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단의 땅, 죽음의 땅, 유령마을. 어느덧 3년째가 된 일본 원전 사고 지역을 표현한 말이다. 도저히 불과 얼마 전까지 사람이 살았던 곳이라고 상상조차 할 수 없어져 버린 곳, 2011년 3월 11일 일본 동부에서 일어난 지진은 예상치 못한 비극을 불러왔다. 지진에 이은 쓰나미,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 사고로 방사능이 대량 유출된 것이다.

 

아비규환이던 당시에 대한 기억도 어느새 제3자들은 잊어가고 있다. 인간이 '망각의 동물'임을 증명이라도 하듯 잊혀져가는 기억 속에서 3자인 우리는 스스로를 자위한다. '자연이 입힌 상처는 치유되기 마련이다'라면서.

 

하지만 잊을 수 없는 기억과 상처도 있다. 바로 인간의 오만이 남긴 상처다. 후쿠시마 원전 폭발은 세계 최고 수준의 안전함을 자랑하던 일본 원자력 발전의 몰락과 함께 이 지역을 사람이 살 수 없는 지역으로 만들었다. 앞으로 몇십 년이 걸릴 지 모르는 자연의 재생을 그저 바라만 보게 만들었다. 이미 후쿠시마 원전 반경 20㎞는 인간이 정한 '죽음의 땅'이 돼 사람들의 뇌리 속에서 점차 흐릿해져 가고 있다.

 

바쁜 일상 속에서 남의 나라 일, 남의 지역 일이라며 우리들 대부분은 스스로를 달랜다. 아프지 않게 달랠 수 있는 이유는 인간의 '죽음'이 속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2년이란 시간 동안 간간이 들려 온 백혈병 환자 발생 소식도 더 이상 충격적이지는 않다. 인간이 살아 있음에 우리는 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망각의 귀퉁이에 버려진 동물들에게 현세의 지옥과도 같은 그 곳은 현재진행형이다. 얼마 있으면 풀리겠지 싶던 긴급 대피령에 남겨 두고 온 반려동물과 가축들은 하릴없이 주인을 기다리며 죽음과 대면해 왔다. 그들의 소외, 굶주림은 오만한 인간이 만든 자화상이다.

 

쓰나미가 뭔지, 방사능 수치가 뭔지도 모르는 동물들은 자신들이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도 모른 채 죽어가야 했다. 일본 정부가 후쿠시마 원전 20km 내에 거주하는 시민들에게 대피령을 내려 사람들은 마을을 모두 떠났다. 동물을 돌볼 이가 없다는 의미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대지진과 쓰나미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은 동물들이 굶어죽거나 먹이를 찾아 떠돌며 야생화되었다. 각자의 사연을 가지고 죽거나 떠도는 동물들. 죄 없는 생명들의 이 비참함을 누가 책임질 것인가? 벌써 3년이라는 시간이 지난 지금, 떠도는 동물 중에 살아남은 수가 몇이나 될까? 아마도 죽음의 땅에서 오지도 않는 가족을 기다리다가 굶어 죽었을 것이다.

 

 

 

 

 

쓰나미에 온 가족이 쓸려나간 가운데 개 한마리가 살아남았다.

카메라에 잡혔다.

조용한 바다를 배경으로,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고였다.

무엇인가 말하고 싶다고, 그 눈은 말한다.

답답하다는 듯, 고개를 좌로 다시 우로 돌린다.

 

누구일까, 개로 하여금 하고 싶은 말을 못하게 하는 그는.

또 사람한테 개의 말을 들을 능력을 갖지 못하게 한 그는.

 

- 신경림 「누구일까」-

 

 

죽음의 땅을 목격한 시인은 말한다. 이런 끔찍한 지옥을 만들어낸 그들은 누구일까. 시인의 질문 속에는 참혹하게 죽어가는 작은 생명에게 아무런 도움을 줄 수 없다는 무력감이 배어 있다. 눈에 눈물이 고인 채 고개를 돌리기만 하는 개의 모습은 스페인 화가 고야의 그림을 떠올리게 한다.

