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속으로 들어간 화가들 - 위대한 화가들의 은밀한 숨바꼭질
파스칼 보나푸 지음, 이세진 옮김 / 미술문화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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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협찬받고 쓴 서평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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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점  ★★★★  A-







어두워져 가는 골목에 서면

어린 시절 술래잡기 생각이 날 거야.

모두가 숨어버려 서성거리다 무서운 생각에 나는 그만 울어버렸지.


- 조용필 못 찾겠다 꾀꼬리(1982) 노랫말 -

 






그대 먼 곳만 보네요. 내가 바로 여기 있는데

조금만 고개를 돌려도 날 볼 수 있을 텐데.


- 일기예보 인형의 꿈(1996) 노랫말 -





저기요, 나 여기 있어요!” 


조용히 있던 그림이 갑자기 입을 연다


, 여기 있다니까. 잘 좀 찾아봐요.” 


소곤소곤 말하는 그림에 눈을 마주친 관객

하지만 그림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고 지나가 버린다


잠깐만, 어디 가?” 


그림은 무심코 지나가는 관객의 발길을 잡아보려고 

한참 동안 그를 뚫어지게 쳐다본다


애타게 불러봐도 소용없다


그림은 혼잣말로 중얼거린다


당신은 다른 곳만 보고 가버리네요. 내가 바로 여기 있는데.” 


또 홀로 덩그러니 있는 그림. 또 기다리는 그림.

 


적막을 깨고 관객에게 말을 거는 그림은 살아 있다. 이 그림 속에 작은 그림이 숨어 있다. 그림의 목소리는 작은 그림에서 나온다. ‘작은 그림의 정체는 자화상, 즉 화가 자신이다. 그런데 화가의 얼굴이 너무 작게 그려져 있어서 그를 찾기가 쉽지 않다. 자화상의 희미한 목소리도 잘 들리지 않는다. 큰 그림 속 작은 자화상을 마주치는 관객은 술래가 된다. 하지만 작은 자화상은 언제나 술래다. 자기를 알아보는 관객을 찾으러 미술관을 헤매는 술래다. 그림속으로 들어간 화가들: 위대한 화가들의 은밀한 숨바꼭질은 조그만 술래들의 도우미다. 이 책은 카메오처럼 그림에 슬쩍 나타난 화가들이 어디에 있는지 알려준다.

 

그림을 그리려면 유명한 화가가 운영하는 공방에 가야 하던 시절이 있었다. 공방에서 그림 그리는 법을 배우고, 손님이 주문한 그림을 제작한다. 그들의 신분은 화가라기보다는 기술자 또는 장인이었다. 공방에서 만들어진 그림에 제작자의 서명이 없다. 조르조 바사리(Giorgio Vasari)는 이름 없이 알려질 뻔한 화가들을 본격적으로 소개한 사람이다. 바사리의 본업은 화가 겸 건축가다. 하지만 그의 작품들은 잊혔고, 당대 화가들의 일대기를 정리한 그의 책 르네상스 미술가 평전(6, 한길사)이 더 유명해졌다. 바사리는 이 책에서 처음으로 큰 그림 속 자화상을 언급했다. 붓을 내려놓고 술래가 된 것이다. 바사리의 술래잡기 놀이 덕분에 공방의 익명 기술자는 화가라는 개인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었다(Renaissance).

 

가장 유명한 큰 그림 속 자화상미켈란젤로(Michelangelo)의 벽화 최후의 심판벨라스케스(Diego Velazquez)시녀들이다. 두 작품 속에 화가가 숨어 있으며 지금도 여전히 말을 걸고 있다. 나는 여기 있다고. 그리고 내 그림 속에서 영원히 사는 중이라고.

 

관객과 화가 둘 다 계속 술래가 될 수밖에 없는 그림들도 있. 화가는 자신을 알리고 싶어 한다. 하지만 손님은 화가에게 자화상을 넣어도 된다고 요구하지 않는다. 이럴 때 화가는 가면을 쓴 자화상을 손님 몰래 그린다. 숨바꼭질을 제대로 즐기고 싶은 화가는 가면을 쓴 채 숨는다. 가면을 쓴 자화상은 자꾸만 말을 걸어오지만, 확실한 증거가 없으면 그가 진짜 화가라고 단정할 수 없다. 술래가 된 관객과 미술사학자는 수백 년 동안 이어져 온 숨바꼭질을 얼른 끊고 싶어 한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화가의 모습과 어느 정도 비슷하게 생긴 사람을 잡아서 저 사람이 화가일 거야라고 주장하는 것뿐이다. 엉뚱한 사람을 화가라고 지목한 관객을 지그시 바라보는 그림 속 화가는 어떤 심정일까? 자신의 정체가 들통나지 않아서 안도하고 있을까, 아니면 자기를 찾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다는 무서운 생각에 슬피 울고 있을까? 끝없는 기다림에 지친 자화상은 나지막이 넋두리를 늘어놓는다


조금만 눈길을 돌려도 날 볼 수 있을 텐데.”

 

익명이라서 영원히 술래로 남은 그림 속 작은 자화상이 미술관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미술관에서 하는 숨바꼭질은 끝나지 않는다


못 찾겠다 꾀꼬리. 나는야 언제나 술래.






