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익을 굽는 여자
마가렛 애트우드 지음 / 새와물고기 / 1993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먹다. 듣기만 해도 좋은 말이다. 음식 먹는 생각에 입안에 침이 고인다. ‘먹는 것’은 삶을 위해 영양분을 섭취하는 생리적 행위다. 그러나 ‘먹다’가 꼭 좋은 의미의 단어로만 사용하지 않는다. ‘여자를 (따)먹다’ 현대에 와서 생겨난 단어 같지만, 조선 시대 때 만들어진 불교 찬가인 <월인천강지곡>에 수록되어 있다. 원래는 ‘여자의 정조를 빼앗다’를 속되게 표현한 말이었는데, 오늘날에는 여성과의 성관계를 이르는 말이 되었다. 남성은 지배 욕구가 강해 소유와 정복에서 큰 만족감을 느낀다. 아내에 대한 사랑이나 애정과 무관하게 다른 여성에게도 성적 충동을 느끼기 마련이다. 이는 정복 욕구와 자손을 널리 퍼뜨리고 싶은 잠재의식에서 비롯되는 심리적 반응이다. 인간, 아니 남성이 이룩한 대부분 문화 속을 곰곰이 들여다보면 섹스와 관련된 언어 표현들이 차고 넘친다.

 

만약에 《The Edible Woman》이라는 제목의 영어권 소설을 우리말로 번역하려면 어떻게 써야 할까? ‘Edible’는 ‘먹다’의 형용사 표현이다. 특히 어떤 음식에 독성 물질이 함유하는지를 확인할 때 사용한다. 그래서 정확하게 의미를 설명하면 ‘독성 성분이 없어서 먹을 수 있는’이 된다. ‘The Edible Woman’을 직역하면 ‘먹을 수 있는 여성’ 혹은 ‘식용 여성’이다. 우리말로 바꾸기가 상당히 곤란한 제목이다.

 

 

 

 

 

《The Edible Woman》는 캐나다 출신 작가 마거릿 애트우드가 1969년에 발표한 첫 장편 소설 작품이다. 그녀의 대표작 《시녀 이야기》가 국내에 널리 알려져서 흔히 이 작품이 애트우드의 첫 장편으로 생각하는 독자가 있을 것이다. 《시녀 이야기》는 애트우드의 여섯 번째 소설이며, 1985년에 발표되었다. 애트우드는 1961년 <Double Persephone>라는 시집을 발표해 시인으로 문단에 등단했다. 그녀의 시집은 캐나다 문학비평가 노스럽 프라이의 찬사를 받기도 했다. 네 권의 시집을 발표한 후에 애트우드는 첫 장편을 선보였는데, 그 작품이 바로 《The Edible Woman》이다.

 

 

 

 

 

 

 

 

 

 

《The Edible Woman》는 의미 있는 애트우드의 첫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국내에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1993년에 《케잌을 굽는 여자》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었으나 많이 팔리지 않았는지 헌책방에서 구하기 힘들고, 심지어 이 책을 소장하는 공공도서관도 많지 않다. 이 책의 실체를 알아보기 위해 오랜 탐색 끝에 《케잌을 굽는 여자》가 대구남부도서관 서고에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 현행 외래어 표기법을 따르면 ‘케잌’을 쓰면 안 되고, ‘케이크’로 써야 한다. 여기서는 특별히 책 제목을 언급할 때 ‘케잌’으로, 본문에는 ‘케이크’로 쓰겠다)

 

소설은 주인공 마리안 맥컬핀(Marian MacAlpin)의 1인칭 시점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마리안은 세이머 설문조사 회사의 직원인데 설문조사 질문을 만드는 일을 한다. 애인슬리(Ainsley Tewce, 번역본에는 ‘애인슬리’로 표기되었다)는 마리안과 같은 집에 사는 룸메이트 여성이다. 두 여성이 사는 집에 가끔 마리안의 남자친구이자 약혼자인 피터(Peter Wollander)가 찾아온다. 피터란 인물은 마리안의 속마음을 간파하지 못한 눈치 없는 놈으로 등장한다. 피터와 마리안은 성격 차이로 종종 말다툼하기도 한다. 여기까지만 보면 흔한 남녀 커플을 보는 것 같다. 마리안과 애인슬리과 같은 대학교 친구인 클라라(Clara Bates)는 죠(Joe)와 결혼하여 벌써 세 명의 아이를 둔 유부녀다. 마리안은 완전히 다른 삶을 사는 두 친구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자신의 미래를 걱정한다. 애인슬리는 훌륭한 혈통에다가 외모가 좋은 남자와 결혼해서 우수한 유전자를 가진 자식을 낳는 것을 원한다. 마리안은 애인슬리가 잘못 생각하고 있다고 말하면서도 크게 반대하는 입장을 드러내지 못한다. 그러면서 자신의 결혼관이 현실적으로 타당한지 고민한다.

 

마리안은 주변 환경에 따른 심적 변화가 유독 큰 인물이다. 한 남편의 아내이자 세 자식을 키우는 어머니로서의 클라라를 지켜보면서 마리안은 모성의 중요성을 느낀다. 그래서 죠가 클라라 대신에 아이를 키우는 모습을 이상하게 생각한다. 오히려 엄마보다 아빠와 함께 지낸 시간이 많은 아이가 성장하면 정신적으로 혼란이 느낄 수 있다고 착각한다. 사실 마리안의 착각은 고정된 남성성과 여성성에 대한 믿음에서 비롯된 기우(杞憂)다. 한때 그녀는 모성애가 여자가 꼭 갖춰야 할 여성상이라고 믿고 있다.

 

그런데 마리안은 자신의 여성 정체성이 구체적으로 어떤 건지 진지하게 고민한다. 여성 정체성을 인정하지 않는 남성들의 시선과 반응에 점점 거부감을 느끼기 시작한다. 마리안은 자신이 처한 상황을 무척 불편하게 여긴다. 그녀 주변에는 피터, 애인슬리, 거기에다가 그녀를 좋아해서 따라오는 대학원생 던컨(Duncan)까지 합세한다. 마리안은 그들에게 둘러싸일수록 예민한 감정을 드러낸다. 마거릿 애트우드는 마리안이 겪는 심적 변화를 세밀하게 묘사했다. 마리안의 심리 상태가 주를 이루는 이야기의 전개가 지루하게 느껴지지만, 독자는 직접 마리안이 되어 그녀가 무엇 때문에 불만을 느끼는 건지 이해해야 한다. 그녀의 심리 변화를 따라가고 파악하는 것이 《The Edible Woman》을 읽을 때 독자가 주목해야 할 부분이다.

 

마리안은 고정된 여성성을 강요하는 사회에 억압받는 여성을 상징한다. 그녀는 무척 외롭다. 마리안은 혼자 침대 밑에 숨어서 편안함을 느끼고 있었는데, 그녀의 기이한 행동에 실망한 피터는 그녀가 ‘여자다움’을 거부한다고 화냈다. 피터가 생각하는 ‘여자다움’은 ‘정상적인 여성성’이다. 누구나 가구 또는 옷장 안에 숨는 것을 좋아했던 어린 시절이 있다. 여자뿐만 아니라 남자도 가끔 어둡고 좁은 공간에 들어가서 혼자만의 자유를 느끼고 싶어 할 때가 있다. 마리안에게 침대 밑 좁은 공간은 편안한 자유를 만끽할 수 있는 ‘자기만의 방’일 수 있다. 그런데 피터는 마리안의 행동을 ‘비정상적 여성성’, 속되게 말하면 ‘미친 여자’가 할 법한 일로 생각한다. 여성의 자유를 누리는 공간의 의미 자체를 무시해버린다.

