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중권의 서양미술사 : 고전예술 편 (반양장) - 미학의 눈으로 보는 고전예술의 세계 진중권의 서양미술사
진중권 지음 / 휴머니스트 / 2008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미학' 의 관점으로 보는 서양미술사

몇 달전부터 에른스트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를 읽고 있다.  사실 읽는다라기보다는 그저 훑어보고 있다는게 옳다.   베개로 삼을 만한 엄청난 분량에다가 깨알 같은 작은 글씨는 아무리 미술 전공자라고 하더라도 책을 펴기 전부터 압박감을 준다.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는 오늘날까지도 미술사의 고전으로 자리잡을 정도로 미술사 스테디셀러이지만 단지 미술사를 알기 위해서 이 책 한 권을 통째로 읽는다는 것은 괜한 오기일지도 모르겠다.     

곰브리치 외에도 B.W. 잰슨의 저서 역시 유명한데 기존의 많은 미술사들은 다양한 사조를 시간순에 따라 서술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광범위한 미술이 변모해나가는 흐름은 한 눈으로 볼 수 있지만 양식의 변화만큼은 파악할 수 없다.  더구나 미술 지식이 전무한 미술 비전공자들은  '양식의 변화' 라는 중용한 알맹이를 지나쳐버리고 수박 겉핥기로 읽게된다.      

우리나라에 소개된 서양미술사들의 저자는 대체로 외국인이다보니 서구의 시선과 관점이 다분히 반영되어 있을수 밖에 없다.  서양과 동양의 그림을 보고 이해하는 방식이 서로 차이가 있가 마련인데 미술에 대한 서구인들의 미적 취향과 관점을 인식하지 못하는 점도 미술사를 이해하는데 더욱 어렵게 만들게하는 원인 중의 하나다.    국내 출신의 미술 전공자들이 기록한 우리나라 독자들을 위한 서양미술사가 소개되고 있지만 여전히 기존의 서술방식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감이 있다.

하지만 진중권의 서양미술사 서술 방식은 독특하다.  미학자답게 '미학' 의 관점으로 미술사를 접근하고 있다.  미술사학에서 널리 알려진 논문이나 저서를 선택, 그것들을 선형적으로 배치하는 방식으로 미술사를 구성한 것이다. 서양미술의 원리를 문제영역별로 제시하면서 역사를 통시적으로 함께 서술하는 방식이다.  

 

 

  '예술 의지' 에 따라 달라지는 미술의 양식 

  

마티아스 그뤼네발트 <십자가 책형> (이젠하임 제단화 중 일부)  1509~1511년  

(진중권 <서양미술사 1> pp 175 수록)

  

 

파블로 피카소 <십자가 책형>  1930년

 

그뤼네발트피카소의 그림이 있다.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의 모습을 그린 그림인데 둘은 너무나도 다르다.   그뤼네발트의 그림에서는 그리스도의 고통스러운 표정과 몸에 곳곳이 난 성흔을 생생하게 볼 수 있지만 피카소의 그림 같은 경우에는 처음부터 제목을 모른 상태로 보게 된다면 그저 정체를 알 수 없는 형상으로만 볼 수 있다.  그뤼네발트의 표현방식처럼 온전한 형태의 사람과 사물이 그려지 그림에 익숙한 사람에게는 피카소의 추상기법을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그렇다면 같은 주제를 다룬 그림인데도 표현방식면에서 확연한 차이가 나는 것일까? 

그것은 두 화가가 표현방식에서 지향하는 바가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르네상스 시대 때 활동한 독일 출신의 그뤼네발트는 인물을 가능한 한 눈에 보이는 것과 똑같이 그릴려고 하였고, 20세기 화가 피카소는 눈에 보이는 것과 다르게 그리는 것이 목표였다.  

예술 의지가 다른 것이다.  저자는 미술사학자 파노프스키가 제시한 두 가지 비례론을 끌어들이는데 그뤼네발트의 그림처럼 실물을 그대료 묘사하려는 ‘객관적 비례’, 실제 인체 비례에서 현저하게 벗어난 피카소의 묘사는 ‘제작적 비례’ 로 부를 수 있다.   

고대부터 르네상스 시대까지 예술가들은 신체를 표현하기 위해서는 이상적인 인체 비례를 찾아내는 것이 관건이라고 생각했다. (객관적 비례)   그러나 시대가 변할수록 창작의 방법으로서의 비례의 의미는 서서히 종말을 맞기 시작한다.  그리고 예술가들은 창작의 근원을 자신이 표현하려는 의지에서 찾게 됨으로써 현대의 추상미술이 등장할 수 있었다. (제작적 비례)  

  

    

  형태냐 색채냐, 미적 관점의 충돌  

 

 

<푸른 옷을 입은 성모> 프랑스 샤르트르 노트르담 대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 12세기경 

 

색과 빛을 바라보는 관점 역시 시기마다 다르다.  감각적 세계보다 초월적 세계를 중시한 중세에는 예술로 감각적 세계를 재현하기 보다 그 너머 초월적 세계를 표현하고자 했다. 그러기위해서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는 것이다.  중세의 장인들은 값비싼 재료의 화려한 색채를 초월적 빛의 상징으로 사용했다. 중세 고딕의 스테인드글라스는 빛의 미학인 명료함을 그대로 보여준다.  

그러나 인간 중심의 르네상스 시대에 접어들게 되면서 예술가들의 미감은 다시 형태 중심으로 바뀌게 된다.  그 이후로부터 시대에 따라 미술에서 강조되는 표현방식으로서 '형태' 와 '색채' , 이 두 가지 요소를 중심으로 미술의 역사는 변화를 맞이하게 된다.    

바로크 시대에는 회화의 고유성을 강조했다. 즉 자연을 묘사하기 위해서는 형태보다는 색채의 효과에 중점을 두었다.   바로크 시대에 탄생된 예술작품들은 르네상스 시대의 작품들에 비하면 더욱 화려하다.   색채를 강조하는 표현양식은 프랑스의 로코코 시대에 이를수록 한층 더 화려한 색감을 더하게 되었다.   바로크와 로코코 시대 때 유행한 화려한 색채의 그림들은 화려한 생활을 누리는 귀족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던 미술양식이었다.

 

 

니콜라 푸생 <세례 요한과 성녀 엘리자베스, 기도하는 성 요셉이 있는 성 가족>  17세기경  

 

 

페테르 파울 루벤스 <세례 요한과 성 엘리자베스와 함께 있는 성 가족>  1634년경  

형태를 강조하는 고전주의적 그림들은 고대 조각상을 연상할 정도로 고정적이다. (니콜라 푸생)  하지만 색채를 강조하는 바로크 및 로코코풍의 그림들은 오히려 고전주의적 그림들보다 화려한데다가 색체의 효과 덕분에 생동감이 느껴진다. (루벤스)  이러한 서로 상반된 미적 관점의 충돌은 한 세기동안 예술가들 사이에서 커다란 논쟁의 화두였다.

    

그러나 비평가들 사이에서 화려한 미술양식의 유행에 반발함으로써 예전처럼 형태가 강조되는 미술로 회귀할 것을 주장하기도 한다.   이들은 예술가들이 색채의 화려한 효과에만 치중하다보니 정작 중요한 형태의 기본이 사라졌다고 하였다.  형태와 윤곽을 강조하는 예술가 및 비평가들로 구성된 '고전주의자' 또는 '푸생주의자' 와 반대로 색체를 강조하는 입장의 예술가들은 '현대주의자' 또는 '루벤스주의자' 로 대립 구도가 형성이 되어 예술적 논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예술적 논쟁이 불붙던 17세기는 절대왕정의 시기였기에 결국에는 귀족과 왕정들의 인기를 힘입은 바로크, 로코코 양식이 승리하게 되지만 유행의 흐름은 오래가지 못하게 된다. 18세기에 터진 프랑스 혁명 이후로 왕정이 붕괴되면서 다시 고전주의적 미적 취향이 유행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예술에서 중요한 것은 '솜씨' 가 아니라 '의지' 

  

클로드 모네 <인상-해돋이>  1873년

  

클로드 모네가 <인상-해돋이>라는 제목의 그림으로 살롱에 출품하였을 때 관객들은 정확한 형태로 이루어지지 않은 안개로 가득한 어둠침침한 풍경에 무척 낯설어하였다.  심지어 비평가들은 '정확한 묘사' 를 강조하는 전통적 회화 표현 수단을 저버린 모네와 같은 예술가들을 향해 경멸감에 가까운 악평을 하기도 했는데 여기서 유래된 단어가 바로 '인상주의' 인 것이다.   

