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 동화책에서 본 글이다. 옛날에 애꾸눈 왕이 있었는데, 나라 안의 유명한 화가들을 불러 초상화를 그리라고 했다. 모든 화가는 어떻게 왕의 모습을 잘 그릴까 고민을 했다. 애꾸눈을 그대로 그린 화가들, 애꾸눈이 아닌 것처럼 정상적으로 그린 화가들 제각기 다양하게 그렸다. 그런데 임금님은 화를 벌컥 내면서 거짓으로 그린 것도 안 되며 애꾸눈인 자기 모습을 그대로 그린 것 또한 몹시 불쾌하다며 다른 화가를 찾았다. 많은 화가 중에 마침내 임금님의 마음에 흡족한 초상화를 그린 화가가 나타났다. 그 화가는 임금의 미소 띤 옆모습의 초상화를 그렸다.

 

“폐하, 사람은 누구나 아름다운 면이 있습니다. 폐하는 미소 짓는 옆모습이 가장 아름답습니다.”

 

왕의 신체적 단점을 극복하여 미적 완성도를 높인 초상화를 제작한 이 화가는 정말 뛰어난 실력을 갖췄다. 대상을 진짜처럼 똑같이 그릴 줄 안다고 해서 다 훌륭한 화가가 되는 것은 아니다. 아름다움과 거리가 먼 대상도 아름답게 보고 묘사하는 능력이야말로 칭송받아 마땅하다. 

 

사실 초상화의 등장은 원래 얼굴 정면이 아닌 측면을 그린 것으로 시작되었다. 인물 또는 사물을 대충 나타낸 그림을 실루엣이라고 한다. 원래 하나의 색조만을 사용해 만든 이미지나 도안, 또는 물체의 윤곽이나 윤곽이 뚜렷한 그림자를 의미했다. 실루엣은 종이를 오려서 그림자 초상을 만드는 것이 취미였던 18세기 중반의 프랑스 재무장관인 에티엔 드 실루에트의 이름에서 유래됐다. 그는 흰 종이 위에 검은 종이를 옆모습처럼 잘라 붙여 만든 초상화를 상당히 좋아했다고 한다.

 

 

 

 

 

조지프 라이트  「코린토스의 소녀」  1782~1785년경

 

 

그렇다고, 실루엣을 만든 실루에트가 측면 초상화를 최초로 그린 사람은 아니다. 그 기원을 찾아보려면 미술의 역사를 더 많이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벽에 비친 인물의 그림자 윤곽을 그린 코린토스 도공의 딸에서 측면 초상화가 시작되었다는 설이 있다. 도공의 딸은 사랑하는 사람을 전쟁터에 떠나보내야 하는 생이별의 슬픔을 견디는 방법을 찾았다. 그녀는 훈련소로 떠나보낸 남자친구의 사진을 지갑 안에 소중히 간직하는 곰신의 처지가 되었으나 그땐 사진이 있을 리가 없다. 멀리 떠나 있어도 애인의 얼굴이 바라보면서 외로움을 달래고 싶었다. 그래서 도공의 딸은 애인의 얼굴에 불빛을 비추어 나타난 그림자의 외곽선을 따라 그림을 그렸다.

 

 

 

 

 

 

 

 

 

 

 

 

 

 

 

 

 

이렇듯 서양의 초상화는 정면을 그리던 동양의 초상화와 달리 측면을 중시했다. 측면의 윤곽을 뜻하는 프로파일(profile)은 오늘날 특정 인물에 대한 단평이라는 뜻으로 더 알려졌다. 정면이 아닌 측면이야말로 한 사람의 특징을 제대로 볼 수 있다고 인식했다. 

 

모델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으면서도 멋있지 않은 모델을 아름답게 묘사하는 것. 모델을 정확하게 그리기보다 쉽지 않은 일이다. 앞에서 언급한 동화 속 궁정화가는 화가 중에 극한직업일지도 모른다. 왕은 화가가 만나게 될 모델의 ‘끝판왕’이다. 권력자의 얼굴을 늘 바라보고 그의 초상화를 그리는 시간은 화가로서의 재능과 배짱을 스스로 증명해야 하는 어려운 임무(Mission impossible)이다. 왕이 초상화가 마음에 든다면 더 많은 명예와 부를 얻을 것이고, 반대로 조금이라도 마음에 안 들면 화가의 입지는 곤란해진다.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  「페데리코 다 몬테펠트로 공작 부부」  1472년경

 

 

과연 이 그림의 모델은 초상화 속 자신의 모습에 만족했는지 무척 궁금하다. 15세기 후반 이탈리아에서 활동했던 프란체스카는 근엄하게 보여야 할 모델을 솔직하게 그리는 데 치중한 것 같다. 관객은 페데리코 다 몬테펠트로 공작의 매부리코와 검버섯에 자연스럽게 눈이 간다. 약간 풀린 듯한 공작의 눈은 세상의 거센 풍파를 딛고 정상에 오른 권력자의 고된 여정을 말해준다. 화가가 공작을 무기력하게 그렸어도 한 지역을 다스리는 권력자란 사실을 잊지 않았다. 공작 부부의 배경으로 공작이 소유한 땅을 그려 넣어 권력자의 자부심을 한껏 드러냈다.

