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코올 열린책들 세계문학 120
기욤 아폴리네르 지음, 황현산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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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cene #1  “여기 또 한 명의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가 있소.”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를 아시오?” 이상은 소설 『날개』가 시작되는 구절을 통해 자신을 인정해주지 않는 사회 분위기에 ‘살아있지만 죽은 것 같은 삶’을 살고 있다고 말했다. 박제란 낱말은 인간으로 하여금 거부감을 갖게 하고 다가가기보다 한걸음 물러서게 하는 외면의 상징물이다. 삶이 박제되었다는 것은 생명력을 상실한, 그래서 사고력과 행위를 상실한 무기력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모습을 상징한다.

 

여기 박제가 된 천재가 또 한 명이 있다. 기욤 알베르 둘치니. 이름이 무척 낯설다. 그렇다면 기욤 아폴리네르는 아시는가? ‘세계의 명시’ 모음집을 읽어 본 독자라면 알 것이다. “미라보 다리 아래 센 강이 흐른다 / 우리 사랑을 나는 다시 / 되새겨야만 하는가”로 시작되는 「미라보 다리」를 쓴 시인이다. 기욤 알베르 둘치니와 아폴리네르는 이름만 다른 동일 인물이다. 첫 번째 이름은 시인의 본명이며 ‘아폴리네르’는 세례명이다. 그런데 「미라보 다리」는 익숙해도 정작 시를 쓴 시인의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은 드물다.

 

아폴리네르는 시뿐만 아니라 소설, 희곡 그리고 미술평론가로도 꽤 이름이 알려져 있었다. 20세기 문학사와 미술사에서 큰 무게를 감당하고 있는 ‘초현실주의’라는 말을 처음 사용한 것이 아폴리네르였다. 그는 21세기를 주도할 새로운 미술의 등장을 짐작하고 있었다. 그 흐름을 주도하게 될 몇몇 예술가들을 눈여겨봤던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파블로 피카소다. 아폴리네르는 사람들로부터 점점 인정을 받기 시작하는 가난한 예술가들을 지원했고 친분 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아폴리네르의 실제 삶은 뛰어난 업적에 비하면 기구하고 불운했다. 태어나면서부터 ‘살아있지만 죽은 것 같은 삶’이 시작되었다. 그는 프랑스에서 살면서 시인으로 활동했지만, 사실은 무국적자에 가까웠다. 또 출생 과정도 좋지 않았다. 미지의 이탈리아인 아버지와 폴란드인 어머니 사이의 사생아로 태어났다. 아폴리네르는 평생 자신의 아버지가 누군지 몰랐다. 아폴리네르의 어머니는 한 곳에 가만히 안주하지 못하는 성격에 허영심이 상당히 강한 도박꾼이었다. 이런 환경 속에서 자란 소년 아폴리네르는 평번한 또래 아이들처럼 부모로부터 사랑을 제대로 받으면서 자라지 못했다. 아마도 이때부터 아폴리네르는 너무 오랫동안 허기진 상태가 계속된 마음을 충족시켜 줄 사랑이 필요했음을 느꼈을 것이다.

 

 

 

 Scene #2  운명은 천재를 가만히 두지 않았다

 

청년이 된 아폴리네르는 자신을 따뜻하게 대해줄 사랑의 동반자를 찾기 시작했다. 그는 21살에 독일의 한 부잣집 딸의 프랑스어 가정교사가 되었는데 영어를 가르치는 애니 플레이든을 만나게 된다. 만남의 시작은 좋았으나 두 사람의 연애 진도는 좀처럼 나아가지 않았다. 결국 애니가 미국으로 떠나버림으로써 시인의 첫 번째 사랑은 불행하게 끝나고 말았다. 실연 이후로 아폴리네르는 자신의 시에 아름답지만 고통스러운 사랑의 기억들을 곳곳에 숨겨놓았고, 간간이 심장에서 솟구쳐 오르는 슬픔과 분노를 시로 표출했다.

 

두 번째 사랑은 입체파 화가들에 영감을 준 ‘몽마르트르의 뮤즈’ 마리 로랑생이었다. 둘은 서로 공통점이 많았다. 사생아 출신이었으며 서로의 예술에 대해 공감했다. 함께 손을 맞잡고 미라보 다리를 건널 정도로 두 사람의 사랑은 당장 결혼도 할 수 있을 정도로 많이 가까웠으나 청천벽력 같은 사건이 그들의 사랑을 방해했다.