인상주의자들은 바로크 시대의 화가들처럼 빛의 미세하고 섬세한 효과를 표현하는데 주력하였는데 정확한 형체로 표현되는 고전주의적 예술를 선호하는 관객과 비평가들 입장에서는 인상주의자들의 표현에 반감을 가질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20세기로 접어들게 되면서 누그러뜨린 형체들만 그려진 기괴하기 짝이 없는 추상미술이 등장하였을 때 관객과 비평가들은 이전에 볼 수 없었던 표현양식에 아연실색하였다.  여전히 정확한 사물과 인간이 그려진 고전적 표현이 시각적으로 익숙해져있다보니 추상미술의 등장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당시 보수적 비평가들은 추상미술의 등장에 '예술의 종말' 까지 운운할 정도였다.

오스트리아의 미술사가 알로이스 리글예술에서 중요한 것은 '솜씨' 가 아니라 '의지' 라고 하였다. (진중권 <서양미술사 1> pp 17)    

예술의 역사를 살펴보게 되면 특정한 미술양식이 유행하는데는 예술적 인식, 사고 등 예술가들이 표현하고자하는 의지에 의해서 이루어져 있고 변화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미술 본연의 예술적 감각 그리고 예술 의지를 알지 못한 채 그림을 보게 된다면 중세의 예술양식을 화려한 로코코 양식과 비교하여 어린아이가 그림을 그리는 정도의 수준으로 평하거나 생각하게 되는 오류를 범하게 된다.    즉, 예술을 접할 때는 실물과 정확하게 묘사할 줄 아는 화가의 역량만이 무조건 우수한다는 것도 아니고 그것을 기준으로 평가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진중권의 <서양미술사>는 기존의 미술사보다는 내용면에서는 깊이가 떨어지지만 미술의 양식이라면 이해가 깊은 독자라도 흔히 접근하기 꺼려해온 형식적 체계까지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가 쓴 미술사가 유용하다.   

이 책을 통해서 고대 미술, 르네상스, 마니에리스모, 바로크, 로코코, 신고전주의 등 미술 교과서에 자주 등장하지만 어렵게만 느껴졌던 미술사조들의 예술적 특징들을 한 눈에 볼 수 있다. 그리고 전문적인 미술사에서 볼 수 없었던 미시적인 예술양식과 유행 역시 알 수 있는 흥미로운 내용도 소개하고 있다.   각각의 미술사조에 강조되었던 예술적, 미학적 감각들을 숙지하고 있다면 두꺼운 분량의 곰브리치 미술사와 같은 전문서적도 부담없이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이제 막 미술사를 입문하는 초보 독자들이라면 진중권표 서양미술사는 미술사의 기본적인 미적 흐름과 미술사조의 특징들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줄 것이다.  

 


댓글(8)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stella.K 2011-09-06 13: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전예술편이었군요. 저는 모더니즘편 읽고 있는데
읽기야 읽겠지만 리뷰를 어떻게 쓰나 한숨이 나오고 있습니다.ㅠ
근데 이책을 그렇게 빨리 읽었어요?
그것도 모자라 곰브리치도 읽고 있다닛!
저는 내친김에 오래 전에 사놓고 안 읽은 미학오디세이2를
일단 책상 위에 올려놨는데 읽을 시간이 있을까 모르겠어요.흐~

cyrus 2011-09-08 00:32   좋아요 0 | URL
모더니즘 같은 경우에는 철학 지식을 요구하고 있어서
어려운건 사실이에요.. 저도 잠깐 모더니즘편을 훑어봤는데
확실한건지 모르겠지만,, 훑다보니 '벤야민'이라는 단어가
보이더군요. 읽기 전부터 어떤 내용이지 짐작이 가더군요 ^^;;

그래서 오랜만에 고전예술편을 읽어봤어요. 제가 작년에
처음 읽었는데,, 그 때는 미술에 대해 무지했던 때라
읽다가 중간에 포기했는데 다시 읽어보니 재미있었습니다.
고전예술편 같은 경우에는 내용이 어렵지 않을거에요. ^^

맥거핀 2011-09-06 15: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며칠 전에 모더니즘 편 사서 지하철타고 왔다갔다하면서 보고 있습니다. 붐비는 지하철에서 미술작품 들여다보고 있는 것도 꽤 재밌더군요. 1편 예전에 보고 괜찮은 것 같아서 2편을 샀는데, 2편은 1편보다는 재미가 살짝 덜한듯한..(구성도 그렇구요.)

이 고전예술 편 보고 생각이 든 것은 미술사라는 것도 일종의 필연성이 엿보인다고 할까요. 잘 모를때는 이 미술양식들의 출현이 그저 별 연관없이 나온줄 알았는데, 어떤 사조가 지나간 후 다시 새로운 사조가 나오는 것은 필연적인 연관이 있더군요. 재미있었습니다.

cyrus 2011-09-08 00:33   좋아요 0 | URL
아무래도 모더니즘은 현대미술에 대해서 다루다보니 현대미술에
생소한 독자들에게는 재미가 덜 할 수도 있다고 봐요.
저 같은 경우에도 현대보다는 모더니즘 이전의 미술양식을
선호하는 편이거든요.

아이리시스 2011-09-06 19: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맨 윗 그림 진짜 좋아해요. 제가 성경을, 그러니까 성서를 많이 좋아하거든요. 모든 이야기는 성서 속에 있다고 배워서 꼭 읽어내고 싶어 핑크 성경책을 샀는데도 그건 제가 읽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예요. 종교가 없는데 것과 상관없이 성경공부는 꼭 하고 싶어요. 곰브리치는 아는 분께 들었는데 아무데나 관심있는 부분 펼쳐읽으래요. 그림읽기에 관한 책을 많이 내신 분인데 처음부터 끝까지 읽으려면 오히려 경기 난다고.

오래 전에 <미학 오디세이>는 신세계를 열어준 인문서였는데, 새로 출간되고 관심이 덜해졌어요. 그치만 저도 꼭 읽어볼래요!

cyrus 2011-09-08 00:35   좋아요 0 | URL
종교에 상관없이 성경을 읽고 공부하고자하는 아이리시스님의
모습이 보기 좋아요. 제 생각이지만 시중에 성경 이야기를 그린
그림을 설명하는 책이 있을거에요. 제목은 기억은 안 나지만,,
언젠가는 따로 페이퍼로 소개해드릴께요. (꼭 기억하고 계세요 ^^)
그 책을 보면서 성경 속 주요 내용을 이해하는 것도 좋다고 생각해요.

곰브리치 같은 경우에는 정말로 관심 있는 부분에만 읽고 있는 편이랍니다.
요즘 인상파에 관심이 많아서 그 부분만 열독하고 있습니다. ^^;;

yamoo 2011-09-07 09: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중권의 서양미술사...괜찮은 책이죠. 시루스님 지적대로 어여 우리 미술사가들의 독특한 시각이 느껴지는 미술 평론책들이 많이 출간됐음 합니다~

그나저나, 올리신 그림들은 도대체 어디서 구하시나요? 리뷰 쓸 때에는 그림이 2개이상 들어가지 않아 이상했는데...그림들을 어찌 많이 넣으셨는지 궁금하네요^^

cyrus 2011-09-08 00:38   좋아요 0 | URL
맞아요, 이와 같은 대중적인 서양미술사의 출간은 보기 드물텐데 말이죠.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저는 <서양미술사 1>이 2008년인가,, 처음
출간되었을 때 이미 알려져 있던 <미학 오디세이>에 버금가는
인기를 얻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대중들의 반응이 뜨겁지 않아서
아쉽기만 합니다. 아무래도 그 당시 진중권 씨가 한창 독설을
날리는 논객으로서의 이미지가 강했던 탓도 있다고 봐요.

야무님은 작성하실 때 그림을 두 개 이상 넣는게 안 되는가보군요.
저는 아무런 불편없이 잘 되요. 혹시 지금도 안 된다면
알라딘 서재지기에 한 번 문의해보셔야 할 거 같아요.
시스템상 문제일 수도 있으니까요.
 
한여름 밤의 꿈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72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최종철 옮김 / 민음사 / 2008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한여름 밤, 마법의 숲에서 펼쳐지는 사랑의 판타지

<한여름 밤의 꿈>은 그동안 영화, 연극, 음악, 무용 등으로 너무나 많이 만들어져 조금 식상하다는 느낌마저 드는 셰익스피어의 작품이다.   하지만 지금까지도 오래전에 쓰여진 이야기에 매료되는 것은 그 속에 들어 있는 사랑이 만들어낸 유쾌한 '판타지' 때문일 것이다. 

허미아와 라이샌더는 서로 사랑하는 사이지만 허미아의 아버지 이지우스의 반대로 결혼을 하지 못하고 있다. 결국 두 사람은 밤중에 몰래 사랑의 도피행각을 벌이기로 하는데, 바로 이 계획을 헬레나가 알게 된다. 헬레나는 허미아를 짝사랑하는 드미트리어스를 남몰래 짝사랑하고 있었다. 하지의 전날 밤, 라이샌더와 함께 도망가는 허미아를 찾기 위해 드미트리어스가 숲으로 들어오고, 이 드미트리어스를 찾아 헬레나도 숲으로 들어온다.  3쌍의 연인이 숲으로 모이게 되면서 사랑의 백일몽이 시작된다.

