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문학은 독자 성향에 따라 작품의 호불호가 극단적으로 나뉜다. 연쇄살인마가 등장하거나 인간의 어두운 본성을 탐구하는 현실 밀착형 공포를 선호하는 독자가 있는가 하면 미지의 존재나 귀신 같은 초자연적 공포만을 찾는 독자도 있다.

 

 

 

 

 

 

 

 

 

 

 

 

 

 

 

 

 

 

 

* 리처드 매드슨 《나는 전설이다》 (황금가지, 2005)

* 김은희 《킹덤: 김은희 대본집》 (김영사, 2019)

 

 

 

 

몇 년 전부터 ‘좀비(zombie)가 공포물의 소재로 주목받고 있다. 미국 드라마 <워킹데드(The Walking Dead)> 시리즈가 인기리에 방영되었고, 2016년에 영화 <부산행>은 천만 관객을 동원한 한국형 좀비 영화의 시발점으로 평가받았다. 올해 초 넷플릭스를 통해 전 세계에 공개된 한국판 좀비 사극 <킹덤(kingdom)>은 탄탄한 스토리와 액션, 화려한 영상미 등으로 큰 인기를 얻었다. 리처드 매드슨(Richard Matheson)《나는 전설이다》(황금가지)는 좀비를 소재로 한 공포소설 중 하나로 손꼽힌다. 이 소설을 원작으로 한 동명의 영화가 나올 정도로 유명한 작품이지만, 원작을 읽을 때 좀비 떼들이 달아나는 인간을 쫓아가서 물어뜯는 잔혹한 영화 장면을 기대해선 안 된다. 《나는 전설이다》는 좀비들에게 둘러싸인 인류 마지막 생존자의 고독과 절망적인 공포의 깊이를 묘사한 소설이다.

 

 

 

 

 

 

 

 

 

 

 

 

 

 

 

 

 

 

 

* 브람 스토커 《드라큘라》 (열린책들, 2009)

 

 

 

 

좀비물이 언제까지 유행할지 모르겠으나, 대중의 눈길을 사로잡는 오컬트 소재가 등장하게 되면 좀비물 인기는 조금씩 사그라질 것이다. 좀비물이 유행하기 전에는 뱀파이어물이 많이 나오던 시절이 있었다. 브람 스토커(Bram Stoker)의 장편소설 《드라큘라》는 20세기 이후에 출현한 다양한 뱀파이어물의 원본이다. <노스페라투(Nosferatu)>에서 프란시스 코드 코폴라(Francis Ford Coppola)의 <드라큘라>에 이르는 뱀파이어 영화들은 스토커의 소설에 빚지고 있다.

 

 

 

 

 

 

 

 

 

 

 

 

 

 

 

 

 

 

* [품절] 정진영 옮김 《뱀파이어 걸작선》 (책세상, 2016)

* [절판] 로렌스 A. 릭켈스, 정탄(=정진영) 옮김 《뱀파이어 강의》 (루비박스, 2009)

* 한혜원 《뱀파이어 연대기》 (살림, 2004)

 

 

 

 

 

스토커의 《드라큘라》가 나오기 전에 흡혈귀 전설이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고 있었으며 스토커가 태어나기 훨씬 전에 활동한 몇 몇 작가들은 흡혈귀를 소재로 한 작품을 썼다. 흡혈귀가 처음으로 ‘뱀파이어(Vampire)라는 이름으로 알려지게 된 것은 영국의 시인 조지 바이런(George Byron)의 주치의 겸 비서인 존 폴리도리(John Polidori)의 동명 단편소설에서였다.

 

폴리도리는 바이런과 함께 이탈리아와 스위스 등의 유럽을 여행하고 있었는데, 1816년 스위스에서 메리 셸리(Mary Shelley)와 그의 남편이자 시인인 퍼시 B. 셸리(Percy Bysshe Shelley)를 만났다. 바이런과 폴리도리, 그리고 셸리 부부가 스위스에 머무르고 있었던 기간의 날씨는 최악이었다. 며칠 내내 비가 내렸는데, 훗날 기상학자들은 1813년에 폭발한 이탈리아 베수비오 화산에 나오는 화산재가 유럽 전역에 확산되면서 1816년 스위스의 날씨가 나빠졌다고 보고 있다. 외출을 할 수 없었던 네 사람은 모여서 대화를 나누던 중 자신들 중에 누가 제일 무서운 이야기를 만드는지 내기를 하게 된다. 그래서 폴리도리는 《뱀파이어》를, 메리 셸리는 그 유명한 《프랑켄슈타인》을 만든다. 폴리도리의 소설에 뱀파이어로 나오는 루스벤 경(Lord Ruthven)은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바람둥이다. 폴리도리의 《뱀파이어》는 1819년에 발표되었다. 올해는 뱀파이어가 세계문학사에 처음으로 진입한 지 200주년이 되는 해이다. 《뱀파이어》가 발표되기 일 년 전에 《프랑켄슈타인》이 메리 셸리의 이름으로 발표되었다. 그러나 《뱀파이어》는 그 이야기를 만든 폴리도리가 아닌 ‘조지 바이런’의 이름으로 발표되었다. 《뱀파이어》를 처음으로 실은 잡지의 편집자가 당시에 가장 유명한 시인이자 명사였던 바이런의 이름을 쓴 것이다. 《뱀파이어 연대기》(살림)에서 폴리도리는 ‘바이런의 명성에 의해 가려진 작가’로 소개되어 있다. 그러나 대학에 뱀파이어 영화와 관련 문학작품들을 비평하는 강의를 개설한 로렌스 A. 릭켈스(Lawrence A. Rickels)폴리도리가 바이런이 이미 구상한 작품[주1]을 표절했다고 주장한다. 《뱀파이어》를 처음으로 구상한 작가가 폴리도리인지 아니면 바이런인지 지금도 의견이 분분하지만, 현재로서는 《뱀파이어》의 원작자는 폴리도리로 알려지고 있다. 폴리도리의 《뱀파이어》는 《뱀파이어 걸작선》(책세상)에 수록되어 있다.

 

 

 

 

 

 

 

 

 

 

 

 

 

 

 

 

 

 

 

 

* [e-Book] 브람 스토커 《드라큘라의 손님과 기이한 이야기들》 (왓북, 2019)

* [e-Book] 브람 스토커 《판사의 집》 (올푸리, 2019)

 

 

 

 

《드라큘라》가 워낙 유명해서 스토커는 ‘원 히트 라이터(one-hit writer)로 알려져 있다. 《드라큘라》를 쓰기 전에 이미 여러 편의 장편과 단편소설을 썼지만, 《드라큘라》만큼 성공적인 인기를 얻지 못했다. 스토커는 27년 동안 영국의 연극배우 헨리 어빙(Henry Irving)의 비서 겸 어빙이 소유한 극장 지배인으로 일한다. 스토커가 영국에서 살았다는 이유로 그를 영국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스토커는 더블린(Dublin)에서 태어난 아일랜드 인이다. 1912년에 스토커가 세상을 떠난 후에 그의 아내(스토커와 결혼하기 전에 오스카 와일드(Oscar Wilde)가 그녀에게 구애한 적이 있었다. 스토커와 와일드는 같은 아일랜드 출신이며 대학 동문이다)가 남편이 쓴 중 · 단편을 모은 《드라큘라의 손님과 기이한 이야기들》을 1914년에 출판한다. 이 소설집에 총 아홉 편의 작품이 실려 있는데, 이중에 가장 많이 알려진 작품은 『드라큘라의 손님(《뱀파이어 걸작선》에 수록), 『판사의 집』(《영국의 괴담》에 수록), 『스쿼(squaw, 《세계 호러 단편 100선》에 수록)』, 『쥐들의 장례』[주2] 등이다.

