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이었어요.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당 전국장애인위원회 발대식에서 장애인을 비하하는 의미의 말을 했었죠.

 

 

“신체 장애인들보다도 더 한심한 사람들은…‥ 아, 제가 말을 잘못했습니다. 더 우리가 그 깊이 생각해야 될 사람들은 정신 장애인입니다. 정치권에서는 말 하는 것 보면 정상인가 싶을 정도로 정신 장애인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까지 우리가 포용하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출처]

 

 

이 대표가 ‘정신 장애인’이라는 표현을 썼다는 점이 잘못되었다고 지적하고 싶은 게 아닙니다. 정신 장애인을 ‘비정상적인 사람’으로 구분 지어서 정치인을 비판하는 발언이 잘못되었습니다. 그리고 정신 장애인을 ‘포용하기 쉽지 않은 존재’로 규정한 이 대표의 생각은 장애인을 배제하는 인식을 부추길 수 있습니다.

 

 

 

 

 

 

두 달 전에 김현아 자유한국당 의원은 대통령을 한센병 환자로 비유했습니다. 김 의원은 대통령의 행보(자기 생각과 다른 국민의 고통을 느끼지 못한 채 일방적으로 정책을 추진하는 모습)가 문제 있다면 의학적 용어를 사용하면서 비판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 발언을 놓고 정치권에서 비판이 이어졌습니다만, 그녀의 발언을 두둔하는 네티즌들도 있었습니다.

 

이 대표와 김 의원은 각각 장애인과 환자를 ‘정상과 거리가 먼 사람’, ‘무능력한 사람’과 같은 의미로 설정하여 정치인을 비판했습니다. 두 사람의 발언은 사회적 소수자인 장애인과 만성 질환 환자를 ‘병리화(pathologizing)하여 그들의 비정상성, 결함, 오류 등 부정적인 이미지를 더욱 고착화하는 ‘장애 혐오’를 재생산하게 만듭니다.

 

이번 주 월요일에 진행된 페미니즘 스쿨 세 번째 강의 주제 중 하나가 ‘병리화’였습니다. 병리화는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은 단어입니다. 책을 읽다 보면 이 단어를 종종 보곤 합니다만, 이게 정확히 무슨 의미인지 몰랐습니다. 전혜은 선생님은 병리화의 의미를 아주 쉽게 설명했습니다. ‘정상성을 생산하고 유지하는 기제’라고요.

 

과거에 세계보건기구(WHO)와 미국 정신의학협회는 동성애를 ‘질병’으로 분류했습니다. 1990년에 동성애를 질병 분류 목록에 제외됐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 사람은 여전히 동성애를 ‘정신 질환’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동성애를 반대하는 기독교 단체들은 동성애를 질병이라고 주장하면서 동성애 혐오를 부추깁니다. 그리고 하느님이 내민 구원의 손길을 받은 동성애자는 탈동성애자로 ‘치유’될 수 있다면서 ‘전환치료’를 주장합니다. 동성애자를 질병으로 병리화하게 되면 헤테로섹슈얼(heterosexual: 이성애)이 ‘정상적인 섹슈얼리티’로 자리 잡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동성애는 ‘비정상적인 사랑’으로 낙인찍히는 거죠. 장애 문제를 병리화하는 것은 성소수자 배제의 논리와 비슷합니다.

 

 

 

 

 

 

 

 

 

 

 

 

 

 

 

 

 

 

* 조한진희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 (동녘, 2019)

 

 

 

 

정상성을 강조하는 병리화는 건강과 질병을 각각 ‘정상 대 비정상’으로 구분 짓게 만듭니다. 건강한 몸이 정상성의 기준이 되면, 아픈 몸은 ‘건강관리를 소홀히 하면 일어날 수 있는’ 몸으로 취급받습니다. 이러한 인식이 지속되면 우리는 질병 문제의 원인을 사회가 아닌 개인에서 찾게 됩니다. 그리고 병리화는 환자를 ‘불행의 아이콘’으로 만들기도 합니다. ‘어느 페미니스트의 질병 관통기’라는 부제가 달린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동녘)는 건강이 ‘성공적인 자기 관리’의 기준이 된 사회를 되돌아보게 만든 책입니다. 이 책을 쓴 저자는 아픈 몸에 대한 혐오에서 벗어나는 삶의 방식을 제안합니다. 몸이 아픈 것이 곧 불행으로 직결되는 것이 아니며, 아픈 사람은 그 불행을 극복할 힘을 가진 ‘주체’가 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 피터 콘래드 《어쩌다 우리는 환자가 되었나》 (후마니타스, 2018)

 

 

 

오늘날 우리 사회와 문화는 정상, 건강에 거의 강박에 가까울 정도로 매력을 느끼고 있습니다. 자신을 ‘정상’이라고 생각하는 대부분 사람은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기준을 내세운다는 명분상의 우위를 점하면서 자신과 타자를 구분합니다. 이러한 방식은 타자에게 무언가 치명적인 결함이 있다고 규정함으로써 자신들이 생각하는 정상성을 유지하려고 합니다. 그러므로 이 사회는 비정상성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온갖 종류의 치료적 방법들을 동원하고 있습니다. 그런 다음에 인간의 유형, 습관, 행동, 특성, 성향들을 ‘병리화’하여 수많은 진단명을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어쩌다 우리는 환자가 되었나》(후마니타스)는 기존에는 질병으로 여겨지지 않았던 증상들이 치료받아야 하는 의학적 문제로 규정 받는 ‘의료화(medicalization) 현상을 다룬 책입니다. 과잉 병리화와 과잉 의료화를 별다른 생각 없이 수용하게 되면, 장애인과 환자, 성소수자는 비정상적인 존재로 남아 비인간화됩니다. 병리화는 타자화와 맞닿아 있습니다. 사회적 소수자 개인의 삶을 제대로 보고, 각각 개인의 목소리를 듣는 일은 그/그녀들을 타자화하지 않게 만듭니다.

