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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가 어려운데 소비라도 줄여야지, 하지만 턱없는 소리다. 우리는 살아가기 위해서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폴란드의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의 말처럼 문화는 이미 소비시장의 지배를 받고 있으며, 유행에 종속된 현대인들이 소비하는 사회에 살아가고 있으니까.

 

"오늘날 문화는 무엇보다도 이제 소비자로 전환된 사람들이 경험하는 거대한 백화점으로 변해버린 이 세상의 여러 매장 중 하나로 자신을 바라본다. 이 거대한 상점의 다른 매점들과 마찬가지로 선반은 매일 바뀌는 매력적인 상품으로 넘쳐나며, 계산대는 그들이 광고하는 한물간 참신한 제품들처럼 곧 쓸모없어질 최신 홍보물로 장식되어 있다. 계산대의 광고와 선반에 진열된 상품들은 선천적으로 억누를 수 없는 순간적인 충동을 불러일으키도록 계산되어 있다." (지그문트 바우만 『유행의 시대』중에서)

 

현대인은 소비를 통해 세상과 소통하고 소비를 통해 나를 발견한다. 현대인이 선택하는 건 상품이 아닌 이미지다. 현대인은 이미지에 열광한 나머지 이미지를 따라하고 이미지를 먹고 이미지를 차지하려고 서로 싸운다. 누가 이미지를 지배하는가를 놓고 벌이는 경쟁에 뛰어들지 않고서는 살아남을 수 없다. 이미지를 새롭게 해석하고 이미지를 통해 메시지를 전달하고 이미지를 통해 상품에 가치를 부여하기 위한 경쟁이 한창이다. 그렇다면 이미지란 무엇이고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 걸까.

 

 

 

 

 

 

 

 

 

 

 

다다이스트 마르셸 뒤샹이 소변기에 ‘R Mutt’라고 사인한 뒤 그걸 독립예술가협회전에 ‘샘’이라는 이름으로 ‘작품’으로 출품했다. 불경스럽고 비도덕적이고 표절이고 어떤 미적 대상도 될 수 없는, 현대미술에 대한 모욕이라는 이유로 출품되자마자 작가의 사전 동의 없이 작품은 사라졌다. 그러나 1964년에 다시 만들어진 복제본을 보고 그 누구도 “불경하다” “비도덕적이다” “표절이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또한 뒤샹이 직접 소변기를 만들었는지 아닌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그가 그걸 선택했다는 사실이다. 지저분한 소변기에 새로운 이름과 새로운 관점을 부여해 전혀 새로운 가치를 만들고, 사람들의 머릿속에 새로운 시각과 생각을 심어주었다. 발상의 전환이었다. 똑같은 이미지인데 사람들은 이제 그 앞에서 기념촬영하기 바쁘고, 콧대 높았던 미술관들은 전시를 하고 싶어 안달이다.

 

이미지는 사전적 의미로는 어떤 대상을 바라보는 관점이고 태도다. 그리고 이미지를 지배하기 위해서는 대상을 새롭게 해석하는 힘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소비자의 취향은 나날이 변한다. 싼 것을 찾다가도 기능과 디자인을 보고 또 친환경 제품인지를 따진다. 요즘 같은 불경기에는 에너지 효율이 어떤지 살핀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어떤 이미지를 보여주는가에 소비자들은 동전을 던진다. 이렇듯 소비는 수많은 이미지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는 특별한 행위다. 어떤 옷을 입고, 어떤 책을 읽으며, 어떤 음식을 먹고, 어떤 음악을 듣고, 무엇을 하며 여가를 보내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자신을 발견한다. 이는 소비대중문화 속에서 자신만의 정체성을 만들어내는 소비자의 특권이다. 이런 특권은 단순히 물건을 사고 점심을 사 먹는 일차원적인 소비를 넘어 특정 생각을 지지하고 특정 문화를 후원하는 소비에 이르러야 비로소 누릴 수 있는 즐거움이다.

 

 

 

 

 

 

인간은 생각하는 동물이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다 보니 무엇을 소비할까 고민하는 동물이 되었다. 더 노골적으로 표현하면 쇼핑을 즐기는 유일한 동물이 바로 인간이다. 바바라 크루거의 작품 「나는 쇼핑한다, 고로 존재한다」(I shop therefore I am)는 이러한 인간의 모습을 풍자한다. 흑백 사진의 오른손이 마치 신분증이라도 제시하듯 ‘I shop therefore I am’이라는 하얀색 글씨가 쓰인 붉은색 사각형 명찰을 들고 ‘저는 쇼핑을 하기 위해 태어났는데요’라고 소개하는 것 같다. 쇼핑을 최고의 가치로 치켜세우고 쇼핑을 통해 자신을 과시하는 당대 여성을 비꼬는 동시에, 무엇을 소비하는가를 통해 한 사람의 정체성을 결정해 버리는 소비 자본주의의 한계를 드러낸다. 그렇다면 역으로 자신만의 독특한 이미지 소비와 해석을 통해 그 한계를 극복해낼 수 있지는 않을까. 그러면 이미지의 소비자에서 생산자로 변신해 볼 수 있지는 않을까. 그리고 이 방법이야 말로 앞서 이야기한 이미지를 지배하는 해법은 아닐까.

