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해적판 서적을 찍어낼 수 있었던 시절에는 종종 ‘유명 외국 작품의 후속작’으로 둔갑한 책이 나오기도 했다. 이런 책은 원서명이 나와 있지 않다. 남이 쓴 글을 유명 작가가 쓴 것처럼 소개한다. 여기에 얼추 원작의 느낌이 나도록 그럴싸한 제목을 붙여놓는다. 출판사의 쌈마이한 수법들을 알아차리지 못해 책을 사놓고 후회하는 경우가 있다. 나 또한 그렇다.

 

 

 

 

 

 

 

 

 

 

 

 

 

 

 

 

 

《O 이야기》는 헨리 밀러의 《북회귀선》과 더불어 20세기를 대표하는 에로티시즘 소설이다. 1954년 《O 이야기》가 세상에 첫선을 보였을 때 포르노그래피에 가까운 성애 묘사가 문제가 되어 찬사와 비난의 평을 동시에 받았다. 이 엄청난 반응을 예상했는지 작가는 폴린 레아주(Pauline Réage)라는 필명으로 소설을 펴냈고, 자신의 정체를 철저히 숨겼다. 《O 이야기》가 발표된 지 40년이 지나서야 작가의 정체가 공개됐다. 《O 이야기》의 작가는 얀 데클로즈(Anne Desclos)라는 여성이었다. 그녀는 젊은 시절, 프랑스 문단을 주름잡은 장 폴랑(Jean Paulhan)의 비서로 일했다. 장 폴랑과 얀 데클로즈의 나이 차는 30살. 게다가 장 폴랑은 예순이 넘은 유부남이었다. 장 폴랑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두 사람은 은밀한 연인 사이로 지냈고, 이 비밀의 관계를 소재로 한 작품이 바로 《O 이야기》다. 얀 데클로즈가 《O 이야기》를 집필하게 된 계기가 재미있다. 장 폴랑이 ‘여성은 마르키 드 사드(Marquis de Sade)처럼 절대로 야한 소설을 쓸 수 없다’고 말하자, 그걸 들은 얀 데클로즈는 자신감 넘치는 남성 지식인에 도전하기 위해 ‘야한 소설’을 썼다. 결국은 장 폴랑의 말이 틀렸다. 《O 이야기》는 사드의 에로티시즘을 뛰어넘은 작품으로 인정받았다. 1967년에 《O 이야기》의 후속작 ‘Retour à Roissy(루아시의 귀환)’이 나왔다. 이 소설 역시 ‘폴린 레아주’라는 필명을 사용했다.

 

 

 

 

 

 

 

《O 이야기》가 2012년에 정식 계약 완역본으로 나오기 전까지만 해도 90년대에 해적판이 떠돌았다. 온라인 헌책방 웹사이트에 ‘O의 이야기’라고 검색하면, 비싼 가격의 해적판 몇 권을 확인할 수 있다. 가장 먼저 나온 《O 이야기》가 1975년에 홍익출판사에서 나온 것이다. 판매가는 3만 원이다. 그밖에 1989년 만남 출판사, 1990년 타임기획 출판사, 1995년 서원출판사에서 《O의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펴냈는데, 정식 계약 절차를 밟지 않은 해적판으로 추정된다. 1975년에 제작된 폴린 레아주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동명의 성인영화가 국내에 알려지게 되면서 해적판이 나오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영화 <The Story Of O>는 <엠마뉴엘>, <차타레 부인의 사랑>을 만든 쥐스트 자캥(Just Jaeckin) 감독의 작품이다. 이 영화가 국내에 처음 개봉됐을 때 제목이 ‘르네의 사생활’로 변경되었다.

 

 

 

 

 

 

 

영화의 성공에 힘입어서 ‘《O 이야기》의 후속작’도 나왔다. 제목이 《르네의 연인》이다. 이 책의 역자는 90년대에 다작 번역으로 왕성하게 활동했던 정성호 씨다. 책 제목과 표지에서도 알 수 있듯이, 상당히 쌈마이한 느낌이다. 사실 책 뒤표지에는 전라 여인의 뒷모습을 담은 사진이 있다. 이 책의 앞날개에 적힌 소개 내용을 보면 《르네의 연인》이 ‘《O 이야기》의 후속작’이라고 되어 있다. 원서 제목은 ‘Rene's club'이다. 책의 뒷날개에는 작가 약력이 적혀 있다. 여기까지만 보면 정말로 이 책이 ‘《O 이야기》의 후속작’처럼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르네의 연인》은 ‘《O 이야기》의 후속작’이 아니다. 앞에서 이미 언급한 ‘Retour à Roissy’와 전혀 상관없는 내용이다.

 

 

 

 

 

 

《르네의 연인》의 주요 등장인물이 제임스 펨브로크와 로쟌느다. 전작 《O 이야기》에 등장하지 않는 인물들이다. 소설에 ‘펨브로크(Pembroke)’라는 인물의 이름이 나온 걸로 봐서는 《르네의 연인》 줄거리는 1984년에 개봉된 에릭 로챠트(Eric Rochat)의 영화 <The Story Of O : Chapter 2>일 가능성이 있다. 이 영화는 쥐스트 자캥이 만든 영화의 후속편이다. 물론, 이 영화도 레아주의 소설을 기본으로 만들었다고 하지만, 원작에서 독립된 영화 줄거리는 에릭 로챠트와 제프리 오 켈리(Jeffrey O’Kelly)가 썼다. 참고로, 이 영화의 음악 담당은 그 유명한 한스 짐머(Hans Zimmer)가 맡았다.