 

 

 

 

[출처] [이해찬, 장애인 앞에서 ‘장애 비하’ 발언 논란] (프레시안, 2018년 12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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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요정 2019-07-25 15: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어릴 때 아프다고 할 때마다 안 받아들여지거나 심하게 혼나기도 해서 ‘아픈 것‘ 자체가 나쁜 줄 알고 아파도 참고, 친구들이 아파서 학교를 조퇴하거나 양호실을 가면 그래도 되나 이상하게 생각하고, 아픈 건 나쁘기 때문에 어떤 사유가 된다고 생각하지 ‘못‘ 했거든요. 그런데 사회에 나와보니 아니더라구요. 누구나 아플 수 있고, 아픈 건 당연하고, 아프면 쉬어야 하고 그렇더라구요. 아픈 것 역시 정상인거죠. 사실 정상, 비정상 개념 자체가 무섭긴 하지만요. 지구에 사는 생명체가 얼마나 다양하고 얼마나 많은데, 그 각각의 존재 자체가 다 특별하고 다름을 어떻게 한 두가지 잣대로 범주화 할 수 있을까요.

cyrus 2019-07-27 10:35   좋아요 0 | URL
아픈 몸은 ‘노동을 할 수 없는 몸’, ‘나태한 몸’으로 연상되기 때문에 부정적 낙인으로 찍히기 쉬워요. 그래서 여전히 사람들은 조퇴, 결근, 생리 공결, 출산 휴가 등을 부정적으로 생각하죠. 아프다는 핑계를 내세워 일을 적게 하면서 임금을 받는다는 이유로 말이에요. 정말 비양심적인 사람들도 있긴 해요. 하지만 그런 이유만 가지고 휴식 차원에서 일을 쉬는 것을 부정적으로 보는 건 좋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조그만 메모수첩 2019-07-25 17: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의학이 발달하면서 개인은 몸의 주체성을 많이 빼앗기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언제나처럼 글 잘 읽었습니다.

cyrus 2019-07-27 10:38   좋아요 1 | URL
몸에 조금이라도 이상이 생기면 의사들이 ‘질병’으로 분류하게 되고, 여기에 제약 회사들이 가세해서 약을 만들어 팔아요. 이런 자본주의 시스템이 작동되면서 아픈 사람들은 병원 치료나 약에 지나치게 의존하게 됩니다.

Conan 2019-07-27 15: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2주째 몸이 아파서 치료를 받으며 휴가와 복귀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저 스스로에대한 무력감과 동료에대한 죄의식이 생기더군요... 주변의 부정적 인식도 있구요...

cyrus 2019-07-29 16:46   좋아요 1 | URL
Conan님이 느낀 그 심정, 저도 이해합니다. 우리나라는 만성 질환을 앓는 사람들이 일할 수 있는 작업 환경과 근로 조건이 마련되어 있지 않아요. 몸이 아프면 무조건 일을 그만두어야 하죠. ㅠㅠ

2019-07-27 21: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7-29 16: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7-29 18: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가 내리고 있는 오늘은 선선해서 좋네요. 이틀 전인 월요일은 산들대는 바람에 조금은 서늘했습니다. 그날은 공부하기 딱 좋은 날이었어요. 페미니즘 북클럽 레드스타킹이 주최한 ‘페미니즘 스쿨’ 첫 번째 강연이 시작된 날이었거든요.

 

 

 

 

 

 

 

 

 

 

 

 

 

 

 

 

 

 

* [페미 스쿨 첫 번째 교재] 오드리 로드 《시스터 아웃사이더》 (후마니타스, 2018)

 

 

 

사실 지난주 월요일(7월 1일)에 열린 세미나가 ‘페미니즘 스쿨’의 시작을 연 첫 번째 일정이었습니다. 그날 세미나에서는 오랜만에 얼굴을 보인 레드스타킹 멤버들과 페미니즘 스쿨에 등록한 새로운 분들이 참석했습니다. 페미니즘 스쿨을 등록한 세 명을 포함해서 총 열다섯 명이 세미나에 참석했습니다. 3주 동안 읽게 될 오드리 로드(Audre Lorde)《시스터 아웃사이더》 (후마니타스)에 대해서 자유롭게 이야기를 나눠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이틀 전 월요일에 진행된 첫 번째 강연의 주제는 ‘교차성 페미니즘(intersectional feminism)입니다. 이 날 강연은 교차성 페미니즘이 탄생하게 된 배경과 교차성 이론을 둘러싼 다양한 정의와 방법론들에 대해서 알아보는 시간이었습니다.

 

‘교차성’이라는 용어는 1989년에 미국의 페미니스트 법학자 킴벌리 크랜쇼(Kimberlé Crenshaw)가 처음으로 사용했습니다. 정확히 30년 전에 나온 학술 용어인데, 이 사실만 보고 교차성 페미니즘의 역사가 생각보다 짧다고 느껴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몇몇 학자들은 크랜쇼가 교차성이라는 개념을 제시하기 전에도 이미 페미니즘 안에서 교차성 담론이 형성되었다고 주장합니다.

 

 

 

 

 

 

 

 

 

 

 

 

 

 

 

 

 

 

 

* [2018년 레드스타킹 일곱 번째 선정 도서] 패트리샤 콜린스 《흑인 페미니즘 사상》 (여성문화이론연구소, 2009)

 

 

 

교차성 페미니즘을 논할 때 가장 먼저 언급해야 하고, 잊어선 안 될 인물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바로 소저너 트루스(Sojourner Truth, 1797~1883)입니다. 그녀는 네덜란드인 지주가 운영하는 미국 농장의 노예로 태어났습니다. 본명은 이사벨라 바움프리(Isabella Baumfree)였습니다. 그녀는 노예 출신 흑인 남성과 결혼하여 아이를 낳았습니다. 1826년에 딸을 데리고 탈출을 감행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노예제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목숨을 걸고 남부에서 북부로 이주하는 노예들이 많았어요.

 

노예제가 적용되지 않은 뉴욕에 정착한 바움프리는 1843년에 ‘소저너 트루스’라는 새로운 이름을 만들어 노예제 폐지 운동과 여성 인권 운동에 참여했습니다. 트루스는 1851년 미국 오하이오주에 열린 여성 권리 대회에 참가했는데요, 그녀는 이 대회에서 노예 해방 운동 역사와 페미니즘 역사에 길이 남을 명연설을 합니다.