 

무엇보다도 프란체스카가 공작 부부를 서로 바라보는 설정으로 측면을 그린 것은 공작을 멋있게 그리고 싶은 화가의 배려이다. 공작은 마상시합 중에 오른쪽 눈을 다쳐 실명된 상태였다. 프란체스카는 공작의 오른쪽 눈이 드러나지 않도록 왼쪽 측면을 그린 것이다. 그래서 공작의 부인은 자연스럽게 오른쪽 측면으로 그리게 됨으로써 부부는 죽어서도 그림에서나마 영원히 서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부부 초상화에 관련된 또 하나 슬픈 사실을 알게 된다면 서로 마주 보는 공작 부부의 애틋한 사랑이 어렴풋이 재현된다. 부부 초상화가 제작되기 전에 공작부인은 아들을 출산하다가 그만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화가는 부부의 인연을 기념하기 위해 부부가 서로를 마주보도록 그렸다.

 

프란체스카가 못생긴 공작을 있는 그대로 그렸던 것은 오른쪽 눈을 잃고, 거의 다 늙어간 정도로 남성미가 완전히 상실된 공작의 곁을 지키다가 세상을 떠난 공작부인과의 고결한 사랑을 충실하게 표현하려는 의도가 아닐까 생각한다. 세월 앞에 장사가 없듯이 찬바람같이 훨훨 들어오는 세월은 뜨거웠던 사랑 감정을 식게 한다. 이 공작 부부의 초상화는 단순히 권력과 부를 과시하려는 일종의 명예인증서라기보다는 고결한 사랑의 아름다움을 인증하는 멋진 그림으로 볼 수 있다.

 

 

 

 

 

 

 

 

 

 

 

 

 

 

 

 

 

눈, 코, 입을 뚜렷하게 볼 수 있는 정면만이 아름다운 것은 아니다. 어떤 일에 몰두하는 사람의 옆모습이 매력적으로 보이는 것처럼 옆모습은 우리의 눈을 이쪽으로 물끄러미 바라보도록 은근히 유혹한다. 그렇다고 해서 손을 벨 것처럼 날카로운 콧대와 조각 같은 옆모습이 사랑받기 위한 필수조건은 아니다. 가짜 콧대와 가짜 눈으로 겉모습이 화려한 얼굴을 자랑하는 사람은 절대로 내면의 아름다움을 모른다.

 

 

나무는 사랑하면 그냥,
옆모습만 보여준다

 

옆모습이란 말, 얼마나 좋아
옆모습, 옆모습, 자꾸 말하다보면
옆구리가 시큰거리잖아

 

앞모습과 뒷모습이
그렇게 반반씩
들어앉아 있는 거 

 

 

(안도현, ‘옆모습’ 중에서)

 

 

어쩌면 삶의 동반자와 백년해로하는 과정에 정작 옆모습을 소홀히 여길 수도 있다. 진짜 그 사람을 사랑한다면 정면뿐만 아니라 측면도 늘 바라보아야 한다. 겉으로 드러나는 단점도 예쁘게 보인다. 그것은 사랑하는 사람의 옆모습에서 그동안 미처 알지 못했던 매력이 될 수 있다. 그래서 옆모습에서 진솔한 매력을 발견하는 것은 정겹다. 옆모습, 옆모습, 자꾸 바라보면 시큰거린 옆구리에 사랑하는 사람의 옆구리가 있음을 가까이 느껴질 수 있을 것이다. 항상 바라볼 수 있어서 행복한, 꾸밈없고 진실한 그 옆모습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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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이 2015-01-03 15: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면 알수록 보면 볼수록 정겨운 얼굴이 좋아. 아주 미남이거나 아주 미녀보다는. 그나저나 우리 사이러스 얼른 연애를 해야 할 터인데_

cyrus 2015-01-03 20:30   좋아요 0 | URL
연애세포가 완전히 죽기 않기 위해 오늘도 글로 사랑을 논합니다. ㅋㅋㅋㅋ

댄스는 맨홀 2015-02-04 10: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러게요.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좋아해주는게 사랑인 것 같아요.
 

 

 

“계획대로 전 연대가 전멸했다! 훌륭하군! 이제 아예 사신이 명령을 내리고 있어. 나도 거기 있었지. 시체가 즐비한 드넓은 전장을 보았다고! 짓이겨진 인간의 살점이 눈 속에 얼어붙어 있었어.” (카렐 차페크  『곤충 극장』 제3막에서, 76쪽)

 

 

카렐 차페크의 희곡 『곤충 극장』(열린책들, 2012년)은 한 편의 잔혹한 우화에 가깝다. 작품에 묘사된 곤충의 세계는 타락을 일삼던 소돔과 고모라가 연상된다. 인간인 여행자는 관찰자의 시점으로 곤충들의 생태를 바라본다. 여행자가 만난 곤충들은 한심하고, 사악하다. 여행자 앞에서 교태를 부리면서 유혹하려 드는 나비, 둥그런 똥 덩어리를 황금같이 여겨 누군가가 훔쳐갈까 봐 노심초사하는 쇠똥구리, 자식의 생존을 위해 다른 곤충들의 목숨을 빼앗는 맵시벌 그리고 과학의 진보를 믿고 영토 확장을 위한 야욕을 버리지 못하는 개미들. 이들은 탐욕 덩어리 인간의 모습과 너무나도 닮았다.

 

 

 

 

 

 

 

 

 

 

 

 

 

 

 

 

 

제3막은 격렬하면서도 끔찍했던 제1차 세계대전의 전쟁터 상황을 개미 연대의 싸움으로 재현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여행자는 개미들이 싸우는 장면을 지켜보면서 ‘훌륭하다!’라고 비꼰다. 그리고 자신 또한 시체가 널브러진 전장을 목격했다고 말한다. 눈 속에 얼어붙은 짓이겨진 인간의 살점. 짤막한 여행자의 독백 대사는 살아남은 자가 없었던 당시 참호전의 풍경을 어렴풋이 떠오르게 한다.

