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개의 관 동서 미스터리 북스 90
존 딕슨 카 지음, 김민영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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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신해철의 유고집에 ‘해철이의 추천 도서 25선’이라는 제목의 글이 있다. 여기서 신해철은 자신의 독서 편력을 언급한다. 자신이 좋아하는 책과 싫어하는 책을 순위별로 정했다. 신해철이 가장 싫어하는 책 1위, 과연 무엇일까. (유고집을 아직 읽지 않은 독자에게 미리 양해를 구한다) 그것은 바로 추리소설이다. 이유는 이렇다. 성격이 급해서 소설 맨 뒷장부터 본다고 한다. 그러면 범인이 누군지 알 수 있으니까. 추리소설에서 가장 극적인 결말을 다 알아버렸으니 정독의 재미를 느끼지 못한다. 결말만 알고 있는 신해철은 범인을 찾으려는 탐정을 비웃는다고 한다. 신해철 같은 장난기 있는 성격이라면 도서관이나 동네 책방에 빌린 추리소설의 결말을 미리 알고 난 뒤에 책 겉표지 밑에 ‘이 이야기의 범인은 OOO이다! 메롱~ ㅋㅋㅋ’라고 스포일러한다. 
 
간혹 추리소설을 읽으면 사건의 범인과 그 트릭이 너무 궁금해서 결말을 살짝 훔쳐보고 싶은 마음이 들 때가 있다. 탐정이 추리력을 동원해서 수사를 펼치는 과정이 너무 길어져 버리면 지루하게 느껴진다. 과감하게 다음 쪽으로 넘어가고 싶다. 하지만 독자를 속이는 사건 해결의 단서가 숨겨져 있을까 봐 함부로 넘기지 못한다. 
 
특히 존 딕슨 카의 《세 개의 관》(The Three Coffins)을 읽었을 때 그랬다. 지금도 추리소설 마니아들 사이에서 자주 회자하는 불가사의한 밀실 살인 사건이 아니었다면 나는 읽다가 중도에 포기했을 것이다. 평소 고대 마술에 관심이 많은 그리모 교수는 자신의 연구실에서 마술 같은 죽음을 맞는다. 교수는 총상을 입는데 외부인이 침입할 수 없는 상황이다. 심지어 발자국마저도 남기지 않았다. 어안 벙벙한 사건이 일어난 지 얼마 안 되어 이번에 마술사 피에르 플레이가 막다른 골목 한가운데서 총상을 입은 시체로 발견된다. 이 사건 역시 범인의 동태를 파악할 수 있는 발자국이 없다. 이렇듯 카의 소설 초반부는 독자에게 강렬한 인상을 심어주는 데 성공한다. 흔한 단서 하나라도 나오지 않은 밀실 살인 사건으로 독자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이제 독자는 사건의 비밀과 범인의 정체를 알고 싶어서 기드온 펠 박사의 추리력을 믿고 친구이자 조수 테드 랜폴과 동행하면 된다. 
 
인내심이 많은 당신이 수사 현장을 잘 따라오면 펠 박사가 하는 밀실에 관한 강의도 들을 수 있다. 공짜 강의다. 생소한 추리소설에서부터 유명 작가가 쓴 소설까지 여기에 나온 밀실 사례들을 펠 박사가 소개한다. 이 부분에 할애되는 쪽수만 해도 5쪽 이상 된다. 결말이 무척 궁금해 미칠 것만 같은 독자라면 펠 박사의 강의를 넘어가도 된다. 그 대신 추리소설 마니아는 펠 박사의 강의에 출석해야 한다. 소설이 발표된 시대를 생각한다면 여기에 나오는 밀실 사례들이 너무 뻔한 낡은 수법이 되었지만, 이 정도 기본 지식은 알고 가야지 않겠는가. 개인적으로 나는 이 밀실 강의 내용을 따로 기록해서 정리해두고 싶은 마음이 든다.  
 
이 작품의 진짜 원제는 ‘The Hollow Man’이다. 발자국조차 남기지 않을 정도로 공기처럼 가벼운 투명인간 같은 범인을 의미한다. ‘세 개의 관’은 작품이 미국에서 출간되었을 때 정해진 또 다른 제목이다. 진짜 원제가 이 작품의 분위기를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다. 《세 개의 관》은 추리소설 마니아들로부터 최고의 밀실 살인 사건으로 선정되었고, 추리 작가들이 추천하는 작품으로 거론되지만, 카의 기드온 펠 박사를 잘 모르는 독자에게는 권하고 싶지 않다. 성격이 급한 나머지 결말을 너무 알고 싶어서 책 뒤쪽부터 펼쳐야 성미가 풀리는 독자도 마찬가지다. 
 
카의 펠 박사 시리즈를 읽기 전에 당신이 잘 알고 무척 좋아하는 홈즈 스타일을 과감하게 잊으시라. 홈즈가 호리호리한 체격에 민첩한 운동 신경을 가진 그레이하운드라면, 펠 박사는 느릿느릿한 불독과 비슷하다. 홈즈는 재빠른 판단력과 명민한 추리력으로 사건의 실체를 하나하나 풀어헤치는 반면, 펠 박사는 사건 해결의 실마리가 될 확실한 단서가 발견되고, 자신의 추리력에 완전히 들어맞을 때까지 좀처럼 자신의 추리력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는다. 그래서 탐문 수사는 해드리 경감의 몫이다. 기고만장한 경감은 조금씩 단서가 찾은 것 같은 느낌이 충만해졌다 싶으면 펠 박사에게 자신의 추리력을 언급한다. 추리의 대가 앞에서 자신의 추리력을 보여주고 싶어서 뽐내는 것처럼. 그러면 박사는 조목조목 반박하면서 경감의 자존심에 스크래치를 준다. 경감이 열심히 움직여가면서 수사할 때 박사는 구석 자리에 조용히 앉아 지켜보기만 한다. 이것이 펠 박사만의 수사 방식이다. 결국, 재주는 경감이 실컷 부리다가 마지막에 박사가 사건을 해결한다. 속 시원하게 하나하나 사건을 증명해나가는 홈즈 스타일에 익숙한 독자는 펠 박사 스타일이 속 터져서 못 본다. 여기에다가 증인 혹은 범인 후보군들의 계속되는 증언이 꼬리에 꼬리를 물듯이 길게 이어질수록 독자는 좀처럼 사건의 실마리를 찾지 못한다. 이러니 결말이 너무 궁금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펠 박사의 멱살을 잡고 얼른 범인을 찾으라고 말할 수도 없고 말이다. 
 