 

남성 중심 사회는 여성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고, 여성의 몸과 정신을 소유한다. 남자는 늘 여자를 빤히 쳐다본다. 그리고 그 여자가 ‘여자다움’을 가졌는지 눈으로 쓱 확인한다. 남자가 공통으로 생각하는 ‘여자다움’이란 일단 예쁘고, 몸매가 좋아야 한다. ‘여자다움’을 소유하고 싶은 욕망이 지나치면 힘과 폭력을 동원하여 여자를 위협하기까지 한다. 반대로 ‘여자다움’이 없는 여자를 만나면 마치 피하고 싶었던 불량품을 만난 것처럼 불쾌감을 느낀다. 이러한 남성들의 혐오감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받은 여성은 일상적인 삶이 불가능해진다. 몸매에 대한 집착 혹은 혼자 감당하지 못할 정신적 스트레스 등으로 인해 거식증에 시달린다. 마리안도 거식증에 가까운 증세를 보인다. 여성을 ‘남성을 만족하게 해주는 상품’ 또는 ‘수동적인 인형’으로 바라보는 남성의 세계를 감당하기 위해서 마리안은 최후의 방법을 실행한다. 그것이 바로 자신의 모습과 닮은 케이크를 구워서 주변 사람들에게 먹여 보는 일이다.

 

이제 밋밋한 하얀 육체가 완성되었다. 접시 위에 부드럽고 달콤하게 그리고 뚜렷한 형태가 없이 누워 있는 그것은 약간 음란해 보였다. 그것에게 옷을 입히기 시작했다. 케이크 데코레이터에 밝은 핑크색 아이싱을 채웠다. 처음엔 비키니를 칠해 넣었지만 너무 빈약했다. 가운데 몸통 부분도 칠했다. 이제 보통 수영복같이 되었지만 아직도 정확히 그녀가 원하는 모양은 아니었다. 계속 위아래로 넓혀가서 원피스 모양이 되었다. 입만 있고 머리카락도, 눈도 없는 케이크는 괴상하게 보였다. 케이크 장식기를 씻고 초콜릿 아이싱을 채웠다. 코와 속눈썹이 많이 달린 눈, 그리고 양쪽 눈 위에 각각 눈썹을 그려 넣었다.

 

부엌으로 가서 접시를 마치 그것이 미사에 사용하는 신성한 어떤 것인 것처럼, 받침으로 받쳐진 성상이나 화관이나 되는 것처럼 조심스럽고 경건하게 받쳐들고 돌아왔다. 무릎을 꿇고 접시를 피터 앞에 있는 커피테이블에 내려놓았다.

 

“당신은 나를 파멸시키려고 했어요.” 그녀(마리안-서평 작성자 주)가 말했다. “나를 당신에게 동화시키려고 했죠. 하지만 난 당신에게 줄 대체품을 만들었어요. 당신이 훨씬 더 좋아할 것으로요. 이것이 당신이 내내 정말로 원했던 것이에요. 그렇지 않은가요? 포크를 드리죠.”

 

(《케잌을 굽는 여자》 397~398, 400쪽 편집 인용)

 

 

 

 

피터는 마리안이 만든 케이크를 먹지 않는다. 마리안은 자신이 만든 케이크를 보는 순간, 한동안 잊어버린 허기를 느끼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케이크를 포크로 떼어내 먹기 시작한다.

 

 

“마리안, 거기 있는 게 뭐지?” 그녀(애인슬리-서평 작성자 주)가 걸어와서 케이크를 내려다 보았다.

 

“여자잖아. 케이크로 만든 여자!” 그녀는 마리안을 이상한 표정으로 쳐다봤다.

 

마리안은 케이크를 씹어 삼겼다. “좀 먹어봐.” 그녀가 말했다. “맛이 정말 좋아. 오늘 오후에 내가 만든 거야.”

 

애인슬리의 입이 마치 그녀가 본 모든 것의 의미를 꿀꺽 삼겨 버리려고 하는 것처럼 물고기같이 벌어졌다가 닫혔다. “마리안!” 그녀가 공포에 질려 소리쳤다. “넌 네가 여자라는 사실을 거부하고 있구나!”

 

마리안은 다시 접시를 내려다보았다. 그 여자는 한쪽 다리가 없어진 채 여전히 멍한 미소를 지으며 누워 있었다. “당치 않아.” 그녀가 말했다. “이건 케이크일 뿐이야.”

그녀는 몸통에 포크를 찔러넣어 깨끗하게 머리로부터 몸통을 잘라냈다.

 

(《케잌을 굽는 여자》 401~402쪽)

 


유일하게 마리안의 케이크를 먹은 사람은 던컨이었다. 마리안은 던컨이 게걸스럽게 케이크를 먹는 장면을 흐뭇하게 바라본다. 케이크를 다 먹어치운 던컨이 말 한마디를 남기면서 소설은 끝이 난다.

 

“고마워요.” 그가 입술을 핥으며 말했다. “맛있었어요.” (‘Thank you,’ he said, licking his lips. ‘It was delicious.’)

 

자신의 대체물인 케이크가 남자인 던컨에게 먹히면서 사라지는 과정을 지켜보는 마리안의 태도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마거릿 애트우드는 독자에게 정확한 해석을 요구하지 않을 것이다. 마리안은 자신과 닮은 케이크를 만들어 ‘여성이 남성에게 먹히는 관계’를 거부했다. 그녀는 자신의 행위에 스스로 만족하겠지만, 케이크를 굽는 행위만으로 남성이 지배하는 사회를 극복하기가 어려워 보인다. 남성 중심 사회에 벗어나지 못하는 여성의 숙명적인 고난이다. 여자는 언제 어디서든 남자에게 먹히기 쉽다. 남자는 여자에게 술을 잔뜩 먹여 취하게 만든 뒤에 ‘골뱅이’로 만들어 먹으려고 한다. 그리고 여성을 먹은 소감을 영웅담을 들려주듯이 떠벌린다. 이런 세상에 여자들이 누굴 믿고 살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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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2016-06-14 20: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월인천강지곡에 그런 말이 있었군요.. 예전에 중세국어문법 공부한다고 형태소 분석 열심히 했었는데 그때는 미처 못 봤네요.. ^^;;

cyrus 2016-06-14 20:29   좋아요 0 | URL
성적 표현의 유래가 궁금해서 인터넷에 검색해봤습니다. 출처가 인터넷이라서 오류일 수도 있습니다. ^^;;

아무 2016-06-14 20:34   좋아요 0 | URL
표준국어대사전에 검색하니까 어원으로 월인천강지곡이 나오네요. 제가 학부생 때 공부를 설렁설렁한 걸로.. ㅎㅎ

cyrus 2016-06-15 12:52   좋아요 0 | URL
중세국어문법을 공부했다는 사실 자체가 대단한 거죠. 그때 배운 내용을 다 기억할 수 없어요. ^^