 

이미지와 텍스트의 조합을 통해 왕성하게 새로운 의미를 생산해내는 작가 바바라 크루거라면 그런 한계를 극복하지 않을까 싶다. 그녀는 이미지를 소비하며 동시에 새로운 이미지를 생산해내는 예술가다. 모든 예술가가 다 그런 건 아니다. 새로운 그림을 그렸다고 해도 기존의 틀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면, 그건 단순히 새로운 스타일을 선보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새로운 인식과 새로운 시점을 제시해 주는 이미지가 진정한 의미의 새 이미지다. 그리고 이 새 이미지야말로 새로운 가치를 제시하는 힘을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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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돌아와요, 옐로 하우스에

 

 

 

 

 

 

 

 

 

 

 

 

 

 

 

 

 

 

 

 

 

 

 

 

 

 

 

 

반 고흐, 그리고 폴 고갱. 달리 설명할 필요도 없이 전 세계인의 사랑을 받는 걸작을 남긴 두 천재화가의 삶에는 교차점이 있다. 고흐가 동생 테오의 후원으로 프랑스 남부의 따뜻한 시골 아를에서 자리를 잡은 뒤 평소 가장 이상적인 동료라고 생각했던 고갱을 설득해 시작한 약 60일간의 동거 생활이다. 바로 1888년 10월 23일부터 12월 25일까지의 일이다. 프로방스 시골 마을 아를에서 이들이 보낸 곳이 바로 고흐의 그림으로 잘 알려진 ‘옐로 하우스’다.

 

 

 

 

빈센트 반 고흐  「노란 집」 1888년

 

 

미술사적으로 이 60일은 가장 유명한 동거임에 틀림없다. 재능이 뛰어나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두 사람의 작품은 상당히 달랐기 때문이다. 두 사람의 동거는 고흐와 당시 미술상이었던 동생 테오와의 구상에서 시작됐다. 예술가들이 한데 모여 살면서 하나의 예술 공동체를 이루기를 원했던 두 사람은 고흐가 동생 도움을 받아 아를에 터를 잡으면서 그 구상을 실행에 옮긴다. 고흐에게 그 대상은 폴 고갱이었다. 테오에게 편지를 써 ‘혹시 고갱이 남쪽으로 올 수 있을까?’라는 기대를 내비쳤고 이런 생각은 일종의 집착으로 발전됐다.

 

고흐는 5월 말부터 다섯 달 동안 고갱에게 편지를 보내 아를에 와서 자신과 함께 살 것을 종용했다. 자신을 금전적으로 도와주고 있던 테오도 동원했다. 가난한 고갱이 옐로 하우스에서 자신과 같이 살면서 그림을 주는 대신 숙식을 제공받는 데 동의하도록 만들었다. 고갱은 이 제안을 받아들이고도 출발은 계속 연기했다고 한다.

 

그 전 해 겨울 파리에서 직접 만난 적이 있었던 두 사람은 이를 통해 훨씬 친밀해졌다. 편지 안에는 아이디어를 나누는 두 사람 얘기도 나오고 새로운 작품에 대한 설명도 들을 수 있다. 그런 과정 이후에 고갱은 1888년 10월 23일 오전 5시가 조금 넘은 시간, 거의 이틀 동안의 여행 끝에 아를 역에 도착했다. 그리고 두 사람의 동거가 시작됐다. 고흐는 고갱을 위해 방을 준비하면서 그 안에 자신의 그림 <해바라기>를 걸어 놓았다고 한다. 6년 후 고갱은 이에 대해 시적으로 표현했다고 한다.

 

 

 

 

 

빈센트 반 고흐  「해바라기」 1888년

 

 

“나의 노란 방에는 해바라기들이 노란색을 배경으로 서 있었다. 해바라기들은 노란 테이블 위의 노란 화분에 심어져 있었다. 그림의 한 귀퉁이에는 화가의 서명인 ‘빈센트’가 쓰여 있었다. 그리고 내 방의 노란색 커튼을 통해 들어왔던 노란 해는 방을 황금색으로 가득 채웠다. 아침에 침대에서 깰 때면 나는 이 모든 것에서 정말 좋은 향기가 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들의 동거는 너무나 달랐던 작품 성향만큼이나 쉬운 일이 아니었다. 고흐는 성격이 예민한 데다 작업 환경이 지저분하고 산만했다. 여기에 대해 고갱은 간섭할 수밖에 없었고 서로 다른 생활방식은 불만이 될 수밖에 없었다.

 

회화에 대한 열정과 불굴의 신념을 갖고 있는 고갱은 인간의 본성을 파괴하는 문명을 비판하며 문명에 오염되지 않은 곳들을 찾아다니며 때묻지 않은 소박한 삶을 찬양하는 그림들을 그렸다. 고갱과 달리 자신을 중생구제를 위해 나선 수도자에 비유한 고흐는 불행한 사람들을 동정했다. 인간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가난한 시골농부들의 삶을 정열적인 붓터치로 그려냈다.