 

 

 

 

 

 

 

 

 

 

 

 

 

 

 

 

 

1914년부터 1918년까지 이어진 연합군과 독일군 간의 서부 전선은 가장 많은 전사자가 속출할 정도로 치열했던 장기전이었다. 이적을 공격하기보다는 적의 진격을 막기 위해 만들어진 기나긴 참호는 스위스에서 영국해협까지 만들어졌고, 그 길이만 1000km에 달한 것도 있었다. 지루한 참호전이 이어질수록 연합국과 독일 간의 적대감은 더욱 커져만 갔다. 영국의 애국주의자들은 독일산 개 닥스훈트를 죽여 적국을 향한 분노를 표출했고, 독일에서는 ‘영국 증오가’가 유행했다. 1914년 크리스마스 하루 동안 양측 군대가 자발적으로 전쟁을 멈추었던 기적의 날을 제외하면 서부 전선은 인류가 스스로 만들어 낸 지옥과 같았다.

 

 

 

 

 

 

 

 

 

 

 

 

 

 

 

‘시체가 즐비한 드넓은 전장’을 두 눈으로 직접 목격한 사람은 『곤충 극장』에 나오는 여행자(또는 카렐 차페크)만 있는 것이 아니다. 독일의 화가 오토 딕스도 제1차 세계대전 중에 자원입대하여 전쟁의 참상을 목도하고, 비참함에 치를 떤다. 그는 끔찍한 참상의 증인이었고, 역겨운 장면 그대로 캔버스에 담아낸다. 

 

 

 

 

 

오토 딕스  「전쟁」  1929~1932년

 

 

 

1929~1932년에 그린 「전쟁」은 참혹한 죽음이 생생한 묘사한 거대한 그림이다. 턱밑이 날아가거나 총탄 구멍으로 너덜너덜해진 병사들의 시체가 참호 속에 널브러져 있다. 그야말로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이다. “짓이겨진 인간의 살점이 눈 속에 얼어붙어 있었어”라는 절규에 가까운 대사를 내뱉는 여행자가 목격했던 그 장면이라고 해도 어색하지 않다. 이 그림이 공개된 당시 사람들과 비평가들은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딕스가 묘사한 그림이 너무나도 끔찍했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그의 그림은 전쟁을 옹호하는 애국 보수주의자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 그림에 대한 비난이 커지자 딕스는 이렇게 대답했다. “바로 저랬다. 나는 보았다.” 딕스도 『곤충 극장』의 여행자처럼 전장 한가운데 거기 있었다.

 

 

 

 

 

 

 

 

 

 

 

 

 

“이 그림은 ‘그림은 아름다운 것이다’라는 일반적인 통념을 철저하게 깨뜨린다. 인류사상 최초의 총력전인 제1차 세계대전을 경험한 후에 ‘아름다운 그림’ 따위는 더는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일까.” (서경식, 『고뇌의 원근법』 중에서)

 

 

「전쟁」을 본 서경식 선생의 감상처럼 무조건 아름다운 그림, 아름다운 세상만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생각했던 아름다운 세상 속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평화롭지 않은 지옥 같은 세상도 펼쳐져 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사는 세상의 참모습이며 우리의 멈출 줄 모르는 탐욕과 증오가 만들어 낸 소돔과 고모라이기도 하다. 딕스의 「전쟁」을 본 어느 비평가는 “구역질이 난다”고 비난했다. 딕스는 이 그림을 통해 휴머니즘이라는 고귀한 영역마저도 짓밟는 전쟁, 아니 전장에 나서는 인간의 광기를 전달하려고 했다. 거대한 그림은 살육을 일삼는 괴물 같이 변해버린 인간의 추악한 본성을 비춘 불편한 거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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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은 길고 인생은 짧다’라는 말이 있다. 하지만 이 예술품도 세월의 무계를 견뎌내지 못한다. 사실 우리가 지금까지 수천 년 전에 나온 예술품을 볼 수 있는 행운을 누릴 수 있었던 이유는 복원의 힘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복원은 낡고 상처 입은 예술품에 새 숨결을 불어넣는 작업이다. 그리고 시간을 거슬러 역사를 되살리는 일이기도 하다.

 

최근에 바티칸이 미켈란젤로가 그린 시스티나 성당 벽화와 천장화의 복원을 위해 관람객 수를 제한하기로 결정했다. 시스티나 성당은 다른 유명 성당들에 비해 규모는 작지만 천장과 벽 전체를 덮은 그림으로 인해 매년 600만 명 이상의 관람객이 줄을 잇고 있다. 그러나 수많은 관람객들이 한꺼번에 내뿜는 이산화탄소와 열기가 그림을 훼손시킬 우려가 있다. 그림의 복원 작업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1980년부터 이미 복원 작업을 시작했으며 제작 당시의 화려한 색채와 원형을 어느 정도 되찾았다. 그렇지만 복원 작업을 한다는 것은 쉬운 결정은 아니다. 복원 작업을 시작한 지 19년 만에 새롭게 단장한 벽화와 천장화가 대중에 공개되었을 때 당시 일부 전문가들은 냉담한 평가를 내리기도 했다. 복원 작업을 하는데 필요한 약품을 과도하게 사용하는 바람에 명암이 희미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복원 약품이 묻은 벽화 표면이 관람객들의 열기와 습기에 더 취약하다는 문제점이 드러났다. 바티칸과 복원 전문가들은 원작의 보존 상태가 최대한 유지될수록 대대적인 복원 작업을 실시했다. 어제 개선 작업이 끝낸 벽화가 공개되었는데 새로운 온도조절기와 LED 조명장치까지 설치하여 한층 선명해진 그림의 색감을 볼 수 있다. 