 

1911년 아폴리네르가 루브르 박물관에 소장된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모나리자’ 도난 사건에 연루된 것이다. 그가 명화 도난 사건에 휘말리게 되는 과정은 정말 불운했다. 아폴리네르의 비서 제리 피에르가 루브르 박물관에서 고대 흉상을 빼돌려 아폴리네르의 집에 숨겨둔 것이 화근이 되었다. 아폴리네르의 집에 숨겨둔 흉상이 발견되면서 아무 죄도 없는 아폴리네르는 ‘모나리자’ 절도 혐의로 상떼 감옥에 구속 수감된다. 아폴리네르가 억울한 누명을 씌우게 만든 비서는 국외로 탈출한 상태였다.

 

이 사건은 프랑스 사회를 발칵 뒤집을 정도로 상당히 충격적이었다. 다행히 아폴리네르는 기소 각하로 구속된 지 일주일 만에 석방된다. 그러나 석방 이후의 아폴리네르 곁에는 그를 지지해준 사람들이 하나둘 떠난 상태였다. 로랑생과의 사랑은 끝났고, 설상가상으로 프랑스 사회는 무국적자이자 명화 도난 사건 혐의를 받은 시인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봤다. 일부 언론은 그의 출생 이력과 무명 시절에 쓴 외설적인 포르노 소설을 트집 잡아 비난했다. 젊은 천재는 자신의 능력을 마음껏 펼치지 못한 채 박제가 되었다. 프랑스 사회는 야박했다. 프랑스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그가 자유롭게 숨 쉬는 것마저 허용하지 않았다.

 

상떼 감옥에서 보낸 일주일은 아폴리네르에게 정말 잊고 싶은 사건 중의 하나였다. 그곳에서의 시간은 자유가 억압되었고, 왕성한 창작의 기력이 한 풀 꺾이고 말았다. 수감 당시에 느꼈던 괴로운 감정은 시 「상떼 감옥에서」에서 구구절절 표현하고 있다.

 

 

감방으로 들어가기 전에
나는 알몸이 되어야 했으니
어느 불길한 밤새 소리 울부짖는다
기욤 너 이게 무슨 꼴이냐고

 

(중략)

 

태양이 창살을 비집고
      걸러 들어와
빛살이 내 시구 위에서
      광대놀음을 벌이네

종이 위에서 춤을 추네
      귀 기울여 들어 봐야
누군가가 발로 둥근 천장을
      구르는 소리

 

한 마리 곰처럼 땅굴 속에서
아침마다 나는 어슬렁거리네
돌자 돌자 마냥 돌자
하늘은 수갑처럼 시퍼렇구나
한 마리 곰처럼 땅굴 속에서
아침마다 나는 어슬렁거리네

 

 

(「상떼 감옥에서」중에서, 175~179쪽)

 

 

그가 프랑스 국적을 얻게 된 것은 세상을 떠나기 3년 전인 1915년.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대가로 아폴리네르는 드디어 무국적자의 설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세계 대전은 문학 천재가 다시 비상(飛上)하기에는 너무나도 위험하고 힘든 시기였다. 1916년 3월, 아폴리네르는 전선에 참전하다가 두뇌에 관통상을 입었다. 그는 몹시 위험한 수술을 받고서도 용케 살아남았지만, 그 총상에서 회복되던 중에 독감에 걸려 종전을 보지 못하고 죽었다.

 

 


 Scene #3  사랑받지 못한 사내의 노래

 

아폴리네르의 시집 『알코올』은 시들을 모은 작품이 아니다. 여기 한 권에 그의 삶 자체가 농축되어 있다. 그는 이 시집만큼은 자신보다 더 많이 사랑받기를 원했다. 성(性)과 국적, 신분이 제각각 다른 일곱 사람만 읽어도 스스로 만족했다.