 

 

 

 나 이제 그 방으로 돌아가지 않으리  

 

 

 

 

 

빈센트 반 고흐  「빈센트의 방」 1889년

 

 

고갱과 비극적인 이별을 하고 나서, 요양원에 치료를 받은 후 고흐는 이 때 옐로 하우스에 있는 자신의 방을 그리게 된다. 몸과 정신이 피폐해진 고흐는 자신이 없는 방 안을 혼령처럼 쳐다본다. 정갈하게 정리된 방은 주인이 방을 비우고 그림을 그리러 나갔음을 나타난다. 살짝 열린 환한 창은 고갱과 함께했던 따뜻한 여름날의 추억을 암시한다. 그림 속 많은 사물들이 짝을 이루고 있다. 양쪽 끝의 문, 두 개의 베개, 두 개의 의자, 두 짝의 창문, 두 개의 초상화 등. 그건 고흐의 외로움을 나타내는 것 같다. 어쩌면 고갱을 생각해서인지 그가 떠나간 쓸쓸한 빈자리를 물감으로 채색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빈센트 반 고흐  「빈센트의 방」 1888년

 

 

재미있게도 고흐는 옐로 하우스에 있는 자신의 방을 이미 두 점을 그린 적이 있었다. 첫 번째 아를의 방 그림은 고갱이 아를에 오기 일주일 전 설레는 마음으로 그린 그림이다. 고갱이 온다는 설렘도 있었고, 처음으로 ‘자기만의 방’을 가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동생 테오에게 경제적으로 의존하는 처지였지만, 그래도 영감이 떠올리게 하는 고장에서 갖게 된 멋진 ‘자기만의 방’이었다.

 

1888년 12월, 무슨 마음의 심경이 고흐로 하여금 자신의 귀를 자르게 했는지 지금도 논란이 있지만 당시 고흐의 상태는 최악이었다. 고갱에게 화가 나 있었고, 친구들은 일 때문에 아를을 떠나갔고, 동생 테오는 약혼을 한 상태였다. 고흐는 외로웠다. 그리고 사건은 터지고 고갱은 바로 떠나 버린다. 고흐는 아를의 병원을 거쳐 생 레미의 요양원으로 옮겨진다. 요양원에 나온 이후 그는 자신의 방을 세 번째 그리게 된다. 그러나 고흐는 예전에 그 행복했던 옐로 하우스의 방으로 다시 들어가지 못했다. 아니, 쓸쓸한 고독만 남아 있을 그 곳으로 돌아가기를 바라지도 않았을 것이다.

 

 

 

 우리가 알지 못했던 경쟁 그리고 숨은 우정

 

 

 

 

 

 

 

 

 

 

 

 

 

 

 

 

고흐와 고갱은 신기하게도 평행선과 같은 인생을 살았다. 다른 직업을 갖고 살다가 화가로서의 삶을 비교적 늦은 나이에 시작했다. 그리고 둘 다 파리 생활에 싫증을 느끼고 지방으로 내려가게 되고 아를에서 드디어 두 사람은 운명적으로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 생전에 그다지 인정을 못 받았다는 점까지 비슷하다.

 

고갱은 35세 때 주식 중매인에서 화가로 전업한다. 몇 년이 지나, 파리를 떠나 이곳 그림 같은 시장 도시 퐁타벤에 반해 동료 화가들과 머물렀다. 여기에서 그린 그림 중 하나가 바로 <황색 그리스도>다.

 

 

 

 

 

폴 고갱  「황색 그리스도」 1889년

 

 

그리스도가 브르타뉴 주변의 가을 들판처럼 황색으로 그려져 있고, 그리스도의 죽음을 슬퍼하는 여인들이 브르타뉴 지방의 전통 의상을 입고 있다. 이 그림은 퐁타벤 근처에 있는 성당 안에 있는, 나무로 된 십자가상을 보고 영감을 받아 그리게 되었다. 고갱의 자화상 후경에 나타나는 <황색 그리스도>는 그림의 좌우가 뒤바뀌어져 있다. 자화상은 거울에 반사된 모습을 그리기 때문이다.

 

 

 

 

폴 고갱  「황색 그리스도가 있는 자화상」 1889년

 

 

'자화상' 오른쪽에 고갱이 만든, 담배 넣는 항아리인 '괴물 형상을 한 폴 고갱의 얼굴'이다. 고갱은 그림뿐만 아니라 도기에도 많은 작품을 남겼다. 여기에 보들레르 같은 상징주의자들이 자주 사용하는 악마주의적 면모를 엿볼 수 있다.

 

신성과 악마성 가운데 자신이 있다. 자신과 오른쪽 항아리는 왼쪽의 그림에 대조적으로 어둡다. 그건 자신의 마음 속 모습과 갈등을 암시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실제로 자신의 방에 이렇게 자신의 작품을 배치해 놓았다기보다는 자화상을 위한 의도적인 구상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래도 고갱의 얼굴에 작은 빛이 머물고 있다. 고갱의 표정을 보면 진지한 것을 볼 수 있다. 가냘픈 그리스도의 몸에 비해 덩치 큰 모습으로 자신을 그린 것은 인간적인 자신의 욕망을 은유하는 것은 아닌가 싶다.