숨어 있는 에 티를 찾으러 술래가 된 cyrus의 주석



* 118





 1505년에 율리우스 2세의 부름을 받아 로마로 건너온 미켈란젤로는 1564218일에 사망할 때까지 레오 10, 하드리아누스 6, 클레멘스 7, 바오로 3, 율리우스 3, 마르첼로 2, 바오로 4, 비오 5[1]까지 여덟 명의 교황을 모셨다.

 

[1] 역대 교황 재위 순을 따르면 바오로 4세 다음 교황은 비오 4. 그다음으로 선임된 교황이 비오 5세다. (참고 문헌: 호르스트 푸어만, 차용구 옮김, 교황의 역사: 베드로부터 베네딕토 16세까지, 도서 출판 길, 2013)





* 138





 특히 593~594년경 사망하고 30여 년이 지난 후 황제[2] 그레고리우스 1가 그의 경건한 삶을 전했기 때문에, 성 베네딕투스의 첫 번째 기적을 그림에서 보여 주지 않는다는 것은 안 될 말이었다.

 

[2] 그레고리우스 1세는 황제가 아니라 교황이다. 그와 레오 1세만이 ()교황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 126: 아폴론


* 243: 비너스, 에로스 [3]


[3] 이 책은 올림포스 신들의 이름을 그리스식이 아닌 로마식(라틴어)으로 표기되어 있다. 아폴론을 아폴로, 비너스는 베누스, 에로스는 쿠피도로 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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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나무라는 우주
더글라스 탈라미 지음, 김숲 옮김 / 도서출판 가지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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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점  ★★★★☆  A





하늘 천(), /땅 지(), 검은 현(), 누를 황(), 집 우(), 집 주(), 넓을 홍(), 거칠 황(). 하늘은 검고, 땅은 누렇다. 우주는 넓고 거칠다







한문 교본 천자문 첫 구절은 우리가 사는 곳이 우주 속 누런 티끌임을 알려준다. 칼 세이건(Carl Sagan)1990년 우주 탐사선 보이저 1호가 촬영한 지구 사진을 공개하면서 창백하게 빛나는 푸른 점(Pale Blue Dot)’으로 보이는 지구를 소중히 여기자고 말했다. 거대한 세상을 압축해서 만든 1,000자의 한문을 몰라도 된다. 우주가 어떤 곳인지 알면 된다. 우주는 크기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넓다. 우주에 셀 수 없을 정도로 무수히 많은 천체만 있는 건 아니다. 인간이 버린 쓰레기(수명이 다해 작동하지 않은 인공위성과 거기서 떨어져 나온 파편)’가 널려 있다. 이 넓고 거친 우주 한가운데에 소행성을 용케 피하면서 조용히 도는 누런 티끌은 정말 소중하다.


천자문에 묘사된 우주는 실은 우리가 아는 그 우주가 아니다. 우리가 아는 우주는 지구 밖 무한 세상이다. 한문으로 된 우주는 우리의 눈, , , 손과 발이 충분히 닿을 수 있는, 하늘과 땅으로 이루어진 세상을 뜻한다. 하늘은 뜨거운 태양 빛을 막아주는 두툼한 이불이라면, 땅은 살아있는 모든 것이 태어나고 자라는 아늑한 침대다천자문첫 구절에 나온 것처럼 지구와 우주는 이다. 하지만 집주인은 없다그런데 진화상으로 볼 때 동식물보다 늦게 나온 인간이 집주인처럼 행세한다지구와 우주는 인간이 독점하는 집이 아니다. 우주는 살아있는 모든 것의 보금자리다.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다. 지금까지 지구를 여러 번 못살게 굴었던 행적을 후회한다면서도 지구를 소중하게 지켜주지 못할망정 제2의 지구를 찾고 있다. 우주를 바라보는 시선을 과감하게 좁혀 보자. 그러면 우주는 지구 밖 무한 세계가 아닌, ‘지구 속 유한한 세계라는 걸 알 수 있다. 우주에 인간만 살고 있는 건 아니다. 지구를 푸르게 하는 숲과 바다도 동물들의 집이자 우주다.


참나무라는 우주가까이 있으면서도 소중히 여기지 않은 지구 속 우주를 소개한 책이다. 참나무 한 그루는 새와 곤충들의 보금자리이자 튼튼하고 오래 가는 지구 속 우주. 이 책의 저자는 드루이드(druid)’. 드루이드는 참나무를 아는 사람(druwides, 드루이드의 어원으로 추정되는 고대 켈트 어)’이다. 드루이드가 모든 동물을 불러들이면서 소통할 수 있는 영적인 힘을 가진 마법사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실제 드루이드는 자연에 관심이 많고, 자연과 어울려 사는 법을 전파한 사제. 현대의 드루이드가 된 저자는 자신의 정원에 심은 참나무가 일 년 동안 자라는 내내 일어나는 또 다른 생명들의 탄생 과정을 독자들에게 알려준다.


푸르른 이파리와 누런 줄기로 이루어진 참나무 우주에 작은 곤충이 살고 있다. 참나무 이파리는 애벌레의 먹을 수 있는 집이다. 그러나 정원 가꾸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꽃과 나무에 모여든 곤충을 달갑지 않은 손님으로 여긴다. 거대한 정원 주인은 작은 손님들을 향해 해충제를 뿌려서 쫓아낸다. 정원은 인공 자연이다. 하지만 인간의 손길을 거치지 않아도 그 안에서 새로운 생명이 태어난다. 정원도 곤충이 사는 우주인 셈이다. 식물을 좋아하는 반응과 식물을 소중히 여기는 반응은 항상 일치하지 않는다. 참나무 심기를 거부하는 정원 주인이 있다. 그들은 땅속에 단단히 박혀 쭉쭉 뻗은 참나무 뿌리가 다른 식물이 자라는 데 방해된다고 생각한다. 푸르른 빛을 잃고 누렇게 변한 참나무 낙엽은 정원 외관을 망치는 쓰레기로 취급받는다.


