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10월의 마지막 날이 다가오면 10~20대는 핼러윈(Halloween)을 생각할 것이고 중년층은 이용의 잊혀진 계절을 듣고 싶어 할 것이다. 켈트인(Celts)의 축제에서 유래한 핼러윈은 이제 우리나라에서도 많은 사람이 즐기는 축제가 되었다. 그러나 핼러윈이 111 만성절(All Saints’ Day) 전날에 하는 축제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만성절은 기독교의 모든 성인을 기념하는 축일이다. 그래서 가톨릭에서는 만성절을 모든 성인의 축일이라고 부른다. 기독교인이 아닌 사람들도 크리스마스(Christmas)가 무슨 날인지 잘 안다. 크리스마스는 예수의 탄생을 기념하는 날이다. 크리스마스 전날 밤은 크리스마스이브(Christmas Eve)라고 한다. ‘Halloween’은 성인(聖人)을 뜻하는 앵글로색슨어 ‘Hallow’와 전야(前夜)를 뜻하는 ‘Eve’와 합쳐져서 만들어진 단어다. 그래서 만성절을 ‘All Hallows’ Day’ 또는 ‘Hallowmas’라고도 한다. 만성절의 원래 날짜는 513일이었다. 8세기에 활동한 그레고리우스 3(Gregorius )교황이 만성절의 날짜를 111일로 변경했다.

 

고대의 핼러윈은 농민들의 축제였다. 농업과 목축업을 하던 켈트인은 1031일을 한 해의 마지막 날로 봤고, 그날에 죽은 자의 영혼이 생전에 살던 집으로 돌아온다고 믿었다. 그래서 켈트인은 집으로 돌아오는 조상의 영혼을 맞이하기 위해 제사를 지내고, 불청객인 악마를 쫓아내기 위해 가면을 쓰거나 불을 피웠다. 교회는 켈트인의 토속신앙과 축제를 이교의 풍속으로 규정했고, 이를 제지하기 위해 만성절을 지정했다. 그리고 그다음 날인 112일을 만령절(All Souls’ Day)로 지정했다. 이날에는 죽은 자의 영혼을 위해 미사를 거행한다.

    

 

 

 

 

 

 

 

 

 

 

 

 

 

 

 

* [e-Book] 이디스 네스빗 등신대의 대리석상(올푸리, 2019)

* [e-Book] 이디스 네스빗 살아있는 조각상(이북코리아, 2017)

    

 

 

영국의 작가 이디스 네스빗(Edith Nesbit)의 단편소설 등신대의 대리석상(Man-Size in Marble, 1893)은 만성절에 일어난 기이하고도 무서운 현상을 경험한 남자의 이야기다. 남자와 그의 부인의 보금자리가 있는 한적한 마을에 무서운 소문이 떠돈다. 그 소문에 따르면 만성절 전날이면 교회에 있는 대리석상이 움직인다. 살아있는 대리석상을 마주치면 끔찍한 일이 일어난다고 한다. 대리석상은 과거 마을에 살았던 악한들의 모습을 따서 만들어진 것이다. 대리석상에 악마나 다름없는 그들의 영혼이 들어있고, 핼러윈에 그들은 깨어나 자신들이 살던 집으로 간다. 하필 재수 없게도 악한들이 살았던 집은 남자와 부인이 사는 곳이다. 그런데 대리석상은 핼러윈이 아닌 만성절에 움직이기 시작한다. 성인에 대항하는 악마답게 대리석상은 모든 성인의 축일이라는 사실을 무시하고 악행을 저지른다.

    

 

 

 

 

 

 

 

 

 

 

 

 

 

 

 

* [절판] 이디스 워튼 거울(생각의나무, 2010)

* [절판] 이디스 워튼 거울(생각의나무, 2008)

* [절판] 해럴드 블룸 엮음 겨울 사자(생각의나무, 2007)

 

    

 

등신대의 대리석상이 만성절에 일어난 초자연적인 사건을 묘사한 이야기라면, 미국의 작가 이디스 워튼(Edith Wharton)의 단편소설 모든 영혼의 날(All Souls’, 1937)만령절에 일어난 초자연적인 사건에 관한 이야기. 워튼의 공포소설 여덟 편을 선별한 거울(생각의나무)에 포함된 작품이다. 이 소설은 만령제라는 제목으로 번역되기도 했다. 만령제는 미국의 문학평론가 해럴드 블룸(Harold Bloom)이 직접 선별하면서 엮은 시와 단편 모음집 중 하나인 겨울 사자(생각의나무)에 수록되어 있다.

 

모든 영혼의 날의 주인공은 여성이다. 새러 클레이번화이트게이트라는 저택에 거주하는 귀부인이다. 만령절에 새러는 산책하다가 낯선 여인을 만난다. 새러는 처음 보는 그 여인에게 화이트게이트에 가시는 거예요?’라고 물어보면서 말을 건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여인은 그렇다라고 짧게 대답하면서 지나간다. 그 여인을 만난 지 몇 분 후에 새러는 길을 걷다가 미끄러져 넘어지는 바람에 발목을 삔다. 이로 인해 새러는 며칠 동안 움직이지 못한 채 침대에 누워 지내야 하는 신세가 된다. 화이트게이트에 여러 명의 하인과 하녀들이 살고 있어서 새러는 큰 불편함 없이 지낸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평온한 화이트게이트는 조용한 공포의 무대가 된다. 화이트게이트에 모든 하인과 하녀는 감쪽같이 사라지고, 집에 있는 난방장치와 전기제품의 작동이 멈춘다. 사람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음산한 저택이 된 화이트게이트. 새러는 그곳에 고립되고 만다. 어둠과 침묵에 지배당한 저택 안에 홀로 남은 새러는 공포를 느낀다. 그 사건을 겪은 지 일 년이 지난 후에 새러는 미지의 여인의 정체가 만령절에 깨어난 마녀이며 그녀를 만난 뒤에 화이트게이트에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고 확신한다.

    

 

 

 

 

 

 

 

 

 

 

 

 

 

 

 

* 아서 코난 도일 J. 하버쿡 젭슨의 진술(북스피어, 2014)

 

    

 

모든 영혼의 날은 안락한 집이 한순간에 공포의 장소로 변해버리는 불가사의한 현상을 생생하게 묘사할 뿐만 아니라 그 현상에 압도당해 두려워하는 인간의 감정까지 잘 묘사한 이디스 워튼의 수작이다. 모든 영혼의 날배니싱(Vanishing)을 소재로 한 작품이다. 배니싱이란 특정 인물이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지는 현상을 뜻한다. 가장 유명한 배니싱은 19세기 중후반에 일어난 메리 셀러스트 호(Mary Celeste) 사건이다.

