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 속의 검은 잎 문학과지성 시인선 80
기형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8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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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정 지나 앞마당에 은빛 금속처럼 서리가 깔릴 때까지 어머니는 마른 손으로 종잇장 같은 내 배를 자꾸만 쓸어내렸다. (「바람의 집 - 겨울 판화 1」중에서, 95쪽)

 

 

겨울바람의 냉기가 여전한 춘삼월이 시작되는 이 무렵, 시인 기형도와 함께 따뜻한 어머니 손길을 떠올린다. ‘겨울 판화’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그의 시 ‘바람의 집’에 귀 기울이며 황량한 겨울바람 소리를 함께 듣는 것이다.

 

‘어머니 무서워요 저 울음소리, 어머니조차 무서워요.’ 어머니는 보채는 아이를 달래며 말한다. ‘얘야, 그것은 네 속에서 울리는 소리란다. 네가 크면 너는 이 겨울을 그리워하기 위해 더 큰 소리로 울어야한다.’

 

어머니의 예언은 그대로 적중했다. 시인은 봄날에 와서 봄날에 갔다. 1960년 봄날이 오는 3월에 세상에 와서 1989년 아직 바람이 차가운 3월에 세상을 떠났다. 3월 7일 만 서른 살 생일을 엿새 앞둔 날이었고, 서울 종로의 심야극장이었다. 새벽의 극장, 그의 가방엔 원고뭉치가 들어 있었다.가방 안에는 시작 노트와 시 원고가 들어 있었다. 안고 있던 그 시들이 바로 어머니가 말했던 그 울음소리였던 것이다.

 

 

열무 삼십 단을 이고

시장에 간 우리 엄마

안 오시네, 해는 시든 지 오래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엄마 안 오시네, 배추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

안 들리네, 어둡고 무서워

금간 창 틈으로 고요히 빗소리

빈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

 

아주 먼 옛날

지금도 내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그 시절, 내 유년의 윗목

 

 

(「엄마 걱정」, 134쪽)

 

 

기형도는 참 여린 사람인 것 같다. 보통 어린 나이엔 어머니가 겪을 고통보다는 내 자신의 외로움과 불편이 더 크게 다가오는 법인데. 그의 시에는 그의 기다림이 한 칸, 어머니의 지치고 힘든 삶이 한 칸, 이렇게 하나씩 켜켜이 쌓여가고 있다.

 

그렇게 고통스럽고 슬프던 날도 세월이 한참 흘러 돌아보면 그리운가 보다. 시장에 가서 늦도록 돌아오지 않는 어머니를 기다리는 배고프고 외롭기만 하던 어린 시절을 돌아보는 시선이 이렇게 다정해도 되는가. 눈물겹다. 아버지도 없고 형제들도 돈 벌러 다른 데로 가버린 아무도 없는 빈집에서 소년은 오직 어머니를 기다리고 있다. 혼자 있어도 아랫목을 비워두는 마음을 누구라도 훔쳐본다면 다독여주고 싶으리라. 시장에서 돌아온 어머니가 아이를 어떻게 보듬었을지 보지 않아도 알 듯하다. 아이가 기다린 것은 밥이 아니라 품이었으리라.

 

그래서 그의 시가 더 아프게 다가오는가 보다.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연민이 자신의 처지와 교차되어 더욱 증폭된다. 그는 상대의 아픔을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그는 그것을 외면할 만큼 모질지 못한 사람인 것 같다. 그러기에 그는 시인이다. 이렇게 하나하나를 다 느끼고 아파하니, 세상을 굳세게 살아가기란 정말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그의 삶이 빨리 끝나버릴 수밖에 없었는지도 모른다. 생각이 여기까지 오자 그의 죽음을 이제야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다. 그래도 참 아쉽다. 그의 부재가.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빈 집」, 81쪽)

 

 

 

마치 자신의 죽음을 예고라도 하는 듯한 문구들이 애절하다. 그러면서도 아무런 구애 없이 자신을 잠가버리는 완숙함. 읽을수록 리드미컬한 운율에 끌려 묘한 세계로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다. 이런 기분이 있기에 생각날 때마다 기형도를 읽는다.

 

기형도의 ‘빈집’이 그것이다. 이 시는 거창하게 무엇인가를 설명하려 하지 않는다. 그냥 있는 그대로, 우리 삶에서 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준다.

