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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 하우스의 유령 엘릭시르 미스터리 책장
셜리 잭슨 지음, 김시현 옮김 / 엘릭시르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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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섬그늘에 굴 따러 가면
아기가 혼자 남아 집을 보다가
바다가 불러 주는 자장 노래에
팔 베고 스르르르 잠이 듭니다

 

(동요 ‘섬집 아기’)

 

 

외딴 섬, 외톨이, 외딴 집 등 그냥 말만으로도 외롭다. 정현종 시인은 ‘사람들 속에 섬이 있다 / 그 섬에 가고 싶다’고 했다. 소설가 제임스 앨런 맥퍼슨은 ‘모두가 외로운 사람들’(All the Lonely People)이라는 단편을 발표한 적이 있다. 사람들 사이에 있어도 외롭고 외롭다는 저 많은 사람.

 

우리는 소통과 사랑의 마음이 향하는 곳, 바로 ‘내 마음의 집’을 찾지 못하고 있다. “집에 안 들어가니?”라는 질문에 흔히 “집에 들어가도 집 같지가 않다”라고 말하는 경우가 있다. 앞의 집은 부동산으로 거래되는 건축물이지만, 뒤의 집은 추위, 더위, 비바람을 막아주고 그 속에 살기 위해 지은 안식처다. 우리가 마음에 되찾아야 하는 '집'은 말하자면 'House가 아니라 'Home'이다. 소통과 사랑의 마음이 향하는 곳, 바로 그곳이 우리가 모두 가야 할 '집'이다. 그곳에 가면 사람의 체온과 숨결을 느낄 수 있다. 주인을 잃어버린 집은 사람의 체온과 숨결의 자취를 찾아볼 수 없다. ‘흉가’로 변해버린다.

 

셜리 잭슨의 소설 『힐 하우스의 유령』에 나오는 힐 하우스는 흉가다. 집을 관리하는 사람이 있어도 이제는 옛 집주인이 남긴 삶의 흔적이 희미해질 정도로 한적하다. 심지어 힐 하우스가 위치한 힐즈데일 사람들도 그 집의 존재를 모른다. 아니면 힐 하우스에 대해 좋지 않은 소문 탓에 애써 집의 위치를 모른 척하고 싶었을 것이다. 오래전부터 힐 하우스는 마을 사람들의 체온과 숨결마저 전달될 수 없을 정도로 저 먼 곳으로 떨어진 채 서 있는 저주 받은 집이 되었다.

 

힐 하우스의 심령 현상에 관심을 가진 인류학자 몬터규 박사는 함께 관찰하고 증인이 될 수 있는 인물을 선택해 초대한다. 몬터규 박사와 함께 힐 하우스에 머물게 될 사람은 세 명이다. 어머니의 병시중 때문에 오랫동안 은둔 생활을 한 엘리너 밴스, 엘리너와 달리 성격이 활발하면서도 격렬한 면이 있는 시어도라 그리고 힐 하우스를 상속받게 될 루크 샌더스. 각기 다른 성격의 세 사람이 힐 하우스에서 같이 생활한다. 몬터규 박사 일행은 낯설고 기이한 현상을 겪기 시작한다. 시어도라가 머무는 방에 온통 붉은 페인트가 뿌려져 있고, 한밤중에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잦아졌다. 수많은 방과 복잡하게 만들어진 구조 때문에 힐 하우스 내부는 음산한 기운이 느껴진다.

 

“이 집은 지켜보고 있어. 모든 움직임 하나하나를. 물론, 다 상상력 때문에 그렇게 느껴지겠지만.” (140쪽)

 

시간이 지날수록 공포의 강도는 더욱 거세지고, 성격이 예민한 엘리너는 몹시 두려워한다. 타인에게 의존적인 성향이 있는 엘리너는 시어도라와 함께 있고 싶어 하지만, 시어도라는 엘리너의 마음을 모른다. 오히려 의기소침한 엘리너를 은근히 무시하기도 한다. 엘리너는 다른 사람들보다 힐 하우스의 초자연적 현상에 괴로워한다. 몬터규 박사의 부인이 힐 하우스 모임에 뒤늦게 합류한 이후부터 엘리너의 마음은 위축된다. 몬터규 박사의 부인은 남편보다 더욱 적극적으로 심령 현상의 비밀을 파헤치려고 노력한다. 집 내부에 ‘도와줘요 엘리너 집으로 와요’라는 글씨가 발견될수록 사람들은 엘리너의 행동을 의심하기 시작한다. 엘리너는 자신이 사람들로부터 소외되고 있다는 생각에 괴로워한다. 그리고 시어도라가 루크를 좋아하는 사실을 알고 나서 질투하게 된다.

 

『힐 하우스의 유령』은 어둡고 음산한 힐 하우스의 분위기에 압도된 인물들의 심적 변화와 그 미묘한 갈등을 긴장감 있게 묘사했다. 불가사의한 고딕풍 분위기에 하드보일드 문체가 곁들어진 인물의 대화를 읽으면 독자가 그들과 함께 힐 하우스에 머무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흡인력이 있는 문체는 이야기 중반부가 잠깐 지루하게 느껴지더라도 결말이 궁금해서 끝까지 읽게 한다.

 

소설은 ‘The haunting’이라는 제목으로 두 차례나 영화화되었다. 1963년에 로버트 와이즈 감독이, 1999년에 얀 드봉 감독이 1963년 작품을 리메이크했는데 원작 영화를 더욱 높게 평가받고 있다. 영화를 본 독자라면 원작 소설이 진부하게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영화로 재탄생한 『힐 하우스의 유령』을 잊고, 셜리 잭슨의 『힐 하우스의 유령』으로 읽는다면 영화에서 발견하지 못한 소설의 진면목을 발견할 수 있다.

 

엘리너는 작가 셜리 잭슨의 성격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엘리너처럼 잭슨도 남들과 쉽게 어울리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그녀의 어머니는 어릴 때부터 감수성이 남달랐던 잭슨을 이해하지 못했다. 어린 잭슨이 요조숙녀로 성장하기를 바랐지만, 그런 어머니의 기대는 잭슨의 마음을 예민하게 만들었다. 잭슨은 어머니의 지나친 기대와 관심을 피하려고 공상과 상상에 자주 빠졌다.

