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에 불타다 문학과지성 시인선 466
정현종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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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고통은 어째서 원하지 않는 곳에서 찾아오며 지나칠 생각도 없이 그림자처럼 찰싹 달라붙어 있는 것일까? 그래서였던가. 정현종 시인의 「그림자에 불타다」를 읽으면서 살면서 잊고 있었던 내 마음속 ‘그림자’의 실체가 궁금해졌다. 심리학자 칼 구스타프 융은 인간의 마음속 근원에 존재하는 원형으로 ‘그림자’를 제시한다. 그림자는 ‘나’의 어두운 면을 의미한다. 이 그림자가 때때로 통제가 안 되고 드러날 때가 있다. 그림자는 우리가 더 칭찬받는 사람이 될수록 그에 맞춰 더 커진다. 그리고 많은 경우 인간은 그림자의 실체를 인정하지 않고 바깥으로, 즉 주변 사람들에게 투사해 자신의 분노와 절망을 표출한다. 그리고 결국 자기 자신도 파괴한다. 「그림자에 불타다」에서 시인의 삶 그리고 그가 사는 세계는 그림자에 까맣게 그을려 있다. 그림자 크기가 비대해질수록 나태, 분노, 우울로 인한 고통의 그늘이 우리 삶을 집어삼킨다.

 

 


1

버스 타고
근동 지방을 구불구불 가다가
드넓은 밀밭을 검게 태운
구름 그림자를 보았다
구름 그림자에 타서! 대지는
여기저기 검게 그을려 있었다.

 

2

욕망 - 구름 그림자
마음- 구름 그림자
몸 - 구름 그림자에
일생은 그을려,
너 - 구름 그림자
나 - 구름 그림자
그 - 구름 그림자에
세계는 검게 그을려-

 

3
그 모든 너울을 걷어낸 뒤의
구름 자체를 나는 좋아하고
그리고
은유로서의 그림자에 불타는 바이오나 -

 

 

(「그림자에 불타다」, 72쪽)

 


 

비로소 시인은 ‘그림자’의 실체를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인다. 물론 자신의 그림자를 들여다보는 일은 불편하고 낯선 작업이다. 하지만 그림자의 일탈을 그대로 내버려두는 순간, 우리 삶은 위험해진다. 괴물로 망가지느냐, 새로운 탄생을 맞느냐, 중요한 기로가 된다. 그림자와의 대면을 통해 자신의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모두 감싸 안은 후에야 자기완성을 이룰 수 있다. 물론, 그 음습한 욕망이 내 것으로 인정하긴 쉽진 않겠지만 피한다고 될 일도 아니지 않은가. 그 다양한 지식이 있어도 누구 하나 가르쳐주지 않는 영역. 바로 우리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일이다. 우리를 둘러싼 세계, 그 바깥쪽에는 그렇게 매달리면서 어째서 우리의 안쪽을 살피는 일에는 그리도 인색한지. 세월이 고단해서, 삶이 지나치게 바빠서, 또 다른 절박한 사정으로, 내 그림자를 때때로 내버려둔 채 살고 있는지 반성하게 된다.

 

 


지난 하루를 되짚어

내 발자국을 따라가노라면

사고의 힘줄이 길을 열고

느낌은 깊어져 강을 이룬다 - 깊어지지 않으면

시간이 아니고, 마음이 아니니.

되돌아보는 일의 귀중함이여

마음은 싹튼다 조용한 시간이여.

 

 

(「지난 발자국」, 12쪽)

 


인간이 하나의 생을 살면서 남기고 가는 흔적은 여러 가지다. 「지난 발자국」은 그렇게 흔적에 대한 관심에서 출발한다. 우리가 남기는 삶의 발자국이 번뇌와 욕심으로 각인된다면 결코 뒷사람이 따르거나 배울 것이 못 된다. 결국 ‘되돌아보는 일’은 어리석은 마음을 없애는 현실적 수행이다. 시인은 소멸하는 것에 대한 이해를 통해 자기 성찰을 유도한다. 하찮게 보이는 발자국을 통해 독자는 삶의 유한한 정체를 깨닫게 된다.


 

이게 무슨 시간입니까
마악 피어나려는
꽃송이,
그 위에 앉아 있는 지금,
공기 중에 열이 가득합니다.,
마악 피어나려는 시간의
열,
꽃송이 한가운데,
이게 무슨 시간입니까.

 

(「이게 무슨 시간입니까」, 76쪽)

 

 

 

꽃이 예쁜 까닭은 그것이 유한한 데에 있다. 때가 되면 시들어 떨어지지 않고 사시장철 한사코 피어 있는 꽃을 상상해 보라. 아무 때나 볼 수 있는 꽃이라면 더 이상 귀하거나 애틋하지 않을 것이다. 개화를 보는 일은 무척 까다롭다. 날씨가 변화무쌍해 개화 시기를 정확히 예측하기 쉽지 않다. 희열의 순간을 앞둔 꽃이기에 보는 이로 하여금 희망의 기운을 찬찬히 느끼게 한다. 꽃을 대하면서 우울해지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게 무슨 시간입니까. 자신도 미소를 짓게 하는 행복한 순간이다. 「이게 무슨 시간입니까」는 지극히 평범한 일상 속에서도 가장 찬란한 순간의 심미적인 삶을 공감케 하려는 시인 작업의 핵심이 농축되어 있다.