 

187211월에 화물선 메리 셀러스트는 알코올 원액을 싣고 미국 뉴욕에서 출항하여 이탈리아 제노바로 향한다. 그러나 도착 예정 시간이 지났는데도 배는 제노바에 도착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화물선이 폭풍을 만나 침몰했거나 해적을 만나 나포되었을 거로 추측했다. 메리 셀러스트 호가 출항한 지 한 달이 지난 뒤에 영국 상선은 북대서양 바다 한가운데를 지나는 배를 발견한다. 알고 보니 그 배가 메리 셀러스트 호였다. 그런데 배에 탔던 선장과 그의 가족, 그리고 모든 선원들은 실종되었다.  

 

호사가들은 메리 셀러스트 호에 탑승한 사람들이 사라진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여러 가지 가설들을 내놓았다. 1884년에 어느 익명의 작가가 메리 셀러스트 호 사건을 소재로 한 소설을 썼다. 소설 제목은 J. 허버쿡 젭슨의 진술(J. Habakuk Jephson’s Statement)이다. 이 소설은 진술서 형식으로 사건이 일어난 원인을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는데, 독자들은 이 이야기를 진짜라고 믿을 정도였다. 이 소설을 쓴 익명의 작가는 명탐정 셜록 홈스(Sherlock Holmes)를 만들어 낸 추리 작가 아서 코난 도일(Arthur Conan Doyle)이다.

 

모든 영혼의 날J. 허버쿡 젭슨의 진술은 배니싱을 소재로 한 공포소설이라는 공통점이 있지만, 또 하나의 공통점은 현대 독자들이 비판할 수 있는 명확한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두 작품에서 배니싱을 일으킨 존재는 외국인또는 흑인과 혼혈인의 모습이다. 모든 영혼의 날에서 새러는 낯선 여인이 외국인 같은 이상한 억양을 한다고 증언한다. J. 허버쿡 젭슨의 진술에는 흑인과 혼혈인을 부정적으로 보는 백인의 인종주의 정서가 반영되어 있다. 작품 속에 언급되는 가상의 진술서에 따르면 백인에게 오랫동안 학대받은 혼혈인이 사라진 배에 탑승한 백인들을 살해했으며 그 배에 탔던 흑인 선원은 공범이다. 당시 독자들이 소설에 나오는 허구적인 내용을 진짜라고 믿는 이유가 있다. 영국 백인들은 흑인’, ‘백인이 아닌 이방인을 배척하면서도 그들에 대한 불안감과 공포심을 가지고 있었다. 백인들의 내면 속에 자리잡고 있는 이방인에 대한 공포는 소설에서 악마 또는 괴물로 변형되어 나타난다. 이러한 작품의 한계는 모든 영혼의 날J. 허버쿡 젭슨의 진술만의 문제가 아니다. 20세기 이전에 나온 고전 공포소설뿐만 아니라 인종주의가 더욱 심했던 20세기 초중반에 나온 공포소설(가장 대표적인 문제의 작가가 하워드 필립스 러브크래프트(Howard Phillips Lovecraft). 그의 소설에는 인종차별적인 문장이 종종 나온다)에서도 심심찮게 나오는 부정적인 클리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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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20-03-02 2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할로윈을 전에는 만성절전야라고도 썼던 것 같은데 요즘은 만성절보다 할로윈이 더 유명해진듯 합니다. 만령절은 생소했는데 설명을 읽으니 매년 돌아오는 11월 첫 주 미사가 생각났어요.
cyrus님 잘 지내고 계신가요.
건강 조심하시고 편안하고 좋은 저녁시간 보내세요.

cyrus 2020-03-03 12:30   좋아요 1 | URL
안부 인사를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서니데이님. 저는 지금 외출을 하지 못할 뿐 잘 살고 있어요. 서니데이님도 건강하시고, 좋은 하루 보내세요. ^^

카스피 2020-03-03 2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만성절과 만녕절이라 cyrus님 덕분에 새로운것을 일게되었네요😙

cyrus 2020-03-04 14:57   좋아요 0 | URL
가끔 서양 문학 고전을 읽다가 기독교와 관련된 용어를 보게 돼요. 저는 무교라서 기독교 관련 용어의 의미를 몰라요. 그래서 용어의 의미를 알아보려고 인터넷에 검색을 합니다. ^^
 
[eBook] 등신대의 대리석상 빅토리안 호러 컬렉션 9
이디스 네즈빗 / 올푸리 / 2020년 1월
평점 :
판매중지


 

 

이디스 네스빗(Edith Nesbit)의 단편소설 등신대의 대리석상은 한 남자가 자신의 경험과 관련된 절망스러운 진실을 들려주면서 시작된다. 그러나 그는 사람들이 진실을 믿을 거라고 기대하지 않는다. 남자가 들려줄 진실은 그가 겪은 이성적으로 설명하기 힘든 초자연적인 사건이다.

 

그와 그의 아내 로라는 아주 싼 집을 운 좋게 구한다. 남자는 그림을 그리는 일을 하고, 로라는 글을 쓰는 일을 한다. 집안일은 부부가 고용한 가정부 도먼 부인이 한다. 그녀는 옛날이야기를 하는 것을 좋아한다. 부부는 도먼 부인이 들려준 옛날이야기를 잡지에 기고해 짭짤한 수입을 챙긴다.

 

그러던 어느 날 도먼 부인은 아픈 조카를 보살펴야 한다는 이유로 가정부 일을 그만두겠다고 밝힌다. 그녀는 1031일 핼러윈(Halloween) 전날에 이 집을 떠나겠다고 말한다. 사실 그녀가 이 집을 떠나는 진짜 이유는 부부의 집을 둘러싼 괴이한 소문 때문이다. 부부의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오래된 교회가 있다. 그 교회 안에 갑옷 입은 기사들의 모습을 한 대리석상이 있다. 도먼 부인이 들은 소문에 따르면 만성절(All Saints Day: 기독교의 모든 성인을 기념하는 축일) 전날, 즉 핼러윈에 기이한 현상이 일어난다. 밤이 되면 교회 안에 있는 대리석상이 살아 움직여 부부의 집으로 걸어간다고 한다. 대리석상의 인물은 옛날 마을에 악행을 저지른 재앙 같은 존재. 부부의 집은 그들이 살았던 집이었다. 부인은 밤에 움직이는 대리석상을 만나면 불길한 일이 생길 거라고 경고한다. 남자는 예민한 성격을 가진 로라를 위해서 대리석상 이야기를 로라에게 알려주지 않는다. 다행히 핼러윈에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다음 날에 남자는 도먼 부인이 알려준 소문을 두 눈으로 확인한다.