 

 

 

 

 

‘죠리 로레이’라는 작가가 쓴 《르네의 연인》 3, 4권도 있다. 물론, 이 책들도 역시 《르네의 연인》을 펴낸 같은 출판사에서 나온 것이다. 당연히 레아주의 소설과 관련성이 없다. 내가 가지고 있는 《르네의 연인》은 1994년에 나온 단권인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해에 두 권으로 분권 되어 나왔다. 그다음에 죠리 로레이의 《르네의 연인》 3, 4권이 출간되었다. 성인소설에 관심 있는 독자라면 《르네의 연인》 전 4권을 헌책방에서 구해보는 것이 나쁘지 않다. 그렇지만 ‘《O 이야기》의 후속작’이라는 문구에 속아 비싼 돈을 내면서 책을 사지 않기를 권한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우리나라에 아직 정식으로 발행된 ‘《O 이야기》의 후속작’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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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reka01 2017-02-16 12: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에 대한 재미난 비하인드 스토리네요..^^..ㅎㅎㅎ

cyrus 2017-02-16 13:53   좋아요 0 | URL
독자들이 몰라도 되는 잡다한 책 이야기를 아주 좋아합니다. 그런 이야기가 흥미진진합니다. ^^

잠자냥 2017-02-16 14: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해적판만 나와 있는 줄 알았는데, 정식판도 있었군요. 조만간 읽어봐야겠습니다. ㅎㅎ

cyrus 2017-02-16 17:09   좋아요 0 | URL
19금 딱지 붙은 책이 생각보다 잘 안 팔립니다. 저처럼 에로 취향을 선호하는 독자들만 구입합니다. 그래서 조용히 절판될 수도 있습니다. 이런 책은 구입해두는 것이 좋습니다. ^^;;

카스피 2017-02-16 18: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 저도 o의 이야기를 구매하고 본 기억이 나는데 갑작스레 cyrus님의 글을 읽으니 이 책이 어디있나 무척 궁금해 지네요^^;;

cyrus 2017-02-16 19:03   좋아요 0 | URL
옛날에 나온 책 말씀하시는거죠? 해적판 구하기가 정말 어려워요. ^^;;

카스피 2017-02-16 23:04   좋아요 0 | URL
ㅎㅎ아마 해적판일거에요.헌책방에서 구한것 같아요^^
19금 소설들 예전에는 헌책방에서도 꽤 많았는데 요샌 보기 힘든것 같네요^^;;;

이병훈 2017-11-03 02: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혹시 이책을 구매할수있는 방법이 있나요?

cyrus 2017-11-03 20:42   좋아요 0 | URL
《O 이야기》는 구매 가능하구요, ‘북코아‘를 검색해서 접속하면 《르네의 연인》을 싸게 구할 수 있습니다. ^^
 

 

 

 

국내 출판계에서 여성문제에 대한 인식은 80년대 중반부터 나오기 시작했다. 여권 운동그룹에서 내놓는 부정기간행물에서 이를 다루는 정도에 그쳤으나 90년대 들어 관련 서적이 쏟아져 나왔다. 여성문제에 대한 이론서에서부터 국내외의 여성현실을 다룬 보고서, 페미니즘 문학서 등으로 다양했다. 접근방식에 따라 여성문제에 대한 개념과 범주가 조금씩 다르지만, 근본적으로 ‘여성해방의 관점’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같다.

 

 

 

 

 

 

 

 

 

 

 

 

 

 

 

 

 

 

 

지금까지 여성운동이나 정책은 성차별을 해소하는 데 중점을 두었으나 여성이 역사로 진입하는 데에는 성공하지 못했다. 역사는 여성을 오랫동안 타자로 규정되었다. 페미니스트이자 역사학자인 거다 러너(Gerda Lerner, 1920~2013)는 여성의 역사가 존재했음에도 불구하고 남성 중심의 가부장제도에 의해 여성의 역사가 은폐, 무시됐다고 주장한다. 그녀는 여성사 분야에서 선도적 역사학자로 평가받는 인물이다. 유대인 출신인 러너는 40대의 나이로 역사학에 뛰어든다. 유대인과 여성이라는 이중의 억압은 그녀를 공부하게 만든 동력이다. 그녀의 활약에 힘입어 미국에서 최초로 여성사 분야 박사학위과정이 개설된다.

 

러너는 남성들의 ‘선택적 기억’의 희생자였던 여성들에게 역사학의 초점을 맞춘다. 그녀가 생각하는 역사란 “앞선 세대의 경험과 생각을 모아 놓은 기록보존소이자 우리의 집단 기억”이다. 과연 우리의 집단 기억 속에 여성 위인은 얼마나 포함돼 있을까. 여성사 연구는 외국에서 90년대 초반부터 논의되기 시작했지만, 국내의 경우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여성사에 주목했다. 그러나 기록이나 사진, 유물, 작품 등 여성사연구에 필수적인 1차 자료의 절대적인 부족은 연구를 더디게 만드는 가장 큰 걸림돌이다. 자료가 남아 있지 않은 것은 여성들의 활발한 활동이 사회나 가족으로부터 배척당하는 경우가 많았고, 여성의 역사가 사소하거나 주변적인 것으로 여겨져 왔기 때문이다. 현행 역사 교과서는 근현대 여성의 역사를 따로 서술하지 않는다. 근대 이후 사회 전면에 등장한 여성의 ‘역사적 의미’가 남성 중심사의 경계 밖으로 밀려나 있는 셈이다.

 

 

 

 

 

이러한 현실적 한계 속에서 이옥수 여사(1931년 출생)[주1]는 역사에서 소외돼 온 여성들을 주인공으로 이끌어 내는 작업을 이미 시작했다. 이옥수 여사의 《한국근세여성사화》는 ‘여성주의적 관점’의 시각으로 근대부터 1980년대까지의 사화(史話)를 정리한 책이다. 이 여사는 거다 러너처럼 역사를 전문적으로 공부하지 않았다. 안동에서 태어나고 자란 그녀는 평범한 주부로 지내다가 36세의 나이에 대구일보 수습기자가 되었다. 이 해에 그녀가 키우는 막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기자 생활 중에 《한국근세여성사화》 집필을 위한 자료 수집을 준비했다. 그녀는 ‘누구나 쉽게 읽는 여성사’를 구축하기 위해 《한국근세여성사화》를 쓰기 시작했다.

 

 

 

“우리 할머니, 어머니들이 어떻게 사셨는지 대부분 여성이 너무 모르고 있습니다. 누구나 이야기책처럼 쉽게 읽을 수 있는 여성사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었지요.” [주2]

 

 

이 여사가 《한국근세여성사화》를 쓰기까지 모아둔 원고지의 양이 3,000장 넘는다고 한다. 그녀가 많이 참고한 자료는 이규태 전 조선일보 논설위원의 글이다.

