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과거에 쓴 리뷰를 보곤 한다. 혼자 보기 때문에 부끄러움은 온전히 내 몫이다. 좋든 나쁘든 독서의 추억을 되살리기 위해 과거의 리뷰를 본다. 풋내기 시절에 쓴 리뷰를 찬찬히 보다 보면 허술한 논리,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비문과 오자 등을 여러 개 발견한다. 부끄러워서 당장 지우고 싶지만, 일단은 그대로 놔둔 상태다. 왜냐하면 고쳐야 할 게 너무 많기 때문이다. 고쳐 쓰면 글은 전보다 좋아지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글쓰기 실력이 부쩍 늘어나는 건 아니다. 글을 고쳐 쓰기 전에 왜 고쳐야 하는지생각해봐야 한다


수험생들은 큰 시험을 대비하기 위해 오답 노트를 만든다. 모의시험을 칠 때마다 정답을 맞히지 못한 문제들이 있다. 그런 문제는 다시 풀어보고 오답 노트에 풀이 과정을 기록해야 한다. 오답 노트가 있으면 틀렸던 부분을 재차 확인하고 취약점을 보완할 수 있다. 독서 행위와 리뷰 쓰기를 시험 문제를 푸는 일에 비유하는 표현이 좋다고 볼 수 없지만(왜냐하면 이런 표현은 논술 시험에서 고득점을 받기 위해 독서를 하는 것처럼 비치기 때문이다), 열심히 공부한 사람은 쉬운 문제를 틀릴 수 있듯이 책을 많이 읽은 사람은 오독을 할 수 있다.


















 

* 조현행 독서의 궁극 서평 잘 쓰는 법: 읽는 독서에서 쓰는 독서로(생애, 2020)


평점

3.5점   ★★★☆   B+




 

독서칼럼니스트 조현행 씨는 어떤 책을 읽었으면 무조건 글을 써야 한다고 강조한다. 왜냐하면 쓰기는 책의 내용을 되새기게 하고, 이해하고, 생각하게 만드는 행위이다. 그리고 글을 쓰면서 자신의 삶을 되돌아볼 수 있다. 조 씨의 표현에 따르면 독서를 마친 후에 쓴 글, 즉 서평(리뷰)은 글쓴이의 정신에 남겨진 지문(指紋)이다. 책 읽는 인간을 지문 인식 기계라고 생각해보자(사람을 기계에 비유한 점을 너그러이 이해해주시라). 지문 인식 기계는 종종 지문을 잘못 인식할 때가 있다. 이러한 오작동의 원인은 단순하지 않지만, 기본적으로 기계가 처음에 등록된 지문을 다른 사람의 지문으로 착각해서 일어난다. 완벽한 기계도 오작동을 일으킨다. 똑똑하다는 소리를 듣는 다독가도 오독한다. 지문 인식 오류를 고치려면 기계를 고치거나 지문을 다시 찍으면 된다. 내가 쓴 리뷰에 오류가 있으면 고쳐서 쓰면 된다. 고쳐 쓴 리뷰는 새로운 지문이다. 이제 그 지문을 내 정신에 꾹 눌러 등록하면 된다.


사람은 완벽한 신이 아닌 이상 자신이 했던 실수를 반복한다. 실수를 다시 하지 않도록 하려면 실수한 일을 꼼꼼하게 되돌아봐야 한다. 다시 생각하고 싶지 않은 실수도 글의 주제가 될 수 있다. 나는 오독도 사람이라면 할 수 있는 실수라고 본다. 그래서 지난달에 오독 노트라는 서재 범주(카테고리, category)를 새로 만들었다. 예전에 나의 오독을 분석한 글을 몇 편 쓴 적이 있다. 역시 기록으로 남아서 그런지 확실히 과거에 내가 책을 읽거나 글을 쓰면서 무엇을 실수했는지 알고 있다. 그래서 오독 노트에 포함될만한 글들을 골라 분류했다. 현재 오독 노트에 분류된 글은 총 다섯 편이다. 이 다섯 편의 글은 나의 실수와 오류가 담겨진 일종의 정오표이며 공개 사과문이자 반성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잊으려고 하면 더 기억이 남는다. 내가 기억력이 좋아서 이런 건 아니다. 이것은 오독에 대한 기록이 글쓴이인 나에게 준 긍정적인 효과. 기록하지 않았으면 과거의 실수를 기억하지 못했을 것이다.


앞으로 내 서재에 남아 있는 잡문들을 살펴보면서 오독이 반영된 글을 발굴할 생각이다. 고쳐 써야 할 책 리뷰가 있으면 내가 다시 그 글을 리뷰(review)’하여 오독 노트에 공개하려고 한다. 오독을 일삼고, 겉멋을 부린 과거의 를 오독오독 씹어줘야겠다. 이러다가 먼 훗날에 내가 이 글마저 비판할 것 같다.








Mini 미주알고주알

 



 

 

이 글은 책 리뷰가 아니지만, 그래도 책 내용이 언급된 잡문이다. 그러므로 책에 있는 오자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독서의 궁극 서평 잘 쓰는 법152쪽의 부록에 오자가 있다. ‘데리 이글턴은 오자다. 정확한 표기는 테리 이글턴(Terry Eagleton)’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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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1-02 08: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21-01-02 13:04   좋아요 1 | URL
독서의 긍정적인 효과는 꽤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야 나오는 것 같아요. 저도 책을 읽거나 글을 쓰다가 ‘빨리빨리’ 병의 증상이 나타나요. ^^;;

레삭매냐 2021-01-02 10: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글로 쓴 것은 지울 수 없다...

