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의 거울 - 바로크 미술에 담긴 철학의 초상
유성애 지음 / 미진사 / 2021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평점


4.5점   ★★★★☆   A






영국의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Bertrand Russell)1912년에 발표한 책 ‘The problems of philosophy’는 국내에 철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었다. ‘철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철학을 본격적으로 공부하기에 앞서 철학의 정의를 살펴보게 만드는 기본적인 주제이기도 하다지금까지 러셀을 포함한 철학자들은 자신이 생각한 철학의 정의를 밝혔다.


철학자의 거울철학자는 누구인가라는 제목(또는 부제)을 붙여도 되는 책이다철학자를 실제로 만나본 적이 없는 사람은 철학자의 정의를 떠올리지 못한다철학자의 거울을 쓴 저자 유성애는 철학을 전공했으며 15년 전부터 예술과 관련된 공부를 해오고 있다철학자는 누구인가는 인간이 누구인지 알고 싶어하던 철학자들도 하지 않은 질문이다하지만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는 질문을 한 사람들이 있었다그들은 바로 17세기에 활동한 화가들이었다.


17세기는 바로크(baroque) 시대. 이 시기에 활동한 화가들은 거지 철학자(beggar philosopher)’ 그림을 즐겨 그렸다거지 철학자로 가장 많이 묘사된 인물은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디오게네스(Diogenes)디오게네스는 키니코스학파(Cynics, 견유학파)에 속한 철학자다. 그는 떠돌이 개처럼 자유로운 생활을 했으며 나무통 속에 살았다. 디오게네스의 동시대인들은 그를 괴팍한 거지라고 비웃었다. 하지만 17세기에 들어서면서 디오게네스는 세습적인 욕망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인간상으로 주목받는다그림 속 철학자는 인간다운 삶을 살아왔던 존재이다바로크 시대 사람들은 철학자를 존경했으며 그들처럼 살고 싶어 했다. 그들은 화가에게 자신의 소망이 반영된 그림을 제작해달라고 부탁했다. 화가는 주문자가 바라는 대로 철학자의 초상화 또는 철학자 옆에 있는 주문자의 초상화를 그렸다.


철학자로 분장한 자신의 모습을 그린 화가들도 있다. 자화상에 자신의 지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화가의 개인적인 소망이 투영되어 있지만, 실제로 몇몇 화가는 인문주의자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을 정도로 철학에 관심이 많았다화가는 철학자가 되지 못해도 철학이 무엇인지는 알고 있었다. 17세기 화가들이 그린 철학자는 누군가에게 진리를 가르치려고 하는 직업인이 아니다. 진정한 자기 자신의 모습을 확인하기 위해 계속 고민하고, 반성하는 인간이다. 그래서 그림 속 철학자의 모습은 후줄근하다


철학자의 거울은 독자에게 철학적인 모험을 부추긴다. 그 모험은 평생 치러야 할 조용한 전투와 같다. 진짜 나를 찾기 위해 외부 세계와 맞서 싸워야 하고끊임없이 성찰해야 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자신의 책을 모험기라고 했다. 그는 질문이 철학자의 무기라고 말한다. 그는 자신을 위해 무기를 사용한다. 철학자 그림을 거울로 삼아 글을 쓰면서 자신의 진짜 모습을 찾기 위한 질문을 던진다. 이런 게 바로 문행일치(文行一致)’.






Mini 미주알고주알

 

 

* 250

 

 아름다움의 여신 비너스와 세 우아미[]가 함께하고 있다. 아글라이아(Aglaea), 에우프로쉬네(Euphrosyne), 탈리아(Thalia).

 

 

[] 아글라이아, 에우프로쉬네, 탈리아는 비너스(Venus)의 시중을 드는 우미(優美)의 여신들이다. 이 세 사람을 가리켜 카리테스(Charites)’ 또는 삼미신(The Three Graces)’이라고 부른다.