 

고흐의 방과 고갱의 방은 사뭇 달라 보인다. 간결하고 단순하면서도 강렬한 인상을 주는 고흐의 방, 어느 정도 자유로운 사조로 살았고 원시주의적인 것에 경도되었기에 어느 정도는 거칠었을 고갱의 방. 이 그림을 그린 시기는 고흐와 비참한 결과로 헤어진 후이고, 그림의 완성은 고흐가 죽은 후다. 고갱의 마음에 고흐에 대한 미안함과 죄스러움이 있었을 테이고 혹시 이 '자화상'에 그런 마음이 담겨져 있을 것이다. 실제로 고갱은 고흐가 귀를 자른 이후 자살할 때까지 편지 왕래가 있었다. 그는 자신의 신세를 보살펴 준 고흐와 테오에 대해 고마움을 표현했으며 병마에 괴로워하는 고흐를 외면할 수가 없었다.

 

"비록 서로 맞지 않는 점들은 있지만, 고통과 병마에 시달리며 도움을 바라는 선량한 친구의 뜻을 도저히 거스를 수가 없다."

 

고흐가 귀를 자른 사건에 대해서 예술 전문가인 한스 카우프만과 리타 빌데간스는 고흐의 귀는 그 자신이 자른 것이 아니라 펜싱을 했던 고갱이 잘랐을지도 모른다는 주장을 제기했다. 사건 전날 밤 두 사람은 술을 마시고 크게 다퉜으며 다음날 아침 고갱이 경찰에 신고했다고 말하고 그러나 고갱이 경찰에게 한 초기 진술에는 고흐 자신이 귀를 잘랐다는 언급이 전혀 없었다는 것이다. 또 고갱이 사건 당일 자신이 살던 아파트가 아니라 호텔에 머물고 다음날 파리로 서둘러 떠난 것도 의심스러운 점이 있다고 주장했다.

 

과연 이 주장이 진실일지 명확하게 판단할 도리가 없다. 분명한 건 고흐와 고갱, 애증의 관계는 우리가 알지 못했던 경쟁과 증오와 우정이 숨어있다. 단편적인 사실만 가지고 두 사람의 복잡한 관계를 추리소설에서나 볼 수 있는 미궁 속으로 엉뚱하게 빠지지 않기를 바랄 뿐이며 과장 해석하지 않았으면 하는 생각이 든다.

 

고흐와 고갱. 이 두 화가는 생애 마지막까지 서로를 의식하며 최선의 창작을 더해가며 예술혼을 불태웠으며 이를 위해 서로가 필요했다. 서로의 페이스를 유지하게 해주는 최고의 육상선수들처럼, 그들은 반세기 동안 상대가 없었더라면 불가능했을지도 모르는 일들을 하도록 서로의 예술관을 자극했다. 탁월한 예술적 성취를 이룬 두 사람이 비슷한 연대에 출생하고, 작품 활동을 벌인 자체가 예술사에 있어서는 위대한 장면이다. 그리고 고흐가 작년 겨울부터 올해 초 사이에 한가람미술관을 들렀고 이번에는 고갱이 서울시립미술관을 찾았다. 두 사람의 위대한 작품을 일 년도 채 안 돼 직접 눈으로 볼 수 있다는 건 크나큰 행운이다. 언젠가 다음에 또 한 번 한국에 찾아오게 되면 두 사람이 한 자리에 동시에 볼 수 있는 기회가 오기를 꿈꿔본다.

 

 

 

* 2013년 9월 29일까지 서울시립미술관에서 ‘낙원을 그린 화가 고갱’ 전시회가 열린다. <황색 그리스도>, <황색 그리스도가 있는 자화상>뿐만 아니라 고갱의 최고 걸작인 <설교 후의 환상><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로 갈 것인가> 등이 전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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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 마그리트  『교사』 1954년

 

 

저 끝으로 마을이 어슴푸레하게 실루엣으로 드러나는 황량한 들판 위에 한 남자가 홀로 서 있다. 뒷모습이라 얼굴은 볼 수 없다. 차림새로 보아 세련된 도시풍의 중년 신사로 짐작된다. 검정 코트를 반듯하게 차려 입었고 코트에 어울리는 중절모를 쓰고 있다. 그리고 달. 중절모의 머리 바로 위로는 그믐달이 교교하게 빛을 발하고 있다. 달빛의 기운을 받았는지 밤하늘의 어둠은 청색조로 온통 물들어 있다. 초저녁일까 새벽일까? 천지사방은 적막할 뿐이다.