 

 

여행을 가면
가는 곳마다 거기서
나는 사라졌느니,
얼마나 많은 나는
여행지에서 사라졌느냐.
거기
풍경의 마약
집들과 골목의 마약
다른 하늘의 마약,
그 낯선 시간과 공간
그 모든 처음의 마약에 취해
나는 사라졌느냐.
얼마나 많은 나는
그 첫사랑 속으로
사라졌느냐.

 

 

(「여행의 마약」, 30쪽)

 

 


시간은 항상
그늘이 깊다.
그 움직임이 늘
저녁 어스름처럼
비밀스러워
그늘은
더욱 깊어간다.
시간의 그림자는 그리하여
그늘의 협곡
그늘의 단층을 이루고,
거기서는
희미한 발소리 같은 것
희미한 숨결 같은 것의
화석(化石)이 붐빈다.
시간의 그늘이
심원한 협곡,
살고죽는 움직임들의
그림자,
끝없이 다시 태어나는(!)
화석 그림자.

 

 

(「시간의 그늘」, 32쪽)

 

 


시인은 시간의 경과에 예민하게 받아들인다. 시집에서 ‘그늘’과 ‘그림자’를 자주 쓰는 빈도를 통해서 시인의 정서가 다가올 시간보다는 지나간 시간 쪽에 쏠려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시인은 아련한 슬픔의 감정을 드러낸다. 시인에게 여행의 추억은 첫사랑처럼 가장 순수했던 시절로 남는다. (「여행의 마약」, 30쪽) 시간의 경과 뒤에 남은 것은 ‘살고 죽는 움직임’의 흔적이 화석처럼 굳어져 버린 그림자들뿐. (「시간의 그늘」, 32쪽)

 

 

이 순간에서
저 순간으로
넘어가는
그 사이에
그림자들,
무거워, 한숨과도 같고
가벼워, 웃음과도 같은
그림자들.
꽃이 피면 같이 웃고
꽃이 지면 같이 우는
그림자들

 

 

(「그 사이에」 중에서, 42쪽)

 

 

 

행복의 빛이 마음속에서 밝아지면 시간의 흐름 속에 비굴해지는 그림자가 그만큼 더 짙게 드리운다. 그러나 시인은 지나가 버린 시절의 광휘에 집착하지 않으며 무기력하지 않다. 삶의 변화를 피해갈 비법은 따로 없다. ‘그늘’을 거꾸로 하면 ‘늘그’가 된다. 늘그막. 시인은 거대한 장막 같은 인생의 그늘 한가운데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 늘그막은 누구에게나 따라오게 되는 인생 자체의 그림자다. 무거워서 한숨과도 같고, 한편으로는 너무 가벼워서 웃음과도 같은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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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의 사랑 문학과지성 시인선 16
최승자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8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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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란 단어는 식상하다. 브라운관에서, 스마트폰 화면까지 사랑은 넘쳐난다. 정치인은 국민을 사랑하고, TV는 시청자를 사랑하고, 기업은 소비자를 사랑한다고 말한다. 너무 흔해서 그런지 그들이 말하는 ‘사랑’은 속이 빈껍데기처럼 느껴진다. 사랑이 깊으면 외로움도 깊어서일까. 그런데도 모두 부르르 떤다. 외로움과 이별에 치를 떤다. 저리도 많은 사랑이 넘쳐나는데 모두가 외롭다고 투정부린다.

 

 

 

사랑은 언제나

벼락처럼 왔다가

정전처럼 끊어지고

갑작스런 배고픔으로

찾아오는 이별.

 

(‘여자들과 사내들’ 중에서, 18쪽)

 

 

 

최승자 시인의 《이 시대의 사랑》은 그냥 읽기만 해도 가슴 찡한 시집이다. 사랑은, 영구불변의 그 무엇이 아니라 벼락처럼 왔다가 정전처럼 가는 변덕스러운 그 무엇이라고 시인은 간파한다. 영원한 사랑이라는 말, 그것은 거짓말과 같다. 영원한 사랑은 언제나 낭만적 수식으로 가득하다. 만남은 이별을 잉태하였고, 그 날은 갑작스럽게 찾아온다. 사랑으로 인해서 맛보았던 모든 즐거움과 행복감은 그 사랑이 허물어지는 시간부터 갈등과 번민으로 변한다.

 

 

허연 외로움의 뇌수 흘리며

잊으려고 잊으려고 여자들은

바람을 향해 돌아서지만,

땅거미질 무렵

길고긴 울음 끝에

공복의 술 몇 잔,

불현듯 낄낄거리며 떠오르는 사람,

그리움의 아수라장.

흐르는 별 아래

이 도회의 더러운 지붕 위에서,

여자들과 사내들은

서로의 무덤을 베고 누워

내일이면 후줄근해질 과거를

열심히 빨아 널고 있습니다.