 

 

 저기 있는 저 남자 분은 여성은 마차에 탈 때 도움을 받아야 하며 구덩이에서 나올 때도 남자가 들어 올려 주어야 하고 모든 곳에서 가장 좋은 곳을 차지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렇지만 아무도 내가 마차를 타거나 진창을 지나야 할 때 도와주지 않으며 아무도 내게 가장 좋은 곳을 내어주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여성이 아니란 말입니까?(Ain’t I a Woman?) 나를 보십시오! 이 팔을 보십시오! 나는 어느 남자보다도 더 많이 쟁기를 끌었고 씨를 뿌렸으며 곡물을 거두어 곳간에 넣었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여성이 아니란 말입니까? 나는 남성과 똑같이 일할 수 있고, 충분한 음식이 있다면 남자만큼이나 많이 먹고, 채찍질을 견딜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여성이 아니란 말입니까? 나는 열세 명의 아이를 낳았으며 이 아이들 모두가 노예로 팔려가는 것을 보아야 했습니다. 내가 어머니로서 슬픔에 겨워 울 때 주님 말고는 아무도 제 슬픈 울음소리를 들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여성이 아니란 말입니까?

 

 

(박미선 옮김, 《흑인 페미니즘 사상》, 44쪽, 밑줄은 cyrus가 내용을 강조하기 위해 표시한 것임)

 

 

 

사회적 약자로서의 정체성을 여러 겹 지닌 트루스는 ‘흑인’과 ‘여성’이라는 이유로 차별하는 백인들을 향해 “나는 여성이 아닙니까?”라고 되물었습니다. 흑인 여성 인권 운동은 19세기 초 백인 여성 인권 운동과 동시에 진행되었지만, 그들이 추구하는 것과 투쟁 노선 방식이 서로 달랐습니다. 흑인 여성들은 인종 차별과 성차별의 이중 억압 아래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노예제 사회에서 흑인의 젠더는 주목받지 못한 명제였고, 먼 훗날 흑인 인권이 부각되었을 때도 ‘인종’이란 대명제에 밀려 더 음습한 곳으로 밀려났습니다. 교차성 페미니즘은 여성을 둘러싼 차별과 불평등 문제를 인종, 계급, 섹슈얼리티와 관련된 억압 문제와 따로 분리해서 보지 않습니다. 서로 ‘상호 연관’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죠. 교차성 페미니즘 담론이 형성되면서 흑인 페미니스트들은 흑인 남성과 백인 여성에 가려져 아주 오랫동안 밀려나있던 흑인 여성들의 삶과 목소리에 주목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교차성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요? ‘페미니즘 스쿨’ 전담 교사인 전혜은 선생님은 교차성을 ‘차이를 사유하는 방식’과 밀접하게 관련된 개념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자, 이제 교차성이 학문적으로 어떤 의미인지 좀 더 깊이 있게 접근해볼까요?

 

크랜쇼는 인종과 젠더가 교차하는 다양한 방식을 나타내기 위해 ‘교차성’을 제시했습니다. 그녀는 이 개념을 가지고 ‘단일 축 사유’의 한계를 지적합니다. 단일 축 사유란 어떠한 대상이나 존재 또는 문제를 단일하게 바라보거나 규정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를테면 과거에 백인 여성 페미니스트들은 “모든 여성이 겪는 억압은 비슷해. 따라서 가부장제를 공격하려면 여성들을 연대하게 만드는 자매애(sisterhood)가 있어야 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하여 그 유명한 “자매애는 강하다”라는 구호가 나오게 됐죠. 그런데 여성이 겪는 억압을 단일하게 볼 수 있을까요? 또 이 세상의 모든 여성을 ‘자매’라는 이름으로 단일한 집단으로 묘사할 수 있을까요? 이러한 질문이 크랜쇼가 교차성 개념을 제시한 목적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크랜쇼는 ‘자매애’를 강조하는 것만으로는 백인 여성들이 겪어보지 못한 흑인 여성의 인종차별 문제를 포괄하기 어렵다고 주장합니다. 따라서 크랜쇼가 말한 교차성은 유색인 여성들이 겪는 젠더와 인종 문제를 설명할 수 있도록 틀을 짜는 개념입니다. 결국 교차성은 ‘차이에 대한 민감성(전혜은)이 있어야 이해할 수 있는 개념입니다. 교차성의 의미를 이해했으면 ‘침묵 당해온 소수자들에게 목소리를 들려줄 수 있는(전혜은) 방식이 무엇인지 생각해봐야 합니다.

 

지금도 교차성을 주제로 여러 가지 논의들이 나오고 있습니다만, 한편으로는 교차성을 비판하는 의견들도 나오고 있습니다. 장점이 많은 이론이라고 해서 그 이론에 단점이나 한계가 아예 없는 건 아니에요. 일부 학자는 교차성을 ‘연구 방법론’으로 보기에 빈약하다고 지적합니다. 사실 교차성 이론은 다양한 분과학문의 틀에 맞춰 사용되는 경우가 많았는데요, 이에 대해 학자들은 교차성 이론에 과연 명확하게 규정할 수 있는 정의와 방법론이 있는지 의문을 제기합니다. 오히려 교차성이 지나치게 분과 학문에 의존하고, 거기에 틀에 맞춰 설명하게 되면 정작 중요한 이슈를 지워버릴 수 있다고 비판합니다.

 

여기에 대해 크랜쇼는 반박합니다. “‘교차성은 무엇인가’라고 묻는 것이 뭐가 중요한데?”라고 말이죠. 크랜쇼는 애초에 교차성을 ‘거대 이론’으로 만들 생각이 없었다고 밝혔습니다. 그리고 교차성 이론을 논할 때 ‘교차성이 무엇인지’ 정의를 따지기보다는 ‘교차성이 무엇을 하는지’에 초점을 맞추자고 제안합니다. 즉 우리가 ‘교차성’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고민해보자는 거죠.