표맥(漂麥) 2016-06-14 22: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먹음직한... 표현이 바로 떠오르는군요...^^ 윽! 돌 날아오는 ===333

cyrus 2016-06-15 12:53   좋아요 0 | URL
주어가 없어서 오해를 살 뻔 했습니다. ㅎㅎㅎ

페크pek0501 2016-06-15 12: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서 아들에 비해 딸을 키우기 힘든 세상입니다. 언제가 되면 딸을 마음놓고 키울 수 있는 세상이 되려나요?

cyrus 2016-06-15 12:58   좋아요 0 | URL
어머니가 휴대폰을 놔두고 외출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제 여동생은 밤늦게 친구 만나고 집에 들어옵니다. 이러면 제가 불안해집니다.
 
noboby여도 좋고, anywhere여도 그만이다

 

 

 

 

 

 

 

 

 

작년 헌책방에서 파트릭 모디아노의 소설 번역본을 만난 적이 있었습니다. 번역본 제목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입니다. 누구나 제목만 보면 프루스트의 소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책 뒤편에 소설 원제가 있습니다. ‘Rue Des Boutiques Obscures’ 사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원작은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입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1984년 한국출판공사에서 나온 번역본입니다. 펼쳐 보면 세로쓰기로 되어 있습니다.

 

지금도 제가 자주 가는 헌책방에 가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주인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좀 오래된 책이라서 새 주인을 만나기가 어려울 듯합니다. 아무래도 제가 이 책을 책장으로 모셔야 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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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ra 2016-06-11 12: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박이라고 할 만 하네요

cyrus 2016-06-11 16:35   좋아요 0 | URL
의외의 발견이었습니다. 알라딘에 없고, 아무도 모르는 책을 찾는 것이 헌책방의 묘미입니다. ^^

yureka01 2016-06-11 13: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게요제목에서 받는 뉘앙스 차이가 참 크네요.ㅎㅎㅎ

어두운 상점의 거리라니,,,의외네요....

cyrus 2016-06-11 16:39   좋아요 0 | URL
역자 입장에서 번역보다 제일 힘든 일이 제목을 정하는 일일 겁니다. 원작 제목 그대로 우리말로 옮기는 것이 불가능한 상황이 생길 때도 있습니다. 그러면 의역을 하거나 역자가 임의대로 제목을 정합니다. ‘obscure’라는 단어를 불어사전을 찾아봤는데, ‘무명의’, ‘이해하기 힘든’이라는 뜻이었습니다. 김화영 교수는 ‘어두운’으로 옮겼어요.

북깨비 2016-06-11 13: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80년대 출판된 세로 쓰기 책이라고 하시니까 어릴 때 부모님 책장에서 보던 세로쓰기로 된 문학전집이 기억이 나네요. 읽진 않고 말그대로 그냥 보기만 봤던.. ^^;; 양장은 양장인데 지금 생각하면 종이질은 뭔가 골판지 같은 느낌? 한 권 한 권 사전처럼 삼면으로 된 상자에 들어 있었던 거 같아요. 요즘처럼 고급 판형은 아니고요 그냥 한자가 나와서 어른이 되야 읽을 수 있나보다 생각하고 저는 어린이 전집만 팠지요. ㅎㅎ 뭔지도 모르고 헤세라는 이름은 어디서 들은 것 같아 수레바퀴 아래서를 펼쳐본 기억이 납니다. 제가 이렇게 책을 좋아하게 될 줄 그 때 알았더라면 (그 전집이 언제부터 안 보이기 시작했는지 기억이 안나지만) 그냥 처분하시게 내버려두지 않았을텐데요. ㅠㅠㅠ 이 책 보니까 옛날 생각나고 그러네요.

cyrus 2016-06-11 16:43   좋아요 1 | URL
저도 그런 책을 가지고 있습니다. 외국 작가의 단편 소설을 모아놓은 전집인데 총 12권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세로쓰기로 되어 있는데, 책이 너무 오래 돼서 책 전체가 누렇습니다. 다행히 이 책을 버리지 않고, 박스에 담아 창고에 보관 중입니다. 어렸을 때는 책의 가치를 몰랐는데, 세계문학에 눈을 뜨면서부터 뒤늦게 알았습니다. 다시 읽어보고 싶은데, 꺼내기가 힘든 상태입니다. ^^;;

alummii 2016-06-11 16: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멋지세요!

cyrus 2016-06-11 16:44   좋아요 1 | URL
누구나 책을 좋아하게 되면 이런 소소한 즐거움을 느낄 수 있습니다. ^^


yamoo 2016-06-11 16: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헐~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가 프루스트의 주저 제목처럼 당당히 표지에 인쇄되어 있네요...ㅎㅎ
이런 옛날책이라니~ 좋은 발견 하셨네요^^

cyrus 2016-06-11 16:51   좋아요 0 | URL
저 책을 처음 본 순간, 프루스트 소설 요약본인 줄 알았습니다. ㅎㅎㅎ

양철나무꾼 2016-06-13 16: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cyrus 님, 저 님 서재 명`개썅 마이 리딩`보고 리썅이 떠올랐다나 어쨌다나~(,.)
혹, 그런 의도로 지으신건 아니겠죠?
암튼 전 개리와 길, 음악 들으러 갈랍니다여~^^

전 세로버전 잘 읽어요. 소싯적엔 대부분 세로 읽기가 대세였죠~^^
암튼, 전 님 여러가지 의미루다가...
넘 멋진거 같아요~^^

cyrus 2016-06-13 21:52   좋아요 0 | URL
서재 이름은 아무도 안 볼 줄 알았는데 나무꾼님이 알아주셔서 감동받았습니다. ㅠㅠ

리쌍의 음악은 좋아하는데 가수와 전혀 관련 없어요. 인터넷 은어 `개샹마이웨이`에서 따온 겁니다. 뜻이 `남들이 뭐라 해도 내 갈 길 가겠다`는 그런 뜻입니다. ^^
 

 

 

 

 

 

 

 

 

 

 

 

 

 

 

 

 

 

 

올해는 최명희의 《혼불》이 10권으로 완간된 지 스물 번째 해다. 1990년에 1부와 2부 내용을 담은 네 권의 책이 한길사에서 선보였고, 1996년 12월에 5부 여섯 권의 책이 나왔다. 한길사 판본은 절판되었고, 2009년에 판권이 매안 출판사로 옮겨 재출간되었다.

 

《혼불》 1부는 1981년 동아일보 창간 60주년 기념 장편소설 공모에 당선된 작품이다. 공모전 상금은 2천만 원. 그 당시로선 어마어마한 상금 액수이다. 정식 작가가 되기 전에 최명희는 여자고등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치던 평범한 교사였다. 그런 그녀가 1980년대 초 한국 문단에 파란을 일으키면서 등장할 거라고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1980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소설 부문에 단편 『쓰러지는 빛』이 당선되어 등단하였다. 이듬해에 최명희는 자신의 인생뿐만 아니라 한국 문단 역사에 길이 남을 작품을 남겼다. 그 작품이 바로 《혼불》 1부다. 《혼불》로 주목받은 최명희는 1988년 9월부터 1995년 10월까지 월간 <신동아>에 《혼불》 2부에서 5부까지 연재했다. 소설이 연재되는 데 걸린 세월은 만 7년 2개월. 국내 월간지 사상 최장 연재 기록이다.