 

(‘여자들과 사내들’ 중에서, 19쪽)

 

 

 

사랑의 흔적은 꽤 오랫동안 가슴에 남는다. 세월이 흘러도 몸속에는 불꽃의 뜨거움이 식지 않는다. 사랑을 가슴속에 묻어두고 언제 다시 만나자는 이별의 말을 내던졌지만, 지붕 위의 먼 허공을 누워서 바라보는 여자들과 사내들의 눈동자는 촉촉이 젖어간다. 차가운 이성은 자꾸 잃으라고 말하지만, 마음의 공허는 채워지지 않고 아득한 과거에 대한 그리움이 일어난다. 울컥울컥 눈물짓게 하는 그리움이 솟아오른다. 언젠가는 다시 만날 수 있겠지. 자신의 마음속에 가득 채워 넣을 수 없는 사랑에 대한 가여운 응시는 과거를 더 후줄근한 것으로 만든다.

 

 

 

하늘과 땅 사이로

빗줄기는 슬픔의 악보를 옮긴다

외로이 울고 있는 커피잔

무위를 마시고 있는 꽃 두 송이

누가 내 머리 속에서 오래 멈춰 있던

현을 고르고 있다.

 

가만히 비집고 들어갈 수 있을까.

흙 위에 괴는 빗물처럼

다시 네 속으로 스며들 수 있을까.

투명한 유리벽 너머로

너는 생생히 웃는데

지나간 시간을 나는 증명할 수 없다.

네 입맞춤 속에 녹아 있던 모든 것을

다시 만져 볼 수 없다.

 

젖은 창 밖으로 비행기 한 대가 기울고 있다

이제 결코 닿을 수 없는 시간 속으로

 

(‘비 오는 날의 재회’, 43쪽)

 

 

 

사랑을 피해도 어쩔 수 없이 그리운 얼굴들이 번들거리는 그 세상에 투영된다. 사랑할 수밖에 없었던 너의 얼굴. 살기 위해 사랑할 수밖에 없었던 너의 얼굴. 아무리 해도 도망칠 수 없는 것은 그리운 얼굴이다.

 

 

 

이것이 아닌 다른 것을 갖고 싶다.

여기가 아닌 다른 곳으로 가고 싶다.

괴로움

외로움

그리움

내 청춘의 영원한 트라이앵글.

 

(‘내 청춘의 영원한’, 48쪽)

 

 

 

사랑으로부터 도망치려고 하면 할수록 새삼 그 사랑이 그립다. 사랑하는 대상이 그립다. 연모하는 사람이 그립다. 누군가를 그리워한다는 것은 아직 살아 있다는 증거다. 늘 허허롭고 시리기만 하던 가슴이 누군가의 무게로 뻐근하고 묵직할 때 비로소 살아 있음을 깨닫는다. 그러나 한 번 떠난 사랑은 되돌아오지 않는다. 돌아오는 길은 더 이상 옛날의 그 길이 아닐지니. 시인은 그저 아플 뿐이다. 후회가 시인을 짓누른다. 얼마나 아팠을까. 얼마나 그리웠을까. 아마도 시인의 가슴 한 자락은 그리움으로 물크러졌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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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15-07-19 21: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제가 넘 좋아하는 시집... 반갑습니다. Cyrus 님 고맙습니다.

cyrus 2015-07-20 18:49   좋아요 0 | URL
별말씀을요. 저는 이제야 이 시집의 진가를 알았습니다. 정말 좋은 문장의 시들이 많았습니다.

프레이야 2015-07-19 20: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무리해도 도망칠 수 없는 것은 그리운 너의 얼굴이다‥ 오늘 제 마음속 이글거리는 무엇을 심안으로 보신 노문우를 잠시 뵙고 울컥했어요. 시집만큼 독하게(!) 쓴 리뷰, 잘 읽었습니다. 가슴에 불덩이 하나 품은 시인‥

cyrus 2015-07-20 18:50   좋아요 0 | URL
시인의 근황을 듣고 난 뒤에 이 시집을 읽게 되니까 더 마음이 짠했습니다.

바람향 2015-07-19 21: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사랑은 돌아오지 않죠... 돌아오더라도 그 사랑은 옛날의 그 사랑은 아닐 거라고 생각합니다. 참~ 사람의 마음은 스스로도 어쩌지 못할 정도로 불안정하고 예민하고 묘한 것 같습니다..ㅎㅎ

cyrus 2015-07-20 18:50   좋아요 1 | URL
맞아요, 사랑이라는 감정은 요물 같습니다. ㅎㅎㅎ

양철나무꾼 2015-07-19 22:4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전 이시집 싫어요, ㅋㅋㅋ~.
제친구의 소싯적 여친이 줄줄 외웠었대요.
시집은 무생물이니 미워할 수 없고 애먼 시인을 향해 눈을 흘킵니다~!

cyrus 2015-07-20 18:53   좋아요 1 | URL
저는 좋은 시집은 생각날 때마다 읽습니다. 그런데 <이 시대의 사랑>은 사랑을 노래하는 시집치고는 전반적으로 분위기가 우울해서 자주 읽고 싶지 않습니다. ㅎㅎㅎ

돌궐 2015-07-19 23: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가 서제에서 가끔 뇌수 운운하며 글을 쓰는 게 아무래도 최승자 시의 영향인 거 같습니다.ㅎㅎ

cyrus 2015-07-20 18:54   좋아요 1 | URL
돌궐님도 이 시집을 읽어보셨군요. ^^

:Dora 2015-07-20 22:3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최승자선생님 건강하시길

표맥(漂麥) 2015-07-21 13:4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괴로움
외로움
그리움...