참나무 우주는 욕심이 없다. 참나무 주변에 어린나무 몇 그루를 심으면 땅속에 뿌리가 엉킨다. 서로 다른 종의 나무뿌리가 엉켜도 나무는 잘 자란다. 오히려 나무들의 뿌리가 엉키면 튼튼해진다. 태풍이 밀쳐도 뿌리째 뽑히면서 쓰러지지 않는다. ‘참나무 우주는 한결같다. 겨울이 되면 생명력이 다한 이파리는 더 이상 푸르른 빛을 내지 않는다. 참나무는 거추장스러울 수 있는 죽은 이파리를 땅에 버리지 않는다참나무 우주는 아름다움을 잃게 되는 변화, 즉 노화를 순순히 받아들인다.


2의 지구를 간절히 찾고 싶은 사람은 다중 우주설을 믿는다. 우주가 무한 세상이라면 우리가 발견하지 못한 또 다른 n개의 우주가 있을 수 있다는 학설이다. 하지만 다중 우주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는 실증적 증거는 나오지 않았다. 지구 밖 다중 우주의 존재 여부에 관심을 쏟는 것보다 지구 속 다중 우주를 만들면 어떨까? 저자는 참나무를 많이 심으면 생태계가 회복될 수 있으며 지구온난화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강조한다. 나무를 많이 심는다고 해서 대기의 탄소가 줄어들지 않는다. 나무가 죽으면 탄소가 나온다. 참나무는 수명이 길고, 탄소를 적게 배출한다. 앞서 언급했듯이 참나무는 다른 종의 나무와 어울릴 줄 안다. ‘참나무 다중 우주에 참나무 우주만 있는 게 아니다. 새와 곤충의 보금자리가 되어주는 ○○나무 우주도 있다. 숲 우주는 또 다른 숲 우주를 만든다. 못된 인간 때문에 골골대는 현재 지구의 얼굴은 창백하다. ‘창백한 푸른 점’의 푸르른 생기를 되찾아주려면 참나무 우주를 심어야 한다.






<cyrus의 주석>

 

 

* 235

 

 대부분 초식 곤충은 이파리를 갉아 먹기 보다 진액을 빨아 먹는 방식을 택했다. 이들, 빨대 구조의 입을 지닌 곤충[]은 애벌레일 때는 아래턱이 발달해 단단한 식물 조직을 씹을 수 있다가 어른벌레로 탈바꿈하는 과정에서 빨대 같은 역할[]을 하는 가느다란 철사 모양으로 변한다.

 

[] 나비의 종류는 다양하다. 그래서 꽃에서 나오는 꿀과 나무 수액을 먹으면서 사는 초식성 나비만 있는 게 아니라 배설물, 동물의 피, 심지어 다른 곤충을 잡아먹는 잡식성 나비도 있다. 나비는 연약함아름다움을 상징하는 곤충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의외로 나비는 오랫동안 비행할 수 있을 정도로 강인하며 척박한 곳에서도 산다


나비의 주둥이는 빨대 구조의 입이 아니다. 나비의 주둥이에 아주 작은 구멍들이 있다. 따라서 나비는 꿀을 마시는 것이 아니라 흡수하듯이섭취한다. 나비의 주둥이는 스펀지와 같다고 보면 된다. ‘참나무 우주의 단골 거주 곤충인 나비와 나방의 다양한 삶을 알려주는 웬디 윌리엄스(Wendy Williams)나비의 언어(이세진 옮김, 그러나, 2022)참나무라는 우주와 같이 읽어볼 만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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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글자로 불리는 사람
파스칼 키냐르 지음, 송의경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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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점  ★★★★  A-






독서는 도락(道樂)이다. 국어사전이 알려준 도락의 의미는 세 가지다. ()를 깨달아 스스로 즐기는 일. 재미나 취미로 하는 일. 술과 도박 같은 못된 일에 흥미를 느껴 빠지는 일. 책에 조언을 구하는 독자는 도락가가 아니다. 책 속의 보물을 찾는 독자가 진정한 도락가다. 도락가가 원하는 보물의 종류는 다양하다. 그중 도락가가 선호하는 책 속의 보물은 실생활에 도움이 되지 않거나 일반인들이 잘 모르는 잡학이다. 보물은 명성 있는 저자가 쓴 책 속에만 묻혀 있지 않다. 무명 저자의 책, 또는 돈 주고 보면 안 될 쓰레기책에도 보물이 있다. 전자의 보물찾기는 진흙 속에 파묻힌 진주를 찾는 일이라면, 후자는 괴팍한 취향을 가진 도락가가 선호하는 일이다


오탈자는 책에 생긴 때다. 그런 오탈자를 보물로 여기는 도락가가 있다. 그의 눈은 단순히 책을 보기 위한 신체 기관이 아니다. 종이를 빡빡 문지르는 때밀이 수건이다. 오탈자 찾기 도락가가 종이를 문질러서 오탈자들을 쏙쏙 골라내면 저자와 편집자는 따가운 고통을 느낀다. 그런데 너무 세게 문지르는 때밀이는 피부 건강에 좋지 않다. 종이 때 밀기도 마찬가지다. 오탈자 찾기 도락가가 과욕을 부리면 오탈자가 아닌 낱말마저 문질러서 떼려고 한다. 오탈자 찾기 도락가도 사람인지라 그가 쓴 글에도 맞춤법이 틀린 낱말이 있다. 그러니 잘하자cyrus.