 

 

 


 
펠 박사의 수사 방식에 익숙해지기 위해선 펠 박사가 등장하기 시작한 첫 작품부터 정주행하면서 읽는 것이 좋다. 《세 개의 관》을 읽기 전에 국내에 번역된 《마녀가 사는 집》(Hag's Nook, 1933년), 《모자수집광사건》(The Mad Hatter Mystery, 1933년)을 읽으면 된다. 《세 개의 관》은 1938년에 출간된 펠 박사가 6번째로 나온 작품이다. 《세 개의 관》을 읽다 보면, 펠 박사가 나온 작품이 잠깐 언급되기도 한다. 70쪽에 나오는 ‘런던탑 사건’은 《모자수집광사건》을 말한다. 72쪽의 ‘죽음의 시계 사건'은 《세 개의 관》보다 먼저 나온, 국내에 번역되지 않은 펠 박사 시리즈 중 하나인 《Death-Watch》(1935년)이다. (164쪽의 ‘키나스톤 살인사건’은 어떤 작품인지 확인하는 데 실패했다. 일단 ‘미확인’으로 남겨둔다) 
 
《세 개의 관》에서 펠 박사와 해드리 경감이 서로 막역한 사이처럼 나오는데, 같은 출판사(동서문화사)에서 나온《모자수집광사건》에서는 해드리 경감이 박사에게 높임말을 한다. 두 작품의 역자가 다르기 때문에 이런 낯선 번역이 나왔다. 이렇다 보니 《세 개의 관》의 해드리 경감은 대놓고 펠 박사의 추리를 무시하고, 자신의 의견이 박사에게 무시당하면 대드는 듯한 성격 급한 인물처럼 묘사되었다. 수많은 추리소설들 중에 탐정과 형사가 사건 해결을 위해 공생 관계를 맺고 지내는 경우가 흔하지 않다. 홈즈 시리즈에서도 볼 수 있듯이 일부 형사는 사립탐정의 역할을 좋아하지 않는다. 자신의 공이 뺏길 수도 있고, 탐정의 실력에 지고 싶지 않은 자존심이 있기 때문이다. 아무튼 그냥 개인적인 느낌이니 대화체가 다르더라도 추리소설 읽는 데 큰 문제는 없다.  
 
 
 
※ 사소한 지적 : 249쪽에 ‘잠을 유발하는 매혹적인 금발미녀(세이렌)’이라는 문장이 있다. 세이렌은 남정네를 유혹하는 치명적인 매력을 가진 바다의 요정이다. 세이렌이 사는 바다는 배가 난파당하기 쉽다. 이곳을 지나가는 뱃사람들은 이 무시무시한 요정의 노래를 조심해야 한다. 세이렌의 노래를 듣는 뱃사람은 바다에 뛰어들어 죽게 된다. 그러므로 249쪽의 세이렌은 잠을 유발하는 존재가 아니다. 문장을 사실에 맞게 고치려면 ‘잠’이 아니라 ‘자살 충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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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선 2015-01-19 21: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세이렌의 날카로운 지적!

[그장소] 2015-01-19 23: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잠이..죽음으로가는 길과 다를게 없다고..
배위에서..특히나 바다라면.. 조타수가 잔다... 모두 잔다. 생각하면..배는 항법 장치없던 시절이라면..지금처럼.항법장치가 있어도
바다의 특수성은 늘 기민할 필요가 있잖아요.
하하..반박이 아니라. 예전에 읽으면서.요즘 개정본 다시 볼 때 ..지나친
친절은..사람이 스스로 생각할 힘 까지
모두 앗아가는 ..불친절 일 수도 있다고.
이제 성미가 급해져서..정해진 답이 있고
거기서 벗어나는 어떤걸 못견디는 시대가
온 모양 이라고..가끔 생각해요.
고대부터..
잠! 은 죽음 이기도 했어요.
사설이 길죠?... 오해할까봐...
문학적인 접근....같이 생각해보자는 건데요..불쾌할까봐..걱정되요.
직역해 써버리면..사라지는 또 하나..
세이렌˝이라는 존재의 신비함이 사라져요.

순 재 생각입니다.글은 시대를 따른다고 봐요..늘.

cyrus 2015-01-20 11:22   좋아요 0 | URL
자기 생각을 소신 있게 말하는 모습이 보기 좋습니다. 장소님 말씀 듣고 보니 세이렌의 유혹이 뱃사람들을 깊은 잠에 빠뜨릴 수 있는 일종의 수면제 역할로 볼 수 있겠군요. 그리스 신화에서 잠과 죽음의 신은 쌍둥이 형제였으니까요. ^^

해피북 2015-01-20 01: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탐정하면 셜록홈즈만 알고있었는데 펠박사두 있군요ㅎ 이웃님들 덕분에 자꾸 추리소설두 막 읽고 싶어져요 ㅋㅋ

cyrus 2015-01-20 11:29   좋아요 0 | URL
추리작가들이 만들어 낸 탐정들이 생각보다 엄청 많아요. 우리나라는 홈즈의 인기가 제일 많은 탓에 그 밖의 개성 있는 탐정들이 빛을 보지 못하죠. 저는 추리소설을 읽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됐어요. 추리소설을 즐겨 읽은 故 물만두님과 카스피님 그 외에 이미 국내에 덜 알려진 추리소설 작품들과 작가들을 소개한 블로거들에 비하면 아기 걸음마 수준이에요. ^^

카스피 2015-01-20 02: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ㅎㅎ 신해철씨 같은 분들은 위해 나오 추리소설도 있습니다.바로 결말 부분을 밀봉한 책이죠.작가는 추리소설이 해답편인 밀봉부분을 읽고 독자가 작가의 추리 전개에 수긍할수 없다면 환불을 해준다고 했죠.참 대단한 자신감이라고 할수 있는데....제 기억에 아마 그 책이 이와 손톱인가하는 제목의 추리소설로 기억합니다.
읽어보시면 아마 재미있으실 겁니다^^

cyrus 2015-01-20 11:31   좋아요 0 | URL
카스피님은 살아있는 장르소설 백과사전 같습니다. <이와 손톱>이라면 빌 밸린저의 작품을 말하시는군요. 아직 읽어보지 않았어요. 꼭 읽어보겠습니다. 좋은 정보 알려주셔서 고맙습니다. ^^
 