아고~ 옛 추억 입니다. ^^
 
- 개정판 민음의 시 42
문인수 지음 / 민음사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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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는 일생에 세 번 운다는 말이 있다. 엄마의 자궁 밖으로 나올 때,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 그리고 나라가 망했을 때. 그런데 어디 눈물 흘릴 일이 고작 세 가지밖에 없을까? 남자가 흘러야 할 눈물 세 가지는 남자가 여자보다 강한 존재라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한 허세일 뿐이다. 남자가 눈물을 흘리지 말아야 할 이유가 없다면, 마음껏 울어 볼 때도 있어야 한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눈물을 흘리게 된다. 눈물에 감정이 개입되면 그것은 내 마음을 대변해주는 도구가 되기도 한다. 그래서 눈물을 보이면 안 된다는 식의 관념은 사람 간의 형식과 격식에 치중하게 되고 솔직한 정서를 억누른다.

 

슬프다는 것. 그것은 분노나 미움의 감정보다는 덜 공격적이다. 문인수 시인은 시를 쓰기 위해 슬픔의 감정을 선택했다. 다만, 그 슬픔은 시인을 무너뜨리지 않게 하려고 슬픔의 내성을 키운다. 시집 《뿔》(민음사, 초판: 1992년 / 개정판: 2007년)에 나오는 눈물은 마치 윤활유처럼 고독한 감정을 쓰다듬는다.

 

 

 흐린 날은, 바람 한 점 없는 날은 비.

 젖은 것들의 몸이 잘 보인다 치잉 칭 감기는, 빗줄기의 한쪽 끝을 몰고 새 날아간다. 건물과 건물 사이 세 뼘 잿빛 하늘 가로질러 짧게 사라진다. 창유리 창유리들이, 나무 나무의 이파리 이파리 풀잎들이 모두 그쪽을 보고 있다 잘 보이는, 노리 속의 새 길게 날아가는 아래, 젖어 하염없이 웅크린

  몸, 섬 같구나 그의 유배지인 몸.

 

(「비」, 13쪽)

 

 

슬픔의 내성을 키운다는 것은 슬픔을 슬픔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의미와 같다. 슬픔을 하나의 성찰의 과정으로 보는 것이다. 그래서 분노가 슬픔으로 뒤바뀌는 변주의 과정을 시인은 내버려 둔다. 불로 변하는 슬픔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시인의 마음을 뜨겁게 태워도 크게 억울해하지 않는다. 시인은 슬픔의 힘을 믿는다. 슬픔의 힘으로 마음 한구석에 남은 고독의 앙금까지 싹 다 태워버리는 것이 고독한 현실에 원망을 품고 있는 것보다는 유익하기 때문이다.

 

 

말 걸지 마라.

 

나무의 큰 키는

하늘 높이 사무쳐 오르다가 돌아오고

땅속 깊이 뻗혀 내려가다가 돌아온다.

나갈 곳 없는

나무의 중심은 예민하겠다.

도화선 같겠다.

무수한 이파리들도 터질 듯 막

고요하다.

 

누가 만 리 밖에서 또 젓고 있느냐.

비 섞어, 서서히 바람 불고

 

나무의 팽팽한

긴 외로움 끝에 와서 덜컥,

덜컥, 걸린다.

슬픔은 물로 된 불인 것 같다.

저 나무 송두리째

저 나무 비바람 속에서 걷잡을 수 없이

타오른다.

 

나무는 폭발한다.

 

(「슬픔은 물로 된 불인 것 같다」, 14~15쪽)

 

 

인간은 누구나 슬픔을 안고 살며 그 슬픔을 통해 성숙한 자아를 이루기도 한다. 가만히 주위를 살펴보라. 크게 웃고 떠드는 사람일수록 마음속 그늘이 깊고, 희망만을 이야기하는 사람의 심장으론 다른 이들보다 더 차가운 절망의 피가 흐른다. 문인수 시인의 시에는 고독을 꼭 극복할 것이라는 희망적인 기다림이 담겨 있지 않다. 살아있는 내내 스스로 감당해야 하는 제 몫의 슬픔이다. 「까마귀」에서 시인은 허허벌판 한가운데 드러내놓고 울 작정이다. 하지만 아무리 강건한 시인이라고 왜 슬픔을 모르겠는가. 강건하기에, 슬픔의 물기는 더 축축하다.

 

 

나는 지금

동구 밖 홰나무 꼭대기에 서 있다

흘끔거리다가 마른 나뭇가지에 주둥이 비비다가

가슴패기 어깻죽지 털다가 꽈악꽈악 소리 지르다가도

잘 보인다

검다.

도무지 열어젖힐 수 없구나 온몸을 오욕칠정을

다 뒤져 보아도 나는,

숯이다.

나는 지금

동구 밖 홰나무 꼭대기에 서 있다.

잘 보인다

더는 타오르지 못하겠다.

 

허허벌판으로 가야겠다.

 

번개 우레 쾅 쾅 목 놓아

목을 놓아, 그 끝 간 데 없는 울음이 돼야겠다.