 

지금도 학자와 페미니스트(이제 막 페미니즘을 공부하기 시작한 사람들)들은 궁금해 합니다. “교차성이라는 게 도대체 무엇인가요?” 아마도 사람마다 생각하는 교차성의 정의는 제각각 다를 것입니다. 그렇다면 개념 정의조차 명확하지 않은 교차성 이론은 너무 난해해서 공부할 필요가 없고, 페미니즘을 연구하는데 쓸모없는 이론일까요?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실번 톰킨스(Silvan Tomkins, 1911~1991)라는 심리학자는 인간이 만든 모든 이론을 ‘강한 이론(strong theory)’과 ‘약한 이론(weak theory)이라는 두 가지 개념으로 설명했습니다. ‘강한 이론’은 문제 상황에 적용할 수 있는 보편적인 방법론을 가지고 있는 이론이라면, ‘약한 이론’은 변동하는 문제 상황의 맥락에 따라서 다양한 방식으로 접근하는 이론을 의미합니다. 교차성은 ‘약한 이론’에 속합니다. 왜냐하면 교차성 이론은 문제를 명확하게 분석할 수 있는 보편적인 방법론이라기보다는 ‘문제의 복잡성을 이해하면서 사유하는 해석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교차성 페미니즘을 이해하게 되면 ‘어떤 (여성을 둘러싼)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한 가지 정답은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혜은 선생님은 페미니즘이라는 학문도 ‘약한 이론’에 속한다고 말씀했습니다. 페미니즘이 ‘약한 이론’이라고 해서 그것을 학문이라고 볼 수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아마도 페미니즘을 체계적인 학문으로 취급하지 않으려는 사람일 것입니다.

 

 

 

 

 

 

 

 

 

 

 

 

 

 

 

 

 

 

 

* 정경직, 최성용, 이아름, 정연 《페미니즘 쉼표, 이분법 앞에서》 (들녘, 2019)

 

 

 

《페미니즘 쉼표, 이분법 앞에서》 (들녘)라는 책에 수록된 『속도와 페미니즘을 사유하다』에 나온 문장을 인용해보겠습니다.

 

 

 일각에서는 페미니즘의 비일관성 · 미완결성 · 다양성을 이유로 페미니즘을 비과학적이고 체계적이지 못한 사상으로 평가절하하거나, 심지어는 철학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다. 참으로 재미있는 주장이다. 과연 철학이나 과학은 체계적이고 일관되며, 완결된 학문일까? 답은 명백하다. 소위 ‘과학적인’ 학문의 대표로 여겨지는 물리학이나 경제학 등의 분야에서도 여전히 수많은 이들이 새 논문을 발표하고, 이질적인 가설을 제시하며, 기존의 이론을 반박하는 등 치열한 논쟁의 역사를 이어가고 있다. 즉, 완결되지 않고 왕성한 토론이 이루어지는 분야는 오히려 가장 생명력 있는 학문인 것이다. 논쟁이 끝나고, 더 이상 연구할 내용이 없는 학문, 문제 제기할 것이 없는 운동, 새로운 해석 없이는 원전만을 읊어대는 교조주의는 체계적이고 일관되며 완결된 것이 아니라, 죽은 것이다.

 

(장경직, 16~17쪽, 밑줄은 cyrus가 내용을 강조하기 위해 표시한 것임)

 

 

 

급진 페미니즘이든 교차성 이론이든 간에 페미니즘의 모든 이론은 ‘약한 이론’입니다. 페미니즘을 부정하는 사람들 눈에는 페미니즘이 무언가 부족해 보이고, 학문 같지 않다고 느껴지겠죠. 하지만 나는 그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당신들이 체계적인 학문을 그렇게도 좋아한다면 왜 다양한 이론으로 설명되는 다른 학문에 대해선 아무 말도 안 하십니까? 유독 페미니즘에만 열을 내면서 학문이 아니라고 폄하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네요. 당신들 논리라면 일관적이지 않는 진화론(자연선택을 믿는 다윈주의자와 성 선택을 믿는 다윈주의자들 간의 논쟁은 지금도 진행 중입니다)도 학생들이 배우면 안 되겠네요.

 

어떤 사람은 ‘페미니스트는 남성을 혐오하는 워마드다’라고 말합니다. 또 어떤 이는 ‘페미니스트 탈출은 지능 순’이라고 말합니다. 이런 말은 ‘남성을 혐오하고 여성만을 챙기려는 페미니스트들은 지능이 부족하다’는 편견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그들이 생각하는 것과 달리 페미니스트들은 어디선가 공부를 하고 있고, 페미니즘 책을 읽으면서 토론을 하고 있을 것입니다. 제가 페미니즘 공부를 좋아하는 이유는 페미니즘은 ‘완결되지 않는 학문’이기 때문입니다. ‘완결되지 않는 학문’은 공부하기가 쉽지 않아요. 공부해야 할 페미니즘 이론이 많고요, 서로 대립하고 있는 페미니스트들(트랜스 여성을 여성으로 보지 않는 ‘일부’ 급진 페미니스트들과 트랜스 여성을 옹호하는 퀴어 페미니스트)을 만나면 혼란스러워요. 그러나 저는 페미니즘을 계속 공부할 것입니다. 계속 공부하다 보면 나를 깜짝 놀라게 해줄(아니면 더 혼란스럽게 만드는) 새로운 페미니즘 이론이나 담론이 나오겠죠. 그럴 때 저는 페미니즘 이론의 유용성을 배우면서, 이론의 한계나 단점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고 싶습니다. 그러려면 논쟁은 피할 수 없습니다. 언젠가는 마주해야 할 상황이죠. 논쟁이 없고, 문제 제기나 비판을 허용하지 않는 페미니즘 공부는 재미가 없어요. 그런 일관된 방향으로 나아가는 페미니즘은 서서히 힘을 잃을 수밖에 없습니다. 페미니즘이 계속 발전할 수 있는 원동력마저 사라지게 되는 거죠.

 

‘약한 이론’의 페미니즘은 가장 생명력 있는 학문입니다. 이 학문에 정답은 없습니다. 입장이 다르다는 이유로 외면하거나 배척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 반응은 ‘학문’으로서의 페미니즘이 가지고 있는 생명력을 닳게 만듭니다. 레드스타킹의 페미니즘 스쿨은 페미니즘을 살아 숨 쉴 수 있게 만드는 ‘영양분’과 같은 이론들을 배울 수 있는 곳입니다. 이 ‘영양분(페미니즘 장애학, 주디스 버틀러의 이론 등)’이 엄청 어려워 보이지만, 내 삶과 페미니즘에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다면 기꺼이 시간을 내서 공부하고 싶습니다.