 

 

 

 

 

미켈란젤로  「천지 창조」 (1508~1512년) 

 

 

예전에 미술 교과서나 그림책에 나오는 「천지 창조」(또는 ‘아담의 창조’) 사진을 보면 항상 갈라진 균열 자국이 신경 쓰였다. 눈에 확연하게 보이는 선명한 균열 자국은 하나님이 팔을 펼쳐 손가락 끝을 대며 아담에게 생명을 불어넣는, 이 극적인 장면의 감동마저도 깨뜨린다. 성당이 지어진 지 오래된 탓에 곳곳에 금이 가 있다. 그림은 오래 보존될 수 있지만, 그림의 캔버스나 다름없는 집(성당)의 상태가 좋지 않은 것이다. 성당 벽화와 천장화는 프레스코(Fresco) 기법으로 그려졌다. 회반죽을 벽에 바르고 미처 마르지 않아 축축하고 ‘신선(Fresco)'할 때, 물에 녹인 안료로 그림을 그린다. 유화가 나타나기 전까지 프레스코화는 수천 년 동안 화가들에게 애용되었다. 보존성이 좋다는 장점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원작의 형태가 그대로 유지될 수 있었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바티칸이 화약 약품에 의지하는 복원 작업보다는 거대한 벽화와 천장화의 캔버스 역할을 하고 있는 성당 건물에 좀 더 신경 썼으면 하는 바람이다. 벽이나 천장에 갈라진 작은 균열도 무시할 수 없다. 건물이 견고하지 못하면 벽화와 천장화가 훼손될 수 있고, 관람객들의 안전을 위협한다.

 

한편으로는 벽화와 천장화에 생긴 갈라진 균열 자국이 500년이라는 시간을 버텨온 위대한 걸작에 어울릴 수도 있다. 사실 복원 작업 이후로 예전에 비해 눈에 보이던 균열 자국이 많이 사라졌음을 볼 수 있는데 옛 느낌도 같이 사라졌다.

 

 

 

 

 

사진출처: 전자신문

 

 

최근에 개장한 지 얼마 안 된 제2롯데월드 건물 바닥에 생긴 균열이 SNS에 공개됨으로써 논란을 일으킨 적이 있었다. 건물이 들어서기 전부터 지반 침하와 누수 논란이 있었기에 또다시 안전성 문제가 불거졌다. 그러자 롯데건설 측은 금이 간 것은 서울의 옛 느낌을 보여주기 위해 일부러 금이 간 것처럼 연출한 디자인이라고 해명했다. 그리고 절대로 안전에 문제가 없다고 강조했다. 일부러 균열을 만들어서 멋지게 보이려는 롯데건설의 디자인 방식. 나는 디자인에 문외한이지만, 누가 봐도 절대로 조각조각 갈라지고 깨진 틈을 자연스럽게 만들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더 웃기고 놀라운 사실은 서울시의 반응이다. 롯데건설 측의 주장에 수긍한 것이다. 회사 측의 해명대로 바닥에 투명 코팅을 했다면 균열에 명함 1장이 꽂힐 수가 없다.

 

롯데건설과 서울시는 제2롯데월드를 서울을 상징하는 랜드마크로 만들고 싶어 한다. 그렇지만, 건물에 생긴 균열이 안전과 무관하다고 볼 수 없다. 철저한 현장 정밀 조사도 없이 일단 대중의 논란을 잠재우려는 태도는 안전 문제에 민감한 시류를 거스르는 것과 같다. 바닥 균열도 하나의 연출 방식으로 생각하는 롯데건설의 ‘디자인 창조’가 건물 전체를 무너뜨리는 치명적 원인이 될 수 있다. 밖으로 드러나는 겉모습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겉모습을 오랫동안 유지되게 하는 내부의 힘이 더 중요하다. 「천지 창조」도 마찬가지다. 「천지 창조」가 더 오랫동안 사람들이 볼 수 있게 하려면 대성당 건물이 튼튼해야 한다. 작은 균열로 공든 ‘창조’가 무너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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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성황리에 끝난 국립중앙박물관의 오르세미술관전을 관람하고 있을 때였다. 전시회  기간 막바지라서 그런지 평일인데도 입장객이 많았다. 일렬로 줄 서서 그림을 봐야 할 정도로 발 딛을 틈이 없었다. 특히 에드가 드가의 발레리나 그림과 조각상에 사람들이 많이 모였다. 통로 중앙에 위치한 「무용복을 입은 발레리나를 위한 누드 습작」이 발레리나 그림보다 가장 많은 관심을 받았다. 어린 발레리나는 오른발을 앞으로 내민 상태에서 눈을 지그시 감고 다음 동작을 취하려고 한다. 이제 곧 발레가 시작되기 전에 흐르는 긴장감이 느껴지는 작품이다.