그들의 꿈이 단지 백일몽이었던 건 요정들의 장난스러운 마법으로 인해 연인들의 사랑싸움을 한층 소란스럽고 복잡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헨리 퓨젤리 <요정들에게 둘러싸인 티타니아가 깨어나다> 1793년  

 

티타니아:  주무세요. 내 팔로 감아 안아 드릴께요.  요정들은 물러가라.  사방으로 멀어져라. 

               (요정들 함께 퇴장)  

               담쟁이도 아름다운 인동 덩굴 이렇게 부드럽게 감으며, 암송악도 껍질 덮인  

               느티나무 가지를 이렇게 둘러싸요.  오. 정말 그대 사랑해요!  

               난 정말 혹했어요! 

- 4막 1장 중에서, pp 79~80 -

                 

이 야단법석은 숲을 지배하는 요정의 왕 오베론과 왕비 티타니아의 부부싸움에서 시작된다. 잠깐의 다툼에 약이 오른 오베론은 티타니아를 골탕 먹이려고 요정 에게 마법의 꽃을 구해 오라고 명했다.  마법의 꽃으로 만든 즙을 눈에 바르면 눈을 뜨고 나서 맨 처음으로 보는 대상을 사랑하게 된다.  꽃의 즙이 눈에 닿은 요정의 여왕은 하필 못생긴 얼굴의 당나귀 인간 바틈을 처음 바라보게 되고, 순식간에 사랑의 마법에 빠져들고 만다.

퍽의 깨알같은 실수 연발은 이야기가 전개될수록 재미가 더욱 배가된다.  드미트리어스를 향해 열렬하게 구애하는 헬레나를 보고 불쌍하다는 생각이 든 오베론은 퍽에게 마법의 꽃즙을 드미트리어스의 눈에 뿌려주라고 한다. 하지만 퍽은 드미트리어스의 눈에 뿌려야 할 꽃즙을 라이샌더의 눈에 뿌리는 바람에 모든 것이 뒤죽박죽되고 만다.

어긋난 큐피드의 화살처럼 연인들의 마음은 갑자기 행로를 바꾸어 꽂히게 되고, 결혼 준비로 흥겹게 달아오른 숲은 세 커플들로 대혼란에 휩싸인다.  퍽은 자신 때문에 꼬여버린 연인들의 운명을 되돌리기 위해 모두를 잠재우고 꿈 같은 하룻밤을 정리한다. 마법이 풀린 여왕은 잠에서 깨어나고나서야 여태까지 당나귀 인간에 사랑에 빠져 있었던 사실에 황당해한다.   

그리고 문제의 3쌍의 연인들이 잠든 사이에 오베론은 다시 마법을 부려 라이샌더는 허미아를, 드미트리어스는 헬레나를 사랑하도록 다시 원래대로 만들어 놓는다. 이렇게 해서 뒤죽박죽이 되었던 연인관계가 정상으로 돌아오게 됨으로써 서로의 짝을 찾은 두 쌍의 남녀가 아테네의 공작 테세우스 집에서 공작 부부와 함께 결혼식을 올리는 것으로 끝난다. 이렇게 우스꽝스럽고 기괴한 하룻밤은 그렇게 막을 내린다.   

 

 

  사랑의 감정에 사로잡히다

<한여름 밤의 꿈>을 원작으로 읽어본다거나 또는 연극, 영화를 보게 되면 희곡에 등장하연 연인들이 겪게 되는 상황과 장면들이 낯설지 않을 것이다.   셰익스피어의 작품들 속에서는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에 수록된 고대 신화 속 이야기들이 곳곳에 숨겨져 있다고나 인용되고 있다.

사랑에 빠진 3쌍의 연인들 그리고 요정들 이외에도 <한여름 밤의 꿈>에는 마을에 살고 있는 평범한 사람들인 목수 퀸스, 풀무장이 플루트, 땜장이 스타우트, 가구장이 스넉이 바로 그들이다. 이들 일행과 어울리는 바틈은 원래 직업이 베틀장이다.    그들은 나흘 앞으로 다가온 테세우스 공작의 결혼식에서 선보일 연극을 연습하기 위해 숲으로 들어온다.  일행 중 한 명인 바틈이 오베론의 마법에 걸려든 것이다.   

  

 

존 윌리엄 워터하우스 <티스베>   1909년 

   
 

퓌라모스와 티스베는 집안의 반대로 인해서 이웃지간임에도 서로 만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 역시 이들 사랑의 장애물이 될 수가 없았다.   

갈라진 벽의 작은 구멍을 통해서나마 대화를 나눔으로써  

두 남녀는 불 타오는 사랑의 감정을 더욱 지펴나갔다.

 
   

 

그런데 마을 일행들이 선보이는 연극의 제목은 '피라무스와 디스비의 가장 구슬픈 코미디와 가장 비참한 죽음' 이다.     그리스 신화 속 이야기를 알고 있는 독자라면 벌써 눈치를 챘을 것이다.   '피라무스와 디스비' 는 신화 속 비극적인 사랑의 연인인 퓌라모스와 티스베를 패러디한 것이다.   

여전히 이들의 이름이 생소하게 느껴진다면 너무나도 잘 알려진 고대판 '로미오와 줄리엣' 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퓌라모스와 티스베 역시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양쪽 가문에서 서로 반대하는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서 사랑의 도피를 결심하게 되지만 불행한 사고로 인해 두 사람 다 서로 목숨을 끊게 된다.  바로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이 나올 수 있었던 것도 퓌라모스와 티스베 신화가 이야기의 원형이기 때문이다.

그 이야기를 토대로 한 연극을 마을 일행들이 연습하게 되는데 공교롭게도 바틈은 연극 속 비극적인 남자 주인공 퓌라모스 역을 맡게 된다.    무식한 바틈은 자신이 맡게 된 퓌라모스 역이 어떤 역할인지 모르고 있지만 비록 오베론의 마법에 의한 것이지만 바틈 역시 퓌라모스처럼 티타니아를 사랑하게 된다.   결국에는 당나귀 머리를 사랑하는 티타니아는 티스베인 것이다.   

두 사람의 가슴을 태운 사랑의 불꽃은 그 뜨겁기가 같았을까, 달랐을까?  아마 같았겠지. (중략)  감추면 감출수록 깊어가는 게 사랑이잖아?   속으로 속으로 타들어가는 섶 속의 불씨 같은 게 사랑이잖아? 

- 오비디우스 <변신 이야기 1> '퓌라모스와 티스베' 편, 민음사 pp 156~157 -  

   

퓌라모스와 티스베 이야기는 단지 바틈과 티타니아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사랑의 마법에 걸린 허미아와 라이샌더 역시 집안의 반대로 인해 사랑의 결실을 맺지 못할뻔한 연인이기 때문이다.  

마냥 희곡 속의 코믹한 아이러니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실제로 인간은 사랑에 빠지면 3쌍의 연인들 그리고 티타니아와 바틈처럼 맹목적으로 상대방만 보게 된다.   이와 관련된 사실을 입증할 수 있는 재미난 실험을 소개하자면 이미 연인이 있는 사람들에게 매력적인 이성의 사진을 보여준 후 주의력을 테스트한 결과, 대부분 주의력에 흐트러짐이 없는 것으로 나타난 것이다. 한참 사랑에 빠져 온통 상대방의 생각뿐인 사람들은 멋진 이성을 보고도 대부분 한눈을 팔지 않는다는 것을 실험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오비디우스의 표현대로 한 번 지핀 불씨가 겊잡을 수 없을 정도로 활활 타오르듯이 사랑 역시 심장 속에서 타오르기 시작하면 스스로도 주체할 수 없는 힘을 가진 감정이다.





  '사랑' 판타지의 마력

하룻밤 사이에 일어난 해프닝이었지만, 희곡 속에서는 모두가 결국 자신의 짝을 바로 찾는 것으로 결론지어진다. 마법을 사용한 유혹은 결국 일탈이자 공상으로 끝난다는 교훈도 덧붙여서 말이다. 작품 말미에서 소동의 장본인인 퍽은 익살스럽게 관객들의 양해를 구하고 있다.  

 

저희 그림자들이 언짢으셨다면 / 이러한 영상들이 보였을 때 / 잠들어 있었을 뿐이라고 /  

생각만 고치시면 다 괜찮죠. / 그리고 가볍고 시시하며 꿈처럼 헛것 같은 이 주제를  

나무라지 마십시오.  여러분.  / 용서해 주시면 잘해보겠습니다.   