 

젊은 날의 사랑은 순수하다. 그러므로 더욱 열정적이다. 길지 않았던 사랑에의 기억은 그 열정으로 인하여 더욱 가슴이 아프다. 그러므로 시인은 이러한 사랑을 잃고, 사랑을 하던, 그 짧았던 밤들에게, 창 밖을 떠돌던 겨울안개들에게, 아무 것도 모르며 타오르던 촛불에게, 눈물에게, 열망에게 아픈 작별을 고한다.

 

시인은 사랑을 잃었다고 전제한다. 그리고 그 상태에서 자신이 이 시를 쓴다고 한다. 이어서 나오는 시구들이 모두 자신의 때(더러움 혹은 먼지)를 의미한다. ‘짧은 밤’,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 ‘내것이 아닌 열망’ 등이 모두 그것이다. 살면서 고통스러워했던 대상물이다.

 

시인은 이 대상물을 그가 있던 빈집의 좁은 방에 가둬놓는다. 그리고 자신은 그 방을 나온다. 시인이 그 대상물과 함께 방에서 나와 ‘장님처럼’ 어렵사리 문을 잠그자 그 방은 빈집이 된다.

 

우리가 함께 울고 웃던 삶을 버린다는 것은 사랑을 잃은 것처럼 견디기 힘든 일이다. 하지만 시인은 과감히 그 대상을 버리고 나와 문을 잠근다. 그러면서 더러움과 고통을 털어낸다. 물론 이 시는 마음속에서 이뤄지는 일을 표현한 것이다. 사랑은, 젊은 시절, 그 사랑에의 열망은 이와 같이 우리에게 혹독한 것이다. 그만큼 우리에게 절실한 것이다. 그만큼 우리에게 진실한 것이다.

 

기형도는 실제의 삶에서는 매우 유쾌하고 사람들과의 친화력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도 왜 그는 이런 고독하고 절망적인 시들을 남겼을까.

 

그가 세상을 떴지만 사람들이 더욱 그를 잊지 못하는 것은 그의 시가 누구나 읽는 이의 가슴을 저미게 하고 그를 생각 할 때마다 뒤흔드는 허무와 절망에서 솟음 치는 아름다움 때문일 것이다.

 

절망에서도 아름다움이 솟다니. 기형도는 왜 절망을 선택했을까. 누군가가 말했다. 인생을 살면서 결코 벗아 날 수 없는 두 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죽음과 선택이라고. 죽음은 알겠는데 선택은 무엇일까. 쉽게 말하면 그것은 자신의 행동을 선택하는 일이다. 예를 들면 겸손과 오만, 용서와 원망, 정직과 속임수 등 우리에게는 선택해야 하는 일들이 수없이 많다. 그렇다면 선택하지 않으면 그만이 아닌가. 아니다. 키에르케고르는 선택을 하지 않는 것 그 자체가 선택이라고 했고 선택을 회피하는 것도 선택이라고 했다. 오늘도 우리들은 선택하며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

 

 

때마침 진눈깨비 흩날린다

코트 주머니 속에는 딱딱한 손이 들어 있다

저 눈발은 내가 모르는 거리를 저벅거리며

여태껏 내가 한번도 본 적이 없는

사내들과 건물들 사이를 헤맬 것이다

눈길 위로 사각의 서류 봉투가 떨어진다, 허리를 나는 굽히다 말고

생각한다, 대학을 졸업하면서 참 많은 각오를 했었다

내린다 진눈깨비, 놀라 넋도 없다, 변덕이 심한 다리여

이런 귀가길은 어떤 소설에선가 읽은 적이 있다

구두 밑창으로 여러 번 불러낸 추억들이 밟히고

어두운 골목길엔 불켜진 빈 트럭이 정거해 있다

취한 사내들이 쓰러진다, 생각난다 진눈깨비 뿌리던 날

하루종일 버스를 탔던 어린 시절이 있었다

낡고 흰 담벼락 근처에 모여 사람들이 눈을 턴다

진눈깨비 쏟아진다, 갑자기 눈물이 흐른다, 나는 불행하다

이런 것은 아니었다, 나는 일생 몫의 경험을 다했다, 진눈깨비

 

 

(「진눈깨비」 39쪽)

 

 

시에서 그가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던 그 날은 오늘보다 더 추운 날이었던 것 같다. 그는 도시를 걸으며 참 외로워했다. 이 뼈아프고 아름다운 시를 읽으며 가슴이 뭉클해진다. 대학을 졸업하면서 나도 참 많은 각오를 하지 않았던가. 빈 트럭이 서있는 어두운 골목의 일상을 지나오면서 많이 지치고 많이 때묻어왔다.