 

드가의 조각 작품을 보다가 내 옆에 서 있는 어느 젊은 커플의 대화를 엿듣게 되었다. 여자는 남자친구에게 드가가 어떤 사람인지 설명하고 있었다. “드가는 발레리나 그림을 많이 그렸대. 그런데 지난주에 서프라이즈에서 본건데 드가가 여성을 무척 싫어했어.신기하지?” 그 여자친구가 언급한 ‘서프라이즈’는 매주 일요일에 하는 TV 방송 프로그램을 의미한다. 지난 달 17일에 방영된 MBC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줄여서 ‘서프라이즈’)에 드가와 관련된 에피소드가 방영되었다.

 

드가라고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그가 즐겨 그렸던 발레리나지만, 작품과 상반되게 여성 혐오자로도 유명하다. 드가는 “여자의 수다를 들어주느니 차라리 울어대는 양 떼들과 함께 있는게 낫다”며 공개적 자리에서 여성 비하를 서슴없이 나타냈다. 결국 드가는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 무엇 때문에 그가 평생 여성을 혐오하면서 살게 되었을까?

 

 

 

 

에드가 드가  「에두아르 마네 부부」  1868~1869년경

 

 

지난 달 17일에 방영된 ‘서프라이즈’ 에피소드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드가는 여성을 흉측한 모습으로 그렸다. 한 번은 드가가 자신의 절친한 친구인 에두아르 마네와 그의 부인 쉬잔이 함께 있는 그림을 그린 적이 있었다. 평소 음악에 재능이 있었던 쉬잔의 피아노 연주를 듣고 있는 마네의 모습을 그렸다. 그러나 친구의 완성된 그림을 본 마네는 부인의 얼굴이 흉측하게 그려진 것에 화를 냈다. 심지어 아내의 얼굴이 있는 그림의 오른쪽 부분을 캔버스로 세로로 잘라버리고 말았다. 자신의 그림이 훼손된 것을 자존심 강한 드가가 그냥 지나칠 리가 없었다. 이 사건 이후로 두 사람 사이의 관계가 한동안 단절되었다.

 

 

 

 

그의 이런 여성혐오증은 어린 시절 어머니의 외도와, 그로 인한 아버지의 몰락으로 인해 생겨난 것이었다. 그림에 여성을 혐오스럽게 표현하면서 어머니에 대한 증오심을 표출했던 것이다. 발레리나들의 모습을 묘사한 그림을 주로 그려 명성을 얻은 드가의 그림들은 한눈에 보기에는 매우 아름답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발레리나들의 얼굴이 모두 추악한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었다.

 

나는 ‘서프라이즈’에 역사적 인물들의 숨겨진 일화를 소개하는 에피소드를 좋아하는 편이다. 그런데 간혹 시청자들의 관심을 높이려고 사실에 맞지 않은 내용을 방송하기도 한다. 최근 영화 ‘아이언맨’에 출연한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편이 완전히 틀린 내용을 사실인 것처럼 내보내 시청자들의 항의가 빗발친 적이 있었다.

 

사실 드가의 여성혐오증을 소개한 방송도 문제가 있다. 사실적인 정보와 거리가 먼 내용을 그대로 전파에 내보냈으니까. 드가가 여성혐오증이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방송은 드가의 여성혐오증을 부각시키려고 그의 그림에 억지로 연관성을 만들어 설명하려고 했으며 심지어 사실에 근거하지 않은 내용도 있다. 지금부터 ‘서프라이즈’ 드가 편 방송 장면을 하나하나 반박하려고 한다.

 

 

 

 반박 1. 드가의 여성혐오증은 어머니의 외도 탓이다?

 

 

 

 

 

 

 

 

 

 

 

 

 

 

 

 

드가의 일생과 작품 세계를 한 눈에 소개한 책으로 두 권이 있다. 시공 디스커버리 총서 시리즈 65번 앙리 루아레트의 『드가: 무희의 화가』(시공사, 1998년)와 마로니에북스 Taschen 베이직 아트 시리즈 17번 베른트 그로베의 『에드가 드가』(마로니에북스, 2005년)다.

 

드가의 어머니는 1847년에 세상을 떠났는데 열세 살의 드가에게 이른 어머니의 죽음은 비극적인 사건으로 보고 있다. 그 후로 드가는 어머니에 관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 어머니의 부재에서 비롯된 그리움을 말로 표현할 수 없었을 것이다. 어머니의 죽음은 드가의 아버지에게도 정신적으로 큰 영향을 끼쳤다. 드가의 아버지는 재혼을 하지 않았으며 조용히 홀로 지내는 바람에 은행이 점점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결국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에 은행은 파산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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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두 권의 책은 드가 어머니의 외도를 언급하지 않고 있다. 반면 이택광의 『인상파, 파리를 그린다』에서는 드가의 불행한 가족사를 상세하게 언급한다. 드가의 어머니는 남편의 남동생과 외도를 했는데 아버지는 아내를 너무 사랑해서 알면서도 묵인했다. 어머니의 사망이 아버지가 폐인으로 전락하게 만드는 결정적인 사건으로 본다. 서프라이즈 드가 편에 소개된 내용과 비슷하다.

 

이렇게 서로 상반된 내용을 어떻게 봐야 할까? 잠정적으로 결론을 내리자면 드가가 여성혐오증을 가지게 만든 원인을 어머니의 외도 탓으로 확정짓는 것보다는 또 다른 추측으로 보면 좋을 것 같다. 즉, 어머니 때문에 드가가 여성혐오자가 되었다는 내용은 무조건 100% 사실이라고 규정할 수 없다.   