 

그녀는 난소암 투병 중에도 펜을 끝까지 놓지 않은 채 원고지에 매달렸다. 병마와 싸우는 고통스러운 집필 끝에 5부까지 마무리할 수 있었다. 《혼불》 10권 완간 이후로 최명희는 5부 이후의 이야기 구상을 염두에 두었으나 그녀의 몸속에 있는 혼의 기운이 거의 소진된 상태였다. 결국, 소설을 끝맺지 못하고 1998년 12월에 세상을 떠났다.

 

《혼불》은 일제 강점기 남원지방을 배경으로 종가를 지키는 여인 3대의 삶을 추적했다. 제목의 ‘혼불’은 사람이 죽기 전 몸에서 빠져나가는 생명을 뜻한다. 작품에서의 혼불은 이른바 정신의 불이며 존재의 불꽃으로 한 인간 혹은 한 민족의 핵이 되는 요체를 상징한다. 안타깝게도 영원히 끝내지 못한 미완성으로 남았지만, 문장마다 스며든 우리말 가락과 치밀하게 복원된 민속 풍습에 대한 묘사가 뛰어나다.

 

 

 

 

 

 

 

《혼불》 1부는 1983년 동아일보사에서 처음 출간되었다. <신동아> 연재 시절에 《혼불》을 접한 독자들의 현재 나이는 대략 50세 초반에서 60대 후반이다. 이들은 동아일보사에 나온 1부를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1990년대에 한길사 《혼불》을 알게 된 독자들은 동아일보사 판본의 존재를 잘 모를 수 있다.

 

 

 

 

 

 

 

 

 

 

 

 

 

 

 

 

 

 

사실 나도 《혼불》 1부가 따로 출간된 적 있는 사실을 최근에서야 알았다. ‘이상한 나라의 헌책방’ 주인장 윤성근 씨의 책 《심야책방》(이매진, 2011)에 《혼불》의 역사를 정리한 글이 있다.

 

 

 

 

 

동아일보사 판본은 매안 출판사 판본으로 읽을 수 있는 《혼불》 1부를 담고 있는 책이다. 그런데 이 한 권의 책을 원하는 독자가 있다. 동아일보사 《혼불》 1부는 《혼불》의 시작을 알리는 최초의 책이다. 당연히 애서가들은 더 이상 구하기 힘든 최초의 책을 가지고 싶어 한다. 그래서 동아일보사 《혼불》 1부도 온라인 헌책 중고가가 악명 높기로 유명하다. 더욱이 초판일 경우, 책의 값어치가 더 오른다. 기본적으로 중고가 금액이 5만 원이며 가장 비싼 가격은 십만 원이 훌쩍 넘는다.

 

나는 동아일보사 《혼불》 1부의 존재만 알고 있었다가 어제 운 좋게도 대구시청 근처에 있는 헌책방 ‘평화서적’에서 샀다. 이 책은 잔뜩 쌓아 올린 책 무더기 제일 밑에 깔렸었다. 이걸 발견하는 순간, 숨이 멎는 줄 알았다. 진짜 이 짜릿한 기분 때문에 헌책방을 안 갈 수가 없다. 악명 높은 금액의 희귀도서를 싸게 살 때가 기분이 더 짜릿하다. 지불한 돈은 천 원짜리 지폐 두 장이었다. 이제 《혼불》 10권을 갖추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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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reka01 2016-04-10 21: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고....그 짜릿함...작가의 부재가 더해지네요....

cyrus 2016-04-12 11:21   좋아요 0 | URL
정말 엄청난 소설을 남기고 떠나셨지요. 박경리의 《토지》와 쌍벽을 이루는 여성 작가의 대하소설입니다. 아마도 다음 시대에는 《토지》와 《혼불》 같은 작품을 쓴 여성 작가가 나오기 힘들 겁니다.

오후즈음 2016-04-10 22: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득템 하셨네요! 이런 득템도 뭘 알아야 할수 있는것 같아요.

cyrus 2016-04-12 11:22   좋아요 0 | URL
헌책방을 자주 찾는 분의 블로그에 정보를 많이 얻습니다. ^^

stella.K 2016-04-11 1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진짜 완전 득템이구만.
혼불이 절판됐나? 이런 건 어느 출판사에서라도 계속 나와야하는데 말야.
오래 전에 1권 읽고 읽어야지 읽어야지 했던 게 결국 못 읽는 신세가 됐군.
변명이지만, 책이 워낙 많이 나오니 뭐 하나를 진득하게 못 붙들고 있겠더군.ㅠ

cyrus 2016-04-12 11:24   좋아요 0 | URL
아니요. 매안 출판사에서 다시 나온 건 지금도 판매되고 있어요.

중학생 때 한길사 판본 1권을 읽으려다가 포기한 적이 있어요. 그때라도 완독 도전해볼 걸 그랬어요. ㅠㅠ

표맥(漂麥) 2016-04-11 21: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혼불... 장길산... 토지... 객주...
저에겐 같은 레벨로 와 닿습니다...^^

cyrus 2016-04-12 11:26   좋아요 0 | URL
조정래의 《태백산맥》도 있지요. 다섯 작품 모두 읽어보고 싶은데 용기가 나지 않습니다. 제가 독서 집중력이 딸려서요. ㅎㅎㅎ
 

 

 

 

애서가라면 세상에 몇 권 안 남은 희귀 도서 한 권쯤 가져보는 것이 일대 소원이다. 희귀 도서가 내 손으로 들어오는 순간, 그 쾌감의 기분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로또에 당첨된 기분이랄까. 너무 기분이 좋으면 자신이 가지고 있는 희귀 도서를 공개해서 자랑한다. 그런데 희귀 도서를 공개하면 여러 가지 문제점이 생긴다. 애서가의 마음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책 한 권 가졌다고 자랑하는 태도를 한심하게 본다. 또한, 적지 않은 돈을 내면서까지 책 한 권을 사려는 모습을 이해하지 못한다. 다른 애서가들은 자신이 가지고 있지 못한 희귀 도서를 획득한 사람을 보면 부러워한다. 그래서 자신이 원하는 희귀 도서를 가진 사람에게 비밀리에 접촉해서 양도해달라고 제안하기도 한다. 단호하게 거절해도 찰거머리처럼 달라붙어 끝까지 요구한다. 특히 희귀 도서에 대한 소유욕이 강한 애서가끼리 만나면 서로 만족하는 협상이 이루어지지 못한다. 책 소유자는 책을 빌려주는 것을 불허한다. 왜냐하면, 상대방이 책을 받자마자 연락을 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책을 원하는 자도 만만치 않다. 쉽게 물러서지 않는다. 소유 집착이 강한 그들은 제본이라도 해서 희귀 도서를 제 손으로 만져보고 싶은 심정이다. 그래서 딱 제본만 할 테니 책을 잠시만 빌려달라고 부탁한다.

 

오늘 희귀 도서를 소개하면, 책을 원하는 사람이 언젠가 나타날 거다. 미리 밝히겠지만, 양도는 물론, 대출도 허락하지 않는다. 일면도 없는 사람에게 내 물건을 빌려주는 일이 쉽지 않다. 불편하다. 책을 공개하는 일이 부담스럽지만, 출판사 이벤트를 응모하기 위해서 처음으로 공개한다. 책 좋아하는 분들이 눈으로나마 즐거웠으면 하는 바람이다. 희귀 도서와 관련된 경험담이 만우절을 위한 거짓말처럼 보일 수도 있다. 거짓말 같아 보여도 실제로 있었던 일이다. 믿으시라.