 

 

 

 

 

상권은 392쪽, 하권은 459쪽이다. 두 권의 책을 펼치면 흑백사진이 나온다. 상권은 개화기 전후에 살았던 여성들의 모습을 담은 사진이 있고, 하권은 전국여성단체협의회(한국여성단체협의회로 명칭이 변경됨)가 주최한 전국여성대회(1975년 제13회, 1976년 제14회)와 제7차 아시아지역 국제여성대회가 진행되는 장면을 찍은 사진이 실려 있다. 제7차 아시아지역 국제여성대회는 1976년에 우리나라가 주관하여 진행되었고 12개국 여성단체 회원들이 참가했다.

 

상권은 한국 여성과 관련된 풍습, 사건, 활동 등 흥미진진한 사화들로 채워져 있다. 가부장제의 폐단에 억압받고, 불이익을 받은 여성들의 이야기들은 과거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낮음을 말해 준다. 개화기 이전의 여성들은 결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시집을 가야했고, 아들을 낳아야 한다는 강박관념 속에 살았다. 아무리 나무랄 데 없는 규수라도 시집가서 아들을 낳지 못하면 끝이었다. 무자(無子)를 칠거지악(七去之惡)에 넣어 내쫓기까지 했었다. 그래서 시집간 여자의 가장 큰 꿈은 떡두꺼비 같은 아들을 낳는 일로 귀착됐다. 남편은 아들을 원하는 마음이 너무나도 간절한 나머지 우스꽝스러운 풍습을 따르기도 했다.

 

 

 

 

청천강 이북의 서북지방에 아들을 낳게 하는 특이한 풍습이 있었다고 한다. 산모가 진통을 시작하면 남편은 길마를 자기 등에 얹고 지붕 위에 올라간다. 산모가 진통을 겪으면서 태아를 출산하고 있을 때 지붕에 올라간 남편은 소 울음소리를 낸다. 이렇게 하면 산모가 딸이 아닌 아들을 낳을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런데 남편이 지붕에 떨어져 다치고, 딸을 낳으면 아내는 시어머니의 원망을 견디면서 살아야 한다. 갓 태어난 딸은 이름을 가지지 못한다. 시어머니는 아들을 낳지 못한 며느리가 섭섭하다고 해서 손녀 이름을 ‘서운이’, ‘섭섭이’로 대충 짓는다.

 

 

 

 

 

 

 

 

 

상권이 하권보다 재미있다. 상권은 논개, 신사임당, 허난설헌, 윤심덕, 나혜석 등 역사의 한페이지에 장식한 여성들의 생애 및 관련 일화들을 소개했다. 최근 김별아 작가의 소설 덕분에 주목받고 있는 최초의 여성 근대 작가 탄실 김명순 이야기도 있다. 하권은 광복 이후의 여성들의 활동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역대 여성 국회의원 명단과 여성의 직업 실태 등을 조사한 기록들이 정리되었다. 그러나 아쉬운 점은 사화 소개에 중점을 맞추다 보니 고증 오류가 몇 개 보인다. 그리고 이 책이 나온 시기가 친일파 문제가 지금처럼 크게 부각되지 않아서 김활란(최초 이화여대 총장), 박경원(비행사)의 친일 행적에 대한 언급이 적다. 심지어 이 여사는 김활란의 친일 행위가 일제의 압력으로 존폐 위기에 처한 학교를 지키기 위한 최선책이라고 평가한 대목은 문제가 있다. 이 여사는 1971년에 공화당 경북지구부녀부장을 역임했다. 그런 이유에서인지 하권에 박정희 대통령의 정치 활동을 시기별로 서술했다. 책의 주제와 상관없는 내용이다. 책의 분량을 일부러 늘리기 위해서 쓴 것일까, 아니면 경북 출신의 이 여사가 박 대통령 시대를 그리워한 것일까? 

 

 

 

 

[주1] 포털 사이트에 검색하면 이옥수 여사 관련 정보가 발견되지 않는다. 이 여사와 《한국근세여성사화》에 대한 언급이 있는 자료가 1985년에 나온 동아일보와 매일경제 기사뿐이다. 그녀가 지금도 살아있는지 아니면 이미 세상을 떠났는지 알 수 없다.

 

[주2] 동아일보. 1985년 4월 25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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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reka01 2016-09-20 17: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전히 현재도 명예살인이라는게 자행되는 걸 뉴스로 접하곤 합니다. 여자로 태어나는 거 자체가 이미 죄가 되는 사회였으니까요..리뷰 잘 읽었어요....

cyrus 2016-09-21 15:33   좋아요 0 | URL
제주도에 중국인이 일으킨 살인사건, 단순히 보면 여혐 살인사건 같아요. 정말 무서운 세상입니다.

syo 2016-09-20 19: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페이퍼를 볼때마다 cyrus님의 저력에 감탄합니다....

cyrus 2016-09-21 15:34   좋아요 0 | URL
대단한 일이 아니에요. 책을 좋아한다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인데요. ^^;;
 

 

 

 

가끔 책을 사게 되면 어이없는 실수를 저지르기도 한다. 예전에 샀던 책이 책장에 꽂힌 줄 모르고, 그와 비슷한 책을 산 적이 있다. 그리고 예전에 산 책의 표지만 다르고, 내용이 비슷한 것인 줄 모르고 사버리는 일도 있었다. 읽지도 않고, 책을 사들이는 습관 때문에 이런 실수를 한다. 루 살로메의 책이 구하기 어려워서 고민할 필요 없이 사들였는데 신중하지 못한 선택이었다.