 

등신대의 대리석상의 이야기 구조를 보면 유령 들린 집이야기. 다만 이 단편소설에서 유령 들린 집이야기의 형식과 다른 점이 있다면 특정한 날이면 집에 유령이 나타난다는 사실이다. 마을의 약탈자들은 죽어서 교회에 안장되었는데(그들의 후손이 재물을 쓴 덕분에 조상들은 교회에 안장할 수 있었다) 대리석상에 그들의 악령이 깃들어 있다.

 

이 소설에서도 공포영화의 클리셰가 나온다. 공포영화의 주인공은 저렴한 가격의 집을 구한다는 점. 영화 속 주인공은 유령이 나오는 집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집값이 싸다는 이유만으로 그 집을 구매한다. 등신대의 대리석상의 부부도 그 집의 말도 안 되는 염가에 혹해서 구매한다. 그러나 남자는 도먼 부인이 알려주기 전까지는 그 집과 관련된 무서운 소문을 모르고 있었다.

 

등신대의 대리석상20세기 이전에 나온 고전 공포소설들과 마찬가지로 초자연적인 현상을 무시하다가 큰코다치는 오만한 이성(=남성)을 보여준다. 남자는 도먼 부인이 들려준 소문을 터무니없는 이야기로 여긴다. 그리고 그는 지나치게 신경이 예민한 로라를 비이성적이라고 언급하기도 한다. 그가 무서운 경험을 겪게 된 것은 인과응보로 볼 수 있다. 소설의 결말과 조금 관련된 거라서 이 리뷰에 만성절에 일어난 일을 자세히 언급하지 않았지만, 그날 그는 아주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른다. 그 실수만 아니었으면 끔찍하면서도 불가사의하고, 절망스러운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다. 알고 보면 그는 그림을 잘 그릴 뿐 그렇게 이성적으로 뛰어난 인물이 아니다.

 

 

 

      

 

Trivia

 

이 전자책에 정말 재미있는 주석 하나가 있다. 주석 내용은 이렇다.

 

 

 8. 루빈스타인: 유럽에서 활약한 러시아의 피아니스트 · 작곡가 · 지휘자 안톤 루빈스타인(1824~1894). 많은 피아노 협주곡 · 솔로 피아노 · 교향곡 등을 작곡했는데 가장 유명한 작품은 오페라 마왕(The Demon)이다. 독자께서는 이 마왕의 줄거리를 알고 계시는가?

 

 

정말로 이게 주석에 있는 내용이다. 독자에게 갑자기 툭 질문하는(갑툭질) 주석 내용은 처음 본다. 오페라 마왕의 줄거리가 뭔지 궁금해서 알아봤는데 러시아의 시인 레르몬토프(Lermontov)가 쓴 장시 악마가 원작이라고 한다. 사실 루빈스타인의 오페라는 마왕보다는 악마라는 제목으로 더 알려져 있다. 사족(TMI)을 붙이자면, 클래식 음악 중에서 가장 유명한 마왕이라는 곡이 있다. 그 곡은 슈베르트(Schubert)가 괴테(Goethe)의 시를 바탕으로 만든 가곡이다.

 

, 나는 역으로 이 주석을 쓴 번역자에게 질문하고 싶다. ‘솔로 피아노는 무슨 장르인가()? ‘피아노 솔로 곡이라고 써야 맞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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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gela 2020-03-01 23: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스토리로 영화만들면 재미있을것 같아요~

cyrus 2020-03-01 23:50   좋아요 0 | URL
네. 단편영화나 공포를 주제로 한 단막극로 각색해도 전혀 어색하지 않은 이야기에요. ^^
 
[eBook] 헐리벌리 저택의 신들린 오르간 연주자 빅토리안 호러 컬렉션 7
로사 멀홀랜드 / 올푸리 / 2020년 1월
평점 :
판매중지


 

 

1인 전자책 출판사 올푸리의 출판 속도는 상당히 빠른 편이다. 이 출판사는 빅토리아 호러 컬렉션(Victorian Horror Collection)이라는 이름으로 빅토리아 시대 영국과 아일랜드에서 발표된 단편 환상소설(공포소설)을 소개하고 있다. 올해 올푸리 출판사가 펴낸 전자책은 총 6권이다. 6권의 작품은 다음과 같다.

 

 

* 샬롯 리델 열린 문(20191)

* 아서 맥킨 오비의 빛(20194)

* 메리 엘리자베스 브래든 귀퉁이 그림자(20195)

* 브람 스토커 판사의 집(20197)

* 로사 멀홀랜드 헐리벌리 저택의 신들린 오르간 연주자(20198)

* 허버트 조지 웰스 붉은 방(20198)

 

 

이 중에 우리나라에 처음 번역된 작품은 4(열린 문, 오비의 빛, 귀퉁이 그림자, 헐리벌리 저택의 신들린 오르간 연주자)이다. 지난달에는 두 편의 작품이 거의 동시에 나왔다. 그중에서 내가 읽은 작품은 헐리벌리 저택의 신들린 오르간 연주자(The Haunted Organist of Hurly Burly, 줄여서 오르간 연주자’).

 

로사 멀홀랜드(Rosa Mulholland)1841년 아일랜드의 명문가 출신 차녀로 태어나 1921년 더블린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녀는 열다섯 살 때부터 글을 써서 각종 문예지에 투고했지만 큰 반응을 얻지 못했다. 그러나 그녀의 작품을 높이 평가한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은 바로 찰스 디킨스(Charles Dickens). 디킨스의 독려를 받은 멀홀랜드는 작가 활동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녀의 작품은 디킨스가 발행하는 문예지에 실리면서 드디어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오르간 연주자1891년에 발표되었다. 헐리벌리 마을에 있는 고풍스러운 저택에 기이한 사연을 간직한 오르간이 있다. 그 오르간의 주인인 루이스 헐리(Lewis Hurly)는 고인이다. 오르간은 루이스의 늙은 부모가 관리하고 있다. 아니, 아들이 애지중지 아낀 오르간을 방에 고이 보관해두는 것이 아니라 그냥 오르간을 방치하고 있다고 설명하는 게 적절하다. 왜냐하면 오르간은 루이스를 죽음에 이르게 한 저주의 악기이기 때문이다.