젖어, 자야겠다.

 

(「까마귀」, 23쪽)

 

 

우리는 눈물 속에서 그 사람의 참 마음을 읽을 수 있다. 거짓된 마음, 교만한 마음에서는 절대로 눈물이 나올 수 없다. 바닥 없는 슬픔은 마른 눈물로 쩍쩍 갈라질 뿐 그다지 위안이 되지 않는다. 《뿔》에는 진실한 눈물의 흔적이 보인다. 어찌 보면 이 시집은 눈물로 만들어 낸 진주같이 아름답기만 하다. 눈물에 젖은 빵을 먹어본 자들이 인생을 안다는 옛말이 있는 것처럼 눈물에 젖은 시를 읽는다면 자기 존재를 알게 되리라. 우리 모두 지금 슬픔이란 감정으로 조금씩 물들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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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쌩 2015-05-29 17: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푸루스트의 말이 생각납니다.
슬픔이 생각으로 바뀌는 순간,슬픔은 우리의 가슴에 상처를 입히는 그능력가운데 일부를 잃어버린다.

오쌩 2015-05-29 17: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이러스님 말대로 슬픔이야말로 정신적 성찰과 지혜를 선물하는거 아닐까 싶어요.
노폐인 노개인^^

cyrus 2015-05-30 20:03   좋아요 0 | URL
적당한 슬픔과 눈물은 마음을 건강하게 만드는 치유제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문인수 시인의 시를 인상깊게 읽었습니다. ^^

붉은돼지 2015-05-29 18: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첫문장을 보니 뜬금없이 떠오르는 문구가 있습니다.
˝남자가 흘리지 말아야 할것은 눈물만이 아니다.˝
화장실벽에 붙어 있었습니다. ㅋ

분위기 파악 못하고 죄송합니다 ㅡㅡ;;;

cyrus 2015-05-30 20:04   좋아요 0 | URL
사실 저 화장실 문구로 첫 문장을 쓸려고 생각했었습니다. ㅋㅋㅋ

단발머리 2015-05-29 19: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cyrus님은 정말 책을 다양하게 읽으시는군요~ 시집이라면 원래 근사하지만 옮겨주신 시들이 참 좋네요^^

cyrus 2015-05-30 20:05   좋아요 0 | URL
시집에 제가 소개한 것보다 더 좋은 시들이 많습니다. ^^
 
세상 모든 길은 집으로 간다 문학의전당 시인선 28
문인수 지음 / 문학의전당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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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그리움은 사랑하는 사람을 보고 싶게 만드는 마음의 중력이다. 잠시나마 떨어져 있을 땐 기다림이 있고, 그것도 참을 수 없을 때는 어디든지 찾아갈 수 있다. 목소리만이라도 듣고 싶을 땐 전화를 걸어 목소리를 전하면 되고, 속삭이는 감정을 편지에 담아 전할 수도 있다. 그러나 보고 싶어도 기다려도 볼 수 없는, 느낄 수도 없는 사람이 없다면 그리움이란 더욱 애절하다. 특히 어머니는 영원한 그리움의 대상이다. 문인수 시인의 제2시집 《세상 모든 길은 집으로 간다》는 오래도록 지워지지 않는 그리움의 대상들을 한자리에 모아 엮은 소중한 창고와 같다. 그것은 진솔하면서도 견고한 서정으로 드러난다.

 

 

먼 수풀은 따뜻하고 부드러워요.

새들은 왜 건너건너 날아가고 있나요.

 

강 건너로 가서 살고 싶어요 어머니.

 

얘야, 내 귓속에 들여다 보아라

 

찬바람 드나드는 갈대숲 말이냐 추운 저

새소리 말이냐 얘야.

 

(「겨울 강변에서」, 13쪽)

 

 

고단한 현실에 저항하는 힘은 ‘어머니’로부터 나온다. 어머니는 자식을 잉태하고 출산하고 젖 먹여 인간 되게 키워서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불멸의 힘을 가지고 있다. 여러 편의 시에서 어머니는 좌절과 절망 속에 빠진 시인의 자아를 끌어올려 주고 있다. 그녀의 구원으로 인해 시인의 삶은 살아볼 만하다. 삶의 아픔을 치유할 방법을 모성에서 찾는다.

 

 

  오랜만에 고향엘 다녀왔다.

 

  대구에 가면 이런 거 흔하고 흔합니다 헐하고 헐합니다 하고 말렸으나 어머니는, 나도 많이 늙었다 오래는 더 못 살겠다 하시면서, 무우말랭이며 머위나물 매운 풋고추 같은 걸 자꾸 챙겨 주셨다. 이만큼 전송 나오시다가 또 쫓아들어가 다른 거 한 보퉁이 들고 나오셨다.

  무릎 앞에다가 이것들을 끌려놓고 깊이 냄새를 맡는다 어느덧, 여름밤 천지에 가득하고 그윽한 먼 별 빛,

 

  긴 바람의 젖을 물고 나는...