 

 

 

 

 

 

 

 

 

 

 

 

 

 

 

 

 

 

 

 

* 르 파뉴 《카르밀라》 (초록달, 2015)

* [e-Book] 르 파뉴《에인저 거리에서 일어난 기묘한 소동에 대한 기술》 (올푸리, 2018)

 

 

 

 

『드라큘라의 손님』은 원래 《드라큘라》 초고의 초반부에 해당한 내용이었으나 초판에서 삭제되었다. 『판사의 집』은 17세기 영국에서 활동한 악명 높은 ‘교수형 담당 판사’가 살았던 집에서 일어나는 초자연적인 현상에 관한 소설이다. 이 소설의 결말은 공포의 절정을 이룬다. 과거에 죽은 교수형 담당 판사가 무시무시한 유령으로 등장하는 플롯은 1851년에 발표된 조지프 셰리든 레 파누(Joseph Sheridan Le Fanu)《에인저 거리에서 일어난 기묘한 소동에 대한 기술》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다. 레 파누 역시 아일랜드 출신이며, 스토커는 레 파누가 공동으로 소유하고 있던 언론 매체의 연극 비평가로 활동하였다. 레 파누는 초자연적인 존재 및 현상을 소재로 한 소설을 썼는데, 그중 가장 유명한 작품은 1872년에 나온 《카르밀라(Carmilla)다. ‘카르밀라’는 소설에 나오는 ‘레즈비언 흡혈귀’의 이름이다. 《카르밀라》는 스토커의 《드라큘라》에 영향을 준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 [품절] 정진영 옮김 《세계 호러 걸작선》 (책세상, 2004)

* 정진영 옮김 《세계 호러 단편 100선》 (책세상, 2005)

* 안길환 옮김 《영국의 괴담》 (명문당, 2000) [주3]

 

 

 

 

《드라큘라의 손님과 기이한 이야기들》 완역본을 전자책으로 읽을 수 있어서 다행이다. 완역본에 수록된 아홉 편의 소설 중 단 네 편(『드라큘라의 손님』, 『판사의 집』, 『스쿼』, 『쥐들의 장례』)만 번역되어 나왔기 때문이다. 점점 시간이 지날수록 종이책에 있는 공포문학 작품들을 접하기 어려워질 것이다. 공포문학도 공포영화와 마찬가지로 유행을 탄다.

 

 

 

[주1] 미완성 소설이라 ‘미완의 소설’이라는 제목이 붙여지게 됐다. 《세계 호러 단편 100선》에 수록되어 있다.

 

[주2] ‘쥐의 매장’이라는 제목으로 《세계 호러 걸작선》에 수록되어 있다. 종이책은 절판되었고, 현재는 전자책으로 판매되고 있다.

 

[주3] ‘판사의 집’이 수록된 단편 공포소설 선집. 영국, 아일랜드 출신 작가들이 쓴 단편 공포소설들이 실려 있다. 그러나 번역체에 한문이 많아 가독성이 떨어진다. 참고로 이 번역본을 만든 ‘명문당’은 동양 고전을 많이 펴낸 출판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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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플갱어의 섬 일본 추리소설 시리즈 4
에도가와 란포 지음, 채숙향 옮김 / 이상미디어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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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MC이상(약칭 ‘이상’): 안녕하세요. ‘이상한 책’의 이상한 진행자 MC이상입니다. 여러분들을 위해 무더위를 식혀줄 재미있는 미스터리 소설을 소개해보려고 합니다. 올여름 피서지 대신에 으스스하고 기괴한 섬에 가보는 것은 어떨까요? 바로 에도가와 란포(江戸川乱歩)의 소설 《도플갱어의 섬》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 깐깐하게 책을 읽는 것으로 유명한 깐죽 아니, ‘깐독의 달인’ 사이러스 선생님을 모셨습니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사이러스(약칭 ‘사이’): 안녕하세요. 사이러스입니다. 방금 저를 소개하면서 ‘깐죽’이라고 말씀하신 거 같은데, 사실 소설에 대해서 깐죽거릴 게 많아요.

 

 

이상: 네, 선생님. 벌써 긴장되기 시작하는데요. 《도플갱어의 섬》이 어떤 소설인지 먼저 소개해주신 다음에 선생님만의 날카로운 의견을 들려주셨으면 합니다.

 

 

사이: 《도플갱어의 섬》은 1927년에 발표된 소설입니다. 원제는 ‘파노라마 섬 기담(パノラマ島綺譚)입니다. 이 소설이 우리나라에 번역된 건 이번이 처음은 아닙니다. ‘에도가와 란포’는 필명입니다. 란포의 본명은 히라이 다로(平井太郎)입니다. 미국의 소설가이자 시인인 에드거 앨런 포(Edgar Allan Poe)에서 따온 것이죠. 란포는 서양 추리소설의 영향을 받아 여러 편의 추리소설을 썼을 뿐만 아니라 추리소설 발전과 보급에 앞장을 섰던 작가입니다. 그래서 그를 ‘일본 추리소설의 아버지’로 불리기도 한답니다. 《도플갱어의 섬》은 ‘도서(倒叙) 미스터리’ 소설입니다. ‘도서’란 시간의 흐름을 역순으로 전개하는 서술 방식을 뜻합니다. 영화 용어로 많이 쓰이는 ‘플래시백(flashback)과 같은 의미입니다. 이미 일어난 사건을 먼저 밝힌 다음에 그 사건이 어떻게 전개되는지 보여주는 방식이죠. 그러면 도서 미스터리가 어떤 장르인지 이해가 되죠? 독자는 처음부터 범인이 범죄를 저지른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범인이 범죄를 저지르게 된 발단과 그 과정을 지켜보죠. 여기까지만 보면 완전 범죄가 됩니다. 그러나 탐정이 등장하면서 완전 범죄로 남을 뻔한 범행이 탄로 나게 되면서 사건이 해결됩니다. 《도플갱어의 섬》에 나오는 범인은 ‘극단적인 몽상가’인 히토미 히로스케입니다. 히로스케는 자신의 이상향인 ‘파노라마 섬’을 만들기 위해 아주 대담하면서도 치밀한 전략을 실행합니다. 자신을 자살로 위장하여 ‘히토미 히로스케’에 관한 모든 삶의 흔적들을 모조리 지웁니다. 그런 다음 자신과 닮았지만, 이미 망자가 된 고모다 겐자부로가 되기로 결심합니다. 히로스케는 매장된 고모다가 죽다 살아났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자신이 고모다가 되어 혼신의 연기를 펼칩니다. 이 작전이 성공하면서 히로스케는 완벽하게 고모다가 되었습니다. 그는 고모다 가문의 재산을 물려받아 그 돈으로 본격적으로 파노라마 섬을 세우기 시작합니다. 파노라마 섬은 현실 세계와 다른 곳입니다. 그곳은 거대한 기계가 환상적인 자연경관을 연출하고 있는 섬입니다. 파노라마 섬이 얼마나 기괴한지 궁금하다면 이 소설을 직접 봐야 합니다.

 

 

이상: 란포가 포의 영향을 받았다고 하는데, 미스터리 소설인 《도플갱어의 섬》도 포의 영향을 받은 작품이라 볼 수 있을까요?

 

 

사이: 네, 그럼요. 현실과 완전히 다른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려는 주인공의 모습은 포의 단편소설 『애른하임의 영토』에 나오는 주인공과 비슷합니다. 둘 다 몽상가이고, 그들이 세우려고 하는 이상향은 오로지 자신들을 위한 안식처이기도 하거든요. 우리가 보기에는 그들의 이상향은 헛된 꿈으로 보이겠지만, 몽상가들은 이상향에서 사는 일이 현실이며 ‘진실’이라고 생각합니다. ‘현세는 꿈, 밤의 꿈이야말로 진실’이라는 란포의 좌우명이 어쩌면 몽상가들이 좋아할 만한 말일 수 있겠군요. 그리고 몽상가들은 자신을 ‘몽상가’라고 스스로 인식하지 못합니다. 눈썰미가 좋은 독자라면 ‘포를 위한 오마주(hommage)로 볼 수 있는 소설 속 장면들을 발견했을 것입니다.

 

 

이상: 포를 위한 오마주라니! 흥미로운데요. 어떤 장면인가요?