 

어느 날 리자(Lisa)라는 여성이 헐리 벌리 저택에 찾아온다. 그녀는 노부부에게 자신을 루이스의 약혼녀라고 밝힌다. 노부부는 루이스는 20년 전에 세상을 떠났다고 말하지만, 리자는 노부부의 말을 믿지 않는다. 리자는 자신과 약혼한 루이스가 여전히 살아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자신은 루이스의 부탁을 받고 저택에 왔다고 말한다. 그녀가 말한 루이스의 부탁저택에 있는 오르간을 쉬지 않고 온종일 연주하는 것이다. 노부부는 리자를 설득하기 위해 루이스의 약혼자였던 마거릿 캘더우드(Margret Calderwood)를 만나보라고 한다. 캘더우드는 망상에 빠진 리자를 위해 루이스의 과거를 들려준다. 루이스는 악마를 숭배하는 일에 빠져 자신의 친구들과 함께 행패를 부리고 다닌다. 루이스와 그 일행은 자신들을 악마 클럽이라고 불렀다. 그들은 고인을 모욕하는 일만 골라서 저지른다. 하루는 루이스 일행은 장례식장에서 난동을 부린다. 루이스는 오르간을 연주하면서 불경한 노래를 크게 부른다. 분노한 고인의 아버지는 루이스와 오르간을 저주한다. 여전히 정신을 못 차린 루이스는 그 문제의 오르간을 헐리벌리 저택으로 가져왔고, 방문을 잠가 놓고 매일 오르간을 연주한다. 미친 듯이 오르간을 연주하는 루이스의 모습을 본 마거릿은 알 수 없는 이유로 인해 그가 오르간의 노예가 되었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마거릿은 리자에게 악마의 계략에 휘말리지 말라고 당부하지만, 리자는 루이스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저주의 손아귀에 떨어진 지 오래다. 오르간은 지속적으로 리자를 괴롭힌다.

 

오르간 연주자는 서양 단편 공포소설 선집에 수록될만한 가치 있는 작품이다. 왜 이 소설이 그동안 국내에 한 번도 번역되지 않았는지 의문이다. 멀홀랜드는 아일랜드 민담을 소재로 한 소설과 강인한 여성상을 드러내는 소설을 주로 썼다고 한다. 공포 문학과 페미니즘 문학에 관심이 있거나 두 장르를 연구하는 사람이라면 멀홀랜드의 소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재평가받을 만한 작품이 있을지도 모른다.

 

 

 

 

Trivia

 

 

전자책은 816일에 발행되었고, 826일에 본문의 오자가 수정되면서 업데이트되었다. 그런데 업데이트가 되었는데도 안 고쳐진 오자가 있다.

 

 

 

 

 

18쪽에 마거릿 캐덜우드라고 적혀 있다.

 

 

 

 

 

그리고 시리즈 소개내용에 있는 메리 셸리의 소설 프랑켄슈타인발표 연도가 ‘1817으로 잘못 적혀 있다. 프랑켄슈타인1818에 발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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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르밀라 영국인이 사랑한 단편선 2
조셉 토마스 셰리던 르 파뉴 지음, 최윤영 옮김 / 초록달(오브) / 2015년 6월
평점 :
절판


 

 

 

 

 

 

 

 

 

 

뱀파이어(vampire) 하면 야회복과 검은 망토를 걸친 남성을 떠올리기 쉽다. 이 익숙한 남성 뱀파이어의 모습은 브람 스토커(Bram Stoker)《드라큘라(Dracula)를 원작으로 한 영화에서 탄생하였다. 남성 뱀파이어 이미지를 만들어낸 것은 미국 영화의 중심지인 할리우드(Hollywood)다. 1931년에 개봉한 영화 <드라큘라>에서 뒤로 빗어 넘긴 머리와 긴 송곳니, 검은 망토의 남성 뱀파이어 이미지가 등장했다.

 

사실 스토커의 《드라큘라》가 나오기 전에 이미 여성 뱀파이어가 등장하는 문학 작품들이 있었다. 가장 대표적인 작품은 괴테(Goethe)의 시 『코린트의 신부』고티에(Gautier)의 단편소설 『죽은 연인』이다. 두 작품에서 보여준 여성 뱀파이어는 남성을 홀릴 정도로 아름다운 외모를 가졌으나 그를 유혹하여 피를 빠는 언데드(undead: 살아있는 시체)다.

 

아름답고 매혹적인 여성 뱀파이어 중 가장 유명한 존재는 아일랜드 출신의 소설가 레 파누(Le Fanu)가 창조한 ‘카르밀라(Carmilla)다. 『카르밀라』는 1872년에 발표된 작품집 《유리잔 속에서 어둡게(In a Glass Darkly)에 포함된 중편소설이다. 《유리잔 속에서 어둡게》는 레 파누가 죽기 일 년 전에 나온 작품이다. 이 작품에 『카르밀라』를 포함한 총 다섯 편의 중 · 단편이 수록되었는데, 한동안 잊힌 작가를 재평가하게 만든 ‘스완 송(Swan Song: 최후의 걸작)이다. 5편의 이야기는 마틴 헤세리우스 박사(Dr. Martin Hesselius)가 기록한 불가사의한 사건들을 다룬다. 《유리잔 속에서 어둡게》에 수록된 다섯 편의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1. 『그린 티(Green Tea)

2. 『친구들(The Familiar)

3. 『하보틀 재판관(Mr. Justice Harbottle)[주1]

4. 『드래건 볼란트의 방(The Room in the Dragon[주2] Volant)

5. 『카르밀라』

 

 

2016년에 초록달 출판사의 크라우드 펀딩을 통해 만들어진 《카르밀라》는 『카르밀라』와 『그린 티』를 번역한 것이다. 『그린 티』는 예전에 ‘녹차’라는 제목으로 번역된 적이 있었으나(《세계 괴기소설 걸작선 1》) 그 이야기가 수록된 책이 절판되는 바람에 한동안 보기 힘든 작품이었다.

 

『카르밀라』는 18~19세기 유럽에 유행한 고딕 소설(Gothic novel)의 기본 요소를 충실히 갖추고 있다. 이 이야기 속의 화자(‘이야기 밖의 화자’는 이름과 정체가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다. 그는 로라가 경험한 불가사의한 사건을 기록한 헤세리우스 박사의 연구 자료를 언급하면서 이야기를 시작한다)이자 주인공인 로라(Laura)가 사는 곳은 외진 지역에 있는 으리으리한 성(schloss)이다. 이 성의 형태를 묘사한 번역문에서는 ‘으리으리한 저택(11쪽)이라고 되어 있는데, 슐로스는 ‘성(城)을 뜻하는 독일어다. 스산한 분위기가 감도는 고성이 고딕 소설의 단골 배경인 만큼 ‘저택’보다는 ‘성’으로 번역하는 것이 적절하다. 로라 가족이 사는 성은 오스트리아의 남부 지방인 스티리아(Styria)에 있다. 성은 외부 세계와 단절된 공간이다. 어머니를 일찍 여윈 로라는 거의 성 안에 혼자서 시간을 보내는 일이 많다. 아무래도 인적이 드문 곳에 성이 있다 보니 성을 왕래하는 또래 친구들이 적을 수밖에 없다.