그리고 쓰지 않는 것들은 모두
사라진다

후자의 말쌈을 남기신 설터 옹의
전례를 따라 보려고 오늘도 읽고
쓰고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그나저나 그렇게 오탈자를 신고해도
반영이 되려나 궁금하네요.

cyrus 2021-01-02 13:07   좋아요 1 | URL
알라딘 독자 리뷰를 꼼꼼하게 보는 출판사 직원이 많지 않을 거예요. 책의 오탈자를 출판사도 알리는 방안에 대해서 고민하고 있는데, 문학동네 같은 출판사 공식 카페나 인스타그램을 활용해볼 생각이에요. 알라딘 단독으로 독서 플랫폼에 활동해보니까 한계들을 많이 느꼈어요.

페넬로페 2021-01-02 11:3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몇년 전 제가 사는 동네의 도서관에서
조현행작가님의 서평 강의를 6주차에 걸쳐 들었는데 참 좋았어요~~
어렵지 않고 경쾌하게 강의하시더라구요^^
회사원이셨다가 그만두고 책읽는 세계로 전향하신 이력도 저는 좋았어요 ㅎㅎ
과거의 리뷰뿐만 아니라
현재의 글도 엉망이지만
작가의 말대로 계속 써야 할 것 같습니다^^

cyrus 2021-01-02 13:09   좋아요 0 | URL
제가 도서관에 열린 서평 강의 공지를 못 봤을 수 있지만, 어째서 대구의 모든 공공도서관에 서평 강의가 열리지 않을까요? 서평 강의가 있으면 한 번 수강하고 싶어요. ^^

syo 2021-01-02 1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데리까지 찾아내는 매서운 눈!!

cyrus 2021-01-03 07:58   좋아요 0 | URL
‘데리버거’ 드립 하려다가 말았어요. 조현행 씨가 책에 서평 쓸 때 농담하지 말라고 했거든요.. ㅎㅎㅎㅎ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책읽는헤라 2021-01-02 20:1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새내기 1인 출판사 도서출판 생애입니다. 오탈자는 접수했습니다. 재쇄 때 반영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조현생 작가님의 강의는 오프라인 온라인, 다양하게 진행됩니다. 관심 가져주시면 깊이 있는 문학 강의에 참여하실 수 있습니다. 페넬로페님, cyrus님, syo님 조현행 작가님의 이어지는 저서들도 관심가져주세요. 감사합니다. ^^

cyrus 2021-01-02 20:57   좋아요 1 | URL
제 글을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출판사 이름을 꼭 기억할게요. 그리고 다음에 나올 두 번째 ‘궁극의 시리즈’를 기대하겠습니다. ^^

이누아 2021-01-02 21: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대구 학이사 독서아카데미에서 매년 서평집이 나와요. 회원들이 책을 읽고 서평을 써서 책으로 엮는데, 거기서 서평 강의가 있는지는 모르겠어요.

cyrus 2021-01-03 15:39   좋아요 1 | URL
좋은 정보를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

얄라알라 2021-01-02 22: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실시간으로 바로 독자와 편집진의 교감이 이뤄져서 2쇄에 반영되는 이 흐름! 알라딘 서재 정말 멋지군요. cyrus님도요!

cyrus 2021-01-03 15:41   좋아요 1 | URL
알라딘 서재에 있는 리뷰를 통해서 독자와 출판인(저자)이 소통하는 일이 많아졌으면 좋겠어요. ^^
 



몸은 배출을 원한다. 특히 요즘 같이 추운 날씨에 자주 소변을 보게 된다. 소변, 대변, 방귀는 자연스러운 생리 현상이다. 소변을 가급적 자주 보는 게 좋다고 말한 의학 전문가가 있다. 하지만 소변이 마렵지 않은데도 억지로 힘을 줘서 쥐어짜면(?) 방광에 좋지 않다. 배뇨 횟수는 계절과 온도에 따라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보통 성인의 경우 하루 5~6회 정도다. 소변 횟수와 양은 너무 많아도 문제고, 너무 줄어들어도 문제다.


살다 보면 세 가지 생리 현상을 참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몸에서 보내는 신호를 계속 무시하면 언젠가 몸에 이상이 생긴다. 필자는 어렸을 때부터 소변과 대변을 참는 나쁜 버릇이 있었다. 학창 시절에 필자는 시험 성적을 잘 받고 싶은 마음이 너무나도 간절했다. 그래서 쉬는 시간에 화장실에 가지 않고 계속 의자에 앉아 공부만 했다. 재미있는 책을 읽느라 화장실에 가는 일을 미루기도 했었다. 이런 나쁜 버릇이 반복되면 건강에 적신호가 빨리 찾아온다. 2016년에 필자는 통풍 진단을 받았다. 통풍은 혈액 속에 있는 요산이라는 물질이 제대로 배출되지 않아 관절에 염증을 일으키는 질병이다. 통풍 진단을 받았던 당시에 신장에 이상이 있는지 신장 기능 검사를 받지 않았으나 이때 당시 요산을 포함한 노폐물을 걸러주는 신장 기능이 나빠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방광은 신장과 연결되어 있다. 소변을 계속 참으면 방광의 압력으로 인해 요관(尿管)으로 역류하여 신장 기능이 떨어질 수 있다.