- 5막 1장 중에서, pp 110 -

 

셰익스피어만의 유머가 묻어나 있는 희곡답게 결말 역시 유머스럽고 재치가 있다.  희곡 속 인물들만 마법의 장난에 농락당한 것이 아니라 텍스트 또는 연극을 보고 있는 독자/관객들 역시 지금까지 지켜본 사건들이 그저 작품 속의 한여름 밤의 꿈인지 아니면 셰익스피어의 만들어낸 판타지인지 분간이 가지 않을 정도로 혼동하게 만들어버렸다.   어쩌면 지금까지도 <한여름 밤의 꿈>이 널리 읽혀지고 자주 무대에 오르는 이유가 셰익스피어가 만들어낸 사랑 판타지의 마력이 현대인들의 감성을 지배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한여름 밤의 꿈>에서 펼쳐치는 사랑의 판타지들은 어떤 이들에게는 여름날 밤에 이루어졌던 꿈 같은 사랑의 추억을 상기시켜주기도 한다.  비록 한낱 꿈으로 남게 되지만 허미아와 라이샌더처럼 더욱 해피엔드로 끝날 사랑의 결실이 맺어질 것이라 기대하면서 말이다.  이것이야말로 셰익스피어가 만들어낸 판타지의 마력인 것이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stella.K 2011-09-04 1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우, 올핸 시루스님 세익스피어를 올킬하실 모양이시군요!
좋습니다.^^

cyrus 2011-09-05 16:22   좋아요 0 | URL
이 계획이 과연 언제 끝날까요? ㅎㅎ
아마도 내년까지 갈거 같네요 ^^;;
 
영혼의 역사 - 그리스 신화와 철학으로 보는
장영란 지음 / 글항아리 / 2010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현대인들에게 '영혼' 이란...? 

우리는 영혼을 잃어버린 시대를 살고 있다.  엄밀히 말하자면 오늘날 현대인에게는 '영혼' 이라는 개념 자체가 낯설 수 있다.   

- <그리스 신화와 철학으로 보는 영혼의 역사> 장영란, 글항아리. pp 7 -

 

'영혼'   우리가 살아가는데 귀에 들리는 익숙한 단어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정작 그 의미를 제대로 아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다.   최첨단 과학기술과 정보가 흘러넘치는 이 시대에 '영혼' 을 들먹거린다는 자체가 어떻게 보면 시대에 뛰떨어진 추상적인 관념을 논하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영혼' 이라고 하면 단지 죽은 사람의 넋이라는 일반적의 의미로만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렇다보니 '영혼' 이 귀신과 같은 초자연적인 의미에만 국한되기도 한다.     

그러나 현대인들은 간혹 '영혼을 팔아서 OO를 이루겠다.' , ' 혼란스러운 세상으로 인해 병든 도시인의 영혼들' 이라는 식으로 이 '영혼' 이라는 단어를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많이 사용하고 있다.   여기서 사용되는 '영혼' 은 그저 죽은 사람의 넋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 살아가면서 형성되는 모든 정신활동을 함축적으로 의미하고 있다.  그래서 '영혼' 의 의미를 좀 더 확장시켜나간다면 '마음' 또는 '정신' 을 뜻하는 것이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병든 영혼' 이라고 비유할 정도로 현대인의 정신은 그야말로 피폐해져만가고 신체 질환 못지 않게 마음과 정신의 병을 죽을 때까지 달고 살아가기도 한다. 아무리 시대가 좋아진다고 하더라도 남녀노소 우울증에 시달리는 사람을 높아지고 있으며 정신적인 고통을 견뎌내지 못해 자살을 선택하는 사람들 계속 증가하고 있는 추세이다.  

무엇이 현대인들의 '영혼' 을 병들게 하고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일까?  정신상담 관련 카운셀러나 전문의들은 대체적으로 현대인의 삶을 둘러싸고 있는 사회적 환경이 현대인들의 정신에 큰 영향을 미치는 일차적인 원인으로 보고 있지만 우울증 문제는 단지 사회 구조의 문제로만 치부하기에는 좁은 발상이며 실질적으로 우울증을 치료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하는데 한계가 따른다.    

 

<그리스 신화와 철학으로 보는 영혼의 역사>를 쓴 그리스 신화 및 고대철학 전문가인 저자는 현대인들의 피폐한 삶을 치유할 수 있는 중요한 단초를 고대 그리스로 대표되는 고대인들의 영혼 개념에서 찾고 있다.    시간을 거꾸로 되돌림으로써 잃어버린 현대인들의 영혼을 고대의 선조들이 남긴 지혜, 즉 그리스 신화와 철학을 통해서 환기시키고 있는 것이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생각한 영혼의 개념  

'영혼' 은 '숨쉬다' 라는 말을 뜻하는 그리스어 psycho에서 유래되었다.  오늘날에는 '정신' 과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어지고 있지만 영혼의 기능이 정신적인 의미로 자리잡는 데에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으며 똑부러지게 한 가지의 의미로 특정짓기보다는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었다.   

'영혼' 이라는 단어를 처음으로 제시한 호메로스<일리아드><오뒷세이아>를 통해 다양한 표현으로 영혼의 기능을 설명해주었지만 매우 한정적인 의미만 지니고 있었을 뿐이었다.  영혼의 어원이 '숨쉬다' 라는 말에서 유래되었듯이 그저 죽은 자들에게만 사용되는 단어였으며 살아 숨쉬고 있는 사람과는 상관없는 것이었다.   즉, 신체에서 영혼이 빠져나가는 것은 바로 죽음이며 그것은 인간이라고 불릴 수 없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지금까지도 현존하고 있는 호메로스가 남긴 문헌들, <일리아드>와 <오뒷세이아>를 보게 되면 영혼을 생명의 원리로서 본절적 특성을 부여한 표현도 있지만 호메로스는 영혼의 본질적 의미에 심도있게 생각해보지 않았다.   

그러다가 그리스 철학이 등장함으로써 본격적으로 영혼의 개념이 철학적 사유로 분석되어지기 시작하게 된다.   밀레토스 학파의 시조인 탈레스는 모든 만물에는 그 자체 속에 생명을 갖추고 있다는 물활론을 확립하여 영혼을 통해서 만물이 스스로 운동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후에도 초기 고대 그리스 자연철학자들은 각기 다른 영혼의 개념을 내세우게 되었는데 아낙시메네스 는 우주를 둘러싸고 있는 공기야말로 영혼이라고 생각했으며  헤라클레이토스는 영혼 개념에 '인식' 능력을 덧붙였다.   

  

 

  오르페우스교 & 피타고라스 학파 : 영혼의 불멸성에 대한 두 학파의 입장 

영혼의 개념이 확립되면서 고대 그리스인들은 영혼의 불멸성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끊임없이 생성, 소멸하는 자연의 변화를 관찰하면서 자연히 인간의 신체가 죽음으로 소멸해도 영혼은 다른 신체에 들어가 윤회하게 된다고 여겼다.      

  

 

 카미유 코로 <오르페우스와 에우뤼디케>  1861년  

오르페우스는 아내 에우뤼디케가 있는 지하세계 하데스로 내려간다. 그곳에서 그는 뛰어난 리라 솜씨로 스튁스 강의 뱃사공 카론과 괴물 케베스(케로베로스), 하데스와 페르세포네까지 감동시켜 에우뤼디케의 영혼을 데리고 갈 것을 허락받는다.  그러나 오르페우스는 아무도 보아서는 안 된다는 지하세계의 법칙을 어겼고, 결국 아내의 영혼을 헤르메스에 의해 이끌려 되돌아갔다.  오르페우스는 그녀 무덤 앞에서 슬픔을 감출 수 밖에 없었다.  

- 같은 책, pp 256 -

 

죽은 아내 에우뤼디케를 데려오기 위해서 죽은 자들만 갈 수 있는 지옥 세계에 도달한 그리스 신화 속 최고의 리라 연주가 오르페우스가 창시한 것으로 알려진 오르페우스교는 언젠가는 죽게 마련인 육체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 인간의 영혼이 영적 존재로서 불멸의 행복을 얻는데 목표를 두고 있다.   영적 불멸의 행복을 얻기 위해서는 엄격한 수행이 요구되는데 육식을 금하고 채식을 권장하는 것이다.    

수학 시간에 배우게 되는 '피타고라스의 정리' 로 유명한 고대 그리스의 수학자이자 철학자인 피타고라스의 사상을 주축으로 형성된 피타고라스 학파는 전생과 윤회를 믿었다.  그래서 피타고라스 학파에 가입된 학자나 사람들은 육식과 동물 살생을 금기시하였는데 인간의 영혼이 완전하게 정화될 때까지 다른 생물로 형체를 바꾸며 다시 태어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플라톤 : 영혼의 본성을 인식하기 위한 일상적인 방법  

플라톤은 시간과 더불어 변하는 일 없이 동일한 것으로서 머무는 영원불변한 형상, 즉 이데아(Idea)를 영혼의 눈으로만 볼 수 있다고 봤다.  그리고 진실한 존재로서의 이데아를 추구하기 위해서는  영원불멸한 진리를 인식해야한다고 주장하였다.   

