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루레이] 풀 메탈 자켓
스탠리 큐브릭 감독 / 워너브라더스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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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대받지 못한 전쟁영화

 

군대를 제대한 대한민국 남성이라면 누구나 군대에서 정신교육을 받아 봤을 것이다. 모든 것이 제한된 ‘군대’라는 집합 공간 안에서 생활하고 또한 목적의식조차 불분명한 20대 초반의 혈기왕성한 장병들을 통제하기 위해선 여러 가지 방법이 필요하다. 매주 토요일 오전에는 정신교육 시간이라고 하여 전 부대원들이 아침부터 점심 식사 시간까지 생활관(예전에는 ‘내무실’, ‘내무반’이라는 용어로 부르기도 했음)에 비디오를 시청한다. 국군 방송에서 방송되는 프로그램의 형식은 주로 국방부나 각 제대의 고위층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들의 강연이었다. 힘들게 임무를 수행중인 현역 병사들이 강연을 듣고 군인으로서의 자부심을 느끼고 목적의식을 가질 수 있도록 강연을 통해 메시지를 주는 것이다. 이 강연이 끝나고 난 뒤에는 항상 국군을 홍보하는 선전물이 나온다. 선전물에도 역시 우리 국군의 우수성과 장점들이 주를 이룬다.

 

그리고 1년 군 생활 중에 상반기와 하반기, 둘로 나누어 1주일씩 집중적으로 정신교육만 진행하는 집중정신교육기간이 있다. 이 기간에도 정신교육의 날과 비슷한 프로그램들로 진행된다. 예전 정신교육의 날에서 보던 국군 홍보물을 다시 보게 되고 가끔은 전쟁영화도 단체로 보게 된다. 내가 복무하던 사단 부대에서는 집중정신교육기간만 되면 꼭 <밴드 오브 브라더스>를 틀어주곤 했다. 가끔 <블랙 호크 다운><라이언 일병 구하기><에너미 엣 더 게이트><진주만> 등과 같은 소위 전쟁영화 베스트 명작들도 틀어줄 때도 있었다.

 

그런데 이 영화 한 작품 역시 역대 전쟁영화의 고전으로 꼽히면서도 집중정신교육 시청자료로서 초대받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면 바로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풀 메탈 자켓>이다.  

 

 

 

 순진한 뚱보는 어떻게 살인기계로 변하게 되는가 

 

 

 

 

아직 군대의 무서운 맛(?)을 몰랐던 순박한 청년 로렌스는...

 

 

이 영화는 특이하게도 전반부와 후반부가 뚜렷하게 갈리는 영화다. 전쟁영화라면 전선의 한가운데에 뛰어든 병사들의 장면이 많이 차지하는 법이다. 그러나 <풀 메탈 자켓>은 전선에 들어가기 전의 시간적 과정부터 시작된다. 전동 면도기 앞에 힘없이 풍성한 머리카락이 뚝뚝 바닥으로 떨어져 빡빡머리가 되어가는 사내들의 얼굴들이 각각 한 컷씩 등장한다. 전반부는 훈련소에서 청년들이 살인 병기로 개조되는 과정을 그렸고, 후반부는 베트남에서의 전쟁을 다루고 있다. 이런 의도성이 엿보이는 단절적인 내러티브 구조가 서있긴 하지만 이 영화는 큐브릭의 다른 영화들 치고는 평이한 수준에 속한 편이다. 갖가지 복합적인 연출 테크닉들이 차곡차곡 쌓아져 커다란 효과를 노리는 큐브릭의 특기를 이 영화에선 그다지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다만 군대와 전쟁 그 자체를 말하려고 할 뿐이다.

 

 

 

 

자기 자신을 제어하지 못하는 무시무시한 '살인 병기'로 변하고 맙니다...

 

 

동작이 굼뜨고 아둔한 ‘뚱보’ 신병 로렌스는 군대라는 단체 속으로 들어가는 순간 강박에 시달리게 된다. 그는 교관 하트먼 중사의 ‘밥’이다. 사격은커녕 총기 분해조차 제대로 못하는 파일을 하트먼 중사는 모욕적으로 대한다. 로렌스 때문에 단체 기합을 계속 받아 화가 난 소대원들이 어느 날 밤 잠자는 그를 집단 폭행한다. 결국 정신이 황폐해진 로렌스는 신병훈련소를 나가기 전날 밤 하트먼 중사를 소총으로 살해하고 자살한다.