 

 

(「젖」, 20쪽)

 

 

이 세상 모든 어머니는 아무리 퍼내도 바닥이 드러나지 않는 정의 샘물을 가지고 산다. 자식을 위하는 일이라면 목숨도 아깝지 않은 열정에 타오르기도 한다. 그런 탓에 혼자 힘으로는 일어설 힘을 잃은 의족이 필요한 자식도 생긴다. 그들은 자신을 지탱해줄 받침목을 잃고서야 넘쳐나는 사랑에 눈을 뜨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는 가슴 속에 외로움의 잡초만 무수히 키우고 사는 어머니를 보면서도 따뜻한 정감의 눈길 한 번 제대로 맞추지 못하는 일을 바쁜 탓으로 돌려 핑계 대고 싶어 한다.

 

고향은 떠나왔기에 그리운 향수의 공간이요, 지금의 나를 만들었기에 풍요로운 서사의 공간이다. 동시에 언젠가는 죽어서 되돌아가야 할 영혼의 귀착지이기도 하다. 그래서 고향은 ‘존재의 집’이다. 시인의 가슴 한구석에는 언제나 마음이 되돌아가 안기는 고향이 있고, 시를 통해 그리움으로 글썽이는 희미한 기억들에 대해 노래하고 있다.

 

 

가을이 되었네.

담쟁이 이파리들이 뚝 뚝 뚝 듣네.

 

고향에게 미안하네.

 

그동안

사방 헤매었던 길들이 그루터기 쪽으로

내게로 다 흘러들면서

나도 이제 지하수처럼 한 줄기 깊이 흐르네

 

밤 어두울수록 이리 눈물 닿아 좋은 곳.

 

 

(「고향에게 미안하네」, 45쪽)

 

 

 

인류는 오랫동안 두 가지 상반된 꿈을 마음속에 품어 왔다. ‘고향’으로 회귀하고자 하는 꿈과 ‘미지의 세계’를 향해 훌쩍 떠나고자 하는 꿈이 있다. 전자가 없다면 방랑과 방황에 지쳐 길을 잃게 될 것이며, 후자가 없다면 현실에 안주한 채 무기력한 삶을 지속하게 될지도 모른다. 고향과 미지의 세계를 향한 갈망은 우리 삶에 팽팽한 긴장력을 부여한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이 긴장을 잃어버렸다. 삶이 지속하는 한 사유의 항해도 지속하여야 한다.

 

  길이 막히거든 노숙을 해봐라.

 

  달빛 아래

  나무의 낯선낯선 이파리들이 눈앞을 저어 가면서 가장 먼 별들이 귓전으로 가슴으로 스며 내리면서 풀벌레 소리들 번져 에워싸면서

  그대 겨드랑이에다가 하염없이 짜넣는

  그 달빛이 무엇이 되는지

 

  팔 벌리고 누우면 허수아비 같고

  돌아누우면 좀 춥고

  몸 웅크리면 섬같이 되어서

 

  날고 싶을 것이다.

 

  달빛 아래

  그 어디로 길이 열리는지

  먼 타관으로 가서 노숙을 해봐라.

 

(「세상 모든 길은 집으로 간다」, 81쪽)

 

 

사유의 항해 끝에는 늘 집, 고향이 있고, 어머니와 아버지에게로 돌아간다. 그래서 노숙은 종국에는 회귀의 과정으로 귀결된다. 깊고 따뜻한 대상에의 시선과 쉽고 편한 언어로 맑고 순하게 써내려간 시들은 편편이 흘러내리며 가슴을 따뜻하게 적셔주고 정화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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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5-05-17 21: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즈넉한 일요일 저녁에 가만히 읽을수록 참 좋군요. 시도 님의 리뷰도. 담아갑니다. ^^

cyrus 2015-05-18 22:33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
 
너에게 가려고 강을 만들었다 창비시선 239
안도현 지음 / 창비 / 200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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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바보다. 세월이 지난 뒤에서야 평범하고 익숙했던 것들에 대해 소중함을 느낀다. 그것은 추억과 공감의 이름으로 우리 앞에 새롭게 태어난다. 흔히 그리움이란 두 손 두 발로 만져왔던 자신만의 추억들을 향하고 있기 마련이다. ‘토토가’가 우리에게 준 감동의 열기가 지금까지도 우리 마음을 뜨겁게 해주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무대에서 들려준 90년대 가수들의 목소리는 잊고 있었던 시절에 대한 환영들을 생생하게 되살아나게 해주었다.

 

시를 잘 읽지 않거나 시를 읽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바보다. 이 짧은 시에서 우리가 살면서 미처 느끼지 못했던 것들의 새로운 이면을 발견할 수 있다. 그 날 읽은 시 한 편이 시간이 흐른 뒤에 다시 읽으면 느낌이 다르다. 학창시절 지루하게만 느껴졌던 국어 시간에 배운 시가 어느 날 갑자기 내 마음을 뒤흔드는 감동의 문장으로 새롭게 나타나기도 한다.

 

『안도현의 발견』(한겨레출판, 2014)의 부제가 ‘작고 나직한 기억되지 못하는 것들의 아름다움에 대하여’이다. 지나치게 길면서도 관념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시를 읽어야 하는 이유로 설명하는 데 충분하다. 시를 읽음으로써 단순한 대상을 새로 보게 된다. 시인은 단어를 조합하여 추상적인 아름다움이 드러나는 간결한 직물을 짜낸다.