 

 

 

 반박 2. 드가는 발레리나를 그린 그림에 여성혐오증을 표출했다?

 

아무리 드가가 주위 동료 화가들에서 잘 알려진 여성혐오자라고 하지만, 왜곡된 여성의 얼굴 그림을 드가가 의도적으로 여성을 비하하기 위한 것으로 보기에는 설득력이 떨어진다. 드가가 발레리나의 얼굴을 이상하게 그린 이유가 인공조명에 의한 빛의 효과를 노려 좀 더 사실적으로 묘사하기 위한 것일 수 있다. 드가는 인공조명의 빛과 어둠이 만나서 생긴 독특한 아름다움을 발레리나의 무대에서 발견했고, 이를 그림으로 나타내고자 했다. 이러한 조명의 효과는 캐리커처처럼 왜곡된 여성의 얼굴에 더욱 역동성을 띄게 만든다. 무대 위에서 자신만의 페르소나를 보여주는 발레리나들의 연기가 사실적으로 느껴진다. 그래서 드가는 발레리나를 그린 그림에 여성혐오증을 표출했다는 주장은 거짓이다.

 

 

 

 반박 3. 드가의 『개의 노래』는 여성을 개의 앞다리와 입모양을 묘사해 비하했다?

 

 

 

 

 

드가의 『개의 노래』는 카페 앙바사되르에서 노래를 부르는 엠마 발라동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서프라이즈’는 드가가 엠마 발라동을 개와 비슷한 자세를 취하게 만듦으로써 여성 비하의 증오심을 표출했다고 소개했다.

 

그러나 이 내용도 여성의 증오심을 담은 드가의 표현이라는 근거가 없다. 그림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엠마 발라동은 자신이 부르는 노랫말에 나오는 개를 흉내 내고 있다. 드가는 발라동의 자세를 혐오스럽게 표현했다기보다는 유행가의 통속성을 강조하려고 했다. 그리고 관람객들이 가수의 몸짓에 몰입할 정도로 열정적으로 노래 부르는 발라동의 아름다운 모습을 그렸다. 드가 또한 발라동의 노래에 열광했다. 

 

 

 

 

 

에드가 드가  「개의 노래」  1875~1877년경

 

“발라동의 커다란 입이 열리자 관능적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가장 아름답고, 부드러운 목소리! 인간의 목소리라고 믿어지지 않는다.” (베른트 그로베, 『에드가 드가』중에서, 58쪽)

 

드가의 『개의 노래』는 발라동의 멋진 노래 실력을 예찬하는 화가의 마음을 담은 그림이다. 이 그림을 여성 혐오와 연관 지어 설명하는 ‘서프라이즈’의 방송 내용은 사실을 왜곡한 거짓이다.

 

 

 

 

 

에드가 드가  「욕조」  1886년

 


이번 오르세미술관전은 드가의 작품 세계를 더욱 많이 알려질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그러나 ‘서프라이즈’ 드가 편은 방송의 재미를 위한 부각시키려다가 그만 사실을 왜곡하는 오류를 범하고 말았다. 평소에 여성을 무시하는 발언을 하고, 여성을 증오해서 평생 독신으로 살다간 드가의 삶이 평범하지 않지만, 그의 작품을 연관 지어 보게 된다면 드가의 독창적인 표현력을 간과할 수 있다. 드가의 여성혐오는 화가의 사소한 정보에 불과하다. 드가는 생각보다 여성을 모델로 많은 작품을 남겼다. 발레리나뿐만 아니라 평범한 여인에서부터 벌거벗은 채 목욕하는 여인까지 연작 형태로 제작했다. 개인적으로 여성을 아름답게 표현하는 뛰어난 작품으로 목욕하는 여인의 누드화를 손꼽히고 싶다. 평범한 여체를 형성하는 곡선 위에 더해진 빛의 효과로 인해 드가의 누드화는 관능적이다. 여성혐오자라고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말이다. 절대로 그럴 일은 없겠지만, 여성 혐오자라는 이유로 드가의 멋진 그림들이 말도 안 되는 선입견과 오해를 받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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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숭이는 영리한 동물입니다.
아프리카 토인들이 이 영리한 원숭이를 생포할 때
가죽으로 만든 자루에 원숭이가 제일 좋아하는 쌀을 넣어
나뭇가지에 단단히 매달아 놓습니다.
가죽 자루의 입구는 좁아서
원숭이의 손이 겨우 들어갈 정도밖에 되지 않습니다.
얼마 동안을 기다리면 원숭이가 찾아와
맛있는 쌀이 담긴 자루 속에 손을 집어넣습니다.
그리곤 쌀을 가득 움켜쥐고는 흐뭇해합니다.
그런데 쌀을 가득 움켜쥔 원숭이는 아무리 기를 써봐도
그 자루 속에서 손을 빼낼 수가 없습니다.
놀란 원숭이는 몸부림치며 울부짖기 시작합니다.
손을 펴서 놓아버리기만 하면 쉽게 손을 빼내 저 푸른 숲 속을
다시 자유롭게 누비며 살 수 있으련만, 슬프게도
원숭이는 한줌의 쌀을 움켜쥔 손을 펴지 못한 채 울부짖다가
결국 토인들에게 생포 당하고 마는 것입니다.
손을 펴라.
놓아라 놓아버려라.
움켜쥔 손을 펴라.
한 번 크게 놓아 버려라.