오른쪽 주머니에서 나온 이야기
카렐 차페크 지음, 정찬형 옮김 / 모비딕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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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 TV로 즐겨 봤던 추억의 프로그램 중에 '경찰청 사람들'을 아직도 기억한다. 프로그램이 시작하기 전에 나오는 오프닝 음악이 인상적이었다. 실제 형사가 카메라를 바라보면서 국어책 읽듯 어색한 멘트를 날리거나 구수한 사투리로 사건의 상황을 이야기했던 장면도 잊을 수 없다. 당시 사건을 맡았던 담당 형사가 좀 더 리얼한 상황 재연을 위해 본인 역을 맡아 멋진 연기(?)를 선보이기도 했다. 실제 사건 사고를 재구성하여 범죄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고 범죄 예방 효과를 주고자 하는 목적으로 만들어졌지만, 단지 이런 의도 때문에 이 프로그램이 많은 사랑을 받은 이유가 아니었다. 어른들은 경찰이 범인을 쫓는 과정을 안방에서 지켜보면서 끝내 경찰에 의해 잡히고 마는 범인의 모습을 보면서 정의가 승리한 듯한 통쾌한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경찰청 사람들'을 즐겨 본 세대라면 이때 장래희망을 경찰이라고 정한 적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여기서 그들이 말하던 경찰은 교통정리를 하는 순경이 아닌 강력계 형사였다. 아이의 눈에는 범인을 힘으로 제압하는 형사의 모습이 무척 멋있으니까. 또래보다 힘 좀 쓰고 체력 좋은 친구들은 강력계 형사가 되고 싶어 했다. 밖에 나가서 뛰어노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체력도 비실비실해 보이는 나도 '경찰청 사람들'을 보면서 강력계 형사에 대한 로망이 있었다.

 

그렇지만 우리 주변에서 실제로 만나는 형사들은 영화나 TV 속 잘생긴 형사와는 딴판이다. 우리는 범인을 체포하는 형사의 장면을 기억할 뿐이다. 그건 TV 속 형사의 모습이다. 실제 형사는 그 범인 한 명을 쫓기 위해 거듭된 야근과 이리저리 이동하면서 탐문 수사를 한다. 이런 강행군 탓에 피로에 찌든 생활을 하게 되고, 쏟아지는 사건 때문에 밀려드는 짜증이 늘어난다. 이리저리 빠져나가는 범인들을 다루다 성격이 거칠어진다. 육체적·정신적 피로가 많은 직업이다. 형사가 경찰보다 업무 강도가 상당히 높다. 이렇다 보니 신입 경찰들이 형사를 기피하는 현상이 생긴다.

 

찡그린 미간에선 범죄자들에 대한 태생적인 거부감과 정의감을 읽을 수 있고, 흉악범을 무력으로 제압하는 장면에선 뛰어난 신체능력을 감지할 수 있으며, 날카로운 추리로 범죄의 전모를 밝혀내는 장면에선 지성미까지 느껴지는 잘 생긴 형사. 이런 형사를 기억하고 있다면 이 책을 읽으면서 말끔히 잊으시라. 카렐 차페크의 단편집 『오른쪽 주머니에서 나온 이야기』에 나오는 경찰들이야말로 경찰서에 만날 수 있는 진짜 경찰이다.

 

르네 마그리트의 파이프 그림 속 명구를 빗대어 표현하자면, 이것 『오른쪽 주머니에서 나온 이야기』는 추리소설이 아니다. 그렇지만 장르를 따지면 추리가 맞다. 형사나 탐정이 등장하여 사건을 해결하는 설정은 추리소설에서 볼 수 있는 흔한 장면이다. 그런데 이 작품에 나오는 형사와 탐정 들이 사건을 해결하는 것은 아니다. 사건을 해결하지 못해 그냥 미제 사건으로 처리하거나 수사법과 추리력이 아닌 순전히 운으로 간신히 사건을 해결하기도 한다.

 

『오른쪽 주머니에서 나온 이야기』의 시작을 알리는 단편 「발자국」은 똑똑한 탐정과 형사 이미지의 환상을 깨뜨린다. 바르토세크 형사 반장은 눈 위에 달랑 몇 발자국만 남겨진 발자국의 정체를 알아야 한다. 그런데 발자국을 남긴 사람의 정체를 알아낼 수 있는 단서를 찾을 수 없다. 그리고 반장은 누군가가 일으킨 장난에 신경 쓸 겨를이 없다. 이것을 형사가 담당해야 할 사건이라고 할 수 없다. 바르토세크 반장은 발자국을 처음 발견해서 신고한 사람에게 자신이 형사라고 해서 미스터리한 현상을 해결해야하는 것은 아니라고 단호하게 말한다. 형사라는 직업은 법과 질서를 수호하기 위해 그 누구도 나서지 않은 고약한 일을 맡는다.

 

"법과 질서는 손톱만큼도 미스터리가 아닙니다. 질서를 수호하는 것은 근사한 일이 결코 아닙니다. 세상을 올바르고 깨끗하게 유지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손으로 온갖 고약한 일을 처리해야 하니까요." (「발자국」 중에서, 21쪽)

 

「메이즈리크 형사의 어느 사건」을 읽게 된다면 독자는 형사라는 직업의 고충과 애환에 공감할 것이다. 메이즈리크 형사는 금고털이범을 체포한 이후로 공을 인정받았지만, 그 이후로 계속 여러 가지 사건을 맡게 된다. 경찰과 언론은 메이즈리크 형사가 주도면밀하게 작전을 세워 사건을 해결했다고 떠들어댄다. 정작 형사 본인은 우연을 계기로 해결된 사건이라고 말한다. 자신만의 방법론으로 해결하는 완벽한 만능형사 혹은 명탐정으로 인정받는다면 명예와 존경이 따라오겠지만, 실상 현실은 그렇지 않다. 각종 사건이 형사를 따라온다. 형사는 사건을 해결해야 한다는 정신적 압박감에 시달린다. 형사는 명예로운 이미지를 스스로 거부한다.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방법론이 필요하죠. 저도 이번 사건 이전에는 온갖 방법론들을 믿었습니다. 신중한 관찰이나 전문 지식, 체계적인 조사 혹은 이와 유사한 ... 그러나 사실은 엉터리에 불과한 것들 말이죠. 저는 이번 사건을 겪고 나서 생각이 백팔십도 바뀌었습니다. 그러니까..." 메이즈리크가 숨을 내쉬듯 불쑥 말했다. "모든 것이 단지 우연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든 겁니다." (「메이즈리크 형사의 어느 사건」 중에서, 29~30쪽)