 

 

 

 

프란시스코 고야 「개」 1820~1823년 

 

고야가 그린 ‘검은 그림’ 연작의 한 작품인 「개」는 천진한 무방비함의 초상이다. 화가는 광대한 배경에 몹시 조그만 개 한 마리를 떨어뜨려놓았다. 창백한 황색 허공과 암갈색 바닥은, 형체와 스케일을 헤아릴 수 없어 더욱 위압적이다. 개의 네 다리를 집어삼킨 어둠은 쓰나미에 불어난 진흙 같기도 하다. 사방을 둘러봐도 개를 구해줄 지푸라기 하나 없다. 순종의 표시로 귀를 뒤로 젖힌 개가 주시하는 오른쪽 허공에는 어렴풋한 음영이 보인다. 개가 그토록 기다리던 주인일까. 아니면 가엾은 생명에 차가운 손길을 내밀려는 죽음의 신일까. 희미한 음영의 정체가 누구인지 중요하지 않다. 개의 눈빛을 보라. 원망도 호소도 없다. 그저 영문을 모른 채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고인 채 고개를 좌우로 돌리면서 주변을 둘러보면서.

 

죽을 때까지 죽음을 들여다보며 붓질했던 고야는 쓰나미처럼 덮쳐오는 거대한 멸망의 공포 앞에서 텅 빈 눈동자를 힐끔거리는 개의 대가리를 그렸다. 200여 년 전 그린 그 개의 모습은 인간이 만든 재앙이 덮친 후쿠시마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다. 고야는 개의 가엾은 눈망울을 그린 것이 아니다. 죽음의 땅을 만들게 한 장본인, 바로 오만한 인류의 모습을 보고 있는 개의 눈망울을 그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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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르 브뤼헐 「추락하는 이카루스가 있는 풍경」 1558년경

 

 

 

그는 하늘을 나는 마법에 도취돼 더 높이 올라갔다. 새의 깃털과 밀랍으로 만든 날개를 달고 태양에 가까이 가는 바람에 날개가 녹아 바다에 빠져 죽었다.

 

검푸른 물빛이 내게로 달려들었다. 순간 깊이를 알 수 없는 바다에 빠져 발버둥치는 이카루스를 보았다. 나, 아니 세상사람 모두가 광활한 삶의 바다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또 하나의 이카루스였다.

 

 

피터르 브뤼헐의 「추락하는 이카루스가 있는 풍경」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펼쳐졌다. 푸른 바다엔 배도 떠있고 섬도 있다. 언덕에선 목동이 양을 치고, 비탈 밭에선 농부와 소가 밭을 갈고, 또 한사람은 바다에 낚시를 드리우고 있다. 전경은 너무나 평화스럽다. 화폭 사분의 일이 하늘이고 나머지가 바다다. 목가적인 전원 풍경이 너무나 아름답다.

 

그러나 한 생명이 광활한 바다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는데 잘 보이지 않는다. 다만, 갈색의 막대기처럼 보이는 두 다리만 보일 뿐이다. 한 인간의 예기치 못했던 재난 앞에서 세상은 꿈쩍도 않는다. 그림에는 어부, 농부, 양치기 세 사람이 등장한다. 그도 아니면 물에 '풍덩' 하고 빠지는 소리를 그들 중 하나는 분명 들었을지 모른다. 물에 빠져 살려 달라는 이카루스의 절규를. 그러나 모두들 자기들 일에만 몰두 하고 있다.

 

 

 

 

 

 

 

 

 

 

 

 

 

우리가 흔히 아는 이카루스의 이야기는 이렇게 끝이 나고 자신의 능력을 과대평가했다는 교훈을 남겼다. 그러나 세계적인 경영 구루 세스 고딘은 이카루스 신화의 교훈을 반박한다. 날개를 만든 발명가이자 이카루스의 아버지인 다이달로스는 아들에게 너무 높게 날지 말라는 말만 한 것이 아니었다. 너무 수면 가까이 날아 날개가 물에 젖지 않도록 주의를 줬다.

 

이 이야기를 교훈 삼아 적은 것에 만족하고 겸손한 태도로 사는 사람이 '안전하다'라는 착각에 빠져 현실에 안주하는 것에 대한 경종을 울린다. 그는 새로운 틀을 구축하고 정해진 규칙 없이 시도하는 것을 '아트'(Art)라 말한다. 기존 질서에 도전하는 용기와 통찰력, 결단력을 갖춘 사람을 ‘아티스트’라 일컫는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날 때부터 아티스트의 자질을 갖추고 있다고 주장한다.

 

세상은 위험한 곳이라는 과장된 정보와 줄밖으로 벗어나면 먹고살기 힘들어질 것이라는 일상적인 불안을 안고 산다. 이 같은 채찍과 더불어 보상이라는 당근을 사용하는 산업사회 시스템에 완전히 길들여지고 말았다. 이런 상황에서 자존감 따위는 생각지도 말아야 한다. 꿈이라는 단어는 머릿속에 둬선 안 된다. 줄을 맞춰 지시대로 움직여야 한다.