 

『힐 하우스의 유령』의 배경 힐즈데일은 그녀가 정착했던 노스 베닝턴 마을을 암시한다. 힐즈데일 사람들은 외지인에 불친절하고, 힐 하우스에 관해 물어보면 적대적인 반응을 보인다. 잭슨의 남편이 대학교수로 발령받아 노스 베닝턴이라는 마을에서 살게 된 잭슨은 그곳 주민들과 잦은 불화를 겪었다. 잭슨을 두고 마을에서는 ‘마녀’라는 악의적인 소문도 돌 정도였다. 잭슨은 마을 주민의 편견과 차별을 증오하면서 살았다. 마을 주민들과 융화되지 못한 그녀의 고립된 삶은 고딕 미스터리 작품을 탄생시켰고 그중에 가장 두드러진 인물이 『힐 하우스의 유령』의 엘리너다. 엘리너는 시어도라가 자신으로부터 점점 멀어질까 봐 두려워한다. 자신의 이름이 적힌 불가사의한 글자가 발견된 사건 이후로 일행은 엘리너를 의심한다. 힐 하우스의 공포에 휘말려 혼란스러운 엘리너는 자신이 고립된 존재가 될까 봐 두려워한다. ‘무엇이든 저택 안을 걸어갈 때는 항상 혼자’였다.

 

『힐 하우스의 유령』의 결말에 대해 호불호의 평가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결말까지 다 읽은 독자 중에는 허무하게 느껴질 수도. 그러나 그 결말은 누군가에게는 슬플 것이다. 혼자 지낸 사람은 안다. 엘리너가 힐 하우스에 가장 먼저 도착할 때부터 철저히 혼자였다는 사실을. 새로운 연인과의 만남으로 엘리너의 힐 하우스 여행은 슬프게 끝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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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버트 조지 웰스 - 눈먼 자들의 나라 외 32편 현대문학 세계문학 단편선 6
허버트 조지 웰즈 지음, 최용준 옮김 / 현대문학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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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이런 공상을 빠지곤 해. 오늘 내게 무슨 일이 벌어질 거란 공상.”

(H.G. 웰스 「기묘한 난초의 개화」 중에서, 56쪽)

 

 

 

공상과학소설은 19세기에 태어난 21세기 장르이다. SF처럼 자기 시대와 불화하며 다른 시대를 앞서 선취하는 장르는 찾아보기 어렵다. 자기의 시대로부터 망명하여 새로운 세기를 예비하는 그 특유의 선취성은 때로 경박한 오락의 수단으로 활용되면서 주류문학으로부터 신뢰를 얻지 못하는 빌미를 제공하기도 했다. 허버트 조지 웰스가 타임머신이라는 황당무계한 소재를 상상했을 때, 사람들은 터무니없다고 치부했다. 하지만 불과 10년 후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이 나오면서 이 황당한 상상력은 가능성이 되었다.

 

웰스는 쥘 베른과 함께 과학소설의 원조로 평가받는다. 베른이 할아버지라면, 웰스는 아버지라고 할 수 있다. 지금도 웰스의 영향력은 21세기 작가들에게 영감을 제공해준다. 베르나르 베르베르가작가로 정식으로 데뷔하기 전에 웰스의 작품들을 사숙하면서 소설과 과학을 익혔다. 그가 발표한 소설에 웰스가 연상되는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개미』에서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의 저자로 나오는 천재 곤충학자의 이름이 에드몽 웰즈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상상력은 웰스가 없었다면 탄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웰스는 자신의 단편소설들이 신사의 서재보다 요양소 침대나 치과의 응접실, 기차 같은 곳에서 읽히기를 바랐다. 그렇다고 이 단편선집이 시간을 때우기 위해 오락성 짙은 내용만 모아 놓은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착각이다. 한 세기 앞선 웰스의 상상력을 한 눈에 확인할 수 있다. 

 

「담장에 난 문」은 웰스의 단편 중에서 가장 많이 알려진 작품이다. 흔히 SF 단편 모음집에 ‘벽문’이라는 제목으로 소개되기도 했다. 벽 속에 현실을 뛰어넘은 미지의 세계를 아름답고 경이롭게 묘사하고 있다. 어느 날 어린아이가 우연히 집 근처 벽 안에 있는 초록색 문을 열고 들어가니 거기에 또 다른 세계가 펼쳐진다. 그 세계는 매우 아름답고 행복하며 어린이 눈으로 봐도 현실보다 달콤하다. 벽 속에 펼쳐진 정원에는 아름다운 자연 풍경에 큰 흑표범 두 마리가 살고 있다. 아이는 그곳에서 행복한 산책을 경험한다. 벽 속의 신비로운 세계를 묘사한 이 장면은 에드거 앨런 포의 단편 「요정의 섬」이나 「이른하임의 영토」에 연출된 환상적인 풍경 분위기와 흡사하다. 웰스는 포처럼 환상의 세계를 구체적 묘사를 통해 영사기처럼 보여 준다.

 

정체를 알 수 없거나 기존의 생태 방식을 뛰어넘는 괴생물체가 등장하는 작품들은 전혀 고루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기묘한 난초의 개화」는 존 윈덤의 1951년 작 소설 『트리피드의 날』에 인간을 살상한는 괴식물의 등장을 예고한다. 평범하게 보이는 난초가 인간의 목숨을 위협하는 내용은 자연을 지배하면서 문명의 진보에 들뜬 인류의 어리석음을 경고하고 있다. 「바다의 침입자」는 지나가는 배를 촉수로 공격하는 두족류(오징어, 낙지가 여기에 속함)가 등장한다.

 

영화에 나오는 괴물은 3D 기술의 등장 덕분에 한층 더 실감 나게 연출이 가능하다. 요즘에 나오는 괴물영화와 비교하면 「바다의 침입자」는 괴물의 형상을 생생하게 느낄 수 없다. 하지만, 인간을 공격하는 촉수 괴물과 살아남기 위해 안간힘으로 버티면서 맞서는 인간의 대결은 짧은 분량에도 불구하고, 결말을 궁금하게 만들 정도로 긴장감이 느껴진다. 「개미 제국」은 웰스의 단편작품들 중에 많이 알려져 있지 않지만,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개미』 시리즈가 탄생되는데 적지 않은 영향을 준 작품이다. 여기서 『개미』 줄거리가 형성되는 단초를 발견할 수 있다. 베르베르의 소설에 나오는 개미들은 ‘손가락들’이라고 불리는 인간을 정복하려고 한다. 웰스는 베르베르가 태어나기 전에 이미 작은 생명체 개미가 인간의 수준이 돼서 전쟁을 치르는 장면을 상상한다.