 

 

 

 

 

 

 

 

※ 레드스타킹이 네이버 카페를 만들었습니다. 페미니즘 스쿨에 등록된 분이 아니어도 카페에 가입할 수 있습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https://cafe.naver.com/redstock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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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11 09: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7-11 11: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7-13 02: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7-11 12: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여러분, ‘유대인’이라는 단어를 들을 때 어떤 이미지가 떠올리나요? 저는 유대인 하면 탈무드(Talmud)홀로코스트(Holocaust)가 가장 먼저 떠오릅니다. 아! 제2차 세계대전 중에 나치 독일의 유대인 말살 정책을 피해 가족들과 함께 숨어 살았던 안네 프랑크(Anne Frank)도 있네요. 우리는 영화나 역사책을 통해 과거 유대인이 겪은 아픔을 잘 알고 있습니다. 나치는 게르만인의 우월성을 바탕으로 한 민족주의를 합리화시키기 위해 수백만 유대인을 학살했습니다. 홀로코스트는 원래 ‘전쟁으로 인해 일어난 대참사’를 뜻하는 단어였어요. 그러다가 나치의 유대인 학살을 뜻하는 고유명사가 되었습니다.

 

 

 

 

 

 

 

 

 

 

 

 

 

 

 

 

 

 

 

* [절판] 노먼 핀켈슈타인 《홀로코스트 산업: 홀로코스트를 초대형 돈벌이로 만든 자들은 누구인가?》 (한겨레출판, 2004)

 

* [품절] 노먼 핀켈슈타인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분쟁의 이미지와 현실: 시오니즘 지식 권력은 어떻게 진실을 왜곡했는가?》 (돌베개, 2004)

 

* [절판] 미하엘 브레너 《다윗의 방패: 시온주의의 역사》 (들녘, 2005)

 

 

 

그런데 이 ‘홀로코스트’라는 고유명사를 내세우면서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점령을 은폐하는 유대인 세력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유대주의(Judaism)라고도 일컫는 시온주의(Zionism)를 신봉합니다. 시온주의가 처음 등장했을 때 세계 각지에 흩어져 있던 유대인들은 잃어버린 선조의 땅을 되찾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시온주의자들은 중동 지역을 지배했던 영국이나 미국과 같은 제국주의 국가에 의존하면서 그들로부터 유대인으로서의 민족 정체성을 인정받으려고 했습니다. 지금도 대다수 유대인은 유대 국가를 건설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시온주의를 지지하면서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점령을 옹호하거나 폭력적인 점령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를 내지 않습니다. 나치가 부활한 듯한 이스라엘 유대인의 팔레스타인 점령을 비판했다가는 나치의 유대인 학살을 망각한 ‘반유대주의자’로 몰릴 수 있거든요. 서구의 유대계 출신 지식인들이 몸을 사리는 이유입니다.

 

 

 

 

 

 

 

 

 

 

 

 

 

 

 

 

 

* 주디스 버틀러 《위태로운 삶》 (필로소픽, 2018)

 

 

 

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는 팔레스타인을 점령하려는 이스라엘의 군사 정책 정책을 정당화하는 ‘진리’로 행세하는 시온주의에 대해 의문을 제기합니다. 《위태로운 삶》에 수록된 『반유대주의라는 비난: 유대인, 이스라엘, 그리고 공적인 비평의 위험부담』이스라엘과 친 이스라엘 시온주의자들에 대한 공적 비판을 뭉뚱그려 반유대주의라고 오명을 덮어씌우는 발언의 문제점을 검토한 글입니다.

 

그렇다면 유대주의를 비판적으로 분석한 버틀러의 글과 페미니즘은 어떤 관련이 있을까요? 버틀러는 핍박의 세월을 오랫동안 견뎌온 피해자로서의 민족 정체성을 쉴 새 없이 강조하는 시온주의를 비판합니다.

 

 

 유대인이 언제나 희생자로만 여겨지는 존재일 수는 없다. 그럴 때도 분명 있지만, 어떤 때는 분명 그렇지 않다. 어떤 정치적 윤리도 유대인이 희생자의 지위를 독점한다는 가정에서 출발할 수는 없다. “희생자”는 재빨리 바뀔 수 있고 순간순간 바뀌어서, 버스에 탄 자살폭탄 테러리스트에 의해 살해된 유대인일 수 있고 이스라엘의 총격에 무참히 살해된 팔레스타인 어린이일 수도 있다.  (151~152쪽)

 

 

미국 내에 활동하는 친 이스라엘 시온주의자들은 실제 다른 소수민족에 비해 불이익을 거의 당하지 않았는데도 미국 사회 안에서 자신들의 민족 정체성을 ‘희생자’로 꾸몄습니다. 앞에서 인용한 문장을 봤을 때 작년에 읽은 《피해와 가해의 페미니즘》이 생각났어요.

 

 

 

 

 

 

 

 

 

 

 

 

 

 

 

 

 

* [레드스타킹 여섯 번째 책] 권김현영, 루인, 정희진, 한채윤 《피해와 가해의 페미니즘》 (교양인, 2018)

 

 

 

이 책에서 정희진은 ‘피해자’로서 여성의 정체성을 강조하는 여성 운동의 한계를 지적하면서 타자와 연대하는 페미니즘을 제안합니다. 피해자 정체성이라는 ‘땔감’을 구하면서 가해 세력을 처벌하는 여성주의와 시온주의는 각각 여성과 유대인도 가해자가 될 수 있다는 상황을 인식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피해자 중심주의의 여성 운동과 시온주의 운동은 ‘피해자의 말이 곧 진리’이며 피해자 편을 들라는 뜻으로 오용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피해자의 지위를 독점하면서 이스라엘을 옹호하는 목소리가 울려 퍼지는 시온주의 운동의 한복판에서 복잡 미묘한 유대인 문제를 예리하게 들여다본 버틀러의 통찰이 용기 있게 느껴졌습니다.