 

이처럼 차페크가 묘사하는 경찰과 탐정은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용감한 모습과 거리가 멀다. 사건을 해결했어도 뒷맛이 영 개운치 않다. 이들은 숨겨지고 은폐된 진실을 끝내 발견하지 못한다. 냉철한 이성과 치밀한 추리력으로 사건을 해결하는 홈즈가 이 소설을 읽었다면 너무나 어설픈 엉터리 형사, 탐정이라고 독설을 퍼부었을 것이다. 

 

차페크는 「실종된 편지」는 에드거 앨런 포의 유명한 추리소설 「도둑맞은 편지」를 우스꽝스럽게 패러디한다. 제아무리 '가장 유능하고 믿을 만한 사람들'도 수사 기법과 추리력을 총동원해서 사라진 편지를 찾아보지만, 끝내 찾지 못한다. 그들이 찾는 편지는 엉뚱한 곳에서 발견된다. 「조금 수상한 사람」의 경사는 사람들 눈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할 정도로 불안에 떠는 상대의 자세만 보고 수상한 사람으로 여긴다. 신통력으로 상대의 마음을 들여다본다는 궁예의 미륵 관심법 뺨치는 수사 방법으로 범인을 잡으려고 한다. 형사 직함을 내밀면 부끄러운, 어설프기 짝이 없는 모습만 드러낸다.
 
미국의 소설가 플래너리 오코너는 작가의 임무를 이렇게 정의했다. 작가는 미스터리를 푸는 게 아니라 깊게 만드는 것이라고. 차페크의 소설은 단지 미스터리를 푸는 데 중점을 두지 않는다. 미스터리한 상황에 마주하는 인물들의 내적 심리를 깊이 내다본다. 그리고 꾸밈없이 솔직하게 묘사한다. 그래서 카페크의 형사는 우리처럼 평범하다. 어리석은 행동을 하지만, 그렇다고 그들을 나무라거나 무시할 수 없다. 자신의 손으로 직접 고약한 일을 맡고 해결하는 것이 보통 일이 아니라는 바르토세크 반장의 말을 우린 절대로 잊어선 안 된다. 형사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 우리가 알지 못했던 진짜 경찰청 사람들은 오른쪽 주머니 속에 있는 이야기에 있다. 이제 TV에서 보던 멋진 경찰청 사람들의 모습을 망각 주머니에 깊숙이 넣으시라. 더 이상 찾지 말라. 지금도 어디선가 추운 날씨 속에 잠을 미루면서까지 고약한 일을 해결하려는 그들을 존중하기 위해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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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피북 2015-01-12 15: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경찰청 사람들을 보구 꿈을 키우신 세대시거나 토토가 를보고 들썩이셨다는걸보니 저와 비슷한 세대신거 같아요ㅋ 오늘 신문정리하다가 순직하신 분들 기사 봤는데 마음이 아프더라구요 말씀처럼 우리 기억에있던 모습이 전부가 아닌데 너무 쉽게 생각하고 있었던거 반성해보기도 했습니다 작가의 임무라는 말도 크게 공감합니다^^

cyrus 2015-01-12 19:31   좋아요 0 | URL
제가 오래된 것을 유별나게 좋아하고 기억하는 나름 젊은 세대입니다... ㅋㅋㅋ
 

 

 

 

 

 

 

 

 

 

 

 

 

 

 

 

 

 

 

 

 

 

 

 

 

 

 

 

 

 

 

 

 

 

 

 

 

 

 

 

 

 

 

 

 

 

 

 

추리소설 마니아라면 한번 정도 읽어봤을 작품들을 펴낸 동서미스터리문고를 읽은 지 얼마 안 됐다. 존 딕슨 카가 쓴 소설 위주로 이제 두 권만 읽었을 뿐이다. (『해골성』과 『모자수집광사건』) 그런데 책의 편집에 대해 아쉬움이 느껴진다. 특히 『모자수집광사건』도 『황제의 코담뱃갑』처럼 타 출판사에서 새롭게 번역됐으면 하는 작품이다. 최근에 엘릭시르 미스터리 책장 시리즈로 나온『황제의 코담뱃갑』도 이미 2003년에 동서미스터리문고에서 소개되었던 작품이다. 『화형 법정』도 엘릭시르에서 새로 번역되어 나온 카의 대표작이다.

 

일단 내가 생각하는 동서미스터리문고의 단점은 역자의 주석이 너무 없다는 것이다. 소설을 읽다 보면 독자가 생소하게 느껴질 수 있는 인명, 지명 또는 기타 용어를 발견할 수 있다. 사실 추리물을 읽는데 굳이 이런 것에 신경 쓸 필요는 없다. 복잡한 사건이 하나씩 해결되는 이야기의 진행 과정을 읽는 데 방해가 되지 않으니까. 하지만 작품 전체 혹은 작품에 나오는 주요 인물들과 깊은 연관성이 있는 특정 용어를 독자가 그냥 지나쳐버려 놓칠 수 있다.

 

예를 들면, 『모자수집광사건』이 시작되는 장면에서 해드리 경감이 펠 박사의 조수 랜폴과 대화를 나누는 과정에서 ‘스태버스 사건’을 언급한다. 경감은 이 ‘스태버스 사건’ 덕분에 기드온 펠 박사의 추리 능력을 알게 됐고, 랜폴은 이 사건 덕분에 지금의 배우자를 만날 수 있었다고 말한다. 그런데 역자는 스태버스 사건에 대한 간략한 설명을 소개하는 주석을 달지 않았다.