 

11년 전에 나온, 이제는 오래된 것이 되어버린 안도현 시인의 여덟 번째 시집 『너에게 가려고 강을 만들었다』 는 사람과 사물 혹은 자연과의 관계 속에 있는 작고 나직한 기억되지 못하는 것들을 관찰하고, 그 아름다움을 표현한다. 이 시에서 나오는 대상은 대체로 우리가 소박하게 여기는 것들이다. 시인은 꽃, 나무, 새, 물고기 등을 세밀하게 관찰하고 묘사한다. 눈에 보이지 않던 자연의 섭리나 기억되지 못하는 하찮은 사물에 세상사를 비유하여 직접 눈에 보이도록 만든다. 즉, 시인은 소박한 아름다움을 드러내기 위해 우리가 잘 아는 삶의 방식, 즉 보조관념을 활용한 것이다. 그래서 그의 시를 읽으면 ‘루빈의 잔’이 생각난다. 눈과 마음이 어느 하나에만 집중하면 그것만 보이고 그 나머지는 보이지 않게 된다. 우리는 자기의 가치와 욕망에 따라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들으려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그런 독자의 고정된 관습을 시인은 타파한다. 삶을 바라보는 눈길의 시야를 넓힌다.

 

이 시집은 언뜻 자연 속에서 발견하는 삶의 교훈을 강조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시를 좀 읽어본 사람이라면 여기서 시대가 기억하지 못하는 또 다른 인물을 우연히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그 인물이 바로 시인 백석이다. 안도현 시인은 작년에 『백석 평전』(다산북스, 2014)를 펴낼 정도로 이미 스무 살 무렵부터 백석을 흠모해왔다. 시집에 수록된 몇 편의 시에서 평소 백석을 사랑했던 시인의 속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내 손이 닿지 않는 곳에서 떨어져 앉아 우는 여치

 

여치소리를 듣는다는 것은
여치소리가 내 귀에 와닿기까지의 거리를 생각하는 것
그 사이에 꽉 찬 고요 속에다 실금을 그어놓고
끊어지지 않도록 붙잡고 있는 것
밤낮으로 누가 건너오고 건너가는가 지켜보는 것
외롭다든지 사랑한다든지 입밖에 꺼내지 않고
나는 여치한테 귀를 맡겨두고
여치는 나한테 귀를 맡겨두는 것

 

여치소리를 듣는다는 것은
오도카니 무릎을 모으고 앉아
여치의 젖은 무릎을 생각한다는 것

 

(「여치소리를 듣는다는 것」, 16쪽)

 


이 시집이 안도현 시인이 펴낸 이전 시집과 다르게 자아와 외부 대상(자연)과의 보이지 않는 관계를 무척 농밀하게 표현하고 있다. 이런 시의 전개가 가능한 이유를 백석의 영향으로 볼 수 있다.

 


명태 창란젓에 고추무거리에 막칼질한 무이를 비벼 익힌 것을
이 투박한 북관을 한없이 끼밀고 있노라면
쓸쓸하니 무릎은 꿇어진다

 

(백석 「북관」 중에서, 『백석문학전집 1』 104쪽)

 


시에서 북쪽 지역 방언과 고어를 사용했던 백석의 표현을 빌리자면, 안도현 시인은 여치 소리를 들으려고 무릎을 모은 뒤에 앉아 ‘끼밀고’ 있다. 여기서 ‘끼밀다’는 어떤 물건을 자세히 보고 느끼기 위해 얼굴 가까이 들이미는 자세를 뜻한다. 백석은 이미 자신의 시 ‘북관(北關)’에서 함경도 음식을 먹으면서 이 지역의 투박함을 자신 삶의 일부로 껴안기 위해 무릎을 꿇는다. 이러한 끼밀기를 통해 시인은 여진에서 나는 사람 사는 냄새를 맡고, 화려했던 신라의 향수를 맛보는 데 성공한다.


 

 산기슭에 버려진 외딴집 한 채, 어느 날 가보니 저 혼자 폭삭 주저앉아 있었다.
 어찌하여 그렇게 형편없이 납작해졌느냐고 나는
 물어보았다 그러나 귀가 뭉개진 집은
 듣지 못했는지 듣고도 못 들은 척하는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조금씩 아주 조금씩 허물어져 내린 것이 아니라 한꺼번에 머리에 이고 있던 하늘을 내려놓은 이유가 궁금했다.
 
 이 집에 살던 주인이 다시 돌아오나 안 오나
 처마 끝으로 고독한 목을 빼고 기다리던 날들이 있었다.
 
 집 없이 떠도는 옛 주인이 돌아온다 해도 두 눈으로 바라볼 게 없도록
 도무지 그리울 것도 사무칠 것도 없도록
 단 한 번에 기둥은 무릎을 접고 서까래는 상의도 없이 고개를 꺾고 봉창은 눈을 질끈 감았을 것이다

 

(「주저앉은 집」, 68쪽)

 

 

산턱 원두막은 뷔었나 불빛이 외롭다
헌겊심지에 아즈까리 기름의 쪼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중략)

 

헐리다 남은 성문이
한울빛같이 훤하다
날이 밝으면 또 메기수염의 늙은이가 청배를 팔러 올 것이다.