 

 

 

* 《아무도 대령에게 편지하지 않다》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1977년 초판, 1982년 중판)

 

 

 

 

 

 

이 책은 2014년에 소개한 적이 있다. 그때가 마르케스가 세상을 떠난 지 2주 지났을 무렵이다. 《아무도 대령에게 편지하지 않다》는 마르케스의 초기 중단편 소설들을 모은 정식 작품이다. 번역본은 세로쓰기로 되어 있다. 마르케스의 대표작 《백 년 동안의 고독》보다 일찍 나왔다. 마르케스는 처음에 단편소설로 작가 생활을 시작했다. 그 시기에 나온 결과물이 바로 ‘아무도 대령에게 편지하지 않다’와 ‘마나님의 장례식(마마 그란데의 장례식)’ 등이다. 이 두 작품은 마르케스의 대표 단편으로 알려졌지만, 현재 나오고 있는 마르케스 중단편선집(《꿈을 빌려드립니다》)에 수록되지 않았다. 나는 마르케스의 단편선집을 알라딘 회원 중고로 만 원이라는 가격에 구입했다. 만 원이라면 정말 저렴한 가격이다. 이런 귀한 책은 보통 5만 원 넘어간다.

 

 


* 《시와 깊이》 J.P. 리샤르 (1984년) / 《옥따비오 빠스 : 시와 산문》 옥타비오 파스 (1990년)

 

 

 

 

 

 

‘이상북’의 주인장이자 작가인 윤성근 씨는 민음사 이데아총서 전권을 모은 사람을 만나기가 어렵다고 말했다. 사실 절판된 이데아총서 한 권 가지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운이 좋으면 헌책방에 만날 수 있다. 두 권의 책 모두 대구 헌책방에서 구입했다. 《시와 깊이》는 3,000원, 《옥따비오 빠스 : 시와 산문》는 5,000원이었다.

 

장 피에르 리샤르는 프랑스 신비평(新批評)을 대표하는 비평가다. 리샤르의 신비평이 본격적으로 소개된 것이 바로 1984년에 나온 책 《시와 깊이》다. 신비평이란 연대기 순으로 정리되는 전기적 관점의 기존 비평을 탈피하여 비평가의 특정한 관점으로 작품을 해석하는 비평 방식이다. 쉽게 말하면 작품 자체만 분석하는 것이다. 신비평 주의자들은 문학 작품의 구조를 파악하지, 작가와 그가 살았던 시대적 연관성과 관련된 분석을 거부한다. 리샤르의 《시와 깊이》는 네르발, 보들레르, 랭보, 폴 베를렌을 ‘깊이’(또는 ‘심연’)라는 관점으로 분석한다. 신비평이 낯선 독자들은 리샤르의 책이 어렵게 느껴진다. 사실 나도 보들레르 편만 읽다가 그만둔 상태다. 

 

옥타비오 파스(1914~1998)는 멕시코 출신 시인이다. 1990년에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옥따비오 빠스 : 시와 산문》는 1990년 10월에 출간되었는데 운 좋게도 시인의 수상 소식에 맞춰 나왔다. 사실 어제 3월 31일이 파스가 태어날 날이다. 파스는 칠레의 파블로 네루다와 함께 스페인어권 중남미문학의 대표적 시인이다. 그는 시를 통해서 잃어가는 인간성에 되찾으려고 했고, 초현실주의로 자신만의 시 세계를 구축했다.

 

 


* 《브이를 찾아서》 토머스 핀천 (1991년)

 

 

 

 

 

 

 

이데아 총서 중에 가장 구하기 힘들고, 애서가들이 가지고 싶어 하는 책이 바로 핀천의 《브이를 찾아서》이다. 회원 중고가 3만 원으로 나온 것을 확인하자마자 바로 주문했다. 책을 주문하기 전에 책 상태가 걱정스러웠다. 다행히 심하게 손상된 곳이 없었다. 네이버 검색창에 ‘브이를 찾아서’를 입력하면 관련 글이 고작 네다섯 개에 불과하다. 나머진 추억의 드라마 ‘V’ 아니면 '태권 V'에 관한 내용이 수두룩하다. 그만큼 《브이를 찾아서》를 소장하고 있는 사람이 많지 않다. 그뿐만 아니라 이 작품을 제대로 읽고 이해한 사람도 찾기 어렵다. 윤성근 씨도 처음에 《브이를 찾아서》를 읽는 데 줄거리를 이해하지 못했다고 고백했다. 우스갯소리로 《브이를 찾아서》가 이해 안 되면 핀천 관련 학술논문부터 먼저 읽으라는 말이 전해진다. 핀천의 소설은 미국 포스트모더니즘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평가받지만, 줄거리가 복잡하고 난해하기로 악명이 높다. 윤성근 씨의 《심야책방》(이매진)에 《브이를 찾아서》의 줄거리가 언급된다. 그리고 윤성근 식 《브이를 찾아서》독서법도 소개되었다. 한 번 따라 해 볼 생각이다.

 

민음사 판이 나오기 전인 1984년에 학원사(주우세계문학)에서 두 권짜리 번역본이 출간되었다. 이 책 또한 전설의 희귀 도서다. 학원사 판은 하얀 색 표지로 되어 있고, 주우사로 나온 번역본은 기다란 숟가락이 있는 그림을 표지로 사용했다.

 

 

 

 

 

모 블로거가 두 권짜리로 된 주우사 판 사진을 공개한 적이 있는데, 표지 그림은 살바도르 달리가 그렸다. 사실 작년에 학원사 판을 회원 중고로 구입한 적이 있었다. 가격이 5만 원. 알라딘 굿즈의 유혹을 피하면서 악착같이 모아놓은 적립금을 쓸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일단 주문하는 데 성공했으나, 주문한 지 네 시간 뒤에 판매자로부터 판매할 수 없다는 통보를 받았다. 알 수 없는 이유로 엄청난 책을 손에 놓친 아쉬운 마음 때문에 잠을 설쳐야 했다. 다행히 5만 원 적립금은 돌려받았지만, 허무한 여운이 사라지지 않았다. 판매가 안 되는 이유가 궁금해서 판매자에게 직접 따지고 싶은 심정이었다.

 

 

 

*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특별판》 (2009년)

 

 

 

 

 

 

 

혹시 저 표지 속에 있는 돼지가 ...

 

붉은돼지님...?

 

 

이 책 속에는 좋은 기억, 안 좋은 기억 모두 간직하고 있다. 좋은 기억이란 이 책이 서평 이벤트에 당첨되어서 받은 상품이라는 사실이다. 이벤트 명이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리뷰 이벤트’였고, 2010년 7월 한 달 동안 진행되었다. 알라딘 블로그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지 두 달 뒤에 기분 좋은 성과를 얻었다. 일단 여기까진 좋았다. 문제는 결과 발표 날 그다음부터였다. 8월에 이벤트 결과를 확인하고 한 달이 지나서도 상품이 오지 않았다. 참으면 상품이 곧 올 거라는 긍정적인 마음을 유지했지만, 두 달이 지나도 아직도 함흥차사였다. 어쩔 수 없이 알라딘 이벤트 담당자에게 문의했고, 내 불만사항이 민음사 직원에게 전해졌다. 그 덕분에 이벤트 상품에 관한 메일을 보낼 수 있었다. 그때가 10월 중순이었다.