 

 

인간들이 책과 기록으로 지식을 모았듯이 개미들이 곧 지식을 모으기 시작하고 무기를 사용하고 거대한 제국을 만들고 계획적이고 조직화된 전쟁을 치른다면? (「개미 제국」 중에서, 554쪽)

 

 

웰스는 과학의 진보가 이루어낸 문명의 위대함을 예찬하면서도 그에 대한 인류의 맹목적인 믿음 또한 경고한다. 「발전기의 왕」은 기계가 작동되는 문명이 인간의 정신을 지배하는 암울한 미래상을 암시한다. 「도둑맞은 세균」은 생물학 무기와 세균전이 초래하게 될 위험성을 경고한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웰스의 작품은 비관주의 성향으로 짙어졌는데 1890년대 후반에서 1900년대 초반에 발표된 단편에서도 언젠가 다가오게 될 과학 문명의 그늘이 드리워져 있다.

 

웰스의 유명 장편 『타임머신』『투명 인간』을 재미있게 읽어 본 독자라면 단편소설도 만족스러울 것이다. 웰스의 SF 문학 세계에 입문하는 독자는 단편소설을 먼저 읽어보면 좋다. 작품을 읽고 나서 즐겁고 유쾌한 기분이 든 독자가 있다면 웰스 본인에게는 무척 만족스러워 할 것이다.

 

단, 책에 아쉬운 점 하나가 있다면 독자에게 생소한 용어나 인명에 대한 주석이 없는 것이다. 간혹 글에 과학 관련 용어나 웰스와 동시대에 활동했던 인물이 언급된다. ‘크레오소트’(「아르피니오스 섬」), ‘두족류’(「바다의 침입자」), ‘섭동’(「별」), ‘블라바츠키 부인’(「기적을 행하는 남자」)은 인터넷으로 검색해도 누구나 쉽게 이해되는 설명을 찾을 수 있다. 상세한 주석은 독자가 백 년 전에 나온 글을 읽으면서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고루한 이야기라도 독자가 전혀 거리감 없이 재미있게 읽히기 위해서는 주석의 역할도 무시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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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 속 여행 쥘 베른 걸작선 (쥘 베른 컬렉션) 1
쥘 베른 지음, 김석희 옮김 / 열림원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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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자, 지구의 중심으로!”

(『지구 속 여행』 중에서, 157쪽)

 

 

 

 

호기심이 많은 열한 살의 소년 쥘은 동갑내기 사촌누이를 무척 좋아했다. 고운 빛깔이 나는 산호 목걸이를 누이에게 선물로 준다면 누이의 마음을 단번에 사로잡을 수 있을 거로 생각했다. 그러나 산호 목걸이는 무척 귀하고 값비싼 물건이었다. 쥘은 산호 목걸이를 얻을 수 있는 인도에 가기로 했다. 마침 마을 주변에 있는 항구에 가면 인도로 가는 원양선을 볼 수 있었다. 쥘은 그 배를 타서 인도로 갈 생각이었다. 그렇지만, 동양의 세계로 향하는 쥘의 모험은 실패하고 말았다. 아버지에게 발각되고 만 것이다. 아버지로부터 호되게 꾸지람을 들은 쥘은 깊은 좌절감에 빠졌다. 이때부터 쥘은 아버지에게 “앞으로는 상상 속에서만 여행하겠다”고 약속한다. 어른이 된 쥘은 아버지의 뜻에 따라 법률을 공부하게 되고, 평범한 법률가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나 쥘은 어린 시절에 활짝 펴지 못한 모험의 동경을 잊지 않았다. 무한한 상상 속에서 미지의 세계를 마음껏 탐험했다. 상상의 여행 속에서 그려지는 신비로운 장면 그리고 여행의 생생한 감동을 잊지 않으려고 쥘은 펜을 잡았다. 그가 처음으로 여행을 한 곳은 아프리카. 당시 사람들에게 많은 관심을 얻고 있던 열기구를 탔다. 쥘 베른의 ‘경이의 여행’(Voyages extraordinaires) 시리즈가 시작되는 순간이다.

 

만약에 쥘 베른이 인도로 떠날 수 있었다면, 그의 인생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전 세계를 떠돌아다니는 항해사(Navigator)가 되었을 것이다. 베른은 상상의 여행을 하는 항해사가 되었고, 그가 쓴 ‘경이의 여행’ 시리즈는 독자들에게 ‘꿈속에서 여행하는 법’을 알려주는 훌륭한 내비게이션(Navigation)이 되었다. 베른이 없었다면, 모험심이 가득한 소년 쥘과 같은 어린아이들이 쉽고 재미있게 꿈속에서 여행하는 기회를 얻지는 못했을 것이다. 쥘 베른의 ‘경이의 여행’ 시리즈는 그가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미지의 세계를 실감 나게 소개하고 있다.

 

『지구 속 여행』(Voyage au centre de la Terre)은 ‘경이의 여행’ 시리즈 세 번째 작품이다. 이 작품은 TV 드라마, 영화를 통해 약 10회 정도 영상으로 재탄생되었다. 2008년에 개봉된 ‘잃어버린 세계를 찾아서’의 원작도 『지구 속 여행』이다. 아이슬란드의 사화산 분화구를 통해 지구 중심을 여행하며 지질시대의 수수께끼를 풀어나가는 흥미진진한 모험담이다.

 

 

 

 

 

 

원작과 영화는 지구 속으로 여행을 한다는 점에서 줄거리는 같지만, 내용상 약간의 차이가 있다. 영화에서는 지질학자인 주인공 트레버와 그의 조카 션이 모험의 주인공이다. 오래전에 실종된 트레버의 형이 남긴 상자 속에 <지구 속 여행>이라는 고서를 발견하게 된다. 트레버는 조카인 션과 함께 암호를 해독하는데 그것은 지구 속 세상을 알 수 있는 중요한 단서였다. 암호에 적힌 대로 트레버와 션은 사화산 분화구가 있는 아이슬란드로 향한다. 아이슬란드에 도착한 트레버와 션은 지구 속 여행에 합류하게 되는 산악가이드 한나를 만나게 된다.

 

영화와 마찬가지로 원작에서도 지질학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는 광물학 교수 오토 리덴브로크와 그의 조카 악셀이 등장한다. 리덴브로크 교수는 희귀본 수집광이다. 아이슬란드의 고대 학자 스노리 스투를루손이 쓴 책을 읽다가 암호가 적힌 양피지를 발견한다. 양피지를 쓴 사람은 아이슬란드의 연금술사이자 학자인 아르네 사크누셈. 아이슬란드의 연금술사는 자신이 지구 속으로 여행한 사실을 기묘한 암호 형태로 남긴 것이다. 리덴브로크 일행과 함께 지구 속 여행을 함께하는 안내인은 한스 비엘케라는 남성이다. 과묵한 성격이지만, 무모하고도 위험한 여행에 끝까지 동행한다.