* 260


 신체 차이가 남성과 여성을 구분 짓는 절대적 척도일까? 리베라의 작품 속 인물은 남녀의 경계를 무너뜨린다. 벗겨진 이마, 검고 긴 수염으로 덮인 얼굴은 영락없는 남자다. 하지만 수염 아래로 여성의 젖가슴이 드러나 있다. 반인반마(伴人半馬), 켄타우로스[]를 보는 듯하다.

 


[] 그리스 신화에서 양성(兩性, 남녀추니)을 상징하는 인물은 헤르마프로디토스(Hermaphroditus). 그리스 신화에 남성의 상반신과 말의 하반신으로 이루어진 켄타우로스(Centaur)가 많이 등장하지만, 여성 반인반마도 있다. 이들을 켄타우리데스(Centaurides)라고 부른다.


  


댓글(3)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미미 2021-03-15 09: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일단 버트런트 러셀의 책을 주섬주섬 담아가렵니다ㅋㅋ

cyrus 2021-03-15 14:26   좋아요 0 | URL
러셀의 책을 읽지 않았지만, <철학자의 거울>이 러셀의 책보다 읽기 쉬운 책이에요. <철학자의 거울>의 전체적인 내용도 좋아요. ^^

미미 2021-03-15 14:33   좋아요 1 | URL
아하! 그렇다면 읽기 쉬운 <철학자의 거울>을 우선순위로 찜요! 어려운책은 당분간 피할래요^^;
 
세상을 이해하는 52가지 방정식 - 만유인력의 법칙에서 IQ, 지구의 나이를 구하는 공식까지 수학으로 세상을 정리한 방정식 이야기
존 M. 헨쇼 지음, 이재경 옮김 / 반니 / 2020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평점


3.5점   ★★★☆   B+






수학책인데, 수학책이 아닌 책이 있다. 세상을 이해하는 52가지 방정식(An Equation for Every Occasion)이 그런 책이다. 이 책을 쓴 저자는 자신의 책을 수학책이 아니라 이야기책이라고 단언한다수학 이야기책’, 그러니까 52가지 공식과 이와 관련된 흥미로운 상식에 관한 책이다.


이 책은 뉴턴(Isaac Newton)의 만유인력 법칙을 설명해주는 공식으로 시작해서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의 질량-에너지 등가 이론 공식(E=mc2)으로 마무리된다52가지 공식에 얽힌 이야기는 수학 교과서에 나오지 않는 것들이다. 수학 공식 이야기를 알아두면 쓸모 없는이야기와 ‘알아두면 쓸모 있는이야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다이어트하는 사람들이 모를 수 없는 체질량지수(BMI)는 전자에 속하는 공식이다. 체질량지수는 몸무게(kg)를 신장(m)의 제곱으로 나눈 값이다. 대다수 사람은 체질량지수를 계산해서 자신이 비만인지 아닌지를 확인한다. 하지만 체질량지수에 단점이 있다. 체질량지수는 생활 방식과 연령 등의 변수를 고려하지 않은 공식이다. 그러므로 부정확한 결과가 나올 수 있다. 숫자에 너무 연연하지 말자.


알아두면 쓸모 있는 공식 중에 가장 쉬운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개의 실질나이를 계산하는 방식이다. 반려견이 없는 사람도 외울 수 있을 정도로 아주 간단하다. 개의 나이에 7을 곱하면 된다. 계산한 값을 사람의 나이로 환산한 것이 개의 실질나이다.


세상을 이해하는 52가지 방정식은 2015년에 나온 세상의 모든 공식과 같은 책이다두 책 모두 같은 출판사에서 나왔고역자도 같다그런데 역자는 세상을 이해하는 52가지 방정식》의 서지사항에 이 사실을 밝히지 않았다알라딘에 저자 이름(존 M. 헨쇼)를 검색하면 세상을 이해하는 52가지 방정식과 세상의 모든 공식이 함께 나오는데두 권의 책이 동일한 가격(정가가 1만 4,000원이다. 알라딘에서 주문하면 10% 할인되는 가격도 똑같다)으로 판매되고 있다두 권 모두 사지(읽지) 말고, 한 권만 사자(읽자)

 






Mini 미주알고주알

 

 

1

 

 

* 14

 

 천문학자 윌리엄 허셜(William Herschel)1781년에 천왕성을 발견했다. []

 

 

[] 윌리엄 허셜은 누이동생 캐롤라인 허셜(Caroline Herschel)과 함께 천왕성을 발견했다허셜은 누이동생의 공로를 언급했지만, 여성을 천대하는 사회적 분위기로 인해 천왕성 발견에 대한 모든 공로는 허셜에게 돌아갔다.