 

도시에서 한 개인이란 늘 이렇게 소외되고 무능력한 존재다. 이것이 바로 도시 삶의 법칙이다. 모여 있으되 따로 있는 것. 그리고 개인이 할 수 있는 것이란 초라할 정도로 미미한 것. 그는 이런 삶을 원했던 건 아니었던 것 같다. 그는 돌아보게 되는 사람들의 아픔이 다 느껴지고 보였다. 그러나 이걸 표현할 수가 없었다. 그는 이것이 사람 간에 진정한 교감이 아니라고 느꼈다. 그의 시를 읽다 보니, 우리는 무엇을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는지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 우리가 바라는 삶은 과연 무엇인가. 그가, 그의 시가 우리들의 삶에 근본적인 물음을 던지고 있다. 역시 기형도의 시는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깊이가 있다. 그래서 시인의 문장이 끌린다.

 

 

고맙습니다.

겨울은 언제나 저희들을

겸손하게 만들어주십니다.

 

(「램프와 빵 - 겨울 판화 6」, 119쪽)

 

 

기형도의 시는 언제나 겨울이다. 봄도 여름도 가을도 겨울이다. 언제나 겨울이다. 아직도 추운 늦은 겨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시는 현실을 도피한 자가 만나는 언어가 아니라 우리가 끝끝내 놓치고 싶지 않았던 감성의 보루이다. 그의 시에서 보이는 유년시절의 가난과, 사랑을 얻지 못한 절망과, 시대에 대한 허무와, 죽음에 대한 예감이, 곧 우리 자신의 아픔이다. 그래서 그가 남긴 문장을 마주치면 당연히 겸손해질 수밖에 없다. 그의 시는 언제나 우리들을 겸손하게 만들어준다. 특히 시인의 생이 멈춰진 3월 7일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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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갔다, 들어온다. 잠잔다. 일어난다.

 변보고. 이빨 닦고. 세수한다. 오늘도 또. 나가 본다.

 오늘도 나는 제 5공화국에서 가장 낯선 사람으로.

 걷는다. 나는 거리의 모든 것을.

 읽는다. 안전 제일.

 우리 자본. 우리 기술. 우리 지하철. 한신공영 제4공구간. 국제그룹사옥 신축 공사장. 부산뉴욕 제과점.

  지하 주간 다방 야간 맥주홀. 1층 삼성전자대리점. 2층 영어 일어 회화 학원. 3층 이진우 피부비뇨기과의원. 4층 대한 예수교장로회 선민중앙교회. 5층 에어로빅 댄스 및 헬스 클럽. 옥상 조미료 광고탑.

  그리고 전봇대에 붙은 임신. 치질. 성병 특효약까지.

  틈이 안 보이는데. 들어가면.

  또 틈이 있는 벽보판까지.

 

 

 

  (중략)

 

 

 

  타워 크레인이. 철근 하나를 공중 100M 높이로 끌어올리고 있다.

  아아아아아아 나는 무모성을 본다. 근면과 광기. 성실과 맹목. 나는 보고 또 보고.

  굴착기는 맹렬하게 아스팔트를 뚫고. 자갈을 뚫고. 암반을 뚫고.

  정신없이 퇴적층을 퍼올리는 포크레인이 그러나.

  의외로 곱고 새하얀 그 순결한 흙을 퍼올리는 포크레인이

  지하 20M에 있다는 것은.

  열정도 신념도 아닌. 연민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으로서 나는.

  하지만 세상을 연민으로 바라보는 것을 자제해야 한다는 것을.

  아는 사람으로서 나는. 그러나

  아아아아아아아 가엾어라. TNT 사제 폭탄을 들고

  은행엘 쳐들어간 청년은 자폭했고(중앙일보 9월 2일자).

  술집 호스티스는 정부에게 알몸으로 목졸려 죽었고(한국일보 6월 15일자).

  방범대원은 한밤에 강도로 돌변하고(경향신문 12월 7일자).

  아들은 술 취한 아버지를 망치로 내리쳐 죽이고(서울신문 4월 11일자).