 

 

 

 

 

 

 

리덴브로크는 지구 속 세상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무척 궁금해 한다. 그 곳을 진짜로 발견하면 과학의 역사에 새롭게 한 획을 긋는 동시에 기존의 학설을 한 번에 뒤집을 수 있는 획기적인 발견이 된다. 하지만, 그 당시나 지금이나 지구 속을 여행한다는 것은 현실에서 불가능한 일이다. 지구 속으로 들어갈수록 마그마로 인해 지열의 온도가 높아진다. 지열은 인간과 기계도 견디기 힘들 정도로 뜨겁다. 그렇지만, 베른은 지구 속에 또 다른 세상이 있다는 상상력을 펼친다. 베른이 활동했던 당시 유럽은 ‘지구공동설’(地球空洞說)이 학자들의 관심 대상이었다. 지구 속은 텅 비어 있는 공간이며 그 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 입구가 남극과 북극에 있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말도 안 되는 허무맹랑한 가설이 되었지만, ‘지구공동설’도 한 때 주류 과학의 화제였다. ‘핼리 혜성’의 등장을 예측했던 영국의 천문학자 에드먼드 헬리가 지구 속 구조에 대해 깊은 관심을 보였고, 수학자 오일러는 지구 중심에 1000km 직경의 별이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지구공동설은 과학이 발달한 지금까지도 여전히 새롭게 변형되어 대중 앞에 나타난다. 20세기 들어 지구공동설 학자 레이먼드 버나드 박사는 1969년에 쓴 『The Hollow Earth』를 통해 UFO가 지구 안에서 나오며, 고리 성운이 지구 속이 비어있을 수 있는 근거가 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아직 정확한 근거는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작년에 전 중앙정보국(CIA) 직원 에드워드 스노든을 사칭한 트위터  UFO에 대한 극비 문서를 폭로하며 지구공동설을 주장해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만약에 베른의 소설 속 내용처럼 지구 속에 또 다른 지구가 있다면 과학적으로 가능할까. 리덴브로크 일행은 지중해와 비슷한 넓은 바다와 구름이 떠 있는 대기 그리고 지구상에서 완전히 사라진 고대 동식물을 보게 된다. 그렇지만, ‘지구 속의 또 다른 지구’는 과학적으로 분석해보면 사람도, 동물도 살 수 없는 불가능한 상상의 세계에 불과하다. 또, 리덴브로크 일행은 절대로 지구의 중심으로 향하는 길을 걸을 수 없다. 뉴턴의 구각정리에 의하면 지구 속 공간에 작용되는 중력의 합이 0이기 때문에 그 곳에 들어간 인간은 무중력 상태를 경험하게 된다. 중력이 없는 세계는 곧 인간과 동식물마저 살 수 없는 죽음의 세계다. 

 

그렇다고 베른이 과학적 이론에 문외한 통속소설 작가 수준은 아니다. 지금도 베른의 작품이 널리 읽혀지고, 영화나 드라마도 재탄생되는 이유는 근대 과학적 지식에 모험과 판타지를 결합한 소설을 시도했기 때문이다. 베른의 ‘경이의 여행’ 시리즈는 독자의 이목을 끌 수 있는 흥미로운 관심사에 자신만의 상상력을 첨가하는 스토리텔링이 만난 환상적인 작품이다. 독자는 베른이 창조한 세계가 허구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진짜 같은 허구’의 세계에 매료된다. 소설 속 세상을 마치 실존의 세상으로 믿는 ‘베르니안’(그의 넘치는 상상력에 심취되어 소설 속 세상을 마치 실존의 세상으로 믿는 사람들을 지칭하는 단어)이라 불리는 독자들까지 생겨날 정도이다.

 

『지구 속 여행』에 당대의 과학자 이름이 실명 그대로 나온다. 그리고 아이슬란드의 지리적 환경과 화산 분화구 주변의 풍경을 장황하게 느껴질 정도로 묘사되고 있는데 이야기에 사실성을 부여하는 효과를 발휘한다. 기상천외한 지구 속 모험이 얼른 시작되기를 바라는 독자라면 이 내용이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다. 하지만 베른의 뛰어난 상상력을 확인할 수 있는 인상적인 장면이기 때문에 주마간산(走馬看山) 격으로 읽을 수 없을 것이다.

 

 

 

 

 

베른의 『지구 속 여행』을 읽었으면,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제3인류』(전 4권 / 열린책들, 2013~2014년)를 읽어보기를 권한다. 『제3인류』를 먼저 읽은 독자라면 이 작품이 베른의 『지구 속 여행』에게 큰 빚을 지고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만큼 SF 소설과 과학소설의 창시자로 인정받고, 지금도 새롭게 변용되는 쥘 베른의 영향력은 경이적이다.

 

 


P.S. 다음 ‘경이의 여행’ 목적지는 달이다. 거대한 포탄을 타고 달에 가볼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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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루주 사건 - 고전추리걸작
에밀 가보리오 지음, 박진영 엮음, 안회남 옮김 / 페이퍼하우스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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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cene #1  추리소설 탐정의 조상 

 

 

 

 

1887년에 아서 코난 도일이 발표한 『주홍색 연구』는 최초로 셜록 홈즈가 등장한 작품이다. 아프가니스탄에서 부상을 입고 송환된 군의관 왓슨 박사가 친구의 소개로 셜록 홈즈의 룸메이트가 된다. 세상에 하나뿐인 자문 탐정 홈즈는 예리한 관찰력으로 처음 만난 왓슨의 이모저모를 알아맞혀 왓슨을 놀라게 한다. 왓슨은 홈즈의 비범한 추리력을 에드거 앨런 포(1809~1849)의 소설에 나오는 주인공이자 탐정인 오귀스트 뒤팽이 연상된다고 추켜세운다. 그러나 홈즈는 뒤팽을 수준 낮은 탐정에 불과하다며 돌직구 디스(Diss)를 시전한다. 그러자 왓슨은 에밀 가보리오(1832~1873)가 쓴 탐정 소설 시리즈의 주인공 르코크(르콕)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어본다. 르코크 또한 홈즈의 디스를 피하지 못했다. 심지어 뒤팽보다 더 심하게 까였다.