 

 

 

 

 

 

 

 

 

 

 

 

 

 

 

* 강영안 《타인의 얼굴: 레비나스의 철학》 (문학과지성사, 2005)

* 콜린 데이비스 《처음 읽는 레비나스》 (동녘, 2014)

* 임옥희 《주디스 버틀러 읽기》 (여성문화이론연구소, 2006)

 

 

 

책의 마지막 글인 『위태로운 삶』에서 버틀러는 독일의 철학자 에마뉘엘 레비나스(Emmanuel Levinas)의 타자 윤리학을 바탕으로 타자를 인정하지 않고, 타자에 대한 공적 애도가 무시되는 문제를 분석합니다. 대부분 사람은 낯선 타자를 만나면 공포와 불안을 느낍니다. 이 불안한 감정을 견디지 못하는 사람들은 무력을 앞세워 타자를 공격합니다. 레비나스는 이러한 행동을 하지 못하도록 투쟁하기 위해서 타자 윤리학이 필요하다고 주장합니다. 필자는 이 글을 읽기 전에 레비나스의 철학에 대해서 알아봤는데요, 솔직히 말해서 지금도 잘 모르겠습니다. 개인적으로 『위태로운 삶』이 제일 어렵게 느껴졌어요. 이번에 제가 쓴 후기가 내용면에서 빈약하기 때문에 제 후기에 만족스럽지 못한 분들이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런 분들을 위해서 『위태로운 삶』을 알기 쉽게 설명한 《주디스 버틀러 읽기》[주]를 권합니다.

 

‘《위태로운 삶》 읽기’ 마지막 모임에 온 5명의 레드스타킹 멤버들은 『위태로운 삶』의 내용과 상관없이 각자 나름대로 글을 읽으면서 느낀 것들을 자유롭게 말해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공독(共讀)을 마무리한 뒤에 다음 달부터 시작하게 될 ‘페미 스쿨’에 대한 논의를 했습니다. 다음 주 월요일에도 이 논의가 이어질 것 같습니다. 레드스타킹이 열심히 준비한 페미 스쿨에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주] 이 책에 ‘옥에 티’가 있는데요, 저자는 조르조 아감벤(Giorgio Agamben)이 제시한 ‘호모 사케르(Homo Sacer)‘호모 사커’라고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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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19-06-19 18: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뭐 팔레스타인에 대한 이스라엘 인들의 행위를 보면 홀로코스트니 반 유대주의하고 이스라엘인들이 외쳐도 그닥 공감이 가질 않더군요.

cyrus 2019-06-20 16:41   좋아요 0 | URL
그래도 나치가 자행한 홀로코스트를 부정하는 세력들을 경계해야 합니다. 독일을 포함한 몇몇 유럽 국가에서는 홀로코스트를 부정하는 행위를 법률로 금지하고 있어요.
 

 

 

문화관광부가 주최하고,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이 주관하는 ‘2019년 청년 인문 상상 프로젝트 지원’ 사업에 ‘레드스타킹’이 선정되었습니다. ‘청년 인문 상상 프로젝트’는 지역에서 자생적으로 운영하는 인문 단체들의 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만들어진 프로그램입니다.

 

 

 

 

 

 

 

레드스타킹은 비영리 민간단체로 등록되었습니다. 그래서 레드스타킹은 대구에 페미니즘을 공부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목표로 ‘엄청난 프로젝트’를 준비했습니다.

 

 

 

 

 

 

레드스타킹이 ‘페미니즘 스쿨(페미 스쿨)을 개설했습니다. 페미 스쿨은 대학원 수준의 페미니즘 이론을 체계적으로 공부하고 싶은 분, 페미니즘 공부를 통해 자신이 나아갈 방향을 찾고 싶은 분들을 위해 만든 대안적 학습 공간입니다.

 

 

 

모집 인원은 ‘입금 완료’를 기준으로 선착순 6명입니다. 수강료는 7만 원입니다.

 

수강 신청은 여기 링크에 하면 됩니다.

https://bit.ly/2ILBCyw

 

 

 

참여 조건은 페미니즘을 공부하고 싶은 분이라면 누구나 환영합니다. 페미 스쿨에 참여하게 되면 2주에 한 번 A4 한 장 분량의 글을 작성하여 네이버 카페(개설 예정)에 등록합니다. 그리고 교육이 끝나는 마지막 날에 ‘졸업 에세이’를 발표합니다.

 

 

페미 스쿨 일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 기간: 2019년 7월 1일 월요일 ~ 2019년 10월 28일 월요일 (총 15주)

 

* 교육 일정: 강의 6회 + 글쓰기 피드백 1회 + 세미나 6회 + 워크숍 1회 + 졸업 에세이 발표 1회 (총 15회)

 

* 일정은 변경될 수 있습니다.

 

* 강의 시간(빨간색 글씨)에는 강사와 함께하며, 나머지 시간은 수강생들끼리 진행됩니다.

 

* 총 15주의 교육 일정 중 10주 이상 참석(70% 이상)하고, 졸업 에세이 1편을 작성해야 수료증을 받을 수 있습니다.

 

* 교육 장소는 ‘카페 스몰토크’입니다. 매주 월요일 오후 7시 30분부터 시작해서 10시(그날 교육 진행 상황이나 분위기에 따라 종료 시각이 짧아질 수 있고 길어질 수 있습니다)까지 진행됩니다.

 

 

 

 

 

 

 

 

 

 

 

 

 

 

 

 

 

* [품절] 전혜은 《섹스화된 몸: 엘리자베스 그로츠와 주디스 버틀러의 육체적 페미니즘》 (새물결, 2010)

 

* [페미 스쿨 교재] 전혜은, 루인, 도균(비사이드 콜렉티브) 《퀴어 페미니스트, 교차성을 사유하다》 (여성문화이론연구소, 2018)

 

 

 

 

* 강사는 전혜은 선생님입니다. 전혜은 선생님은 퀴어 이론과 퀴어 페미니즘 장애학을 공부하는 연구가입니다. 저서로는 《섹스화된 몸: 엘리자베스 그로츠와 주디스 버틀러의 육체적 페미니즘》이 있고, 현재 ‘아픈 사람’과 퀴어, 장애와 행위성에 관한 주제로 글을 쓰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작년에 《퀴어 페미니스트, 교차성을 사유하다》의 집필진으로 참여하여 책의 서문, 『장애와 퀴어의 교차성을 사유하기』, 『‘아픈 사람’ 정체성』을 썼습니다.