2

 

 

* 106

 

 스위스가 낳은 수학자 레온하르트 오일러는 누가 꼽아도 역사상 가장 위대한 수학자 5인방에 꼭 들어간다. (5인방에 항상 끼는 다른 이름들은 뉴턴, 가우스, 아르키메데스다.) []

 

 

[] 오일러, 뉴턴, 가우스, 아르키메데스나머지 한 사람은 누구일까?






3

 

 

* 126





[] 야곱 베르누이가 태어난 연도는 1655인데, 영국의 옛 달력(Old Style, O.S.)을 기준으로 보면 1654년이다






4



* 139


 그동안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는 수학자들의 마음속에 에베레스트 산처럼 버티고 서서 앤드우 와일스의 모습을 한 에드먼드 힐러리 경을 기다리고 있었다. (뉴질랜드의 산악인으로 1953529일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를 처음으로 등정했다. 옮긴이)[]

 

 

[] 힐러리(Edmund Percival Hillary)와 동행한 네팔의 셰르파(히말라야 산맥을 오르는 산악인들에게 도움을 주는 티베트계 네팔인) 텐징 노르가이(Tenzing Norgay)도 에베레스트 등정에 처음으로 성공한 인물이다.






5



* 145






캐놀라 카놀라(canola)






6



* 164쪽


 러시아 물리학자[주] 하인리히 렌츠(Heinrich Lenz, 1804~1865)는 유도기전력은 자속의 변화를 감소시키는 방향으로 일어난다는 렌츠의 법칙을 세웠다.



[] 하인리히 렌츠는 발트 독일계(Baltic German, 발트 해 연안에 거주하는 독일인) 러시아 물리학자. 그를 독일의 물리학자로 소개하는 경우가 많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21-03-10 12: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21-03-14 23:31   좋아요 0 | URL
국내 역자뿐만 아니라 외국 저자들도 에베레스트 최초 등정에 관한 진짜 이야기를 간과하는 경우가 있어요. 실제로 힐러리는 텐징 노르가이도 에베레스트를 최초로 등정했다면서 몇 차례 밝혔는데도 말이죠. ^^;;
 
망고나무의 비밀
레오 페루츠 외 지음, 오용록 옮김 / 이유 / 2002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평점


2.5점   ★★☆   B-






그는 아가사 크리스티(Agatha Christie)와 프란츠 카프카(Franz Kafka)가 만나서 생긴 사생아다.” 오스트리아의 작가 프리드리히 토르버그(Friedrich Torberg, 1908~1979)는 동료 작가인 레오 페루츠(Leo Perutz, 1882~1957)를 이렇게 평가했다페루츠와 카프카는 체코의 프라하에서 태어난 유대인이다. 두 사람은 보험회사에서 일한 적이 있다페루츠는 오스트리아에 정착해 작가 활동을 하다가 독일 나치(Nazi)의 탄압을 피해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했다페루츠의 소설들은 한동안 잊히다가 작가 사후에 독창적인 환상 문학 작품으로 주목을 받았다.


망고나무의 비밀(Das Mangobaumwunder, 1916)은 국내에 처음 소개된 페루츠의 장편소설이다. 페루츠는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기 위해 지원했지만, 근시로 인해 불합격 판정을 받았다. 그는 예비군이 되어 군사 훈련을 받았고, 이 무렵에 망고나무의 비밀을 쓰기 시작했다. 소설가 겸 극작가인 파울 프랑크(Paul Frank)가 공동 필자로 참여하게 되면서 1915년에 소설이 완성되었다.