 

얼핏 봐서 그림에 특별히 이상한 점은 없다. 적어도 이상한 점을 합리적으로 설명하기는 힘들다. 그러나 들여다볼수록 야릇한 의문과 신비한 느낌에 사로잡힌다. 우선 그믐 치고는 사위가 너무 훤하다. 중절모 위에 거의 내려앉은 듯한 달의 위치도 묘하고, 낮게 깔린 지상의 풍경과 대비된 남자는 거인처럼 커 보인다. 그리고 왜 저렇게 부동의 차렷 자세로 우두커니 서 있을까? 양복점 마네킹처럼 혹은 방부 처리되어 압정으로 고정된 곤충표본처럼 미동도 않는 모습이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전혀 짐작할 수 없다. 그러면서도 그림 전체는 뭐라 딱 꼬집어서 말할 수 없는 신비와 경이의 영역으로 우리를 몰입하게 만든다.

 

마그리트가 그린 ‘교사’(敎師)라는 제목의 그림이다. 제목과 그림 전체의 이미지와의 연관성도 수수께끼다. 그의 그림은 늘 이렇다. 불합리, 부조리, 불가해함. 더불어 시와 꿈과 환상이 배어있는 그림. 그러나 여기서는 모든 것이 사실적으로 정확히 그려진다. 다만 그려진 내용은 현실에서는 존재하기 힘든 모습들이다. 사실적으로 그려진 이미지는 일반적으로 우리로 하여금 참이라고 믿게 만드는 속성이 있다. 그 속성 때문에 참이라고 믿는 순간, 동시에 우리는 모순과 역설에 직면한다. 정작 그려진 건 도저히 참일 수 없는 모습이기 때문이다. 마술은 이때 발생하고 우리는 일상의 현실과 이미지 사이에서 길을 잃고 헤맨다. 그러나 그 헤매는 과정에서, 관성에 젖은 평범한 현실 너머를 호흡할 수 있는 길도 열린다.

 

 

 

 

 

 

 

 

 

 

 

 

 

 

 

 

우울증 속에서 은둔자적인 삶을 살았던 화가 자신의 뒷모습이 연상된다. 실제 마그리트는 종종 작품 속에 등장하는 중절모 사나이와 비슷한 복장을 입기도 했다. 하지만 논리적 설명이 불가능할 때 작품이 제대로 되었다고 생각했고, 상징적인 의미를 찾아냈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분노했던 화가 자신에게는 헛소리로 들릴 것이다. 그래도 마그리트 그림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거창하게도 세계 속 단독자의 절대적인 고독이 보인다. 실존철학에서 말하는 ‘내던져진 존재’로서의 인간존재. 그 존재의 황당함. 우리는 죽음이라는 절멸의 순간에 대한 예감과 더불어 살아간다. 누구나 간직한 이 예감의 능력은 곧 '천형(天刑)'이다. 거부할 수 없는 숙명의 이별이다.  

 

 

 

 

 

 

 

 

 

 

 

 

 

 

 

 

 

산유화

 

                                      김소월

 

 

 산에는 꽃 피네.

꽃이 피네.

갈 봄 여름 없이

꽃이 피네.

 

산에

산에

피는 꽃은

저만치 혼자서 피어 있네.

 

산에서 우는 새요,

꽃이 좋아

산에서

사노라네.

 

산에는 꽃 지네

꽃이 지네.

갈 봄 여름 없이

꽃이 지네.

 

 

 

무상(無常)으로서 곧 영원(永遠)을 구현한다. 그러나 그 끝없는 생성과 소멸의 질서 속에 사는 꽃은 ‘저만치 혼자서’다. 개별자의 삶이다. 그만큼 불만족스럽다. ‘산’의 질서를 수락은 하되 그 삶이 구족(具足)하지만은 않다. 그러나 꽃이 좋아서 산에 사는 새도 있다. 이것이 곧 삶이다. 좋아한다는 것은 만족스럽다는 것이다. 그래서 새는 노래한다. 그러나 그 만족스러움이 영원히 지속될 수는 없다. 꽃은 지고 또 진다. 별리(別離), 또는 영결(永訣)을 피할 수 없다. 산유화는 무상 속에서 영원을 구현하는 산의 질서를 받아들이면서 동시에 유한한 개별자로서의 고독과 사랑과 비애 또한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그 모순을 그대로 드러내고 또 받아들이면서 그 모순의 한가운데 담담히 서 있다.  

 

이 망 위를 부지런히 오가는 동안에는 내던져진 존재로서의 공포와 불안은 유보되거나 경감된다. 그러나 우리의 발은 망 사이의 틈새로 빠지기 일쑤다. 그때 절대 고독과의 대면은 불가피하다. 마그리트의 이 그림이 바로 그 불가피한 대면의 순간을 형상화한 이미지로 다가온다. 중절모를 쓴 사내는 저만치 혼자서 고독의 질서를 받아들인 채 서 있다. 무한한 세계와 유한한 인간의 적나라한 만남. 그런 점에서 본다면 이 그림은 우리 모두의 자화상이기도 하다. 뒷모습이 누구인지 중요하지가 않다. 그는 우리가 부르는 소리를 듣지 않는 척 외면할 뿐이다. 그리고 묵묵히 고독의 길을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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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이 2013-06-04 11: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슬프잖아 ㅠㅜ
 

 

 

 

알브레히트 뒤러  「기도하는 손」

 

 

 