 

 

 

 

 

 

 

 

 

 

 

 

 

 

 

 

 

 

 

 

* [페미 스쿨 교재] 오드리 로드 《시스터 아웃사이더》 (후마니타스, 2018)

* [페미 스쿨 교재] 주디스 버틀러 《젠더 허물기》 (문학과지성사, 2015)

* [페미 스쿨 교재] 주디스 버틀러, 아테나 아타나시오우 《박탈》 (자음과모음, 2016)

 

 

 

 

* 전혜은 선생님과 함께 4개월 동안 ‘교차성 페미니즘’, ‘퀴어 페미니즘 장애학’, ‘주디스 버틀러’라는 이 세 가지 주제로 강의를 듣고, 책을 읽고, 토론하고, 글을 쓰는 시간을 가집니다. 수업 관련 교재는 오드리 로드의 《시스터 아웃사이더》, 전혜은 선생님이 공저로 참여한 《퀴어 페미니즘, 교차성을 사유하다》, 주디스 버틀러의 《젠더 허물기》《박탈: 정치적인 것에 있어서의 수행성에 관한 대화》, 총 4권입니다.

 

 

대구에서, 그것도 여성학과 대학원 밖에서 고급 수준의 페미니즘 이론을 배울 수 있는 기회는 흔치 않습니다. 이번에 레드스타킹이 야심차게 준비한 페미 스쿨에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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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9-06-18 17: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정말 좋은 기회다. 수강료도 싸고.
경쟁를이 좀 있겠는데? 너도 수강하지?ㅋ

<섹스화된 몸>은 나도 읽어보고 싶다.
근데 왜 벌써 품절이래.ㅠ
그도 그렇지만 상품화된 몸도 문제 아니겠니? 같은 맥락일 것 같은데?

cyrus 2019-06-19 12:51   좋아요 0 | URL
네, 저도 페미 스쿨 학생이에요. <섹스화된 몸>을 도서관에 가서 읽어보려고 하는데 하필이면 서고에 보관되어 있어요. 사서한테 직접 이 책을 달라고 얘기해야 되는데 말을 할 수가 없네요... (부끄부끄) ^^;;

stella.K 2019-06-19 14:07   좋아요 0 | URL
그때는 마스크하고 썬글라스 끼고
사서한테 조용히 책 제목을 적은 쪽지를 내밀면 되지.ㅎㅎㅎ

cyrus 2019-06-20 16:51   좋아요 0 | URL
그러면 사서가 이상한 눈빛으로 저를 쳐다보겠는데요.. ㅎㅎㅎㅎ

2019-12-21 00: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9-12-23 22:02   좋아요 0 | URL
멤버들이 하자고 하면 해야죠. ^^
 

 

 

 

 

 

 

 

※ 레드스타킹 공식 인스타그램에도 공개된 글입니다. 정말 오랜만에 공식 후기를 써보네요. 《경계 없는 페미니즘》은 한동안 절판된 책이었는데요, 몇 달 전에 레드스타킹 멤버 한 분이 여성문화이론연구소(여이연) 출판사에 직접 전화를 해서 재고가 남아 있다고 물어본 적이 있어요. 그때 출판사 측은 재고가 남아 있지 않다고 답변을 했었는데요, 다행히 그 분의 의견이 출판사 측이 반영했는지 지난달부터 알라딘에 책이 판매되고 있습니다. 언제 절판될지 모르니 관심 있는 독자는 꼭 구입하시길.

 

 

 

 

 

추위와 따뜻함이 반복되는 변덕스러운 봄 날씨는 감기에 걸리기 쉬운 날씨입니다. 제 주변에 감기나 몸살 증세를 호소하는 분들이 많아졌습니다. 이 글을 보고 있을 분들 모두 감기 조심하시기를 바랍니다.

 

 

 

 

 

 

 

 

 

 

 

 

 

 

 

 

 

 

 

지난 월요일(25일)찬드라 탈파드 모한티(Chandra Talpade Mohanty)《경계 없는 페미니즘》 첫 번째 읽기 모임이 있는 날이었습니다. 첫 번째 시간에는 1부 1, 2장을 읽었습니다. 모한티는 미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인도 출신의 여성학자입니다. 그녀는 미국 내 유색인 여성 차별 문제, 탈식민주의 페미니즘 등을 연구하고 있습니다.

 

책 제목인 ‘경계 없는 페미니즘(Feminism without borders)’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일단 먼저 ‘경계’가 무슨 뜻인지 간략하게 설명하겠습니다. 경계는 젠더, 섹슈얼리티, 계급, 인종, 종교, 장애 등 인간의 일상생활 영역을 명확하게 구분해주는 기준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여러 가지 경계선을 가지고 세상을 구분합니다. “세상을 둘로 나누어 본다”는 강력한 믿음은, 일상생활을 가로지르는 투명한 ‘경계’에서 나옵니다. 이 경계는 때론 차별을 초래하기도 합니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바로 피부 색깔로 인종을 구분하는 인종차별주의입니다. ‘국민-비(非)장애인-이성애자-정상’과 ‘난민-장애인-성 소수자-비정상’으로 나누어 판단하는 것 또한 보이지 않는 경계가 만들어내는 이분법적 구분입니다. 이러한 구도는 모한티가 허물려고 하는 ‘장벽’입니다. 따라서 ‘경계 없는 페미니즘’은 수많은 개인과 사회집단의 경험을 관통한 다차원적인 경계들을 극복하는, ‘해방의 잠재력을 지닌 페미니즘’[주1]입니다.

 

저자는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페미니즘의 분석 방법으로 탈식민주의와 반자본주의적 비평을 제시합니다. 탈식민주의는 ‘서구-비서구’를 가르는 틀, 그리고 서구의 제국주의가 피식민지 비서구를 바라보며 재현하는 방식 등을 비판하는 이론입니다. 반자본주의 비평은 사회 전반에 걸쳐 작동하고 있는 자본주의 체제를 비판하고 반대하는 비평 방식입니다. 그래서 탈식민주의는 ‘제3세계’로 명명되는 비서구를 착취한 서구 제국주의 및 식민지 문화를 문제 삼는다면, 반자본주의적 비평은 제3세계를 착취하는 전 지구적 자본주의에 주목합니다.