 

 

사이: 히로스케가 매장된 고모다의 시체를 파헤치기 전에 ‘가사(假死) 매장’에 대해서 생각합니다. 히로스케는 죽은 것처럼 보이는 사람이 매장된 사례를 잘 알고 있는데요, 이때 히로스케의 범행을 관찰하듯이 서술하고 있는 화자는 포의 단편소설 『때 이른 매장』을 언급합니다. 아마도 이 이름없는 화자의 정체는 포를 누구보다 잘 아는 작가일 것입니다. 고모다의 아내 치요코는 남편 행세를 하는 히로스케를 의심합니다. 결국 히로스케는 자신의 정체를 안 치요코를 죽입니다. 그는 치요코의 시체를 콘크리트 기둥 안에 숨깁니다. 저는 이 장면을 보면서 포의 대표작 『검은 고양이』가 생각났어요. 이 단편소설에 나오는 남편도 아내를 죽이고 맙니다. 그도 아내의 시체를 지하실 한쪽 벽 속에 숨깁니다. 이 남편과 히로스케는 시체를 완벽히 숨겼다고 확신하지만, 아주 사소한 실수로 인해 범행 사실이 발각됩니다. MC 양반, 히로스케가 치요코를 죽인 다음에 그가 무슨 말을 했는지 아십니까?

 

 

이상: 글쎄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데요.

 

 

사이: 책을 제대로 안 읽었구먼. 책을 펼쳐서 221쪽을 보시오. 치요코를 죽인 이후로 히로스케는 더욱 더 망상에 가까운 광기를 드러내요. 이때 그는 자신을 ‘파노라마 왕국의 주인’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자신이 죽인 치요코를 ‘파노라마 왕국의 여왕님’이라고 스스로 선포합니다. 저는 소름 돋는 히로스케의 말을 보면서 그가 『애너벨 리』에 나오는 ‘바닷가 왕국’의 남성과 너무나 다르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이상: ‘애너벨 리’라면…‥ 포가 쓴 시 아닌가요?

 

 

사이: 네, 맞아요. 『애너벨 리』는 죽은 아내를 위한 애가(哀歌)입니다. 이 시의 화자인 남성은 바닷가 왕국에 영원히 잠들어 있는 애너벨 리를 잊지 못해 늘 그녀의 곁에 누워 있어요. 만약 그가 이 바닷가 왕국의 주인이라면, 애너벨 리는 이 왕국의 여왕입니다. 그러나 화자의 마음속에는 왕국이 아닌 오로지 애너벨 리에 대한 일편단심만 있을 뿐입니다. 그에게 애너벨 리는 단순히 사랑했던 연인이 아니에요. 에너벨 리는 그녀를 사랑했던 소중한 기억을 끊임없이 불러일으키면서 화자를 살아가게 만드는, 화자만을 위한 진짜 ‘왕국’인 거죠. 그는 죽은 애너벨 리가 다시 살아남을 수 있다면 그것에 대한 담보로 이 왕국을 바쳤을 것입니다. 그러나 히로스케는 바닷가 왕국의 남성과 비교하면 형편없는 인간이죠. 히로스케는 치요코를 ‘파노라마 왕국의 여왕님’이라고 말하지만, 그는 치요코를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습니다. 그는 치요코를 왕국의 여왕이라고 말하면서도 그녀가 섬의 경관을 돋보이게 하는 나체상의 하나가 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히로스케는 그녀를 자신의 왕국을 아름답게 만드는 부속품으로 취급합니다. 그는 오로지 자신이 직접 만든 왕국인 파노라마 섬을 사랑합니다.

 

 

이상: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보니, 히로스케가 정말 무서운 사람이라는 걸 새삼 느끼게 되네요. 선생님은 지금까지 《도플갱어의 섬》을 긍정적으로 평하면서 소개해주셨는데요, 이 소설에 대한 선생님의 비판적인 견해가 어떤 것인지 궁금합니다.

 

 

사이: 일단 작품 평을 하기 전에 이 책에 있는 오자 하나를 지적하고 싶소.

 

 

이상: 네? 저희가 만든 《도플갱어의 섬》에 오자가 있었어요?

 

 

 

 

 

사이: 내가 읽은 책은 초판이에요. 111쪽에 보면 ‘무가유향’이라는 말이 나와요. 무가유향을 한자로 쓰면 ‘無可有鄕’입니다. 《도플갱어의 섬》의 일본어 텍스트에 보면 ‘無可有鄕’이라고 적혀 있어요. 그런데 번역본에는 무가유향의 한자어가 ‘無何有鄕’으로 되어 있어요. 이 한자어를 읽으면 ‘무하유향’입니다. 무가유향과 무하유향 모두 유토피아(utopia)를 뜻하는 한자어죠. 내 말을 못 믿겠다면 증거를 보여줄 수 있소.

 

 

이상: 아, 정말이네요. 다음 쇄가 출간되면 이 오자를 고치겠습니다.

 

 

사이: 그럼,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죠. 《도플갱어의 섬》의 최악의 장면을 꼽으라고 하면, 저는 히로스케가 치요코를 죽이는 장면을 언급할 것입니다.

 

 

이상: 이유가 무엇인가요? 저는 그 장면이 오랫동안 축적되어 온 히로스케의 잔인한 광기가 ‘펑’하면서 폭발하는 절정의 순간이라고 생각했거든요.

 

 

사이: 그렇게 생각하는 당신이 이상하네요. 출판사 이름이 ‘이상’미디어라서 그런가?

 

 

이상: 네? 뭐라고요?

 

 

사이: 아, 아닙니다! 책 이야기를 해보죠. 저는 란포의 소설을 좋아합니다. 하지만 가끔 그의 소설을 읽다 보면 역겹다고 느껴지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런 장면은 제 눈살을 찌푸리게 합니다. 히로스케가 치요코를 죽이는 장면을 묘사한 문장에 나오는 표현 몇 개를 인용해보죠. 인용된 표현들은 모두 220쪽에 있습니다.

 

 

 “벌거벗은 남녀의 도취된 몸짓”

 

“죽음의 유희”

 

“히로스케와 치요코 모두 어느새 고통을 잊고 황홀한 쾌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환희에 빠져들었습니다.”

 

“치요코의 창백한 얼굴과 그 위에 흐르는 실처럼 가느다란 피, 붉은 옻칠을 한 것처럼 윤기가 흐른 한 줄기 피는 얼마나 고요하고 아름답게 보였는지 모릅니다.”

 

 

히로스케와 치요코는 전라 상태입니다. 히로스케는 강압적으로 치요코를 덮친 상태에서 교살을 시도합니다. 저는 그 장면을 보자마자 불쾌감이 느껴졌어요. MC양반, 치요코가 죽어가는 과정을 ‘죽음의 유희’라고 표현한 문장이 좋다고 생각하오? 피해자인 치요코가 죽어가면서 황홀한 쾌감에 빠진다는 묘사는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어요. 어떻게 이 장면을 ‘미학’이라고 주장할 수 있나요? 저는 잔인하고 폭력적인 행위를 미학으로 과대 포장하면서 해석하는 것을 거부합니다.

 

 

 

 

 

 

작년에 이상미디어 출판사에서 나온 《단발머리 소녀》사토 하루오(佐藤春夫)의 단편소설 『불의 침대』가 수록되어 있어요. 혹시 그 소설을 읽어보셨습니까?

 

 

이상: 네, 당연히 읽었죠.

 

 

사이: 『불의 침대』에 벌거벗은 여인이 분신자살을 시도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제가 《단발머리 소녀》 리뷰를 쓰면서 그 장면을 비판한 적이 있어요.[주] 온몸에 불이 붙은 여인이 쾌락을 느끼면서 죽어가는 것처럼 묘사했거든요. 포는 『상상력에 대하여』라는 글에서 추한 것도 상상력의 재료가 될 수 있으며 아름답다고 썼습니다. 란포는 《도플갱어의 섬》에서 기괴하고 섬뜩한 것을 상상력의 재료로 쓰는 포의 작법을 충실히 따르고 있죠. 하지만 기발한 란포의 상상력은 가끔 정도를 넘어설 때가 있어요. 히로스케의 망상이 위험하듯이, 란포의 상상력도 위험해요. 우리는 그 점에 대해 의구심을 품어야 하고 비판적으로 봐야 합니다.

 

 

이상: 좋은 쪽으로 말씀하신 것은 아니지만, 저희 출판사에서 나온 《단발머리 소녀》도 언급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선생님.

