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천지의 ‘신’자만 들으면 이젠 신물이 나다 못해 환멸을 느낀다. 그 문제의 종교(사실 ‘종교’라고 부를 수 없는 사이비 단체이다) 때문에 ‘신천지’의 또 다른 의미들이 무색해졌다. ‘신천지’라고 하면 새로운 세상이라든가 1921년과 1964년에 우리나라에서 발행된 잡지 이름을 떠올리지 않는다. 당분간 ‘신천지’는 금기어가 될 것으로 보인다.
* [절판] 박상준 엮음 《토탈 호러 1》 (서울창작, 1993)
‘신천지의 악몽’이라는 제목으로 알려진 외국 단편소설이 있다. 소설 제목이 대구를 초토화한 코로나19를 떠올리게 하지만, 이 소설은 많은 사람이 싫어하는 그 문제 단체와 바이러스와 아무 관련이 없다. 이 소설의 원제는 ‘Student Body’다. ‘Student Body’는 한 대학에 다니는 학생 전체 수를 뜻하는 단어다. 이 소설을 번역한 역자는 지금도 꾸준히 외국 장르문학 소설들을 소개하고 있는 박상준 씨다. 아마도 박상준 씨도 제목을 우리말로 어떻게 옮겨야할지 한참 고민했을 것이다.
소설을 쓴 작가는 미국에 태어난 F. L. 월리스(Floyd Lee Wallace)다. 1950~60년대에 단편소설을 주로 썼으며 ‘Student Body’는 월리스가 작가로 왕성하게 활동하던 시기인 1953년에 발표되었다. 월리스는 국내에 유명하지 않은 작가이지만, 그가 쓴 ‘신천지의 악몽’은 다시 번역되었으면 하는 단편소설 중 하나이다. 이 소설은 이제는 절판되어 ‘희귀 도서’가 된 공포 단편소설 선집인 《토탈 호러》 1권에 수록되어 있다.
소설 제목에 있는 신천지는 지구의 환경과 거의 흡사한 미지의 행성을 뜻한다. 소설에 나오는 지구인들은 우주를 개척하는 기술을 보유하고 있다. 그들은 인류가 살기에 가장 알맞은 행성을 발견하고, 그곳으로 이주한다. 이주민들은 이 행성에 ‘글레이드(Glade: 숲속의 빈터)’라는 이름을 붙여준다.
이주민들이 탄 우주선의 총 지휘자인 해프너(Hafner) 부장은 글레이드를 제2의 지구, 즉 신천지로 만들려고 한다. 이주민들의 신천지 개척은 순조롭게 진행된다. 그러나 이주민들이 해결하지 못한 문제가 있다. 쥐와 닮은 생명체가 우주선에 몰래 들어와 이주민들이 농사를 지어서 수확한 곡식을 먹어 치운다. 우주선에 거주하는 생물학자 다노 마린(Dano Marin)은 못 먹는 게 없는 생명체를 관찰하여 그것에게 ‘식충이(omnivore)’라는 이름을 붙인다. 처음에 로봇 고양이를 우주선에 들여놔 우주선에 들어온 식충이를 퇴치하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전보다 몸집이 더 커진 쥐가 나타나 로봇 고양이를 파괴한다. 이주민들은 한 단계 진화한 식충이들을 절멸하기 위해 사냥을 잘하는 테리어를 데려오지만 효과는 미미하다. 시간이 지날수록 식충이는 아주 빠른 속도로 진화하여 호랑이와 같은 모습으로 변한다.
마린은 식충이의 정체가 ‘옴니멀(omnimal: 전능수)’이며 그 어떤 생명체보다 외부 조건에 적응하면서 빠르게 진화한다고 확신한다. 옴니멀은 ‘무한’을 뜻하는 ‘omn’과 동물을 뜻하는 ‘animal’을 합친 단어다. 옴니멀은 생존을 위해 계속 먹기만 하면서 진화하는 생명체다. 해프너 부장은 무슨 수단을 가리지 않고 옴니멀을 완전히 박멸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마린은 절대로 그들을 멸종시킬 수 없다고 반박한다. 그는 옴니멀이 계속 진화할수록 그들의 생존력까지 높아진다고 주장한다.
