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은 배출을 원한다. 특히 요즘 같이 추운 날씨에 자주 소변을 보게 된다. 소변, 대변, 방귀는 자연스러운 생리 현상이다. 소변을 가급적 자주 보는 게 좋다고 말한 의학 전문가가 있다. 하지만 소변이 마렵지 않은데도 억지로 힘을 줘서 쥐어짜면(?) 방광에 좋지 않다. 배뇨 횟수는 계절과 온도에 따라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보통 성인의 경우 하루 5~6회 정도다. 소변 횟수와 양은 너무 많아도 문제고, 너무 줄어들어도 문제다.
살다 보면 세 가지 생리 현상을 참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몸에서 보내는 신호를 계속 무시하면 언젠가 몸에 이상이 생긴다. 필자는 어렸을 때부터 소변과 대변을 참는 나쁜 버릇이 있었다. 학창 시절에 필자는 시험 성적을 잘 받고 싶은 마음이 너무나도 간절했다. 그래서 쉬는 시간에 화장실에 가지 않고 계속 의자에 앉아 공부만 했다. 재미있는 책을 읽느라 화장실에 가는 일을 미루기도 했었다. 이런 나쁜 버릇이 반복되면 건강에 적신호가 빨리 찾아온다. 2016년에 필자는 통풍 진단을 받았다. 통풍은 혈액 속에 있는 요산이라는 물질이 제대로 배출되지 않아 관절에 염증을 일으키는 질병이다. 통풍 진단을 받았던 당시에 신장에 이상이 있는지 신장 기능 검사를 받지 않았으나 이때 당시 요산을 포함한 노폐물을 걸러주는 신장 기능이 나빠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방광은 신장과 연결되어 있다. 소변을 계속 참으면 방광의 압력으로 인해 요관(尿管)으로 역류하여 신장 기능이 떨어질 수 있다.
어떤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꾸준히 노력하는 자세는 보기 좋다. 노력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인내심이 강하다. 어느 한 분야의 경지에 오른 사람들의 일화에는 공통점이 있다. 성공한 사람들은 끼니를 거르고, 생리 현상을 참으면서 노력했다고 한다. 한 분야에 제대로 푹 빠진 이 사람들의 열정과 노력은 박수받을 만하다. 하지만 이들처럼 따라 하고 싶지 않다. 목표를 빨리 이루고픈 마음은 잘 알겠지만, 생리 현상을 참으면서까지 노력할 필요는 없다.
[우주지감 ‘나를 관통하는 책 읽기’ 2020년 12월의 책]
* 게랄트 휘터 《존엄하게 산다는 것: 모멸의 시대를 건너는 인간다운 삶의 원칙》 (인플루엔셜, 2019)
평점
3점 ★★★ B
독일의 뇌과학자 게랄트 휘터(Gerald Huether)는 자신의 책 《존엄하게 산다는 것》에서 ‘존엄’의 의미를 되짚어본다. ‘나는 이러이러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내적 표상(內的 表象: 그림이나 언어와 같은 외부적 표현 형태가 아닌 개인의 내적 상태에서 일어나는 표상)은 고유의 한 사람으로서의 행동으로 표출하게 만드는 관념이다. 휘터는 이를 ‘존엄’이라고 말한다. ‘존엄하게 산다는 것’은 결국 외부의 유혹에 맞서 자신의 내면 표상, 즉 ‘나’라는 존재의 고유한 삶을 지키면서 사는 방식이다.
존엄하게 살아가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살면서 존엄하게 살 기회를 받지 못했거나 혹은 빈번히 놓치고 말았다. 존엄하게 살려면 어릴 때부터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반드시 해야 할 일은 무엇인지, 무엇을 배워야 하는지를 스스로 인식해야 한다. 그런데 주변 사람들의 관심과 지나친 교육열, 빽빽한 교육 환경은 아이들을 외부의 지시를 그대로 따르는 수동적인 존재로 자라게 했다. 이런 아이들은 ‘나는 이러이러한 사람이 되고 싶다’라고 생각할 여유조차 누리지 못한 채 어른으로 성장한다.
자녀를 너무 열심히 가르치는 부모는 자녀에게 과제를 줄 때 “과제를 다 할 때까지 절대로 ○○○을 하지 마라!(“간식 먹지 마!”, “스마트폰 들여다보지 마!”, “친구와 만날 생각하지 마!” 등)”고 지시한다. 강압적인 성격의 교사들도 종종 이런 식으로 학생들을 옭아맨다. 그러니까 어떤 하나를 다 끝낼 때까지 다른 어떤 일―학생들을 통제하는 부모나 교사는 자신의 지도법에 어긋나거나 따르지 않는 아이의 행동에 부정적인 인상을 심어주기 위해 ‘딴짓’이라고 표현한다―을 절대로 하지 말란다. 개인의 자율성을 옥죄는 교육법에 익숙한 학생들은 학교나 집에서 지도받고, 통제당하며, 감시당한다. 이런 갑갑한 분위기에 지배당한 아이들은 화장실에 잠깐 가야 할 상황도 크게 잘못된 일이라고 생각한다.