 

 

사이: 고맙긴. 시간이 더 있었으면 《단발머리 소녀》까지 비판할 수 있었소. 그나저나 《단발머리 소녀》에도 오자가 있던데, 고치긴 했소?

 

 

이상: 정말요? 그 책에 오자가 있는 걸 오늘 처음 알았습니다!

 

 

사이: 허, 이런…‥.

 

 

이상: 오늘은 여기까지 마무리를 하겠습니다. 《도플갱어의 섬》은 표제작 이외에 세 편의 소설이 수록된 란포의 작품 선집입니다. 오늘 인터뷰에서 언급되지 못한 세 편의 소설도 재미있으니 꼭 읽어보시길 바랍니다. 그럼 다음 인터뷰 때 뵙겠습니다. (속마음: 다음 인터뷰를 할 땐 저 사람 부르지 말아야겠어)

 

 

 

 

[주] “파격으로 가장한 문학의 성 착취를 보고 싶지 않다” (2019년 1월 28일 작성) https://blog.aladin.co.kr/haesung/106393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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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19-07-24 16: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참 재미있는 글이네요.잘 읽었습니다.에도가와 란포는 본래는 에드가 앨런 포우에서 필명을 따올정도로 처음에는 정통파 본격 추리로 출발했는데 중간에서 이른바 변격물로 변신해간 작가죠.아무레도 일본인 특유의 뭐랄까 좀 음습한 감성과 암울했던 군국주의 시대의 합작품이 아닌가 싶어요^^

cyrus 2019-07-25 11:49   좋아요 0 | URL
예전에 란포 특유의 음습한 묘사를 좋아했어요. 그런데 란포의 단편소설 <애벌레>에 묘사된 장애인의 모습이 불편하게 느껴진 이후로는 란포의 소설을 읽을 때면 양가적인 느낌이 들어요. 재미있으면서도 무언가 불편한 느낌이 들어요. ^^;;

2019-07-24 17: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9-07-25 11:51   좋아요 0 | URL
여자 도둑이 탐정 아케치와 사랑에 빠지는 전개가 별로였어요... ㅎㅎㅎ
제 리뷰에 작품과 출판사를 비판하는 내용을 담고 있어서 안 뽑힐 가능성이 있습니다. ^^;;

겨울호랑이 2019-07-25 11: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cyrus님께서 평소 대화에서도 ‘~했소‘하는 문어체를 많이 사용하시는지 궁금해집니다 ㅋ

cyrus 2019-07-25 11:53   좋아요 1 | URL
겨울호랑이님! 저는 옛날 사람이 아닙니다! ㅎㅎㅎㅎ 저의 정체를 철저히(?) 숨기기 위해서 옛날 사람 어투를 써봤습니다... ^^;;

syo 2019-07-24 22: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ㅋㅋㅋ 이런 글도 잘 쓰시면 어떡해요. 왜 혼자서 칼국수도 잘하고 피자도 잘 만들죠?

cyrus 2019-07-25 11:55   좋아요 0 | URL
나름 재미있게 쓴 리뷰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반응이 저조하네요. 스포일러 표시 때문에 글을 안 보는 사람이 많을 것 같네요. 그런데 지금 이 글을 다시 보니 분량을 조절하는 데 실패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

오늘 날씨가 습하면서 흐린데 따끈한 칼국수가 먹고 싶네요.. ㅎㅎㅎ

syo 2019-07-25 13:42   좋아요 0 | URL
요즘 전체적으로 알라딘이 좀 휑한 것 같은 느낌입니다. 그래서 그런 걸거예요.

칼국수 한그릇 하시죠. 저 서울 올라가면 또 기약없이 못 만날 텐데.

cyrus 2019-07-27 10:48   좋아요 0 | URL
분위기가 전체적으로 휑하다기보다는 온라인 관계가 파편화되었다고 생각해요. 이 곳 알라딘 서재에 크게 두 가지 유형의 회원이 활동한다고 생각해요. 첫 번째 유형은 혼자서 책 읽고 글 쓰는 일에 몰두하는 분들, 두 번째 유형은 특정 회원들을 중심으로 친분을 맺는 분들이에요. 그 전에 syo님과 만나면서 얘기했었지만, 제가 읽는 책들이 쉽고 재미있는 분야나 주제의 내용이 아니라서 다른 사람들 입장에서는 책을 매개로 저와 친하게 지내기 어려워할 거예요. 책에 대한 공통된 관심이 온라인 회원들 간의 친밀도를 높아지게 만드는 원인이거든요. 제 블로그가 다른 분들의 블로그와 비교하면 친밀도를 형성하기 어려워요.

서울에 언제 가세요? 서울 가기 전에 한 번 뵙죠. ^^

syo 2019-07-29 11:57   좋아요 1 | URL
정해진 것은 아니지만 가을의 한복판은 서울에서 보내게 되지 않을까 추측합니다.

그 전에 한번 봐요. 사이러스님이 바쁨쟁이니까 여유내서 알려주세요.
 

 

 

예전부터 독자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장르문학 작가의 작품을 읽으면서 생각해왔던 것이 있다. 그게 뭐냐면 작가의 작품, 작가와 관련된 각종 문헌 등을 한 번에 모아 확인할 수 있는 아카이브(archive)를 만드는 일이다. 아카이브는 ‘기록 보관소’라는 뜻을 가진 단어이다. 아카이브라는 단어가 생소했던 이십 년 전에 이미 소수의 장르문학 마니아들은 절판된 번역본들을 찾아내 그것에 대한 기록을 개인 홈페이지나 블로그에 남겼다. 하지만 이 귀중한 기록의 일부는 삭제되거나 비공개 상태로 남아 있다. 그리고 예전 기록의 정보가 갱신되는 피드백(feedback)이 잘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그래서 나는 새로운 정보가 기록되어야 한다는 것을 더욱 절실히 느꼈다. ‘알아도 되고 몰라도 되는 작가’의 작품이지만, 언젠가는 주목받는 날이 있을 거라 믿기에 열심히 아카이브를 만들어보려고 한다. 이번에 내가 새로 지은 아카이브의 이름인 ‘Good Bad Literature Archive(줄여서 GBLA)조지 오웰(George Orwell)의 글에서 따온 것이다.

 

 

 

 

 

 

 

 

 

지난 주 금요일에 프랑스의 사진작가 클로드 카엥(Claude Cahun)에 대한 글을 남겼다. 그 글을 유심히 본 독자들(생소한 사진작가에 대한 글을 진지하게 읽은 분이 많지 않았을 것 같다)카엥의 삼촌이 ‘작가’였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카엥의 본명은 루시 슈보브(Lucy Schwob)다.

 

 

 

 

 

 

 

 

 

 

 

 

 

 

 

 

 

 

* 줄리엣 해킹 《위대한 사진가들》 (시공아트, 2016)

 

 

 

슈보브 가는 작가를 배출한 집안이다. 그녀의 할아버지 조지 슈보브(George Schwob, 1822~1892)는 일간지를 직접 만들어 운영한 작가였고, 이 일을 물려받은 사람이 카엥의 아버지 모리스 슈보브(Maurice Schwob, 1859~1928)다. 이 집안에서 가장 많이 알려진 사람은 모리스의 동생이자 카엥의 삼촌인 마르셀 슈보브(Marcel Schwob)다. 네이버 백과사전에 마르셀 슈보브를 소개한 항목이 있다.

 

작가 아카이브를 만들면서 외국 작가 이름을 표기하는 것이 제일 난감하다. 이 글에서는 ‘마르셀 슈보브’라고 썼지만, 이름의 표기 방식이 제각각이다. ‘마르셀 슈웝’, ‘마르셀 슈워브’라고 쓰기도 한다.

 

 

 

 

 

 

 

 

 

 

 

 

 

 

 

 

 

 

 

* [품절] 프랑수아 레이몽, 다니엘 콩페르 《환상문학의 거장들》 (자음과 모음, 2001)

 

 

 

 

마르셀 슈보브에 대한 설명이 있는 유일한 책이 《환상문학의 거장들》 (자음과 모음)이다. 근대부터 현대까지 이어져온 장르문학의 역사를 이해하는 데 이 책만 한 요긴한 자료가 없을 것이다. 이 책의 설명에 따르면, 슈보브는 ‘복잡하고 호기심에 가득 찬 인물’이다. 그는 학자에 가까운 삶을 살았을 정도로 고전 문학 작품에 해박했다.

