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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 / 구운몽 최인훈 전집 1
최인훈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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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의 굴욕?

 

문학작품이 특정한 역사적 사건이나 시대적 상황과 연관돼 독자들에게 오랫동안 기억되고 꾸준히 읽혀지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다. 그것은 역사적 사건 안에 담겨 있는 '시대정신', 즉 당시 사람들이 추구했던 가치와 고뇌를 온전하고 명료하게 표현했을 때에만 가능한 일이다. 특히 최인훈의 『광장』과 작품 속 주인공 이명훈이 분단시대에서 4.19혁명으로 나타난 역사적 전환기의 민족의 사상과 고뇌를 상징한다면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는 급격한 산업화의 물결 속에서 몰락해가는 도시 빈민들의 삶을 통해 70년대 경제성장의 사회상의 폐해를 고발했다. 두 작품의 공통점이 있다면 소설에서 묘사되고 있는 시대적 상황의 단면들이 발표된 지 수십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변함없이 유지되고 있다는 점이다. 『난쏘공』이 출간 30년 만에 통산 100만 부의 판매 기록이 세웠을 때 작가 조세희는 '현재 철거민의 삶은 30년 전이나 똑같다'고 말하면서 '30년 전에 나온 내 소설이 지금까지도 오랫동안 읽혀진다는 것 자체가 부끄러운 일이다'라고 냉담한 소감을 밟혔다. 3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사회로부터 소외받아야만 했던 '난장이의 꿈'은 아직도 이루어지지 못했던 것이다. 『광장』도 마찬가지다. 작가 최인훈은 여러 차례 개작 끝에 탄생된 수정본을 출간하게 된 이유를 『광장』의 역사적 시대의 산물이며 좀 더 문학성을 보강하여 후대 독자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마음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명준이 바다에 투신한 지 42년이 지난 지금도 분단의 대립은 여전하다.

 

최인훈의 『광장』도 문학 교과서에 많이 수록되고 지금까지도 수정본으로 나올 정도로  전후 한국 문학의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세희의 『난쏘공』에 비하면 대중의 인지도는 조금 낮은 편이다. 철거민 또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비참한 생활상이 조명되는 사회적 이슈가 거론될 때면 항상 연관되어 따라 언급되는 게 바로 조세희의『난쏘공』이다. 그런데 지금도 '분단국가'인데도 '분단 문학'의 인기는 그리 많지 않다. 5, 60년대 이데올로기의 대립이 뚜렷했던 사회상을 그려냈기에 오늘날 읽기에는 너무 케케묵은 소설이라는 인식 탓일까?  4.19 혁명이 일어나기 시작되는 시점에서 나온게『광장』인데 4.19 혁명을 기념하는 날에도 잘 언급되지 않는 정도면 문학적 평가에 비하면 상당히 굴욕적이다.『광장』은 수십년 전에 출간된 책치고는 50만 부를 넘을 정도로 스테디셀러라고 말해도 전혀 어색하지 않을 판매 기록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수능 세대를 거쳤던 기성 세대들이나 현재 수능 시험을 앞두고 있는 청소년들에게 『광장』은 역대 수능시험 지문 출제 작품이면서 모의고사에 심심찮게 만나게 되는 소설로만 기억되고 있을 뿐이다. 그저 문학 교과서에 수록되어 있는 작품으로만 남아 있는 것이다. 문학 시간에『광장』을 배웠던 사람들 중에서 텍스트 전체를 한 번이라도 끝까지 읽어본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있을지 궁금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젊은이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광장'과 '밀실'의 사회

 

한반도는 자유주의 이데올로기와 사회주의 이데올로기가 서로 경쟁하고 투쟁하는 세계적인 공간으로서의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불행하게도 지금도 갈등의 기억이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 일제 강점기부터 시작된 이데올로기 갈등은 해방 이후에 미국과 소련이 개입하면서 더욱 심화되었는데 이러한 체제 갈등과 경쟁 속에서 이데올로기는 개인의 자율성을 크게 훼손하기에 이른다. 이데올로기를 통해 기존 질서를 유지하고자 하는 흐름이나 반대로 이데올로기를 통해 또 다른 세계를 지향하던 세력이나 개인에게 폭력적으로 다가왔던 것에는 큰 차이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한 시대적 상황이 팽배하고 있었던 1960년, 때마침 이데올로기의 싸움에 지쳐버린 이명준이 등장하는 『광장』이 탄생하게 되었다.『광장』이 나올 수 있있던 이유는 바로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도 한몫했다. 소설은 4.19 혁명으로 드러난 의식의 전환과 시대정신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4.19 혁명은 사회적으로 민주주의의 가치를 확산시킴과 아울러 민족 통일의 염원을 각인시켰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기존의 정치세력들은 갑자기 폭발한 민중들의 자유의 에네르기를 제대로 추스르지 못했고 그 혼란을 틈타 군사독재가 등장함으로써 자유로운 사회의 탄생에 대한 민중들의 갈망은 끝내 '미완'으로 남아야만했다.

 

'자유'가 없는 사회에는 오직 '억압'과 '복종'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이명준은 남한과 북한 어디에도 진정한 인간의 삶을 충족시켜줄 수 없다는 인식하에 제3국을 선택하지만, 끝내 바다에서 자살하고 만다. 이명준은 '광장' 과 '밀실'로 구분되는 이데올로기의 시대가 만들어 낸 희생양이다. '광장'은 사회 구성원들이 공동의 이념을 추구하면서 바람직한 사회 건설을 위해 토론하고 실천하는 공적 공간이다. 반면, '밀실'은 개인이 삶의 행복을 추구하고 사랑을 나누며 자신의 역량을 키워나갈 수 있는 사적 공간이다.

 

아버지의 월북 이력이 문제가 되는 바람에 남한 사회는 이명준을 빨갱이로 몰아붙였고, 그는 이를 계기로 남한의 개인주의적이고 폐쇄된 밀실의 현실에 환멸을 느끼고 월북하기에 이른다. 그의 마음 속에는 '밀실' 속에서 사적 이익만을 탐닉하는 퇴락한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비판적 의식과,그와 동시에 '광장', 다시 말해 공동체를 지향하는 사회주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묘한 동경도 존재했다. 그러나 이명준의 눈에 비친 북한 사회는 활기차고 정의로운 공동체적인 '광장'이 아니라 명령과 복종만이 남아서 개인의 자율성이 크게 훼손되는 사회였다. 심지어 '사랑'마저도 허용되지 않은 통제사회였던 것이다. 이명준의 눈에 비친 남한과 북한은 모두 불구적인 사회다. 그가 원하는 사회의 모습은 바람직한 광장이 건재하되 밀실이 존중되는 것이다. 결국 개인과 사회의 조화, 이념과 행복이 공존을 이루는 사회이다. 그런데 이명준은 남과 북 어디에서도 자신이 바라는 진정한 사회를 발견하지 못했다.

 

『광장』은 우리에게 '이데올로기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끊임없이 던진다. 이명준의 행적과 심리적 자의식을 통해 작가는 남과 북을 지배하는 이데올로기와 사회현실을 비판하고 있다. 이명준은 나름의 방식으로 남북의 현실에 적응하려고 노력한다. 그는 현실에 순응하지도, 현실을 무작정 거부하지도 않는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속한 사회와 현실을 논리적으로 이해하려는 노력을 포기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에게는 친일파가 해방 후 고위직에 오르고 타락과 부조리, 방종에 가득 찬 '남한 사회'나 경색된 이데올로기, 허위, 부자유가 만연한 '북한 사회' 모두 환멸의 대상일 뿐이다. 모두 진정한 인간 삶을 충족시키기 어려운데, 그것은 애당초 남과 북을 지배하는 이데올로기가 모두 사회 성원들의 자생적인 욕구의 결과로 나타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동무, 앉으시오."

명준은 움직이지 않았다.

" 동무는 어느 쪽으로 가겠소?"

 "중립국." 

그들은 서로 쳐다본다. 앉으라고 하던 장교가, 윗몸을 테이블 위로 바싹 내밀면서, 말한다.

 "동무, 중립국도, 마찬가지 자본주의 나라요. 굶주림과 범죄가 우글대는 낯선 곳에 가서 어쩌자는 거요?"