 

도락가가 책을 너무 좋아하면 책을 훔치는 도벽을 끊지 못한다. 책 도둑은 도둑이 아니라고 여기던 시절이 있었다. 지식 습득에 대한 욕구를 좋게 생각했던 과거 사람들은 책 도둑을 너그러이 용서했다. 하지만 책을 소유한 사람을 죽이면서까지 훔치는 행위는 중범죄다.

 

책을 훔치는 도벽이 없어도 독자는 조용한 도둑이다. 프랑스의 작가 파스칼 키냐르(Pascal Quignard)는 독서를 소리 없는 절도에 비유한다. 그가 쓴 산문 세 글자로 불리는 사람독서라는 고상한 범죄 행위를 예찬한다. 책 제목의 세 글자도둑을 뜻하는 라틴어 ‘fur’이다. 고대 로마인들은 부정적인 의미의 단어를 제 입으로 말하길 꺼렸다. 그래서 ‘fur’를 직접 말하는 대신에 세 글자로 불리는 사람이라고 에둘러 표현했다.

 

책 읽는 도둑도 책 속의 보물을 훔치는 일에 능숙한 도락가다. 그들이 훔치고 싶은 보물은 앞서 언급한 쓸데없는 잡학이라면, 쓸모 있는 보물은 다른 나라의 언어다. 언어 훔치기 도락가의 활동 구역은 외국 서적이다. 지식이든 언어든 독자는 타인이 쓴 책 속에 있는 모든 것을 훔쳤다. 책을 읽으면서 훔친 남의 보물로 치장해서 만들어진 존재가 바로 . 키냐르는 책 읽는 인간을 스스로 만들어내는 창조자가 아닌 ‘ab alio(타인을 통한) 피조물로 여긴다. 그러므로 독자는 겸손해야 한다. 불손하고 허세가 심한 독자는 사기꾼이다. 그들은 저자나 다른 독자들의 소중한 생각들을 훔쳐 왔으면서 자기가 원래부터 가지고 있었다는 식으로 거짓말을 한다.

 

글 쓰는 도락가는 책 속 보물을 계속 만져보고, 군더더기를 잘라내고, 다듬는다. 그렇게 해서 다른 독자들이 탐낼 만한 새로운 보물이 나온다. 그것이 바로 한 편의 글과 한 권의 책이다서평은 책 속 보물찾기 전문 도락가가 다시 만드는 보물이다. 서평 쓰는 도락가가 주로 찾는 보물은 책의 핵심 내용이다. 17세기 프랑스 시인 생 타망(Saint-Amans)은 저자를 고기파이 속에 잠들어 있는 토끼고기로 비유했다. 책은 고기파이를 담은 접시다. 서평 쓰는 도락가는 칼과 포크를 쥐고 고기파이에 박힌 토끼고기를 골라낸다. 먹음직스러운 토끼고기는 저자가 독자들에게 먹여주고 싶은 본인 생각이다. 독자는 고기파이를 먹기 전에 이미 그것을 맛본 도락가의 서평을 먼저 본다. 독자는 서평을 읽으면서 고기파이가 먹을 만한지 아니면 맛이 괜찮은지 판단한다.

 

서평 쓰는 도락가는 보물을 찾으려는 독자들을 위해 책을 잘게 나누고 찢어야한다. 종이를 문질러서 오탈자라는 때를 제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책 속의 오류와 거짓 정보를 찾아내서 찢는다. 책은 청정 지식 보고가 아니다. 거기에도 독자들이 걸러내야 할 보물인 척하는 가짜오물이 종종 있다. 보물이 아니라고 해서 모른 척할 수 없다. 서평 쓰는 도락가는 그걸 발견하는 즉시 잘라내야 한다. 저자의 명성에 기가 눌리거나 맹목적으로 신뢰하면 책의 오물이 눈앞에 있는데도 찾지 못한다. 서평 쓰는 도락가는 좀 더 과감해져야 한다. 저자의 견해를 무조건 믿어서도 안 되며 내가 믿는 지식도 틀릴 수 있다는 회의주의적 자세를 유지해야 한다. 그는 책의 오물만 찾아 찢어버리는 책 더 리퍼(책 + Jack the Ripper)’. 비판과 검증은 책 더 리퍼가 책을 읽을 때마다 들고 다니는 무기다.

 

키냐르는 소리 없는 절도(vol)’ 행위인 독서가 올빼미의 비상(飛上, vol)과 흡사하다고 했다. 독일의 철학자 헤겔(Hegel)은 자신의 책 서문에 미네르바의 올빼미는 황혼이 저물어야 그 날개를 편다(Die Eule der Minerva beginnt erst mit der einbrechenden Dämmerung ihren Flug)”라는 구절을 남겼다. 세상이 어두워지면 인간의 정신은 몽롱해진다. 한 치 앞을 내다보기 어려울수록 인간은 음모론과 가짜 정보를 너무 쉽게 믿어버린다. 그럴 때 지혜의 신 미네르바의 곁을 지키는 올빼미는 힘차게 날갯짓한다. 미네르바의 올빼미 독자는 진짜 보물’, 즉 진실을 원한다. 소중한 보물을 찾으러 글자 나무로 이루어진 책 숲을 혼자서 모험한다. 책 숲 이곳저곳 전전하면서 자신과 타인이 믿고 있는 지식과 정보가 맞는지 아닌지 스스로 검증한다. 하지만 독서와 글쓰기를 예찬한 키냐르도, 미네르바의 올빼미 독자도 안다. 한평생 책 속의 보물을 찾는 모험이 얼마나 외롭고, 힘들고, 위험한지를.