옛날 옛날에 가난한 젊은 화가 두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한 사람은 뒤러였고 또 다른 한 사람은 프란츠 나이스타인이었습니다. 두 화가는 너무 가난해서 생계를 위해 일하면서 틈틈이 그림을 그리면서 궁핍한 삶을 연명하면서 살았어요. 그래서 이 두 사람의 우정은 무척 돈독했습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두 가지 일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형편이 여의치 않아서 한 사람은 그림 그리기를 포기하고 돈을 벌어야 했거든요. 이들은 상의했습니다. 그리고 제비를 뽑아 한 사람이 돈을 벌어서 다른 사람을 돌보아주기로 결정했습니다. 제비를 뽑은 결과 나이스타인이 일하게 되었고 뒤러는 그림을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뒤러는 유명한 화가 밑에서 공부하게 되었고 나이스타인은 친구의 학비를 마련하기 위해서 더욱 열심히 일했습니다.

 

드디어 뒤러는 유명한 화가가 되었고 돈도 많이 벌게 되었습니다. 그 후 뒤러는 친구에게 진 빚을 갚기 위해서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친구를 미술학교에 보내서 그림을 배우게 했습니다. 하지만 그 친구는 오랫동안 육체노동을 했기 때문에 손이 굳어서 그림을 그릴 수 없었습니다. 나인스타인은 화가가 될 수 없었던 것이죠. 친구를 위해서 일하다가 자신의 꿈을 포기해야만 했습니다. 뒤러는 이 사실을 알고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뒤러는 자신의 친구가 두 손을 모아서 기도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기도하는 그의 손은 상처투성이였지만 친구를 위해서 희생한 그 손으로 기도하는 그의 모습은 너무나도 아름다웠습니다. 뒤러는 그 순간을 정성스럽게 스케치를 했습니다. 훗날 ‘기도하는 손’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는 감동적인 그림입니다.

 

자신을 위해 기도하는 친구의 손을 잉크로 그린 이 스케치는 얼굴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손 마디마디마다 절절한 감정이 배어 있습니다. 그리고 감동적인 우정과 신뢰의 이야기가 전설처럼 숨어 있습니다.

 

세상에서 삶이 가장 아름다운 건 이처럼 인간적 유대로 엮여 있을 때입니다. 이러한 삶의 감동을 경험한 사람은, 어떤 경우라도 자신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한 사람을 사랑하는 일도 그것이 진심일 때에만 가치가 있습니다. 진심이 없는 곳에서는 감동의 싹이 자라지 않습니다. 고귀하고 운명적인 사랑은 평탄한 곳에 피어나는 꽃이기보다는 역경의 가시밭길을 넘어선 곳에 선물처럼 주어지는 열매이기 마련입니다. 인간이 가질 수 있는 희생과 감사와 신뢰를 한마디로 축약하면 아마 ‘사랑’일 것입니다. 빅토르 위고는 시 「가을의 나뭇잎」에서 “사랑하는 것은 전부를 믿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감동이 있는 삶은 우리 모두가 꿈꾸어야 할 일생의 경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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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근법의 탄생

 

 

 

 

 

 

 

 

 

 

 

 

 

 

 

 

 

 

 

 

 

 

 

 

 

 

 

 

 

 

 

기원전 2만 년경, 어두컴컴한 동굴에서 탄생한 미술의 최대 꿈은 박진감 넘치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화면에 옮기는 것이었다. 그러나 삼차원의 현실을 이차원의 평면에 그리는 것은 아주 오랜 동안 거의 불가능한 요원한 꿈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르네상스의 화가들은 변화하게 될 것들을 미리 자신 앞으로 끌어당겨서 자기의 작품 속에서 그 역동적 에너지를 원근법으로 표현하려고 했다. 당시 원근법은 단순히 이미지를 구성하는 방식이 아니다.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이 원근법이라는 구성방식을 통해 드러난 것이다.

 

 

 

 

마사초 「삼위일체」  1426년경

 

 

원근법은 사람의 눈에 보이는 3차원 공간의 물체나 공간을 2차원의 평면 위에 거리감과 깊이감을 주어 입체적으로 표현하는 방법이다. 원근법은 주로 풍경화 등 넓은 공간을 표현할 때 사용한다. 1417년 무렵 건축가 브루넬레스키(1377~1446)가 최초의 실험적 시도로써 투시 원근법과 소실점에 대한 과학적 접근을 완성한 이후, 회화에서는 마사초(1401~1428)의 <삼위일체>에서 최초로 실현되었다. 르네상스 미술가들은 광학과 기하학적 지식에 근거한 원근법을 이용하여 미적 아름다움을 추구하기보다 대상의 사실적인 측면을 강조하고자 했다.

 

마사초는 브루넬레스키가 발명한 투시 원근법을 이 작품에 응용하는 창의성을 발휘하게 된다. 그림에서 보는 바와 같이 원근법을 사용해 후면의 벽면과 천장이 깊어 보이는 입체감을 주는 공간구성 방식을 창조해낸 것이다. 그리고 이 좁은 공간에 삼위일체의 형상을 묘사하는 성부를 포함해 6명의 형상을 그려 넣어도, 전혀 좁아 보이지 않게 작품을 구성했다.