 "중립국."

 "다시 한 번 생각하시오. 돌이킬 수 없는 중대한 결정이란 말요. 자랑스러운 권리를 왜 포기하는 거요?"

 "중립국."

 

 

 (p 196)

 

 

이명준이 포로수용소에서 나누는 인상적인 이 대화에는 민족의 현실에 대한 작가의 고뇌, 나아가 우리 민족의 고뇌가 응축돼 있다. 이명준이 선택한 '중립국'은 현실에 존재하는 어떤 나라가 아니라, 남과 북의 현실에 대한 비판적 대립항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여전히 '밀실'과 '공간'이 공존하지 않는 한국 사회

 

 

 

 

 

'밀실'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한 채 '광장'으로 나서려고 하는 자와

'밀실'에서 탈출하여 새로운 '광장'을 만들려다가 고초를 겪었던 자.

 

 

 

독일의 사회학자 하버마스는 민주주의 발전의 핵심 개념으로 '공론장'을 주장했다. 공론장은 개인들이 모여 권력의 간섭이나 제약없이 이성적인 비판과 합리적인 토론을 통해 국가 권력의 방향을 논의하는 공간이다. 공론장의 엄청난 힘은 현대 민주주의 혁명의 동력이 되었다.

 

"인간은 광장에 나서지 않고는 살지 못한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인간은 밀실로 물러서지 않고는 살지 못하는 동물이다. 광장은 대중의 밀실이며, 밀실은 개인의 광장이다."

 

인간에게는 저마다의 밀실과 광장이 있다. 사회적 동물인 인간에게는 밀실보다 광장에서 존재감을 찾는다. 광장은 열린 공간이자 보다 적극적인 소통의 창구다. 개인과 개인이 모여 여론을 형성하고 다양성을 교감하며 통일성을 지향한다. 우리나라 사회는 "광장을 열어라"라는 저항의 외침과 "무조건 열 수는 없다"라는 거부의 몸짓이 팽팽하게 맞서고 있는 중이다. 한쪽은 자신을 진보라 부르고, 다른 한쪽은 보수로 이름 붙인다. 국민을 위한 정치는 실종되었고, 대화와 타협은 사라졌다. 정부의 얼굴이 여러 번 바뀌어도 철 지난 이데올로기 대립과 그에 대한 불신만 반복되고 있다. 이 땅에 진정한 진보와 보수가 있는지 의문만 커질 뿐이다.

 

60년 전의 이명준이 지금 우리나라의 모습을 본다면 심정이 어떠했을까?  '밀실'의 암흑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한 채 오직 '광장'으로 나서려고 하는 자 그리고 '밀실'에서 탈출하여 새로운 '광장'을 만들어보려고 했지만 고초를 겪어야만했던 자가 같은 땅덩어리 내에서 살고 있는 게 지금 우리나라 사회의 현주소다. 이데올로기의 종말을 고한 지 십여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우리 사회가 구 냉전시대를 지배했던 이데올로기의 영향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세계적으로 유일한 분단 국가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낡은 이분법적 영향력이 유지되는 사회는 결국 사회구성원 간의 갈등의 골만 깊어질 뿐이다. 이러한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젋은 세대들은 이명준처럼 이데올로기로 인한 극단적인 죽음을 선택하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진정한 삶의 행복을 스스로 찾지 못한 채 정치적 무관심에 빠져 무기력하게 살아갈지도 모른다.  '밀실'에서 나와 '광장'에서 공론의 장을 형성하고 소통하고자 하는 것이야말로 우리 사회에 깊게 패인 극단적 단절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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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 2012-09-03 19: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루스님! 저도 학교 독후감 숙제 때문에 <광장> 읽어야 하는데...
전에 조금 읽어봤더니 살인적으로 어렵더군요. 그땐 아직 경험이 부족해서 그랬고, 지금은 읽을 수 있겠죠.. 히

cyrus 2012-09-04 16:30   좋아요 0 | URL
<광장>은 중고등학생이 읽어야 할 필수 소설이에요. 저도 고등학생 때 문학시간에 처음
접했을 때 좀 어려웠어요. 아무래도 작품 중간 곳곳에 비유가 많이 있고요, 게다가 교과서에
수록된 작품은 소설 텍스트 전체의 일부에 지나지 않아서 처음부터 안 읽으면 내용을 이해하기
어려울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이런 작품은 한 번만 읽어서 끝나는게 아니라 생각날 때마다
다시 읽어두면 좋아요, 저는 이번에 세 번째로 읽게 되었어요. 참고로 <광장>은 여러 번 개정판으로
나왔는데 각 판마다 내용이 조금씩 달라요. 참고하세요 ^^

아이리시스 2012-09-04 02: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구운몽]이 왜 저기 있는지 한참 생각한 1인.......... 중립국! 중립국! 중립국! 중립국을 외치던 명준의 메아리가 오래 남아서 이후로 오랫동안 <광장>의 여운이 가시질 않았어요.

명준은 결국 중립국으로 갔을까요?
한국사회는 왜 진정한 공론의 장과 이분법적인 잣대 겨누기를 멈추지 않는 걸까요?

cyrus 2012-09-04 16:35   좋아요 0 | URL
<광장>하면 같이 수록된 단짝 <구운몽>이 빠질 수 없죠 ^^;; 저도 소설 중에서 제일 기억나는
장면이에요, 고등학생 때 문학 시간에 이 문장을 처음 읽었을 때 느꼈던 그 때 감정이 아직도
기억나요. 인물의 심정을 가장 간결하면서도 뚜렷하게 표현한 문장이라고 생각해요.

오히려 명준은 자살을 선택함으로써 갈등이 없는 또 다른 세상을 추구하고 싶었을거에요.
소설을 읽는 독자들마다 명준의 죽음이 옳다, 잘못했다라고 해석의 차이가 있겠지만요.
아무튼 명준은 참으로 불행한 사람이에요. 이념 대립의 사회적 상황과 명준의 개인적 상황
(남과 북에 사랑했던 여인의 부재)을 맞물려 돌아본다면 명준의 죽음은 불가피한 선택이라고 생각되요.
 
작지만 큰 한국사, 소금 - 짜게 본 역사, 간을 친 문화
유승훈 지음 / 푸른역사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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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 옛날이여", 화려했던 역사를 지니고 있는 소금

 

이틀 전에 방영된 KBS 2TV '비타민'에서 '나트륨 중독'에 대해서 소개했다. 나트륨, 즉 소금 섭취 과잉은 근래 한국인의 나쁜 생활습관으로 가장 중요하게 지적되고 있는 것 중 하나다. WHO의 하루 소금 권장 섭취량은 2,000mg(5g) 이하다. 반면 2012년 현재 한국인의 1인당 1일 평균 소금 섭취량은 WTO 권장량의 2배를 훨씬 넘는 5000㎎(12.5g) 선인 걸로 나타났다. 짜게 먹는 한국인의 식습관이 주요 질병의 증가 원인이 되고 있다. 소금 섭취량이 늘면 고혈압, 심장병 등 주요 만성질환 발생 위험이 높아진다. 건강을 지키기 위해서는 소금 섭취를 줄이는 방법 밖에 없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소금에 대한 인식은 딱 두 가지다. 음식에 간을 맞추기 위해서 절대로 없어서는 안 될 조미료. 그리고 반대로 설탕과 마찬가지로 너무 많이 섭취하면 건강에 해로운 조미료. 좋든 나쁘든 간에 결국 우리가 생각하는 소금의 존재는 우리 입으로 들어가는 조미료에 불과할 뿐이다. 하지만 소금의 역사를 되돌아본다면 지금과 다른 용도로 사용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조금은 놀라울 것이다. 사실 인간에게 소금은 생존상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기 때문에 소금을 얻기 위한 노력은 아주 오래 전부터 이루어졌다. 본격적으로 정착 생활을 시작하게 되는 신석기 시대의 주거 지역의 특징은 강이나 바다가 근접하는 위치에 있다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신석기 시대 사람들이 이 곳에 정착하게 된 배경을 어획 방법의 발달로 보고 있지만 놀랍게도 이 때부터 고대 사람들은 바다를 통해서 소금을 얻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고 한다. 소금이 산출되는 해안, 염호가 있는 장소는 교역의 중심이 되고, 산간에 사는 수렵민이나 내륙의 농경민은 그들이 잡은 짐승이나 농산물을 소금과 교환하기 위하여 소금 산지에 모이게 되었다. 그 결과 유럽이나 아시아에서도 소금을 얻기 위한 교역로가 발달되었다. 또, 고대 그리스 사람은 소금을 주고 노예를 샀으며 고대 로마의 병사들은 월급으로 소금을 받았다. 그래서 '급여, 월급'을 뜻하는 영어 Salary가 소금의 Salt에서 비롯되었다. 간략하게 이 정도의 역사적 상식만 본다면 과거의 소금은 그저 음식을 위한 조미료가 아니라 경제생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생산수단 또는 재화로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소금이 없다면 나라가 발전 못해요, 아~ 미운 소금~~♬"