 

 

셜록 홈즈는 차갑게 코웃음을 쳤다. “르콕은 형편없는 인물이지요.” 그는 성난 목소리로 말했다. “괜찮게 봐줄 만한 것은 그의 의욕뿐입니다. 나는 그 책을 읽으면서 정말 속이 뒤집혔습니다. 문제는 죄수들 중에서 어떻게 범인을 찾아내느냐는 것이었지요. 나라면 그런 문제는 24시간 안에 해결할 수 있었을 겁니다. 그런데 르콕에게는 여섯 달이 걸렸습니다. 그 책은 탐정들에게 해서는 안 되는 일에 대해 가르치는 교본으로 쓰일 수는 있겠습니다.” (아서 코난 도일  『주홍색 연구』 중에서, 황금가지, 37쪽)

 

 

왓슨은 자신이 좋아하던 소설 속의 두 주인공이 홈'근자감'('근거 없는 자신감'의 준말)에 가까운 홈즈의 독설에 만신창이 되는 모습에 속상해한다. 오귀스트 뒤팽과 르코크. 이 두 사람은 셜록 홈즈를 비롯한 추리소설 탐정의 조상님이다. 뒤팽은 『모르그 가의 살인』에 처음 등장했다. 르코크는 국내 독자에게 생소한 탐정이다. 『르루주 사건』이 첫 등장 작품이며 그 후로 르코크를 주인공으로 한 작품들이 나왔다. 발표연도는 포의 뒤팽이 빠르지만(『모르그 가의 살인』은 1841년, 『르루주 사건』은 1866년) 두 작품 다 세계 최초의 추리소설로 인정한다. 포는 세계 최초의 단편 추리소설, 가보리오는 세계 최초의 장편 추리소설을 썼다.

 

도일은 자신의 첫 탐정소설에 포의 뒤팽과 가브리오의 르코크를 이제 막 세상에 처음으로  등장한 홈즈와 비교당하는 과감한 장면을 삽입했다. 홈즈 시리즈가 나오기 전까지만 해도 포와 가브리오의 작품들이 대중적으로 큰 인기를 얻었다. 아마도 이 두 작품이 나오지 않았다면 도일의 홈즈는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비록 홈즈에 의해 처참히 짓밟히는 대접을 받게 되지만, 도일은 탐정소설의 원조를 잊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결국 홈즈의 탄생이 뒤팽과 르코크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은 점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이다.

 

 

 

 Scene #2  “나도 한때 홈즈보다 인기가 많은 시절이 있었다오.”  

 

추리소설을 즐겨 읽은 지 얼마 안 된 독자라면 르코크는 ‘듣보잡’으로 보이겠지만, 추리소설 덕후 수준의 독자라면 르코크를 기억해야 한다. 사실 국내에 처음 소개된 추리소설이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아는 홈즈가 아니라 르코르였다. 그리고 홈즈가 나오기 전까지만 해도 인기 많은 탐정이 가보리오의 르코크였다.

 

신소설 작가 이해조(1869~1927)가 1913년에 『르루주 사건』을 『누구의 죄』라는 제목으로 우리나라에 처음 선보였다. 그 후 『금수회의록』의 작가 안국선(1878~1926)의 아들 안회남(1910~?)이 1940년에 다시 소개했다. 조선일보사 계열의 출판사인 조광사에서 내놓은 ‘세계 걸작 탐정 소설 전집’의 첫 번째 책이었다. 르코크의 한국 정착(?)은 여기가 끝이 아니다.

 

추리 소설가 김내성이 1948년에 『마심 불심(魔心 佛心)』이라는 제목으로 ‘번안’ 작품을 썼다. 6.25 전쟁 중인 1952년에 『르루주 사건』은 재등장한다. 제목은『복면 신사』. 안회남의 번역본을 제목만 바꾼 채 그대로 재출간했는데 1960년대 초반까지 재판이 나왔다. 그런데 책은 안회남이라는 이름 석 자를 볼 수 없고 다른 번역자의 이름이 남아 있다. 이유는 그가 월북 작가였기 때문이었다. 그 당시 월북 작가나 예술가는 실명 그대로 공식석상에 거론될 수 없었다.

 

이렇듯, 르코크의 국내 번역 역사는 홈즈보다 훨씬 더 오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게다가 르코크 시리즈는 가정 비극에 치우친 소재와 멜로드라마의 요소가 곁들인 이야기의 전개가 큰 특징인데 국내 독자의 취향을 저격하기에 적당한 최적의 조건이었다. 그러나 홈즈와 그 밖의 탐정소설이 등장하기 시작하면서 르코크는 퇴역하는 형사가 된 것처럼 한물 간 주인공이 되었다. 조상 대접 받지 못한 르코크를 2011년에 안회남의 번역으로 되살렸으나 이 책마저도 품절되었다. 역사적 가치가 있는 르코크가 재평가를 받고, 더 이상 잊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출간했다고 밝힌 머리말이 무색해지고 말았다. 

 

 

 

 Scene #3  『르루주 사건』의 주연은 타바레다

 

작품은 르루주라는 과부가 피살되면서 의문의 사건이 시작된다. 예심판사 다브롱, 제르롤 경부 그리고 주인공 르코크 형사가 이 사건을 맡는다. 사건이 점점 미궁에 빠지자 티모클레어라는 ‘경시청의 숨은 고문’이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등장한다. 티모클레어는 가명이고, 원래 이름은 타바레이다. 그는 탐정을 취미로 하는 괴짜 노인이다. 어떤 사건을 해결하면 그에 대한 금전적 대가를 받지 않는다. 괴이한 범죄 사건을 해결하는 것이 그의 유일한 오락이다.

 

『르루주 사건』은 르코크의 등장을 알리는 첫 작품으로 알려졌지만, 직접 작품을 읽어보면 가장 비중이 많은 진짜 주인공은 르코크가 아니라 타바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르코크는 조연에 불과하다. 르코크는 소설 초반부에 자신의 스승인 타바레를 사건 해결의 조력자로 불러들이고, 중간에 르코크가 사건을 해결하는데 도움을 주는 것이 전부다. 그러나 르코크가 타바레의 조수임에도 불구하고 홈즈를 껌딱지처럼 붙어서 따라다니는 왓슨과 같은 역할을 하지 않는다. 즉, 이 소설에서 르코크의 등장 횟수가 많지 않다는 것이다.

 

 

 

 

 

도일은 『주홍색 연구』에서 르코크를 언급했고, 탐정 소설의 역사를 정리하고 관련 작품들을 분석한 월러드 헌팅턴 라이트(1888~1939, 파일로 밴스를 창조한 추리소설가 S.S. 밴 다인의 원명. S.S. 밴 다인은 라이트의 필명)마저 르코크를 뒤팽을 훌륭하게 계승한 『르루주 사건』의 주인공이라고 말했다. (『위대한 탐정 소설』 북스피어, 49쪽) 반면 르코크 시리즈 첫 작품에서 사건을 해결한 타바레에 대한 언급이 단 한 줄도 없다. 가보리오가 쓴 범죄소설 시리즈의 주인공은 르로크를 기억해야겠지만, 『르루주 사건』에 비중 있게 등장하는 타바레의 존재를 잊어서는 안 된다. 타바레의 존재가 있었기에 그 다음 시리즈물에서 아마추어 풋내기 형사 르코크가 훌륭한 탐정으로 성정할 수 있었다. 