그래도 나는 독서와 글쓰기를 즐기는 도락가, 대도(大盜)’로 살아가고 싶다. 매일 밤, 책 읽기 전에 기도해야겠다. 미네르바님, 오늘도 정의로운 도둑이 되는 걸 허락해주세요.







<‘오탈자 찾기 전문 도락가’, ‘책 더 리퍼’ cyrus가 발견한 책의 때와 오물>

 



* 26쪽 옮긴이 주 6







아우구스티누스 황제 아우구스투스(Augustus)






* 195쪽 옮긴이 주 24





아프로디테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미와 사랑의 여신. 로마 신화의 디아나(Diana)[주1].



[주1] 디아나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사냥의 신 아르테미스(Artemis)와 관련된 로마 신이다. 아프로디테에 대응하는 로마 신은 베누스(Venus).






* 223쪽 옮긴이 주 3





 제임스 조이스의 장편소설(1922) 율리시스에 나오는 인물.[2] 이 작품이 오디세이아를 모방했다는 사실을 암시하고자 오디세우스라는 주인공의 이름을 짐짓 율리시스라 쓴 것으로 보인다.



[2] 조이스의 소설에 율리시스(오디세우스)’라는 이름의 인물이 나오지 않는다. 율리시스의 주요 등장인물은 오폴드 블룸(Leopold Bloom)과 그의 부인 몰리 블룸(Molly Bloom), 조이스의 또 다른 소설 젊은 예술가의 초상에 나온 스티븐 데덜러스(Stephen Dedalus) 등이다. 율리시스호메로스(Homer)의 서사시 오디세이아의 서사 구조와 등장인물들을 패러디한 소설이다.폴드 블룸은 오디세우스, 몰리는 페넬로페(Penelope)에 해당한다.






* 242쪽 옮긴이 주 1







오레스트 오레스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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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수하 2023-09-05 08: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지성미 넘치고 날카로운 사이러스님의 글 잘 읽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은 제목이 가장 마음에 드는 군요 :)
(중간에 들어간 이미지의 의미를 아시는 분이.. 많겠지요?)

cyrus 2023-09-06 06:58   좋아요 1 | URL
글 제목과 마지막 사진이 이 글의 ‘웃음 벨’이라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반응이 조용하네요. 수하 님이 알아주셔서 기분이 좋아요. ^^

stella.K 2023-09-06 10: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난 왜 엉뚱하게 그런 이미지를 썼나했던니 나름 심오했네. 근데 저 이미지는 우리 사랑하게 해주세요 이미지 아닌가?
암튼 이 글은 근래에 본 너의 글중 단연 쵝오다! 인정! 근대 이번 같은 경우엔 오탈자는 슬쩍 넘어가지 꼭 그리해야만 했냐? 이 미네르바 올빼미야! 😤

cyrus 2023-09-07 06:53   좋아요 1 | URL
제 눈에 보이는 걸 어찌 그냥 넘어갑니까? ㅋㅋㅋㅋ 저는 정의로운 일을 했을 뿐이에요. ^^

lyssauvage 2023-09-06 11: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책 더 리퍼 cyrus 님
지적하신 내용 모두 맞습니다.
이 책을 번역하고 주를 단 오류의 생산자로서
한편 부끄럽고 (왜 이런 잘못을...? )
다른 한편으론 정정의 기회를 가지게 되어 한없이 감사한 마음입니다.
2쇄에 필히 반영토록 하겠습니다.

cyrus 2023-09-07 06:50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제 글을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파스칼 키냐르의 책을 이번에 처음 읽었는데, 정말 마음에 들었어요. 역자님이 예전에 번역한 다른 키냐르의 책들도 읽어보고 싶어졌어요. ^^

2023-09-07 10: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9-11 06: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9-13 08: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DSAC 아트 페스티벌대구 달서아트센터에서 열리는 지역민을 위한 예술 축제다. 이 축제에 총 6회의 공연 및 연주회가 편성되어 있다. 그중 다섯 번째로 순서로 진행되는 행사가 달서 청년연극제







826일부터 3주간 매주 토요일 오후 3, 7시에 청년 연극인들의 공연을 볼 수 있다. 내가 보려는 공연은 내일 선보이는 극단 폼(form)의 보이첵(Woyzeck, 보이체크).