 

루 안드레아스 살로메는 니체, 릴케, 프로이트 등 당대 천재들의 운명을 관통한 전설적인 여인이다. 그녀는 이들과 차례대로 만나면서 학문적으로도 깊은 영향을 주고받았다. 루가 21세 때 니체를 만났다. 그때 니체의 나이는 마흔을 바라보고 있었다. 니체는 그녀에게 두 번이나 청혼했다가 거절당한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당시 루의 연인이었던 파울 레와 니체는 셋이 이상한 동거를 하게 된다. 루는 지성을 나누는 관계와 육체를 나누는 관계를 확실히 구분 지었다. 기묘한 삼각 동거는 루의 결혼으로 끝난다. 루는 언어학자 안드레아스와 결혼한다. 레는 실연의 아픔을 못 이겨 투신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니체도 이후 약 10년간 정신착란 상태로 삶을 마감한다.

 

 

 

 

 

 

 

 

 

 

 

 

 

 

 

 

 

 

 

1885년, 루는 자신의 첫 소설 <Im Kampf um Gott>를 발표하여 비평가들로부터 극찬을 받았다. 원제를 직역하면 ‘신을 얻기 위한 투쟁’으로 읽어야 하지만, 국내에서는 ‘선택된 자들의 소망’, ‘우리는 어디에서 어디로 가는가’로 소개되었다. 신앙(종교)과 이성 사이에서 갈등하는 주인공이 성장하면서 깨닫는 과정을 그린 이야기다.

 

 

 

 

 

 

 

 

 

 

 

 

 

 

 

 

 

 

 

 

 

루가 레와 니체를 만나고 있었을 때 이 소설을 쓰기 시작했는데, 니체의 인상이 느껴지는 문구가 많이 보인다. 그래서 니체가 루의 소설에 영향을 받아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썼다고 주장하는 연구가도 있다. 니체는 진리, 선, 신들이 이 세계를 부정하기 위해 고안해낸 창작물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그는 차라투스트라를 내세워서 선과 악 사이에서 끊임없이 투쟁하는 인간의 자유 의지를 추구했다. 루의 소설에 나오는 주인공 역시 기독교의 신을 부정하고 스스로 치열하게 투쟁하는 영혼이다. 루는 소설 중간에 삽입된 시 『고뇌에 부친다』에서 자기극복의 고통과 기쁨을 통해 자유정신과 육체의 통일을 이루는 인간을 바람직한 미래의 인간상으로 제시한다.

 

 

 

너는 정신의 힘을 시험하기 위해 찾아오는 것이다.

너와의 투쟁으로 가장 위대한 사람들은 더 위대해진다.

그것은 목표를 향한 외줄기 길의 투쟁인 것이다.

그런 것이기에 우리에게 운명과 기쁨으로서

오직 하나뿐인 그 고뇌, 참된 위대함이 주어진다면

그때면 우리들은 정면으로 그것과 투쟁할 뿐.

그렇다, 생사를 걸고 그것과 투쟁할 따름이다.

 

(『고뇌에 부친다』 중에서, 《우리는 어디에서 어디로 가는가》 114~115쪽)

 

 

 

 

 

 

 

 

《선택된 자들의 소망》은 <Im Kampf um Gott>와 니체, 릴케, 프로이트에 대한 그녀의 글, 그리고 아포리즘을 엮은 책이다. 아마도 이 책에 있는 글 일부가 H.F. 페터즈의 《나의 누이여 나의 신부여》에서 참고한 것으로 보인다. 산호출판사에서 나온 《선택된 자들의 소망》의 초판 출간 연도는 1993년이며, 2000년에 투영출판사에서 재출간되었다. 두 권 다 비슷한 번역본이다. 2년 전 헌책방에서 《선택된 자들의 소망》을 샀고, 최근에 알라딘 중고매장에서 《우리는 어디에서 어디로 가는가》를 샀는데, 《선택된 자들의 소망》에 <Im Kampf um Gott>가 수록된 줄 몰랐다. 《선택된 자들의 소망》을 조금이라도 읽었다면 사지 않아도 될 책을 사지 않았다.

 

 

 

 

 

 

 

 

 

 

 

 

 

 

 

 

 

 

책만 보는 사람은 바보 소리 들으면 할 말이 없다. 15세기 독일의 법학자 제바스티안 브란트는 제대로 읽지도 않을 거면서 책을 사기만 하는 사람들을 ‘바보 배’ 첫 번째 탑승자로 선정했다.

 

 

 

 

제바스티안 브란트의 <Das Narrenschiff>(바보들의 배)는 중세 말기의 무질서와 혼란을 풍자한 책이다.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 고안에 힘입어 저자가 사망할 때까지 17판이 나올 정도로 인기를 누렸다. 배에 올라탄 바보들의 유형이 무려 100가지 넘는다. 그 중 첫 번째 등장하는 바보가 책만 읽는 바보다.

 

 

 

 

 

 

책은 항상 나의 믿음직한 핑계요,

책 속에 파묻히면 근심걱정은 끝일세.

가갸거겨도 모르는 처지지만

딴에 책을 무척 숭상한다네.

파리가 얼씬대면 얼른 쫓아내지.

사람들이 학문을 논할 때면,

“나도 집에 책 많다!”고 자랑하네.

책 속에 파묻혀서 산다니,

생각만 해도 마음이 흡족한걸.

 

(《바보 배》 22~23쪽)

 

 

 

바보들 모두 같은 복장을 하고 있다. 당나귀처럼 뾰족한 귀 양쪽 끝에 방울이 달린 광대의 모습이다. 과거에는 광대가 바보스럽고 어리석은 인물을 상징하는 존재였다. 바보는 똑똑한 사람의 뒤집힌 거울이다. 똑똑한 사람들은 바보들의 어리석은 행동을 보며 웃음을 터뜨리지만, 자신에게도 바보 같은 모습이 있음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Das Narrenschiff>의 삽화로 수록된 알브레히트 뒤러의 판화는 누구든 스스로 ‘바보’임을 알아차리게 하는 거울 같은 기능을 한다.

 

 

 

 

 

 

 

그래, 내가 바보라는 걸 안다. 그런데 책 읽는 것이 정말 재미있다. 누가 뭐래도 독서의 매력은 재미다. ‘간서치’ 이덕무는 책을 읽다가 막히는 부분의 의미를 깨닫는 순간, 혼자 바보처럼 웃었다고 한다. 책을 잘못 산 사실을 알게 되면 바보처럼 웃어본다.