 

자유란 자신이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또한 자신이 원하는 모든 것을 이루려는 의지를 말한다. (36쪽)

 

이제 세상의 시선에 눈치 보지 않으면서 자신의 길을 가는 아티스트의 시대가 시작했다. 아티스트는 어떤 선입견 없이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남을 따라하지 않는다. 백지상태에서 최초로 시도하려는 자유의지가 강하다.

 

지도 없이 새로운 길을 걷는다는 것은 무모하고 두려운 일이다. 세상은 개인의 도전과 실패, 그리고 그 고통과 아픔에 귀기울여주지 않는다. 하지만 그 위험이야말로 진짜 아티스트가 되기 위해 거쳐야 할 관문이다.

 

물에 빠져 허우적대는 이카루스는 어리석지 않다. 태양에 가까이 가고 싶은 욕망! 이카루스의 도전은 아티스트 본연의 모습이다. 정해진 일만 하면서 안락한 생활을 추구하는 낚시꾼, 농부, 양치기는 아티스트가 될 수 없다.

 

태양을 향한 이카루스의 날개는 아름다웠다. 도전과 추락은 전보다 더 높이 더 멀리 날아 갈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그림 왼쪽 덤불에 있는 시체는 ‘사람이 죽어도 경작은 계속된다’라는 플랑드르의 옛 속담을 상징한다. 죽을 때까지 현실에 안주하면서 삶의 경작을 계속할 것인가 아니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하늘을 나는 이카루스가 될 것인가.

 

 

 

 

※ 책에 관한 쓴소리 : 감정노동이 아트를 위한 최선의 능력이 될 수 있을까?

 

최근 페이스북에서 이 책에 대한 간략한 평을 본 적이 있다. 자신의 주장을 계속 반복하고 사례만 열거하는 세스 고딘의 글쓰기 때문에 책을 구입한 돈이 아깝다는 혹평도 있었고, 번역의 문제를 제기한 내용이 있었다. 인용된 문제의 문장은 다음과 같다.

 

그 자신이 하나의 신화적 존재인 조지프 캠벨은 이렇게 못을 박았다. (중략) 신화는 우리 인간이 신 또는 전설적인 존재의 옷을 걸치고 인간적인 행동을 하는 이야기다... 우리가 좋아하는 인물 또는 우리가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자아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기 때문이다. (104~105쪽)

 

처음에 읽었을 때 별다른 느낌은 없었는데 인용된 문장만 봐도 잘못된 문장인지 판단하기 어렵다. 어법이 잘못되었다기보다는 한 번에 읽고, 의미를 이해하기 어려운 문장인 것 같다.

 

그래서 내가 문제 제기하고 싶은 번역의 수준이 아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저자답지 않은 억지스러운 내용의 글은 실망스럽기만 하다. 내가 인용한 문장을 읽어보라.

 

 

다른 사람들에게 관심과 감사하는 마음을 얻고, 그들의 영혼 깊숙이 파고들려면 감정노동을 통해 다가서야 한다. 기존의 경제는 확장 불가능한 육체노동의 성실함을 기반으로 성장했다. 여기서 ‘육체노동’이라는 말은 인간의 근육이나 두뇌를 써서 하는 반복적인 작업을 가리킨다. (중략) 아트는 감정노동을 통해, 즉 위험과 기쁨, 두려움, 사랑을 통해 이룰 수 있다. 감정노동은 ‘좀 더 많은 노력으로 때로는 엄청난 가치를 창출할 수 있다는 점’에서 확장 가능하다. 사람들 사이의 관계에는 육체노동이 아니라 감정노동으로 형성된다. (75쪽)

 

 

‘감정노동(Emotion work , Emotional labor)’. 책의 원문을 이 ‘감정노동’을 어떻게 표현했는지 궁금하다. 세스 고딘은 ‘감정노동’을 아트를 위한 가치를 높일 수 있는 새롭고도 긍정적인 노동의 한 형태로 봤다. 미국에서는 감정노동자에 대한 처우가 잘 되어 있을지 몰라도, 우리나라는 의미뿐만 아니라 상황도 전혀 다르다.