 

사실 「미라보 다리」와 몇몇 작품을 제외하면 아폴리네르의 시는 어렵다. 시 속에 시인의 삶 자체가 그대로 녹아들어있기 때문에 아폴리네르라는 시인을 모른다면 시를 이해할 수 없다. 그리고 시 중간에 나오는 고대 종교 및 중세 신화 속에 나오는 장면들은 독자들에게 상당한 배경지식을 요구한다. 즉, 한 문장 천천히 음미하면서 읽는 시가 아니다. 『알코올』을 읽기 전에 역자 해설과 작가 연보를 먼저 읽을 것을 권한다. 아폴리네르를 전공한 불문학자 황현산 교수가 아폴리네르의 시를 독자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해설했다.

 

「미라보 다리」 다음으로 아폴리네르의 대표작으로 거론되는 「사랑받지 못한 사내의 노래」는 시집에서 수록된 시 중 가장 긴 내용이다. 애니 플레이든과의 결별 이후에 쓴 작품으로 제목만 봐도 그 때 그 심정을 읊은 것으로 짐작할 수 있지만, 정작 시 내용을 읽게 되면 감정을 문장으로 표출하는, 가슴 아픈 서정시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시인은 고대 및 종교 신화에 나오는 장면을 인용하여 최대한 감정을 절제한다. 아니, 일부러 그 가슴 아픈 기억을 감추는 듯하다. 시는 런던과 파리의 모습뿐만 아니라 행복한 왕들의 장면, 저주 받은 운명 그리고 익사한 왕의 장면 등 어지럽게 섞인 채 나타난다. 독자는 이 시에서 사랑받지 못한 사내, 즉 시인의 감정을 제대로 포착해내기 어렵다.

 

「사랑받지 못한 사내의 노래」의 구성 방식은 입체파 화가들이 즐겨 제작하던 양식인 파피에 꼴레(Papier colle)가 연상된다. 화면에 현실감을 주기 위해 색지나 신문지, 악보, 상표, 벽지 등을 풀로 붙여 새로운 효과를 낸다. 아폴리네르는 과거와 현재뿐만 아니라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이야기들을 끌어 모아 생경한 이미지를 만들어 자신이 지금까지 살아온 경험과 기억 전체를 환기시킨다.

 

이루지 못한 사랑의 기억이 추억이 되어 슬프고도 시인 자신을 괴롭게 만들지만, 아폴리네르는 점점 세월의 흐름에 떠내려가는 그 추억의 한줄기마저 잡기 위해 힘겹게 시를 써내려간다. 그것이 돌아오지 못할 거라는 사실을 시인을 알면서도.  

 

 


나날이 지나가고 주일이 지나가고
    지나간 시간도
  사랑도 돌아오지 않는다
미라보 다리 아래 센 강이 흐른다

    밤이 와도 종이 울려도
    세월은 가고 나는 남는다

 

(「미라보 다리」중에서, 53쪽)

 

 


「사랑받지 못한 사내의 노래」는 사랑의 변심과 좌절에 비롯된 회의감을 드러냈다면, 「미라보 다리」와 「고별」에서 시인은 이별의 고통을 묵묵히 견디면서 지나간 추억이라도 잊지 않으려는 의지를 보여준다.

 


내 언젠가 히스나무 이 가녀린 가지를 꺾어 두었지
가을도 가버렸으나 잊지는 말아라
우리는 이 땅에서 다시 보지 못할 거야
시간의 이 향기 히스나무의 이 가녀린 가지
그래 내 너를 기다리니 잊지는 말아라

 

(「고별」, 105쪽)

 

 

 


 Scene #4  시를 쓴다는 것은 외롭고도 황홀한 심사이어니.   

 

「미라보 다리」가 너무 많이 알려지는 바람에 아폴리네르는 서정시인으로 둔갑되어 알려졌다. 하지만 그는 단순히 사랑을 추억하다가 행복한 결실을 맺지 못하는 불행한 시인은 아니다. 비록 함께하는 기간은 짧았으나 빨강머리 자클린 콜브와 약혼하여 잠시나마 행복한 시절을 보내기도 했다.