 

 

 

 

 

 

 

 

 

 

 

 

 

 

 

 

 

 

 

스태버스 사건은 기드온 펠 박사가 처음으로 등장하는 카의 작품 속 사건이다. 국내에서는 『마녀가 사는 집』(해문출판사, 2003년)이라는 제목으로 소개된 『Hag's nook이다. 이 작품을 간략하게 설명하자면, 스태버스 가문의 사람들이 목이 부러져 죽은 사건을 펠 박사가 맡게 된다. 스태버스 가문의 조상인 앤터니는 자신의 저택 근처에 마녀를 처형하고 그 옆에 교도소를 지었다. 이때부터 스태버스 가문의 끔찍한 저주가 시작된다. 후손들은 목이 부러진 채 죽고 만 것이다. 랜폴은 기차 여행을 하는 길에서 우연히 도로시 스태버스를 만나 사랑에 빠지고 이를 계기로 팰 박사와 함께 스태버스 가문의 저주를 푼다.

 

『모자수집광사건』의 역자가 추리소설에 정통하고 관심이 많았더라면 작품 속 사소한 대화 내용을 그냥 지나치지 않았을 것이다. 주석까지는 아니더라도 작품 해설에 언급됐어야 한다. 동서미스터리문고의 작품 해설 방식도 아쉽다. 작가의 작품 세계를 이해하는 데 너무 부족한 분량이라고 생각한다. 참고로 『마녀가 사는 집』과 『모자수집광사건』은 2003년에 1월에 동시에 국내에 출간되었다. 그런데 『마녀가 사는 집』는 아동용 작품으로 소개되는 바람에 오히려 카 특유의 괴기스러운 분위기를 죽이는 어설픈 삽화를 넣어버린  ‘악마의 편집(?)’을 저질렀고(이 책에 대한 카스피님의 서평을 참고했음), 『모자수집광사건』은 카의 작품을 좀 더 상세하게 알려줄 수 있는 내용을 간과하고 말았다. 여러모로 두 작품이 아쉬울 수밖에 없다. 새로 번역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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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피북 2014-12-30 09: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다양한 분야를 읽으셔서 덕분에 다양한 정보를 듣게되네요 ㅎ 좀 무시무시 할거 같지만 서점에서 보면 그냥 지나치진 않을거 같아요^^

cyrus 2014-12-30 18:17   좋아요 0 | URL
편식 독서를 하지 않으려고 나름 노력하는 중입니다. 북플로 관계를 맺은 분들 덕분에 저도 몰랐던 정보를 많이 얻습니다. ^^

낭만인생 2014-12-30 09: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책을 읽는 묘한 재미를 알려 주시니 감사합니다.

카스피 2014-12-30 22: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ㅎㅎ 추리소설의 세계에 빠져드셨군요.축하드립니다^^
cyrus님이시라면 아마도 좋은 추리 리뷰를 많이 남기실것 같네요.
동서미스터리문고를 읽으시고 역자의 주석이 너무 없다고 지적하셨는데 그건 어쩔수 없을 것 같습니다.2003년도에 나온 동서미스터리문고를 처음 접하신 분들이라면 잘 알수 없지만 이 문고시리즈는 사실 1970년대 중반에 나왔던 동서추리문고를 그대로 복간한 책들이지요.아는 분들은 아는 사실이지만 동서추리문고는 일본의 모 출판사에서 나온 추리문고를 그대로 일어번역한 책이라 현시점에서 보면 번역이 어색한 부분이 상당수 있습니다.
70년대의 동서추리문고른 추리 소설을 사랑한 분들이라면 헌책방을 뒤지면서 찾았던 일종의 성배같은 책들인데 비록 영어에서 일본어로 번역한것을 한국어로 재번역했지만 워낙 유명한 작가들의 작품들이 많았고 이후 전혀 재간이 안되었기에 어쩔수 없었지요.
이후 2003년에 동서미스터리문고로 재간되면서 많은 추리소설 애호가들이 쌍수를 들고 환영했지만 1970년대의 동서추리문고를 토씨하나 안틀리고 그냥 복간해서 많은 비난을 받게되었지요.
이런 사정이기에 님이 아쉬워하는 부분들이 전혀 고려되지 않았습니다.

마녀가 사는 집은 현재 아동용 책으로만 간행되었는데 이 책 역시 1970년대 중반에 나온 삼중당 추리문고에서 성인용으로 나온 것으로 기억합니다.동서 미스터리문고에서 삼중당 추리문고의 책들을 다수 차용해 간행했기에 이 책도 재간될줄 알았는데 아쉽게도 다시 재간되지 않았네요.

cyrus 2014-12-30 23:11   좋아요 0 | URL
카스피님, 반갑습니다. 진작 읽었어야 했는데 뒤늦게 재미에 푹 빠졌어요. 아직 입문자 수준이라서 카스피님이 예전에 블로그에 쓰신 추리물에 관한 글과 서평을 읽고 있습니다. 물만두님의 글도 읽고요. 저 같은 입문자가 추리소설의 세계를 이해하는 데 아주 유용한 글입니다. 이런 가치가 있는 수많은 글이 잊혀지는 게 아쉽게 느껴집니다.

동서미스터리문고의 역사에 무척 궁금했는데 마침 카스피님의 댓글 덕분에 궁금증이 풀렸습니다. 내년에도 예전처럼 추리소설에 관한 페이퍼나 서평 업데이트를 많이 해주세요.
 
모자수집광사건 동서 미스터리 북스 60
존 딕슨 카 지음, 김우종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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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자수집광사건』(원제: The Mad Hatter Mystery)은 존 딕슨 카가 두 번째로 창조한 아마추어 탐정 기드온 펠 박사가 등장하는 작품 중 하나이다. 사실 펠 박사가 처음으로 등장한 작품은 『마녀가 사는 집』(해문출판사, 2003년)이라는 이름으로 번역된 『Hag's Nook』이다. 이 작품과 『모자수집광사건』은 1933년 같은 해에 발표되었다.