  노름판을 덮친 형사가 판돈 몽땅 꼬불치고(MBC라디오 12시 뉴스 7월 26일자).

  교사가 여학생을 추행하고(조선일보 11월 30일자).

  신흥사 주지들 칼질 뭉둥이질(KBS제2라디오 8월 3일자).

  디스코홀서 청소년들 집단적으로 불타 죽고(연합통신 4월 14일자).

  前 중앙정보부차장이 억대 사기를 치고(동아일보 3월 6일자).

  아 세월은 잘 간다.

  눈 먼 세월. 잘 간다.

  나는 손 한번 못 댄 세월. 잘 간다.

  아직 오지 않은 사고와 사건과 사태와 우발과 자발과 불발의 세월. 속으로.

  잘 간다.

 

 

  - 황지우 「활로를 찾아서」중에서 -

 

 

 

꽃피는 춘삼월이라고 했다. 만물이 희망의 싹을 활짝 틔우는 계절이다. 봄꽃이 평년보다 사흘 정도 빨리 필 것이라는 예보가 나올 즈음 안타까운 사건사고 소식이 전해져 마음을 아리게 한다. 리조트 붕괴로 이제 막 피는 청춘들의 목숨을 앗아간 안타까운 소식의 여운이 지나지 않았건만 생활고에 시달리던 세 모녀의 동반 자살이 또 한 번 우리 마음을 아리게 한다.

 

무엇이 그들의 가슴을 짓눌렀기에 그리 됐을까. 이들은 서울 반지하 셋방에 살면서 고달픈 삶의 무게를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저세상으로 갔다. 식당일을 하는 60대 어머니와 병마에 시달리던 30대 큰딸, 그리고 신용불량자로 낙인찍힌 둘째 딸의 기구한 삶은 끝내 출구를 찾지 못한 채 스러지고 말았다. 성실하게 살아가던 그들이 무너지기 시작한 건 가장 노릇을 하던 어머니가 넘어져 팔을 다친 후 더 이상 돈을 벌지 못하면서부터다. 그동안 세 모녀는 방세와 공과금이 밀린 적은 없었다고 한다. 마지막까지 다른 사람들에게 신세를 지고 싶지 않은 마음에서 방세와 공과금을 마지막으로 남기고 세상을 떠난 것이다.

 

그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 전까지 세 모녀의 삶은 얼마나 고되고 힘들었을까? 그 시간들이 얼마나 암담하고 견디기 힘들었으면 죽음을 선택했을까? 무엇보다도 ‘같이 죽자’하고 결정을 내리고 나서는, 죽음이 찾아오기 전까지 세 모녀가 얼마나 오랜 시간을 끌어안고 눈물을 흘렸을까? 아마도 엄마는 딸들을 생각하고, 딸들은 노모를 생각하며, 그렇게 소리 없는 울음을 토해냈을 것이다.

 

반면 세 모녀와 반대로 더러운 마지막도 적지 않다. 선임들의 가혹행위에 비관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병사의 죽음을 은폐하고 동료 병사의 죽음을 추모하기 위해 모금한 조의금까지 빼돌린 파렴치한 간부들의 행태가 뒤늦게 알려졌다. 온갖 해악을 저지르고도 일신의 안위만 영위하고자 타인의 죽음을 왜곡하고 은폐하는 군상이 주변에 어디 하나둘인가.

 

경주 리조트 강당 붕괴, 대학생 9명, 사망 70여명 부상 (한국일보 2월 18일자)

“공과금 밀려 죄송해요”, 모녀 셋 안타까운 선택 (중앙일보 2월 28일자)

가혹행위로 자살 육군병사 조의금까지 가로챈 여단장 (동아일보 2월 28일자)

 

눈 뜬 장님처럼 우리는 눈 먼 세월을 보냈다. 약자를 외면하고 따돌렸던 우리가 계속 눈을 감는다면 손 한 번 못 댄 세월은 그렇게 간다. 아직 오지 않은 사고와 사건과 사태와 우발과 자발과 불발의 세월이 이어질 것이다. 열정과 희망의 활로를 찾지 못한 채 세월은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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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인데르트 호베마 「미델하르니스의 길」 1689년

 

 

 

길을 그리기 위해 나무를 그린 것인지

나무를 그리기 위해 길을 그린 것인지 알 수 없지만

 