 

세계사에 영향을 줄 정도로 화려했던 역사라고 해서 우리가 흔하게 보는 소금을 그저 짠 맛의 조미료로만 보지 말지어다. 우리가 제대로 알지 못해서 그렇지 한국사에서도 소금의 존재와 그 영향력은 무시 못한다. 조금 과장되게 표현하자면 소금이 없었다면 지금의 대한민국은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역사의 전례에서도 알 수 있듯이 염전에서 얻게 되는 소금량에 따라 국가의 발전에 좌지우지할 정도로 영향을 주었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우리나라에도 소금은 그에 동등한 가치를 지닌 생산물과 거래, 교환할 수 있는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산으로 둘러싸인 내륙 지방의 사람들은 소금 맛 보기가 귀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해안 지방에 위치한 염전업자들 간에 농산물을 소금과 교환하는 거래가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이렇다보니 염전업자는 최대의 이윤을 얻을 정도로 최고의 직종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과거에는 소금을 부엌에서 볼 수 있는 단순 조미료라기 보다는 국가 발전의 기틀을 마련할 수 있는 경제적 재화 정도로 인식했다. 고려의 시조 태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기 위한 재정이 손쉽게 마련할 수 있었던 것은 소금의 최대 생산지였던 전남 지역을 점령했기에 가능했다. 그리고 원나라의 간섭으로 인해 재정난으로 어려움을 겪었던 고려 말의 충선왕은 '각염법'이라는 소금 전매법을 시행하였다. 국가가 직접 소금을 생산하고 판매하는 일을 맡게 된 것이다. 백성들이 소금을 얻기 위해서는 세금의 일종인 '소금세'를 지불한다거나 또는 일종의 생산량을 교환해야만 했다. 소금 생산 및 판매로 벌여들인 소금세와 교환 거래를 통해 국가 재정을 좀 더 수월하게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국가 또는 관리가 염전사업에 관여하다보니 정작 소금이 필요한 백성들이 피해를 얻는 문제점이 속출하게 되었다. '국가 재정'이라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돌파구를 급하게 찾다보니 소금을 요리에 필요한 조미료라는 아주 기본적이고도 중요한 용도를 잊고 말았다. 국가가 시행하는 소금 전매법에 관여하는 왕족 또는 권문세족들에게 소금은 부를 축적하기 위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자본의 용도로 보고 있었다. 소금이 권세가들만을 위한 귀한 최상급의 조미료가 되었던 것이다. 심지어 고려 정부도 소금을 자신들과 가까운 왕족, 고급관리들에게 분배할 정도였다. 그래서 백성들이 일정 기간 소금세와 생산량을 바쳐도 백성들이 양손 한 가득 소금 담기가 하늘에 별 따기였다. 원나라의 간섭에 의한 조공을 피하기 위해서 만든 각염법이 아이러니하게도 지배층들의 폐단을 더욱 낳게 만들었으며 백성들의 삶을 어렵게 만들어주었다. 고려 말의 소금 전매법의 폐단은 조선 건국 초기까지 이어질 정도로 국가적 차원에서 해결해나가야 할 하나의 사회문제가 되었다. 조선 건국의 공신 중의 한 사람인 삼봉 정도전이 태조에게 염법의 문제점을 지적할 정도로 국가 발전에 있어서 소금 개혁은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그러나 염법 개혁에도 불구하고 '국가 및 왕권 강화를 재정 확보'와 '백성들의 민심 얻기'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기가 쉽지 않았다.

 

 

 

 

 누가 소금을 외면하게 만드는가

 

어떻게 보면 소금은 지금이나 과거나 중요하면서도 백성들에게 불편을 준 양면적인 존재다. 오늘날에는 건강상 해로운 조미료라고 인식하고 있다면 과거에는 권세가들의 배만 불리게 만드는, 백성의 생활을 괴롭게 만드는 조미료였다. 그러나 역사를 볼 땐 공과 사는 확실하게 구분해야 하는 법. 국가 재정 확보에 있어서 농산물과 철만 있었던 건 아니다. 소금의 존재 또한 무시할 수 없다. 조선의 성군 세종은 오랜 기근 생활로 인해 피폐해진 백성들의 경제난을 해결하기 위한 복지정책의 재원으로 소금을 사용했으며 임진왜란 시기 속에서도 백성들의 식량과 군사들의 군량을 확보하기 위한 해결 방법을 류성룡은 염전에서 발견했다.

 

자염은 질박한 토기에 바닷물을 담은 뒤에 끓여서 소금을 채취하는 방식이다. 천일염은 갯벌에 바닷물을 가둔 뒤에 바람과 햇볕으로 수분을 말려 소금을 얻는 방식이다. 자염이 사라진 이유는 일제 강점기 시절, 산업과 철도를 중심으로 한 국책 사업에 밀리는 바람에 쇠퇴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게다가 바람과 햇볕에 의해 말리는 천일염의 등장으로 인해 오랜동안 누려온 화려한 역사를 뒤로 한 채 사라졌다. 그러나 천일염의 등장으로 인해 우리나라의 염전은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우리 식생활에서 음식의 간을 조절하는 것은 소금, 간장, 된장 등 소금기가 있는 조미료였다. 우리 여성들은 짠맛을 맞추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하지만 화려했던 '짠맛의 시대'는 가고 '단맛'과 '매운맛'의 시대가 왔다. 짠 음식과 소금에 대한 부정적 인식도 널리 퍼지고 있다. 역설적으로 소금을 불필요하게 짜게 만들어 건강을 해치게 한 장본인은 인간이었다. 부엌에 있어야 할 소금을 그저 부를 축적할 수 있는 '황금'으로만 봤던 것이다. 그러하기에 방대한 역사 속에서 희미하게나마 들려오는 소금의 화려했던 블루스가 너무나도 짜게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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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int236 2012-09-01 11: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곳곳에 소금에 관한 우여곡절들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삼국지에도 보면 관우가 하던 일이 소금 밀매업자와 연결되어 있다, 혹은 그의 뒤를 봐주던 사람이다, 혹은 소금 밀매업에 종사하던 사람이다라는 추측이 있습니다.

cyrus 2012-09-03 11:17   좋아요 0 | URL
오~~! 그렇군요. 알라딘 검색창에 소금이라고 검색하면 꽤 소금의 역사에 관한 책이 많았어요. ^^

아이리시스 2012-09-03 14: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금으로 역사책이 나오는 게 신기하네요. 미시사도 좋아하지만 소금책도 읽는 시루스님이 더 좋아요.
제목 좋네요, 소금 블루스.
예전엔 오롯이 국가사업이었고, 부의 사업이었고, 권력과도 연관이 되어있었던 것 같아요.

cyrus 2012-09-03 15:07   좋아요 0 | URL
예전에 나온 책 제목 중에 슈가 블루스라고 있어요. 설탕이 건강에 유해하다는 사실을 반박하는
일종의 설탕 예찬론에 관한 책이었는데 거기서 따왔어요. 사실 지금 소금도 설탕과 마찬가지로
건강에 유해한 조미료라는 인식이 강하잖아요, 하지만 과거 역사를 되돌아보면 소금의 존재가
얼마나 유용했는지 소개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그 책 제목에서 따온거에요 ^^
 