 

로라는 어린 시절에 악몽을 겪은 적이 있다. 밤이 되면 어떤 여인이 로라의 방에 찾아와 로라의 목에 상처를 냈다. 너무나도 생생했던 일이라 로라는 자신의 목에 상처를 낸 미지의 존재가 실제로 목격했다고 주장하지만, 가사 도우미는 그녀의 말을 꿈으로 생각할 뿐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 악몽 같은 날을 겪은 지 12년이 지난 후에 로라는 우연히 사륜마차가 전복되는 사고를 목격한다. 그 마차에 중년 부인과 소녀가 타고 있었는데, 부인은 로라의 아버지에게 자신의 딸을 당분간 돌봐달라고 부탁한다. 부인의 부탁을 흔쾌히 들어준 로라의 아버지 덕분에 소녀는 로라의 성에 거주하게 되는데, 그 소녀가 바로 카르밀라다.

 

로라는 카르밀라의 외모가 12년 전 자신의 목에 상처를 낸 여인과 닮은 것을 알고 깜짝 놀란다. 그러자 카르밀라도 12년 전에 꾼 꿈에서 로라와 비슷한 여인을 봤다고 말한다. 두 사람은 신비한 공통점을 매개로 친하게 지내게 된다. 하지만 카르밀라는 로라의 유일한 또래 친구이지만, 자신의 과거나 정체를 밝히지 않는다. 카르밀라는 로라와 단 둘이 있을 때마다 마치 사랑스러운 애인을 대하는 것처럼 로라에게 다가가 친밀감을 드러낸다. 이때 카르밀라는 로라를 ‘내 사랑(Dearest: ‘간절한’, ‘여보’라는 뜻이 있다)이라는 애칭으로 부른다.

 

 

 

  카르밀라는 당황하는 내 모습에 흡족해하며 나를 더 세게 끌어안았고, 뜨거운 입술로 내 뺨 이곳저곳에 키스를 퍼부으며 거의 울먹이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넌 내 거야, 내 것이 되어야만 해. 너와 나는 영원히 하나야(You are mine, you shall be mine, you and I are one for ever).

 

(『카르밀라』 중에서, 54쪽)

 

 

 

두 여성의 에로틱한 관계는 레즈비언(lesbian)의 애정 관계와 유사하다. 그래서 카르밀라를 ‘여성 뱀파이어’가 아닌 ‘레즈비언 뱀파이어’로 볼 수 있다.[주3] 레 파누가 로라와 카르밀라의 관계를 에로틱하게 묘사한 이유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카르밀라』는 빅토리아 시대(Victorian era) 중반기에 나온 소설이다. 그 시대에 산 사람들 특히 지식인들은 도덕적 중심에 우뚝 서려는 인간상을 지향했다. 빅토리아 시대의 도덕적 인간상은 속물적이지 않으면서도 도덕적으로 결백하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는 존재이다. 중산층과 귀족계층의 도덕적인 영국 신사들은 도덕적 인간상이 되고자 노력했고, 여성은 도덕적 인간상의 축에 들지 못한다. 그러므로 ‘남자답지 못한 행동’, 즉 ‘여성스러움’은 남성성을 강조한 도덕적 인간상의 조건에 부합하지 못한다. 특히 동성애는 도덕적 타락의 극치로 여겼다.

 

당시 인기 절정에 올랐던 작가 오스카 와일드(Oscar Wilde)가 동성애자라는 사실이 만천하에 알려지면서(와일드의 동성 연인의 아버지가 와일드의 동성애를 공개했다) 한순간에 몰락해버린 사건은 동성애에 대한 빅토리아 시대의 부정적 인식을 확인할 수 있는 동성애자 탄압 사례로 남아 있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을 생각해 볼 때 보수적인 영국 독자들은 로라의 카르밀라의 레즈비언 관계를 도덕적 공동체의 근간을 위협할 수 있는 위험 징후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러면서 독자들은 소설에 묘사된 동성애에 공포를 느낀다. 그러나 독자들은 그녀들의 동성애 관계를 무서워하면서도 이들의 관계가 어떻게 전개되는지 궁금해서 보게 된다. 독자들은 도덕적으로 타락한 카르밀라를 ‘도덕성이 오염된(타락한) 괴물’로 규정하면서도 그녀의 매혹적인 모습에 눈을 떼지 못한다. 이야기 곳곳에 나오는 에로틱한 묘사는 남성 독자들의 호기심을 유발하기 위해 레 파누가 종이 위에 설치한 장치이다. 로라와 카르밀라는 서로를 향한 감정을 ‘사랑’이라고 생각했지만, 세상은 그녀들의 사랑을 치료받아야 할 ‘병든 열정’으로 치부했다.

 

『그린 티』는 지나치게 학문 연구에 몰두한 인간의 내면이 섬뜩한 미지의 힘에 점점 압도당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이야기다. 제닝스(Jennings) 신부는 글을 쓰다가 정신이 지치면 녹차를 자주 마셨다. 녹차에 중독된 이후로 신부는 원숭이를 닮은 악마를 자주 본다. 그러나 다른 사람은 제닝스 앞에 나타나는 악마가 보이지 않는다. 악마는 신부의 눈앞에 계속 나타나고, 그 악마가 점점 나타날수록 신부는 괴로움을 호소한다. 빅토리아 시대 영국 독자들은 『카르밀라』보다 『그린 티』를 더 무서워했을 것이다. 『그린 티』가 영국 독자들에게 공포심을 유발하는 이유는 차(茶)를 즐겨 마시는 영국인의 평범한 일상이 무서운 사건이 되고, 그 불가사의한 사건을 분석할 수 있는 이성조차 무력해지기 때문이다. 『그린 티』에 신부가 마시는 녹차는 현실 세계에 있으면서도 현실 세계에서 마실 수 없는 녹차이다. 레 파누는 이 녹차 하나로 사람들이 익숙하게 생각하던 현실 세계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데 성공했다. 독자는 녹차를 즐겨 마실 수 있는 일상이 사라진 세상을 대면할 때 긴장감과 섬뜩함을 느낀다. 『그린 티』는 레 파누가 남긴 소설 중에 걸작으로 손꼽힐 만하다.

 

 

 

 

 

[주1] 『하보틀 재판관』에 관한 내용은 필자의 글을 참고할 것.

[GBLA #3: 레 파누] (2019년 8월 20일 작성)

https://blog.aladin.co.kr/haesung/11044572

 

 

[주2] ‘Dragon’은 상상의 동물인 용(龍)과 ‘거친 여자’라는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아마도 소설 제목에 있는 ‘Dragon’은 후자의 의미에 더 가까울 것이다.