어떤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꾸준히 노력하는 자세는 보기 좋다. 노력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인내심이 강하다. 어느 한 분야의 경지에 오른 사람들의 일화에는 공통점이 있다. 성공한 사람들은 끼니를 거르고, 생리 현상을 참으면서 노력했다고 한다. 한 분야에 제대로 푹 빠진 이 사람들의 열정과 노력은 박수받을 만하다. 하지만 이들처럼 따라 하고 싶지 않다. 목표를 빨리 이루고픈 마음은 잘 알겠지만, 생리 현상을 참으면서까지 노력할 필요는 없다.


















[우주지감 나를 관통하는 책 읽기’ 202012월의 책]

* 게랄트 휘터 존엄하게 산다는 것: 모멸의 시대를 건너는 인간다운 삶의 원칙(인플루엔셜, 2019)



평점

3점   ★★★   B




독일의 뇌과학자 게랄트 휘터(Gerald Huether)는 자신의 책 존엄하게 산다는 것에서 존엄의 의미를 되짚어본다나는 이러이러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내적 표상(內的 表象: 그림이나 언어와 같은 외부적 표현 형태가 아닌 개인의 내적 상태에서 일어나는 표상)은 고유의 한 사람으로서의 행동으로 표출하게 만드는 관념이다. 휘터는 이를 존엄이라고 말한다존엄하게 산다는 것은 결국 외부의 유혹에 맞서 자신의 내면 표상, 라는 존재의 고유한 삶을 지키면서 사는 방식이다


존엄하게 살아가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살면서 존엄하게 살 기회를 받지 못했거나 혹은 빈번히 놓치고 말았다. 존엄하게 살려면 어릴 때부터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반드시 해야 할 일은 무엇인지, 무엇을 배워야 하는지를 스스로 인식해야 한다. 그런데 주변 사람들의 관심과 지나친 교육열, 빽빽한 교육 환경은 아이들을 외부의 지시를 그대로 따르는 수동적인 존재로 자라게 했다. 이런 아이들은 나는 이러이러한 사람이 되고 싶다라고 생각할 여유조차 누리지 못한 채 어른으로 성장한다.


자녀를 너무 열심히 가르치는 부모는 자녀에게 과제를 줄 때 과제를 다 할 때까지 절대로 ○○○을 하지 마라!(“간식 먹지 마!”, “스마트폰 들여다보지 마!”, “친구와 만날 생각하지 마!” )고 지시한다. 강압적인 성격의 교사들도 종종 이런 식으로 학생들을 옭아맨다. 그러니까 어떤 하나를 다 끝낼 때까지 다른 어떤 일학생들을 통제하는 부모나 교사는 자신의 지도법에 어긋나거나 따르지 않는 아이의 행동에 부정적인 인상을 심어주기 위해 딴짓이라고 표현한다을 절대로 하지 말란다. 개인의 자율성을 옥죄는 교육법에 익숙한 학생들은 학교나 집에서 지도받고, 통제당하며, 감시당한다. 이런 갑갑한 분위기에 지배당한 아이들은 화장실에 잠깐 가야 할 상황도 크게 잘못된 일이라고 생각한다.


















* 김영민 공부란 무엇인가(어크로스, 2020)




공부에만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이나 분위기가 갑갑하면 아이들은 공부에 대한 흥미를 잃을 수 있다서울대의 모 교수는 자신의 강의를 듣는 학생들에게 생리 현상을 참는 것이 성인의 자부심이라고 말한다.




* 공부란 무엇인가중에서, 76~77

 

 수업 도중에 화장실에 가도 안 되냐고요? 물론 안 됩니다. 여러분은 성인이고, 성인의 자부심은 똥오줌을 참을 수 있다는 데 있습니다. 여러분이 한 시간 30분 정도는 생리현상을 관리할 수 있으리라는 사회적 기대가 있습니다. 마치 극장에 들어가기 전에 화장실에 들르듯이, 강의실에 들어오기 전에 화장실에 들르기 바랍니다. 그리고 손을 씻기 바랍니다. 예외적인 사정이 있는 사람은 미리 상의해주기 바랍니다.

 아무리 화장실에 미리 다녀왔어도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이 생길 수도 있겠지요. 그렇다고 해서 수업 중에 갑자기 손을 들고, “뭔가 나와요!”라고 울부짖는 것은 민망한 일이겠지요. 그런 경우에는 노래를 부르기로 합시다. 수업 중에 불가피하게 화장실에 가야 할 사정이 생긴 사람은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는 겁니다. 어디선가 나직하게 들려오는 노랫가락을 듣고 우리는 누군가 곧 강의실 문을 나갈 것을 예감하고 그에 대해 마음의 준비를 하면 강의에 집중력을 잃지 않을 수 있겠지요. 노래를 부르며 강의실을 떠나는 학우의 고통을 공감하고 양해할 수 있게 될 겁니다. 공감과 양해는 규율 못지않게 중요한 시민적 덕성입니다. 노래하는 목소리가 클수록, 곡조가 슬플수록, 그가 처한 상황이 위중하다는 신호겠지요. 저 역시 만에 하나 급히 용변을 봐야 할 사정이 생기면, 장송곡을 부르도록 하겠습니다.