망고나무의 비밀은 동양에 대한 서구의 호기심과 취향즉 오리엔탈리즘(Orientalism)이 반영된 소설이다오리엔탈리즘을 논할 때 주로 언급된 분석 대상은 프랑스와 영국에서 나온 문학 및 예술 작품들이다하지만 실제로 북유럽과 동유럽에서도 오리엔탈리즘이 유행했다.[주] 오리엔탈리즘은 페루츠가 활동한 오스트리아에서 가장 인기 있는 주제 중 하나였고, 동양을 소재로 한 소설과 예술 작품들이 나왔다. 


키르히아이젠 박사는 동양에서 자란 식물에 관심이 많은 독극물 전문가다. 등산가로 유명한 포그 남작은 전문의가 아닌 박사에게 진료를 받고 싶어 한다. 남작의 요청을 수락한 박사는 남작의 저택을 방문한다. 남작의 저택 안에 동양에서 온 식물들로 가득한 온실이 있다. 그런데 남작은 엉뚱하게도 온실에서 일하는 인도인 정원사를 진료해달라고 요구한다. 인도인 정원사는 독사에 물려 사경을 헤맨다박사는 독사가 동양에 서식하며 유럽에 한 번도 들여온 적이 없는 희귀종임을 확인한다. 박사는 이상한 행동을 하는 남작을 의심하고, 독사가 어떻게 남작의 저택에 있는지 궁금해한다박사는 나름 추리를 해보지만, 남작의 비밀에 접근하는 박사의 모습은 탐정이라고 보기 어렵다작가는 그에게 불가사의한 현상의 비밀을 밝히는 능력을 부여하지 않았다


망고나무는 남작의 온실에 있는 식물이다. 박사는 남작의 외동딸 그레틀을 사랑하게 되고, 그녀에게 청혼한다. 두 사람은 망고나무에 사랑의 징표를 새긴다. 이때까지만 해도 박사는 신비로운 주술의 힘이 부녀(父女)와 온실을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 주술의 힘이 밝혀지면서 박사와 그레틀의 결혼은 무산된다.


박사는 동양의 식물을 엄청 좋아하지만, 풍토병이 두려워서 그곳에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다. 남작은 젊은 시절에 인도를 여행하면서 힌두교의 신비주의에 심취한 인물이다. 하지만 힌두교 전통 주술의 무시무시한 힘을 확인한 이후부터 동양에 열광했던 자신의 과거를 후회한다박사와 남작의 오리엔탈리즘 속에 공통적으로 동양을 바라보는 이중적인 시선이 반영되어 있다. 그들은 동양에 매료된 오리엔탈리스트이지만, 한편으로는 동양을 부정적으로 인식한다박사가 동양의 풍토병을 두려워한다면, 남작은 자신이 기대했던 것과 다른 동양의 신비주의를 직접 확인했기 때문에 두려워한다오리엔탈리스트가 생각하는 동양은 매력과 공포가 공존하는 미지의 세계이다유럽인들은 호기심 반 두려움 반으로 실제로 가본 적이 없는 동양을 바라봤다. 유럽에서의 동양은 인간이 사는 세계가 아닌 대중의 감성을 자극하는 환상적이고 무시무시한 소재로 소비되었다.


망고나무의 비밀은 당대의 유행이 반영된 통속 소설이라서 페루츠의 대표작으로 꼽기 어렵다. 게다가 공동 집필한 작품이라서 페루츠의 문학적 능력을 가늠할 수 없다. 소설을 쓴 페루츠 또는 프랑크가 착각한 것인지 아니면 역자가 번역을 잘못한 것인지 알 수 없지만, 번역본에 사실과 맞지 않은 내용이 있다.

 

 

* 208

 

 나는 힌두교 승려들이 파르바티 여신을 기리는 성대한 의식을 보려고 하루 더 아그라에 머물렀죠. 파르바티는 비슈누의 부인으로 물고기 눈을 가진 여신이오.