 

 

 

 

 

 

 

 

 

 

 

 

 

 

 

 

 

 

* 프랑수아 비용 《유언의 노래》 (민음사, 2016)

 

 

 

 

 

 

 

 

 

 

 

 

 

 

 

 

 

 

* 오스카 와일드 《오스카 와일드 작품선》 (민음사, 2009)

* [품절] 오스카 와일드 《살로메》 (기린원, 2008)

 

 

 

슈보브는 거의 잊혀 있던 중세 프랑스의 시인 프랑수아 비용(Francois Villon)의 작품을 연구했다. 1896년에 슈보브는 자신과 친한 문인들과 함께 오스카 와일드(Oscar Wilde)의 희곡 《살로메》를 프랑스어로 번역해 무대 위로 올렸다. 1893년에 영국에서 발표된 《살로메》는 성서를 모독했다는 이유로 공연이 금지되었다. 비록 원작을 수정한 것이지만, 슈보브와 그의 동료들 덕분에 프랑스에서 처음으로 공연이 열릴 수 있었다. 그들이 없었으면 《살로메》는 꽤 오랫동안 공연 금지작으로 남았을 것이다.

 

 

 

 

 

 

 

 

 

 

 

 

 

 

 

 

 

* 김경란 《프랑스 상징주의》 (연세대학교출판부, 2005)

* [품절] 김기봉 《프랑스 상징주의와 시인들》 (소나무, 2000)

 

 

 

 

슈보브의 소설은 ‘상징주의 문학’으로 분류된다. 상징주의 문학은 이성을 동원한 논리적인 분석으로 포착할 수 없는 초월적인 세계를 지향한다. 논리와 이성에 반발한 상징주의 작가들은 주관적인 정서를 중시했으며 현실 도피에 가까운 꿈과 이상, 환상과 이지적인 것에 관심을 가졌다. 재미있게도 슈보브는 프랑스어와 고전 문학 작품을 분석하는 논리적인 작업을 하면서도 환상과 기이한 것을 좋아했다. 그는 11살에 보들레르(Baudelaire)가 번역한 에드거 앨런 포(Edgar Allan Poe)의 소설을 처음 읽고 난 이후부터 환상 문학의 세계에 발을 내딛었다. 보들레르는 프랑스 상징주의 문학을 대표하는 시인이다. 그는 포의 작품을 보면서 “내가 쓰고 싶었던 모든 것이 포의 글 속에 있었다”라고 말했다. 그래서 포의 시를 상징주의 시의 원조로 보기도 한다.

 

 

 

 

 

 

 

 

 

 

 

 

 

 

 

 

 

* 정진영 옮김 《세계 호러 단편 100선》 (책세상, 2005)

* [절판, No Image] 정태원 편역 《공포특급 5: 세계편》 (한뜻, 1996)

 

 

 

 

슈보브가 쓴 작품의 수는 그렇게 많지 않다. 우리나라에 번역된 그의 작품은 총 세 편이다. 작품을 소개하면서 평하는 방식은 지난주에 쓴 글 「잊힌 작가: M. P. 실」에 썼던 것과 동일하다. (H: 작품의 역사적 중요성, Q: 작품의 우수성, R: 작품 번역본의 희소가치)

 

 

 

 

 

1. 미라 만드는 여인

Les embaumeuses (1891)

 

 

R

 

 

 

 

 

 

아프리카 사막에 여행하는 것을 좋아하는 형제는 리비아의 사막을 건너다가 자매로 보이는 두 여인을 만난다. 두 여인의 환대에 받은 형제는 그녀들이 사는 집에서 하룻밤을 묵게 된다. 이 소설의 화자인 형은 여인들이 있는 방으로 연결된 구멍을 발견한다. 그는 구멍으로 방의 내부를 들여다보는데, 여인들이 미라를 만드는 모습을 목격한다. 끔찍한 장면을 본 형은 날이 밝으면 이 집을 떠나기로 한다. 형이 목격한 ‘무서운 사실’을 모르는 건지 동생은 두 여인 중 한 명과 동침한다. 다음 날이 되자 동생은 나병에 걸려 고열에 시달리다가 죽는다. 형은 동생의 죽음에 새벽 2시까지 계속 울다가 혼절한다. 나중에 깨어난 형은 동생의 시신과 두 여인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안다. 형은 미친 듯이 집안을 돌아다니다가 자신이 발견한 구멍을 들여다본다. 그는 두 여인의 손에 의해 미라로 만들어지는 죽은 동생을 목격한다. 공포에 질린 형은 동생을 죽인 여인들을 저주하면서 도망친다.

 

 

 

 

 

 

 

 

 

 

 

 

 

 

 

 

* 에드워드 사이드 《오리엔탈리즘》 (교보문고, 2015)

* 김중현 《프랑스 문학과 오리엔탈리즘》 (아모르문디, 2012)

 

 

 

이 단편소설에서 에드워드 사이드(Edward Said)가 비판한 ‘오리엔탈리즘(orientalism)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남성 중심의 서구 문명에서 동양 여성은 ‘타자’이며 멸시와 동경의 대상으로서 판타지가 덧입혀진다. 서구의 상징주의 작가들은 현실을 초월하는 세계를 호기심을 가지게 되었고, 그들의 시선이 쏠린 곳은 동양과 아프리카 대륙이었다. 서구 작가들은 동양과 아프리카 대륙을 ‘미지의 세계’이자 ‘환상의 세계’로 그렸다. 그들은 『미라 만드는 여인』에 나오는 형제처럼 동양과 아프리카를 직접 여행하기도 했다. 그러나 『미라 만드는 여인』처럼, 동양과 아프리카 대륙을 바라보는 긍정적 시각이 부정적으로 변하는 작품들도 있다. 이런 작품들에는 공통적인 서사 있다. 비(非)서구에 속한 나라를 ‘문명 이전의 세계(『미라 만드는 여인』에 묘사된 리비아는 고대부터 전해 내려오는 미라 제조법이 성행하며, 마술을 부리는 마녀들이 존재하는 나라)’로 설정함으로써 서구를 유일한 문명으로 만드는 ‘서구 우월적인 사고’를 전제한 서사이다.

 

 

 

 

 

2. 열차

Le train 081 (1891)

 

 

HQR

 

 

공포특급 5: 세계편》에 수록

 

 

 

장르문학에서 작가들이 많이 쓰고, 독자들이 좋아하는 소재 중 하나는 ‘분신(doppelgänger)이다. 『열차』는 공포 문학 또는 환상 문학에서 자주 묘사되는 ‘불길한 제2의 자아’를 소재로 한 단편소설이다. 원제는 ‘081호 기차’다. 소설의 화자는 파리, 리용, 마르세유를 경유하는 ‘180호 기차’를 운행하는 기관사이다. 화자의 형은 배에서 일하는 운송선의 기관부이다. 마르세유에 콜레라가 유행하면서 화자는 죽을 각오로 기차를 운행한다. 자신이 운행하는 기차에 탄 손님 중에 콜레라 보균자가 있을 것이고, 마르세유에서 출발한 기차가 파리에 도착하면 콜레라가 더 확산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화자는 평소대로 파리로 향하는 기차를 운행하는데, 맞은편 철로에 ‘081호 기차’가 180호 기차와 같은 방향으로 가는 것을 목격한다. 화자는 081호 기차에 타고 있는 기관사가 자신과 똑같은 행동을 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한다. 그리고 081호 기차 객실 안에 있는 형의 시체를 보게 된다. 이 믿을 수 없는 광경에 충격에 빠진 화자는 180호 기차 객실로 달려간다. 그곳에 콜레라에 걸려 죽어 있는 형을 발견한다.