 

큐브릭은 전반부에서 왜 로렌스가 하트먼 중사를 죽었는지를 이야기한다. 평면적인 해석일 수도 있지만, 결국은 군대 제도라는 것이 얼마나 모순적이고 비인간적인지를 증명하고 있다. 무조건적 연대책임과 인권 무시, 신체 혹사를 통해 바른 정신을 배양한다는 구시대적 유물론. 천재적으로 냉정한 탐구자의 눈에는 세상에서 가장 납득할 수 없는 곳이었을 것이다.

 

 

 

 

 군대라는 특수한 공간에서만 느낄 수 있는 무시무시한 강박증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다보면 군대에 관한 화제에서 벗어 날 수가 없다. 나 또한 군대를 다녀왔고 주변엔 온통 군대를 갈 사람이거나 군대에 가 있는 사람, 군대를 갔다 온 사람들 천지 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남자 셋이 모이면 군대 얘기가 나오게 되는데(초면이면 더더욱) 남자들이 만들어 내는 내무반, 얼차려, 구타, 탈영 이야기를 질리도록 하고 또 하게 된다. 이 땅은 과거에 전쟁이 있었고 지금은 반으로 갈려 핵이 있어 없어 쏠까 말까하고 앉았으니 의무가 된 건 당연하지만, 이 의무에는 신성함이 곁들여 있으니까 구실 좋게 애국자들이 되는 게 아니겠나. 남자는 군대 다녀와야 사람 된다는 거짓말이 유효한 사회라서 인지 몰라도, 군대라는 집단이 가진 폭력성을 이야기 하는 사람이 참 드물다. 우리는 흔히 군대 무용담을 술안주 삼아 이야기를 시작하게 되면 과거 고통스러웠던 군대 단체 기압이라거나 선임병한테 가혹 행위 당하던 시절들의 일화가 어느새 즐거운 추억담으로 변주된다. 그 때 느꼈을 강박의 경험들이 아무 일도 아니라는듯이 말이다. 

 

 

 

 

 

 

 

영화 속 인물들이 드러나는 강박 증상은 흡사 이 나라를 지키고 있는 군인들을 연상시킨다. 그래서 영화를 보는 내내 무언가 비위가 거슬리면서도 찝찝한 기분을 지울 수가 없다. 충성스러워야 하는 강박, 신성해야만 하는 강박, 그런데 두들겨 맞아버리니 강박, 그래서 그만큼 두들겨 패줘야 하는 게 강박, 그걸 모른 척 해야 하는 강박, 함부로 말해서도 안 되는 강박, 그래서 무사히 전역하고야 말겠다는 강박. 기어코 미쳐버린 군인이 할 수 있는 거라곤 자살, 또는 자살이 아닌데도 자살이여야만 하는 자살, 이것 또한 강박.

 

영화를 본 나의 소감은 ‘아니, 저런 걸 갖고 뭘 저러나…’였다. 영화에서 ‘고문관’ 로렌스가 받은 육체적 정신적 고통의 수준은 별것 아니었다. 중학교 때 이미 원산폭격을 경험했다. 신병훈련소에서 구타는 없었지만 영화 속 파일이 듣던 욕설에 버금가는 폭언도 들어봤다. 그런데 어느 순간 섬뜩해졌다. 일상의 폭력에 너무 관대해져 버린 나 자신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나도 한때 그 누구도 말할 수 없었던 강박증을 마음의 관물대 속으로 억지로 짱박혀 둔 적이 있었는데. (짱박히다: ‘숨다’를 나타내는 군대 비속어)

 

 

 

 승자도 패자도 없는, 상처의 포탄 자국만 남아 있는 전쟁터 

 

 

 

 

 

전반부의 훈련병 조커는 후반부에서 베트남 파병군의 기자가 된다. 베트남 휴(hue) 시에서 훈련소 동기를 만나게 된 조커는 그들과 동행하지만, 베트콩의 습격을 받게 된다. 후반부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은 바로 이 휴 시에서의 전투이다. 전쟁영화 마니아라면 정말 흥미롭게 볼 수 있는 전쟁 장면이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하지만 적들을 소탕하는 인물들을 통해 느끼는 일종의 희열감이라든가 적의 눈을 피하면서 가까스로 목숨을 부지하는 과정을 보면서 느껴지는 긴박감 등은 이 영화에서 좀처럼 느낄 수가 없다. 영화 속 병사들은 저돌적으로 적을 소탕하는 것도 아니다. 언제 자신의 심장에 박힐지도 모르는 저격수의 총알 하나에 두려워하지 않고 진격하려는 전쟁 영웅도 없다.