 

나는 바보입니다. 나는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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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100년 전의 그녀 - 루 살로메 《선택된 자들의 소망》
    from 공음미문 2016-09-06 18:57 
    [목차] 선택된 자들의 소망(~9) / 나와 니체(~206) / 나와 릴케(~227) / 나와 프로이트(~273) / 크리스마스 메시지(~298) / 성이란 무엇인가?(~316) / 승화된 성과 사랑(~334) / 거울 속에서(~359) / 유대인의 예수(~363) ​<릴케편>​(p267~268)​러시아 기행 1. 형식과 내용………… 예술가는 감각적인 것에서 유래하고 있다. 그는 몸짓 따위에 함께 들어 있는 모든 것을 보는 것이다. 예술가
 
 
북프리쿠키 2016-09-06 17: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출판사 추천좀 해주세요^^;

cyrus 2016-09-06 17:21   좋아요 1 | URL
어려운 질문인데요. 저는 번역의 질을 고려하지 않고 읽었어요. 니체 전집(책세상)의 《차라투스트라》가 직역에 가까운 번역본이라서 많이 추천하는 책입니다. 민음사 판본과 펭귄클래식 판본은 들고 다니기 편해서 좋긴 한데 니체 전집의 번역 우수성과 비교당해서 밀리는 편입니다. 니체의 사상을 공부한다는 마음으로 읽으려면 책세상 판본이 좋습니다. 책세상 판본 역자가 니체 전공자입니다. ^^

북프리쿠키 2016-09-06 17:59   좋아요 0 | URL
아 감사합니다!!

오거서 2016-09-06 17: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cyrus 님의 고백에 용기내어 봅니다. 같은 이유로, 저도 바보입니다. 제 경우는 CD 를 중복 구매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ㅎㅎ

cyrus 2016-09-07 07:54   좋아요 0 | URL
음악 CD의 가격이 책보다 비쌀텐데 손해 데미지가 클 것 같습니다. ㅠㅠ

yureka01 2016-09-06 18: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많이 좋아했나 봐요..너무 좋아하면 눈꺼풀에 뭔가 쉰다고하잔하요..ㅎㅎ

cyrus 2016-09-07 07:56   좋아요 0 | URL
맞아요. 신중하게 살펴보고 인터넷에 검색하면 될 것을 흥분에 취해서 사는 경우가 있어요. ^^

AgalmA 2016-09-06 18: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잊고 있던 책이었는데, cyrus님 소개를 보고 이 책 찾아보니 리뷰가 하나도 없어서 맛뵈기 소개 좀 해야겠네요. 제게 일감을 던져 주시다니ㅜㅜ 서재는 역시 뜸하게 와야....

cyrus 2016-09-07 07:57   좋아요 0 | URL
아무도 읽지 않는 책을 한 명이라도 알고 있는 분이 있을 때 기분이 좋습니다. ^^

또 봄. 2016-09-06 19: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심지어 같은 제목의 책도 나란히 있어요. --;;

cyrus 2016-09-07 07:59   좋아요 0 | URL
서점에 산 책이면 환불하거나 지인에게 선물로 줄 수 있는데, 헌책은 바꿀 수도 없고, 헌책방에 판다고 해도 수중에 들어오는 금액이 적어요. ^^;;

잠자냥 2016-09-06 2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묘한 삼각관계로 끝난.... 루, 레, 니체의 삼위일체 사진이 떠오르네요. 루 살로메의 책도 읽어보고 싶어지는군요. 저는 책도 산 거 또 사고 음반도 산 거 또 산답니다. ㅠㅠ 완전 바보지요... ㅠㅠ

cyrus 2016-09-07 08:00   좋아요 0 | URL
책 좋아하는 사람들은 정말 책 앞에서는 바보가 되는군요. ^^;;

transient-guest 2016-09-08 01: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Me too!! 저도 책을 구하다보면 간혹 같은 책을 구할 때가 있어서 장서목록을 만들어 사용하고 있습니다. 최근엔 2014년도에 다시 만든 것으로 계속 사용하고 있는데, 그래도 가끔 빵꾸가 나네요.ㅎ

cyrus 2016-09-08 08:21   좋아요 0 | URL
저는 예전에 큰 맘 먹고 장서목록을 만들려고 시도했는데 포기했어요. 만들지 않은 게 후회됩니다. ^^

아이리시스 2016-09-13 20: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왕 저거 나다. 루. 으히히😜😝

cyrus 2016-09-13 23:33   좋아요 0 | URL
메일에 아이리시스님 댓글 알림을 보는 순간, 장난 댓글 다는 이상한 회원인 줄 알았어요. ㅋㅋㅋ
`으히히`가 제일 먼저 보였거든요. ^^

아이리시스 2016-09-13 23:36   좋아요 0 | URL
ㅋㅋㅋ 아무리그래도 너무 웃긴다 ㅋㅋㅋㅋㅋㅋㅋ
 

 

 

 

 

 

 

어제 깜빡해서 이 책을 공개하지 못했어요. 사무엘 베케트의 《몰로이》입니다. 흔히 베케트를 극작가로 알고 있지만, 그의 대표 희곡작품 《고도를 기다리며》를 집필하기 전에 이미 시집과 소설을 발표했습니다. 《몰로이》는 베케트의 소설 3부작 중 하나입니다. 나머지 작품은 《말론, 죽다》, 《이름 붙일 수 없는 자》입니다. 최근에 워크룸프레스 출판사가 《이름 붙일 수 없는 자》를 출간하여 베케트 선집의 등장을 알렸습니다. 《말론, 죽다》만 나오면 베케트 소설 3부작을 우리말로 읽을 수 있게 됩니다.

 

 

 

 

 

 

 

 

 

 

 

 

 

 

 

 

 

 

《몰로이》는 1969년 ‘노벨문학상전집’으로 국내에 처음 출간되었습니다. 20여 년이 지난 1995년에 故 김현 교수가 번역한 《몰로이》가 재출간되었습니다. 이 책 또한 절판되었습니다. 그 후에도 《몰로이》 번역본이 새로 출간되었는데요, 가장 많이 알려진 번역본이 2008년에 나온 문학과지성사 판본입니다. 사실 저는 문학동네 판본을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문학과지성사 판본이 초역본인 줄 알았습니다. 