또는 길에 드리운 나무 그림자를 그리기 위해

길을 그린 것인지 알 수 없지만

 

길과 나무는 서로에게 벽과 바닥이 되어왔네

 

길에 던져진 초록 그림자,

길은 잎사귀처럼 촘촘한 무늬를 갖게 되고

나무는 제 짐을 내려놓은 듯 무심하게 서 있네

 

그 평화를 누가 베어낼 수 있을까

 

그러나 시간의 도끼는

때로 나무를 길 위에 쓰러뜨리나니

파르르 떨리던 잎사귀와 그림자의 비명을

여기 다 적을 수는 없겠네

 

그가 그린 어떤 길은 벌목의 상처를 지니고 있어

내 발길을 오래 머물게 하네

굽이치며 사라지는 길을 끝까지 따라가게 하네

 

길을 그리기 위해서는

마음의 지평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는 것

누군가 까마득히 멀어지는 풍경,

그 쓸쓸한 소실점을 끝까지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

 

나는 한 걸음씩 걸어서 거기 도착하려 하네

 

- 나희덕 「길을 그리기 위해서는」 -

 

 

 

서로 마주 보고 나란히 선 가로수가 만든 선을 연장하면 한 점에서 만나게 된다. 이 점이 소실점이다. 그러나 실제로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기차 레일을 멀리서 보면 평행선이 만날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키는 것처럼.

 

인생은 길과 같다. 길이 마치 소실점 같은 끝이 있어서 어느 지점에서 목적지를 찾을 수 있을 거로 생각한다. 길을 떠나는 누구나가 길 끝에서 간절히 바라는 무언가를 만나게 되기를 기원하는 것처럼.

 

인생의 길에서 중요한 것은 소실점에 급히 도달하고 싶은 열망이 아니다. 길은 목적지에 이르는 통로가 아니다. 소실점을 끝까지 바라보면서 한 걸음씩 자신을 찾아 걷는 여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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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옷은 입을 수가 없네 - 이해인 기도시집
이해인 지음 / 열림원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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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우리가 늘 기도의 명수, 사랑의 명수이길 바란다. 아무에게나 함부로 털어 놓기 힘든 어둡고 아프고 슬픈 이야기도 우리에겐 마음 놓고 쏟아놓으며 거듭거듭 기도를 부탁할 때가 많다. 많은 경우에 수녀는 늘 심부름 잘하는 세상의 천사이길 바라는 것 같다.”

 

시인이 이 책의 서문에서 고백하는 이야기이다. 수녀로 살아가면서 느끼는 여러 가지 마음을 솔직하게 표현한 대목이 아닌가 싶다. 흔히 ‘수녀’하면 떠오르는 고결하고 성스러운 이미지가 짐스럽고 무거울 때도 있겠지만, 그들이 바치는 신에 대한 사랑만큼 인간에 대한 사랑도 넘쳐나길 바라는 것이 바로 그들을 바라보는 우리들의 마음이다.

 

이 시집은 수도자로 자신을 봉사와 헌신 속에 던진 시인이 세상에서 느끼는 많은 감정과 생각들을 아름다운 시어들로 표현하였다. 이 시집에는 인간이면 누구나 겪는 내적 고민과 번뇌, 그리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애쓰는 수도자적 태도 등이 잘 표현되어 있다. 세상에 대한 여러 가지 단상들도 아름다운 시어 속에 담겨 드러난다.

 

 

풀잎처럼 내 안에 흔들리는

조그만 생각들을 쓰다듬으며

욕심과 마음을 모르는

작은 사람들이 많이 사는

행복한 나라를 꿈꾸어본다

 

작은 것을 아끼고 그리워하는 마음을

보이지 않게 심어주신

나의 하나님을 생각한다

내게 처음으로 작은 미소를 건네며

작은 것의 소중함을 일깨워준

가장 겸허한 친구의 목소리를

다시 듣고 싶다

 

- 「작은 노래」중에서 -

 

 

이처럼 자신을 낮추어 ‘풀잎처럼 자신 안에서 흔들리는 조그만 생각들’을 쓰다듬는 것은 단지 수녀에게만 부여되는 짐이 아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인간이 지녀야 할 바람직한 삶의 태도가 바로 겸손이고, 욕심과 미움을 버리는 것이다. 이 시집이 가톨릭 신자만을 위한 기도 시집이 아닌 대중적 가치를 지니게 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삶의 자세 때문이다.