 

 

 

 

 

 

 

 

 

 

 

 

 

 

 

 

우리나라의 감정노동은 실제 자신의 감정을 숨기면서 직무를 수행하는 것을 뜻한다. 감정노동으로 생긴 감정적 부조화는 감정노동을 행하는 조직 구성원을 힘들게 만든다. 감정노동으로 생긴 문제가 적절하게 다루어지지 않는 경우엔 심한 스트레스(좌절이나 분노, 적대감)가 나타난다. 육체노동을 하면 할수록 건강에 좋지 않다. 감정노동 또한 거의 육체노동과 마찬가지로 노동자의 정신적 상태에 악영향을 주는 문제점이 부각되고 있다. 과연 ‘감정노동’이 신뢰와 사랑을 형성할 수 있는 잠재적인 가치의 능력으로 볼 수 있을까?

 

‘감정노동’이라는 용어는 최근에 등장한 것이 아니다. 세상에 나온지 지금으로부터 무려 21년이나 되었다. 미국 출신의 사회학자 앨레 러셀 혹실드가 1983년에 처음으로 『managed heart: commercialization of human feeling』이라는 책에서 사용했다. 우리나라에서는 ‘감정노동’으로 번역됐다.

 

사실 세스 고딘이 말하는 ‘감정노동’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다. 이에 대한 부연 설명할 수 있는 간단한 사례 또한 언급되지 않았다. 세스 고딘은 ‘감정노동’의 원래 의미를 잘 이해하지 못했던 걸까? 이렇듯, 아무리 영향력 있는 저자라고 해서 그의 주장에 무조건 동의할 수 없는, 의문이 들 때가 간혹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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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젠 들라크루아 「단테의 배」 1822년

 

 

 

 

 

현실이 어렵고 세계가 불투명하게 보일 때, 마음이 어둡고 패잔감이 쌓여갈 때 떠올리는 그림이 하나 있다. 외젠 들라크루아가 그린 「단테의 배」다. 그림을 보면 중앙에는 두 인물이 서 있다. 왼쪽은 르네상스 이탈리아 시인인 단테이고, 오른쪽은 고대 로마의 시인 베르길리우스이다. 등을 보이며 노 젓는 이는 지옥의 뱃사공 카론이다. 이들 주위로 지옥의 저주받은 자들이 물속에서 허우적거리며 몰려들고 있다. 폭풍우가 몰아치듯 하늘은 어둡고 물결은 출렁이며 저 멀리 성벽이 검은 연기 속에 불타고 있다. 단테는 스승 베르길리우스의 안내로 지옥을 돌아다닌다. 이 대목은 지옥문을 지나 ‘디스’라는 도시로 들어가는 순간이다.

 

 

 

단테는 흰 옷에 수도사의 붉은 두건을 쓰고 있다. 왼팔은 스승에 기댄 채 오른쪽을 보며 구명을 청하듯 손을 흔들고 있다. 버질은 그 옆에서 갈색 망토를 두르고 월계관을 쓴 채 믿기 어려울 정도의 평정을 유지하는 듯하다. 단테를 다독이듯 그는 그 왼손을 잡고 있다. 요동치는 물결에 배는 금세라도 뒤집힐 듯하다. 지옥의 무리들은 뱃전을 잡거나 사람을 밀치거나 서로 싸우고 있다. 배를 드러낸 채 탈진해 있는가 하면, 배 뒷전을 물어뜯는 이도 있다. 단 한 사람, 노를 젓는 카론이 위치한 건너편에서 오른팔을 배에 걸친 사람만이 화면을 똑바로 노려보고 있다. 이 그림을 보는 당신네는 누구인가라는 듯.

 

지옥의 사람들이 배 주위를 에워싼 채 불안과 분노로 흔들리고 있다면, 배 안의 두 사람 단테와 베르길리우스는 상대적으로 침착함을 유지하고 있다. 이것은 내게 현실에 대면하는 어떤 자세로 보인다. 거대한 현실의 격랑 한가운데에 휘말려 사투를 벌이는 우리네 인생을 보는 거 같다. 밀려오는 현실의 파도 앞에서 성난 얼굴로 밀치고 찢고 뜯고 때리는 사람들의 싸움. 분노를 이기지 못하면 늘 불안하다. 이들의 광분과 두 시인 사이의 대조. 어둠과 빛, 광기와 정적, 삶과 죽음의 드라마. 이 모든 것은 선명한 색채 안에 녹아있다. 단테가 『신곡』에서 묘사한 장면보다 한층 더 입체적이다. 들라크루아가 묘사한 지옥은 파괴와 살육, 그리고 화재로 가득 차 있다. 그것은 “인간의 영원한, 나아질 수 없는 야만을 증거”한다. 관객의 시선은 저주받은 자들에게서 항해하는 자, 노 젓는 자에게서 손짓하는 자로 나아가고, 명상하는 자로부터 허우적거리는 자로 다시 돌아온다.