해프너와 마린은 또다시 진화한 옴니멀을 목격하는데, 두 사람이 옴니멀의 모습을 확인하는 장면이 나오면서 소설은 끝난다.
그 동물은 천천히 앞으로 나왔다. 옷이라는 것에 대해 학습할 시간이 없었기 때문인지 벌거벗은 채였다. 마찬가지로 무기도 지니고 있지 않았다. 놈은 나무에서 흰색의 커다란 꽃을 꺾더니 평화의 상징으로 조용히 내밀었다.
“어른처럼 보이긴 하지만 내부도 그럴지 궁금하군요. 저 몸속에는 뭐가 있을까요?”
“나는 그의 머리에 뭐가 들어있을지 궁금하다네.”
해프너가 걱정스러운 어조로 받았다.
그놈은 인간을 그대로 빼다 박은 모습을 지니고 있었다.
(《토탈 호러 1》 『신천지의 악몽』, 305쪽)
‘신천지의 악몽’은 외계의 공포를 주제로 한 SF 소설이다. 그러나 반전이 있는 결말은 비현실적이면서도 한편으로는 현실적인 공포를 느끼게 해준다. 외계에 인간과 흡사한 생명체가 있다는 것 자체가 비현실적이다. 하지만 지구의 단독 주인인 것처럼 행세하며 개발과 생존을 위한 탐욕을 멈출 줄 모르는 인류의 행보를 생각한다면 우리를 위협하는 공포의 존재가 무엇인지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된다. 그 공포의 존재가 바로 ‘인간’이라고 부르는 우리 자신이다.
‘신천지의 악몽’의 결말은 열린 결말이다. 인간의 모습으로 진화한 옴니멀은 평화의 상징인 꽃을 내밀어보지만, 이 장면 하나만 가지고 행복한 미래의 결말을 상상할 수 없다. 해프너와 다린이 서로 대화하는 장면을 보면 그들이 여전히 옴니멀을 경계하고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들은 옴니멀을 자신들의 상식에 벗어난 존재로 인식하고 있다. 또 자신들보다 더 뛰어난 수준을 가질 정도로 거듭 진화하는 옴니멀을 달갑게 여기지 않을 것이다. 그들에게 옴니멀은 두려운 존재이며 자신들의 생존을 위해서 해치워야 할 적이다. 따라서 지구에서 온 이주민과 글레이드의 토착민인 옴니멀 간의 살육전을 예고하는 슬픈 결말을 생각할 수 있다. 생존을 둘러싼 이주민과 토착민의 갈등 양상으로 전개되는 ‘신천지에서의 악몽’은 끝나지 않았다.
* 맬서스 《인구론》 (동서문화사, 2016)
* 맬서스 《인구론》 (동서문화사, 2011)
‘신천지의 악몽’은 단순히 공상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소설이 아니다. 이야기를 잘 살펴보면 다윈(Darwin)의 진화론과 맬서스(Malthus)의 인구론이 적절히 반영되어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다윈은 젊은 시절에 맬서스의 저서 《인구론》을 읽었다. 그는 맬서스의 주장에 매료되었다. 맬서스는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고, 식량은 산술급수적으로 증가”한다고 주장하면서 인구의 과잉 증가가 빈곤과 인류의 멸망을 초래한다고 경고했다. 맬서스의 주장에 영감을 받은 다윈은 모든 종(種)은 제한된 식량을 차지하기 위해 환경에 적응하면서 진화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다윈의 진화론에 따르면 늘 배가 고픈 옴니멀은 이주민들의 식량을 차지하기 위해 엄청난 속도로 진화한다.