 

아폴리네르에게 사랑은 상대방을 향한 지고지순한 감정이 아니다. 고독한 삶의 여정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환기시켜주는 특별한 경험이다. 그에게 시를 쓴다는 것은 ‘외롭고도 황홀한 심사’(정지용 「유리창 1」중에서)이다. 사랑받지 못한 사내의 외로움은 황홀한 시적 감정에 의해 절제된다.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 아폴리네르. 그는 오늘도 세월의 박제가 되어 미라보 다리 밑에서 가슴 아픈 사랑의 추억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아니면 팔 밑에 낡은 책을 끼고 센 강변을 걷고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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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14-09-18 16: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특히 외국작품을 읽을 때는 역자해설을 자세히 읽으면 얻을 것이 많은데 의외로 많은 이들이 소홀히 여기더라고요.아폴리네르의 생애는 얼마나 비극적입니까.저는 역자해설을 정독하라고 늘 권합니다.

cyrus 2014-09-20 23:40   좋아요 0 | URL
최근에 헌책방에서 황현산 교수가 번역한 파스칼 피아의 <아폴리네르>도 구해서 같이 읽고 있습니다. 이 책 덕분에 아폴리네르의 문학을 한결 더 이해할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노이에자이트 2014-09-21 22:49   좋아요 0 | URL
광범위한 지식을 얻을 수 있는 독서를 하시는군요.
 

 

 

 

바닷가에 왔드니
바다와 같이 당신이 생각만 나는구려
바다와 같이 당신을 사랑하고만 싶구려

 

구붓하고 모래톱을 오르면
당신이 앞슨 것만 같구려
당신이 뒤선 것만 같구려

 

그리고 지중지중 물가를 거닐면
당신이 이야기를 하는 것만 같구려
당신이 이야기를 끊는 것만 같구려

 

바닷가는
개지꽃이 개지 아니 나오고
고기비눌에 하이얀 햇볕만 쇠리쇠리하야
어쩐지 쓸쓸만 하구려 섧기만 하구려

 

(백석,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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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

 

 

(정현종, ‘섬’)

 

 

 

인간관계 모두가 사이로 통하고 있다. 사람을 인간(人間)이라고 하는 이유를 깨닫게 된 것이다. 사람을 인간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사람은 사이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사이는 소통의 공간이며 시간 속에 존재한다. 또한 사이는 틀림이 아닌 서로 다름의 영역일 것이다. 사이가 망가지면 갈등이 발생하고 갈등은 왜곡된 신념으로 굳어져 공격적인 분노의식으로 표출되거나 우울감으로 빠져들 수 있다. 인간은 우주 속에서 인간, 시간, 공간의 삼간을 떨쳐버리고는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그 섬에 가고 싶다’하여 희망을 가져볼 수 있겠지만 결국 섬이란 사람과 사람들 사이의 고립이라는 심리적 거리감을 나타내는 것이다. 누군들 고립이 두렵지 않을까. 고립을 피하는 길이 있다. 그런데 갈림길이다. 하나는 고립을 피해 경쟁하는 길이다. 경쟁에서 이기면 섬에서 벗어날 수 있다. 섬에 갇힌 이들과 함께할 수는 없다.

 

또다른 길이 있다. 고립을 피해 연대하는 길이다. 섬과 섬 사이에 다리를 놓는다. 나뿐만 아니라 너도 고립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러나 가시밭길이다. 그래서 우리들 다수는 두 눈 질끈 감고 이 길을 외면한다. 어쩌면 나이를 먹는다는 건 비겁에 익숙해지는 일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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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봄 한철
격정을 인내한
나의 사랑은 지고 있다

 

분분한 낙화
결별이 이룩하는 축복에 싸여
지금은 가야할 때

 

무성한 녹음과 그리고
머지않아 열매 맺는
가을을 향하여
나의 청춘은 꽃답게 죽는다

 

헤어지자
섬세한 손길을 흔들며
하롱하롱 꽃잎이 지는 어느 날

 

나의 사랑, 나의 결별
샘터에 물 고이듯 성숙하는
내 영혼의 슬픈 눈

 

 

 

- 이형기 ‘낙화’ -

 

 


사람의 마음을 짜릿하게 할 정도로 아름다움을 주던 꽃들도 질 때가 되면 더없이 흉한 몰골이 된다. 꽃망울이 터진 지가 언제인데 꽃들은 벌써 옷매무새를 여미고 있다. 누가 불러 저토록 빨리 지려 하는가. 몇날 며칠 그늘을 깔아 주던 땅 위에 마음껏 꽃잎들을 부려 놓고선 나무들은 허탈한 모습으로 하늘을 올려다본다. 꽃망울이 늦게 핀다고 비닐봉지로 벚나무를 씌우던 광경은 아릿한 추억처럼 선명하게 눈에 밟혀 온다. 이제 가진 것 없이 말쑥하게 꽃잎을 떨어낸 벚나무. 그나마 푸릇푸릇 잎이 올라와 허전함을 달래 주지만 바람 불 때마다 날리는 꽃잎들은 여전히 지난날을 잊지 못하는 것 같다.