 

오늘의 우리는 단테처럼, 또 단테를 그린 들라크루아처럼 지옥의 강을 따로 떠올릴 필요가 없다. 지금의 현실이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영혼도 육체도 고통의 기억 없이, 추방의 경험 없이 살 수는 없을까? 스스로 인간성을 증명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수치에 불과하다. 살아 있을 때 선하지 않으면 진흙 속 돼지와 다를 바 없다. 예술의 보편성은 바로 이 점, 당파나 관점을 벗어나 오늘의 지옥을 반성하는 데 있다. 그래서 죽은 자의 영혼 이야기는 산 자의 행동에 대한 얘기가 된다. 어떻게 살 것인가 묻지 않는다면, 우리는 들라크루아의 그림도, 단테의 시도 그르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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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앙소르의 이상한 가면들

 

 

 

 

 

 

 

 

 

 

 

 

 

 

 

 

 

 

에드거 앨런 포의 단편소설 『붉은 죽음의 가면』은 왕이 개최한 호화로운 가장무도회에 백성들 사이에 창궐하는 적사병(赤死病) 환자로 분장한 인물이 등장하는 이야기다. 무언의 도발에 분노한 왕은 돌아선 그의 얼굴을 직면하는 순간 즉사한다. 역병으로 죽은 시체를 모방한 줄 알았던 가면은 가면이 아니었다. 불청객은 다름 아닌 적사병 그 자체였다. 벨기에 화가 제임스 앙소르(1860~1949)가 즐겨 그린 가면 쓴 인물들의 초상화가 오싹한 까닭도 그들이 가면을 쓴 인간인지, 가면처럼 변해버린 얼굴을 가진 인간인지 불분명해 보이기 때문이다. 앙소르의 그림 속에서는 가면과 얼굴의 구분과 더불어 현실과 환영의 경계도 희미하다.

 

 

 

 

 

 

 

 

 

 

 

 

 

 

 

앙소르는 어두운 도상과 가면 쓴 사람들을 통해 타락한 인간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표현했던 화가였다. 가면은 그의 작품에 중요한 주제로, 자신을 비롯한 사람의 본성을 표현하는 매개체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앙소르에게 유희의 광기에 달뜬 이방인들의 군상을 표현하는 데에 가면보다 자연스런 오브제는 없다.

 

 

 

 

 

제임스 앙소르  「이상한 가면들」 1892년

 

 

「이상한 가면들」에 도열한 가면들은 축제의 열기에 휩싸여 우연히 노출된 사람들의 진짜 표정처럼 보인다. 안면근육과 주름살, 뺨에 떠오른 홍조는 가면이라기엔 지나치게 복잡 미묘한 표정을 짓고 있다. 기념사진이라도 찍듯 부자연스럽게 정면을 향한 가면들의 포즈는 초현실적이다.

 

 

 

 

제임스 앙소르  「음모」 1890년

 

 

가면이 등장하는 또 다른 그림인 「음모」는 앙소르 자신과 주변의 인물들이 가면 속에 가려진 실체의 모습들을 드러내지 않고 위선 속에서 살아가는 모습을 풍자하듯 묘사해내고 있다. 그들 마음속에는 자신의 이익을 우선적으로 생각하고 서로의 관계를 멀어지게 하려는 음모가 숨겨져 있으며, 이러한 모습들은 자기 주변뿐만 아니라 현대를 살아가는 일반인들 모두에게서 느껴지는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다. 기괴하고 해학적인 모습으로 그려진 가면 모습은 또 다른 자신들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제임스 앙소르  「가면에 둘러싸인 자화상」 1899년

페터 파울 루벤스 「인동덩굴 그늘에서 이사벨라 브란트와 함께 있는 화가의 자화상」 1609년

 

 

 

 

 

 

 

 

 

 

 

 

 

 

 

 

 

「가면에 둘러싸인 자화상」이라는 작품을 보면 중앙에 있는 단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두 가면을 쓰고 있다. 바로 이 그림을 그린 화가 앙소르 자신이다. 그로테스크한 가면들 사이에 커다란 깃털이 달린 바로크식 빨간 모자를 쓴 사람이 화가다. 그러나 그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유명한 화가의 얼굴과 상당히 비슷하다. 바로 루벤스다. 사실 앙소르는 이 그림에서 루벤스의 가면을 쓰고 있었던 것이다. 생전에 대중들은 물론 비평가들에게조차 철저하게 외면 받았던 앙소르는 같은 출신의 위대한 화가인 루벤스처럼 자신의 예술이 널리 인정받기를 바랐던 걸까, 아니면 자신의 암울한 예술가로서의 삶을 루벤스의 가면으로 변장하여 자기위안을 하고 싶었던 걸까.