카라바조 Taschen 베이직 아트 (마로니에북스) 6
질 랑베르 지음, 문경자 옮김 / 마로니에북스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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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관심 있게 알아보고 있는 화가가 이탈리아 출신의 미켈란젤로 다 카라바조다. 이름은 그 유명한 미켈란젤로와 비슷한데 국내에선 카라바조에 대해서 알려진 바가 별로 많지 않다. 그러나 유럽이나 미국에선 미켈란젤로 못지않은 작품성을 인정받고 있으며 고흐를 능가하는 격정적인 삶을 살았던 화가로 알려져 있다. 불같은 성격, 시대를 앞서갔지만 결국 외면 받아야만 했던 남다른 천재 그리고 요절. 이러한 카라바조의 삶에 비하면 고흐는 양반에 불과하다. 경쟁 화가들 그리고 자신에게 그림을 주문했던 사람들을 무시하는 발언은 예사였고 수차례에 걸쳐 폭행 및 살인사건에 연루되어 감옥에 여러 번 투옥되기도 했고 탈옥을 감행하여 도피 생활을 해야만 했다. 카라바조의 초상화를 보라. 딱 얼굴만 봐도 그의 격정적인 성격이 인상에서도 묻어 나온다. 예술적인 삶보다는 카라바조의 무시무시한 전과 이력이 제일 먼저 떠올려서 그런지 초상화 속에서 그가 쥐고 있는 것이 붓이 아니라 생전에 품속에서 지녔다던 단검처럼 보인다.

『성 마태오의 소명』1599~1600년


카라바조는 어린 시절부터 도제 생활을 거쳐 예술적 능력을 점점 키워나갔다. 콘타랠리 예배당에 그린 <성 마태오의 순교>와 <성 마태오의 소명>이 각광받으며 실력을 인정받았다. 권력자였던 델 몬테 추기경이 후원자로 나서고 로마 최고의 화가라는 명성도 얻었다. 그러나 전통을 무시하고 자신만의 양식을 추구한 그는 악마적 화가,‘회화의 반(反) 그리스도'라는 비판도 받았다. 길거리에서 만난 집시나 부랑자, 창녀의 모습을 성자나 예수의 모델로 삼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성사회의 비판과 조롱을 비웃기라도 하듯, 충격적인 주제 선택과 표현 방식에 대한 고집이 묻어 나 있는 카라바조의 붓은 절대로 꺾이지 않았다.


『마리아의 죽음』1606년경






임종한 성모 마리아를 그리기 위해 물에 빠져 죽은 매춘부의 썩어가는 시신을 모델로 사용했다는 소문이 떠돌 정도로 카라바조에게 그림을 부탁했던 가톨릭교회 관계자들은 카라바조의 그림에 대한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오히려 그림 모델에 대한 출처불명의 소문보다는 교회 관계자들을 더욱 실망하게 만든 것은 카라바조의 표현 방식이었다. 붉은 옷을 입은 성모 마리아는 왼팔이 축 늘어진 채 숨을 거두었다. 그녀의 임종을 가까이서 지켜보는 사람들은 슬픔에 빠져 있다. 교회 관계자들은 이러한 그림 구도를 마음에 들지 못했다. 성모의 죽음은 종교적으로 성스러운 장면이기에 평범한 사람들이 죽어가는 성모 가까이에서 임종을 지켜본다는 것은 그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장면이었던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그림 속 성모의 모습에 대해서도 비난의 화살을 피할 수 없었다. 맨 발을 드러낸 채 죽은 성모의 모습이 저속하게 느껴진다는 이유를 들면서 카라바조의 그림을 비난했다. 그나마 그림 속 죽은 여자가 성모라는 것을 단번에 알 수 있는 희미한 후광만 그려져 있을 뿐, 이것마저 그려 넣지 않았더라면 이 그림 또한 거절당했을지도 모른다. 이렇듯 카라바조는 지극한 성스러움은 결국 지독한 세속적인 삶에 기초해 있으며, 성(聖)과 속(俗)은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그림으로 표현했다.

『성 마태오와 천사』1602년 (첫 번째 그림, 현재 소실됨)






『성 마태오와 천사』1602년 (수정된 그림)


카라바조는 그림 제작 주문자들로부터 총 두 번이나 거절당할 정도로 퇴짜를 맞은 적이 있었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성 마태오와 천사>다. 첫 번째 그림 속 성 마태오가 너무 초라하고 천사가 마태오 옆에 너무 가까이 묘사되었다는 이유로 거절당하고 말았다. 무엇보다도 천사의 영감을 받아 마태복음을 기록하는 마태오의 모습은 평범한 하층민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마태오가 다리를 꼬고 앉아 있는 탓에 그의 발바닥은 그림을 보는 관중들 앞으로 드러나 있다. 그 당시 사람들이 이 그림을 본 순간, 마태오가 성인으로써의 면모가 전혀 느껴지지 않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로레토의 성모』1604~1605년


비록 성당이 요구하는 작품을 위해 카라바조는 고귀하고 근엄한 성인으로서의 면모를 부각시키도록 그림을 수정했지만 평범하고도 세속적인 종교화를 추구하고자하는 자신만의 독특한 예술적 가치는 포기하지 않았다. <성 마태오와 천사> 두 번째 그림이 완성된 지 2년 뒤에 그려진 <로레토의 성모>에서는 성모와 아기 예수 앞에서 무릎을 꿇은 늙은 순례자의 맨발을 과감하게 드러냈다. 카라바조는 그 당시로서는 독창적인 사실주의적 화법을 과감하게 표현하고 있었던 것이다.


『과일 바구니를 든 소년』1593~1594년경




화가로 활동하기 시작했던 초창기의 카라바조 그림을 보게 되면 이미 사실주의적 표현을 시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과일 바구니를 든 소년>과 <과일 바구니가 있는 정물>을 처음 보는 독자라면 훗날 그려지게 될 종교화에 비하면 별다른 인상을 받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이 두 점의 그림을 박물관에서 실제로 보게 된다면 좀 더 가까이 살펴 볼 것. 과일과 이파리가 아주 세밀하게 그려져 있다. 과일은 먹음직스럽게 윤기가 흐를 정도로 싱싱하게 느껴진다. 특히 포도는 너무나 사실적이다. 각각의 포도 알맹이가 하얗게 그려진 것을 알 수 있는데 포도 열매 위에 묻은 하얀 가루를 보는 듯하다. 이것을 사람들은 농약이라고 생각하지 쉽지만 다행히도 농약 성분은 아니다. 그리고 카라바조가 살았던 시대에는 농약이라는 게 나오지도 않았다. 포도 속 당분으로 포도 껍질이 변해 생성된 것뿐이다. 하얀 가루가 많은 포도일수록 당분이 높고 신선함이 유지되어 있다. 과연 카라바조는 이러한 과학적 사실을 처음부터 알고 그렸던 것일까?

『참회하는 막달레나 마리아』1596~1597년


카라바조는 종교화를 그렸던 화가이면서도 동시에 폭행, 살인 전과가 적지 않은 범죄자라는 양면성이 존재하는 독특한 화가이다. 하지만 렘브란트와 요하네스 베르메르가 등장할 수 있게 명암법을 처음으로 시도했으며 극적인 순간을 사실적으로 표현하고자 했던 방식은 훗날 조르주 라 투르와 쿠르베에게 영향을 주었다고 평가할 정도로 그의 미술은 정당한 대우를 받을 받을만한 가치가 있다. 카라바조의 종교화를 반복해서 볼수록 차분해지고 안정감이 느껴진다. 물론 화가의 생애를 자세히 모르는 상태에서 그림을 본다면 그림이 주는 감동은 더욱 배가될 것이다. 카라바조도 다른 화가들과 마찬가지로 참회하는 막달레나 마리아의 모습을 주제로 한 그림 한 점을 남겼는데 불같은 성격의 화가가 그렸다는 생각이 전혀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너무나도 고요하다. 두 눈을 감고 얼굴을 숙인 막달레나의 모습을 자세하게 보면 눈물 한 방울이 그려져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막달레나의 얼굴에 흐르고 있는 이 눈물 한 방울은 이 그림을 보고 있는 관객마저도 숙연하게 느껴진다.