 

 

 

 서양의 대표적 원근법, 투시 원근법

 

원근법은 투시 원근법과 대기 원근법으로 나뉘는데, 투시 원근법은 일정한 비율이나 법칙이 없이 단순히 멀리 있는 것을 위에 또는 작게 그리거나 사선을 사용하여 배경을 표현하는 초보적인 원근 표현방식을 탈피하여 기하학적인 기초 위에서 과학적인 방법으로 체계화시킨 일종의 공식이다. 투시 원근법은 삼차원의 대상물들을 입체적으로 표현하고 대상들이 이루는 공간 내에서의 원근을 표현하기 위해 소실점을 도입했다. 소실점의 개수에 따라서 1점 투시, 2점 투시, 3점 투시로 나눌 수 있다.

 

 

 

 

 

마인데르트 호마바  「미들하르니스의 길」 1689년

 

 

1점 투시는 소실점이 한 개다. 물체의 한 면을 정면에서 볼 때 생기는 투시로, ‘평행선 원근법’이라고도 한다. 주로 건축물 실내, 길게 나 있는 길, 가로수, 가로등 등을 표현할 때 주로 사용되고, 소실점이 가운데 집중되어 멀고 깊은 공간감을 느낀다. 2점 투시는 소실점이 2개다. 물체의 한 면 대신 모서리를 중심으로 볼 때 생기는 투시로, ‘사선 원근법’이라고도 한다. 이는 기하학적인 입체가 시선에 빗겨 일정한 각도로 틀어져 있거나, 모서리가 화면 표면에 완전히 돌출된 듯이 보인다. 3점 투시는 소실점이 3개이고, 위에서 내려다 볼 때 생기는 투시로, ‘조감도법’이라고도 한다. 물체를 바로 위에서 바라보면 좌, 우, 위 3개의 소실점이 생긴다.

 

 

 

 

 

 동양의 원근법, 삼원법

 

 

 

 

 

 

 

 

 

 

 

 

 

 

 

 

중국의 북송(北宋) 때의 화가 곽희는 북송 산수화 양식을 완성하여 화면에 포치하기 위한 시점의 다변화를 최초로 시도했다. 이 때부터 우리나라를 비롯해 동양에서는 오래전부터 산수화를 표현할 때 삼원법이라는 원근법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삼원법은 고원법, 평원법, 심원법 3가지가 있다. 독립된 각 시점에 일치한 시점만의 고집에서 이러한 시점을 한 화면에 복합적으로 적용했다는 것에 커다란 의미를 갖는다. 이는 곧 산점투시(散點透視)를 의미한다.

 

 

 

 

 

정선  「청풍계(淸風溪)」 제작연도 미상

 

 

산점 투시는 이동 시점에서 생기는 여러 시점으로 바라본 것을 표현하는 방법으로 고정된 시점에서 대상을 보지 않고, 위치를 여러 번 바꾸어 가면서 대상을 보는 것을 말한다. 이는 미술가가 한 공간 안에, 같은 시간대에 동시에 출현할 수 없지만 서로 연관되어 있는 사물들을 한 화면에 담을 수 있게 함으로써, 작품의 주제를 더 완전하게 표현할 수 있다.

 

산점 투시는 구도의 배치에도 자유롭다. 고정된 소실점에 따라 물체를 바라보는 서양의 투시 원근법과 다르게 산점 투시는 소실점이 다양하며 고정적이지 않다. 그래서 구도의 필요에 따라 좌우와 상하의 거리 조정 등의 표현이 자유로운 편이다. 그래서 화가는 대상을 효과적으로 표현하고 화면의 예술적 효과를 얻어내기 위해, 화가 자신이 가장 절실하다고 느낀 부분을 적절하게 배치하고 중요하지 않은 부분은 과감하게 생략해서 표현한다.

 

 

 

 

정선 「금강전도(金剛全圖)」 1734년 (왼쪽, 고원법)

김홍도 「명경대(明鏡臺)」 제작연도 미상 (가운데, 평원법)

정선 「구룡폭포」 제작연도 미상 (오른쪽, 심원법)

 

 

‘고원법’은 높은 산을 산 아래에서 올려다보는 상태에서 생기는 높이를 표현하는 방법으로, 고원법을 이용한 그림은 자연의 웅대함과 위압감을 느낄 수 있다. '진경산수'를 대표하는 정선의 <금강전도>는 서양의 원근법과는 전혀 다른 다시점의 공간구성법을 통해 금강산의 일만이천 봉을 하나의 화폭에 담고자 한다. 화가는 체험을 바탕으로 하되 풍경에 대한 어떤 이상향적 관념을 품은 채 금강산의 숭고미와 신비감을 극대화하려고 한다.

'평원법’은 산을 정면에서 바라보는 느낌으로 마치 앞산에서 뒷산을 건너다보는 평평한 공간의 넓이를 표현하는 방법으로, 평원법을 이용한 그림은 자연의 광활함이 느껴진다. ‘심원법’은 높은 산의 정상에서 산 아래를 내려다보며 표현하는 방법으로, 심원법을 이용하여 그린 그림은 자연의 깊이감을 느낄 수 있다. 채색을 할 때 고원인 경우에는 청명한 느낌이 나게 하며, 평원은 밝고 어두움이 고루 나타나게 하여 심원은 무겁고 어둡게 표현한다.