 

 

 

 

 

 

 ♣ 우리가 만드는 가면

 

오스카 와일드가 말하였듯, 가면이 실제 얼굴보다 더 진실한 모습일 수도 있다. 가면은 인간의 내면 깊숙이 감추어진 본성을 밖으로 드러내주기 때문이다. 비굴한 얼굴, 짜증내는 얼굴, 남을 탓하는 얼굴. 앙소르가 그린 자화상은 비단 중앙에 있는 사람만이 아니다. 자신은 맨얼굴이고 다른 사람들만 가면을 쓴 것이 아니라, 그를 둘러싼 가면의 얼굴들 모두가 바로 화가의 마음속 얼굴들일 수도 있다.

 

집에서 입는 옷과 거리로 나설 때 입는 옷이 다르듯 우리는 군중의 일원이 될 때 가면을 쓴다. 그러나 가면을 쓴 개인은 자기 모습을 보지 못하고 타인들의 가면만 본다. 도어즈는 노래했다. “당신이 이방인일 때 사람들은 이상하게 굴고, 당신이 외로울 때 타인의 얼굴은 흉해 보인다.”  어느 날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이 가면처럼 경직돼 있음을 발견하는 일이고 자신도 그렇게나 혐오했던 군중의 일부임을 깨닫는 일이기도 하다.

 

현대인의 고립은 집단의 존재 목적이나 이상에 종속되는 과정에서 자기 소외에 빠지며 정체성의 상실이 일어난다. 경직되고 냉소적인 군중의 가면은 자기실현에 빠져 정체성의 혼란을 겪고 있는 현대인의 무의식을 보여주는 ‘페르소나’(persona)라 할 수 있다.

 

 

앤디 워홀은 자신에 대해 알고 싶으면 미디어에 비친 자신의 이미지를 보라고 했다. 그것이 자신의 전부라는 것이다. 가령 마릴린 먼로의 실명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본래 그녀의 인격이 어땠는지 아는 사람은 더 적을 것이다. 하지만 그 따위가 뭐가 중요한가? 우리가 아는 마릴린 먼로는 어차피 미디어가 만들어낸 페르소나가 아닌가. 다시 말해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지하철 통풍구 위에서 치마를 내리고, 케네디의 생일날 피아노 위에 걸터앉아 생일축하 노래를 부르는 백치 미녀이지, ‘노마 진 모르텐슨 베이커’라는 긴 이름을 가진 여인이 아니다. 미디어가 실재를 사라지게 했다는 보드리야르의 명제를 페러프레이즈하면, 미디어를 통해 가면(persona) 자체가 곧 인격(person)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 하지만 이미지만큼 허망한 것이 어디에 있을까? (진중권 『미학 에세이』27~28쪽)

 

 

오늘날에는 누구나 이미지로 자신의 가면을 만드는 시대가 되었다. 트위터, 페이스북 등 온갖 SNS는 각기 다른 가면들의 군상을 볼 수 있는 공간이다. 그렇게 덧칠된 이미지 속에서 연기를 하며 살다가 하루아침에 이미지가 몰락해 버린다면, 어떻게 될까. 그때도 연기를 계속할 수 있을까. 진중권은 “미디어가 깔아놓은 무대 위에서 세계는 다시 한번 거대한 연극”이라고 지적했다. 문제는 실재와 미디어 사이의 간극이다. “가면 자체가 곧 인격”이 되어버린 시대 속에서 언제까지 허망한 가면을 쓴 채 현실의 삶을 영위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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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en 2013-10-22 23: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cyrus님의 글을 읽으니 '무대 위와 무대 아래'가 너무 다른 수많은 광대들을 떠올리게 만드는군요. '자기 집 문턱만 넘어서면 옷과 더불어 역할도 벗어놓는다'는 식으로(몽테뉴) '자기 집안에서는 엉망진창'인 인물들이 얼마나 많을지가 마침 어제 저녁 식탁 위에 올라운 '두드러진 화제' 가운데 하나였는데 말이지요...