스승인 소크라테스의 재판 이후 비극작가로의 꿈을 접고 철학의 길로 들어선 플라톤은 그가 살아가는 초라하고 부적절한 세계보다는 마음속으로 더 순수하고 더 확실한 미래를 꿈꾸는 이상주의자였다. 플라톤에게 있어 영혼은 육체보다 완벽하며, 이데아는 육체나 영혼보다 더 완벽하였다. 그에게는 배움마저도 태어나기 전부터 비자연적인 존재로부터 배웠던 것을 ‘상기’해 내는 것이었다.    

플라톤은 자신의 삶을 음미하는 행위 자체를 곧 자신의 영혼에 대해서 주의 깊게 성찰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영혼을 성찰하고 돌보기 위한 일상적인 행위로서 플라톤이 제시한 방법은 바로 '글쓰기' 다.  그러나 문자 자체로서의 의미만 파악한 채 정작 참된 의미의 지혜를 기억하지 않는 글쓰기 행위를 경계하였고 인간이 문자를 배워 글쓰기에만 신뢰한다면 지혜의 기억에 무관심해져 영혼이 더 쉽게 망각될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단 한 편의 저서를 남기지 않았던 스승인 소크라테스와는 반대로 대화편을 남긴 우리가 알고 있는 플라톤의 모습과 상반되는 사실이다.  

 

 

  에피쿠로스 학파 vs 스토아 학파 : 영혼의 병을 치유할 수 있는 실천적 방법

고대 헬레니즘 시대에 형성된 에피쿠로스 학파와 스토아 학파는 공통적으로 영혼의 병을 치유할 수 있는 실천적 문제를 제시하고 있다.   에피쿠로스 학파는 쾌락이 인생의 최고 목표이며 행복한 삶은 최대의 쾌락과 최소의 고통을 의미한다고 가르친 반면, 스토아 학파는 행복을 정신과 영혼의 안정에서 찾았으며 욕망을 버리는 금욕주의를 행복을 달성하는 실천 윤리로 제시했다.  

에피쿠로스는 쾌락을 옹호하면서도 그것을 동적 쾌락과 정적 쾌락, 두 가지로 분류했다. 전자는 욕구를 만족시킴으로써 형성되는 쾌락(아포니아, aponia)이다. 후자는 욕구가 충족된 뒤 더는 그것을 느끼지 않는, 그야말로 영혼이 동요되지 않는 평정한 마음 상태의 쾌락(아타락시아, ataraxia)이다.  에피쿠로스는 그러한 감각적이며 순간적 쾌락으로 대표되는 아포니아를 부정하고, 지속적이고 정신적인 쾌락인 아타락시아를 역설하여 쾌락의 질적 구별을 인정하였다.  에피쿠로스가 정적 쾌락을 중시한 것은 욕구의 충족보다는 그것의 제거가 인간의 고통을 벗어날 수 있는 행복의 관건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쾌락을 최대화하고 고통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는 죽음과 신들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죽음과 신에 대한 인간의 관심이 곧 불멸에 대한 욕망을 불러일으킨다고 생각했다.    

 

 

자크 루이 다비드 <세네카의 죽음>  1773년 

여느 스토아 철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세네카도 자기 자신을 돌보는 삶은 자연에 일치하여 살아가는 삶이라고 말한다.  그는 스스로 세속에 물들면서도, 끝내 인간이 인간다운 까닭은 올바른 이성을 갖췄기 때문이며 유일의 선(善)인 덕(德)을 목적으로 행동하기 때문이라고 역설했다.  (중략) 

- 같은 책, pp 493 -

 

반대로 스토파 학파와 같은 경우에는 삶을 적극적으로 살면서도 괴로움에 빠지지 않고 내면의 평화를 유지하는 방법으로 쾌락에도 고통에도 무감각한 부동심의 마음을 강조했다.  변화무쌍한 운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휘둘리지 않으려면 '이성' 에 따름으로써 분노, 슬픔 따위 감정의상태에서 벗어나 자신을 최선의 상태로 유지할 수 있는 자기보존 능력이 필요하다.   현재의 상황에만 집착하지 말고 미래에 일어나게 될 상황들을 예측하고 상상함으로써 미리 영혼의 준비를 하는 훈련을 할 것을 강조하였다. 

    

 

  고대인들의 지혜를 통한 잃어버린 영혼 되찾기  

고대 그리스 신화나 철학에서 언급되는 있는 '영혼'의 의미들은 수많은 세월이 지난 오늘날의 입장에서 보기에는 너무나 단순하면서도 관념적이다.    하지만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영혼' 의 의미보다는 한층 더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논어> 위정편에 '온고지신'(新)이라는 구절이 있다.  옛 것을 배움으로써 새로운 것을 알 수 있다는 뜻이다.   오랜 세월의 풍파를 뛰어넘어 오늘날에도 현존하고 있는 고대 그리스인들이 남긴 영혼에 대한 탐구의 결과물들 중에는 오늘날에도 현대인들의 삶에 적용할 수 있는 유용한 내용도 있다.  

자신의 삶, 즉 영혼 그 자체를 스스로 반성하고 성찰할 수 있는 일상적이면서도 가장 쉬운 방법이 글쓰기임을 플라톤은 제시하였고, 에피쿠로스는 죽음에 대한 지나친 두려움이 곧 삶의 욕망으로 발전하여 자신 스스로 영혼을 병들게 한다고 봤다.    즉, 고대인의 지혜가 함축된 철학을 배움으로써 단순히 진리를 인식하도록 도와줄 뿐 아니라 일상적 삶 속에서 실천할 수 있도록 삶의 방식을 변화시키기도 한다.   

하루하루 살아갈수록 더욱 고달퍼지고 퍽퍽해져나가는 세상 속에서 영혼이 병들지 않기 위해서는 굳이 비용을 부담하면서까지 상담 카운셀러와 전문의를 만나는 것보다는 자신 스스로 문제점을 파악해보고 이를 해결해나가 수 있는 영적 훈련을 해보는 것도 좋을듯하다.  

플라톤의 스승이 델포이 신전 현관 기둥에 새겨진 문구를 보고 이런 말을 하지 않았는가.   

 ' 너 자신을 알라'

 


댓글(4)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yamoo 2011-09-01 16: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어요^^ 아, 근데...진짜..무엇이 현대인들의 '영혼' 을 병들게 하고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일까요? 정말 궁금해요...저 책에는 나와있지 않은가요??

나 자신을 알면 병든 영혼을 치유할 수 있을지...근데, 이거...넘 어려운거 아닌지...ㅜㅜ

cyrus 2011-09-02 23:25   좋아요 0 | URL
제가 그 부분만큼은 글에서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네요.
자칫 읽는 분들이 오해할 수 있는 소지가 있겠습니다. ^^;;

참고로 이 책에서는 현대인들의 정신적인 병에 대한 원인은 상세하게
밝히지 않고 있답니다. 머리말에서 저자가 현대인들의 영혼을
치유하기 위한 단초로 고대인들의 신화나 철학 속에 등장하는
영혼 개념이라고 언급하고 있을 뿐입니다.

하지만 덧글로나마 글에 대해서 덧붙이자면..
현대인들이 정신적인 병에 생기는 이유가 스토아 학파가 주장한 것처럼
우리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삶에 대한 지나친 집착 때문에
자신 스스로 병들게하지 않았나 생각이 들어요.

사실 이 책의 내용이 어렵기는 해요. 플라톤의 철학에 대해서도
알고 있으면 읽는데 수월할거 같고요.. 저 같은 경우에는
에피쿠로스나 스토아 학파에 대해서 학창시절에 인상깊게 배운 적이
있어서 제가 최대한 소개할 수 있었던 내용이랍니다.

꽃도둑 2011-09-02 16: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이러스님, 안농안농! 잘 지내시죠? 아, 여전하네요.. 보기 좋아요..^^
정말 오랜만에 알라딘에 들어왔네요.
그냥 인사차 들렀어요.. 잊을만 하면 또 올게요.
몸, 마음, 정신, 영혼 모두모두 건강하게 지내세요~~

cyrus 2011-09-02 23:26   좋아요 0 | URL
정말 오랜만이네요. 꽃도둑님 ^^
잘 지내고 계시죠. 꽃도둑님도 건강하시고,, 제 생각이 나신다거나
심심하면 들려주세요 ^^
 
정신병과 심리학
미셸 푸코 지음, 박혜영 옮김 / 문학동네 / 2002년 6월
평점 :
품절


   

이성은 자신이 현명한 줄로 믿고 있었다.  그러나 이성은 미친 것이다. 이성은 자신이 알고 있다고 믿었지만, 실제로는 모르고 있는 것이다.  이성은 자신이 올바르고 믿었으나 실제로는 망상에 빠져 헛소리를 하고 있는 것이다.  