『골리앗의 머리를 든 다윗』1609~1610년


카라바조의 생애와 미술을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찻잔 속의 태풍’이다. 카라바조는 평범한 기교의 예술에 의한 마니에리즘(Mannerism)이 지배하던 시대에 태어나 독특하고 파격적인 주제와 표현법으로 세상을 뒤흔들 젊은 천재로 거듭날 수 있었지만 범죄 이력과 도주 생활은 활짝 펴야만했던 예술적 능력의 꽃을 시들게 만들었다. 카라바조의 예술이 세상에 가져다 준 파급 효과는 한 순간일 뿐이었다.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한 채 점점 소멸되어가는 태풍처럼 카라바조는 생전에 제대로 된 평가도 받지 못한 채 요절하고 말았다. 아마 반 고흐를 제외하면 이처럼 파격적이면서도 개성적인 짧은 삶을 살았던 예술가도 드물 것이다. 이제는 르네상스 거장 중의 한 사람인 미켈란젤로에 맞먹을 정도로 평가를 받고 있는 카라바조 출신의 미켈란젤로('카라바조‘라는 성은 화가가 태어난 지명으로부터 유래됨)를 고풍스러운 미적 취향을 선호하는 우리 국민들은 어떻게 받아들일까? 그림 장면의 절반을 지배할 정도로 어두컴컴한 흑(黑)의 영역이 많이 차지하고 있는 명암법의 가치를 제대로 알아줄까? 그리고 과거의 불미스러운 이력만 가지고 장점을 무시하고 심지어 끝까지 냉담한 선입견을 거두지 않는 우리 사회 속에서 과연 전과자의 그림들이 그러한 선입견 없이 예술적 평가를 알아볼 수 있을까? 자신의 목을 참수하고,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마지막 자화상으로 그렸던 카라바조의 파격적인 예술을 아직 우리 사회는 받아들이기에는 준비가 되지 않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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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시스 2012-08-28 22: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카라바조를 다시 보게 돼서 정리가 돼요. 예전에는 마로니에 북스에서 나오는 화가 일대기 종종 읽었는데 요즘은 통-_-;; 저도 현대미술에 관심 좀 가져야 될 듯 싶어요. 아는 사람이 앤디 워홀 뿐이라니 orz

카라바조 페이퍼에 앤디 워홀 얘기하는 쓸데없는 댓글..

cyrus 2012-08-31 22:32   좋아요 0 | URL
저는 이제부터 마로니에북스 시리즈 완독 도전해보려고요. 분량도 많지도 않고 시리즈 중에 제가
관심 있는 화가들이 꽤 있어서 이번 기회에 화가들에 대해서 더 자세히 알아보고 싶어요.
그런데 내일 모레부터 2학기 시작이라는 게 함정이네요.. ㅋㅋㅋ ㅠㅠ
다음 마로니에북스 시리즈는 앤디 워홀을 읽어보겠습니다요 ^^
 
생각에 관한 생각 - 우리의 행동을 지배하는 생각의 반란!
대니얼 카너먼 지음, 이진원 옮김 / 김영사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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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를 이해한다는 착각은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 우리의 능력을 과신한다.

 

 

- 대니얼 카너먼 (『생각에 관한 생각』p 300) -

 

 

 

 

 

 합리적 인간의 불편한 진실

 

춘추 전국 시대 초나라 때의 이야기이다. 어떤 사람이 배를 타고 강을 건너고 있었는데 한가운데쯤 왔을 때 칼을 물에 빠뜨리고 말았다. 그는 바로 주머니칼을 꺼내서 배에 자국을 내어 빠뜨린 부분을 표시해 두었다. '떨어진 자리에 표시해 놓았으니 칼을 찾을 수 있겠지.' 그는 배가 언덕에 닿자마자 뱃전에 표시해 두었던 물속으로 뛰어 들었으나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가 없었다.

 

『여씨춘추』에서 유래된 '각주구검'(刻舟求劍)에 관한 일화다. 각주구검은 어리석고 미련하여 융통성이 없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배를 타고 강에 나가서 칼이 빠져버린 위치를 확인하는 방법은 양쪽 강변의 지형 지물을 보는 것이다. 칼의 주인이 떨어뜨린 칼에만 몰두하지 않고 강변을 주목했더라면 이렇게 어리석은 행동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융통성 없는 이 바보스러움을 우리는 반복하기도 한다. 그 바보스러움은 각주구검의 그것과 같이 시간성과 공간의 변화라는 점을 무시한 목적의 설정이라는 것이다.

 

시간성과 공간뿐만 아니라 숫자의 세계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난다. 개미들이 투자를 할 때 기점이 되는 가격은 말할 나위 없이 매입가, 즉 본전이 된다. 그들은 항상 지금이 본전 대비 이익인지 손실인지를 따지고 든다. 그런데 때에 따라서 기준가가 바뀌기도 한다. 만약 주가가 상승해서 한 번 그 주식이 고점을 쳤다면 그 고점이 새로운 기준가로 변한다. 개미들은 주가가 그 고점에 갔을 때의 기분을 이미 느껴봤고 그 가격대를 또 다른 나의 본전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증시가 조금이라도 주춤하는 경향을 보이게 되면 시장에서는 비관론이 고개를 들기 마련이다. 비관론이 만약 논리적이라고 판단되면 주식을 파는 것이 마땅한데, 개미들은 얼마 전에 경험했던 고점에 미련이 남아 지금 가격대에 팔기가 싫어 하는 경향을 보인다. 만약 지금 팔았다가 바로 주가가 반등하면 낭패를 볼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고점에 대한 미련이 남아 있는 것이다. 이처럼 주가가 상승을 하다가 다시 하락하면 전 고점은 또 하나의 숫자로 각인이 되고 투자자들은 그 고점을 본전으로 여긴다. 그 숫자에 집착의 감정을 느끼기 때문이다. 이를 경제학 용어로 '기준점 편향'(Anchoring Bios, 닻내림 편향)이라고 말한다.

 

합리적이면서도 이성적인 사고를 지닌 인간은 왜 이처럼 어리석은 행동을 하는 것인가?  과연 인간은 지구상에 유일한 합리적인 동물이라고 떳떳하게 말할 수 있을까? 

 

 

 


 이성과 직관, 두 가지 생각 시스템의 상호작용  

 

심리학자 대니얼 카너먼은 인간의 모든 행동과 생활에 밀접한 영향을 주는 생각을 크게 2가지로 구분한다. 직관을 뜻하는 시스템 1의 '빠르게 생각하기(fast thinking)'와 이성을 뜻하는 시스템 2의 '느리게 생각하기(slow thinking)'다. 달려드는 자동차를 피하는 동물적 감각의 순발력, 끔찍한 사진을 보자마자 저절로 인상이 찌그리게 되는 것처럼 완전히 자동적인 개념과 기억의 정신활동이 '빠르게 생각하기'이다. 반면 123 x 456의 문제처럼 머릿속에 즉시 떠오르지 않는 문제의 답, 복잡한 논리적 주장이 타당성이 있는지 확인할 때는 '느리게 생각하기'가 작용된다.

 

인간은 어떠한 의사결정을 하게 되면 두뇌 속에서 시스템 1과 시스템 2이 상호작용하게 된다. 예를 들면 냉장고 안에 유통기한이 지난 우유가 보관되어 있다고 하자. 내가 냉장고 안에 있는 우유를 보는 순간 마시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이것이 시스템 1, 직관, 빠르게 생각하기가 만들어 낸 충동적인 인지 과정이다. 그러나 유통기한을 지난 우유를 마시게 되면 배탈이 날 수가 있다. 목이 마르다고 해서 기한이 지난 우유를 벌컥 들이마셔서는 안 된다. 기한 날짜를 먼저 확인하고 우유가 상했는지 유리잔에 부어 확인한다. 그래야만 복통의 괴로움을 면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시스템 2, 즉 이성적으로 느리게 생각함으로써 행동을 통제한다.

 

 

 

 

 휴리스틱(Heuristic)에 의한 사고의 오류

 

 

● 언론이 집중 조명한 비행기 추락 사고는 일시적으로 비행기의 안전에 대한 느낌을 바꿔 놓는다. 길가에서 불타는 자동차를 본 후 당신 머릿속에는 그 사고 장면이 잠시 동안 남아 있게 된다. 그리고 이제 세상은 당분간 훨씬 더 위험하게 느껴진다.