* 게오르크 뷔히너, 임호일 옮김 보이체크 / 레옹스와 레나(지만지, 2019)

 

* 게오르크 뷔히너 원작, 타데우시 브라데츠키 연출 보이체크: 연습과 과정의 기록(올댓콘텐츠, 2011)

 

* [절판] 게오르크 뷔히너, 최병준 옮김 보이체크(예니, 2005)

 

* 게오르크 뷔히너, 박종대 옮김 뷔히너 전집(열린책들, 2020)

 

* 임호일 게오르크 뷔히너의 문학과 삶(지만지, 2021)




보이체크는 독일의 극작가 게오르크 뷔히너(Georg Büchner, 1813~1837)의 미완성 유작이다. 뷔히너는 보이체크를 포함한 희곡 세 편(당통의 죽음》과 레옹스와 레나), 단편소설 한 편(렌츠)만 남긴 채 23세로 요절했다. 걸출한 소설가와 시인들이 남긴 불멸의 고전들로 채워진 독일 문학사에 극작가 뷔히너가 있어야 할 자리는 좁아 보인다. 소설과 시는 책 좋아하는 독자들이 문학의 범주를 논할 때 가장 먼저 나오는 친숙한 장르다. 문학의 한 장르인 희곡과도 친해지면 고전으로 불릴 만한 극 작품을 접할 수 있으며 위대한 극작가를 만나게 된다. 보이체크는 지금까지도 여러 차례 공연된 고전 희곡이다. 뷔히너는 독일 문학사에 반드시 포함되어야 할 극작가다.


뷔히너는 낭만주의 문학의 중심지인 독일에서 태어났다. 낭만주의는 계몽주의 사상가들이 강조한 이성과 합리주의에 반발하여 생긴 사조이다. 그래서 낭만주의 문학은 감정과 상상력을 중시한다. 낭만주의자들이 현실 너머세계로 시선을 향하고 있을 때 뷔히너는 현실 그 자체’만 바라보고 있었다. 뷔히너는 유복한 유산계급인 의사의 아들로 태어나 대학에서 의학을 공부했다. 하지만 뷔히너는 안락한 삶을 살아가기를 거부했다. 그는 하층민을 억압하는 사회에 비판 의식을 가졌고, 정부와 지배 계급을 비판하는 팸플릿을 만들어 농민들에게 배포하기도 했다.


















* 장 코르미에 체 게바라 평전(실천문학사, 2005)

* [절판] 체 게바라 체 게바라의 모터사이클 다이어리(황매, 2012)



 

혁명가 기질을 드러낸 청년 뷔히너의 모습은 남미의 혁명가 체 게바라(Che Guevara)의 젊은 시절과 비슷하다. 체의 아버지는 병원 원장이었고 체는 의대를 졸업했다. 체는 오토바이를 타고 남미 대륙을 여행하면서 비참하게 살아가는 빈민들을 만난다. 오토바이 여행 이후로 체는 의사 가운을 벗어 던지고, 군복을 입어 혁명에 뛰어든다.


보이체크하층민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희곡이다. 보이체크는 희곡의 주인공 이름이며 실존 인물이다. 보이체크는 자신과 교제한 과부를 죽여 처형당한 인물이다. 여기까지만 보면 살인을 저지른 범죄자다. 당시 의사들은 보이체크의 정신 상태를 관찰했는데, 그들이 남긴 보고서에 따르면 보이체크를 정신 이상자로 판단했다. 뷔히너는 이 보고서를 참고하면서 희곡을 썼다. 하지만 보이체크의 범행을 단순히 성격 결함에서 비롯된 끔찍한 일탈로만 보지 않는다. 뷔히너가 묘사한 보이체크는 인간으로 제대로 대우받지 못한 하층민을 상징한다


보이체크는 대위의 이발사로 일하지만, 궁핍한 일상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대위는 자신보다 계급이 낮은 비천한 보이체크를 깔본다. 보이체크의 연인 마리는 경제적으로 불안정한 일상에 권태감을 느끼고, 군악대장(‘고수장으로 번역되기도 한다)과 바람피운다. 보이체크는 돈을 더 벌려고 아르바이트까지 하게 된다. 그 일은 바로 의사의 황당한 실험 대상이 되는 것. 의사는 사람이 완두콩만 먹으면 당나귀로 변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의사는 자신의 생각을 증명하기 위해 보이체크에게 완두콩만 먹인다. 보이체크는 완두콩을 먹은 대가로 매일 2그로셴을 받는다


하층민을 차별하고 억압하는 사회 구조에서 인간과 비인간을 나누는 기준은 계급이다. 보이체크는 불평등한 사회 안에서 아이러니한 비극을 겪는 인물이다. 보이체크는 자신을 가난하고 쓸모없는 비인간으로 취급하는 현실을 견디지 못한다. 그의 분노는 마리에게만 향해 있다. 결국 살인을 저지르면서 분노를 표출한다. 보이체크는 살인자가 됨으로써 인간이길 스스로 거부한다.


보이체크는 일반적인 희곡과 확연히 다르다. 보이체크는 순차적으로 진행되는 기승전결의 서사 구조로 되어 있지 않다. 완성되지 않은 초고 형태라서 제목이 없는 27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연출 지시문도 많지 않다. 보이체크》에 27개의 글 파편과 뷔히너의 여백만 남아 있다. 연출가와 각색자는 새로운 대사를 추가해 뷔히너의 여백을 채울 수 있다. 배우는 뷔히너가 종이 위에 만들다 만 인물들을 무대 위에 올려 자신만의 연기력으로 빚어서 만들 수 있다. 그렇기에 극단 폼이 보이첵을 어떻게 보여줄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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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3-09-01 2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우, 좋겠다. 난 언제 연극을 봤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ㅠ
부럽다. 좋은 시간되길...^^


cyrus 2023-09-04 20:10   좋아요 1 | URL
토요일에 갑자기 일이 생겨서 공연 못 봤어요... 정말 그날 생각하면 너무 아쉽고 화가 나네요.. ㅎㅎㅎㅎ
 
화가들의 마스터피스 - 유명한 그림 뒤 숨겨진 이야기
데브라 N. 맨커프 지음, 조아라 옮김 / 마로니에북스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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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협찬받고 쓴 서평이 아닙니다.



