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전 세계 사람들이 작은 섬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 섬에 사는 사람들은 억울하다. 파나마의 수도 파나마시티에 있는 로펌회사 때문에 파나마가 조용할 날이 없다. 국제탐사보도언론인협회(ICIJ)가 로펌회사 모색 폰세카(Mossack Fonseca)의 비밀서류를 조사하면서 사상 최대의 조세 회피 사실을 폭로했다. 이로 인해 전 세계 조세 피난처에 페이퍼 컴퍼니(paper company)를 설립한 유명 인사들의 이름이 드러났다. 이 문건에는 부자뿐만 아니라 정부 고위인사, 왕족, 축구선수 등도 포함되었다. 노태우 전 대통령 장남이 영국령 버진 아일랜드에 페이퍼 컴퍼니를 설립한 사실도 확인되었다. 조세피난처 가운데 원조는 단연 스위스 은행이다. 오랜 세월 엄청난 규모의 ‘검은 돈’을 숨겨준 든든한 금고 구실을 했다. 하지만 지금은 달라졌다. 구린 돈이 오가는 거래를 차단하기 위해서 스위스의 모든 은행은 계좌 정보를 스위스 정부에 알려야 한다.
로버트 러들럼의 소설 《오스터맨의 주말》은 옛날 옛적에 세계 부자들이 달러 지폐에 불붙여 담배 피우던 시절을 배경으로 한 작품이다. 그 시절 부자들은 스위스 은행 계좌 하나만 잘 숨겨 놓아도 재산을 은닉할 수 있었다. 로버트 러들럼은 첩보 스릴러 장르를 개척한 미국의 작가다.
작가 이름이 생소해도 그의 대표작 ‘제이슨 본 시리즈’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 《본 아이덴티티》, 《본 슈프리머시》, 《본 얼터메이텀》 은 그의 동명 소설 원작으로 만든 영화다. 1980년에 발표된 《본 아이덴티티》가 2002년 영화로 개봉할 때만 해도 이 영화가 4탄 <본 레거시>까지 이어지는 시리즈가 되리라고 아무도 예상하지 않았다. 안타깝게도 작가는 영화화된 자신의 작품을 보지 못한 채 2001년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본 레거시>는 작가로 활동한 러들럼의 친구가 썼다고 한다. 러들럼은 작가가 되기 전에 연극배우와 제작자로 활동했다. 그러다가 42세라는 늦은 나이에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그의 첫 작품은 1971년에 나온 <The Scarlatti Inheritance>이다. 러들럼에게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이 딱 어울린다. 그는 해마다 소설 한 편씩 써내려갔다.
자, 러들럼이 누군지 알았으니 본격적으로 그가 쓴 《오스터맨의 주말》이 어떤 작품인지 알아보자. 《오스터맨의 주말》은 1972년에 발표된 러들럼의 두 번째 소설이다. 유명 TV 뉴스 진행자인 존 터너는 뉴저지주에 있는 평온한 마을 세들 벨리에 거주한다. 세들 벨리는 호화로운 생활을 하는 상류층들이 거주한다. 그래서 이곳은 마치 외부와는 전혀 다른 세상처럼 느껴지고, 세들 벨리 사람들은 다른 지역 사람들의 접근을 반기지 않는다. 일요일 오후에는 뉴저지주 소속 순찰차가 마을 전체를 순찰한다. 존 터너 부부는 버나드 오스터맨 부부, 조셉 카르돈 부부, 변호사 트리메인 부부를 자신의 저택으로 초대해 만나기로 한다. 오스터맨은 작가, 조셉 카르돈은 주식중개업자, 트리메인은 변호사다. 네 사람 모두 남들 부러워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풍족한 삶을 보내고 있다.
그런데 행복한 일상을 깨뜨리는 사람이 터너에 접근한다. CIA 소속 요원 로렌스 퍼세트는 터너에게 세 쌍의 부부가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인물이라고 알려준다. 그들의 정체는 소련 군국주의자들과 손잡아 거대한 음모를 꾸미는 비밀 조직단 오메가 일원이다. 퍼세트는 오메가를 일망타진하기 위한 계획을 실행하기 위해서 터너에게 협조를 요청한다. 말이야 협조지 터너는 반강제적인 퍼세트의 태도에 못 이겨 순순히 받아들인다. 그 대신 자신들의 가족이 CIA로부터 안전하게 보호받는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퍼세트와 CIA 요원들은 폐쇄 회로 CCTV를 통해 터너 가족의 행적을 감시한다. 퍼세트는 오스터맨, 카르돈, 트리메인이 서로 의심하여 갈등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교란 작전을 펼친다. 이럴수록 터너의 입장이 더욱 난처해진다. 세 사람은 동료의 배신으로 인해 자신들의 비밀이 터너가 알게 될까 봐 노심초사한다. 드디어 운명의 주말이 다가왔다. 터너는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세 사람을 만나지만, 긴장감의 끈을 놓치지 않는다. 만일 자신의 사소한 행동 때문에 퍼세트의 계획이 발각되면, 오메가 체포 작전이 실패됨을 물론이거니 자신과 가족의 목숨이 위태롭다.