생리 현상을 참으면 건강에 좋지 않다. 생리 현상을 참는 나쁜 버릇 때문에 아파봤던 필자는 무료로 수강할 수 있다고 해도 절대로 그러고 싶지 않다. 똥오줌을 잘 참으면 느낄 수 있다는 성인의 자부심은 쓸데없는 허세다생리 현상을 참고 공부에 매진하길 바라는 사회적 기대는 학생들의 주체성과 (똥오줌을 눌 수 있는) 자유의 욕구를 통제한다교수의 글을 좋아하는 혹자는 필자의 지적에 이렇게 반박할 것이다. “재미있게 하려고 쓴 건데 왜 이리 민감한 반응을 보이세요?”, “그냥 웃고 넘길 수준의 내용 아닌가요?” 교수는 우스갯소리로 생리 현상을 참으라고 말한 것일 수 있다. 하지만 교수의 말에 유머를 싹 다 제거해보면 그 속에 제자들에게 전하는 교수의 본심이 나온다. “내 수업이 끝날 때까지 절대로 수업 도중에 화장실에 갈 생각하지 마!”


필자가 학생이었으면 교수의 지도 방식에 태클을 걸었을 것이다. “교수님, 수업 도중에 화장실에 가는 학생들 때문에 일순간에 집중력이 흐려지는 상황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저도 이렇게 생각하는데 열심히 가르치는 교수님은 오죽하시겠어요. 하지만 수업에 집중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똥오줌을 참는 일을 성인의 자부심이고 공부에 매진하는 사람의 미덕으로 여기는 교수님의 말씀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공부든 뭐든 무언가를 끝까지 잘 해내기 위해 인내심을 강요하는 것은 구시대적 어른의 사고방식입니다. 교수님, 저는 생리 현상을 참으면 건강이 나빠지는 체질이에요. 교수님의 수업 내용을 하나라도 놓치고 싶지 않아요. 그러나 수업 도중에 갑자기 똥오줌이 마려우면 망설이지 않고 화장실로 갈 겁니다. 저는 건강을 유지하면서 공부하고 싶어요. 이게 제가 존엄하게 공부하는 방식이고, 존엄하게 똥오줌을 싸야 할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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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미 2020-12-21 17: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가 지금 읽고 있는 책에서 수용소의 오물통 얘기가 나오는데
더러운 오물통의 존재보다 더 무서운것은 오물통의 부재란 얘기가 있었어요. 우리는 여러 이유로 생리현상을 무시하고 때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데 말씀하신것처럼 건강에 큰 영향을 줄만큼 본질적으론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데 말이죠.
아직 저 두번째 책 읽어보지 못했는데 흠..그런 자부심은 저도 거부하겠습니다^^

얄라알라 2020-12-21 22:54   좋아요 1 | URL
이래서 제가 알라딘 서재에 매일 출석하나 봅니다. 글도 글이지만, 프리즘처럼 다른 각도에서 이야기를 또 이어가는 멋진 댓글을 보면, 온라인 상이지만 대화의 희열을 느낍니다. 제가 두분의 대화에 끼어든 셈이긴 하지만요^^

han22598 2020-12-22 03: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학생뿐 아니라, 선생도 화장실을 가고 싶을때가 있을텐데 말이죠.....ㅋ

cyrus 2021-01-01 13:48   좋아요 0 | URL
대부분 선생님들은 자신이 화장실에 가면 수업 흐름이 끊길까봐 생리 현상을 참고 일했을 것입니다. 선생님의 마음을 잘 알지만, 자신의 건강에 무리를 주면서까지 아이들을 가르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답글이 좀 늦었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han님. ^^

페크pek0501 2020-12-24 0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건강을 유지하면서 공부하고 싶어요. ^^

메리 크리스마스!!!

cyrus 2021-01-01 13:49   좋아요 0 | URL
올해도 건강하면서 좋은 글 많이 써주세요. 페크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초딩 2021-01-01 13: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cyrus 님 새해 복 많이 많이 받으세요~
2021년에는 더 자주 인사 드리고 응원 하겠습니다~
:-)
신정 연휴도 잘 보내세요~
 

 

 

 

 

몇 년 전만 해도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책방이 생기길 바랐다. 작년에 필자의 소원이 이루어졌다. 필자는 대구에서 가장 낙후한 서구에 오래 살았다. 작년에 서재를 탐하다책방이 서구 원대동(신 주소: 고성로)으로 이전하면서 처음으로 서구에 자리 잡은 책방이 되었다.

 

 

 

 

 

 

 

하지만 ‘책방을 탐하다는 대구 서구에서 최초로 문을 연 책방이 아니다. 책방이 처음으로 문을 연 자리는 북구 침산동(신 주소: 옥산로)이다. 책방이 있었던 자리에 큰 아파트가 들어서 있다.

 

대구 전체를 어둡게 만든 코로나19의 그림자가 좀처럼 걷히지 않았던 시기에 서구에서 아가 책방’이 태어났다. 아가 책방의 이름은 담담책방(약칭: 담담). 책방 이름처럼 아가 책방은 코로나19의 그림자를 서서히 걷어내고, 서구 주민들에게 다가서기 위해 걸음마를 떼기 시작했다.