 

● 개인적 경험, 사진, 생생한 사례들은 타인에게 일어났던 사건이나 단순한 말 혹은 통계보다 훨씬 더 머릿속에 잘 떠오른다.

 

 

 (p 190)

 

 

하지만 시스템 2에 의해 인간의 행동이 통제된다고 해서 이것이 곧바로 합리적인 의사결정과 결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시스템 2는 인지적 편안함이 느껴질 정도로 반복되고 낯익은 문제나 상황 앞에서는 나태해지고 회피적 경향을 보이게 된다. 이럴 때 인간의 행동을 통제되어야 할 시스템 2는 평소보다 기능이 약해지고 시스템 1에 의해서 의사결정을 내리게 된다. 그래서 자신이 잘 아는 것에 바탕을 두고 쉽게 단정해버리는 '가용성 휴리스틱'(Availability Heuristic)을 주의해야 한다. 두뇌는 에너지를 절약할 수 있기 때문에 정신적 단축을 선호한다. 애매모호한 자료나 대상은 자연스럽게 무시하거나 왜곡하게 된다.

 

위에서 소개한 두 가지 사례는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쉽게 경험할 수 있는 가용성 휴리스틱이 만들어 낸 편향이다. 이것을 가용성 편향이라고 한다. 비행기 추락 사고에 관한 뉴스를 접하고 난 후부터 비행기에 탑승하는 것보다는 기차나 배를 타는 것을 더 선호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하지만 가용성 편향이 만들어 낸 잘못된 생각일 뿐이다. 실제로 교통수단의 사고발생 빈도 수에 대한 통계자료에 의하면 비행기보다는 우리가 자주 타는 자동차의 사고 발생이 높다고 한다. 가용성 편향의 착각에 빠지게 되면 실증적인 통계자료마저 눈에 들어오지 않게 된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직관의 함정에 빠지는 인간

 

그렇다면 통계자료를 완벽히 분석하고 이해하면 가용성 휴리스틱의 오류를 벗어날 수 있을까? 완벽한 대안으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안타깝게도 이것 또한 인간의 합리적인 사고 형성에 큰 도움을 주지 못한다. 통계자료와 같은 과거의 기록을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게 된다면 하나의 기준과 틀로 이루어진 정합적인 사고로 형성된다. 의사결정자는 어떠한 문제를 해결해나가는 데 긍정적인 결과가 나올 수 있다는 근거의 자료를 이해하고 있다는 확신만 가지고 미래를 예측할 수 있다는 착각에 빠지게 된다.

 

우리 주변에 일어나는 수많은 상황 및 사회문제들은 우연에 가까울 때가 많다. 그런데 인간의 생각은 작은 실마리를 토대로 반복되는 패턴을 찾아내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세상은 기승전결이 뚜렷한 하나의 이야기처럼 규칙적이면서도 정함성을 갖고 돌아가지 않는다. 지난번에 잘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이번에도 똑같은 방식으로 하면 잘될 것이라는 맹점에 빠지게 되는게 이것을 '정당성의 착각'라고 한다. 이러한 심리적 오류는 분석적인 의사결정 성향이 강한 기업의 CEO들에게 많이 볼 수 있다. 분석적이고도 논리적인 사고를 지향한다는 CEO마저도 자신도 모르는 사이 시스템 1의 직관에 의해 생각의 함정에 빠지는 경우가 있다. 일부 CEO들은 불확실한 상황 속에서도 정합적인 과거만을 이해함으로써 미래를 예측하고 운의 역할을 무시한다. 그리고 아는 업무에만 집중하게 되어 지나치게 자신의 믿음을 과신하는 초낙관주의 성향에 빠지게 된다.

 

시스템 1의 직관의 기능과 관련된 인간의 오류적 판단 경향은 '전망 이론'으로도 설명할 수 있다. 대니얼 카너먼과 故 아모스 트버스키의 공동 연구에 의해 밝혀졌으며 2002년에 심리학자 카너먼에게 노벨 경제학상을 안겨 주었던 이론이다. 우리는 의사결정을 하게 되면 이익보다도 손실에 더욱 민감하고 손실을 회피하려고 한다. 하지만 앞에서 소개했던 '기준점 편향'에다가 위협을 기회로 여기는 낙관적인 사고까지 어울린다면 종종 자신에게 유리한 이익을 거부하게 되는 모순적인 의사결정을 하게 된다. 매몰비용으로 상당한 손실을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손실 규모가 더욱 확대될 정도로 초음속 여객기 콩코드 개발 사업을 오랫동안 매달렸던 영국와 프랑스의 경우가 전망 이론의 대표적인 사례이다. (콩코드 효과)

 

 

 

 

 합리주의자들이여, 익숙한 생각의 지배에서 벗어나라

 

인간은 생각하는 동물이고 그래서 기억하는 동물이며 결국 후회하는 동물이기도 하다. 그러나 더 큰 후회를 하지 않기 위해서 어떠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잘 생각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말이야 쉽지 합리적인 인간이라도 올바른 결과를 위한, 옳은 의사결정을 하기 위해서 '잘' 생각한다는 것이 쉽지가 않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구상 유일한 합리적인 동물'이라는 명예로운 훈장을 내려놓아하는 것일까?  전혀 그렇지가 않다. 우리가 본능적으로 혹은 습관적으로 범하는 사고방식이나 행동습관을 제대로 이해하고 훈련만 한다면 완벽한 해답에 도달하지는 않더라도 어느 정도 쉽게 문제를 해결해나갈 수 있는 합리적인 사고방식을 실행할 수 있다. '생각'에 의해 작동하는 사고방식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면 그만큼 현명한 선택을 할 가능성은 한층 높아진다.

 

그러기 위해서는 '익숙함과의 결별'이 중요하다. 이미 주어진 정보와 지식만을 가지고 의견을 보강하는 쪽으로 문제를 해결해나가는 것보다는 외부 환경으로부터 들어오는 새로운 정보에 의도적으로 개방하고 수용되어야 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최대한 가용할 수 있는 모든 정보들을 활용하여 문제 예측의 시나리오를 만든다. 이러한 시나리오에는 예측하지 못하는 불확실성의 정보도 포함되기 때문에 판단의 오류에 의한 손실을 줄일 수 있다.

 

모든 성공은 최면이요 마약이다. 언제든 반복될 수 있고 어디서든 통할 것만 같다. 모 통신사 광고 카피처럼 '생각대로' 하면 모든 일이 다 이루어질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불확실성, 경쟁이 있는 사회에서 우리가 바라는대로 쉽게 생기지 않는다. 변화 빠른 시절에 과거의 성공 그리고 정보와 지식들은 그야말로 과거일 뿐이다.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는 역사를 바꾸는데 성공한 창조적 소수가 그 성공으로 인해 교만해져서 남의 말에 귀를 막고 독단적으로 행동하다 판단력을 잃게 되는 것을 '휴브리스'(hubris)라고 불렀다. '합리적인 동물' 인간은 자기 과신, 지나친 오만에서 비롯되는 실패를 경험해야 했다. 그렇기에 카너먼은 이 책을 통해 세상을 합리적으로만 보려고 하는 합리주의자들에게 경고보다는 충언에 가까운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 그리고 불확실한 상황 속에서 비합리적인 판단을 하게 되는 모순된 행위에 대해서 스스로 되돌아보고 인식할 것을 권하고 있다. 미래를 예측할 수 없는 불확실성의 시대에 살고 있는 지금, 우리 스스로 존재의 유한성을 인정하고 겸손과 지혜가 필요해야 할 때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완벽하고 합리적인 동물'이라는 오랜 인류에게 보편적으로 적용되었던 이 익숙한 생각부터 결별하는 것이 최우선의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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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를 말하다 - 이덕일 역사평설
이덕일 지음 / 역사의아침(위즈덤하우스)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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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 강점기 역사의 트라우마가 만들어 낸 '반일' 감정  

 

 

 

 

 

 

KBS 드라마 '각시탈'은 일제 강점기를 배경으로 일본을 응징하는 한국판 슈퍼히어로의 대활약을 그려낸 이야기다. 시청자들은 2대 각시탈 이강토(주원 분)가 일제 강점기 일본인들의 악랄한 만행을 제대로 다뤄주길 원하고 있다.