- 미셸 푸코 <정신병과 심리학> 중에서, pp 136 -

 

 

  젊은 푸코의 '광기' 에 대한 풋풋한(?) 학문적 탐구     

인간의 광기는 흔히 정상적인 것과는 대칭에 선 비정상의 개념쯤으로 통한다. 우울증과 죽음, 욕망, 폭력, 비판과 같은 광기의 양상은 위험하고 혐오되야 할 가치로 여겨지기 일쑤다. 그래서  광기는 정치와 철학, 역사의 범주에선 늘상 배제되고 억압받곤 한다. 그러면 광기는 정말 비정상적이고 배척해야만 할 주제일까.    

이성의 광기에 대한 배제와 억압의 역사를 담은 미셸 푸코의 <광기의 역사>를 읽다가 독서 진도가 나아가지가 않아서 <광기의 역사>가 출간되기 전에 쓰여진 <정신병과 심리학>을 겸하여 읽게 되었다. 

푸코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광기의 역사>는 1961년에 발간되었는데 대부분 사람들은 <광기의 역사>가 푸코라는 이름을 세상에 널리 알려준 처녀작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나 역시 <광기의 역사>를 읽기 전에는 그저 '푸코' 라는 이름만 알고 있었던 터라 <광기의 역사>가 푸코의 처녀작인줄 알았다.    <정신병과 심리학>은 1954년에 푸코가 심리학과 조교수로 역임된 후 처음으로 자신의 이름으로 출간된 공식 저작물이다.   으레 푸코라고 하면 철학자라고 떠올리기 쉬운데 그가 처음으로 대학 강단에 오르면서 전공했던 학문이 심리학이다.  전통적인 철학의 학문적 범위에만 한정하지 않는 그의 광범위한 지식 편력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책의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정신병과 심리학>에는 심리학을 통한 정신병에 대한 탐구에 대해서 논하고 있다.    이 책은 총 2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1부는 심리학적 시각에서 바라보는 정신병에 대해서 프로이트의 이론 등과 같은 다양한 심리학 이론 등을 논지로 끌어들여 설명하고 있으며 2부에는 광기의 사회문화적 관계를 역사적으로 고찰하고 있다.    

1부는 심리학적 용어가 많이 언급되는데 사실 심리학적 지식이 빈약한 편이라 굳이 1부를 읽지 않았다. 나 같은 경우에는 <광기의 역사>를 읽고 있는 상황이라  '광기' 에 대해서 논하고 있는 2부만 따로 발췌해서 읽었다.

700여페이지나 되는 <광기의 역사>를 완독한 것은 아니지만 <정신병과 심리학> 2부는 훗날 <광기의 역사>로 집대성하기 전. '광기'에 대해서 연구하고 있는 젊은 푸코의 풋풋한(?) 학문적 탐구를 볼 수 있었다.   <정신병과 심리학> 2부 '광기와 문화'가 푸코 사상의 청소년기라고 한다면 <광기의 역사>는 사상의 범위가 한층 더 광범위해지고 성숙되어진 청년기인 것이다.  

 

 

  서구문화적 관점이 만들어낸 광기의 정의

푸코는 하나의 사회집단 속에서 특정 개인이 '정신병 환자' 로 간주될 수 있는 원인을 프랑스의 사회학자 에밀 뒤르켐과 미국의 인류학자 루스 베네딕트의 분석에서 찾고 있다.   

뒤르켐은 '사회' 를 정치체계, 가족체계 및 그 밖의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다양한 체계 등 여러 부분이 합성된 하나의 실체로 보고 있다.  즉, 사회 그 자체는 하나의 동일한 실체를 가지고 있으며 사회의 특징을 부분으로 한정지어서 파악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사회학이라는 학문에서 과학적 조사를 실시한 최초의 사회학자이다.  그는 통계적인 자료를 체계적으로 수집하여 이를 근거로 이론을 제시하였다.  사회집단에 속한 사회 구성원들은 유기적 연대를 강화하는데  구성원의 행위를 규제하는 공통의 가치나 도덕적 규범이 형성하게 된다.  그러나 구성원의 욕구나 행위가 무규제 상태로 사회 내 도덕적 규범의 가치가 상실된다면 그 현상은 일탈 행동으로 보게 된다.     이를 푸코는 통계학적 시각의 관점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테오도르 제리코 <미친 여인>  1822년 

 

우리 사회는 사회가 추방하거나 감금하는 정신적 환자 속에서 자신을 알아보기를 원치 않을 것이다.  우리 사회는 질환을 진단하는 바로 그 순간, 환자를 축출한다.   

- 2부 광기와 문화 서론, pp 110 -

 

그리고 루스 베네딕트와 같은 미국 심리학자들의 관점 역시 뒤르켐의 통계학적 관점의 내용과 다르지 않다고 설명하고 있다.   

아프리카와 같은 원시성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원주민 집단은 대체로 옷을 입지 않은 채 벌거벗은 상태이며 신발 역시 신지 않은 채 맨발로 생활한다.  그런 사회적 집단을 이루고 있는 50명의 원주민 중에서 단 한 명만이 옷을 입고 신발을 신는다고 가정해보자.   평소에 벌거벗고 맨발로 다녔던 원주민들에게는 옷과 신발로 무장한 그 원주민이 무척 낯설게 느껴지며 그동한 자신들이 생활했던 행동과는 전혀 다른 광경이다.   실오라기 걸치지 않는 원주민 집단의 고정된 문화적 유형에서 배제되는 행위이며 이는 곧 사회집단 내에서는 부정적으로 인식하게 된다.  

결국 푸코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뒤르켐과 베네딕트의 분석과 같은 서구문화적 관점에는 공통적으로 사회 구성원이 공유하고 있는 문화양식, 도덕적 규범 등에 위반되는 행위는 비정상적, 또는 정신병자로 간주되어진다는 점이다.   

 

 

  광기의 역사   

 

피터르 브뤼헐 <죽음의 승리>  1562년경  

 

15세기 말은 확실히 광기가 언어의 본질적 힘과 다시 관계를 맺게 된 세기들 중 하나다. 고딕 시대의 마지막 징표들은 차례차례, 그리고 연속적으로 죽음과 광기에 대한 강박관념에 지배받았다.  죄없는 자들의 묘지에 그려진 '죽음의 무도'(Dance macabre), 피사의 캄포 산토 벽에 새겨진 '즉음의 승리' 가 그것이다.  그리고 또 그 당시에는 광인들의 수많은 춤과 축제가 있었다.  르네상스 시대에는 유럽이 그렇게 기꺼이 기념하던 광인 춤과 광인 축제가 존재했다.  

- 5장 정신질환과 역사적 형성 중에서, pp 116~117 -  

  

2부 '광기와 문화' 에는 <광기의 역사>에서 다루어지게 되는 광기라는 단어가 형성되어지는 역사를 간략하게 소개하고 있다.     

오늘날에는 광기는 일반인들에게는 혐오스러운 '비정상적' 행위이지만 15세기 때만 해도 어느 곳에나 광인은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있었으며 광인의 심리에 대한 저작물도 출판될 정도로 그 당시 대중들에게 광기는 친숙한 주제였다.   광기는 특정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이가 자유롭게 논할 수 있는 사회학적 대상이었다.

 

 

 윌리엄 호가스 <연작 '탕아의 편력' - 정신병원에서>  1732~1735년    

 

가난한 불구자들, 빈곤층 노인들, 고집 센 실업자들, 성병 환자들, 온갖 유형의 방탕아들, 가족이나 왕권이 가하는 공식 처벌을 기피하는 자들    (중략)     간단히 말해서 이성, 윤리 그리고 사회 질서에 비추어 볼 때, '문란' 의 신호를 보이는 모든 자들을 이 강제수용소에 감금했다.  

- 5장 정신질환과 역사적 형성 중에서, pp 119~120 -  

 

그러나 17세기에 들어서면서 광기에 대한 대중의 인식에 큰 변화가 찾아오게 된다.   

광인들을 수용하기 위한 강제수용소가 생기게 되면서 광기는  개인적인 문제의 대상으로 그 범위가 변형되었다.   그리고 '광인' 에 포함되는 대상은 단순히 정신질환자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17세기의 강제수용소는 단순히 의학적으로 정신병에 걸린 환자들을 수용하는 의학적인 목적으로 설립된 것이 아니다. 사회 생산에 참여하지 못하는 가난한 부랑자에서부터 사회 질서에 어긋나고 부도덕적인 범죄자들까지 사회에서 인정될 수 없는 비이성적이면서도 비정상적인 사람들을 강제수용소에 감금했다.    강제수용소의 탄생은 사회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이성' 을 통용하는 권력집단의 사회적 통제 수단에서 비롯된 것이다.  

비이성을 감금하고, 광기라는 낙인을 붙여 치료의 대상으로 전환시킨 것은 심리학과 정신병리학이 등장한 근대 이후부터다.  그러나 사회적 일탈과 범죄 행위로 결부되는 광기의 시선은 변함없었다.