 

 

 

 

 

 

 

담담은 올해 3월에 서구에서 태어났다. 필자는 여름에 담담의 존재를 처음 알았다. 담담이 있는 동네에 마을도서관이 있다. 필자는 마을도서관에 가다가 우연히 담담을 발견했다. 책방에 가기 전에 담담 책방지기가 만든 인스타그램과 블로그를 구경했다. 인스타그램과 블로그에 책방 내부를 찍은 사진들이 있다. 그냥 사진만 봤을 뿐인데, 책방 내부는 무척 깔끔해 보였고 편안한 느낌이 들었다.

 

우주지감연말 모임 전날인 16(목요일)에 지인과 함께 책방에 갔다. 필자와 동행한 지인은 대구 페미니즘 북클럽 레드스타킹의 남성 멤버다. 이분은 공연을 기획하고 제작하는 일을 하고 있다. 이분의 성함은 송승인데, 이 글에서는 특별히 가명을 사용했다. 이제부터 송승씨를 송승환이라고 부르겠다.

 

필자의 집에서 책방까지 걸어가는 데 걸린 시간은 15~20분이다. ‘서재를 탐하다까지 걸어가는 시간과 거의 비슷하다. ‘서재를 탐하다와 담담책방 사이의 거리도 그리 멀지 않다. 버스 타고 조금만 더 걸어가면 금방 도착할 수 있다.

 

 

 

 

 

 

 

 

 

담담이 살아있는 시간은 오후 1시부터 6시까지다. 일요일, 월요일은 책방이 숙면하는 날이다. 가끔 책방지기의 사정에 따라 책방이 조금 늦게 눈을 뜨거나 아니면 일찍 잠들 수 있다. 책방을 만나기 전에 책방 공식 인스타그램을 미리 확인해야 한다.

 

 

 

 

 

 

 

 

책방은 3층에 있다. 승강기는 없고, 계단만 있다(다리가 불편한 손님은 계단에 오르는 일이 벅찰 수 있다). 계단 주변에 아기자기한 소품과 장식이 배치되어 있고, 싸늘하게 느껴질 하얀 벽에 여러 점의 그림들이 붙여져 있다.

 

 

 

 

 

 

 

 

계단을 올라가다 보면 벽에 붙어 있는 담담책방 이용 팁을 발견할 수 있다. 담담은 커피나 그 밖의 음료를 팔지 않는다. 책방에 있는 차와 커피는 손님이 직접 타서 마셔야 한다.

 

 

 

 

 

 

책방 입구에 두 개의 문이 있다. 회색 철제문이 활짝 열려 있으면 미닫이문을 열고 들어오면 된다. 미닫이문 근처에 손 소독제가 있다. 그런데 담담책방의 미닫이문은 한 번 열면 잘 닫히지 않는다. 문이 완전히 닫힐 때까지 손잡이를 잡고 밀어야 한다. ‘서재를 탐하다읽다 익다책방의 문도 미닫이문인데 역시나 한 번에 닫히지 않는다. 세 책방의 작은 결점(?)이 비슷하다.

 

 

 

 

 

 

 

 

책방지기의 첫인상은 정말 좋았다. 책방지기를 보면 약간 살이 빠진 ‘yureka01’ 님이 생각난다. 책방지기가 책방에 처음 온 필자를 위해 따뜻한 커피 한 잔을 대접했다.

 

 

 

 

 

 

 

 

 

 

 

미닫이문 오른쪽에 작은 책상이 있다. 책상 위에 책방 이름이 적힌 여러 종류의 책갈피가 놓여 있다. 미니어처 서재는 책방지기가 손수 조립해서 만든 것이라고 한다.

 

 

 

 

 

 

 

대형 TV에서 음악이 나온다. 성탄절을 코앞에 둔 시기에 맞게 책방 내부에 캐럴이 잔잔하게 흐르고 있었다.

 

 

 

 

 

 

 

 

 

 

 

 

 

책방지기의 가족은 제주도에서 생활하다가 대구에 정착했다. 책방지기는 제주도에 있는 모든 책방을 가봤을 정도로 제주도 여행에 대해 잘 알고 계신다. 그래서 제주도와 관련된 책과 인쇄물을 따로 놓아둔 책장이 있다. 혼자서 제주도를 여행하고 싶은 분은 담담책방에 있는 책방지기를 만나라. 그러면 책방지기가 친절하게 여행 정보를 알려준다.

 

 

 

 

 

 

 

 

책방지기의 부인은 빨간 머리 앤을 좋아한다. 책방지기는 부인을 만나면서 앤을 좋아하게 되었다고 한다. 같은 취향을 공유하면서 지내는 부부의 모습이 정말 보기 좋다.

 

 

 

 

 

 

 

 

 

 

 

책방지기는 대구에서 가장 낙후한 서구에서 책방을 열었을까? 그가 책방을 열려고 한 목적과 이유는 단순하다. 책방지기는 서구 주민들이 편안하게 방문할 수 있는 문화 공간을 만들고 싶어 했다. 책을 사고 싶은 손님이 오는 책방이 아니라 책을 보러 오는 손님, 잠시 책방에서 쉬고 싶은 손님, 그리고 마음대로 그림을 그리고 싶은 손님들도 올 수 있는 편안한 쉼터 같은 문화 공간. 담담책방은 책방이라고 규정할 수 없는 공간이다. 담담책방의 진짜 주인은 바로 이곳을 찾는 손님들이다. 책방을 찾는 손님의 목적에 따라 책방의 용도와 내부 분위기는 달라진다.