 

『르루주 사건』에 등장하는 타바레는 홈즈의 모습이 연상될 정도로 완벽한 탐정형 인물이다. 아니, 도일의 홈즈가 타바레의 모습에서 따온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타바레가 사건 현장을 관찰하는 모습을 보라.

 

그(타바레)는 경쾌한 걸음으로 뛰어 들어가듯이 구석방으로 들어가서는 약 반 시간 동안이나 걸려 차근차근히 검사를 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돌연 밖으로 뛰어나갔다가는 뒤로 물러서고 또 나갔다가는 들어가고 재삼재사 들어갔다 나왔다 하면서 혹시 범인의 작은 냄새라도 남아있지 않은가 코를 쫑긋거리는 모양은 마치 짐승을 쫓아 도는 사냥개와 같았다. (『르루주 사건』 중에서, 36쪽)

 

홈즈도 정상적이지 않는 모습으로 진지하게 사건 현장을 관찰한다. 『주홍색 연구』에서 피의자가 독극물로 살해되었는지 확인하기 위해 입 냄새를 맡고, 주변 현장을 개가 기어가듯이 엎드린 채 범죄와 관련된 흔적이나 증거를 찾는다. 홈즈가 사건 현장을 살피면 그 누구도 건드리거나 말을 걸 수 없다. 분주하면서도 산만하게 보이지만, 홈즈는 경찰도 찾지 못하는 증거를 정확하게 발견한다.

 

런던 경시청은 자신들이 맡은 사건이 해결하기 어려우면 가끔 경시청의 능력을 무시하는 독설을 서슴없이 하는 홈즈를 꼭 찾는다. 그래서 간혹 그의 사건 해결을 탐탁지 않게 보는 경찰 관계자도 등장한다. 『르루주 사건』에서 제브롤 경부는 타바레를 싫어한다. 그의 사건 해결 방식을 믿지 못하고, 자신의 능력과 비교될까봐 은근히 라이벌 의식을 느끼기도 한다.

 

타바레의 또 다른 취미는 범죄에 관한 문헌자료나 서적을 수집하는 것이다. 홈즈도 범죄 관련 기록을 스크랩하고 사건 기록물을 읽는 것을 좋아한다. 그리고 타바레는 독신인데다가 하녀 마네트가 가사를 맡는다. 여자를 싫어하는 ‘차도남’ 독신 홈즈 그리고 그가 사는 하숙집 주인이자 가정부인 허드슨 부인이 연상된다. 이 정도 되면 타바레도 탐정으로 거론되어야 한다.

 

 

 

 Scene #4  어설프지만 인간미가 느껴지는 탐정

 

르코크와 홈즈. 이 두 사람은 서로 성격은 비슷하나 사건 해결 방식은 확연히 차이가 난다. 홈즈는 과학적인 수사 기법과 논리력을 동원하여 사건의 실마리를 깔끔하게 푼다면, 르코크는 특정 인물이 연루된 스캔들이나 음모를 차분하게 하나하나씩 파헤치고 증명한다. 두 사람 간의 탐정 능력을 비교하고, 한 쪽을 더 우월하게 평가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그래도 굳이 홈즈와 비교를 하자면 타바레는 사건 해결 과정 중에 헛다리 짚는 실수를 한다. 르코크도 마찬가지. 다음 작품에서 르코크는 스승처럼 사건을 해결하는 과정에 잘못된 추리를 하고 만다. 냉철한 논리력과 판단을 중시하는 홈즈의 눈에는 르코크가 아마추어 탐정의 티를 벗지 못한 형편없는 수준으로 보였을 것이다.

 

그렇지만,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고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 재수사하는 타바레의 모습에서 따뜻하고 친숙한 인간미를 느낄 수 있다. 자신의 존재를 공개적으로 밝히기를 꺼려하는 괴팍한 노인이지만, 어려운 상황에 처한 사람이 있으면 끝까지 도와주면서 해결 방안을 제시해주는 현자(賢者) 같은 성품을 지니고 있다. 겸손하면서도 남을 돕는 착한 타바레의 성품은 ‘동방예의지국’의 독자들을 매료시키기에 충분했다.

 

뽕나무 밭이 푸른 바다로 변할 정도로 세상은 몰라 볼 정도로 많이 변했다. ‘동방예의지국’은 옛말이 되었고 이제는 ‘예의’보다는 ‘능력’으로 인정받는 시대가 되었다. 아무리 ‘예의’가 좋은 사람이더라도 ‘능력’ 좋은 사람이 훨씬 더 많이 대접받는다. 추리소설에 나오는 탐정의 취향도 시대에 따라 변화되는 것 같다. 우리는 대체적으로 ‘예의’가 있고, 조금 미숙하게 보이는 아마추어 타바레보다는 완벽한 ‘능력’을 보여주는 홈즈 같은 프로를 선호한다. 일반적으로 추리소설이라고 하면 홈즈가 가장 먼저 떠오르고, 탐정이 되려면 홈즈와 같이 똑똑하게 머리가 좋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점점 타바레는 잊혀만 간다. 가끔 따뜻한 마음씨를 가진 이웃 할아버지 같은 타바레 같은 탐정이 다시 나왔으면 좋겠다. 지금 현실로 봐서 이루어지기가 어렵겠지만,『르루주 사건』복간과 나머지 르코크 시리즈 출간을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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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하버쿡 젭슨의 진술 에스프레소 노벨라 Espresso Novella 7
아서 코난 도일 지음, 송기철 옮김 / 북스피어 / 2014년 2월
평점 :
절판


 

 

 Scene #1  심령술에 빠진 추리소설가

 

탐정하면 셜록 홈즈를 떠올리지만 셜록 홈즈하면 코난 도일을 떠올리기는 쉽지 않다. 그만큼 작가 코난 도일이 창조한 ‘완벽에 가까운’ 명탐정 셜록 홈즈는 추리소설의 상징적인 인물인데 반해 그 창조주인 코난 도일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많지 않다. 홈즈를 주인공으로 한 흥미진진한 소설로 부와 명예를 거머쥔 도일은 그러나 “홈즈가 지겨워졌다”고 토로한 바 있다. 홈즈의 인기가 절정에 달하던 1893년. 작가는 『최후의 사건』에서 홈즈를 폭포에 떨어뜨려 죽인다. 작중 인물에 싫증이 난 것일까. 작가의 명성을 압도하는 그에게 질투를 느낀 것일까.