     

 

  광기 그리고 정신병에 대한 편견을 깨자

광기에 대한 편견의 출발점은 사회적 소수자와 그 대척점에 있는 기득권자들의 평가의 기준이 다르다는 것에 있다. 인간의 역사에서 후자만이 그 기준을 정하고 평가함으로써 비극을 낳고 꾸준히 계속되고 있다.  이성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광기에 대한 편견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배척과 소외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보이지 않는 힘으로 작용하고 있다.   

예컨대 당연히 가져야 할 교육과 직업을 얻을 기회를 빼앗아 놓고 장애인을 사회적 무능력자로 낙인찍어 사회로부터 보호가 필요하거나 격리의 대상으로 삶을 규정해버리거나 동성애를 혐오스러운 병균체로 사회를 오염시키거나 격리가 필요한 정신병으로 치부하는 등의 사회적 판단이 여전히 사회에서 당연시되고 있다.

정신병에 대한 잘못된 인식은 사회, 문화적으로 여러 요인이 있지만, 영화나 언론매체에서의 정신과 환자에 대한 왜곡된 묘사 때문이다. 사람들은 '미친다'는 것에 대해 두려움과 호기심을 동시에 갖고 있으며,영화나 언론은 일반인의 관심을 끌기 위해 그것을 이용한다.   그리고 실제 정신병을 앓는 사람은 일반인보다 사건, 사고를 일으키는 확률이 높지 않은데도, 확실히 밝혀지지 않은 사건을 정신병 환자의 소행으로 모는 것은 그렇지 않아도 편견으로 음지에서 고통받는 환자와 그 가족들에게 또 한번의 고통을 준다.   

이제 정신병도 약으로 치료할 수 있으며, 정신병은 더 이상 숨길 병도 아니다. 다른 질병처럼 주위 사람과 상의하고 감기를 치료하듯 스스럼없이 병원도 다닐 수 있어야 한다.  그러려면 정신병에 대한 사회적 통념이 바뀌어야 한다. 이는 의료인들이 더 노력하고 연구할 문제이지만, 의료시스템을 포함한 사회제도적 측면에서도 많은 보완이 필요하다.  


 


댓글(18)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책을사랑하는현맘 2011-08-26 23: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찌 사람의 상태를 둘로 나눌 수 있을까요... 살다보면 스스로 정상이 아니라고 느껴질 때가 많거든요. 광기와 정상을 오가는 삶이랄까요.

cyrus 2011-08-27 13:11   좋아요 0 | URL
푸코가 이성의 헛점을 지적했듯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모든 사람들도
그런 착각 속에 살고 있지 않나 생각이 들어요.

비로그인 2011-08-26 23: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읽었던 기억을 더듬으면 푸코의 <광기의 역사> 는 흥미진진하게 시작하다가 읽는 속도가 조금 느려지다가 다시 빨라졌던 것 같습니다. 제게는 서양의 역사를 다시 보게 만드는 책이자 현대 사회에 대한 진지한 물음을 던져준 책으로 도서관에서만 보다가 돈벌고 나서 거의 처음으로 구입하게 된 책인 듯 싶네요 ^^

푸코에 말한 판옵티콘의 구조를 갖고 있는 학교, 병원, 감옥과 그것이 만들어내는 사회 시스템에 대한 경고는 앞으로 더 중요하게 다뤄져야 할 문제가 아닐까 싶습니다.

cyrus 2011-08-27 13:13   좋아요 0 | URL
맞아요, 읽을 때 각 내용마다 속도가 달랐던거 같아요. 처음에
광인의 배에 대한 내용 때는 좀 흥미진진했었는데 그 뒤로는 진도가
잘 안 나갔어요. 그래서 좀 얇은 분량의 푸코의 글을 읽게 되었는데
절반 정도는 이해할 수 있었어요, 책의 1부는 너무 어려웠고요. ^^;;

2011-08-27 10: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8-27 13: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녀고양이 2011-08-27 10: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두려움 때문 아닐까요? 자신과 다른 사람에 대한...

얼마 전 버스에서 한 아이를 봤는데, 자리에 앉더니 머리를 앞뒤로 크게 흔들더군요.
몸을 감싸안고 박자에 맞추어 흔들흔들. 사람들이 다 그 아이를 보더군요. 그런데
한눈에 그 아이가 자폐증 증상을 보이고 있다는 것과 자폐증이 어떤 유형이라는 것을
떠올리고 나니 무섭지 않더라구요.

아마 아이는 버스에서 자신의 불안을 견디고 어디론가 가고 있는 중인거 같았거든요.
대견한거죠.

광기에서 많은 기적들이 나타나기도 한다죠. 천재와 광기는 종이 한장 차이기도 하고.
결국 관용의 문제인데, 현 사회는 관용과 여유를 부리기에는 다들 너무 빡빡한거 같아 슬퍼요... ㅠ

cyrus 2011-08-27 13:21   좋아요 0 | URL
마고님 말씀대로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푸코의 삶을 완전히 알고 있는 건 아니지만 푸코가 학창 시절에
정신 발작을 경험했고 동성애자였다네요.
제가 읽은 <정신병과 심리학> 역자 후기에는 왜 푸코가
광기와 성이라는 주제의 연구에 매달렸는지 이애할 수 있었어요.
사회 내에 암묵적으로 용인되어 온 감시와 처벌, 그리고
광기와 이성으로 구분짓는 경계 때문에 고뇌하고 이를
극복하지 않았나 생각이 듭니다.

마녀고양이 2011-08-27 13:26   좋아요 0 | URL
심리학이든 철학이든
자신의 경험이 반영되었다 하잖아요. 그리고 특히 심리학은
문명화(?)된 사회에서는 적용 가능하지만, 원시 부족에게는 적용하기 어렵다는 말에... 그렇구나 싶어집니다.

아래 <지나가는 이>님의 댓글로 인해 생각이 많아져버렸어요.
지금 팽팽 돌아가는 중이예요,, 아하하.

cyrus 2011-08-27 13:33   좋아요 0 | URL
저의 부족한 글 때문에 괜히 마고님 머리 아프게 만들었네요 ^^;;


2011-08-27 13: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8-27 13: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8-27 14: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yamoo 2011-08-27 23:09   좋아요 0 | URL
푸코가 에이즈땜시 사망했다죠..

지나가는이 2011-08-27 12: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흥미롭네요. 제가 알기에는 푸코가 제시한 문제제기는 설명할 수 없는 타자를 자폐증으로 재단하는 지식권력의 문제인데요. 이걸 관용이나 사회적 통념 또는 제도적 변화로 해결하자는 것은 정신병을 생산한 지식권력을 내재화시키는 것이 아닐까요? 푸코가 가장 비판할만한 답변일 듯 싶은데요......

cyrus 2011-08-27 13:30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제 글의 오류를 지적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시 읽어보니깐 정말 앞뒤가 맞지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이제 막 푸코의 사상을 접한 것이라 제가 그 부분에 대해서
오류를 범했네요. 푸코를 읽은게 <정신병과 심리학> 그리고
현재 읽고 있는 중인 <광기의 역사>뿐이랍니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맨땅에 헤딩하는 격으로 푸코의 사상적 특징의 기본을
이해하지 못한 채 그저 텍스트에 접근하고 있는 식이라
아직은 제가 모르는 부분이 많습니다. 님이 언급하셨던 부분은
푸코의 사상을 읽는데 꼭 명심해야할 내용으로 기억하겠습니다.
좋은 내용의 댓글 남겨주셔서 다시 한 번 감사드리고,
좋은 주말 되셨으면 합니다. ^^

2011-08-27 23: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8-30 17: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도가니 - 공지영 장편소설
공지영 지음 / 창비 / 2009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돌아서면 가로막는 낮은 목소리
바람이여 안개를 걷어 가다오 
아~아~ 그 정의는 어디에
아~아~ 그 정의는 어디에
 

- 정훈희의 노래 <안개>의 가사를 개사함 -

 

 

  너무나 어둡기만한 공지영의 안개

무진(霧津).  우리말로 풀어보면 '안개 나루터' 정도라고 말할 수 있다.  문학을 좋아하고 즐겨 읽는 독자라면 '무진' 이라고 하면 자연스럽게 김승옥 작가의 <무진기행>을 떠올릴 것이다. 서울 생활에서 상처받은 인물이 남쪽 고향인 무진에 와서 겪는 에피소드를 통해 삶의 여러 면모를 성찰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한 때 민주화운동의 성지로 불렸던 무진은 안개로 덮여 있다.  '감수성의 혁명' 이라는 별명답게 김승옥 작가는 '이승에 한(恨)이 있어서 매일 밤 찾아오는 여귀(女鬼)가 뿜어 내놓은 입김' 이라고 음습하면서도 멋드러지게 표현하고 있다.   문학과 예술에서의 안개의 이미지는 어둠, 억압, 소통 불능, 희망 없음 정도 등의 부정적인 이미지가 강하다.  