 

흔히 ‘제3세계’라고 하면 가장 많이 떠오르는 이미지는 ‘아프리카’, ‘가난한 나라’, ‘(정치적으로, 또는 성적으로) 억압받는 민족’입니다. 그런데 저를 포함한 대부분 사람은 한국이나 일본, 중국과 같은 아시아를 제3세계 국가라고 인식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레드스타킹 멤버 중에 대학원에서 여성학을 공부하는 분이 있습니다. 그분이 배우고 있는 제3세계 여성을 다룬 과목은 중국 · 재중동포(조선족) 여성에 관한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서구 여성, 서구 페미니스트들이 생각하는 제3세계 여성 이미지는 주체적으로 자기 권리를 주장하는 서구 여성 이미지와 대비됩니다. 저자는 제3세계 여성을 ‘서구 식민화의 피해자’, ‘남성 폭력의 피해자’, ‘가부장적 친족체제에 벗어나지 못하는 종속적인 여성’ 등으로 일방적으로 규정해버리는 서구 페미니즘 담론을 비판합니다. 이러한 서구식 담론은 제3세계 여성의 주체적인 목소리와 그녀들 고유의 역사를 생략해버립니다.

 

제3세계 여성을 ‘피해자’로 묘사하는 서구식 담론의 문제점은 우리나라에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레드스타킹 멤버들은 우리 일상생활에 영향을 끼치고 있는 서구식 제3세계 담론으로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이야기를 나눠봤습니다. 이야기를 나누면서 멤버들이 가장 많이 언급한 예는 국제 구호단체의 기부금 모집 광고였습니다. 구호단체의 광고를 보면 굶주림에 시달리거나, 절망 어린 눈빛을 한 중동 · 아프리카 난민들의 모습이 많이 나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피해자로서의 난민’ 이미지를 지나치게 부각하는 광고는 ‘가난하고 꾀죄죄한 난민’이라는 고정관념을 만듭니다.

 

아프리카 일부 지역에 성행하고 있는 ‘여성 음핵 절제술’은 제3세계 여성의 생명권을 위협하는 악습입니다. 여성 음핵 절제술 근절에 앞장서는 서구 페미니스트들의 관심과 참여는 훌륭한 일입니다. 하지만 여성 음핵 절제술의 위험성을 강조하기 위해서 제3세계 여성을 ‘남성에 의해 성적으로 억압받는 무기력한 피해자’로 규정하는 입장에 한계가 있습니다. 저자는 제3세계 여성에 대한 온정주의적 태도에 ‘서구가 우월하다는 이념의 헤게모니(hegemony)[주2]가 스며들어 있다고 말합니다.

 

 

 

 

 

 

 

《경계 없는 페미니즘》을 함께 읽은 레드스타킹 멤버들은 제3세계 여성을 설명하는 서구식 담론과 헤게모니에 익숙해진 것에 대해 반성을 했습니다. 그리고 제3세계 여성 같은 타자의 정체성을 일방적으로 단정하게 만드는 ‘일상 속 권력’의 위력을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가해자’의 위치에 서서 연대해야 할 타자를 ‘피해자’로 대상화했을 수도 있습니다. 무지는 연대를 형성하지 못하도록 만들 뿐 아니라, 타자들의 고통을 가중하는 커다란 함정이 됩니다. 이 책에 언급된 ‘성찰적 연대(reflective solidarity)[주3]에 공감하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연대의 필요성을 말하기 전에 ‘나’와 ‘타자’의 관계가 제대로 상호작용하고 있는지 ‘성찰’해야겠습니다. ‘성찰’이 빠진 연대는 타자의 아픔을 제대로 품을 수 없습니다.

 

 

 

 

[주1] 찬드라 탈파드 모한티, 문현아 옮김, 《경계 없는 페미니즘》, 여이연, 14쪽.

 

[주2] 같은 책, 69쪽.

 

[주3] 같은 책, 22~2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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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9-03-27 1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싸이러스 브로는 가히 페미니즘 전문가로
등극하실 것 각입니다 !!!

전 리베카 솔닛의 책을 두어권 사긴 했는데
딴 데 정신이 팔려서리...

이른바 白禍의 시대에 서구석 관점에서부터
탈피하는 게 가장 우선이 아닌가 싶습니다.

cyrus 2019-03-28 17:12   좋아요 1 | URL
‘페미니즘 전문가’가 되고 싶지 않아요.. ㅎㅎㅎㅎ ‘남성 페미니스트’라는 말이 없듯이 ‘남성 페미니즘 전문가’도 없어요. 저는 페미니즘을 지지하는 마음으로 공부하는 사람으로 남고 싶습니다. ^^

비연 2019-03-27 13: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cyrus님.. 참 대단. 엄지척!

cyrus 2019-03-28 17:13   좋아요 0 | URL
대단하지 않습니다. 매주 월요일에 만나는 분들이 저보다 뛰어나고 정말 열심히 공부하는 분들입니다. ^^

페크(pek0501) 2019-03-30 16: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니까 비를 맞는 사람에게 우산을 주는 것보다 더 좋은 게 함께 비를 맞는 것, 이라는 말이 있는 것 같습니다. 함께, 라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주는 자와 받는 자로 나뉘는 게 아니라 함께...

cyrus 2019-04-08 05:58   좋아요 0 | URL
“비를 맞는 사람에게 우산을 주는 것보다 더 좋은 게 함께 비를 맞아야 한다”라는 말에 대해서 다르게 생각해볼 필요가 있어요.

비를 맞으면 옷이 젖고, 감기에 걸리기 쉬워요. 결국 비를 맞는 것은 유쾌한 일은 아니에요. 고통이 생기는 일이죠. 내가 타인과 함께 비를 맞는 것은 타인을 힘들게 하는 경험을 함께 하면서 그가 느끼고 있는 고통을 이해한다는 뜻입니다. 좋은 방법입니다. 하지만 타인과 ‘나’ 모두가 비를 ‘안’ 맞는 방법도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고통을 주는 상황을 벗어날 수 있는 적극적인 일을 시도하는 거죠. 저는 ‘비를 맞는 사람’은 고통을 감수하기만 하는 피해자 정체성을 가진 사람인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래서 ‘비를 안 맞으려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

페크(pek0501) 2019-04-14 12: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함께 비를 맞는다는 의미를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비를 안 맞을 수 있으면 더 좋겠지만 비를 맞아야만 하는 상황인 거예요. 예를 들면 어느 농성장에서 텐트를 치고 잠을 자며 며칠 동안 농성을 한다고 할 때 이것이 비를 맞는 상황인 겁니다. 이럴 때 이들을 도울 수 있는 건 함께 비 맞기. 즉 텐트에서 자고 농성을 하며 동고동락함이 되는 것이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