 

부득이하게 동료가 한 명씩 ‘보이지 않는 적’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하면서 전략을 펼치기 위한 판단력이 흔들릴 정도로 혼란에 빠지게 된다. 이로 인해 조커의 일행은 무려 3명이 희생당하지만, 알고 보니 보이지 않는 적은 어린 소녀 저격수 한명 뿐이었다. 저격수를 해치우는데 성공하지만 남는 것은 승리의 쾌감도, 복수의 만족감도 아니다. 이도저도 할 수 없는 쓴맛뿐이 남아 전쟁의 딜레마를 표현하고 있다. 이런 상황 설정을 통해 큐브릭은 전쟁에 영웅이란 없다고, 그들은 결코 전쟁에 승리하지 못한다고 말한다.

 

 

 

 

영화 제목인 ‘풀 메탈 자켓’은 원래 M16 실탄의 탄피에 대한 애칭이지만(영화 원제는 ‘메탈 자켓’이지만) 이 영화에서는 전쟁 앞에서 ‘풀 메탈화’하는 인간의 행동학을 지칭하고 있다. 본부로부터 낙오된 부대가 베트남 전장에서 행하는 자연발생적 전투에서 정점에 달한다. 동료애, 용기, 자존심 같은 가장 인간적인 감정은 배제된 채 ‘로봇신체’의 실질적인 에너지로 아이러니하게 작동함을 보여주는 일종의 사고실험이다. 동료의 어처구니없는 죽음, 자연히 솟아오르는 복수심과 인간적 자존심은 나중에 알고 보니 연약한 베트남 소녀가 저격수였다는 사실이 밝혀질 때까지 병사들을 광적 전투로 몰고 간다.

 

 

 

 공포의 전쟁터 속에서 우리의 인간성(humanity)은 살아남을 수 있을까?

 

큐브릭의 손에 그려진 군대와 전쟁은 정말 그 자체로 공포로 다가오는 것이다. 군대 내부에서 인간이 아닌, 시계태엽 장치 속의 부품과도 같은 신세가 된 인간들은 존엄성을 잃었고 합법적 대량살상을 허용하는 전쟁 속에서 망가졌다. 그래서 이 영화는 전쟁의 실상에 대하여 더욱 차가워진 탐구자 스탠리 큐브릭의 시선이 느껴진다.

 

<풀 메탈 자켓>은 베트남 전쟁의 씁쓸함을 그린 전쟁영화다. 그러나 마그리트식 이름 붙이기로 이 영화를 정의한다면 이것은 전쟁영화가 아니다. 평범한 청년들을 전쟁도구로 만드는 과정이나 미군 헬기에서 베트남 민간인들을 향해 재미있다는 듯이 마구 기관총을 난사하는 장면 등에서 전쟁을 비판하는 대개의 다른 전쟁영화와 언뜻 흡사해 보인다. 하지만 이것을 뛰어넘어 씁쓸한 유머까지 던지며 전쟁과 군대를 마구 조롱하고 있는 스탠리 큐브릭을 발견할 수 있다. 포탄 파편이 난무하고 선혈이 흩뿌리는 대규모 전쟁 장면 뒤에 대단한 승전의 감동을 원하는 사람이라면 이 영화를 추천하고 싶지는 않다. 특히 <플래툰>보다는 좀 더 최신작에 가깝다고 할 수 있는 <라이언 일병 구하기><블랙 호크 다운>에 찬사를 마다하지 않으며 군대 정신 교육 단골 영상으로 <밴드 오브 브라더스>를 기억하는 또래 젊은 친구들에게는 말이다.

 

그런데!  진짜 한반도에 전쟁이 일어난다면 전쟁영화 속 멋진 군인 주인공처럼 멋지게 적군들을 해치우고 폼나게 담배 한 대를 피우면서 쉴 수 있을까?  TV 브라운관 속 전쟁처럼 실제 전쟁도 그렇게 될 수 있을까?  전쟁은 영화가 아닌 엄연한 현실이다. 어떤 이념도 구호도 허구일 뿐이다.