 

 

 

 객관적 재현을 강조한 서양, 체험의 공간을 강조한 동양

 

 

 

 

 

 

 

 

 

 

 

 

 

 

 

 

 

르네상스시대 서구 미술을 지배해 오며, 환영적 사실주의를 꾀했던 전통적 방법은 1점 투시에 의한 원근법이었다. 이는 화면에서 시점의 통일성을 요구하게 되어 관찰자로 하여금 형태의 사실적 화면을 느끼게 하는 방법이다. 하지만 이러한 방법을 뛰어넘어 동양에서는 다시점(多視點)을 통한 화면전개 방식을 구사했다. 한 화면 속에 고원, 심원, 평원 등의 적용은 흩어진 시점 즉 복수시점을 말한다.

 

 

 

 

파블로 피카소  「다니엘 헨리 칸바일러의 초상」 1912년

 

 

바로 상반된 논리를 동시다발적 표현으로 결합시키는 것이 큐비즘(cubism)의 혁명이라 할 수 있는데, 큐비즘은 대상을 해체하고, 시점을 이동하여 다양한 각도에서 본 대상을 자유롭게 해체하고 재구성한다. 눈에 보이는 대상을 보이는 그대로가 아닌, 인지하는 것으로 그리고자 한 것이다. 이렇게 그림은 3차원의 모방을 넘어서 시간을 담은 4차원으로 이동하였다. 현대미술의 시작을 알리는 큐비즘의 다시점 방식은 이미 오래전에 동양의 화가들에 의해서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근대 서양회화의 가장 핵심적인 기법은 원근법인데, 전근대 동양의 그림에서는 이 원근법을 찾아볼 수 없다. 왜 그런 것일까?  그렇다고 원근법이 없는 동양화의 미적 가치를  서양화와 비교하면서 낮출 필요는 없다. 이것은 인식의 우열의 문제가 아니라 세계관의 문제다. 원근법은 과학의 대두와 개인의 등장이라는 르네상스시대의 사건과 깊은 관련이 있다. 개별적·독자적 주체인 화가의 시선으로 대상을 보고 그것을 화폭에 옮길 때 원근법이 출현한 것이다. 동시에 원근법은 수학적 질서다. 공간은 시점의 각도에 의거해 기하학적 질서로 인식된다. 근대 서양회화의 그림은 이 기하학적 공간에 사물을 배치하는 방식을 따른다. 그러니까 기하학적 공간을 회화의 공간을 만드는 보이지 않는 선험적 공간인 셈이다.

반면에 동양의 그림에는 이런 기하학적 공간이 존재하지 않는다. 바꿔 말하면 원근법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림을 그리는 화가, 곧 주체는 그림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림 속 풍경의 일부이다. 그 풍경 안에서 산수의 신비감과 숭고미를 체험하는 것이다. 정선의 <금강전도>는 ‘진경산수’라고 하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진경은 아니다. 그것은 여러 시점에서 관찰한 금강산을 마음에 품은 채로 그 산의 숭고미와 신비감을 극단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림을 그렇게 그린 이유를 김우창 교수는 회화의 기법을 근본적으로 규정한 세계관에서 찾는다. 풍수사상이 보여주는 대로 땅은 사람이 깃들어 사는 곳이자 무한을 향해 초월하려는 인간의 의지를 표상한다. 그 땅의 세계와의 일체감이 중요했기 때문에, 동양의 산수화는 풍경을 대상화하기보다는 그 안에 들어가 체험하는 공간으로 인식했던 것이다. 반면에, 서양은 사물을 객관적으로 재현하는 것에서 쾌감을 느꼈다.

 

대상을 그린다는 것은 우리의 눈을 통한 관찰이 우선되는 경우가 많다. 물론 관념적으로 직접 보지 않고 그리는 예도 있지만 시각적 언어인 그림은 어떠한 대상을 관찰하는 것부터 출발한다. 그림을 그릴 때 우리의 눈앞에 놓여 있는 대상물을 어떠한 방식으로 보는가에 따라 실제적 결과물은 천차만별이다. 대상물을 어떻게 그려야 하는가에 앞서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 것이 그리는 화가의 자세다. 그리고 동양의 삼원법을 통해서 서양의 원근법처럼 그림을 그릴 때 언제나 정확한 형태와 배치를 요구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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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철나무꾼 2013-05-01 17: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최북을 주인공으로 하는 소설을 읽다보면 말이죠,
가본 것만으로도 축복이고 은총으로 생각하는 부분이 나와요.
그렇다면 보고 경험하고 할 수 있는...
현대를 살아서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고 누릴 수 우리들은 행복한가 하고 생각해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이 상대적이라는 생각이 들지요.
그림을 그리는 사람의 자세와 더불어,
그림을 감상하는 사람의 자세까지 얘기하자면 오지랖이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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