 

필자와 송승환 씨는 책방지기와 대화를 나누다가 우리가 하고 있는 독서 모임 활동을 언급했다. 그러자 책방지기는 우리에게 독서 모임을 어떻게 시작하면 좋을지 질문했다. 세 사람은 40분 동안 독서 모임에 대해서 대화를 나누었다.

 

 

 

 

 

 

 

우주지감연말 모임이 있던 금요일에 다시 담담에 갔다. 두 번째 방문이다. 그날 오후를 담담에서 보내다가 담담이 문 닫을 때 연말 모임 장소인 서재를 탐하다로 갈려고 했다. 연말 모임에 항상 하는 행사가 있는데 책 선물을 모임 참석자에게 주는 일이다. 필자는 담담에서 선물용으로 고른 책 한 권과 빨간 머리 앤북 스탬프를 샀다. 포장지도 함께 샀다. 책방지기가 아주 정성스럽게 책을 포장했다.

 

책방지기는 얼마든지 책방에 오라고 말씀하셨다. 그러고 싶은데, 맨손으로 책방에 와서 맨손으로 나가는 일은 여전히 어색하고 괜히 죄송스럽다. 다음부터는 책방에서 신간을 사야겠다. 그러면 담담을 오랫동안 만날 수 있다. 주민들의 사랑을 받으면서 무럭무럭 자라는 담담이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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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0-12-20 18: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시부터 6시까지만 하면 그 나머지 시간은 그냥 비어있는 건가?

cyrus 2020-12-20 23:44   좋아요 0 | URL
책방지기님에 대해선 자세히 모르지만, 그 분이 예전에 NGO 활동을 하셨대요. 지금도 그 일을 하시는지 잘 모르겠어요. 요즘에는 혼자 또는 여러 명이 책방을 마음대로 이용할 수 있는 예약 서비스가 있어요. 책방 문 닫는 시간이나 책방 쉬는 날에 예약하면 책방을 이용할 수 있어요. ‘서재를 탐하다’ 책방은 이미 예약 서비스를 하고 있어요. ^^

blanca 2020-12-20 18: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음이 따스해지네요. 담담이 잘 되기를....대구는 저에게 고향 같은 곳이에요..

cyrus 2020-12-20 23:45   좋아요 0 | URL
확실히 대구에 동네 책방과 독서 모임 조직이 많이 생겼어요. 요즘 제일 힘든 시기인데 동네 책방과 독서 모임 조직이 잘 버텼으면 좋겠어요.

막시무스 2020-12-20 19: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정 책방이라고 불리는게 맞는것 같네요! 뭔가 포근한 느낌이 강하게 느껴집니다! 번창하시길 바래요!

cyrus 2020-12-20 23:48   좋아요 0 | URL
한 달에 한 번이라고 책방에 있는 책 한 권 사야겠어요. 그래야 책방이 오래 번창할 수 있거든요. ^^

파트라슈 2020-12-21 08: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업 이윤이 목적이 아닌 진정 자신이 좋아서 즐기는 일을 하시는 분이 연 책방이 대구에 있었군요.. 대구 서구쪽 광범위한 재개발 예약이 되어 있는데 앞으로 한 5년 뒤에 아파트 숲이 들어서도 이런 동네책방이 여전히 존재하면 좋겠습니다. 책방 감성 잊어버린지 오래인데 책방 가서 이런저런 책들 손에 잡히는 대로 보면 시간가는 줄 모르던 시절이 있었죠. 지금도 가끔은 대백 교보문고나 예스24서점에 가는데 이쁜 책들 사고 싶은 충동 누르느라 혼나죠. 마음에 드는 읽고 싶은 책 한 권 사서 집으로 오는 버스안에서 이리저리 훑어보며 기대하던 그 설렘을 이제 택배기사님이 대신 제공 제공해 주고 있다는 것ㅎㅎ

cyrus 2020-12-21 11:22   좋아요 0 | URL
책방에 시간을 보내면 하루가 금방 지나갑니다. 하지만 그 하루를 알차게 보냈다는 기분이 들어요. 책방에 다른 손님이 오면 전혀 싫지도 않고, 어색하지도 않아요. 담담 책방지기님이 편안하게 대화를 시작하는 분이라서 이 분이 입을 열면 서로 모르는 손님들끼리 대화를 하게 됩니다. 아주 잠깐이지만 한 공간에서 새로운 인연이 맺어지고, 친밀한 소통이 이루어지죠. ^^

psyche 2020-12-22 07: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따뜻한 느낌의 책방이네요! 동네 책방들이 오래오래 잘 되었으면 좋겠어요. 미국도 동네책방들이 다 죽고 있어서... 동네 책방만이 아니라 오프라인 책방이 다 죽고 있죠. 너무 안타까워요.