 

 

(박노해, ‘손을 펴라’)

 


아프리카 원숭이는 한줌의 쌀과 생명을 너무나 허무하게 맞바꿔 버렸다. 생소한 덫이 쌀을 움켜쥔 손을 결박해버리는 바람에 원숭이는 크게 당황하여 쉽게 빠져나오는 방법을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나 원숭이를 노리는 덫은 생각한 것보다 특별하게 생기지 않았다. 오히려 진짜 덫은 원숭이의 마음에 자리 잡은 ‘욕심’이다. 자신이 만든 덫에 걸리고 만 것이다. 한 편의 우화가 연상되는 박노해의 시 ‘손을 펴라’는 욕심을 움켜쥔 채 손을 펴지 못하는 어리석은 인간을 원숭이로 비유했다.

 

 

 

 

 

 

 

 

 

 

 

 

 

 

 

 

우화나 동화 속 원숭이는 꾀가 많은 영리한 동물로 등장하지만, 눈앞의 이익만 집착하는 우매한 모습으로 그려지기도 한다. 가장 대표적인 이야기가 ‘조삼모사’(朝三暮四)다. 중국 춘추시대 송나라에 저공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워낙 오랫동안 원숭이를 길렀으므로 그는 원숭이들의 심리를 꿰뚫고 있었으며 원숭이 또한 그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정도가 되었다.

 

하지만 원숭이들의 숫자가 많았던 데다 식욕까지 워낙 왕성하다 보니 먹이를 대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었다. 저공은 원숭이들의 양식을 줄이기로 했다. 하지만 원숭이들이 불평할 것이 두려워 먼저 원숭이들과 상의하기로 했다. 그는 집안의 모든 원숭이들을 불러 놓고는 말했다. 처음에는 도토리를 아침에 3개, 저녁에 4개로 주기로 제안하자 원숭이들은 그렇게 먹어도 배고프다고 불평했다. 원숭이들의 항의에 저공이 “이제부터 아침에 4개, 저녁에 3개 주겠다”고 대답하자 원숭이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세 개에서 네 개로 늘어났다고 여긴 원숭이들은 그 제서야 뛸 듯이 기쁜 것이다. 실질적으로 달라진 게 없는데 원숭이는 저공의 꾀에 속아 넘어갔다.

 

‘조삼모사’에 나오는 원숭이들은 저공에게 농락당할 뿐만 아니라 그에게 쉽게 길들여지고 마는 수동적인 모습 또한 보인다. 영원히 우리 안에 갇혀서 아침, 저녁으로 저공이 주는 도토리 7개를 먹으면서 살아야 한다. 아침에 4개, 저녁에 3개로 식사하는 것이 자신들이 살아가는데 최상의 조건이라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피터르 브뤼헐  「두 마리 원숭이」  1562년

 

어리석은 원숭이 이미지는 플랑드르 출신 화가 피터르 브뤼헐의 그림에서도 나타난다. 언뜻 보면 두 마리 원숭이를 묘사한 평범한 그림이다. 원숭이들은 좁은 창의 난간 위에 쇠사슬로 묶인 채 지내고 있다. 창밖으로 시야가 탁 트인 항구가 보인다. 오른쪽 원숭이 등 뒤에 속살을 먹고 버린 호두 껍데기가 흩어져 있다.

 

 

 

 

 

 

 

 

 

 

 

 

 

 

 

 

브뤼헐은 쇠사슬에 묶인 원숭이들을 그린 이유가 무엇일까? 어느 부유한 사람이 기르는 애완용 원숭이를 그렸던 것일까? 브뤼헐의 그림은 우화나 속담을 그림으로 묘사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래서 그의 그림 속에 화가가 전달하려는 어떤 특정한 메시지가 숨겨져 있다.

 

원숭이 그림에 관한 해석 중 가장 설득력이 높은 것이 플랑드르 속담을 그렸다는 설명이다. “개암나무 열매 한 개 때문에 재판소에 간다”라는 속담은 별 것 아닌 열매 때문에 죄를 짓고 마는 어리석은 태도를 조롱하고 있다. 속담의 의미를 브뤼헐의 그림에 대입하면 우리는 두 마리 원숭이가 쇠사슬에 묶인 채 살게 된 배경을 상상해볼 수 있다.

 

두 마리 원숭이는 길에 떨어진 호두를 발견한다. 그런데 호두는 한 마리 원숭이만 먹을 수 있다. 원숭이들은 호두를 차지하기 위해서 서로 싸운다. 서로 뒤엉키면서 싸우는 사이에 마침 지나가는 사냥꾼이 손쉽게 그들을 포획한다. 새와 조개의 싸움으로 제3자인 어부가 덕을 보는 ‘어부지리’(漁父之利) 고사와 유사하지만, 어쨌든 호두 한 개를 둘러싼 원숭이들의 욕심은 그들에게 덫이 되어 인간에 잡히고 만다. 이제 예전처럼 자유로운 야생 생활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어부지리’ 고사를 따온 그림에 대한 해석은 개인적인 상상으로 꾸민 것이다. 지금도 브뤼헬의 원숭이 그림을 설명할 수 있는 확실한 해석이 나오지 않았다. 그렇지만 우리는 딱 이 그림만 봐도 원숭이들이 자유롭지 못한 상태임을 짐작할 수 있다. 두 마리가 겨우 움직일 수 있는 창의 난간이 감금된 상황을, 이것과 대조적으로 창 밖에 펼쳐진 항구 풍경은 두 마리 원숭이의 과거, 즉 자유로웠던 삶과 세계를 상징한다. 하필이면 하늘 위에 두 마리 새가 훨훨 날아다닌다. 영원히 난간 위에 살아야하는 원숭이를 더욱 비참하게 만든다. 왼쪽 원숭이의 표정은 예전처럼 자유로운 생활로 돌아가지 못한 마음에 자포자기한 심정이 드러나 있다. 오른쪽 원숭이도 마찬가지다. 그는 항구 풍경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 차마 하늘 위로 날아가는 새를 바라보지 못한다. 오히려 회피하는 듯하다.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새가 부럽다. 이제야 자유의 소중함을 깨닫는다. 호두 한 개 때문에 욕심으로 눈이 먼 어리석음을 후회한다.