 

펠 박사도 카가 맨 처음 창조한 탐정 앙리 방코랭처럼 사건 현장에 조수를 대동한다. 미국 출신의 랜폴이라는 인물이다. 『모자수집광사건』이 펠 박사가 나오는 두 번째 소설이라서 그의 특징을 소개하는 내용이 언급되지 않는다. 기드온 펠 박사는 사전 편집자로 활동했으며 콧수염을 가진 뚱뚱한 인물이다. 움직임이 둔한 편이라서 두 개의 지팡이를 짚고 이동한다. 복장은 주로 낡은 망토와 중절를 착용한다. 『모자수집광사건』이 시작되는 이야기 초반부에 해드리 경감 '스태버스 사건'을 잠깐 언급하면서 과거를 회상하는 대화가 나온다. 여기서 '스태버스 사건'이란 바로 『마녀가 사는 집』에서 펠 박사가 처음 맡은 사건을 말한다. 그러므로 이야기가 진행되는 시간적 과정을 고려하면서 읽으려면 『마녀가 사는 집』, 『모자수집광사건』 순으로 읽어야 한다.

 

『모자수집광사건』은 이전에 발표한 카의 작품(『밤에 걷다』『해골성』)보다 사건이 복잡하면서도 기괴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원제의 'The Mad Hatter'는 루이스 캐럴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나오는 특이한 '미친 모자 장수'를 말하는데 이 소설에서는 실크 모자를 훔치는 정체불명의 사나이를 가리킨다. 평범하기 짝이 없는 도난 사건을 펠 박사가 맡게 되는데 이것은 사건의 전초전에 불과하다. 이어서 끔찍한 사건이 발생한다. 슬프고 잔인한 역사가 남아있는 런던탑에서 필립 드리스콜이라는 젊은 기자가 중세 때 사용했던 무쇠 화살에 찔린 채 발견된 것이다. 여기서 더 특이한 것은 죽은 드리스콜이 미친 모자 장수가 훔쳐서 사라진 실크 모자를 쓰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드리스콜을 죽인 범인은 모자를 훔치고 다닌 미친 모자 장수란 말인가. 사건 현장을 조사한 사람들이라면 당연히 미친 모자 장수를 범인으로 지목하게 된다. 그러나 범인이 너무 뻔뻔하게 자신이 범인이라고 증명할 수 있는 단서를 살해 현장에 그대로 남겨둔 이유는 무엇일까? 펠 박사는 처음에 시큰둥하게 반응했던 모자 도난 사건이 드리스콜의 죽음과 연관성이 있다는 전제하에 일단 미친 모자 장수의 정체를 알아내려고 한다. 그런데 펠 박사는 모자 도난 사건, 드리스콜 살해 사건에 관한 수사를 해드리 경감에게 맡긴 채 또 다른 사건에도 신경 쓰고 있다. 그것은 누군가에 의해 사라져버린 에드거 앨런 포의 미발표 원고를 찾는 것.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이 희귀한 원고는 죽은 드리스콜의 삼촌 윌리엄 경이 소유하고 있었다. 결국, 펠 박사는 세 가지 사건을 동시에 맡은 셈이다.

 

미친 모자 장수의 모자 절도사건, 런던탑에서 일어난 살인사건 그리고 포의 미발표 원고 도난사건. 카는 전혀 상관성이 없어 보이는 이 세 가지 사건을 절묘하게 얽혀 복잡한 트릭을 선보인다. 소설을 읽는 독자라면 범인이 누구이며 어떻게 이런 사건들이 발생하게 되었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의 트릭은 독자의 흥미를 유발하는 신선한 소재이지만, 이야기가 중반부로 진행할수록 지루하게 느껴지는 것이 흠이다. 아무래도 세 가지 사건의 연관성을 독자에게 잘 설명하기 위해서 카는 이 소설을 쓰는 내내 새도록 커피를 마시고, 줄담배를 피우면서 크게 고심했을 것이다. 이렇다 보니 해드리 경감이 여러 인물을 직접 만나면서 수사하는 과정이 지나치게 길어져 버렸다. 책의 300쪽 정도 돼서야 실타래처럼 복잡하게 얽혀버린 사건의 내막이 점점 밝혀지게 된다. 결말이 궁금하다면 꾹 참고 읽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독자는 인내심이 필요하다. 

 

그리고 독자는 펠 박사만의 수사 방식을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펠 박사는 해드리 경감이 수사하는 모습을 옆에서 쭉 지켜보고 나서야 경감의 추리에 귀를 기울인다. 어떤 사건이 완벽한 해결에 도달할 때까지 펠 박사는 자신의 추리를 공개하지 않는다. 일단 상대방의 추리를 듣고 나서 자신이 지금까지 머릿속으로만 정리했던 추리를 덧붙여 설명하고 논리적으로 반박한다. 이러한 펠 박사의 수사 방식은 겸손한 그의 성품을 엿볼 수 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이야기를 질질 끌어 결말이 궁금한 독자의 마음을 애타게 한다. 사건 현장에 들어서마자 간단한 단서만 가지고 사건의 진상을 단번에 알아내고, 자신의 추리를 왓슨과 형사들에게 잘난 척하면서 설명하는 셜록 홈즈와 무척 비교된다.

 