Angela 2020-12-22 1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과 사진에서 따뜻한 공간이 느껴져서 한번 가보고 싶네요^^
 



네루다의 우편배달부에 보면 네루다가 마리오에게 ‘공인 우체부 찬가를 들려주는 장면이 나온다(요즘은 우체부보다 집배원이라는 말을 더 자주 쓴다). 작중에서 네루다가 들려준 집배원 찬가의 원곡이 비틀스의 <우체부>’라고 나온다노래가 나오자 저택 안에 있는 네루다의 수집품들이 마치 춤을 신나게 추듯이 움직인다. 마술적 사실주의를 떠올리는 인상 깊은 장면이다

 





 

 













* 안토니오 스카르메타 네루다의 우편배달부(민음사, 2004)

 

 

 시인은 전축으로 발길을 옮기더니 갑자기 행복에 겨워 손가락 하나를 들면서 선언했다.

 “자네에게 줄 아주 특별한 선물 하나를 산티아고에서 가져왔지. 공인 우체부 찬가일세.”

 이 말과 함께 비틀스의 <우체부> 멜로디가 응접실에 퍼졌다. 그러자 뱃머리 장식들이 움찔움찔, 병 속의 돛단배들이 출렁출렁, 아프리카 가면들이 이빨을 으드득으드득, 응접실 돌들이 들썩들썩, 나무에 홈이 쩌억쩌억, 의자의 은 세공이 너울너울, 서까래의 죽은 친구들이 덩실덩실, 오랫동안 꺼져 있던 담뱃대들이 푸우푸우, 배불뚝이 킨차말리 도자기들이 기타를 딩가딩가, 벽을 뒤덮은 벨 에포크 화류계 여인들의 향수가 스멀스멀, 푸른 말이 다그닥다그닥, 휘트먼 시의 고색창연한 기관차가 기적을 울렸다


(77)




하지만 우체부는 정확한 곡명이 아니다. 비틀스의 음악을 정말 좋아하는 독자는 곡명이 틀렸다는 것을 이미 눈치챘을 것이다. 필자는 팝송을 즐겨 듣진 않지만, 집배원 찬가로 알려진 비틀스의 노래가 궁금해서 직접 찾아봤다.








‘Please, Mister(Mr.) Postman’이다. 1963년에 발매된 비틀스의 정규 2집 앨범 <With The Beatles>에 수록된 곡이다. 마리오가 네루다에게 선물로 받은 비틀스 앨범은 2집 앨범일 수 있다.

 

노랫말을 보면 네루다가 왜 이 노래를 집배원 찬가라고 했는지 이해할 수 있다. 노랫말 속에 화자로 나온 남자는 사랑에 빠져 있다. 그는 집배원에게 여자 친구가 자신에게 보낸 편지가 있는지 확인해달라고 애타게 간청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집배원인 마리오가 노랫말 속 남성처럼 사랑에 빠졌다.


사실 ‘Please, Mr. Postman’은 리메이크 곡이다. 원곡은 1961년에 미국의 보컬 그룹 마블레츠(The Marvelettes)가 불렀다. 1974년에 남매 가수인 카펜터스(Carpenters)가 이 노래를 불렀다. 마블레츠과 카펜터스는 이 곡으로 빌보드 차트 1위를 차지했다. 집배원 찬가는 네루다의 수집품들이 살아 움직일 정도로 흥겨운 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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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註釋)은 낱말이나 문장의 뜻을 쉽게 풀이한 글을 말한다. 동서양을 불문하고 옛사람들은 종교 경전에 적힌 모든 내용을 그대로 읽지 않았다. 경전을 공부한 사람들은 책이 귀했던 시대에 살았다. 그들은 특별한 장소(오래된 책들이 보관된 수도원의 도서관)에 가야만 볼 수 있는 책을 어름어름 읽지 않았다. 수준 높은 학자는 책 속에 있는 구절이나 단어의 의미를 보충 설명해줄 수 있는 자신의 견해(저작권이 없는 시대에 살았던 학자들은 다른 책에서 본 내용을 베껴서 쓰기도 했다)를 여백에 적었다. 주석 쓰는 일을 전문적으로 하는 사람을 주석가(exegetist)라고 한다. 경전의 여백에 익명의 주석가들이 남긴 주석들이 빼곡히 채워져 있으면 경전을 공부하는 사람이나 또 다른 익명의 주석가는 주석들을 하나라도 빠지지 않고 읽었다. 대담한 성격의 주석가는 남들이 생각하지 못한 관점으로 경전 구절을 해석한 내용을 주석으로 쓰기도 했다. 다른 사람이 쓴 주석을 비판하기 위해 꼬리에 꼬리를 물듯이 주석을 새로 단 주석가도 있었다.

 

경전 한 권에 적힌 수많은 주석을 모아놓으면 또 한 권의 새로운 책이 된다. 주석만 모아놓은 책은 경전을 치밀하게 읽은 주석가들의 다양한 생각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주석 전집은 경전 공부를 시작하려는 사람들에게 큰 도움을 준다. 그러나 주석가들도 사람인지라 경전의 원문을 오독할 수 있다. 주석가가 경전을 공부하면서 실수로 내용을 잘못 이해했다면 너그러이 봐줄 수 있다. 그러나 지적 우월감에 빠진 채 허술한 설명의 주석을 달아놓거나 특정 종파 및 학자들의 집단을 옹호하기 위해 정직한 비판을 피한 주석가들은 경전의 소중한 여백을 줄어들게 만든 주범이다.

