것도 인식을 못해왔었는데 심각한 문제임을 다시 생각하게 됐습니다.

cyrus 2018-04-11 10:11   좋아요 0 | URL
<우리의 의지에 반하여>에 각종 강간 피해 사례들이 많이 나옵니다. 차마 읽기 힘든 내용들도 있습니다. 책을 보는 내내 마음이 무거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