 

당해보지 않고는 젊은 세대는 전쟁이라는 단어 두 글자를 함부로 말할 수 없으리라. 그 공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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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LE - Single Spark (2disc)
박광수 감독, 문성근 외 출연 / 씨넥서스 / 200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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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 '노사관계론' 수업시간에는 노사관계의 현실적인 문제와 관련한 시청 자료로 찰리 채플린의 「모던 타임스」에 이어서 박광수 감독의 1995년 작「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을 보게 되었다. 전태일. 그 이름 석 자는 수없이 많이 들어봤어도 짧은 인생을 자신과 함께 했던 노동법 책과 함께 화염에 온 몸을 던졌던 그 유명한 죽음 이외에는 정확히 그의 삶에 대해서 몰랐다. 故 조영래 변호사가 쓴 『전태일 평전』도 한 번이라도 읽은 적도 없었다.

 

지금 내가 수학하고 있는 '노사관계론' 수업은 경영학과 3학년 전공과목이다. 올해 대학교 3학년이라면 10학번, 즉 1991년에 태어났다. 영화를 시청하기에 앞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노사관계론' 수업을 펼쳐지고 있는 강의실 안에 있는 10학번 중에 '전태일'이라는 이름을 알고 있는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있을까?   

 

2년 전에 전태일 사망 30주년을 맞아 그의 삶, 그리고 열악한 노동현실 속에 살아가는 노동자들의 비참한 현실을 분신이라는 극단적인 죽음으로 고발하고자 했던 뜨겁기만한 족적들을 다시 한 번 기리기 위해서 본격적으로 조명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때마침 비정규직 문제가 사회적인 문제로 부각되는 시기라서 전태일의 정신이 절실히 필요했다.

 

하지만 그가 우리에게 알리고자 했던 노동문제에 대한 현실고발은 그가 죽은 지 30년이 지난 지금도 유효하다는 것은 여전히 노동자들의 삶이 개선되지 않았다는 것을 반증해주고 있다. 산업화 시대가 진행됨으로써 생겨나는 물질만능주의 팽배와 빈부 격차의 문제를 다룬 조세희의 연작소설 『난쏘공』이 지금까지도 많은 판매부수를 기록할 정도로 읽혀지는 것처럼 전태일이 고발하고자 했던 현실은 여전히 진행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전태일이라는 인물은 故 조영래 변호사의『전태일 평전』 출간, 1995년에 그의 일대기를 영화화한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그리고 최근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그의 사망 30주년에 기념하기 위해 대대적으로 조명받게 된 2010년을 제외하고는 '전태일'의 삶과 업적에 대해서 대중적으로 깊이 공감할 수 있을 정도로 부각받은 적은 없었다. 단지 '비정규직'이나 극단적으로 파국에 치닫는 노사투쟁 관련 문제가 불거질 때면 이 세상에 없는 그의 이름을 빌어 노사관계 문제의 심각성을 부각시켜주는 데 그치는 하나의 상징으로만 남게 되었다. 정작 자신의 몸을 불사르면서까지 절규에 가까운 현실고발적인 그의 목소리는 제대로 들려주지 않은 채 말이다.      

 

 

 

 

 

 

 

'전태일'에 대해서도 모르더라도 이 영화를 본 관객들에게 제일 기억 남는 장면을 꼽는 질문을 하게 된다면 이구동성 전태일이 분신하게 되는 영화 마지막 장면일 것이다. 하지만 관객들은 온 몸에 화염에 휩싸이는 전태일을 목격했을 뿐, 전태일이 그 당시 자본가들 그리고 노동문제에 무관심한 채 이 영화를 관람하고 있는 무지의 관객들에게 향하는 규탄의 목소리, 더 나아가 그가 왜 극단적인 결심을 하게 되는 이전의 과정에 대해서 자연스럽게 잊혀져 버리게 된다.

 

1970년 11월 13일 오후 1시 30분 청계천 평화시장 한가운데서 22살의 전태일은 자신의 몸에 불을 붙이고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근로기준법을 보장하라"를 외치며 시장 한가운데 쓰러졌다. 병원으로 옮겨진 청년은 다음날 숨을 거두고 말았다. 모든 것은 그 사람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 날, 전태일이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며 자신의 몸을 불사르기 전까지 대한민국에 '노동자'는 없었다. 주인이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 말을 듣는 '노예'가 있었고, 하루도 쉬지 않고 일하는 '기계'가 있었을 뿐이다. 전태일이 '불꽃'이 된 순간 모든 게 변했다.