 

 

파르바티(Pārvatī)는 파괴의 신 시바(Shiva)의 아내이다. 파르바티는 창조의 신 브라흐마(Brahma), 유지의 신 비슈누(Vishnu)와 함께 힌두교 3대 신(Trimūrti)으로 추앙받는다.

 

 

 


[] 존 맥켄지, 박홍규 외 옮김, 오리엔탈리즘 예술과 역사(문화디자인, 2006), 130.



 


댓글(4) 먼댓글(0) 좋아요(2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바람돌이 2021-03-03 14: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가사 크리스티와 프란츠 카프카가 결혼이 가능할까요????? 아니 사생아라고 했나? 그것도 좀 불가능할 것 같은데..... ㅎㅎ

cyrus 2021-03-03 14:59   좋아요 0 | URL
국내에 번역된 페루츠의 소설이 <망고나무의 비밀>을 포함해서 총 세 권이에요. 그런데 이 세 작품만 가지고 페루츠가 사생아인지 아닌지 알 수 없어요. ^^;;

smellslikeyou 2021-03-04 08: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진짜 사생아란 얘기가 아니라 두 작가의 특징을 모두 연상시키는 소설을 썼다는 뜻의 비유적인 표현이에요. <망고나무의 비밀>은 저도 별로였고 다른 두 작품을 추천합니다.

cyrus 2021-03-04 08:41   좋아요 0 | URL
<스웨덴 기사>를 재미있게 읽었어요. ^^
 
보이지 않은 역사 - 한국 시각장애인들의 저항과 연대
주윤정 지음 / 들녘 / 2020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평점


4점   ★★★★   A-






장애 역사(disability history)는 비장애인에게 생소한 분야이다. 장애 역사에 대한 생소함을 풀어줄 책을 만나기가 쉽지 않다. 아마도 비장애인들은 장애 역사를 다룬 책이 단 한 권도 본 적이 없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들이 보지 못한 책은 세상에 나오지 않은 책’, 즉 미출간된 책이라는 의미로 귀결된. 하지만 그것은 착각이다다른 나라에 비해 늦은 편이지만, 우리나라도 장애 역사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고 있으며 연구 성과물들이 속속 나오고 있다비장애인은 이런 자료를 접할 기회가 없다. 그래서 비장애인들의 눈에는 장애 역사를 정리한 책들이 보이지 않았다책이 보이지 않으니까 역사 속에 있는 장애인들의 삶마저 보지 못한다.


보이지 않은 역사는 비장애인들의 눈에 보이지 않았던 우리나라 시각장애인의 역사에 관한 책이다보이지 않은 역사의 저자는 시각장애인 구술사 조사를 하기 위해 다양한 집단에 속한 시각장애인들을 만났다안마 일에 종사하는 시각장애인(안마 맹인), 점을 보는 시각장애인(점복 맹인), 구걸로 생계를 이어나가는 시각장애인(구걸 맹인)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맹인 공동체의 역사를 기록하고 전승하는 데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저자는 글자를 읽지 못하는 시각장애인들이 어떻게 역사를 기록했고, 대대로 전승해왔는지를 살핀다.


시각장애인의 역사에 차별만 있는 게 아니다. 그 속에 저항연대도 있다. 차별, 저항, 연대. 이 세 개의 단어는 우리나라 시각장애인들의 삶이 압축되어 있다어느 분야에서 뚜렷한 족적을 남긴 인물을 중심으로 서술된 주류 역사에 사회적 약자들의 역사가 들어갈 자리는 없다사회를 재편한 근대화를 중요하게 보는 역사학자들은 장애인을 시대적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집단으로 인식했다이러한 인식이 반영된 단어가 바로 문맹이다글자를 보지 못한 시각장애인은 글자를 모르는 문맹’이 되었. 