이야기는 일요일 오후부터 시작해서 다음 주말까지 시간상으로 이어진다. 하루하루 지날수록 인물 간의 긴장감이 더욱 고조된다. 등장인물들은 각자의 비밀을 숨긴 채 상대방의 반응을 살피면서 행동한다. 터너는 퍼세트가 시키는 대로 따라야 한다. 오스터맨, 카르돈, 트리메인은 퍼세트의 교란 작전 속에서도 자신들의 비밀을 철저하게 숨긴다. 비밀을 지키느라 서로서로 의심하는 상황까지 연출된다. 터너와 퍼세트와의 기 싸움도 볼 만하다. 러들럼은 긴장감이 팽팽하게 감도는 이야기로 독자의 몰입을 높인다. 후반부에 이를수록 그동안 쌓여 있던 다이너마이트가 한꺼번에 터지듯이 폭발적으로 전개된다. 주인공은 이제야 진실의 적이 누군지 깨닫고 결단적으로 행동하기 시작한다. 터너는 영웅 모드로 전환하여 오메가에 직접 맞서는 용감한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오메가의 실체를 알게 된다. 진짜 오메가는 퍼세트였다. 전직 CIA 요원이었던 그는 자신의 복수를 위해서 오메가와 손잡았다. 오스터맨, 카르돈, 트리메인은 오메가 일원이 아니었다. 단지 그들 모두가 진짜로 숨기고 싶었던 비밀은 바로 스위스 취리히에 있는 비밀계좌였다. 오메가는 이들의 비밀계좌를 노렸고, 복수심에 불타는 퍼세트를 이용해 터너에 접근했다.
《오스터맨의 주말》은 1970년대 냉전 시대를 배경으로 한 소설이다. 당연히 지금 읽기에는 러들럼의 반전이 큰 감흥을 주지 못한다. 그렇지만 이 소설이 높게 평가 받을 만한 자격은 유효하다. 러들럼은 거대한 사회 체제 속에서 저항하는 주인공의 감정을 밀도 있게 묘사했다.
퍼세트는 웃었다.
“지금 현재 세들 벨리에는 13명의 정보원이 배치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당신들의 좋은 이웃으로서 그 지방에서 생활하고 있습니다.”
“설마!”
터너는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오웰의 1984년 그대로가 아닙니까?”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가 종종 그것을 요구하니까요.”
“내겐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입니까? 전혀 선택의 여지가 없는 거로군요.”
(《오스터맨의 주말》 중에서, 74쪽)
터너는 퍼세트의 24시간 감시를 견디지 못해 일부러 돌발적인 행동을 한다. 그러면서 집단의 이익을 위해서 개인의 자유를 제한하고, 희생을 강요하는 정부조직의 권력을 비판하기도 한다. 그러나 쉽게 빠져나가지 못하는 감시 체제의 암울한 현실을 씁쓸하게 받아들인다.
터너는 자신과 가족의 생명을 스스로 지켜내는 영웅처럼 그려지지만, 실상은 이중의 권력 집단에 감시받는 미약한 개인이다. 터너가 오메가가 조종당하고 있었을 때, 그들을 소탕하려고 진짜 CIA가 주도면밀하게 감시하고 있었다. 가까이 보는 놈 위에 멀리서 보는 놈이 있었다. 차가운 냉전의 긴장감은 사라졌지만, 개인을 감시하는 권력의 서늘한 눈은 살아 있다. 우리는 개인의 삶을 침해하는 감시 체제의 위험성을 알면서도 ‘사회 보호’라는 안전한 명목에 순응한다. 오늘도 빅 브라더는 우리를 향해 바라보면서 이렇게 말한다. 권력은 당신을 원한다. 《오스터맨의 주말》은 ‘감시를 위한 통제’가 평범한 일상을 어떻게 변하게 하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수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