 

상품이 받지 못해서 화가 나는데, 직원의 회답 메일 내용이 어이가 없었다. 발송이 늦어진 점에 대해 죄송하다고 대충 사과하고, 상품 관련 제세공과금을 내라고 한 것이다. 특별판 정가가 256,000원이었는데, 내가 내야 할 제세공과금은 56,320원이었다. 아, 진짜 속으로 족구를 여러 번 외쳤다. 분명히 이벤트가 진행되었을 때 제세공과금 언급이 없었다. 무척 억울했다. 이벤트 상품을 받는 것이 아니라 사야 한다니. 이게 무슨 시추에이션이란 말인가. 문득 상품 수령을 포기하고 싶은 생각도 살짝 들었다. 일반 사람이라면 그냥 포기했을 것이다. 그런데 너무 갖고 싶어서 내 통장에 고이 모셔둔 비상금을 깼다. 이 기회를 포기하면, 나중에 후회할 것 같았다. 그래서 입금하고 책이 오기를 기다렸다.

 

아, 세금을 보냈는데도 책이 안 와!!!

 

지금도 네이버 개인 메일함에 민음사 직원에게 보낸 메일이 저장되어 있다. 그래서 내가 메일을 보낸 날짜를 기억한다. 12월 2일에 다시 메일을 보냈다. 입금한 지 두 달이 지났는데도 책을 못 받았어요! 이번에는 강경한 자세를 취했다. 빠른 시일 안에 상품이 안 오면 출판사의 늑장 대처를 알리겠다고. 그러자 직원이 다시 한 번 집 주소와 주민등록번호를 알려달라고 요구했다. 저 우리 집에서 장남인데 장난하십니까? 기분을 가라앉히고 개인정보를 알려줬다. 개인정보를 두 번이나 알려달라는 출판사의 태도가 한심하다기보다는 의심스러웠다. 결국, 며칠 지난 후에 책이 도착했다.

 

 

 

 

 

선. 견. 지. 명

 

 

2010년 후반기 내내 특별판 세트 하나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았다. 이 사건 이후로 나는 서평 이벤트를 응모하기 전에 제세공과금 언급이 있는지 꼼꼼하게 본다. 누군가는 내가 세금을 내면서까지 상품에 집착하는 모습이 이상하게 여길 것이다. 생각해 보니 그때부터 내 마음속에 잠자고 있던 책에 대한 애착 본능이 깨어난 듯하다. 지금 상황을 보면 그때 포기하지 않길 잘했다. 특별판 세트는 더 이상 구하기 힘든 책이 되고 말았으니까.

 

민음사에서 일하는 조XX 님. 잘 지내고 계시죠? 네, 제가 바로 상품을 얼른 보내달라고 메일을 보냈던 독자입니다. 조XX 님이 이 글을 보셨으면 참 좋았을 텐데. 제가 특별판 세트를 집에 잘 모셔두고 있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었어요. 사실 오늘 올린 사진 말고도 사서 읽은 민음사 책이 엄청나게 많아요. 그러니까 과거의 일로 인해 열을 올렸던 절 너무 미워하지 마세요.

 

 

 

 

+ 특이한 책 한 권 더. 이 책은 진짜다.

만우절을 노리려고 일부러 조작하지 않았다.

 

 

 

 

 

지금은 절판되어 사라져버린 문학전집 30나보코프의 롤리타. 롤리타책등에 있는 작가 사진을 보시라. 문학전집 31아메리카의 작가 헨리 제임스의 외양과 닮아 보인다. 닮아 보이는 것이 아니라 두 사람 다 '헨리 제임스'다. 책이 잘못 만들어졌다. 나보코프는 헨리 제임스처럼 생기지 않았다.

 

 

 

 

 

뒤표지에 있는 작가 사진에도 나보코프가 아닌 헨리 제임스가 있다...

 

 

 

 

+ 지금까지의 모든 내용들에 거짓이 없습니다. 진짜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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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6-04-01 20: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ㅎㅎㅎㅎㅎㅎ 진짜 희귀책이네요.. ㅎㅎㅎㅎ

cyrus 2016-04-02 08:22   좋아요 0 | URL
마르케스와 핀천의 책은 다시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비싼 돈을 내면서까지 헌책 사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

시이소오 2016-04-01 20: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 대박이셈 ^^

cyrus 2016-04-02 08:22   좋아요 0 | URL
제가 여복은 없어도 책복은 많습니다. ^^

fledgling 2016-04-01 21: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어쩐지... 나보코프 사진이 아니었군요.ㅎ 좋은 정보 굿입니다~^^ 정말 책을 사랑하는 마음이 듬뿍 느껴지네요.

cyrus 2016-04-02 08:24   좋아요 0 | URL
제가 가진 《롤리타》는 2009년 개정판 31쇄입니다. 잘못 만들어진 책도 보기 드물어요. ^^

원더북 2016-04-01 23: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신기하네요. 제가 가진 롤리타의 책등에 있는 작가 사진이 달라요 ㅎㅎ 제껀 2006년 개정판 17쇄이고 나보코프 사진이 맞는데...^^

cyrus 2016-04-02 08:26   좋아요 0 | URL
제껀 2009년 개정판 31쇄입니다. 이 사실을 알리고 싶어서 7년 기다렸습니다. ㅎㅎㅎ

yureka01 2016-04-02 0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책의 깊이를 느낍니다..대단하네요.ㅎㅎㅎ

cyrus 2016-04-02 08:27   좋아요 0 | URL
헌책방에 가면 상당히 오래된 민음사 책을 만납니다. 출간연도가 80년대 초중반 된 것도 있고요. ^^

blanca 2016-04-02 10: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즐겁게 읽었어요.

cyrus 2016-04-02 14:44   좋아요 0 | URL
blanca님의 서재에 민음사 책이 많이 있을 것 같은데, 공개해주세요. ^^

피오나 2016-04-02 1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우! 멋지십니다!!대단대단!!

cyrus 2016-04-02 14:44   좋아요 0 | URL
좋게 봐주셔서 고맙습니다. ^^

카스피 2016-04-02 14: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넘 좋은책 많이 갖고 계시네요^^

cyrus 2016-04-02 14:45   좋아요 0 | URL
다음 수집 목표가 절판된 추리소설, SF, 장르소설을 모으는 것입니다. 카스피님의 글을 많이 참고하고 있습니다. ^^

페크pek0501 2016-04-04 13: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만우절에 글을 올리면 의심을 받을 가능성이 있는 거네요. ㅋ

참 잘생겼어요, 책이.

사진을 잘 찍으신 건가요?

cyrus 2016-04-04 18:12   좋아요 0 | URL
사실 만우절을 노리고 쓴 글입니다. ㅎㅎㅎ
사진은 대충 찍었어요.

붉은돼지 2016-04-05 16: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cyrus 님~ 롤리타 사진 저거 진짜 맞나요????

제가 알기로 민음사세계문학전집 중 절판되고 그 번호로 다른 제목의 책이 나온 것이
`30번 롤리타`와 `42번 감옥에서 보낸 편지` 두 권으로 알고 있는데요. 제가 저 두권 다 가지고 있는데 제가 가지고 있는 롤리타는 헨리 제임스 사진 나오는 거는 아니구요 맞게 되어있어요...