 

 

[주3] 필자가 말하는 ‘여성 뱀파이어’와 ‘레즈비언 뱀파이어’의 의미는 다르다. 그러니까 레즈비언 뱀파이어는 ‘(생물학적) 여성’이 아닌 뱀파이어다. 프랑스의 페미니스트 모니크 위티그(Monique Wittig)의 레즈비언 여성주의 이론을 근거를 가지고 카르밀라의 레즈비언 뱀파이어 정체성을 설명할 수 있다. 이에 대한 내용은 따로 글로 풀어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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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o 2019-08-22 13: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레즈비언 뱀파이어가 생물학적 여성이 아닌 뱀파이어라는 말씀은 레즈비언이 생물학적 여성이 아니라는 말씀인가요?? 정체성 차원이 아니라 생물학적 차원에서도요??

주3이 무슨 말인지 전혀 이해가 가지 않아서, 얼른 따로 글로 풀어주시기를 기다려봅니다....

cyrus 2019-08-22 15:37   좋아요 0 | URL
모니크 위티그는 보부아르가 말한 유명한 명제 “여자는 태어나는 것이 만들어지는 것이다”를 재해석하면서 사회적으로 만들어지는 여성은 이성애 여성이 아니라 레즈비언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위티그는 “레즈비언은 여성이 아니다”라는 주장까지 합니다.

위티그가 거부하는 ‘여성’이란 이성애 중심 사회에 있는 생물학적 여성을 뜻해요. 위티그는 생물학적 남성과 여성이 무엇인지 설명하는 방식이 이성애 중심주의가 만들어낸 해석이라고 비판합니다. 그래서 위티그는 여성 내부의 이성애 중심주의가 레즈비언의 존재 자체를 거부한다고 지적했고, 레즈비언이야말로 남성 중심적 권력과 이성애 중심주의 모두를 거부할 수 있는 주체라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이를 설명하기 위해 나온 명제가 바로 “레즈비언은 여성이 아니다”입니다. 위티그가 강조하는 레즈비언은 남녀 성별 범주를 넘어서는 독립적인 주체입니다.

카르밀라를 ‘여성 뱀파이어’라고 보는 해석이 많았는데요, 저는 이 해석이 카르밀라의 레즈비언 정체성을 설명하지 못한다고 생각해요. ‘여성 뱀파이어’는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뱀파이어라는 정체성을 부각하거든요. 결국 여성 뱀파이어는 남성을 유혹하는 이성애적 존재가 돼 버려요. 그렇지만 카르밀라는 이성애적 존재가 아니죠. 그래서 저는 위티그의 이론을 가지고 와서 카르밀라를 ‘이성애 중심 사회를 전복하는 레즈비언 뱀파이어’로 봐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나 레즈비언을 특별한 주체로 내세우는 위티그의 주장도 비판받고 있습니다. 주디스 버틀러는 <젠더 트러블>에서 위티그가 레즈비언을 이상화한 존재로 규정하고 있다고 비판했습니다.

이상, 제가 쓰려는 글을 요약해봤습니다. ^^

syo 2019-08-22 16:01   좋아요 0 | URL
그러니까 ‘생물학적 여성‘이라는 개념이 품고 있는 문제점이 있기 때문에 그 개념을 거부하고, 그 거부를 선언하는 언술로 ˝레즈비언은 (생물학적) 여성이 아니다˝ 라고 주장했다는 거죠??

그럼 다음 글에서는 자세한 내용에 대해서 알 수 있겠군요. 화이팅 ㅎㅎㅎㅎ

cyrus 2019-08-22 16:20   좋아요 0 | URL
네, 맞아요. <쉽게 읽는 젠더 이야기>에 위티그의 이론을 설명한 내용이 나와요. ^^
 

 

 

아일랜드는 영국 옆에 있는 섬나라지만, 걸출한 작가들이 태어나고 자란 세계문학의 보고이다. 오스카 와일드(Oscar Wilde), 브람 스토커(Bram Stoker),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William Butler Yeats), 조지 버나드 쇼(George Bernard Shaw), 제임스 조이스(James Joyce), 사무엘 베케트(Samuel Beckett) 등은 아일랜드 출신이다. 예이츠와 쇼는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앞에 언급한 작가들보다 인지도가 낮지만, 시인 셰이머스 히니(Seamus Heaney)는 1995년에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영국의 식민지였던 19세기 말 아일랜드에서는 독립운동뿐만 아니라 문화 운동을 통해 정신적인 독립을 이루려는 노력이 병행되어 전개되었다. 그리고 그 핵심에는 ‘문예 부흥 운동(The Gaelic Revival Movement)이 있었다. 문예 부흥 운동을 주도한 아일랜드의 문화예술인들은 잊힌 켈트인(Celts)의 고대 신화와 게일어(Gaelic)를 복원하고, 상실된 민족 주체성을 고양했다. 이러한 아일랜드의 문예 부흥 운동은 일제 식민 통치 시절의 우리 문인들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다.

 

아일랜드에는 요정과 같은 초자연적인 존재들이 나오는 구전 설화들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아일랜드인의 일상에 자연스럽게 스며든 각종 전설과 민담은 아일랜드 특유의 문학을 활짝 꽃피게 만든 자양분이 됐다. 영국과 아일랜드 출신의 환상소설 작가들은 어린 시절부터 들은 구전 설화를 자양분 삼아 이야기에 살을 붙여나갔다. 아일랜드를 포함한 영국의 환상 문학 계보를 되짚어 볼 때 가장 먼저 언급되는 작가는 《드라큘라》를 쓴 브람 스토커지만, 스토커 이전에 등장한 ‘이 작가’를 절대로 빠질 수 없다. 그는 바로 조지프 토마스 셰리든 레 파누(Joseph Thomas Sheridan Le Fanu)다.[주]

 

 

 

 

 

 

 

나는 ‘레 파누’라고 쓰고 있지만, 정확한 영문 이름표기라고 할 수 없다. 현재 외래어 표기법을 따르면 ‘레 퍼뉴’ 또는 ‘러 파누’라고 쓴다. 그러나 ‘르 파뉴’, ‘르파누’, ‘레퍼뉴’라고 쓰는 사람도 있다. ‘Le’와 ‘Fanu’를 붙여 쓰는 경우가 있는데, 정확하게 표기하려면 띄어 써야 한다. 《주석 달린 셜록 홈즈 4》(현대문학)에서는 ‘러패뉴’라고 적혀 있다. 그런데 더 골치 아픈 건 미들 네임(middle name)을 한글로 표기하는 것이다. 나는 ‘셰리든’이라고 썼지만, 또 어떤 사람은 ‘셰리던’, ‘셰리단’이라고 쓴다. 한글로 표기된 이름이 다양한 외국 작가가 또 있을까? 아무튼 나는 ‘레 파누’라고 쓰겠다.