* 김영민 《공부란 무엇인가》 (어크로스, 2020)
공부에만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이나 분위기가 갑갑하면 아이들은 공부에 대한 흥미를 잃을 수 있다. 서울대의 모 교수는 자신의 강의를 듣는 학생들에게 생리 현상을 참는 것이 성인의 자부심이라고 말한다.
* 《공부란 무엇인가》 중에서, 76~77쪽
수업 도중에 화장실에 가도 안 되냐고요? 물론 안 됩니다. 여러분은 성인이고, 성인의 자부심은 똥오줌을 참을 수 있다는 데 있습니다. 여러분이 한 시간 30분 정도는 생리현상을 관리할 수 있으리라는 사회적 기대가 있습니다. 마치 극장에 들어가기 전에 화장실에 들르듯이, 강의실에 들어오기 전에 화장실에 들르기 바랍니다. 그리고 손을 씻기 바랍니다. 예외적인 사정이 있는 사람은 미리 상의해주기 바랍니다.
아무리 화장실에 미리 다녀왔어도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이 생길 수도 있겠지요. 그렇다고 해서 수업 중에 갑자기 손을 들고, “뭔가 나와요!”라고 울부짖는 것은 민망한 일이겠지요. 그런 경우에는 노래를 부르기로 합시다. 수업 중에 불가피하게 화장실에 가야 할 사정이 생긴 사람은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는 겁니다. 어디선가 나직하게 들려오는 노랫가락을 듣고 우리는 누군가 곧 강의실 문을 나갈 것을 예감하고 그에 대해 마음의 준비를 하면 강의에 집중력을 잃지 않을 수 있겠지요. 노래를 부르며 강의실을 떠나는 학우의 고통을 공감하고 양해할 수 있게 될 겁니다. 공감과 양해는 규율 못지않게 중요한 시민적 덕성입니다. 노래하는 목소리가 클수록, 곡조가 슬플수록, 그가 처한 상황이 위중하다는 신호겠지요. 저 역시 만에 하나 급히 용변을 봐야 할 사정이 생기면, 장송곡을 부르도록 하겠습니다.
생리 현상을 참으면 건강에 좋지 않다. 생리 현상을 참는 나쁜 버릇 때문에 아파봤던 필자는 무료로 수강할 수 있다고 해도 절대로 그러고 싶지 않다. 똥오줌을 잘 참으면 느낄 수 있다는 ‘성인의 자부심’은 쓸데없는 허세다. 생리 현상을 참고 공부에 매진하길 바라는 ‘사회적 기대’는 학생들의 주체성과 (똥오줌을 눌 수 있는) 자유의 욕구를 통제한다. 교수의 글을 좋아하는 혹자는 필자의 지적에 이렇게 반박할 것이다. “재미있게 하려고 쓴 건데 왜 이리 민감한 반응을 보이세요?”, “그냥 웃고 넘길 수준의 내용 아닌가요?” 교수는 우스갯소리로 생리 현상을 참으라고 말한 것일 수 있다. 하지만 교수의 말에 유머를 싹 다 제거해보면 그 속에 제자들에게 전하는 교수의 본심이 나온다. “내 수업이 끝날 때까지 절대로 수업 도중에 화장실에 갈 생각하지 마!”
필자가 학생이었으면 교수의 지도 방식에 태클을 걸었을 것이다. “교수님, 수업 도중에 화장실에 가는 학생들 때문에 일순간에 집중력이 흐려지는 상황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저도 이렇게 생각하는데 열심히 가르치는 교수님은 오죽하시겠어요. 하지만 수업에 집중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똥오줌을 참는 일을 성인의 자부심이고 공부에 매진하는 사람의 미덕으로 여기는 교수님의 말씀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공부든 뭐든 무언가를 끝까지 잘 해내기 위해 인내심을 강요하는 것은 구시대적 어른의 사고방식입니다. 교수님, 저는 생리 현상을 참으면 건강이 나빠지는 체질이에요. 교수님의 수업 내용을 하나라도 놓치고 싶지 않아요. 그러나 수업 도중에 갑자기 똥오줌이 마려우면 망설이지 않고 화장실로 갈 겁니다. 저는 건강을 유지하면서 공부하고 싶어요. 이게 제가 존엄하게 공부하는 방식이고, 존엄하게 똥오줌을 싸야 할 이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