이 소설에서 해드리 경감은 항상 사건 현장에서 침묵하는 펠 박사의 수사 방식에 불만을 표출한다. 펠 박사가 소설에 나오는 탐정처럼 모든 걸 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 신비스럽게 보이는 행동을 흉내 낸다고 비꼬는 것이다. 그러자 펠 박사는 자신은 소설 속에 나오는 탐정과 전혀 다르다고 반박한다. 오히려 소설 속 탐정은 현실적이지 못해 부정하고 나선다. 그는 자신이 추리에 뜸 들이는 이유를 신비스러운 이미지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사건을 신중하게 해결하는 자세라고 말한다. 사건을 해결할 수 있는 결정적인 단서조차 알지 못하면서 다 알고 있다는 듯 남들에게 뽐내고 싶은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은 것이다. 펠 박사는 단서 하나하나 꼼꼼하게 검증하는 추리야말로 오류를 피할 수 있는 신중한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펠 박사의 모습은 독자에게 색다른 매력으로 다가온다. 사실 그는 프랑스 요리를 좋아하는 대식가인데 음식과 술이 뱃속으로 들어가는 시간이 되면 범죄 이야기를 절대로 언급하지 않는다. 그의 성품은 놀 땐 잘 놀고, 공부할 땐 완벽하게 암기하면서 공부할 줄 아는 똑똑한 모범생 같다. 이런 친구들이 성적 잘 나오는 비결은 항상 똑같다. 교과서 위주로 공부했어요. 교과서만 쭉 봤는지 알 수 없지만, 공부 잘하는 모범생들은 뚝심 있게 공부한다. 자신만의 공부 방식을 고수한다. 문제에 한 번 파고들면 풀 때까지 매달린다. 펠 박사는 인내심이 많고 뚝심이 센 탐정계의 모범생이다. 문제의 답을 완전히 찾을 때까지 오랫동안 고민을 하고 신중하게 문제를 푸는, 공부와 문제 풀이에 대한 의지가 확고한 모범생. 이들은 완벽함을 추구하는 탓에 문제 하나라도 틀리는 실수를 두려워한다. 펠 박사 또한 섣부른 추리를 아예 입 밖으로 꺼내지도 않는다. 잘못된 추리가 사건을 더욱 미궁에 빠뜨리는 치명적인 오류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가끔 우리는 이런 모범생을 은근히 싫어하고 질투했다. 문제를 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그런 모범생 친구 하나쯤은 있지 않은가. 이런 친구들을 보면 무언가 꽉 막히면서도 답답한 느낌을 받는다. 그래서 그런지 나는 아직도 펠 박사의 추리가 익숙하지 않다. 국내에 그가 등장한 작품은 많이 소개되지 않은 편인데 앞으로 이 신중한 탐정과 친해지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릴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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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연 2014-12-28 1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는 추리소설과는 아직 친해지지가 않아. 읽어볼 생각도 안 들고. 이유가 뭘까 곰곰_

cyrus 2014-12-28 14:04   좋아요 0 | URL
추리소설을 잘 읽지 않은 이유가 여러 가지 있겠지만, 아무래도 이야기를 읽으면서 느끼게 되는 문화적 차이감이 독서 몰입을 방해하는 요인이 되는 것 같아요.

qualia 2014-12-28 17: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좀 뚱딴지 같은 질문인데요. 원제 『The Mad Hatter Mystery』를 『모자수집광사건』으로 번역한 까닭이 궁금합니다. cyrus 님 글을 읽어보면 “Mad Hatter”는 “미친 모자 장수” 혹은 괴짜 모자 장수를 가리키는 것 같은데요. 그런데 이 미친 모자 장수가 실제로도 모자 수집에 미친 “모자수집광”인가요? 원작 소설에 그렇게 그려지고 있는지 걍 궁금해서요.

구한말 혹은 개화기 초기에 우리나라를 방문했던 어느 외국인 탐험가(?)가 그랬다고 합니다. 한국(조선)처럼 모자가 다양하고 수많은 나라는 첨 봤다고요. 만약 어떤 모자수집광이 당시 한국에 들어왔다면 대박을 쳤을 거란 생각이...^^ 가만 돌이켜보면 정말 우리 민족은 수많은 갖가지 모양의 모자를 만들어냈고, 또 일상에서도 많은 시간을 모자를 쓴 채 생활했던 것 같습니다. 조금만 살펴봐도 아이부터 노인까지, 남녀노소, 지위고하, 사농공상을 가리지 않고 아주 다양한 모자들을 만들어 썼음을 알 수 있죠. 그중에서 ‘갓’의 실용성/예술성/독창성/문화적 상징성은 정말 압권이죠.

cyrus 2014-12-28 17:57   좋아요 0 | URL
제가 글을 쓰다가 ‘미친 모자 장수’라는 말을 빠뜨리고 말았군요. 지적 감사합니다. 수정하겠습니다. 출판사가 이 작품을 ‘모자수집광사건’이라고 정했는데 사실 저도 이 소설을 읽으면서 제목이 잘못 지은 듯한 느낌이 났어요. 왜냐하면 이 소설에 나오는 모자 도둑이 모자를 수집하기 위한 목적으로 모자를 훔치는 것이 아니거든요. 그냥 모자만 훔치는 절도범이라고 보면 됩니다.

제가 알기로는 우리나라에서 만든 모자만 수집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아마도 그런 사람이 있다면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모자를 보유한 수집가의 반열에 올랐을 겁니다. ^^
 
해골성 동서 미스터리 북스 110
존 딕슨 카 지음, 전형기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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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골성』(Castle Skull)은 처녀작 『밤에 걷다』(로크미디어, 2009년)를 발표한 지 1년 뒤에 나온 존 딕슨 카의 두 번째 소설이다. 여기서도 『밤에 걷다』에서 처음으로 등장한 파리 경시청 총감 앙리 방코랭(Henri Bencolin)과 그의 동료인 제프(Jeff Marle)가 사건을 해결한다. 『해골성』은 1989년에 일신서적, 1994년에 계림출판공사에서 아동용 버전으로 ‘해골성의 비밀’이라는 제목으로 다시 나왔다. 현재 구할 수 있는 정식판은 동서출판사가 1977년에 낸 것을 2003년에 동서미스터리북스 110번째로 재출간한 것이다.

 

『밤에 걷다』의 역자는 제프가 방코랭에게 존댓말을 쓰도록 대화체를 옮겼다. 방코랭은 제프를 조수처럼 대하는데 제프가 방코랭보다 나이가 어린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반면에 『해골성』의 역자는 방코랭과 제프를 막역한 사이의 동료처럼 번역했다. 문득 이 두 사람의 관계가 어떻게 되어있는지 궁금하다. 방코랭이 제프보다 나이가 많은 것인가, 아니면 두 사람은 허물없이 지내는 친구 사이인가? 그리고 두 사람은 어떤 계기로 친하게 된 것일까? 『밤에 걷다』에서 화자인 제프는 방코랭의 생김새와 성격을 언급할 뿐, 자신이 방코랭을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가르쳐주지 않는다. 사실 제프의 성(姓)을 『해골성』에서 처음 알았다. Jeff Marle. 『해골성』에서 ‘제프리 마르’라는 이름으로 나온다. (소설의 주인공인 경시청 총감 이름은 ‘방코랑’으로 표기했다)그의 직업이 작가라는 사실이 소설에서 잠깐 언급되는데 그 외에는 더 자세한 정보는 나오지 않는다. 어쩌다가 방코랭을 따라다니면서 그가 사건을 해결하도록 도울 뿐이다.