 

레 파누는 아일랜드 더블린에 태어난 작가이다. 그는 아일랜드의 구전 설화에 관심이 많았고, 이를 다듬어서 환상 소설과 공포 소설을 주로 썼다. 그래서 레 파누의 소설에는 꼭 한 번은 아일랜드의 미신이라든가 구전 설화의 일부 내용이 언급된다. 소설은 이야기 밖의 화자가 아는 사람에게서 들은 신기하고도 으스스한 경험담을 들려주는 형식으로 전개된다. 그래서 레 파누의 짧은 환상 소설과 공포 소설을 읽으면 한 편의 구전 설화를 읽는 듯한 기분이 든다. 파누는 실재와 환상이 하나로 포개진 세계를 그려낸 다음, 그 속에서 혼란을 느끼는 인물의 내면 심리를 묘사한다.

 

 

 

 

 

 

 

 

 

 

 

 

 

 

 

 

 

 

 

* 이탈로 칼비노 엮음 《세계의 환상 소설》 (민음사, 2010)

* [품절] 프랑수아 레이몽, 다니엘 콩페르 《환상문학의 거장들》 (자음과모음, 2001)

 

 

 

 

환상 소설을 직접 선별하고 편집한 이탈리아의 소설가 이탈로 칼비노(Italo Calvino)는 레 파누를 ‘최초의 유령 이야기 집필 전문가’라고 평가했다. 과거의 환상 소설은 소수의 작가만 쓰는 가벼운 글이었다. 자연의 아름다움을 모방하는 예술을 지향한 고전주의 미학이 지배한 주류 문단은 환상 소설을 저급한 이야기로 치부했다. 그러나 영국에서 유령을 소재로 한 고딕 소설(Gothic novel)이 유행하기 시작하면서 환상에 흥미를 느낀 독자들의 욕망을 충족시켜 줬다. 레 파누가 등장하면서 환상 소설은 본격적으로 ‘대중화’되고 ‘전문화’하기 시작된다. 19세기 영국에 유령 이야기를 안 쓴 작가를 찾기가 어렵다. 찰스 디킨스(Charles Dickens)도 유령 이야기를 썼다. 《환상문학의 거장들》(자음과모음)에서 레 파누는 ‘환상문학의 위대한 고전 작가’로 소개된다.

 

 

 

 

 

 

 

 

 

 

 

 

 

 

 

 

 

 

 

* 르 파뉴 《카르밀라》 (초록달, 2015)

* [품절] 정진영 옮김 《뱀파이어 걸작선》 (책세상, 2006)

 

 

 

 

 

 

 

 

 

* [절판, No Image] 르 파뉴 《흡혈귀 카르밀라》 (효리원, 1996)

* [절판, No Image] 르 파뉴 《사랑을 꿈꾸는 흡혈귀 카밀라》 (지경사, 1993)

 

 

 

 

레 파누의 대표작인 《카르밀라(Carmilla)여성 뱀파이어(vampire)가 등장하는 중편 소설로, 스토커의 《드라큘라》에 큰 영향을 준 걸작이다. 《카르밀라》는 영화로 나올 정도로 《드라큘라》만큼 파급력이 있는 뱀파이어 문학의 고전이다. 90년대에 ‘사랑을 꿈꾸는 카밀라’라는 제목의 번역본이 나온 적이 있다. 어린이 독자의 수준에 맞게 원작을 순화한 것이다. 사실은 원작에 레즈비언의 섹슈얼리티가 부각된 묘사가 있다.

 

국내에 레 파누의 단편소설 몇 편이 번역되어 나왔다. 여기서부터 그의 작품들을 발표 연도순으로 하나씩 하나씩 살펴보기로 한다. (H: 작품의 역사적 중요성, Q: 작품의 우수성, R: 작품 번역본의 희소가치)

 

 

 

 

 

 

유령과 접골사

The Ghost and the Bonesetter (1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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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 파누가 처음으로 쓴 소설로 알려져 있다. 접골사는 골절되거나 탈골된 뼈를 직접 손으로 교정하는 일을 전문적으로 하는 사람을 뜻한다. 아일랜드의 지방에서 근문하는 주교 사제 프랜시스 퍼셀(Francis Purcell)은 독특한 취미가 있다. 그의 취미는 자신이 거주하는 지역에서 전해 내려오는 전설과 마을 주민들이 경험한 초자연적인 현상들을 수집하고 기록하는 일이다. 퍼셀은 세상을 떠나면서 유언 집행인이 퍼셀이 남긴 기록들을 살펴보게 되고, 이 소설에서 유언 집행인은 퍼셀이 기록한 이야기들을 들려주는 ‘이야기 밖의 화자’로 등장한다. ‘이야기 속 화자’는 접골사 테리 닐(Terry Neil)의 아들이다.

 

테리 닐은 영주의 땅에서 일하는 소작인이다. 영주가 외출하면서 며칠간 성을 비우게 되면, 영주의 소작인들이 성을 지켜야 한다. 테리 닐도 어쩔 수 없이 영주의 명령을 따라야 한다. 그러나 소작인들은 그 성에서 일어나는 기이한 현상에 대한 소문을 알고 있다. 성에 과거 영주의 할아버지의 초상화가 있는데, 밤이 되면 이 늙은 지주의 유령이 액자에 나와 성 안을 돌아다니면서 닥치는 대로 술을 마시고 물건을 흩뜨려 놓는다고 한다. 테리 닐은 뜬눈으로 성을 지키다가 늙은 지주의 유령을 만나게 되고 대화까지 하게 된다. 늙은 지주의 유령은 생전에 다친 오른쪽 다리를 가리키면서 부러진 뼈를 제대로 맞춰달라고 부탁한다. ‘재미있는 반전’이 있는 이야기다.

 

 

 

 

 

 

 

 

 

 

 

 

 

 

 

 

 

 

* [국내 미번역] 레 파누 《The Purcell Papers》 (Arkham House Publishers[주2], 1975)

 

 

 

『유령과 접골사』에 영주의 집사가 등장하는데, 이름은 로렌스 코너(Lawrence Connor)다. 그런데 번역문에는 ‘로렌스 오코너’라고 잘못 표기되어 있다. 『유령과 접골사』는 레 파누가 죽은 이후에 나온 《The Purcell Papers》(1880)에 수록되었다. 세 권으로 구성된 이 단편집은 작중인물인 퍼셀이 수집하고 기록한 이야기들로 채워져 있다. 단편집에 수록된 모든 글은 레 파누가 1838년부터 1840년까지 <Dublin University Magazine>라는 잡지에 발표한 것이다. 레 파누는 <Dublin University Magazine>의 편집자로 활동했다.