 

 

 

 

 

 

문학동네 《몰로이》에서 눈여겨볼 점이 있습니다. 책 앞표지 오른쪽 상단에 ‘문학동네 세계문학’이라는 문구가 적혀 있습니다. 1995년에 ‘문학동네 세계문학’이라는 타이틀이 등장했던 것입니다. 문학동네 출판사는 책 뒷날개에 ‘문학동네 세계문학’ 출간에 대한 포부를 밝혔습니다. ‘전집’이라는 단어가 없을 뿐, 2009년에 선보인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의 전신으로 볼 수 있습니다.

 

 

문학동네는 오늘의 한국문학에 의미있게 수용될 외국작가의 작품을 선별하여 ‘문학동네 세계문학’을 발간합니다. 문학은 당대의 시대적 상황과 사회상, 예술과 인간, 역사가 만나는 드넓은 광장으로서 우리는 그 속에서 시공을 초월하여 다양한 삶을 영위하는 인간들의 땀과 눈물과 지혜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문학동네 세계문학’은 아직 국내에 소개되지 않은 작가들의 역량있는 작품들과, 이미 소개되었으나 널리 보급되지 않은 작가들의 작품들을 엄선하여, 그들의 가장 치열한 정신과 정열이 빚어낸 순금 같은 작품들을 소개합니다. 세계의 문학과 한국문학, 그리고 독자를 잇는 튼실한 기교로서, 우리 삶의 문학과 문학의 풍요에 기여할 것입니다.

 

 

‘문학동네 세계문학’ 시리즈의 첫 작품이 베케트의 《몰로이》이고, 그 다음에 나온 작품이 존 파울즈의 《마법사》(Magus)였습니다. 그 후로 ‘문학동네 세계문학’이라는 타이틀을 단 번역 작품들이 나왔는지 모르겠습니다. 1997년 IMF 외환위기 여파로 인해 문학동네의 세계문학 출간 작업이 더디었을 겁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문학동네 세계문학’이 조용히 잊히고, 1998년에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이 등장했습니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은 1980년대 이후로 침체했던 국내 세계문학전집 출간 붐을 다시 일으켰습니다. 만일 ‘문학동네 세계문학’이 꾸준히 나왔더라면, 세계문학전집 출판시장의 판도가 달라졌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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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6-08-17 17: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사이러스 님 현재 보유 중이신 책이 총 몇 권이십니까 ?

cyrus 2016-08-17 18:18   좋아요 1 | URL
책의 권수가 궁금해서 엑셀에 입력하면서 세어봤어요. 그런데 작업을 하다가 말아서 정확하게 몇 권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400권 정도일겁니다.
 
케익을 굽는 여자
마가렛 애트우드 지음 / 새와물고기 / 1993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먹다. 듣기만 해도 좋은 말이다. 음식 먹는 생각에 입안에 침이 고인다. ‘먹는 것’은 삶을 위해 영양분을 섭취하는 생리적 행위다. 그러나 ‘먹다’가 꼭 좋은 의미의 단어로만 사용하지 않는다. ‘여자를 (따)먹다’ 현대에 와서 생겨난 단어 같지만, 조선 시대 때 만들어진 불교 찬가인 <월인천강지곡>에 수록되어 있다. 원래는 ‘여자의 정조를 빼앗다’를 속되게 표현한 말이었는데, 오늘날에는 여성과의 성관계를 이르는 말이 되었다. 남성은 지배 욕구가 강해 소유와 정복에서 큰 만족감을 느낀다. 아내에 대한 사랑이나 애정과 무관하게 다른 여성에게도 성적 충동을 느끼기 마련이다. 이는 정복 욕구와 자손을 널리 퍼뜨리고 싶은 잠재의식에서 비롯되는 심리적 반응이다. 인간, 아니 남성이 이룩한 대부분 문화 속을 곰곰이 들여다보면 섹스와 관련된 언어 표현들이 차고 넘친다.

 

만약에 《The Edible Woman》이라는 제목의 영어권 소설을 우리말로 번역하려면 어떻게 써야 할까? ‘Edible’는 ‘먹다’의 형용사 표현이다. 특히 어떤 음식에 독성 물질이 함유하는지를 확인할 때 사용한다. 그래서 정확하게 의미를 설명하면 ‘독성 성분이 없어서 먹을 수 있는’이 된다. ‘The Edible Woman’을 직역하면 ‘먹을 수 있는 여성’ 혹은 ‘식용 여성’이다. 우리말로 바꾸기가 상당히 곤란한 제목이다.

 

 

 

 

 

《The Edible Woman》는 캐나다 출신 작가 마거릿 애트우드가 1969년에 발표한 첫 장편 소설 작품이다. 그녀의 대표작 《시녀 이야기》가 국내에 널리 알려져서 흔히 이 작품이 애트우드의 첫 장편으로 생각하는 독자가 있을 것이다. 《시녀 이야기》는 애트우드의 여섯 번째 소설이며, 1985년에 발표되었다. 애트우드는 1961년 <Double Persephone>라는 시집을 발표해 시인으로 문단에 등단했다. 그녀의 시집은 캐나다 문학비평가 노스럽 프라이의 찬사를 받기도 했다. 네 권의 시집을 발표한 후에 애트우드는 첫 장편을 선보였는데, 그 작품이 바로 《The Edible Woman》이다.