 

그렇다보니 '각시탈' 연출 관계자들은 드라마를 애청하는 시청자들 때문에 종종 곤혹을 치뤄야 할 때가 있다. 지난 7월에 모 포털 사이트에서는 ''각시탈' 속 기미가요 장면 논란'을 주제로 네티즌 투표가 실시된 적이 있었다. 7천명이 넘는 네티즌이 참여한 가운데 '연출을 위해 필요한 장면'이라는 대답이 70.6%로 나타났다. 반면 '한국 드라마에서 기미가요는 부적절한 장면'이라는 대답은 29.4%로 집계됐다. 이에 대해 '각시탈' 측 연출 관계자는 "기미가요는 극의 흐름상 꼭 필요했던 장면의 일부였을 뿐 중점이 아니다"라고 해명했다.

 

이강토는 각시탈로 변신, 일본 형사들을 모조리 제압한다. 통쾌한 복수극에 지켜보던 시청자들은 모두 환호하고 박수를 보냈다. 이처럼 '각시탈' 항일정신이 부각되는 시점이면 온라인 반응은 뜨겁기만 하다. 하지만 일본인에 대한 정당성이 부여될 때는 여지 없이 혹평이 쏟아진다.

 

어제 SNS를 중심으로 경기 고양시 지하철 3호선 화정역 광장의 모양이 일본의 '욱일승천기' 문양을 그대로 닯았다는 논란이 확산되었다. 욱일승천기는 일본 국기인 일장기의 붉은 태양 문양 주변에 붉은 햇살이 퍼져나가는 모양을 형상화해 만든 것으로 일본 제국주의와 군국주의 상징으로 인식돼 있다.

 

독도 영유권을 둘러싼 한일간 외교 관계가 불화의 국면 상태로 접어들고 있는지라 국민들의 반일(反日) 감정이 어느 정도인지 보여주고 있는 해프닝이다. 우리나라가 광복을 맞이한 지 67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국민들의 마음 속에는 일제 강점기 역사에 대한 트라우마가 남아 있다. 드라마 속 기미가요 장면에 대한 시청자들의 예민한 반응 또한 일제 강점기 역사에 대한 기피감으로부터 비롯된 반일 감정이라고 볼 수 있다.

 

 

 

 

 일제 찬탈의 원인을 고종과 노론에서 찾다

 

제국주의 열강들의 세력 다툼 속에서 쇠락의 기운이 완연했던 대한제국의 모습 그리고 일제의 식민 통치로 얼룩진 한국의 근대사. 그 당시 우리 민족에게 행했던 일제의 만행만큼이나 한국 근대사 역시 우리가 똑바로 바라보기를 꺼리는 역사이기도 하다. 현재와 가장 가까운 시기지만 고대와 중세보다도 더 멀게 느껴진다. 그런데도 우리나라 국민들은 일제 강점기 역사를 기피하고 자세하게 알지 못하면서도 '친일' 문제만큼은 민감하게 반응한다. 과거사에 대한 반성의 면모를 전혀 보이지 않는 일본정부의 몰염치를 끊임없이 비판, 감시하면서도 우리 안에 있는 친일 잔재를 청산하는 작업도 병행해야 한다. 다만 이러한 역사적 작업이 대대적으로 진행되기 위해서는 일제 강점기 역사에 대한 올바른 인식과 관심이 선결조건이 되어야 한다.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소장은 자신이 펴낸『근대를 말하다』에서 친일파들이 나라를 팔아먹고 집권했던 일제 강점기 역사를 제대로 성찰하지 않으면 대한민국은 과거와 같은 똑같은 역사적 실수와 비극을 되풀이할 것이라고 머리말에서 밝히고 있다. 역사를 성찰하기 위해서는 역사를 제대로 알아야 하는 것이 우선이다.

 

이덕일 소장은 조선 망국의 뿌리를 1623년 인조반정 체제로까지 끌어올린다. 인조반정을 주도한 서인과 그 후예인 노론은 조선을 시대착오적인 사회로 끌고 갔다. 사지선다형이어야 할 외교는 숭명(崇明)이란 이념으로 통일되어 선택의 여지를 없애버렸다. 여러 사상 중 하나에 불과한 주자학을 유일사상으로 만들고, 해체되어야 할 신분제를 더욱 강화시켰다. 이런 상황 속에서 '500년 조선'은 단 30분 만에 이루어진 협상에 의해 멸망되었다.

 

노론 세력의 기득권 유지 속에서도 대한제국이 망국의 길을 걷을 수 있도록 더욱 재촉하게 만든 것은 고종의 리더십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지금까지도 고종의 리더십을 둘러싸고 대한제국의 멸망을 이르게 한 무능한 군주인지 아니면 근대화를 앞장서 이끈 개혁을 시도한 군주인지 대해서 역사학자들 사이에서 논란이 진행되고 있다. 하지만 2010년에 펴낸 『조선 왕을 말하다 2』에서도 이덕일 소장은 고종의 '개혁군주론'을 정면으로 반박하고 그의 리더십을 부정적으로 평가했듯이 이 책에서도 망국의 결과를 초래한 고종의 오판에 대해 질타한다. 

 

 

 

 

 

 

러시아 공사관에 피신한 고종(사진 왼쪽에서부터 두번째 인물, 1896년 아관파천)

 

 

 

고종에게는 시대의 흐름을 읽는 혜안이 없었다. 그리고 친일파만 득실거릴 뿐, 국제 정세에 해박한 식견을 가진 인물이 주변에 없었다. 그게 대한제국으로서는 가장 뼈아픈 점이었다. 고종은 개화를 추진하다가도 입헌정치체제가 전제왕권을 조금이라도 저해하면 하루아침에 돌변해 관련 인물들을 제거했다. 갑신정변으로 급진 개화파를 척살했고, 아관파천(약 1년 동안 고종과 왕세자가 왕궁을 버리고 러시아 공사관에 옮겨서 거처한 사건)으로 온건 개화파를 몰아냈다.

 

당시 동아시아의 패자는 일본이었다. 외형적으로는 러시아가 강했지만, 국민적인 단결이 이뤄진 일본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일본의 선제공격으로 러일전쟁이 시작됐을 때까지도 고종은 러시아의 승리를 믿고 있었다. 청일전쟁 직후 러시아가 주도한 삼국간섭으로 일본이 요동반도를 되돌려주는 것을 보고 러시아의 힘을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본이 승리한 후, 조선은 일본의 지배권에 놓이게 된다. 이때부터 고종의 이중적인 처신은 극에 달한다. 이미 세계가 대한제국을 일본의 몫으로 인정했음에도 고종은 줄타기 외교로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을 것이라고 믿었다.

 

이후 상황은 더욱 악화됐다. 러시아의 영향력은 완전히 소멸됐고, 급기야 고종은 을사늑약 체결 이후 조약 체결 당사자인 외부대신 박제순을 의정대신으로 승진시키고, 학부대신 이완용을 임시 외부대신으로 삼았다. 그러면서 고종은 뒤로는 의병들에게 밀서를 내려 나라를 되찾자고 독려했다. 이 같은 이중적인 정치 행보는 조선이 망국의 길을 내달리는 동안 계속됐다.

 

 

 

 

 개나 고양이보다 못했던 조선인들의 삶   

 

1910년 한일합방 이후 조선총독부가 설치되어 '총독정치'가 시작되었다. 조선총독은 일왕 이외에 그 누구에게도 책임을 지지 않으면서, 조선인에게는 일방적으로 복종만을 강요하는 명령권자였다. 조선에서는 그의 말이 곧 법이었다. 무단통치는 헌병경찰제도에 기반을 두었다. 헌병경찰제도는 군사경찰인 헌병이 보통경찰의 직무를 겸직할 수 있게 한 제도였다. 이것은 헌병으로 하여금 경찰권을 장악하게 한 것이다. 헌병경찰은 곧 총독의 수족이었다. 조선인을 완전무장해제시킨 다음 조선인의 모든 생활을 철저히 탄압하고 규제하기 위하여 헌병경찰에게 일정한 사법관의 특권을 부여하고 태형 제도를 제정, '범죄즉결례'를 공포했다.