 

1970년은 박정희 정권이 개발이란 이름으로 경제성장에 박차를 가하고 있을 때였다. 표면적으로는 개발에 따른 경제성장이 눈에 보였다. 하지만 개발에 따른 경제성장은 많은 노동자들에 인간적 삶을 담보로 진행되었던 보이지 않는 착취에 의한 성장이었다. 전태일의 분신자살은 당시 암묵적으로 이루어 졌던 노동자들에 대한 노동력 착취와 기본적인 권리마저 박탈당한 노동현실을 죽음이란 수단으로 고발했던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당시의 청계천에서는 닭장 같은 좁은 공간에서 열서너 살의 어린 여공들이 졸음을 참아가며 14시간 이상 혹독한 노동을 강요당하고 있었다. 한참 성장할 나이에 여공들이 허리 한 번 제대로 펼 수 없는 작업장에서의 일한 대가는 고작 50원뿐이었다. 돈을 벌어 공부를 하고 싶어했던 전태일의 가슴엔 어린 여공들의 현실이 언제나 남아 있었다. 자신의 차비를 털어 점심도 변변히 먹지 못하는 여공들을 위해 풀빵을 사주고 청계천에서 미아리까지 걸어 다녔던 청년이었다.

 

어느 날 피를 토하며 쓰러져 그냥 버려지는 여공을 보면서 사회적 모순에 눈을 뜬다. 영화 속에서는 비록 짧게 지나갔지만 전태일은 피를 토하면서 몸이 망가질 때로 망가져버린 자신의 처지에 비탄한다. 특히 양손에 검붉은 핏덩어리를 씻어내지 못할 정도로 공장 내 수도시설마저 갖춰지지 않은 현실 앞에서 절망에 찬 울음을 터뜨리게 된다. 이러한 소녀의 절망을 몰래 훔쳐보는 전태일의 장면은 그가 노동 개선 문제에 본격적으로 뛰어들게 되는 중요한 극적인 장면일 수도 있는 부분이었다.  

 

청계천 노동현장에 노동 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을 하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이다. 그는 '근로기준법'의 존재를 알게 되면서 법적으로 자신들의 노동시간과 휴일 시간, 건강 지침이 마련돼 있다는 '당연한' 사실을 알게 된다. 그는 어렵사리 구한 근로기준법 책을 밤새 읽고 또 읽었다. 제대로 공부를 해본 적이 거의 없어 밤새 읽어도 한 페이지를 넘기기가 쉽지 않았지만 근로기준법 조문을 해석하는 게 유일한 하루의 낙이었다. 이후 생각이 맞는 재단사를 모아 바보회를 결성하기도 하고, 노동청에 건의를 하며 노동 환경 개선을 위한 노력을 이어나가지만 현실의 벽에 부딪힌다. 사업장 안에 근로기준법이 제대로 이행되지 않는다며 노동청과 신문사를 찾아가지만 전태일과 청계천의 노동자들은 그들의 관심 밖이었다. 결국 오랜 고민 끝에 분신이란 극단적 방법을 통해서 당시 인간다운 대접도 못 받는 노동자들에 현실을 고발하기로 결심하게 된다.

   

현재의 시점에서 돌아보면 70년대의 노동자들은 성장의 결과에 대한 분배 및 재분배에서도 정당한 수혜를 받지 못했으며, 동등한 인간으로서의 인격적 대우 또한 제대로 받지 못했다. 이렇듯 전태일의 외침은 바로 산업화의 위용에 가려지고 억눌려온 이들의 목소리를 대변했으며, 현실이 참혹했던 만큼 그 절규에 담긴 아픔과 공감, 그리고 설득력 또한 결코 작지 않았다. 전태일이 외쳤던 '8시간 노동'과 '휴일 보장'은, 일하고 또 일해야 했던 당시 노동자들의 최소한의 요구였다. 노동운동가이기에 앞서 사람답고자 했던 한 인간의 '인간선언'이었다.