 

 

 

 

 

 

 

 

 

 

《The Edible Woman》는 의미 있는 애트우드의 첫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국내에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1993년에 《케잌을 굽는 여자》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었으나 많이 팔리지 않았는지 헌책방에서 구하기 힘들고, 심지어 이 책을 소장하는 공공도서관도 많지 않다. 이 책의 실체를 알아보기 위해 오랜 탐색 끝에 《케잌을 굽는 여자》가 대구남부도서관 서고에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 현행 외래어 표기법을 따르면 ‘케잌’을 쓰면 안 되고, ‘케이크’로 써야 한다. 여기서는 특별히 책 제목을 언급할 때 ‘케잌’으로, 본문에는 ‘케이크’로 쓰겠다)

 

소설은 주인공 마리안 맥컬핀(Marian MacAlpin)의 1인칭 시점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마리안은 세이머 설문조사 회사의 직원인데 설문조사 질문을 만드는 일을 한다. 애인슬리(Ainsley Tewce, 번역본에는 ‘애인슬리’로 표기되었다)는 마리안과 같은 집에 사는 룸메이트 여성이다. 두 여성이 사는 집에 가끔 마리안의 남자친구이자 약혼자인 피터(Peter Wollander)가 찾아온다. 피터란 인물은 마리안의 속마음을 간파하지 못한 눈치 없는 놈으로 등장한다. 피터와 마리안은 성격 차이로 종종 말다툼하기도 한다. 여기까지만 보면 흔한 남녀 커플을 보는 것 같다. 마리안과 애인슬리과 같은 대학교 친구인 클라라(Clara Bates)는 죠(Joe)와 결혼하여 벌써 세 명의 아이를 둔 유부녀다. 마리안은 완전히 다른 삶을 사는 두 친구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자신의 미래를 걱정한다. 애인슬리는 훌륭한 혈통에다가 외모가 좋은 남자와 결혼해서 우수한 유전자를 가진 자식을 낳는 것을 원한다. 마리안은 애인슬리가 잘못 생각하고 있다고 말하면서도 크게 반대하는 입장을 드러내지 못한다. 그러면서 자신의 결혼관이 현실적으로 타당한지 고민한다.

 

마리안은 주변 환경에 따른 심적 변화가 유독 큰 인물이다. 한 남편의 아내이자 세 자식을 키우는 어머니로서의 클라라를 지켜보면서 마리안은 모성의 중요성을 느낀다. 그래서 죠가 클라라 대신에 아이를 키우는 모습을 이상하게 생각한다. 오히려 엄마보다 아빠와 함께 지낸 시간이 많은 아이가 성장하면 정신적으로 혼란이 느낄 수 있다고 착각한다. 사실 마리안의 착각은 고정된 남성성과 여성성에 대한 믿음에서 비롯된 기우(杞憂)다. 한때 그녀는 모성애가 여자가 꼭 갖춰야 할 여성상이라고 믿고 있다.

 

그런데 마리안은 자신의 여성 정체성이 구체적으로 어떤 건지 진지하게 고민한다. 여성 정체성을 인정하지 않는 남성들의 시선과 반응에 점점 거부감을 느끼기 시작한다. 마리안은 자신이 처한 상황을 무척 불편하게 여긴다. 그녀 주변에는 피터, 애인슬리, 거기에다가 그녀를 좋아해서 따라오는 대학원생 던컨(Duncan)까지 합세한다. 마리안은 그들에게 둘러싸일수록 예민한 감정을 드러낸다. 마거릿 애트우드는 마리안이 겪는 심적 변화를 세밀하게 묘사했다. 마리안의 심리 상태가 주를 이루는 이야기의 전개가 지루하게 느껴지지만, 독자는 직접 마리안이 되어 그녀가 무엇 때문에 불만을 느끼는 건지 이해해야 한다. 그녀의 심리 변화를 따라가고 파악하는 것이 《The Edible Woman》을 읽을 때 독자가 주목해야 할 부분이다.

 

마리안은 고정된 여성성을 강요하는 사회에 억압받는 여성을 상징한다. 그녀는 무척 외롭다. 마리안은 혼자 침대 밑에 숨어서 편안함을 느끼고 있었는데, 그녀의 기이한 행동에 실망한 피터는 그녀가 ‘여자다움’을 거부한다고 화냈다. 피터가 생각하는 ‘여자다움’은 ‘정상적인 여성성’이다. 누구나 가구 또는 옷장 안에 숨는 것을 좋아했던 어린 시절이 있다. 여자뿐만 아니라 남자도 가끔 어둡고 좁은 공간에 들어가서 혼자만의 자유를 느끼고 싶어 할 때가 있다. 마리안에게 침대 밑 좁은 공간은 편안한 자유를 만끽할 수 있는 ‘자기만의 방’일 수 있다. 그런데 피터는 마리안의 행동을 ‘비정상적 여성성’, 속되게 말하면 ‘미친 여자’가 할 법한 일로 생각한다. 여성의 자유를 누리는 공간의 의미 자체를 무시해버린다.

 

남성 중심 사회는 여성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고, 여성의 몸과 정신을 소유한다. 남자는 늘 여자를 빤히 쳐다본다. 그리고 그 여자가 ‘여자다움’을 가졌는지 눈으로 쓱 확인한다. 남자가 공통으로 생각하는 ‘여자다움’이란 일단 예쁘고, 몸매가 좋아야 한다. ‘여자다움’을 소유하고 싶은 욕망이 지나치면 힘과 폭력을 동원하여 여자를 위협하기까지 한다. 반대로 ‘여자다움’이 없는 여자를 만나면 마치 피하고 싶었던 불량품을 만난 것처럼 불쾌감을 느낀다. 이러한 남성들의 혐오감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받은 여성은 일상적인 삶이 불가능해진다. 몸매에 대한 집착 혹은 혼자 감당하지 못할 정신적 스트레스 등으로 인해 거식증에 시달린다. 마리안도 거식증에 가까운 증세를 보인다. 여성을 ‘남성을 만족하게 해주는 상품’ 또는 ‘수동적인 인형’으로 바라보는 남성의 세계를 감당하기 위해서 마리안은 최후의 방법을 실행한다. 그것이 바로 자신의 모습과 닮은 케이크를 구워서 주변 사람들에게 먹여 보는 일이다.