 

카는『해골성』으로 처녀작 『밤에 걷다』보다 괴기스러운 배경과 음산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데 성공했다. 『해골성』을 읽어보면 해골성 주변 광경과 내부를 유령이 나올법한 공포 분위기로 조성하려는 작가의 노력을 엿볼 수 있다. 카는 저 멀리서 보는 웅장한 옛 고성에서 거대한 해골 형상이 포착되는 것처럼 묘사했다.

 

 

“해골성이 눈에 띄었어요. 달이 높이 떠올라 해골성의 둥근 지붕이 번쩍번쩍 빛나고 있었지요. 그 퀭한 눈, 뻥 뚫린 창문, 코처럼 기뿐 나쁘게 쑥 내밀어진 곳......” (41쪽)

 

 

해골성은 요기 서린 괴상한 마술을 선보였던 인기 마술사 메이르쟈(Maleger)가 소유한 고성이다. 그런데 메이르쟈는 불가사의한 죽음을 맞는다. 마인츠에서 코블렌츠로 가는 일등칸 기차에서 혼자 타고 있던 마술사는 순간 이동 마술을 한 것처럼 사라진다. 며칠 뒤에 라인 강에 변사체가 된 메이르쟈가 발견된다. 이 사건은 메이르쟈의 자살로 종결되었지만, 여전히 의문의 꼬리는 사라지지 않았다. 밀실 같은 일등칸에 혼자 있었던 메이르쟈가 어떻게 라인 강으로 나갈 수 있단 말인가. 달리는 기차 밖으로 나와 자살을 시도할 수도 없고, 심지어 일등칸에 들어올 수 있는 침입자의 흔적을 전혀 찾아볼 수도 없다.

 

마술사의 죽음 이후로 그가 소유했던 해골성에서 기이한 사건이 발생한다. 메이르쟈의 유산 상속인 중 한 사람인 배우 마일런 아리슨이 온몸에 불이 붙은 채 해골성에서 떨어져 사망한다. 사람들은 마술사와 배우의 죽음이 해골성의 저주라고 여기기 시작한다. 15세기 때 세워진 해골성의 성주가 마술사였는데 그가 아리슨처럼 불에 타죽었다는 전설이 전해 내려온다. 성에 성주의 영혼이 돌아다닌다는 소문도 떠돌기도 한다. 이러한 소문과 전설은 해골성과 관련된 두 사람의 죽음을 불가사의한 힘이 개입된 미스터리한 범죄 사건으로 만들어 놓는다.

 

『해골성』의 또 다른 재미는 방코랭과 폰 아른하임 남작과의 추리 대결이다. 추리물에서 독자들이 제일 흥미진진하게 보는 것이 주인공인 탐정의 라이벌이 등장해 추리 솜씨를 뽐내는 대결 구도. 이런 이야기의 요소는 소설을 읽는 독자들도 사건을 해결하는 과정에 몰입하게 만든다. 또 주인공 탐정을 정말 좋아하는 독자라면 주인공이 직접 사건을 해결하는 동시에 라이벌도 완벽하게 제압해버리는 속 시원한 해피엔딩을 원하기도 한다. 폰 아른하임 남작은 베를린 경찰국의 주임경장이다. 그는 제1차 세계대전 중이었던 스파이전에서 적국이 내세운 방코랭과 자주 맞붙을 정도로 뛰어난 두뇌를 가지고 있다. 프랑스와 독일을 대표하는 머리 좋은 두 고위급 경찰이 해골성에서 만나 추리력이라는 지적인 무기로 대결을 펼친다. 두 사람은 성격이 다를 뿐만 아니라 사건을 푸는 과정도 약간에 차이가 있다.

 

남작은 해골성 살인 사건을 제 손으로 직접 해결하여 자신의 추리력이 방코랭보다 한 수 위임을 증명하고 싶어 한다. 어둡고 무시무시한 해골성 내부를 꼼꼼하게 살필 정도로 적극적으로 수사에 나선다. 반면, 방코랭은 자신의 존재감을 최대한 드러나지 않으면서도 조용히 사건을 풀기 위한 단서를 찾는다. 그는 자신을 향한 남작의 질투심을 내심 알고 있다. 그러면서 남작이 사건을 푸는 과정을 쭉 지켜본다. 가끔 방코랭이 남작의 추리력에 태클을 걸면서 두 사람 간의 팽팽한 긴장감이 연출되기도 한다. 그런데 냉철한 방코랭의 매력(?)에 빠진 독자라면 추리 대결의 결과가 만족스럽지 못할 것이다. 이번 사건에서 방코랭은 해골성 살인사건 해결의 주인공이 되고 싶은 남작을 위해서 그의 추리력이 틀린 것을 알면서도 모르는 척 봐주는 아량을 베푼다. 『밤에 걷다』에서 깐깐하면서도 상대방 앞에서 약간 잘난 척하는 방코랭의 ‘까칠남’ 이미지가 한풀 꺾였다.

 

『해골성』의 역자는 해설에서 카의 작품 속에 볼 수 있는 신비적 취향이 마음 약한 독자가 정신을 잃을 정도라고 과장되게 표현했다. 카의 작품 속 오컬트적 분위기에 매료될 수는 있어도, 심신 노약자나 임산부의 정신 건강에 해칠 정도는 아니다. 사실 카의 처녀작을 읽어 본 독자로서 『해골성』은 전작보다 으스스한 분위기를 발산하는데 성공했다고 본다. 글을 쓰는 내내 커피를 연달아 마시고, 줄담배를 피우면서 고민했던 젊은 작가의 흔적이 역력하다. 그런데 카가 너무 배경에만 치중한 탓일까. 탐정으로서의 방코랭의 매력과 그 능력치가 떨어진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두 번째로 나온 방코랭 시리즈라면 개성 있는 탐정의 성격을 좀 더 뚜렷하게 묘사했어야 한다.

 

 

 

 

 

※ 이 책에 동명의 작품인『해골성』뿐만 아니라 카의 단편 「뛰는 자와 나는 자」(Strictly Diplomatic)도 수록되었다. 이 단편소설은 1947년에 발표된 『Dr. Fell, Detective, and Other Stories』에 실려 있다. 사실 카의 단편은 장편에 비해 많이 소개되지 않아서 쉽게 찾아 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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