 

하지만 아직도 수많은 노동자들이 부당한 노동을 강요당하고 있고 또 노동할 수 있는 권리마저 박탈당하고 있다. 물론 노동환경은 달라졌다. 국민소득이 오른 만큼 노동자의 임금은 올랐다. 적어도 배를 곯는 사람은 대부분 사라졌다. '보릿고개'는 이제 전설이 되었다. 살인적인 장시간 노동도 완화됐다. 근로기준법이 부분적으로 정비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허울 뒤에 숨겨진 어두운 그림자는 짙다. 인간에 대한 존중과 배려는 한층 각박해졌다. 해마다 수많은 노동자들이 거리로 나와 인간답게 살고 싶다고 외치고 있지만 현실은 힘없는 사람들이 살아가기 더 힘든 세상이다. 전태일이 우리에게 외치고자 했던 그 목소리를 기억해두는 것이 중요하다. '부유한한 환경에서 물질적 도구로 전락한' 노동자들의 닿지 않는 외침을 온몸으로 불태운 그의 비장한 투쟁은, 비장해야 할 순간에 더없이 온순한 우리들에게 수많은 메시지를 남긴다. 비록 그의 생생한 육성이 담긴 목소리를 들을 순 없지만 이 영화를 통해서라도 대중들이 '전태일' 이름 석 자 그리고 그의 강렬했던 죽음보다는 그가 우리에게 외쳤던 그 목소리를 기억해주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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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2-05-08 15:52   좋아요 0 | URL
글을 읽다보니 소시적에 보았던 <전태일 평전>의 내용들이 생각이 납니다.(영화는 안봤지만요.) 최근에 전태일의 어머님 이소선 여사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어머니>라는 영화도 나왔었지요. 이제는 전태일도 그 어머님도 이 세상에 없습니다만...

cyrus 2012-05-10 01:06   좋아요 0 | URL
영화를 보고난 뒤에 <전태일 평전>을 한 번 읽어보고 싶었어요,
요즘 과제하느라 책 읽을 시간이 부족해서 다음으로 미뤘지만요, ^^;;

꽃도둑 2012-05-10 15:03   좋아요 0 | URL
전태일 평전 읽고 진짜 많이 아주 많이 울었던 기억이 납니다...
영화는 보지 못했지만...암튼 책 내용은 너무 아팠어요..ㅡ.ㅡ

cyrus 2012-05-12 21:29   좋아요 0 | URL
전태일 평전도 꼭 읽어야겠군ㅇ. 역시 이 책을 읽어보신 분들이
꽤 많으시네요. 사실 영화만으로 전태일의 온전한 삶을 알기에는
부족한 감이 들었거든요. 평전 꼭 읽어봐야겠어요 ^^
 
찰리 채플린 - 모던 타임즈 - [할인행사]
찰리 채플린 감독, 찰리 채플린 외 출연 / 워너브라더스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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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학교에 듣고 있는 경영학 수업 중에 '노사관계론'이라는 과목을 수강하고 있는 중이다. 말 그래도 노동자와 자본가 사이의 관계에서 비롯된 사회문제에 대해서 공부하는 것이다. 특히 '노사관계론' 과목은 이번 학기에 들어서 수강신청한 과목 중에서 제일 마음에 든다. 비록 담당교수님이 점수평가하는데 있어서 인색하다는 평이 있지만 그래도 지금 발생하고 있는 노사관계 문제에 대해서 제대로 공부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접하는 것만이라도 만족한다. 무엇보다도 이 수업이 좋은 점은 수업방식에 있다. 노사관계 문제에 있어서 약소의 힘을 가진 노동자보다는 오히려 경영가들에게 손을 들어주는 데 치우쳐져 있는 교과서 위주의 수업보다는 경영가와 노동자, 타협과 갈등으로 이어져 있는 두 관계에 비롯되는 문제를 균형적인 관점으로 볼 수 있도록 강조하고 있다. 말 그대로 노동자의 입장에서도 사회현상의 문제를 바라보고, 최근에 일어나고 있는 사회적 흐름을 파악하고 분석하는 방식으로 학습중점으로 두고 있다.

 

며칠 전에 산업사회의 문제점이 노동자들에게 미치는 영향을 알아보기 위해서 그 유명한 고전영화 찰리 채플린의 [모던 타임즈]를 시청하게 되었다. 이름만 들어봤던 명작을 이 수업을 통해서 보게 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그것도 두 시간동안 그 영화 한 편, 풀버젼을 보게 되었다! 유명한 영화를 본 것도 좋았지만 수업 두 시간을 영화시청으로 때울 수 있어서 무척 좋았다.