근대화는 계몽(enlightenment)과 궤를 같이 한다근대성이 시작되자 눈뜬 채 잠든 무지몽매한 대중을 깨워주는 시각 매체와 활자 매체(신문, 영화, 신식 문화를 소개한 인쇄물)가 보급되었다. 하지만 시각장애인은 시각 매체와 활자 매체에서 나오는 빛을 볼 수 없었다. 조선의 근대화에 앞장선 학자와 서구 선교사들은 시각장애인을 불쌍하고, 무능한 존재로 인식했다. 이때부터 시각장애인을 돕는 선교사들의 자선 활동과 조선을 통치한 일제의 시혜 정책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조선을 통치한 일제의 시각장애인 보호 정책은 자신들의 문명화 사명(civilizing mission)’을 알리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 그들에게 포섭당한 시각장애인들은 도움을 받고 살아야 하는 존재’ 또는 근대화에 맞춰 재교육을 받아야 하는 대상’으로 전락했다.


식민화, 탈식민화, 근대화의 과정에서 시각장애인들은 독자적인 생활 방식을 유지하면서 살아왔다. 그들은 차별에 맞서 저항해왔으며 자신들의 생존과 직결된 안마 사업권을 지키기 위해 서로의 몸을 줄로 묶어 다니면서 투쟁했다. 시각장애인의 구술 문화는 시각장애인 공동체를 설명해주는 집단 기억을 형성하게 했고, 공동체의 유산이 대대로 후손들에게 전해지면서 역사가 되었다. 역사 속에 남은 시각장애인들의 모습은 무능한 사회적 약자가 아닌 사회 변화와 차별에 적극적으로 대응한 주체적 인간이다보이지 않은 역사는 주류 역사 서술 방식에 익숙한 독자와 다양하고 역동적인 장애인의 세계를 보지 못하는 비장애인의 눈을 트이게 만든다. 






Mini 미주알고주알

 

 

* 14

 

게레멕 브로니슬라프 브로니슬라프 게레멕(Bronisław Geremek)

* 21

 

엘레나 그로스 노라 엘렌 그로스(Nora Ellen Groce)

* 71각주

 

거대한 변혁』 → 『거대한 전환(The Great Transformation)



댓글(2) 먼댓글(0) 좋아요(3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감은빛 2021-03-02 20:2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cyrus 님의 폭넓은 독서에 감탄합니다!
이런 책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다행이란 생각이 드네요.

cyrus 2021-03-03 11:24   좋아요 1 | URL
도서관에서 우연히 만난 책입니다. 책을 만든 출판사가 나름 인지도가 높은 편인데, 독자들의 주목을 많이 받지 못해서 아쉽습니다.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앤드루 포터(Andrew Porter)의 소설집을 읽은 김영하 작가와 달궁인들은 포터의 대표작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The Theory of Light and Matter, 약칭 빛과 물질’)에 찬사를 보냈지만, 나는 호평 일색이 좋게 보이지 않았다.


















[달의 궁전 2월의 책]

* 앤드루 포터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문학동네, 2019)





빛과 물질의 화자인 헤더는 대학생이다. 헤더는 서른 살 연상인 물리학과 교수 로버트의 초대를 받아 그가 사는 아파트를 방문한다. 헤더는 로버트가 자신을 유혹하기 위해 집으로 초대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녀는 로버트를 의심하지 않으며 두려워하지도 않는다.



 그는 나를 편하게 해주기 위해 각별히 노력하는 듯 보였고, 눈이 마주칠 때마다 아래쪽을 흘끗 내려다보는 살짝 불안한 습관이 이상하게도 내 자신감을 북돋워주었다. 강의실 밖에서는 얘기라곤 나눠본 적이 없었지만, 나는 그와 함께 있다는 사실로 인해 이미 핏속부터 편안하고 따뜻해지는 기분이었다. 아버지의 친구분들, 농담을 주고받기 쉬운 나이 많은 남자들, 젊고 매력적인 여자를 앞에 두고 부끄러워하는 모습 때문에 무해한 존재가 되는 그런 남자들과 있을 때 느껴지는 따스함이었다.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중에서, 90~91쪽)