 

그 반응은 상상을 초월했다. 런던 시내에는 검은 상장을 단 수많은 사람들이 등장했고, 군중은 소설 속 홈즈의 집이 있는 런던 베이커가 221B번지로 몰려가 가상의 인물을 연호했다. 항의편지에 시달리던 출판사는 작가를 달래기도 하고 으름장도 놓았다. 그러나 독자들의 원성에 결국 홈즈를 부활시켰다.

 

도일은 ‘홈즈의 작가’가 아닌 ‘역사 소설가’로 불리기를 원했다. 사실 홈즈 시리즈가 나오기 전에 도일은 역사소설로 문단에 데뷔했다. 그리고 초현상을 소재로 다룬 공포소설도 쓰기도 했다. 홈즈는 초현상을 믿지 않을 정도로 이성과 명석한 논리로 무장한 인물인 반면에 도일의 실제 삶은 그렇게 논리적이지만은 않았다. 도일은 말년에 심령술에 무척 관심이 많아 세계심령학회 회장도 지냈다. 1920년대 영국은 심령학이 엄청난 유행이었는데 그 때 ‘코팅리 자매의 요정 사진’이 공개되어 큰 파문을 일으켰다. 코팅리라는 이름의 소녀가 ‘요정’으로 추정되는 사람 형상과 함께 사진에 찍힌 것이다.

 

 

 

 

 

 

하지만 이 같은 사실이 놀라운 것도 아니었다. 한 눈에 봐도 조작된 사진이었으니까. 하지만 도일은 이 사진가 진짜라고 믿었으며 이를 증명하기 위해서 『요정들의 출현』이라는 책도 발표했다. 유명 인사가 사진을 진짜라고 주장하자 꽤 많은 사람들은 믿기 시작했다. 그러나 많은 세월이 흐르자 사진의 위조사실이 밝혀졌다. 코팅리 자매 중 한 사람이 나서서 사진 속 요정은 마분지와 실로 만들어낸 요정이라고 실토했다.

 

많은 사람들, 특히 홈즈의 작가 도일마저 조작된 사진을 쉽게 믿고 만 것일까. 당시 1920년대 영국은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침울한 분위기에 빠져 있었다. 우울한 심리상태는 요정과 같은 신비로운 존재를 믿게 만들었다.

 

 

 Scene #2  초현상적 사건을 소재로 다룬 네 편의 소설

 

간혹 우리는 매사가 불안하며 심약해지만 헛것이 보인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것을 진짜로 믿고 만다. 아니면 현실에서 불가능한 현상에 대한 호기심이 강할수록 가짜라고 해도 일말의 의심도 없이 믿게 된다.

 

아마도 도일은 평소에도 초현상에 관심이 많았을 것이다. 그 중에 『J. 하버쿡 젭슨의 진술』은 세계의 불가사의를 모은 책에서도 종종 소개되는 ‘마리 설레스트 호’ 사건을 소재로 한 작품이다.

 

마리 설레스트 호는 처음 건조되었을 때는 이름이 ‘아마존 호’였다. 후에 ‘마리 설레스테 호’로 이름을 바꾸었는데 1872년에 선박의 승무원들이 감쪽같이 사라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사라지기 직전에 배는 미국 보스턴을 출발해 포르투갈 리스본으로 향하고 있었다. 아조레스 제도 부근에서 항해하는 설레스테 호가 발견되는데 돛을 펼쳐져 있었으나 장난감 배처럼 수면 위에 고정되듯이 멈춰져 있었다. 문제의 배를 발견한 데이 그라티아 호의 선장은 선원들을 시켜 조사하도록 했다. 셀레스테 호를 조사하던 선원들은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배에는 아무도 없었고 갑자기 황급하게 그곳을 떠난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이 배의 승무원은 8명이었으며 선장 브릭스의 처와 5살 된 아들도 함께 타고 있었다.
 
마리 설레스테 호의 수수께끼는 정밀하게 조사를 하면 할수록 의문점이 늘어갔다. 나침반 상자가 망가져 있고 나침반도 고장 나 있었다. 선장실에 항해용 기계류나 측정기가 보이지 않은 채 표류하듯이 배는 그렇게 움직였다. 가장 의심스런 일은 외부의 습격을 받을만한 흔적이 발견되지 않은 점이다. 그리고 구명보트는 없어졌는데도 살아남는데 필요한 식량과 식수를 전혀 가져가지 않았다.

 

사고 원인에 대한 의견도 분분하여 “선원들이 외계인에 의해 납치되었다, 회오리바람이나 거대한 바다뱀이 갑판 위의 선원들을 쓸어갔다, 해적의 소행이다, 선원들이 갑자기 미쳐서 모두 자살했다”라는 등 여러 가지 설이 난무하였으나 아직도 정확한 원인이 규명되지는 않은 미제 사건으로 남게 된다.

 

도일은 마리 설레스테 호의 승객으로 실종된 폐결핵 전문가 하버쿡 젭슨이라는 가상의 인물을 설정하여 그의 진술을 토대로 설레스테 호가 실종된 이유를 독자에게 이야기하듯이 풀어낸다. 물론 화자는 하버쿡 젭슨이다. 

 

젭슨은 남북 전쟁에 참전하여 부상을 당해 치료를 받게 된다. 그의 병상을 돌보던 흑인 노파로부터 젭슨은 용도를 알 수 없는 검은색 돌멩이를 받는다. 노파는 이 돌이 아버지에, 그 아버지에, 또 그 아버지로부터 받은 귀중하고 성스러운 돌이라고 말한다. 자신이 대를 이을 자식이 없기 때문에 노예제도를 반대하는 젭슨에 대한 고마움으로 돌을 주게 되었다. 둥그스럽고 평범하기 짝이 없는 돌을 젭슨은 버리지 않고, 호주머니에 보관한다.

 

상처가 회복된 젭슨은 요양을 겸해서 마리 설레스트 호에 승선하게 된다. 선원을 제외한 또 다른 승객은 흑인의 피가 섞인 혼혈인 셉티미어스 고링이라는 인물인데 그는 정체를 알 수 없다. 자신의 정체를 밝히지 않은데다가 밤이 되면 그의 얼굴에 나오는 음흉한 표정은 소름끼칠 정도로 느껴진다.