동물농장을 지배하는 짐승들은 돼지죠....
돼지들 ....나중에는 두발로 걷기도 하는... ㅋㅋㅋㅋㅋㅋ

cyrus 2016-04-05 18:35   좋아요 0 | URL
<롤리타> 앞표지는 두 눈이 있는 흑백사진입니다. 2009년 개정판 31쇄입니다. 아마도 제 책이 잘못 만들어진 것 같아요. ^^;;
 
공포특급 1
한국공포문화연구회 / 한뜻 / 1993년 7월
평점 :
품절


 

 

 

 

 

 

내가 2016년 1월 28일에 작성한 글은 추진력을 얻기 위함이었다. 이날 괴랄한 조합으로 만들어진 단어가 튀어나왔다. 비스트셀러(Beastseller). 한때 전국을 강타했던 괴담 집을 말한다. 약속대로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비스트셀러를 오늘 소개해볼까 한다.

 

※ 관련 글 : [‘비스트셀러(Beastseller)’라고 불러다오] 2016년 1월 28일 작성 (북플 이용 시 링크 연결 불가)

 

 

 

 

 

* "그 책을 찾아주세요" Book #25

 

《공포특급 : 93편의 현대판 무서운 이야기 》

한국공포문학연구회, 한뜻출판사 (1993년)

 

 


1990년대를 풍미했다가 돌연 사라진 가수들이 ‘투유 프로젝트-슈가맨’에서 부활하고 있다. 세월 속에 희미해져 간 그들의 노래는 기계음 범벅의 아이돌 가요에 질린 대중의 심금을 휘젓는다. 책의 세계에서도 ‘슈가맨’을 선정한다면 과연 어떤 책이 좋을까. 소개하고 싶은 책이 너무나도 많다. 내가 생각하는 슈가맨, 아니 슈가북은 1990년대 초반 괴담 신드롬을 선풍적으로 불러일으킨 책이다.

 

 

 

 

 

 

남녀노소 공포에 떨게 하였고, 피부에 소름을 돋게 한 최고의 비스트셀러, 《공포특급 : 93편의 현대판 무서운 이야기》를 슈가북으로 소환한다. 이 책은 1993년 7월에 처음 출간되었다. 이 책의 엮은이는 ‘한국공포문학연구회’다. 그런데 이런 명칭을 가진 모임이 실제로 있었는지 확실하지 않다. 우리나라는 일본과 다르게 괴담을 하위문화의 창작물로 인정하기 보다는 킬링 타임을 위한 가벼운 이야기로 인식한다. 아무래도 괴담의 위상을 높이려고 이런 명칭을 썼을 거로 추정한다. 무더위를 한 방에 날려 버리기 위한 첫 번째 필수품이 선풍기와 에어컨이라면, 그다음이 바로 무서운 이야기들이다. 여름에 맞춰 등장한 《공포특급》은 전 국민의 무더위를 식혀주기에 충분한 괴담들로 구성되었다.

 

 

 

 

 

책의 목차가 독특하다. 각 장의 제목은 괴담 속 단골 장소다. 유령이 배회하는 아파트, 무서운 학교, 음산한 별장 그리고 지옥의 도시. 책은 겁 없는 독자를 무시무시한 장소로 데려다주는 ‘공포 특급 열차’ 콘셉트로 설정되었다.

 

공포 특급 열차에 탑승한 독자가 가장 먼저 가는 곳은 유령 아파트의 엘리베이터 문 앞이다. 엘리베이터 안에 ‘그 무언가’가 독자를 기다리고 있다. 

 


 

* 공포의 엘리베이터 1 (13쪽)

 

고층 아파트에 살고 있는 소녀는 왠지 아파트 엘리베이터를 타기가 두려웠다. 혼자서 엘리베이터를 타면 꼭 누군가가 자기를 노려보고 있다는 느낌을 받기 때문이다. 더구나 학교 보충 수업을 끝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밤늦은 시간에는 너무 무서웠다.

 

“엄마, 엘리베이터 안에서 누가 나를 노려보는 것 같아서 무서워.”
“그럼 엄마가 마중을 나갈까?”

 

보충 수업을 마치고 돌아오는 소녀는 엄마가 나와 있는 것을 보고 안심이 되었다. 소녀는 엄마와 함께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문이 닫히고 엘리베이터는 스윽 올라가기 시작했다.

 

“엄마, 이제는 하나도 무섭지 않아.”

 

엄마는 소녀를 그윽이 바라보며,

 

“넌 내가 네 엄마로 보이니?”

 

 

 

풍문에 들은 바에 의하면 엘리베이터 괴담을 믿었던 순진한 아이들은 밤늦게 귀가를 할 때 계단을 이용했다고 하더라. 그리고 자기를 위해 마중 나온 어머니가 진짜인지 귀신인지 꼬치꼬치 물어봐야 직성이 풀리는 아이도 있었다고 한다. 믿거나 말거나.

 

어느 학교에나 가면 학교와 관련된 무시무시한 전설 하나씩은 있다. 학생들은 이승을 떠나지 못한 귀신이 밤마다 떠돌아다닌다고 믿었다. 이 귀신의 소문이 전교생들에게 알려지면 강심장이 아닌 이상 누구도 야심한 시간에 혼자 공부할 수 없었다. 과거의 학교는 학생들이 공부만 하는 건전한 장소였다. 《공포특급》은 건전한 학교를 무시무시한 공포의 장소로 만들었다. 이를 계기로 학교 괴담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다음 이야기는 90년대 초중반에 학창 시절을 보낸 사람이라면 절대로 모를 수가 없는 전설 급 학교 괴담이다.

 

 

 


* 2등의 질투 II (63~64쪽, 글 작성자 임의로 편집)

 

M여중에 다니는 미영이와 수연이는 성적이 우수한 자매였다. 하지만 수연이는 항상 1등을 했고, 미영이는 2등이었다. 하지만 둘은 무척 친하게 지냈다. 어느 화장한 일요일. 둘은 학교 도서실에 나와 함께 공부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잠깐 쉬러 도서실 옥상으로 올라갔다. 활발한 성격의 수연이는 옥상 난간에 올라서서 아슬아슬하게 걷는 장난을 쳤다. 그러다 한순간 수연이는 균형을 잃고 균형을 잃고 넘어졌다. 수연이는 간신히 난간을 잡고 매달려 있었다. 수연이는 미영이에게 도와달라고 간절하게 말했지만, 미영이가 손 쓸 겨를도 없이 땅바닥으로 추락했다. 수연이는 머리가 땅에 박혀 끔찍한 상태로 죽었다.

 

충격적인 사고 이후, 마음의 안정을 되찾은 미영이는 평소처럼 일요일에 도서실에서 혼자 공부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복도 끝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통통통, 드르륵, 없네.”
“통통통, 드르륵, 여기도 없네.”

 

차츰 소리가 가까워지자 미영이는 교실을 뛰쳐 나와 화장실 끝에 숨어 있었다. 얼마 후, 화장실 문을 여는 소리가 들렸다.

 

“통통통, 삐걱, 여기도 없네.”