 

081호 기차는 180호 기차의 분신이다. 예로부터 유럽에서는 분신을 ‘죽음을 불러오는 불길한 존재’로 여겼다. 『열차』에서는 분신이 예고한 대로 임종을 맞이한 사람은 분신을 직접 목격한 화자가 아니라 동생이 운행하고 있는 기차에 타고 있던 형이다. ‘반전’까지는 아니지만, 기존의 분신 서사를 살짝 비튼 전개가 좋다.

 

그런데 이 소설의 ‘옥에 티’라면 죽은 형의 형수를 언급하는 장면이다.

 

 

 내 형수는 인도차이나 여인이다. 그녀는 아몬드 씨처럼 위로 올라간 눈과 황색 피부의 소유자다. 나는 그녀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인종이 다르다는 것은 왠지 묘한 느낌을 준다.

 

(정태원 옮김, 192쪽)

 

 

인도차이나는 과거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를 모두 이르는 말이다. 화자는 뜬금없이 형수의 외모를 언급한다. 여기서도 ‘동양 여성’의 매력을 상상하게 만드는 오리엔탈리즘을 엿볼 수 있다.

 

 

 

 

 

 

3. 잔인한 블랑슈

Blanche la sanglante (1893)

 

R

 

 

 

 

이 단편소설에 나오는 기욤 드 프라비는 폭군이다. 그는 귀족의 열 살짜리 딸 블랑슈를 강제로 데려가 아내로 맞이한다. 여기까지만 보면 기욤 드 프라이가 최악의 인물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소설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 이야기의 진짜 주인공은 블랑슈다. 이 소설에서 블랑슈는 ‘순진무구한 악녀’로 묘사된다. 세상 물정 모르는 열 살짜리 소녀가 왜 잔인한 악녀가 되었는지 소설을 직접 보시라‥…고 말하고 싶지만, 이 소설을 본 독자로서 진심을 담아서 말하는 데 진짜 재미가 없다! 이 지루한 소설이 왜 ‘세계 호러 단편 100선’에 들어가 있는지 이해되지 않는다.

 

 

 

 

 

 

 

 

 

 

 

 

 

 

 

 

 

 

 

* 마르셀 슈보브 《The King in the Golden Mask》 (Wakefield Press, 2017)

 

 

 

마르셀 슈보브의 소설이 몇 편 더 번역되어 나올 가능성은 있다. 2016년에 대산문화재단이 지정한 ‘2016년 외국문학 번역지원’ 리스트에 슈보브의 단편집 《황금 가면을 쓴 왕(Le Roi au masque d’or)(1893)이 포함되었기 때문이다.[주] 『미라 만드는 여인』이 수록된 단편집이기도 하다. 이 단편집의 번역이 완료되면, 문학과 지성사의 ‘대산세계문학총서’ 시리즈로 나온다. 번역본이 나올 때까지 몇 년 더 기다려야 하나? 나온다고 해도 잘 팔리지 않겠지만, 이왕이면 번역본이 나왔으면 좋겠다. 번역본이 영영 나오지 않게 되면 대산문화재단이 준 지원금을 허무하게 낭비해 버린다. 번역가가 누군지 모르겠지만, 출간일이 늦어도 좋으니 번역지원금을 헛되게 쓰지 않도록 슈보브의 단편집을 번역해주길 바란다.

 

 

 

 

[주] 울리츠카야 ‘통역사 다니엘 슈타인’ 등 번역지원」 (연합뉴스, 2016년 12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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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9-07-16 17: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사진 공부를 해서 여러 사진 작가들
을 안다고 자부해 왔는데, 역시나 세상은
넓더라는.

다시 한 번 싸이러스 브로의 뛰어난 정보력
에 감탄해 마지 않습니다.

대산문화 재단 번역 지원 프로그램에까지
마수를 ㅋㅋㅋ

cyrus 2019-07-17 11:36   좋아요 0 | URL
인터넷에 검색하면 나와요. 작가의 삶을 설명한 글은 위키백과 영어판을 참조했어요. 영어 독해 능력이 딸려서 위키백과에 있는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가능성이 있어요. 즉, 오류가 있을 수 있다는 거죠. ^^;;

stella.K 2019-07-16 2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개인으로 일간지를 발행하디니 대단하다.
내용이 어땠을지 궁금하다.
울나라는 품절 절판된 책들이 넘 많아.
나도 궁금하긴 하다.

cyrus 2019-07-17 11:40   좋아요 0 | URL
절판된 책 중에 출판연도가 오래된 것은 헌책방뿐만 아니라 도서관에서도 만날 수 없는 희귀 템이에요. 그런 책들은 창고나 다름없는 도서관 자료실에 따로 보관되는데요, 종종 관리가 안 되어 있으면 책 상태가 좋지 않거나 찾지 못하는 경우가 있어요. 예전에 syo님이 도서관 서고에 있는 오래된 책을 빌리려고 했는데, 사서가 그 책을 못 찾았다고 하네요. 검색하면 서고에 그 책이 있다고 나오는데, 정작 사서가 확인해 보니 책이 없었던 거죠. ^^;;
 

 

 

 

조지 오웰(George Orwell)은 이튼스쿨에 다니던 시절에 프랑스어를 배웠다. 그에게 프랑스어를 가르쳐준 교사는 오웰의 문학에 큰 영향을 준 올더스 헉슬리(Aldous Huxley)다. 이때 헉슬리의 나이는 스물네 살이었다. 그러나 헉슬리는 눈이 너무 좋지 않았다. 10대 때부터 걸린 각막염으로 인해 시력이 반쯤 상실된 상태였다. 그의 시력 장애는 이튼스쿨 학생들의 놀림감이 되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오웰은 헉슬리 선생을 잘 따랐다. 그는 헉슬리 선생에게서 프랑스 문학 작품들을 접했고, 가끔 그와 진지한 토론을 벌이기도 했다. 오웰은 헉슬리에게 프랑스어를 잘 배운 덕분에 파리에서 생활할 수 있었다.

 

 

 

 

 

 

 

 

 

 

 

 

 

 

 

 

 

* 스테판 말테르 《조지 오웰, 시대의 작가로 산다는 것》 (제3의공간, 2017)

 

 

 

 

오웰은 인도 제국 경찰을 그만두고 본격적으로 작가가 되기 위해 영국으로 돌아와 일 년간 지내다가 파리로 건너갔다. 1928년 초에 그는 가난한 노동자와 노숙자들이 모여 사는 동네에 자리를 잡았고, 그곳에서 살아온 경험을 소재로 한 첫 번째 작품 《파리와 런던의 따라지 인생》을 쓰게 됐다. 오웰이 파리에 정착하는 데 경제적으로 도움을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이모 넬리 리무진(Nellie Limouzin)이다. 넬리는 페이비언 사회주의(Fabian socialism: 영국에서 만들어진 점진적 사회주의) 협회에 소속된 회원이었고, 유명 인사들이 모이는 살롱의 주인이기도 했다. 오웰 평전인 《조지 오웰, 시대의 작가로 산다는 것》 (제3의공간)은 오웰의 주변 인물에 대해서도 아주 상사하게 설명되어 있는데, 그 책에 넬리의 살롱에 드나든 유명 인사들이 누군지 언급된 내용도 있다.

 

 

 

 페미니스트이자 페이비언협회 회원인 넬리는 자신의 집을 작가들의 살롱으로 제공했다. [중략] 그러나 불행히도, 에릭은 역시 이 살롱에 드나드는 신랄한 논조로 유명한 G. K. 체스터턴(G. K. Chesterton)이나, 공포 이야기와 공상과학 소설가 P. M. 실, 그리고 심지어는 자기의 우상인 웰스와는 마주친 적이 없었다.  (67~68쪽)

 

 

 

그런데 내가 인용한 문장에 오류가 있다. 이 문장의 오류는 ‘공상과학 소설가 P. M. 실이다. 작가 이름이 잘못 적혀 있는데, 오류라기보다는 ‘오식’에 가깝다. 퍼스트 네임과 미들 네임의 순서가 잘못 적혀 있다. ‘P. M. 실’이 아니라 ‘M. P. 실’이다. 사족이지만 P와 M, 그리고 실(Shiel)의 첫 글자인 S가 합쳐지면 ‘PMS’가 된다. PMS는 월경 전 증후군(premenstrual syndrome)의 약자이다.