타인을 쉽게 믿지 못하고, 심지어 타인의 호의를 의심할 정도로 각박해진 요즘 현실을 생각하면 로버트의 초대에 선뜻 응하는 헤더의 모습은 이해하기 힘들다내가 헤더의 정서적 태도를 이해하지 못한 이유는 지난달에 읽은 캐서린 맨스필드(Katherine Mansfield)의 단편소설 어린 가정교사』(The Little Governess)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 캐서린 맨스필드 가든파티(궁리, 2021)




맨스필드의 소설에 나온 영국인 가정교사는 독일에서 일하게 되어 그곳으로 향하는 배에 올라탄다. 그런데 가정교사는 혼자 외국에 가본 적이 없고, 밤 여행을 좋아하지 않는다. 가정교사 소개소에 일하는 여자가 독일에 가려는 가정교사의 마음을 읽었는지 그녀에게 충고한다.



 “나는 항상 여자들에게 누군가를 믿기보다는 처음에는 의심하는 게 낫다고, 그러니까 사람들이 악의를 품고 있을지 모른다고 의심하는 게 선의를 품었다고 생각하는 것보다 안전하다고 말해주곤 해요좀 너무하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우린 영악하게 세상물정을 아는 여자가 되어야 하잖아요. 그렇죠?”

 

(어린 가정교사중에서, 55~56)



가정교사는 자신이 난감한 상황에 부닥쳐 있을 때 도움을 준 친절한 노인에게 호감을 느낀다. 노인은 자신의 명함을 가정교사에게 건네준다. 명함에 적힌 노인의 직업은 참사관(Regierungsrat, 공무원)이다. 노인의 정체를 파악한 그녀는 그가 문제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녀는 노인의 초대를 받아 그가 사는 아파트에 들어간다. 집안일을 하는 가정부를 제외하면 노인도 로버트 교수처럼 혼자 사는 남자다. 노인은 가정교사 앞에서 자신의 진짜 얼굴을 드러낸다. 그는 가정교사에게 키스 한 번 해달라고 요구한다. “나이 든 남자는 이전과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어린 가정교사중에서, 74) 노인은 강제로 가정교사에게 입맞춤하고, 깜짝 놀란 그녀는 밖으로 도망친다.


누군가를 믿기 보다는 의심하라. 가정교사 소개소 직원의 말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타인에 향한 의심의 눈길이 그 사람의 참된 모습과 진심을 훼손하는 흉기가 돼선 안 된다. 세상 물정을 잘 아는 영악한 사람들이 생각보다 우리 주변에 많다. 그중 몇몇은 본심을 숨긴 채 상황에 따라 여러 개의 가면을 쓰고 다닌다. 그런 사람들에게 당하지 않도록 영악하게 살아갈 필요가 있어 보인다.




댓글(5) 먼댓글(0) 좋아요(2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vita 2021-03-02 13: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늘 리뷰는 여러모로 많은 것들을 느끼게 해주는구려

cyrus 2021-03-02 17:12   좋아요 0 | URL
타인을 언제까지 의심해야 하고, 그 의심을 언제 거둬야할지 사실 저는 잘 모르겠어요. 계속 의심만 하다가는 타인의 진심을 못 볼 수 있거든요. 그 사람이 떠나고 난 뒤에야 진심을 뒤늦게 확인할 때가 있어요. 아무튼 사람을 만나고, 그 관계를 유지하는 일은 간단하지 않아요. ^^;;

vita 2021-03-02 17:14   좋아요 1 | URL
사이러스 마음이 제 마음입니다

stella.K 2021-03-02 16: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앤드루 포터는 좀 호불호가 있는 것 같아.
나의 경우 몇몇 단편은 나름 괜찮았는데
나머지는 지루해서 걍 중고샵에 팔아버렸지.ㅋ

cyrus 2021-03-02 17:13   좋아요 0 | URL
저도 그래요. 제가 괜찮게 본 앤드루 포터의 소설은 <구멍>, <피부>, <코네티컷>이었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