역시 '무진' 이라는 지명을 무대로 한 공지영의 <도가니> 역시 안개의 부정적인 이미지가 딱 들어맞는다.  그러나 김승옥이 바라본 무진의 안개와는 분위기가 전혀 다르다.   김승옥의 안개는 몽환적이라고 한다면 공지영이 본 무진의 안개는 런던의 스모그 못지 않게 너무 불투명하면서도 어둡기만 하다.     당최 희망이라는 것이 보이지도 않는다.

   

 

  우리 사회에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 악의 카르텔

장애인 학교 '자애 학원' 내에서 실제로 발생했던 성폭행 사건을 토대로 구성한 소설은 세상에 만천하에 공개된 사건 실체의 내막 자체가 소설을 읽는 독자에게는 충격적일 수 밖에 없다. 그러나 더 충격적인 점은 이 불행한 사건이 전혀 공권력의 힘이나 지역사회 상식의 힘으로 해결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지역 인권단체에서 교장의 파렴치한 장애 학생 사실을 고발하지만 무진경철서 형사, 시교육청 장학사, 시청 담당 공무원, 판 검사 하물며 영광제일교회 교인들, '무사모' 라는 무진을 사랑한다는 사람들이 만든 시민단체까지 철저히 담합을 형성하여 이 사건을 은폐시키는 데 일조한다.  지역사회의 기득권자라고 할 수 있는 인물들이 총동원되어 비리 주범인 자애학원의 이강석 교장을 무혐의받도록 하는 것이다.   마치 성벽처럼 견고하고 거대한 악의 담합 앞에서 인간의 양심은 보잘것없는 사치에 불과한 것인가?    작가의 머리에서 탄생된 순전히 허구적인 내용이라고 하면 모를까 실화를 토대로 구성한 진실적인 내용이기에 우라나라의 현실에 대해 탄식이 절로 흘러나올 수 밖에 없다.

문제는 무진에서 벌어지는 이 협잡과 타락의 추악한 풍경이 단지 소설 속의 가상공간을 넘어 우리 사회의 축소판이라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는데 있다.  점점 더 강자 중심으로 변해가는 권력 기득권자들의 담합과 약자들에 대한 억압, 정의의 실종과 같은 사회적 퇴행 현상이 무진에서 벌어지는 '악의 카르텔' 을 닮아가고 있다.  

 

 

  잘못된 사회가 괴물을 만든다 

 

 

" 죽다 살아난 세계적 사회지도층의 미소 " 

호텔 여종업원을 성폭행한 혐의로 수사를 받았던 도미니크 스트로스 칸 IMF 前 총재는 

법원으로부터 공소 기각 결정을 받아 무혐의로 풀려나게 되었다. 

(사진 출처: 로이터)

 

범죄도 대중의 관심에 따라 달라지는 세상에 무엇보다도 장애인은 언제나 가장 나약한 존재일 수밖에 없다. 유독 장애아의 성폭행에 관해선 둔감하고 가해자에 대한 처벌이 솜방망이인 사회에서 장애를 가진 당사자도 그렇지만 장애 아이를 키우거나 대한민국에서 딸을 키우는 부모로서는 늑대 굴에 어린 양을 풀어놓는 것과 다름없는 기분일 것이다.   

요즘에는 집 근처 평범한 이웃에서부터 사회적으로 지위를 누리는 사회지도층, 심지어 세계 경제를 주름잡는다던 IMF 총재까지 자신의 욕망을 주체하지 못하는 인간이 비이성적인 범죄를 저지르게 된다.     그리고 게중에 몇 몇 권력을 가진 자들은 자신이 일으킨 행위에 대해서 일말의 책임을 지지 않은채 법의 심판을 교묘하게 피하고 있다.  

검찰 조직의 집단적인 성 접대가 만천하에 알려져도, 경제 대통령이라는 사람도 무혐의 처분을 받는 나라와 세상에서 우리는 무엇을 바랄 수 있을까?  온갖 비리를 저지르고도 당당하기만 한 권력자들로 인해 상식적으로 용납해서는 안 되는 비인간적인 행위마저도 범죄가 안 되는 세상은 성경 속 소돔과 고모라 시대와 별반 다를게 없다.  

장애 소녀를 집단 성폭행하고도 멀쩡하게 학교에 다니는 그들에게 대한민국은 어떻게 보일까?  그리고 인면수심으로 가득한 어른으로부터 신체적 상처를 입은데다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충격적인 경험의 기억은 또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여성을 하나의 성적인 유희의 도구로만 생각하게 만드는 사회에서 그들이 배울 수 있는 것은 없다. 장애아에 대한 지원은 고사하고 그들이 억울한 범죄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는 것도 막아주지 못하는 대한민국에서 장애아로 살아간다는 것은 지옥과도 같을 것이다.  

소설 속에서 장애아들은 여전히 권리를 획득하지 못한 것으로 나와 있다. 소설 속에서 등장하는 인호는 불편한 진실을 간직하지만 그 진실 안으로 뛰어들지 않는다. 뛰어들어 해결하지 않으려 하는 진실은 결국에는 묻혀버리고 만다.   지금도 어디선가 제2, 제3의 자애학원 사건이 일어나고 있을지도 모른다.

최근에 공지영의 소설이 영화로 제작된다고 한다.  소설 발간 당시 그랬듯이 가을에 곧 개봉될 동명제목의 영화 역시 과연 소설 속 충격적인 내용을 어떻게 영상화가 될지 개봉 전부터 영화팬들 사이에서 많은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하지만 영화가 어떻게 잔인한 성폭행 장면을 묘사하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충격 요법형으로 현실의 치부를 그대로 알려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영화를 통해서 잘못된 사회에 대한 진지하고 절박한 고민으로 이어질 수 있느냐가 문제다.

세상은 감상으로 변하지 않는다. 제 자리에서 분노하고 공감만 한다고 해결되지 않는다. 변화와 문제의 시점을 파악하고 행동으로 옮겨야 비로소 변화의 실마리를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행동하지 않는 방관자의 무서운 침묵은 사회를 더욱 미쳐버리게 만들게 되며 괴물 같은 아이를 양산하고 그런 괴물들은 더욱 기괴한 모습으로 성장해 정의를 집어 삼켜버릴지도 모른다. 두렵고 무서운 사회를 방조하는 권력자들부터 변하지 않는 한 이 나라에는 희망의 햇빛 한 줄기 보이기는커녕 그저 어둡고 음습한 악(惡)과 거짓의 안개로만 가득할 것이다.

 


댓글(8)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맥거핀 2011-08-25 22: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첨부하신 것이 곧 개봉할 영화 포스터인가 보네요. 포스터 분위기 한번 으스스 합니다. 저는 소설은 읽지 않았는데, 영화로 개봉하게 되면 한 번 보려구 해요.^^

cyrus 2011-08-26 21:59   좋아요 0 | URL
9월에 영화가 개봉한다고 하네요, 맥거핀님은 영화를 즐겨 보시는 분이시니까
영화리뷰,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

blanca 2011-08-25 22: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특히 우리나라는 성범죄에 관대한 것 같아요. 특히 합의에 의해 처벌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도 오히려 유야무야 넘어가는 사태를 조장하는 것 같고요. 이 책은 읽어보지 못했지만 cyrus님의 리뷰를 읽으니 많은 생각거리를 던져 주네요.

cyrus 2011-08-26 22:02   좋아요 0 | URL
간혹 언론과 뉴스를 보게 되면 법전 내용의 형식에 너무 지우쳐서
분명 범죄 행위임에도 무죄나 가벼운 형량을 받은 사례를 보곤 해요.
성범죄만큼은 확실히 규제할 수 있는 형법의 도입이 필요한거 같아요.

비로그인 2011-08-26 2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영화.. 저도 자극적인 내용 묘사보다는 그 분위기와 생각할거리를 어떻게 던져주는가가 중요하다는 생각입니다. 그런데 한편 흥행이라는 면도 고려해야 할텐데, 과연 어떻게 될지.

영화로 만들어진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에서는 책에서 받은 느낌의 반밖에 되질 못했었는데 이 소설이 영화가 되어 보게 된다면.. 어떨까 싶습니다. cyrus님 덕분에 영화가 나오게 되는 걸 알았네요~

cyrus 2011-08-26 22:04   좋아요 0 | URL
예전 <우행시>가 성공했듯이 <도가니>도 블록버스터급 외국 영화가
개봉되지 않는 이상 흥행에 성공할 것이라고 생각해요.
게다가 소설 속 인호 역으로 공유입니다. 얼핏 <우행시>의 강동원이
생각나네요 ^^;;

책을사랑하는현맘 2011-08-26 23: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때론, 아니 자주 현실은 소설보다 더 무섭죠...제가 이 영화를 보게 될 가능성은 5% 정도일 것 같은데 보게 된다면 아마 공유때문일 것 같네요 ㅎㅎㅎ

cyrus 2011-08-27 14:05   좋아요 0 | URL
<도가니>가 흥행에 성공한다면 공유의 역할도 큰 비중이 있다고
봐야될 거 같아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