 

넬리의 살롱에 드나든 G. K. 체스터턴허버트 조지 웰스(Herbert George Wells)는 각각 추리소설가(대표작: 브라운 신부 시리즈), 《타임머신》과 《투명 인간》을 쓴 작가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런데 M. P. 실은 어떤 사람인가? 실은 체스터턴과 웰스의 인지도에 비해 한참 못 미치지만, 장르문학의 역사를 논할 때 한 번쯤은 언급되는(언급되어야 할) 작가다.

 

 

 

 

 

 

 

풀 네임은 매튜 핍스 실(Matthew Phipps Shiel)이다. 카리브 해에 있는 영국령 몬세라트(Montserrat) 섬에 태어났고, 주로 미스터리물이나 공상과학소설을 썼다. 생전에 실의 작품은 크게 주목을 받지 못했고, 실은 가난하게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실이 죽고 난 후에 극소수의 미스터리 마니아와 장르문학 작가들이 그의 작품을 재평가했다.

 

 

 

 

 

 

 

 

 

 

 

 

 

 

 

 

 

 

 

* M. P. 실 《The Purple Cloud》 (Penguin Group USA, 2012)

* H. P. 러브크래프트 《공포 문학의 매혹》 (북스피어, 2012)

 

 

 

실의 대표작은 1901년에 발표된 <The Purple Cloud>이다. ‘자줏빛 구름’ 또는 ‘보랏빛 구름’이라는 제목으로 알려진 이 작품에 지구가 파괴되어 혼자 살아남은 주인공이 등장한다. 그래서 <The Purple Cloud>는 포스트 아포칼립스(post-apocalypse: 세계 종말 이후의 상황을 그리는 SF문학의 한 하위 장르)의 서막을 알린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하워드 필립스 러브크래프트(Howard Phillips Lovecraft)는 공포 문학 작품들을 비평한 자신의 글《공포 문학의 매혹》(북스피어)에서 <The Purple Cloud>의 작품성을 호평했으나 이 작품의 종반부가 아쉽다는 비판적인 견해도 곁들었다.

 

 

 

 

 

 

 

 

 

 

 

 

 

 

 

 

 

 

 

 

 

 

 

 

 

 

 

 

 

 

 

 

 

* 안길환 엮음 《영국의 괴담》 (명문당, 2000)

* 정진영 엮음 《세계 호러 걸작선 2》 (책세상, 2004)

* 한국추리작가협회 엮음 《세계 추리소설 걸작선 2》 (한스미디어, 2013)

* [e-Book] 매튜 핍스 실 《오번 가문의 비극》 (한스미디어, 2014)

 

 

 

 

실은 스무 편 이상의 단편소설을 남겼지만, 국내에 소개된 작품은 그리 많지 않다. 총 세 편인데, 나는 이 작품들을 엘러리 퀸(Ellery Queen)이 썼던 평가 방식처럼 소개하겠다.

 

 

 

 

 

 

 

 

 

 

 

 

 

 

 

 

 

 

* 엘러리 퀸 《탐정, 범죄, 미스터리의 간략한 역사》 (북스피어, 2016)

 

 

 

 

‘엘러리 퀸이 썼던 방식’이 무엇이냐면 그가 탐정소설을 평가할 때 사용했던 세 가지 기준을 말한다. 첫 번째 기준은 ‘역사적 중요성(Historical Significance)이다. 작품이 역사적으로 어느 정도 중요한지 평가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작품이 문학적으로 우수한지(Quality) 평가하는 것이다. 마지막 세 번째는 초판본의 희소가치(Rarity)다. 내 글에서 사용된 ‘R’은 초판본이 아닌 ‘번역본’의 희소가치를 뜻한다. 퀸은 탐정소설을 평가할 때 이 세 가지 기준을 뜻하는 단어의 첫 글자를 따온 ‘HQR’로 표시했다. 나는 여기에 네 번째 기준을 추가했다. ‘번역되지 않은(Untranslated) 작품’일 경우 ‘U’를 표시했다.

 

 

 

 

 

1. 지상에서 못 이룬 사랑

The Tale of Henry and Rowena (1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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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괴담》 (명문당)에 수록된 작품이다. 자신이 사랑한 귀부인에 집착하는 한센병 환자 귀족에 대한 이야기다. 귀부인은 저주의 병(20세기 전까지만 해도 한센병은 치료법이 없는 불치병이었다)에 걸린 귀족에 연민을 느껴 어쩔 수 없이 그의 구애를 받아들이지만, 귀부인에 향한 귀족의 사랑은 간절하다기보다는 무시무시하게 느껴지는 발악에 가깝다. 번역이 영 좋지 않다. 이 작품만 번역에 문제가 아니라 《영국의 괴담》에 수록된 전 작품 모두 번역이 좋지 않다. 2000년에 나온 책인데, 국한문혼용체로 되어 있다. 문장 한 개에 들어 있는 한자어가 한글보다 더 많은 것 같다. 역자가 한자어를 너무 많이 썼다. 거기에 편집자는 아주 친절하게 한자어 옆에 한문까지 같이 써주셨다…‥. 동양고전을 전문적으로 펴낸 출판사라서 한자를 많이 썼던 것일까? 한자어가 너무 많은 문장은 독자가 이야기에 몰입하는 데 방해가 될 뿐만 아니라 줄거리를 파악하는 데 어렵게 만든다. 그리고 한센병 환자 귀족의 이름은 ‘헨리(Henry)’인데 번역본에는 ‘덴리’로 되어 있다.

 

 

 

 

 

 

2. 제루샤

Xélucha (1896)

 

HR

 

 

 

 

 

 

러브크래프트는 이 작품을 ‘독기 어리고 소름 끼치는 단편’이라고 평가했다. 소설 제목인 ‘제루샤’는 ‘악마 같은 여성’으로 묘사된 인물의 이름이다. 『제루샤』는 세기말에 유행했던 병적이고, 반도덕적이고, 퇴폐적인 문화 양식, 즉 데카당스(décadence)풍 감수성이 느껴지는 작품이다. 이 작품에 ‘메리메’라는 인물이 나오는데, 비제(Georges Bizet)의 오페라 《카르멘》의 원작자로 유명한 프로스페르 메리메(Prosper Merimee)와 관련이 있는 것일까?

 

 

 

 

 

3. 오번 가문의 비극

The Race of Orven (1895)

 

HRU (엘러리 퀸의 평점은 HQR)

 

 

 

 

 

실은 아마추어 탐정이 등장하는 탐정소설 네 편을 썼다. ‘잘레스키 왕자(Prince Zaleski)가 미궁의 사건을 해결하는 이야기다. 『오번 가문의 비극』, 『에드먼즈버러 승려의 돌(The Stone of the Edmundsbury Monks)』, 『The S.S』는 실이 살아있을 때 발표한 ‘잘레스키 왕자’ 시리즈다. 그러나 이 작품도 크게 주목을 받지 못했다.

 

 

 

 

 

 

 

 

 

 

 

 

 

 

 

 

 

 

 

 

* [절판] 김봉석, 장경현, 윤영천 《탐정 사전》 (프로파간다, 2014)

 

 

 

 

잘레스키 왕자는 에드거 앨런 포(Edgar Allan Poe)가 창조한 아마추어 탐정 오귀스트 뒤팽(Auguste Dupin)과 흡사하다. 두 사람 모두 앞날 걱정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재력이 있으나 신분이 몰락한 상태가 되었고, 세상과 단절되다시피 하면서 살고 있다. 그리고 두 사람의 또 다른 공통점은 도락가로서 살고 있다는 점이다. 잘레스키는 골동품을, 뒤팽은 책을 수집한다. 실과 포의 탐정소설에 나오는 화자의 역할도 비슷하다. 작품 속 화자는 탐정에게 미궁의 사건을 들려준다. 이야기를 들은 탐정은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을 동원하여 논리적인 방식으로 사건을 해결한다. 그렇다 보니 뒤팽과 잘레스키는 종종 자신의 학식을 자랑하는 듯한 발언을 한다. 그들은 너무 진지하게 현학적인 발언을 하는데 대부분은 사건과 전혀 관련 없는 철학적인 내용이다.