 

 

 

 

 

 

 

에인저 거리에서 일어난 기묘한 소동에 대한 기술

An Account of Some Strange Disturbances in Aungier Street (1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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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Book] 르파뉴 《에인저 거리에서 일어난 기묘한 소동에 대한 기술》 (올푸리, 2018)

* [e-Book] 브람 스토커 《판사의 집》 (올푸리, 2019)

 

 

 

 

이 단편소설도 <Dublin University Magazine>에 실렸다. 에인저(Aungier)는 실제로 더블린에 있는 거리다. 화자와 그의 사촌 톰 러들로(Tom Ludlow)는 에인저 거리에 있는 집에 살게 된다. 그런데 그 집은 17세기에 교수형을 집행했던 판사(사람들은 그에게 ‘교수형에 미친 판사’라는 별명을 붙여졌다)가 살았던 곳이다. 그들은 그 집에서 악몽과 같은 무서운 일을 겪는다. 그들이 본 것은 교수형에 미친 판사의 유령이었다. 이 이야기는 브람 스토커의 단편 『판사의 집(The Judge’s House)의 모티프가 된 작품이다. 그리고 1872년에 레 파누는 『에인저 거리』를 다듬어  『하틀보 재판관(Mr. Justice Harbottle)라는 제목의 작품을 발표했다.

 

전자책으로 만들어진 『에인저 거리』 번역본에 오류가 있다. 『에인저 거리』의 발표연도가 1851년’으로 잘못 적혀 있다. ‘하틀보 재판관’의 원제가 ‘Mr. Judge Harbottle’로 되어 있는데 ‘Judge’가 아니라 ‘Justice’이다.

 

 

 

 

 

 

 

녹색 눈을 가진 고양이의 원한

녹색 눈의 흰 고양이

흰 고양이

The White Cat of Drumgunniol (18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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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Book] 르파뉴 《흰 고양이》 (위즈덤커넥트, 2019)

 

 

 

 

 

 

 

 

* [절판, No Image] 레파뉴 《녹색 눈의 흰 고양이》 (뱅크북, 1996)

* [절판, No Image] 레파뉴 《녹색 눈을 가진 고양이의 원한》 (동림, 1993)

 

 

 

드럼거니얼(Drumgunniol)은 가상의 지명이다. 드럼거니얼에 사는 도너번(Donovan) 가족은 죽음의 그림자가 덮쳐오는 저주에 시달린다. 녹색 눈의 흰 고양이는 불길한 예언을 암시하고, 한 가족을 파멸시키는 무시무시한 존재이다. 고양이는 불길함의 상징으로 이야기 속에 많이 등장해왔다. 그래서 이 소설은 에드거 앨런 포(Edgar Allan Poe)《검은 고양이》와 비교하기 위해 언급되기도 한다. 레 파누는 고양이와 유령이 동시에 나타나는 장면을 《카르밀라》에 재현했다.

 

 

 

 

 

 

악마 디컨

Dickon the Devil (18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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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진영 옮김 《세계 호러 단편 100선》 (책세상, 2005)

 

 

 

이 소설은 전설적인 영국의 록 그룹 (Queen)의 멤버인 존 디컨(John Deacon)과 관련이 없다. 이름의 알파벳 철자가 다르다. ‘악마 디컨’은 이십 년 동안 널따란 영지에서 노숙하는 사나이다. 그는 백치지만, 영지를 이리저리 뛰어다니면서 “악마다, 악마를 보았다!”라고 외치기만 한다. 화자가 디컨이 완전히 미쳐버리게 된 이유를 알려주는 짤막한 이야기다.

 

 

 

 

 

 

 

 

 

 

 

 

 

 

 

 

 

 

 

* [절판] 레파뉴 《유령의 집》 (동림, 2001)

* [절판, No Image] 레파뉴 《낡은 저택의 유령》 (동림, 1993)

 

 

 

90년대에 ‘동림’이라는 이름의 출판사가 ‘세계명작괴기시리즈’를 펴낸 적이 있다. 책 한 권에 서구의 단편 공포 소설과 환상소설을 세 편 이상 수록되었다. 어린이 독자를 겨냥해서 만든 책이라서 그런지 책의 번역 및 편집 상태는 차마 눈 뜨고 못 볼 정도로 좋지 못하다. 2000년대 초반에 동림 출판사는 ‘세계걸작스릴러’ 시리즈를 펴냈는데, 표제와 표지만 달라졌을 뿐 ‘세계명작괴기시리즈’의 구성과 똑같다. 그러므로 《낡은 저택의 유령》과 《유령의 집》은 같다고 보면 된다.

 

 

 

 

 

 

 

 

 

 

 

 

 

 

 

 

 

 

* 앰브로즈 비어스 《아울크리트 다리에서 생긴 일》 (혜윰, 2017)

 

 

 

이 책에는 레 파누의 작품으로 알려진 표제작(‘낡은 저택의 유령’, ‘유령의 집’) 이외에 ‘악마가 된 사나이’, ‘오른발 가운뎃발가락’이라는 단편소설도 수록되었다. 악마가 된 사나이’를 쓴 작가가 누군지 잘 모르겠지만, ‘오른발 가운뎃발가락’은 앰브로스 비어스(Ambrose Bierce)가 썼다.

 

 

 

 

 

[주1] 물론, 레 파누 이전에 활동한 고딕 문학 작가들을 외면할 수 없다. 그러나 여기서 내가 말한 환상 문학 계보는 온전한 의미의 환상 문학이 본격적으로 나타난 근대부터 시작한다.

 

 

[주2] 러브크래프트(Lovecraft)의 소설을 포함한 공포 소설 및 환상 소설들을 출판한 곳이다. ‘아캄/아컴(Arkham)’은 러브크래프트의 소설에 자주 나오는 가상의 도시다. 이 출판사는 러브크래프트의 작품들과 크툴루 신화(Cthulhu Mythos)와 관련된 저작물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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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8-20 17: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9-08-22 12:03   좋아요 0 | URL
아일랜드에 극심한 기근이 일어나서 아일랜드 인들이 많이 죽고, 대부분은 미국이나 다른 유럽으로 이주했어요. 미국으로 이주해서 성공한 아일랜드 출신 사람이 많아요. 케네디 대통령의 조상이 대기근을 피해 미국으로 건너온 아일랜드 인이에요. 살기 위해서 다른 나라로 이주해온 아일랜드 인들은 ‘외부인’이라는 이유로 차별을 많이 받았어요.

2019-08-22 03: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9-08-22 12:05   좋아요 0 | URL
존 밀링턴 싱. 유명한 극작가네요. 제가 희곡에 대해서 모르는 게 많아서 싱이 이런 대단한 극작가인 줄 몰랐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