 

 

내일은

나에게 없다고 생각하며

오늘이 마지막인 듯이

모든 것을 정리해야지.

 

사람들에겐

해지기 전에

한 톨 마음도

남겨두지 말아야지.

 

찾아오는 이들에겐

항상 처음인 듯

지극한 사랑으로 대해야지.

 

잠은 줄이고

기도 시간을 늘려야지.

 

늘 결심만 하다

끝나는 게,

벌써 몇 년째인지.

 

하루가 가고

한숨 쉬는 어리석음.

 

- 「후회」-

 

 

그녀가 하는 삶의 고민들은 너무나 인간적이다.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와 같이 결심은 많이 하고 이루지 못하여 후회하는 마음, 행복이 어딘가에 있을 것이라고 찾아 헤매면서 정작 가까이에 있는 행복은 발견하지 못하고 지나치는 어리석음. 많은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느끼는 후회와 미련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그녀의 고민 속에는 그 고민과 성찰을 통한 발전이 담겨 있다. 그녀는 자신의 내적 고뇌를 사랑의 정신으로 승화시켜 표현할 줄 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녀의 정신적 성숙과 순수성을 느끼게 하고 그녀를 닮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한다.

 

 

너무 작게 숨어 있다고

불완전한 것은 아니야

내게도 고운 이름이 있음을

사람들은 모르지만

서운하지 않아

 

기다리는 법을

노래하는 법을

바람에게 배웠기에

기쁘게 살 뿐이야

 

푸름에 물든 삶이기에

잊혀지는 것은 두렵지 않아

 

나는 늘

떠나면서 살지

 

- 「풀꽃의 노래」중에서 -

 

 

자그마한 것에서 의미를 발견하고 삶의 기쁨을 찾는 소박한 삶을 찾는 것, 그것이 바로 시인이 우리들에게 전하고 싶은 삶의 메시지가 아닐까 싶다. 풀꽃처럼, 조개처럼, 바람처럼, 노래처럼 작은 것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기쁨을 얼마나 많이 잊고 바쁘게만 달려 왔는지...

 

이 시집을 읽다 보면 이러한 반성의 마음과 함께 자신을 최대한 낮추었을 때에 발견할 수 있는 세상의 아름다움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아름다운 시 한 편과 함께 자연 앞에서 겸손할 수 있는 소박한 마음 한 자락을 얻는다면, 도시의 복잡하고 답답한 일상에 대해서도 너그러운 마음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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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관집 이층 창비시선 370
신경림 지음 / 창비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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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서점에 시집을 사러 갔더니 매대에 신경림 시인의 신작 시집이 없었다. 지방도시라서 아직 시집이 오지 않았나 해서 서점 주인장에게 여쭈어봤다. 보내온 시집이 다 팔려 재고가 없다고 한다. 질박한 서정과 꾸밈없는 언어로 시대의 상처와 아픔을 다독이는 시를 써온 그를 지역의 독자들도 잊지 않았던 것이다. 기쁜 마음으로 다른 서점으로 가서 시집을 샀다.

 

올해 여든, 내년이면 환갑을 맞는 원로 시인의 문장은 여전히 따뜻했다. 언 손을 녹일 수 있는 것이 작은 핫팩이라면, 시인의 시집은 겨울바람 같은 냉소에 얼얼해진 심장을 녹이는 따뜻한 문장들로 채운 핫팩이다. 하룻저녁 내내 아껴가며 읽은 시집에는 사실 새로울 것도, 유별난 것도 없었다. 현란한 비유도 없고, 어려운 축약도 없다.

 

 

아무래도 나는 늘 음지에 서 있었던 것 같다

개선하는 씨름꾼을 따라가며 환호하는 대신

패배한 장사 편에 서서 주먹을 부르쥐었고

몇십만이 모이는 유세장을 마다하고

코흘리개만 모아놓은 초라한 후보 앞에서 갈채했다

그래서 나는 슬프고 안타깝고 아쉬웠지만

나를 불행하다고 생각한 일이 없다

나는 그러면서 행복했고

사람 사는 게 다 그러려니 여겼다

쓰러진 것들의 조각난 꿈을 이어주는

큰 손이 있다고 결코 믿지 않으면서도

 

- 「쓰러진 것들을 위하여」 (32쪽) -

 

 

이 시는 시인이 1993년 펴낸 시집 『쓰러진 자의 꿈』에 실으려다 마음에 차지 않아 빼 놓았다가 다시 써 낸 것이다. 그래도 시인은 성에 차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이 시는 시인 신경림이 아직 살아 있음을 독자들 앞에서 당당하게 보여 준다. 그의 삶은 중국 시성(詩聖) 두보를 닮았다. 인간의 고통를 늘 가슴에 품어 연민의 시어로 위로하고, 평탄치 않은 삶의 불우에 매몰되지 않아 '우리시대의 두보'라 불린다.