 

이제 밋밋한 하얀 육체가 완성되었다. 접시 위에 부드럽고 달콤하게 그리고 뚜렷한 형태가 없이 누워 있는 그것은 약간 음란해 보였다. 그것에게 옷을 입히기 시작했다. 케이크 데코레이터에 밝은 핑크색 아이싱을 채웠다. 처음엔 비키니를 칠해 넣었지만 너무 빈약했다. 가운데 몸통 부분도 칠했다. 이제 보통 수영복같이 되었지만 아직도 정확히 그녀가 원하는 모양은 아니었다. 계속 위아래로 넓혀가서 원피스 모양이 되었다. 입만 있고 머리카락도, 눈도 없는 케이크는 괴상하게 보였다. 케이크 장식기를 씻고 초콜릿 아이싱을 채웠다. 코와 속눈썹이 많이 달린 눈, 그리고 양쪽 눈 위에 각각 눈썹을 그려 넣었다.

 

부엌으로 가서 접시를 마치 그것이 미사에 사용하는 신성한 어떤 것인 것처럼, 받침으로 받쳐진 성상이나 화관이나 되는 것처럼 조심스럽고 경건하게 받쳐들고 돌아왔다. 무릎을 꿇고 접시를 피터 앞에 있는 커피테이블에 내려놓았다.

 

“당신은 나를 파멸시키려고 했어요.” 그녀(마리안-서평 작성자 주)가 말했다. “나를 당신에게 동화시키려고 했죠. 하지만 난 당신에게 줄 대체품을 만들었어요. 당신이 훨씬 더 좋아할 것으로요. 이것이 당신이 내내 정말로 원했던 것이에요. 그렇지 않은가요? 포크를 드리죠.”

 

(《케잌을 굽는 여자》 397~398, 400쪽 편집 인용)

 

 

 

 

피터는 마리안이 만든 케이크를 먹지 않는다. 마리안은 자신이 만든 케이크를 보는 순간, 한동안 잊어버린 허기를 느끼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케이크를 포크로 떼어내 먹기 시작한다.

 

 

“마리안, 거기 있는 게 뭐지?” 그녀(애인슬리-서평 작성자 주)가 걸어와서 케이크를 내려다 보았다.

 

“여자잖아. 케이크로 만든 여자!” 그녀는 마리안을 이상한 표정으로 쳐다봤다.

 

마리안은 케이크를 씹어 삼겼다. “좀 먹어봐.” 그녀가 말했다. “맛이 정말 좋아. 오늘 오후에 내가 만든 거야.”

 

애인슬리의 입이 마치 그녀가 본 모든 것의 의미를 꿀꺽 삼겨 버리려고 하는 것처럼 물고기같이 벌어졌다가 닫혔다. “마리안!” 그녀가 공포에 질려 소리쳤다. “넌 네가 여자라는 사실을 거부하고 있구나!”

 

마리안은 다시 접시를 내려다보았다. 그 여자는 한쪽 다리가 없어진 채 여전히 멍한 미소를 지으며 누워 있었다. “당치 않아.” 그녀가 말했다. “이건 케이크일 뿐이야.”

그녀는 몸통에 포크를 찔러넣어 깨끗하게 머리로부터 몸통을 잘라냈다.

 

(《케잌을 굽는 여자》 401~402쪽)

 


유일하게 마리안의 케이크를 먹은 사람은 던컨이었다. 마리안은 던컨이 게걸스럽게 케이크를 먹는 장면을 흐뭇하게 바라본다. 케이크를 다 먹어치운 던컨이 말 한마디를 남기면서 소설은 끝이 난다.

 

“고마워요.” 그가 입술을 핥으며 말했다. “맛있었어요.” (‘Thank you,’ he said, licking his lips. ‘It was delicious.’)

 

자신의 대체물인 케이크가 남자인 던컨에게 먹히면서 사라지는 과정을 지켜보는 마리안의 태도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마거릿 애트우드는 독자에게 정확한 해석을 요구하지 않을 것이다. 마리안은 자신과 닮은 케이크를 만들어 ‘여성이 남성에게 먹히는 관계’를 거부했다. 그녀는 자신의 행위에 스스로 만족하겠지만, 케이크를 굽는 행위만으로 남성이 지배하는 사회를 극복하기가 어려워 보인다. 남성 중심 사회에 벗어나지 못하는 여성의 숙명적인 고난이다. 여자는 언제 어디서든 남자에게 먹히기 쉽다. 남자는 여자에게 술을 잔뜩 먹여 취하게 만든 뒤에 ‘골뱅이’로 만들어 먹으려고 한다. 그리고 여성을 먹은 소감을 영웅담을 들려주듯이 떠벌린다. 이런 세상에 여자들이 누굴 믿고 살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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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2016-06-14 20: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월인천강지곡에 그런 말이 있었군요.. 예전에 중세국어문법 공부한다고 형태소 분석 열심히 했었는데 그때는 미처 못 봤네요.. ^^;;

cyrus 2016-06-14 20:29   좋아요 0 | URL
성적 표현의 유래가 궁금해서 인터넷에 검색해봤습니다. 출처가 인터넷이라서 오류일 수도 있습니다. ^^;;

아무 2016-06-14 20:34   좋아요 0 | URL
표준국어대사전에 검색하니까 어원으로 월인천강지곡이 나오네요. 제가 학부생 때 공부를 설렁설렁한 걸로.. ㅎㅎ

cyrus 2016-06-15 12:52   좋아요 0 | URL
중세국어문법을 공부했다는 사실 자체가 대단한 거죠. 그때 배운 내용을 다 기억할 수 없어요. ^^

표맥(漂麥) 2016-06-14 22: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먹음직한... 표현이 바로 떠오르는군요...^^ 윽! 돌 날아오는 ===333

cyrus 2016-06-15 12:53   좋아요 0 | URL
주어가 없어서 오해를 살 뻔 했습니다. ㅎㅎㅎ

페크pek0501 2016-06-15 12: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서 아들에 비해 딸을 키우기 힘든 세상입니다. 언제가 되면 딸을 마음놓고 키울 수 있는 세상이 되려나요?

cyrus 2016-06-15 12:58   좋아요 0 | URL
어머니가 휴대폰을 놔두고 외출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제 여동생은 밤늦게 친구 만나고 집에 들어옵니다. 이러면 제가 불안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