평점


4점  ★★★★  A-








Cry baby, cry baby, cry baby.

Honey, welcome back home.


[중략]

 

Honey, your heartache, too?

And if you need me, you know

That I’ll always be around if you ever want me.

 

 

- 재니스 조플린(Janis Joplin) Cry Baby(1971) 노랫말 -





명화는 걸작의 동의어다. 매우 훌륭한 예술 작품(傑作)은 사람들의 칭송을 받아서 유명해진 것(名畫)이다명화와 걸작의 정의는 모든 사람이 동의할 수 있을 정도로 단순하다. 하지만 명화와 걸작으로 불릴 만한 자격 및 조건은 천차만별로 다르다. 생각보다 복잡하다.


명화와 걸작에 피어나는 영롱한 빛은 세월이 지나도 사그라지지 않는다. 하느님께서 빛이 생겨라!’ 하시자 빛이 생겨났다.” 성경 첫 장면에 따르면 하느님은 하늘과 땅을 창조한 뒤에 빛을 만들었다. 빛나는 명화의 창조주는 예술가다. 그러나 명화는 예술가가 빛이(명화가) 생겨라!’라고 말해서 한순간에 나온 것이 아니다천재소리를 듣는다고 해도 예술가는 명화를 뚝딱 만들지 않는다. 예술가는 그림이 본인이 보기에[주1]좋았다고 생각할 때까지 붓을 잡고 휘두르는 사람이다. 명화 나와라 뚝딱!”하고 주문을 외치면서 도깨비방망이를 휘두르지 않는다.


엄마 품속에 먹고 자란 아기는 거대한 세상에 나오자마자 우렁차게 운다. 이와 마찬가지로 감정과 생각을 표현하는 예술가의 머리에서 태어나 완성된 예술 작품은 말이 없다. 예술 작품이 완성되자마자 응애, 저 명화예요라고 말하지 않는다보부아르(Simone de Beauvoir)가 남긴 명언을 빌리자면 명화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 캔버스에서 태어나는 것은 대중의 반응과 평가를 기다리는 예술 작품이다. 부모의 마음을 지닌 예술가는 갓 태어난 예술 작품을 귀한 걸작으로 생각한다. 예술가는 당연히 갓난 예술 작품이 누구에게나 사랑받는 멋진 명화로 성장하길 원한다. 하지만 갓난 예술 작품을 바라보는 대중의 말이 부드럽고 달콤한 모유 같은 칭찬이 아닌 뾰족한 꼬챙이처럼 생겼다면? 대중의 쌀쌀한 말은 갓난 예술 작품의 연약한 귀를 따갑게 만드는 소음이 된다. 뾰족한 소음이 무서운 갓난 예술 작품은 기분이 좋지 않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2]이다. 대중은 예쁘고 귀엽고 빛나는 걸작을 좋아한다. 그들의 눈에는 울기만 하는 예술 작품이 귀엽지 않은 실패작으로 보인다.


대중의 관심에서 멀리 떨어진 갓난 예술 작품에도 한 줄기 빛이 있다. 그 빛은 아주 얇아서 희미하다. 대중의 눈에 들리지 않을 정도로 조용하게 퍼진다그 모습이 화려하지 않지만, 대중들에게 인정받는 날이 언젠가는 찾아온다. 평범한 예술 작품은 그렇게 어엿한 명화가 되고, 무색에 가까운 빛은 알록달록 아름다워진다.


화가들의 마스터피스: 유명한 그림 뒤 숨겨진 이야기는 명화의 화려한 빛에 가려진 긴 어둠을 들려준다. 긴 어둠책의 부제인 유명한 그림 뒤 숨겨진 이야기, 갓난 예술 작품이 갓생사는 명화가 되기까지 앓아야 했던 성장통이다







보티첼리(Sandro Botticelli)비너스의 탄생』(1485년경)은 바다에 일은 거품에서 태어난 사랑의 신 비너스[Venus, 그리스 신화 속 이름은 아프로디테(Aphrodite)’]의 몸을 우아하게 표현한 작품이다. 거대한 조개 위에 서 있는 비너스의 자세는 너무나도 유명하다이 작품 속에 모든 남자가 홀딱 반하게 만드는 사랑의 신이 한가운데에 우뚝 서있는데도 처음에는 대중에게 많은 사랑을 받지 못했다. 1815년 우피치 미술관에서 공개된 이후부터 그림 속 비너스의 빛이 점점 커지기 시작한다. 아름다운 것만 보면 미쳐버린 남성 시인과 소설가들은 미술관에서 폭발한 비너스의 빛에 압도당한다. 그들이 여러 번 비너스를 언급하고 칭송함으로써 긴 어둠을 먹고 자란 보티첼리의 그림은 빛나는 명화로 만들어지게 된다.