* * *

저마다 광대놀이에 참가하여, 무대 위에서는 점잖은 인물을 연기할 수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모든 일이 허용되고 모든 것을 감추어 두고 있는 가슴속, 마음속에 질서를 세워 보는 일이다. 그 다음 단계는 아무에게도 보고할 필요가 없고, 연구도 기교도 없이 살아가는 자기 집에서 평소의 행동에 질서를 세우는 일이다. 그 때문에 비아스는 가정 생활에서의 훌륭한 태도를 묘사하며 이렇게 말했다. "한 가정의 주인은, 그가 밖에서 나라의 법과 사람들의 평판이 두려워서 처신하는 식으로 집안에서도 그대로 행해야 한다."

아게실라오스가 여행할 때에 항상 그의 숙소를 사원 안에 정하며, 사람들이나 신들이 모두 그의 개인적인 행동까지 볼 수 있도록 한 것은 칭송할 만한 일로 주목된다. 자기 아내와 하인이 보아도 별로 눈에 띌 일이 없게 살아간 자는 세상에서도 놀라운 인물이다. 집안 사람들에게 숭배받았던 인물은 거의 없었다.

사람들은 공적 행동으로는 황공해서 저자를 그의 집 문 앞까지 바래다 준다. 그 자는 그의 옷과 더불어 역할도 벗어 놓는다. 그는 높게 올라갔던 정도로 낮게 내려온다. 그는 자기 집안에서는 모든 일이 엉망진창이다. 질서가 서 있다고 해도 이런 변변찮은 행동 속에 그것을 알아보려면 예민하게 식별하는 판단력이 필요하다. 그뿐더러 질서는 침침하고 희미한 덕성이다.

성벽을 무찌른다, 외국으로 사절단을 데려 간다, 한 국민을 다스린다 하는 것은 혁혁한 행동들이다. 자기 집 사람들이나 자기 자신과 부드럽고 올바르게 꾸지람하고 웃으며, 팔고 사며, 사랑하고 미워하고, 교섭하고 되는 대로 일하지 않고, 자기 말을 어기지 않는 것 등은 눈에는 드러나지 않지만 더 드물고 어려운 일이다.


cyrus 2013-10-23 18:41   좋아요 0 | URL
oren님이 인용해서 소개한 몽테뉴의 글을 읽으면서 저 또한 사람들 앞에서 가면을 쓰고 있지 않았나 생각해봅니다. 이런 방식의 삶을 살아가는데 무척 피곤한 일인데 참고 지낸다는 게 아이러니합니다. 오늘 김주하 앵커 이혼사유가 남편의 폭력 때문이었다고 하더군요. 방송에서는 남편이 가정적이었다고 하던데.. 그렇다고 오랫동안 얼굴에 씌여있는 가면을 한번에 완전히 벗는 것도 쉽지 않고요.
 

 

 

 

 

 

 

 

 

 

 

 

 

 

 

 

 

 

 

 

경제가 어려운데 소비라도 줄여야지, 하지만 턱없는 소리다. 우리는 살아가기 위해서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폴란드의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의 말처럼 문화는 이미 소비시장의 지배를 받고 있으며, 유행에 종속된 현대인들이 소비하는 사회에 살아가고 있으니까.

 

"오늘날 문화는 무엇보다도 이제 소비자로 전환된 사람들이 경험하는 거대한 백화점으로 변해버린 이 세상의 여러 매장 중 하나로 자신을 바라본다. 이 거대한 상점의 다른 매점들과 마찬가지로 선반은 매일 바뀌는 매력적인 상품으로 넘쳐나며, 계산대는 그들이 광고하는 한물간 참신한 제품들처럼 곧 쓸모없어질 최신 홍보물로 장식되어 있다. 계산대의 광고와 선반에 진열된 상품들은 선천적으로 억누를 수 없는 순간적인 충동을 불러일으키도록 계산되어 있다." (지그문트 바우만 『유행의 시대』중에서)

 

현대인은 소비를 통해 세상과 소통하고 소비를 통해 나를 발견한다. 현대인이 선택하는 건 상품이 아닌 이미지다. 현대인은 이미지에 열광한 나머지 이미지를 따라하고 이미지를 먹고 이미지를 차지하려고 서로 싸운다. 누가 이미지를 지배하는가를 놓고 벌이는 경쟁에 뛰어들지 않고서는 살아남을 수 없다. 이미지를 새롭게 해석하고 이미지를 통해 메시지를 전달하고 이미지를 통해 상품에 가치를 부여하기 위한 경쟁이 한창이다. 그렇다면 이미지란 무엇이고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 걸까.