 

『오번 가문의 비극』은 ‘잘레스키 왕자 시리즈’에 속한 작품 중에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번역된 작품이다. 그래서 1895년에 『오번 가문의 비극』과 함께 발표된 나머지 두 작품은 번역되지 않았기 때문에 ‘U’를 표시했다. 실이 세상을 떠난 이후에 알려진 『The Return of Prince Zaleski』도 번역되지 않은 작품이다. 이 소설은 1945년에 쓰였으나 실이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한동안 잊히고 말았다. 다행히 실과 공동으로 집필 작업을 했던 존 고스워스(John Gawsworth)가 이 작품의 원고를 엘러리 퀸에게 보내게 되면서, 잊힐 뻔했던 ‘잘레스키 시리즈’의 네 번째 작품이 세상의 빛을 볼 수 있게 됐다.

 

 

『오번 가문의 비극』이 수록된 《세계 추리소설 걸작선 2》 (한스미디어)의 작품 해설에 오류가 있다.

 

 

『Prince Zaleski: three detective stories』(1895)에는 잘레스키가 활약하는 「오번 가문의 비극」과 「에드먼즈버리 승려의 돌」 「The SS」「The Return of Prince Zaleski」로 네 편의 단편이 실렸다

 

 (해설, 658족)

 

 

 

『Prince Zaleski: three detective stories』의 부제를 보면 알겠지만, 이 책에는 세 편의 단편소설이 수록되었다. 그런데 어째서 해설을 쓴 글쓴이는 이 단편집에 「The Return of Prince Zaleski」이 실려 있다고 말하는 것일까? 단편집에 네 편의 글이 수록되어 있다면 ‘three detective stories’라는 부제가 삭제되어야 한다. 앞서 언급했듯이 「The Return of Prince Zaleski」는 실 사후에 나온 단편 선집을 통해 처음으로 공개된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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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은빛 2019-07-08 2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조지 오웰 평전에 등장하는 이름 오류에서 출발해,
그 작가가 쓴 작품들까지 평가하는 이 글, 너무 너무 멋지군요!
국내에 번역된 작품이 3편 밖에 없다니, 아쉽네요.

시루스님의 이 글을 잘 기억해두었다가 나중에 찾아 읽어야겠어요.

cyrus 2019-07-09 11:11   좋아요 0 | URL
<The Purple Cloud>가 우리말로 번역되었으면 좋겠어요. 왠지 이 소설은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
 
[eBook] 귀퉁이 그림자 빅토리안 호러 컬렉션 5
메리 엘리자베스 브래든 지음 / 올푸리 / 2020년 2월
평점 :
판매중지


 

 

지난 금요일에 올푸리 출판사‘빅토리아 호러 컬렉션’ 다섯 번째 시리즈가 공개되었다. 메리 엘리자베스 브래든(Mary Elizabeth Braddon)의 단편소설 《귀퉁이 그림자(The Shadow in the Corner)다. 브래든은 국내 독자에게 생소한 작가이지만, 생전에 베스트셀러 작가로 명성을 얻었다. 1862년에 연재한 《오들리 부인의 비밀(Lady Audley’s Secret)은 빅토리아 시대의 사회적 분위기를 정직하게 그린 브래든의 대표작이다(《귀퉁이 그림자》가 나온 지 5일이 지난 후에 《오들리 부인의 비밀》 번역본이 정식 출간되었다). 이 소설의 주인공 오들리 부인은 순종적인 ‘남편의 아내’로 나타나는 전통적인 여성상에서 벗어난 인물이다. 그녀는 남자들의 유혹을 거부하지 않는다. 《오들리 부인의 비밀》과 같이 바람피우는 여주인공, 간통, 살인 등 자극적인 소재를 다룬 대중소설을 ‘선정소설(Sensation Novel)이라고 부른다.

 

《귀퉁이 그림자》는 1879년에 나온 소설이다. 소설의 줄거리는 간단하다. 자연과학 교수인 마이클 베스컴은 23년 동안 ‘와일드히스 그랜지’라는 저택에서 혼자 지낸다. 저택에 그와 함께 사는 혈육은 없지만, 베스컴의 시중을 드는 부부(직책은 집사와 하녀)가 살고 있다. 연로한 하녀가 집안일을 계속할 수 없게 되자, 집사는 베스컴에게 젊은 하녀 한 명을 고용해달라고 간청한다. 그러나 새로운 하녀를 구하기가 쉽지 않다. 왜냐하면 저택에 귀신이 나온다는 소문이 있었기 때문이다. ‘과학도’인 베스컴은 저택과 관련된 흉흉한 소문을 가볍게 넘긴다.

 

베스컴은 타지에서 고아로 자란 젊은 여성을 새로운 하녀로 고용하고, 하녀가 지낼 곳으로 ‘저택 북쪽 끄트머리에 있는 큰 방’을 배정한다. 그런데 하녀가 저택에 들어온 지 일주일째 되던 날, 그녀의 외양은 마치 악몽에 시달려온 사람과 같았다. 베스컴은 하녀가 걱정돼서 무슨 문제가 있느냐고 물어보는데, 그녀는 망설인 끝에 저택에 생활하면서 느꼈던 심정을 솔직하게 밝힌다.

 

 

“나리. 제가 자는 방이 무서워요.” (22쪽)

 

 

하녀는 자신의 방 귀퉁이에 있는 ‘흐릿하고 형체 없는 그림자’를 목격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베스컴은 하녀의 말을 믿지 않는다. 그는 그녀가 최근에 세상을 떠난 아버지의 죽음으로 인해 정신적인 충격을 감당하지 못해 신경이 쇠약해졌다고 생각한다. 또 그녀가 상상력이 너무 풍부하다고 지적한다.

 

《귀퉁이 그림자》는 이렇다 할 반전이 없고, 결말을 쉽게 예상할 수 있는 공포소설이다. 그렇지만 이 소설은 ‘이성’과 ‘감성’을 철저히 분리하고, 위계적인 이분법의 관계로 보는 남성 중심적 사고의 한계를 보여준다. 베스컴은 ‘과학 연구를 사랑하는 광신도’이다. 그는 하녀의 진술을 마치 과학자가 분석하듯이 받아들인다. 즉, 철저하게 따져보는 태도이다. 하녀를 대하는 베스컴의 시선은 ‘과학자’의 시선이기도 하며, 더 넓게 보면 ‘이성’을 중시하는 남성적인 시선이다. 이 시선이 뿌리 깊게 박힌 서양철학은 ‘이성’과 ‘감성’의 관계성을 ‘남성’과 ‘여성’으로 설명하고, 여성(감성)에 대한 남성(이성)의 우위를 도식화해왔다. 서양 철학은 남성과 여성을 둘로 나누면서 이 둘을 수평적인 둘이 아니라, 위계적인 둘로 구분하였다. 서양 철학에 의해서 남성과 여성은 남성이 여성의 위에 있는 위계적인 이분법으로 구분되었다. 이러한 위계적인 이분법의 의미가 은폐된 철학의 근본 개념들이 바로 이성 대 감성, 합리성 대 상상력이다.

 

계몽주의 시대에 공상과 심령 현상은 비이성적인 감성으로 규정 받으면서 피해야 할 대상이 되었다. 계몽주의 시대의 지식인들이 생각하는 ‘인간’은 경험과 과학을 바탕으로 이성적인 판단을 하는 존재이다. 당연하게도 남성 지식인들에 의해 강제로 ‘감성’과 동일한 존재가 된 여성은 그들이 생각하는 ‘인간’에 속하지 못했다. 여성에 대한 남성의 편견은 계몽주의 시대가 끝나고, 한 세기 지나서 나타난 근대적인 빅토리아 시대에도 여전했다. 역사적으로 이성이 감성보다 우위를 점하던 시기는 오랫동안 지속되었지만, 《귀퉁이 그림자》에서 묘사된 이성은 감성에게 승리하지 못했다. 이성의 무기력한 패배를 암시하는 듯한 이 소설의 결말을 꼭 보시라.

 

 

 

 

※ Trivia

 

* 3쪽에 ‘계급’의 오자가, 21~22쪽에 뜻을 알 수 없는 비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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