 

그러나 자유의 의미가 상실되거나 박탈된 존재는 끊임없이 고통 받는 것이 아니다. 저공의 원숭이처럼 현실을 그대로 순응하면서 살아가기도 한다. 자유를 찾기 위한 어떠한 해결책도 생각하지 않은 채 말이다. 오히려 탈출을 시도하다가 위험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탈출한 죄로 예전보다 먹이를 적게 주거나 더 좋지 않은 곳에 살 수도 있다. 최악의 결과는 죽음이다. 그만큼 생존을 위한 탈출 시도는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오랫동안 쇠사슬로 결박된 채 좁은 감옥 생활에 적응하면 어느새 탈출에 대한 생각이 사라진다. 탈출하고 싶고, 살아서 자유로운 삶을 원한다. 그러나 그 방법이 무모하다고 생각한다. 일단 사는 것이 우선이기 때문에 탈출 실패가 초래하는 끔찍한 결과를 원하지 않는다.

 

 

 

 

 

 

 

 

 

 

프란츠 카프카의 단편 '학술원에 드리는 보고'에 나오는 원숭이 ‘빨간 피터’는 철창을 벗어나기 위해 원숭이의 본성을 벗어던진다. 인간이 되기로 결심한다. 처음에 피터는 좁은 철장에 빠져나오기 위해 몸부림쳤지만 탈출이 불가능하게 되자 원숭이의 정체성을 포기한다.  인간이 된다면 자유를 되찾을 수 없더라도, 우리에서는 벗어날 수 있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러기 위해 악수하는 법과 술·담배를 배우고 말하는 법을 배우면 됐다. 간단히 말해 쇼무대에서 인간흉내를 내어 그나마 우리 속에서 탈출할 수 있었던 것. 인간의 언어를 습득함으로써 점점 더 인간의 모습에 가까워진 피터는 서커스단의 일원으로 대성공을 거둔다. 피터는 학술원 회원에게 자신이 그동안 살아온 과정을 보고하는 내내 구원의 길을 모색하는 자신의 모습에 한껏 자부심에 고취되어 있다.  

 

그러나 작품의 이면을 살짝 들여다보면 피터는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그는 여전히 원숭이일 뿐임을 알 수 있다. 그가 목소리를 높이면 높일수록 피터는 여전히 원숭이의 상태에 머물고 있을 뿐이다. 관객 앞에서 묘기를 부리는 공연하는 것은 인간에게 조련당하는 원숭이의 모습에 불과하다. 결론적으로 원숭이 피터는 인간으로 거듭난 행복한 원숭이가 아니라 인간에게 사로잡혀 자유분방한 정체성을 상실한 가련한 원숭이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피터는 ‘하겐벡 증기선의 중간 갑판에 있는 우리 안에’ 갇히게 되는데 여기서 ‘하겐벡’은 그 당시 유명한 동물원을 세운 회사이다. 독일 출신 회사 설립자의 이름을 딴 하겐벡은 육식, 초식동물의 구분 없이 공존하는 파노라마 형태의 동물원을 만들었다. 피터가 제아무리 인간처럼 흉내를 내도 그는 하겐벡 소속의 동물일 뿐이다.

 

피터는 억압적인 현실에 순응하면서 참된 자아를 잃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극복해나가는 탈출구를 스스로 포기했다. 철창의 자물쇠를 물어뜯을 수 있는 이빨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예 시도를 하지 않는다. 인간이 먹이로 가져다주는 호두 껍데기를 원활하게 부수는데 사용한다.

 

“지금의 제 이빨로는 이미 일상적인 호두까기에도 조심해야만 합니다만, 그 당시에는 틀림없이 시간이 지날수록 문의 자물쇠를 물어뜯는 데 성공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저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한들 무엇이 얻어졌겠습니까? 제가 머리를 내밀자마자, 사람들은 저를 다시 잡아서 더 고약한 우리 안에 가두었겠지요.” (카프카  '학술원에 드리는 보고' 중에서, 도서출판 솔, 263쪽)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라는 우리나라 속담처럼 피터는 탈출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어려운 현실 속에 살아갈 수 있는 방안이 생기게 마련이다. 우습게도 피터는 탈출할 수 있는 유일한 무기를 사람이 주는 호두를 부수는 용도로 사용했다. 호두 때문에 탈출 시도를 쉽게 체념하고 만다. 그 호두가 피터의 탈출 시도를 방해하는 덫이 되었다. 자물쇠를 물어뜯어보는 시도를 하지도 못한 채 그렇게 피터는 인간 흉내 내는 어리석은 원숭이가 되었다. 피터는 철창 우리 생활을 영원히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절망 속에 갇힌 상태에서 희망의 탈출구를 찾기 위해 서성거리기에는 이미 늦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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