 

 

나는 깨지 않으리 이 꿈에서,

비록 이 꿈이 죽음으로 이어지는 것일지라도.

 

- 「몽유도원」 마지막 부분 (39쪽) -

 

 

시인은 이미 인생의 먼 길을 와서 ‘사불휴(死不休, 시로 독자들을 감동시키지 못하면 죽어서도 쉬지 않겠다는 두보의 말)’의 꿈을 이야기하고 있다. “아름다운 시는 오만과 독선을 버린 시”라는 팔순 시인의 시집을 읽어 보면 오히려 그의 눈이 맑아지고 귀는 순해졌다는 것을 읽을 수 있다.

 

 

이웃 가게들이 다 불을 끄고 문을 닫고 난 뒤까지도 그애는 책을 읽거나 수를 놓으면서 점방에 앉아 있었다. 내가 멀리서 바라보며 서 있는 학교 마당가에는 하얀 찔레꽃이 피어 있었다. 찔레꽃 향기는 그애한테서 바람을 타고 길을 건넜다.

 

꽃이 지고 찔레가 여물고 빨간 열매가 맺히기 전에 전쟁이 나고 그애네 가게는 문이 닫혔다. 그애가 간 곳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

 

오랫동안 그애를 찾아 헤매었나보다. 그리고 언제부턴가 그애가 보이기 시작했다. 강나루 분교에서. 아이들 앞에서 날렵하게 몸을 날리는 그애가 보였다. 산골읍 우체국에서, 두꺼운 봉투에 우표를 붙이는 그애가 보였다. 활석 광산 뙤약볕 아래서, 힘겹게 돌을 깨는 그애가 보였다. 서울의 뒷골목에서, 항구의 술집에서, 읍내의 건어물점에서, 그애를 거듭 보면서 세월은 가고, 나는 늙었다. 엄마가 되어 있는, 할머니가 되어 있는, 아직도 나를 잊지 않고 있는 그애를 보면서 세월은 가고, 나는 늙었다.

 

하얀 찔레꽃은 피고,

또 지고.

 

- 「찔레꽃은 피고」 (22~23쪽) -

 

 

한국인의 정서에 각인된 찔레꽃의 이미지는 순박, 소박, 고향, 슬픔이다. 때로는 그 옛날 어린 시절 가난한 고향의 산야에서 만났던 순한 첫사랑의 이미지이기도 하다. 그래서일까. 유난히 찔레꽃을 소재로 만들어진 노래도 많다. 향기가 진해서 오히려 서러운 찔레꽃! 그래서 장사익은 목이 터지도록 “찔레꽃 향기는 너무 슬퍼요”라고 노래를 불렀던 것일까?

 

 

 

 

장사익의 찔레꽃은 노래를 듣고 있는 당신이다. 그 누구도 아닌 바로 '당신'이야말로 순박한 찔레꽃이라고 자꾸 최면을 걸어쌓니 거기에 안 넘어가고 배기겠는가. 신경림의 찔레꽃은 순박했던 첫사랑을 가슴 속에 품은 당신이다.

 

찔레꽃을 담은 장사익은 찔레꽃 가시로 우리들의 가슴을 찔렀다면, 시인은 찔레꽃 향기로 세월의 모진 풍상에 찌든 우리들의 가슴을 살짝 건드린다. 몇 달 뒤에 피게 될, 세월에 잊고 있었던 그 아름다운 찔레꽃 향기의 감각을 살린다.  

 

찔레꽃이 슬픔의 이미지로 한국인들에게 각인된 것은 전쟁이 갈라놓은 생이별, 그리고 이루어지지 못한 첫사랑에 대한 아련한 그리움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저 홀로 고고하게 하얗게 얼굴을 내밀고 있는 찔레꽃. 세월의 바람에 첫사랑의 기억과 함께 점점 희미해져만 가는 찔레꽃 향기는 너무 슬프다. 한국인의 감성 유전자에 그렇게 새겨놓은 것일 게다.