 

주석을 다는 일은 아주 오래전부터 학자들이 선호한 공부법이자 독서법이다. 그렇지만 오늘날에 주석가라는 직업으로 알려진 유명한 사람을 손꼽기 힘들다. 명망 있는 주석가가 있어도 후대 사람들은 그를 학자로 보지 않는다. 어떤 책을 쓴 저자는 유명한 고대 및 중세 사상가를 학자 겸 주석가로 소개했다. 그러나 학자주석가를 서로 무관한 별개의 직업으로 볼 수 없다. 유명한 학자들은 주석을 달면서 공부했다. 후대의 학자들은 책의 여백에 남아 있는 선대의 흔적들을 쫓아 꼼꼼히 공부하고 분석했다.

    

 

 

 

 

 

 

 

 

 

 

 

 

 

 

 

 

* 표정훈 탐서주의자의 책: 책을 탐하는 한 교양인의 문..철 기록(마음산책, 2004)

 

평점: 3점   ★★★   B

    

 

 

도서평론가 겸 번역가 표정훈은 익명의 주석가(탐서주의자의 책에 수록)라는 글에서 책 읽는 사람(독서인)이란 기본적으로 주석가라고 말했다. 그가 새롭게 정의한 주석가는 책 속에 있는 지식과 정보를 모아서 재편집하는 지식 네트워커(knowledge networker). 지식 네트워커는 지금 들어도 생소한 단어다. 하지만 표 씨의 글이 나온 지 십여 년이 지난 지금 누구든지 글을 쓸 수 있는 시대가 되었고, 지식 네트워커라고 불릴 만한 독자들이 생겨났다.

    

 

 

 

 

 

 

 

 

 

 

 

 

 


 

 

 

* 이반 일리치 텍스트의 포도밭: 읽기에 관한 대담하고 근원적인 통찰(현암사, 2016)

    

평점: 4점   ★★★★   A-

 

 

* 에라스무스 외 공부의 고전: 스스로 배우는 방법을 익히기 위하여(유유, 2020)

 

평점: 3점   ★★★   B

    

 

 

12세기에 활동한 수도사이자 신학자인 성 빅토르의 후고(Hugh of Saint Victor)는 성서에 대한 주석을 많이 남겼다. 그는 성서와 철학 등의 학문을 공부하는 수도원 학생들을 위해 디다스칼리콘(Didascalicon, 교육론)이라는 책을 썼다. 사상가 이반 일리치(Ivan Illich)디다스칼리콘을 분석하여 옛사람들이 생각한 독서와 공부의 의미를 추적했다. 그가 쓴 텍스트의 포도밭디다스칼리콘을 재해석한 주석이라 할 수 있다. 암기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후고의 훈계(?)를 받아들이기 힘들지만, 독서와 공부의 기본적인 의미를 확인하여 나태해진 마음에 새기고 싶을 때 공부의 고전에 수록된 디다스칼리콘을 읽으면 된다. 공부의 고전공부를 주제로 한 옛사람들의 글 모음집이다. 이 책에 번역된 디다스칼리콘은 서문과 1, 3부의 내용 일부이다. 그래서 글의 분량이 많지 않다.

 

중세 이탈리아의 신학자 보나벤투라(Bonaventura)는 책을 만드는 사람을 4가지로 정의했다. 그 중에 하나가 주석가다.

 

 

 책을 만드는 데에는 네 가지 길이 있다. 한 가지도 보태거나 바꾸지 않고 다른 사람의 말을 적는 사람이 있는데, 그렇게 하는 사람은 서기(scriptor). 다른 사람의 말을 적으면서 자신의 말이 아니라 하더라도 뭔가 보태는 사람도 있다. 이렇게 하는 사람은 편찬자(compilator)이다. 그리고 다른 사람과 말과 자신의 말을 모두 적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 경우에는 다른 사람의 자료가 지배적이며 그 자신의 말은 설명하기 위한 부록처럼 덧붙인다. 이렇게 하는 사람은 저자라기보다는 주석가(commentator)라고 부른다. 그러나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과 남에게서 나온 것을 모두 쓰되, 자신의 말을 확인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남의 자료를 붙이는 사람은 저자(auctor)라고 부른다.

 

(텍스트의 포도밭163~164)

 

 

네 가지 유형 중에서 내가 선호하는 것은 주석가다. 나는 익명의 독자들에게 쓸모 있는 익명의 주석가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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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0-12-07 15: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 알라딘에 오지 않는 동안 독서에 어느 정도 경지에 오른 사람들이나
읽을 법한 책들을 읽으셨구만.
난 본문 읽기도 벅차서 주석 달린 책은 잘 못 읽겠더라구.
몇 줄 읽다가 번호찾아 주석 읽으면 흐름이 끊기고 시간도 많이 걸려서
결국 읽다 포기하게 돼.
표정훈의 책 오래 전에 읽었는데 없는 걸 보면 누구한테 보내러렸나 보다.ㅠ

cyrus 2020-12-07 19:05   좋아요 1 | URL
책 본문을 주석과 병행해서 읽으면 시간이 오래 걸리긴 해요. 그래서 요즘은 주석을 보지 않은 채 본문을 다 읽고 난 후에 두 번째 독서를 할 때 주석을 읽어요. 이러면 자연스럽게 한 권의 책을 두 번 읽게 되는 거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