 

 

 

 

 

 

 

 

 

 

 

다다이스트 마르셸 뒤샹이 소변기에 ‘R Mutt’라고 사인한 뒤 그걸 독립예술가협회전에 ‘샘’이라는 이름으로 ‘작품’으로 출품했다. 불경스럽고 비도덕적이고 표절이고 어떤 미적 대상도 될 수 없는, 현대미술에 대한 모욕이라는 이유로 출품되자마자 작가의 사전 동의 없이 작품은 사라졌다. 그러나 1964년에 다시 만들어진 복제본을 보고 그 누구도 “불경하다” “비도덕적이다” “표절이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또한 뒤샹이 직접 소변기를 만들었는지 아닌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그가 그걸 선택했다는 사실이다. 지저분한 소변기에 새로운 이름과 새로운 관점을 부여해 전혀 새로운 가치를 만들고, 사람들의 머릿속에 새로운 시각과 생각을 심어주었다. 발상의 전환이었다. 똑같은 이미지인데 사람들은 이제 그 앞에서 기념촬영하기 바쁘고, 콧대 높았던 미술관들은 전시를 하고 싶어 안달이다.

 

이미지는 사전적 의미로는 어떤 대상을 바라보는 관점이고 태도다. 그리고 이미지를 지배하기 위해서는 대상을 새롭게 해석하는 힘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소비자의 취향은 나날이 변한다. 싼 것을 찾다가도 기능과 디자인을 보고 또 친환경 제품인지를 따진다. 요즘 같은 불경기에는 에너지 효율이 어떤지 살핀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어떤 이미지를 보여주는가에 소비자들은 동전을 던진다. 이렇듯 소비는 수많은 이미지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는 특별한 행위다. 어떤 옷을 입고, 어떤 책을 읽으며, 어떤 음식을 먹고, 어떤 음악을 듣고, 무엇을 하며 여가를 보내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자신을 발견한다. 이는 소비대중문화 속에서 자신만의 정체성을 만들어내는 소비자의 특권이다. 이런 특권은 단순히 물건을 사고 점심을 사 먹는 일차원적인 소비를 넘어 특정 생각을 지지하고 특정 문화를 후원하는 소비에 이르러야 비로소 누릴 수 있는 즐거움이다.

 

 

 

 

 

 

인간은 생각하는 동물이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다 보니 무엇을 소비할까 고민하는 동물이 되었다. 더 노골적으로 표현하면 쇼핑을 즐기는 유일한 동물이 바로 인간이다. 바바라 크루거의 작품 「나는 쇼핑한다, 고로 존재한다」(I shop therefore I am)는 이러한 인간의 모습을 풍자한다. 흑백 사진의 오른손이 마치 신분증이라도 제시하듯 ‘I shop therefore I am’이라는 하얀색 글씨가 쓰인 붉은색 사각형 명찰을 들고 ‘저는 쇼핑을 하기 위해 태어났는데요’라고 소개하는 것 같다. 쇼핑을 최고의 가치로 치켜세우고 쇼핑을 통해 자신을 과시하는 당대 여성을 비꼬는 동시에, 무엇을 소비하는가를 통해 한 사람의 정체성을 결정해 버리는 소비 자본주의의 한계를 드러낸다. 그렇다면 역으로 자신만의 독특한 이미지 소비와 해석을 통해 그 한계를 극복해낼 수 있지는 않을까. 그러면 이미지의 소비자에서 생산자로 변신해 볼 수 있지는 않을까. 그리고 이 방법이야 말로 앞서 이야기한 이미지를 지배하는 해법은 아닐까.

 

이미지와 텍스트의 조합을 통해 왕성하게 새로운 의미를 생산해내는 작가 바바라 크루거라면 그런 한계를 극복하지 않을까 싶다. 그녀는 이미지를 소비하며 동시에 새로운 이미지를 생산해내는 예술가다. 모든 예술가가 다 그런 건 아니다. 새로운 그림을 그렸다고 해도 기존의 틀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면, 그건 단순히 새로운 스타일을 선보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새로운 인식과 새로운 시점을 제시해 주는 이미지가 진정한 의미의 새 이미지다. 그리고 이 새 이미지야말로 새로운 가치를 제시하는 힘을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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