 

 

그의 가난과 추위가 어디 그만의 것이랴.

그는 좁은 어깨와 야윈 가슴으로 나의 고통까지 떠안고

역 대합실에 신문지를 덮고 누워 있다.

아무도 그를 눈여겨보지 않는다.

간혹 스치는 것은 모멸과 미혹의 눈길뿐

마침내 그는 대합실에서도 쫓겨나 거리를 방황하게 한다.

 

찬 바람이 불고 눈밭이 치는 날 그의 영혼은 지상에서 사라질 것이다.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를 걸어올라가 못 박히는 대신

그의 육신은 멀리 내쫓겨 광야에서 눈사람이 되겠지만.

 

그 언 상처에 손을 넣어보지도 않고도

사람들은 그가 부활하리라는 것을 의심치 않을 것이다.

다시 대합실에 신문지를 덮고 그들을 대신해서 누워 있으리라는 걸.

 

그들의 아픔, 그들의 슬픔을 모두 끌어안고서.

 

- 「나의 예수」 (85쪽) -

 

 

석가모니도, 예수도 길에서 태어나고 길에서 생을 마감했다. 머리가 아니라 몸으로 보여 주었던 그 삶은 역시 그들이 가려는 ‘사람의 길, 생명의 길, 평화의 길’이다. 시인은 서울에 예수가 있다고 믿는다. 한 달 전에 이성의 지식인이라는 사람은 집 없는 사람들을 '좀비'라고 돌직구 같은 말을 했다면, 감성의 지식인은 이 세상의 고통을 떠안고 아파하는 '예수'라고 표현했다.

 

비탄과 절망의 현실을 뻔히 눈뜨고 보면서도 도리어 선을 긋고 침묵하고 고개 돌리고 저 멀리 비켜간다면, 자기 말과 행위의 진정성과 인간애를 진실하게 살피며 새롭게 살기를 도모하지 않는다면, 과연 이 시대에 소통을 갈구하는 것은 잘한 일일까? 상처 입고 고통 받는 모든 존재들을 외면하는 것은 소통이라고 할 수 없다. 마음으로 통하는 소통이 아니라 냉소적인 외면일 뿐이다. ‘나의 예수’는 이 땅의 고통 받는 이들을 향해 연민의 손길마저 내밀지 못하는 이 시대, 이 땅에서 ‘가난과 추위’와 동거하는 그들의 아픔, 슬픔을 끌어안을 수 있는지 독자들에게 자문하게 만든다.

 

시인은 언어를 잃어도 맨 몸뚱어리로 세상에 부딪히는 사람들이다. ‘늙은 시인’이라면 더 그렇다. 하지만 우리 나이로 팔순을 맞이한 시인의 나이를 감안하면 새로운 시집 출간을 향한 축복보다 “이번이 마지막 작품이 아닐까?”하는 불안감이 앞서는 마음은 어쩔 수 없다. 시인이 말미에 남긴 “얼마 남지 않은 내일에 대한 꿈도 꾸고 내가 사라지고 없을 세상에 대한 꿈도 꾼다”는 고백은 그래서 더 애틋하게 다가온다. 추억과 따뜻함 그리고 인간애를 동반한 애틋함이다.

 

짧은 인생 동안 정들었던 수많은 거리와 인연을 다 음미하고 또 가슴에다 남겨놓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정말 소중한 것은 적어도 가슴 한 켠에 남아서 가끔 슬퍼지거나 외로워질 때 순간순간 떠오르게 된다. 흑백사진처럼 화려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남루하지는 않고, 조금은 코끝이 찡해지는 그런 순간들이다. 하지만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그 시절이기에 시인은 시로 그 시절 그 사람들을 다시 불러내 살려낸다. 망각의 강 속에서 시인은 추억의 시어(詩語)를 건진다. 추억의 시어는 어느새 냉소로 트다 못해 갈라진 우리들의 마음에 바르는 ‘희망’이라는 연고가 된다. 이 ‘희망’의 연고가 세상과 세월의 풍파 앞에 ‘쓰러진 자들’의 아픔, 슬픔 모두 끌어안을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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