레오나르도 다빈치(Leonardo da Vinci)모나리자』(1503년경)도 처음에는 여인을 그린 평범한 초상화였다. 희미한 미소의 의미도 수수께끼고, 미소 짓는 여인의 정체도 수수께끼인 모나리자는 어떻게 루브르의 A급 명화가 되었을까. 우리는 모나리자의 우아함과 다빈치 특유의 천재성 덕분에 명화가 빛을 발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모나리자의 빛을 유명하게 만든 사람은 다빈치와 그의 주변 사람들도 아니요, 건물 전체가 걸작이라고 할 수 있는 루브르도 아니다. 모나리자를 명화로 키워준 사람은 다름 아닌 여행 안내자들이다. 자본주의가 도시에 스며들던 19세기 이후부터 중산층은 충분히 먹고살 수 있을 정도로 부유해졌다. 돈 많은 귀족만 드나들던 미술관에 중산층의 발길이 잦아졌다. 관광업도 발전하면서 파리의 여행 안내자들은 관광객들에게 파리의 명소들을 소개했다. 그 명소 중 하나가 모나리자가 사는 집, 루브르다. 과장이 살짝 더해진 여행 안내자들의 입소문, 여기에 모나리자의 미소에 피어나는 수수께끼의 빛을 직접 느낀 관광객들의 입소문이 더해져서 모나리자는 가까이서 보기 힘든 특A급 명화가 되었다


저자는 모나리자의 예를 들면서 명화의 조건이 단순하지 않음을 강조한다. 앞서 말한대로 명화의 조건은 생각보다 복잡하다무조건 잘 만들고, 아름답다는 이유만으로 명화가 되지 않는다여기서 명화의 여러 가지 조건을 나열하지 않겠다. 다만 분명한 사실은 예술가의 인생은 짧고, 예술가의 작품이 진정한 예술로 인정받는 시간은 길다그 시간 속에 예술 작품은 까다로운 대중의 시선과 날이 서린 폭력적인 언어를 묵묵히 귀 기울여 들었다. 성장통은 너무 아팠지만 참고 견뎠다. 쓰디쓴 인내의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예술 작품의 빛은 무관심과 혹평으로 만들어진 두꺼운 어둠을 뚫어냈다. 한 송이 명화로 피우기 위해 작품은 먹구름 같은 어둠 속에서 그렇게 울었나 보다[3]. 우리는 명화라는 이름으로 남은 멋진 어른을 바라보고 있다. 한때 어두운 아기였던 그림의 서러운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4].






<cyrus의 주석>



[1] 하느님께서 빛이 생겨라!” 하시자 빛이 생겨났다.

그 빛이 하느님 보시기에 좋았다. 하느님께서는 빛과 어둠을 나누시고


(공동 번역 성서창세기, 1:3~4)




[2] 백석의 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마지막 행.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 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3] 서정주의 시 국화 옆에서2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4] 박인환의 시 목마와 숙녀중에서

 

모든 것이 떠나든 죽든

그저 가슴에 남은 희미한 의식을 붙잡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서러운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 21


 1855~1856년 이탈리아 여행에서 에드몽 드 공쿠르(Edmond de Goncourt)와 그의 형제 (Jules de Goncourt)[5]은 마치 조각상 같은 금발의 비너스가 발푸르기스의 밤을 주관하는 파우스트 전설 속 환영 같다며 칭송했다.



[5] 에드몽이 형, 쥘이 동생이다. 따라서 그의 동생이라고 써야 한다.





* 31


 수년간 초상화의 모델과 그녀의 묘한 미소를 둘러싼 자극적인 이야기들이 생산되었다. 소문인즉 모델은 레오나르도의 정부였고, 비밀을 가진 여인이자 좋은 새어머니였다는 것이다.[주6]



[6] 모나리자모델이 다 빈치의 새어머니’라는 소문의 진원지는 정신분석학자 프로이트(Sigmund Freud). 프로이트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유년의 기억>이라는 글에서 다빈치의 유년 시절을 정신분석학적 방식으로 분석했다











프로이트가 분석한 다빈치의 작품은 <성 안나,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1519년경). 성 안나(그림 가운데)는 마리아의 어머니다. 그림에서 아기 예수를 안으려는 여성이 마리아. 프로이트는 성 안나의 얼굴이 마리아보다 젊게 그려진 것에 주목한다. 프로이트의 견해를 바탕으로 다빈치의 그림을 해석하면, 아기 예수는 젊은 두 어머니와 같이 있. 프로이트는 두 어머니로 해석할 수 있는 성 안나와 마리아가 각각 어린 다빈치를 키운 친모와 새어머니를 상징한다고 주장한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유년의 기억>프로이트 전집의 열네 번째 책 예술, 문학, 정신분석(열린책들, 2020년)에 수록되어 있다. 성 안나의 미소는 모나리자 미소와 유사하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다빈치의 새어머니가 모나리자의 모델이라는 견해가 나온 듯하다.






* 34


(월터 페이터의) 르네상스 역사 연구』 [7]



[7] 본서 25에 언급된 월터 페이터(Walter Pater)의 저서 제목은 르네상스 역사에 관한 연구. <르네상스 역사에 관한 연구>34쪽의 <르네상스 역사 연구>는 내용이 같은 책이다. 페이터의 저서는 르네상스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었는데, 번역본은 총 3종이다. 문예출판사(이덕형 옮김, 1982), 종로서적(김병익 옮김, 1988), 학고재(이시영 옮김, 2001)에서 출간되었지만, 모두 절판되었다.






* 152

 

 피카소는 고야가 1810년에서 1812[8] 사이에 만든 82점의 에칭에 감탄했다.

 


[8] 스페인의 화가 프란시스코 고야(Francisco de Goya)의 판화집 <전쟁의 참화> 관련 도판 설명문 중 일부다. <전쟁의 참화>1810년에서 1820년 사이에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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