 

(백석 「정주성」 중에서, 『백석문학전집 1』 84쪽)

 


「주저앉은 집」은 백석의 첫 작품 「정주성」의 분위기와 상당히 유사하다. 두 작품 다 더 이상 인적을 찾아볼 수 없는 폐허의 건물을 쓸쓸하게 묘사한다. 백석의 시선은 시끌벅적한 경성을 벗어나 고향의 옛 모습이 남아있는 북방으로 향한다. 그렇지만 그곳 또한 세월의 변화를 비껴갈 수 없었다. 백석이 가보고 싶은 북방은 언제나 사람 냄새가 나는 고향이지만, 이제는 정착할 수 없는 추억의 공간으로 변했다. 시인이 본 ‘헐리다 남은 성문’은 근대화 바람에 풍화되어 무너져버린 전통사회이다. 「주저앉은 집」에서 무너져버린 폐가 상태에 감정을 이입하여 정착하지 못한 채 떠도는 주인을 기다린다. 폐가가 기다리는 주인은 혹시 한 곳에 안주하지 못해 북방에 대한 향수병에 걸린 백석이 아닐까. 그가 아니더라도 북방의 고향 전체를 마음속에 간직했던 백석처럼 고향을 그리워하는 회귀 본능을 지닌 도시인이 돌아오기를 폐가는 말없이 기다린다. 그가 돌아와야 어렴풋이 남아있는 고향의 추억을 떠올릴 수 있다.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듯 보이는
 저 갈대나무가 엄동설한에도 저렇게 엄하기만 하고 가진 것 없는 아버지처럼 서 있는 이유도
 그늘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제 빈한한 집안의 지붕 끝처럼 서 있는 저
 나무를
 아버지,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그 드물다고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 중에서, 92쪽)

 

 

메마른 듯, 얼핏 죽은 듯 보이지만 잠시 움직임을 멈추고 나무로 숨결을 보낸다면 생명의 박동을 느낄 수 있다. 백석의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에 나오는 갈매나무는 삶의 고통을 뛰어넘으려는 시인의 의지가 결연하게 느껴지는 시인의 나무이다. 한편, 가족의 안부도 모른 채 저 북방 춥고 쓸쓸한 여관방에서 외로움에 떨었을 가장을 다시 일으켜 세워 줄 유일한 희망의 버팀목이기도 하다. 외로운 가장의 차디찬 가슴 한켠에 자란 갈매나무에서 안도현 시인은 가족을 위해 희생하는 아버지를 떠올린다. 그리고 아버지를 불러본다. 감정을 잘 드러나지 않는 무뚝뚝한 아버지처럼 갈매나무는 조용히 서 있을 뿐이다. 나무를 바라보면서 기운을 차리고 일어나 세상 속으로 걸어갈 마음을 다잡게 한다.

 

안도현 시인은 ‘백석’이라는 이름만 들어도 마음이 시큰거릴 것이다. 짝사랑하는 사람의 이름만 들어도 마음이 설레고 심장이 쿵쾅쿵쾅 요동을 치는 순수한 사춘기 청년의 마음처럼. 이제는 남아있는 글만으로 만날 수 있는 시인에게 다가서고 싶고, 자꾸 잊혀가는 시간이 무서워서 그 사람의 일생을 복원했다. 참으로 대단한 문학적 사랑이다. 믿거나 말거나 짝사랑하는 사람이 가장 많이 하는 행동 1위가 노랫말에 사랑하는 상대 이름을 넣어 부르는 것이라고 한다. 안도현 시인은 시를 쓰면서 ‘백석’이라는 두 글자의 이름을 넣는 대신, ‘백석의 시’를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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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사랑하는현맘 2015-01-09 23: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에게 가려고 강을 만들었다˝도 ˝시를 만들었다˝도 너무 멋진 제목인데요!

cyrus 2015-01-10 22:10   좋아요 0 | URL
좋게 봐주셔서 고맙습니다. 시를 만들 줄 아는 시인들이 정말 부럽습니다.

오후즈음 2015-01-09 23: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하! 이 감각적인 제목이라니

수이 2015-01-10 00: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너`가 있어야 합니다. 얼른. :)

cyrus 2015-01-10 22:11   좋아요 0 | URL
제대로 한 방 먹었어요. 맞아요. `너`가 있어야 하죠.. ㅠㅠ

해피북 2015-01-10 13: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키로스님 덕분에 안도현 저자 팬이 되어버릴것 같네요 ㅎㅎ 지난번에 안도현의 발견이란 책을 서점가에서 들춰봤는데 짧은 산문이 어찌나 재미나고 웃기던지, 마치 눈앞에 상황이 보여지고 상황상황에 위트도 있고 깨달음도 있고 좋은 책이더군요 ㅎㅎ 전엔 다른 이웃님의 백석평전에 대한 리뷰글을 보며 안도현 저자의 마음도 느껴지고 그 책도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번엔 시집까지 소개해주셔서 마음이 바빠지네요 ㅋ

cyrus 2015-01-10 22:12   좋아요 0 | URL
조만간 `백석 평전`도 읽어볼 생각입니다. 요즘 안도현 시인 덕분에 다시 한 번 백석 시집을 읽게 되었어요. 정말 백석의 시는 다시 읽어도 새롭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