 

이 때 무단통치의 시기의 조선인들의 삶은 우리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인간답게 살지 못했다. 불경한 언어와 거동, 일본인들에 대한 욕설 등을 이유로 조선인들은 일본 순사에게 강제로 연행되어 태형을 맞곤 했다. 태형 장면을 목격한 한 독립운동가의 증언을 보게 된다면 일본의 비인륜적 통치가 어느 정도인지 실감할 수 있다.

 

 

일본인들이 벌려놓은 형틀과 그 형편(刑鞭, 채찍)은 조선 왕조가 자국민을 징치(懲治)하기 위하여 시행했던 고대의 태형과는 그 성격과 내용이 달랐다. 형판(刑板)에 사람이 엎드리면 음부가 닿는 곳에 구멍을 뚫었으며 두 팔을 십자판에 벌려놓고 두 다리와 허리를 묶었다. 그들이 사용하는 우음경(牛陰莖, 소 음경으로 만든 매)은 끝에 납을 달아서 노출된 둔부를 치면 그 납이 살에 파고들어가 피가 흐르고 살이 찢긴다. 매는 1차 80대가 보통이며 중도에 기절하면 회생시켰다가 3일 후에 다시 때린다.

 

 

 

일본은 조선의 경제를 독점 착취하기 위해서 조선의 산업자본을 키우고 개발한다는 명목으로 제국의회에서 회사설치법안을 통과시키고, 동양척식주식회사를 설립하여 토지매수에 힘을 기울였다. 비옥한 토지를 강제로 사들여 조선총독부 소유로 만들고 토지에서 생산되어 나온 곡물들을 일본으로 반출해나갔다. 일본의 토지 착취 이후로 조선의 자작농들은 가난한 소작농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일본은 농업 경제만 억압했을 뿐만 아니라 산업 경제의 발전을 저해하기도 했다. '회사령'을 공포하여 조선인만 회사를 설립, 운영하지 못하도록 억제하는 기형적인 법령을 제정하기도 했다. 조선의 독립을 위한 민족자본 형성을 애초부터 불가능하게 만들려는 의도 하에서 제정되었다. 조선인들에게만 부당하게 대우하는 일제 강점기의 법령들은 식민 지배의 정당성을 유지하기 위한 일본의 속셈이 뻔히 드러나 있다. 그러면서도 당시 일본 관리들은 조선 회사령의 목적을 '조선 경제계의 발달에 기여하는 제도'라고 주장했다. 자신들의 식민 통치를 한국의 근대화 발전에 기여했다는 근거를 들어 과거사에 대한 반성을 하지 않으려고 하는 오늘날 일본 극우파들의 모습과 일맥상통하다.

 

 

 

 

 항일 정신이 살아 숨쉬던, 우리가 기억해야 할 역사

 

올해 3.1절을 맞아 전국 교교생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정신대문제'에 대한 인식조사에서 의하면 고등학생들의 86%가 '잘 모른다'고 응답했다고 한다. 그런데 다수의 학생들이 정신대문제에 대해서 잘 모른다는 응답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전체 학생의 67.8%이 정신대 문제에 대한 우리 정부의 일본 정부에 대한 태도를 부정적으로 보고 있으며, 일본정부의 고의적인 무관심에 대해서도 98%가 강력하게 비판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조사 결과는 한ㆍ일 과거사에 대한 역사교육을 강화해야 할 필요성을 느낄 수 있는 동시에 역사를 배우고 있는 청소년들이 일제 강점기의 역사를 민족 수난의 아픈 상처들만 기억되는 암울한 시기로 인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으로도 바라볼 수도 있다.

 

지금 일제 강점기 과거사에 대한 대중의 인식은 명확하면서도 한정적이다. 친일 청산 문제, 위안부, 독도. 이 세 가지 키워드를 역사적 배경을 중심으로 살펴보면 결정적으로 국권을 온전히 일본에게 속절없이 넘겨져야만 했던 무기력한 국력 상태로 유지되어 온 일제 강점기 때부터 불거진 민감한 사안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아직도 계속되고 있는 아픈 과거사인데도 역사를 배우고 있는 청소년들 심지어 학창 시절 역사를 배웠던 한국의 성인들마저도 이런 역사적 사실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있다. 역사를 잘 모르는 것보다 더 심각한 것은 한국인으로서 기억하기 싫은 우울한 역사라고 해서 그것을 외면하는 인식이다.

   

과거사를 교과서 공부하듯이, 오직 '친일 청산, 위안부, 독도' 프레임으로만 보는 단순하고 획일적인 역사적 시각과 인식에서 탈피해야 한다. 항일무장투쟁은 을사늑약, 한일합방 이전 근대에서 발생했던 의병 활동에서 그 기원을 찾아볼 수 있다. 그리고 1920년대 초반이 절정기였다. 나라를 팔아먹은 왕족과 지배층은 일제에서 주는 합방공로작과 은사금을 받고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반면에 일가족을 이끌고 북풍이 휘몰아치는 만주로 떠나 독립운동에 나서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회영과 이시형은 전 재산을 정리해 마련한 광복 자금을 갖고 6형제 일가족 60여명을 이끌고 망명길에 나섰다. 일제 강점기의 조선은 국권을 상실한 이미 죽은 나라나 다름 없었지만 여전히 항일 정신은 살아 숨쉬고 있었다. 이렇듯 나라의 패망 시기에 엇갈린 판단으로 자신의 길을 찾았던 수많은 독립운동가의 삶과 활동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매해 광복절 즈음에는 일본 군경에 의해 모진 고문을 당한 생존 유공자들이 쓸쓸한 노후를 보내고 있다는 언론보도가 심심찮게 나오고 있다. 이들은 정부에서 주는 적은 생계비에 의지해서 고령과 병마와 싸우며 힘겨운 삶을 이어가고 있다. 대한민국의 기틀을 세운 항일·독립유공자들이 국가로부터 정당한 예우를 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국가적 불행이자 시대의 아이러니라고 밖에 할 수 없을 것이다.

 

'항일'(抗日)의 사전적 의미는 '일본 제국주의에 맞서 싸움'이라는 뜻이다. '반일'(反日)은 '일본에 반대함 또는 일본에 반대되는 것'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사실 '항일'과 '반일'의 사전적 의미만 본다고해서 양자의 의미가 서로 명확하게 구분되어지는 건 아니다. 어찌 보면 '항일'과 '반일'의 개념은 서로 비슷해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일본 제국주의에 의한 과거사를 제대로 알지 못한 상태에서 일본을 반대하는 인식 및 정서를 과연 '항일'이라고 볼 수 있을까?  그것은 '반일'의 의미에 가깝다. 우리가 드라마 속에 흘러나오는 기미가요나 욱일승천기와 비슷한 이미지의 대상만 가지고 분노하는 것은 그저 역사 인식이 결여되고 과거사에 대한 불편한 기억 속에서 비롯된 '반일' 감정과 다를 바가 없다. 우리가 정말 과거사를 제대로 인식하려면 일본 제국주의의 지배에 의해서 망국의 길을 걷게 된 역사적 원인 및 배경을 알고 있어야하는 건 당연하다. 그리고 망국의 책임을 고종과 노론에게만 씌울 수는 없다. 조선이 망할 수 밖에 없었던 그 당시 국제적 정세 또한 간과해서는 안 될 역사적 사실이다.

 

과거사, 즉 일제 강점기의 근대사는 단지 우리 민족의 아픈 상처를 말끔히 지워낼 수 있는 청산의 대상이 아니다. 우리가 앞으로 나가야 할 방향을 비춰주는 거울이다. 우리의 역사는 함께 지키고 만들어가는 것이다. 일제강점기의 역사를 제대로 인식할 수 있도록, 또한 우리의 역사와 문화를 기억하고 올바른 역사관을 세울 수 있도록 정부뿐만 아니라 대중의 지속적인 관심과 노력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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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8-23 18:3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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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8-23 21:0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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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8-23 22:5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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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8-23 22:5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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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8-24 19:3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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