 

항해할수록 설레스테 호에 괴이하고도 끔찍한 사고가 발생한다. 선장의 아내와 아들이 실종되고, 가족을 잃은 선장은 실의에 빠져 멘탈이 붕괴되고 만다. 결국 슬픔을 이겨내지 못해 자살하고 만다. 선장을 잃은 설레스테 호는 침울한 분위기가 감돈 채 목적지를 향하지만, 엉뚱하게도 배는 목적지에 완전히 떨어진 아프리카 대서양 쪽에 표류한다.

 

이 때 수수께끼의 인물 고링이 드디어 숨겨왔던 본성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그는 의도적으로 배가 아프리카 쪽으로 향하도록 했다. 자신의 계획을 실행하기 위해서 선장과 그의 가족을 제거했다. 배에 탑승한 선원 중에 고링이 심어놓은 스파이가 있었다. 그래서 나머지 선원과 승객을 한명씩 제거할 수 있었다. 고링은 왜 셀레스테 호에 탑승해서 이런 잔인무도한 음모를 꾸미고 실행하고 있었던 걸까? 그는 젭슨이 가지고 있는 검은 돌 하나 때문에 치밀한 살인 음모를 꾸몄던 것이다. 사실 저 평범해 보이는 검은 돌 속에 어마어마한 비밀이 숨겨져 있었다.

 

『가죽 깔때기』는 오컬트적 분위기가 느껴지는 소설이다. 라이어넬 데이커는 탐험가 로버트 리플리처럼 진귀하고 마술적인 물건을 수집하고, 초현상에 관심이 많은 인물이다. 그가 수집한 물건 중에는 용도를 알 수 없는 가죽 깔때기가 있는데 데이커는 친구인 ‘나’에게 깔때기에 관한 불가사의한 비밀을 언급하는데 자세하게 설명해주지 않는다. ‘나’의 호기심만 불러일으키게 만들면서 직접 불가사의한 일을 경험해보라고 제안한다. 친구의 제안에 어쩔 수 없이 ‘나’는 받아들이는데 머리맡에 깔때기를 둔 채 잠을 자는 것이다.

 

‘나’는 꺼림칙하게 여기면서 잠을 청하는데 기괴한 내용의 꿈을 꾼다. 죄인으로 추정되는 여인과 그녀를 벌하기 위해서 검은 옷을 입은 몇 명의 사내가 등장한다. 목마에 포박당한 여인의 옆에는 물을 가득담은 세 개의 양동이와 국자가 있다. 그리고 사내 한 명이 문제의 가죽 깔때기를 여인의 입 속으로 찔러 넣는데... 끔찍한 벌을 받는 여인의 정체는 무엇이며, ‘나’가 목격한 꿈의 내용은 어떤 장면일까?

 

『경매품 249호』는 미라가 등장한다. 옥스퍼드 올드칼리지 기숙사에 미라가 있다. 흑마술에 탐닉하는 올드칼리직 학부생 벨링엄은 자신의 방에 미라를 보관한다. 그것이 기숙사 전체를 발칵 뒤집는 무시무시한 사건의 전말이 될지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 ‘경매품 249호’라는 상표가 붙인 미라는 어떤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살아 움직인다(?) 그리고 기숙사에 살고 있는 학생들을 공격한다. 주인공 스미스는 기숙사에 발생하는 괴사건을 비웃었지만 자신도 공포스러운 일을 경험한다. 벨링엄의 방에 보관된 미라가 자신을 뒤쫓고 있는 것이 아닌가! 미라는 왜 기숙사 학생들만 골라 습격하는 것일까? 그리고 미라를 움직이게 만드는 자는 누구인가?

 

『북극성호의 선장』은 도일이 젊은 시절에 고래잡이배에 탔던 경험이 반영된 소설이다. 소설 배경과 전개가 『J. 하버쿡 젭슨의 진술』과 유사하다. 의학도 존 멜리스터 레이가 북극성호에 탑승하면서 겪었던 일을 일기 형식으로 쓴 것이다. 배는 거대한 얼음 덩어리가 떠다니는 곳에 갇히고 만다. 주위에는 온통 하얀 빙하만 있을 뿐이다. 유빙이 배에 부딪히는 순간, 차가운 바다 한가운데로 침몰할 위기에 놓여졌다. 그런데 북극성호의 선장은 제정신이 아니다. 밤마다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거대한 얼음의 땅을 향해 멀뚱히 지켜보기만 할 뿐이다. 얼른 빙하의 세계를 탈출해야 할 시급한 상황에 선장은 엉뚱한 행동을 하고 있다니. 존은 선장의 모습에 어이 없어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더 어이없는 사건이 하나씩 발생하기 시작한다. 선원이 유령을 목격했다는 등 항해가 지체될수록 선상에 불가사의한 분위기가 지배한다. 항해하면서 일용할 식량도 얼마 남지 않은 상황에 설상가상으로 선장이 실종되고 만다. 선원들은 배에 저주를 받았다고 두려움에 떤다. 북극성호도 마리 설레스트 호처럼 저주받은 배가 된 것일까? 그리고 선장과 선원을 두렵게 만든 유령의 정체는 무엇일까?

 

 

 Scene #3  '오컬트 소설가' 코난 도일

 

네 편의 작품에 장르를 구분하자면 똑부러지게 말하기가 애매모호하다. 『J. 하버쿡 젭슨의 진술』은 마리 설레스트 호 사건을 도일 나름의 상상력을 가미해서 흥미 본위로 쓴 소설이다. 이 불가사의한 사건을 정확하게 밝혀주는 것은 아니지만, 고대 마술과 심령술에 대한 코일의 독특한 관심을 보여주는 첫 작품이다. 훗날 『가죽 깔때기』와 『경매품 249호』그리고 홈즈 시리즈에 포함되는 일부 작품들에서도 이야기의 소재로 등장한다.

 

네 편의 소설은 공통적으로 초현상을 믿지 않는 이성적인 인물과 그것을 믿고 두려워하는 인물이 뚜렷하게 대비된다. 그러나 이성적인 인물도 초현상을 경험하고 목격하는 순간 믿게 된다. 상당히 이성적일 것 같은 도일이 평생 심령술에 푹 빠진 채 살았던 그의 이력을 생각한다면 도일의 작품 세계는 흥미진진하다. 도일은 챌린저 교수가 등장하는 SF소설도 쓸 정도로 장르소설의 시초로 평가받을만하다. 그동안 홈즈 시리즈만 읽은 독자라면 잠시 홈즈를 잊고 도일의 또 다른 작품들도 읽어본다면 특별한 매력을 느낄 것이다. ‘역사소설가’가 되고 싶어하던 도일의 수식어에 ‘오컬트 소설가’라고 하면 본인은 만족스러워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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