맬서스가 말한 인구론의 밑바탕에는 생존 투쟁에 밀린 가난한 사람이나 사회적 약자는 도태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깔려 있다. 이러한 생각은 우생학을 탄생할 수 있는 실마리가 됐다. 유럽에서 시작된 우생학은 20세기 초에 미국으로 건너가 대중의 인기를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우생학 관련 정책을 세계 최초로 합법화한 국가는 미국이다. 우생학 정책의 영향을 안 받을 수가 없는 사회에서 태어난 월리스가 우생학에 대한 비판적인 관점을 드러내려고 ‘신천지의 악몽’을 쓴 건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신천지는 진화론을 극단적으로 변형시킨 우생학이 지배한 암울한 세상, 즉 디스토피아(dystopia)에 가깝다. 그래서 소설의 열린 결말은 한층 암울하고 비극적으로 느껴진다.
* 데이비드 스토브 《다윈의 동화》 (영림카디널, 2008)
다윈의 진화론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모든 종이 생존을 위해 투쟁한다는 다윈의 생각을 불편하게 여긴다. 그들이 보기에 다윈은 인간을 그저 생존하기 위해 살아가는 동물로 취급한다. 그래서 맬서스와 다윈의 생각이 반영된 ‘신천지의 악몽’을 보게 되면 찝찝한 기분을 지우지 못하는 독자들이 있을 것이다. 이 소설에 부제를 정할 수 있다면, 나는 ‘다윈의 잔혹 동화’로 짓고 싶다. 호주의 철학자 데이비드 스토브(David Stove)가 쓴 《다윈의 동화》는 자연의 모든 이치를 설명할 수 있는 진리가 되려고 하는 다윈의 진화론을 비판한 책이다. 저자는 반 계몽주의자인 맬서스의 주장에 영감을 받아 탄생한 다윈의 진화론이 계몽주의자들의 지적 무기가 된 사실을 꼬집으면서, ‘적자생존’을 지나치게 강조한 진화론자들이 우생학을 만든 역사까지 지적한다. 저자가 《종의 기원》을 불태워야 할 책이라면서 다윈을 과격하게 비난하고 있지만, 그는 창조론자가 아니다. 그는 진화론이 자기중심적인 오만한 도그마(dogma)가 될 수 있다고 경고한다.
* [품절] 마크 리들리 《HOW TO READ 다윈》 (웅진지식하우스, 2007)
* 찰스 다윈 《종의 기원》 (사이언스북스, 2019)
다린은 옴니멀이 글레이드뿐만 아니라 지구와 여러 행성에도 살고 있을지 모른다고 추측한다. 그만큼 옴니멀은 외부 환경에 적응해서 진화하고 번식할 수 있는 능력이 뛰어나다. 이를 ‘형질 분기(divergence of character)’라고 한다. 다윈은 변이가 큰 종일수록 다양한 장소에 적응하면서 살 수 있는 새로운 종으로 번식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형질 분기는 한 종에 다양한 형질을 가진 개체들이 늘어나면서 확산되는 과정을 설명하기 위해 다윈이 제시한 개념이다. 형질 분기에 대한 설명은 《종의 기원》 4장(제목은 ‘자연 선택’)에 나온다.
《HOW TO READ 다윈》은 형질 분기를 ‘형질의 분산’으로 소개했다. 그런데 그 단어의 출처가 잘못되었다. 책 31쪽에 나오는데, 출처는 ‘《종의 기원》, 생존 경쟁’이라고 되어 있다. ‘생존 경쟁’은 3장 제목이다. 1859년에 나온 《종의 기원》 초판을 번역한 책(장대익 번역, 최재천 감수)에서는 ‘생존 투쟁’으로 되어 있다. 이 책의 역자로 참여한 장대익 교수는 다윈의 진화론을 제대로 알리기 위해 단어 하나하나에 신중히 검토하면서 번역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