 

겨울 끝자락의 질투를 견디지 못해 모가지 뎅강 꺾어 바닥으로 떨어진 채 슬픈 연가를 부르며 누워 있는 꽃들이 수북하다. 지나가는 사람들을 유혹하자며 여심처럼 봄날을 만끽하던 벚꽃은 이제 그 때의 추억을 가슴에 묻은 채 아득한 영면에 들어 있다.

 

질 때는 속절없이 져도 그 추억은 오래 남아 있는 법이다. 나뭇가지에 붙어 한 계절 능히 붉은 열정으로 불태우던 꽃들이기에 그 추억의 향기도 오래 동안 내 마음에 남아 잔잔한 꽃 물살을 일으킨다. 사람은 한번 가면 오지 않아도 꽃들은 내년 봄이면 다시 핀다. 소리 없이 꽃잎 다 떨군 나무에 슬퍼하지 말고 푸르름 짙은 잎새가 희망처럼 허공을 쑥쑥 밀고 올라오길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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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든지 길이 있다. 문을 열고 나서면 여러 길들은 손을 내민 채 떠나고 만나는 사람들을 기다린다.

 

길은 시각의 감정을 먼저 열어준다. 그리고 마음을 움직이게 하여 순간 어떤 본능적인 갈망들이 교차하다가 이내 선택한 희망을 믿고, 따라나서게 하는 힘이 있는듯하다.

 

영화 ‘모던 타임즈’에서 채플린의 엔딩에서 보여주는 길의 풍경이 그러했다. 가난과 희망의 조화를 안은 채 연인과 함께 적막한 길을 떠나는 뒷모습이 아름답게 남았다면... 펠리니의 영화 '길'에선 안소니 퀸과 줄리에타 마시니가 고집스럽고 순수한 삶의 전향을 떠올리게 하는 그들의 길을 짙은 향수로 전해주었다.

 

나는 어디에 서있는가. 어디로 어떻게 흘러서 어색하지 않은 자기 의자에 앉은 것 같이 흔쾌히 길을 나서게 될까. 수없이 많은 질문과 대답들은 잊혔다가도 한 번씩 되돌아오는 부메랑이 되어 묻는 것 같다.

 

누구든지 각자의 길이 있다. 가보고 싶은, 가야만하는, 갈 수 없는 길까지...

 

망설이다가 각자의 주사위를 던지고 떠나지 않는가. 그러면 길은 거대한 수평선의 고요함이 되어 현대인의 고립된 방을 만들어 주다가도, 뒤흔드는 파도를 만들어 어디론가 다시 떠나가도록 돛단배 한 척을 내던져 주는 것 같기도 하다.

 

길위에 서면 덩그러니 비어 있는 끝없이 먼 대지가 다가온다. 그것은 텅비어 있는 도로가에서 향기가 피어나는 것 같은 어떤 세계로 인도한다. 희망의 안단테가 들려오는 곳으로 말이다.

 

 

그는 어디로 갔을까 
너희 흘러가버린 기쁨이여 
한때 내 육체를 사용했던 이별들이여 
찾지 말라, 나는 곧 무너질 것들만 그리워했다 
이제 해가 지고 길 위의 기억은 흐려졌으니 
공중엔 희고 둥그런 자국만 뚜렷하다. 
물들은 소리없이 흐르다 굳고 
어디선가 굶주린 구름들은 몰려왔다. 
나무들은 그리고 황폐한 내부를 숨기기 위해 
크고 넓은 이파리들을 가득 피워냈다. 
나는 어디로 가는 것일까, 돌아갈 수조차 없이 
이제는 너무 멀리 떠내려온 이 길 
구름들은 길을 터주지 않으면 곧 사라진다. 
눈을 감아도 보인다. 
 
어둠 속에서 중얼거린다. 
나를 찾지 말라... 무책임한 탄식들이여 
길 위에서 일생을 그르치고 있는 희망이여

 

 

기형도의 시 '길 위에서 중얼거리다'가 아른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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