 

소리는 점점 미영이가 숨은 곳으로 다가왔다. 미영이는 식은땀을 흘리면서 몸을 부르르 떨고 있었다. 어느새 그 소리는 미영이가 숨어 있는 화장실 앞까지 왔다. 미영이는 차마 문을 열어 볼 수가 없어서 문아래 틈으로 밖을 내다보았다. 그 순간, 미영이는 너무 놀라 그만 기절하고 말았다.

 

문아래 틈으로 머리를 숙여 내다보는 순간 땅바닥에 거꾸로 머리를 통통 튀기며 웃고 있는 수연이 귀신과 눈이 마주쳤던 것이다. 눈이 마주친 순간 수연이 귀신이 말했다.

 

“응, 너 여기 있었구나.”


 

 

상상해보시라. 눈앞에 귀신이 거꾸로 선 채 머리를 땅에 찧으면서 다가오는 순간을. 이 괴담이 유행했던 시절에 이 귀신을 모르는 학생들이 없을 정도였다.

 

 

 

 

이 괴담이 큰 인기를 끌게 되자 다양한 바리에이션(variations)이 나왔다. 귀신을 친구로 설정하여 성적지상주의의 경쟁 체제를 비판하는 뉘앙스까지 전달하기도 했다. 또한, 화장실 대신에 교탁 밑에 숨다가 귀신에 발각되는 전개의 괴담도 있었다.

 

《공포특급》에는 김새는 허무한 이야기도 몇 편 있었다. 이런 이야기는 일반적인 괴담같이 공포감을 유발하기 위한 목적을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이야기의 시작은 무섭게 연출을 해보지만, 마무리는 썰렁한 유머로 끝낸다. 그렇다고 해서 허무개그 식의 괴담이 완전 쓸모없는 것은 아니었다. 괴담을 실감 나게 들려주는 능력이 있는 괴담 이야기꾼들(일본에서는 ‘미스터리 텔러’라는 이름의 전문적인 직업이 있다)은 청자들의 경직된 긴장감을 풀어주려고 이런 이야기 하나쯤 해준다.

 


 

* 엄마는 밤마다 밖으로 나간다 (143쪽)

 

 

 

 

 

 

우리가 어렸을 때 한 번쯤 들어본 괴담들은 십중팔구 《공포특급》에서 나오는 것들이다. 비록 아주 오래전부터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오던 괴담들을 모아 한 권의 책에 정리한 수준이지만, 《공포특급》 인기는 예상과는 달리 하늘을 치솟았다. 공포 코드에 재미 들린 국민은 좀 더 자극적이고 색다른 괴담을 듣고 싶어 했다. 여기에 맞춰 《공포특급》 시리즈가 연속으로 출간되었고, ‘공포’가 들어간 각종 아류작까지 무수히 나오게 되었다.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이야기임에도 괴담이 국민에게 미친 파급 효과는 정말 대단했다. 1970년대 말부터 80년대 말까지는 <전설의 고향>이 대한민국의 여름을 책임져 준 공포물이었다면, 90년대 초중반은 도시를 배경으로 한 《공포특급》이 대세였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평범하다고 여기던 학교, 아파트 같은 장소를 공포 이야기의 장소로 내세운 방식은 그 당시로선 획기적인 스토리텔링의 전형이었다.

 

그런데, 어쩌다가 《공포특급》이 우리 곁에서 홀연히 사라졌는가. 그 속에 있는 이야기들은 꾸준히 살아남은 반면, 괴담의 진원지라고 할 수 있는 책은 거의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1993년 한뜻출판사에서 나온 《공포특급》이야말로 대중적인 인기를 얻은 최고의 괴담 집이다. 그러나 큰 인기를 받았던 원조는 ‘미투(me too) 제품’의 함정에 피할 수 없었다. 적지 않은 수의 아류작들에 점차 밀려나는 바람에 자연스럽게 잊히게 되었다. 그리고 이 책을 읽은 괴담 이야기꾼들은 ‘내가 누군가에게서 직접 들은 이야기’ 혹은 ‘실제로 누군가가 겪은 이야기’라는 형식으로 괴담을 들려주기 시작한다. 그러면 청자는 괴담의 진원지가 어딘지 모르는 상태에서 괴담을 이해하고 기억한다. 영상 기술이 나날이 발전되어 갈수록 공포영화 또는 공포 동영상의 수준이 한층 더 높아졌다. 당연히 문자 형태의 괴담 집은 시각적인 공포 효과를 주는 영상 기기의 수준을 따라올 수 없었다. 90년대 후반부터 괴담 집은 점점 퇴행의 길을 걷게 되었고, 어린이 독자들을 위한 유치한 공포물로 전락했다.

 

《공포특급》은 우리에게 많은 양의 괴담들을 남겨주고, 레테의 강물 속에 산화되어 사라졌다. 이 땅에 괴담 문화를 정착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음에도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 그나마 소수의 독자만이 얼마 안 남은 추억의 파편들을 모아 기록으로 남겨 이 책의 존재를 알리고 있을 뿐이다. 《공포특급》이 90년대 대중문화에 끼친 영향을 진지하게 고찰해본 서평이 단 한 편도 없다. 괴담을 아이들이 즐기는 유치한 창작물이라는 편협된 인식이 남아 있어서 그런 것일까. 비록 책 보는 안목이 부족하지만, 우리가 잊고 있었던 《공포특급》의 가치를 확인해보고 다시금 상기하기 위해서 첫 서평을 남겨본다. 출간된 지 무려 22년이나 지난 책의 서평을 남기는 기분이 특별하다. 책의 별점에 대해서 이견이 있을 거로 본다. 이 책의 장점과 가치를 아는 대로 최대한 알리려는 마음을 알아주고 너그러이 이해해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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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16-02-19 20:3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들었던 무서운 이야기네요.
잘 읽었습니다.
cyrus님 , 좋은 저녁시간 되세요.^^

cyrus 2016-02-20 09:49   좋아요 2 | URL
지금은 이런 이야기들은 시시하게 느껴져요.

주말 잘 보내세요. ^^

오거서 2016-02-19 20:5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글 내용에 대한 호불호를 떠나 남들이 시도하지 않는 서평을 남기려는 노력에 먼저 박수를 보냅니다! 열정 없이 불가능한 일이기도 하구요! 수고하셨습니다.

cyrus 2016-02-20 09:52   좋아요 2 | URL
글의 내용을 칭찬하는 것보다 이런 말씀이 더 고맙게 느껴집니다. ^^

clavis 2016-02-19 21:4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흑흑 밤에 이 글을 읽어버렸으니 이 무서움을 어떡하지요ㅠㅠ

cyrus 2016-02-20 09:53   좋아요 2 | URL
괴담도 유행을 심하게 타는 편이라서 90년대 괴담을 무서워하는 사람들이 없을 겁니다.. ^^;;

akardo 2016-02-19 22:01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여름 가까워질 무렵이면 학교 쉬는 시간에 애들이 모여 무서운 이야기를 하곤 했었죠,ㅎ 밤에 무서울 걸 알면서도 호기심 때문에 안 들을 수 없었는데......무서운 이야기는 은근히 중독성이 강한 것 같아요.

cyrus 2016-02-20 09:55   좋아요 2 | URL
맞아요. 저도 그런 추억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괴담을 선호하는 이유를 잘 설명해주셨습니다. ^^

transient-guest 2016-02-20 11:2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국민학교 때 들었던 12가지 비밀이 떠오릅니다 ㅋㅋ 아직도 무서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