 

 

 

 

 

 

 

 

컨베이어벨트 앞에서 하루 종일 나사를 조이는 일을 하는 공장 노동자 찰리. 그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공장 사장의 감시를 당하며 나사를 조인다. 심지어 그에게는 담배를 피울 여유도 없다. 몰래 담배 한 개비를 피우기 위해서 입에 문 순간, 공장 곳곳에 설치된 거대한 화면에서 사장이 등장하여 담배 한 개비 피는 것마저도 게으름으로 생각하여 크게 호통을 친다. 그리고 얼른 다시 컨베이어벨트 작업장으로 갈 것을 명령한다. 이러한 작업환경에서 살게 되다보니 찰리의 직업정신은 어느새 비정상적인 직업병이 되었다. 찰리 본인 스스로 절제하지 못할 정도로 나사와 닮은 모든 것들을 보이는 족족 조이려 달려든다. 심지어 중년 여성의 앞섶에 있는 단추를 보고도 연장을 들고 달려들어 된통 혼나고, 톱니바퀴에 빨려들어 가서까지도 나사를 조이려는 행동을 멈추지 않는다. 결국 그에게 돌아온 것은 해고 통지서다. 그리고 그는 신경쇠약증에 걸려 병원에 입원하게 된다. 공장은 찰리가 컨베이어벨트 노동에 투입하는 순간부터 인간 취급을 하지 않았다. 공장에 해고되는 순간까지도 일만 죽어라 하는 공장 속 톱니바퀴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이 영화에서 노동을 비인간화하는 원흉으로 지목된 생산 방식은 '자동차왕' 헨리 포드에 의해 설립된 1913년 T모델 자동차를 싼 값에 쏟아낼 수 있게 해준 바로 그 발명품이다. 일반적으로 '포드'라는 이름만 들으면 자동차를 만든 위대한 발명가로만 알고 있다. 하지만 그가 지금까지 자동차 산업을 주도한 개척자로 알려지게 된 것은 자신이 창안한 생산 방식 덕분이다. 포드 자동차는 일관된 생산 방식, 즉 '포디즘'(Fordism)으로 현대사회의 물질적 풍요를 가져다준 대량생산체제의 창조주이다. 오랜 결핍의 시대를 살았던 세상사람들에게 포드주의에 의한 대량생산은 신이 내린 축복이었다.

 

그러나 포디즘의 등장은 '인간 없는 노동'을 만들었다. 엄격한 노동규율과 통제를 요구했다. 노동자의 동작을 23개의 동작으로 쪼개서 각각의 기본동작에 소요되는 시간과 에너지를 계산해 직무관리를 하고 노동자의 동선을 직선화하기까지 했다. 이런 방식이 있었기에 공장주들은 노동자 개개인의 행동 하나하나 면밀히 감시할 수 있었다. 이런 감시의 눈 속에서 노동자들은 제대로 인간으로서의 삶을 보장받지 못했고 그저 공장 속의 '기계'가 되어야만했다.

 

 

어찌 보면 [모던 타임즈]라는 영화는 공장 실직자이며 떠돌이 찰리가 어떻게 해서 부조리한 산업사회 속에서 자신만의 행복을 찾아가는 보여주고 있는 삶의 여정을 보여주고 있다. 아무래도 '모던 타임스'라고 한다면 우리의 주인공이 거대한 수레바퀴에 빨려들어가는 장면이 제일 먼저 떠오르게 되다보니 이 영화를 대량생산에 눈이 먼 현대 산업사회의 문제점을 고발하는 문제적 영화로만 인식하게 된다.

 

그러나 [모던 타임즈]의 백미는 영화를 통해 고발하고자 하는 산업사회의 문제점을 희화화하는 장면만 있는 건 아니다. 영화 속 주인공 찰리가 인간의 삶을 병들게 만드는 산업사회 속에서 어떻게 행복과 자유를 찾아가기 위한 고군분투의 과정 역시 이 영화에서 눈여겨 볼 만한 핵심적인 줄거리이자 영화 전반을 이루고 있는 장면이다.

 

정신병원에 빠져나와 떠돌이가 된 찰리는 얼떨결에 사회주의와 관련된 시위 주동자로 몰려 감옥에 갇히고 만다. 하지만 그 곳은 찰리에게 뜻밖의 행운을 선사해주었다. 찰리는 탈옥수를 막는 공로로 한순간에 모범수가 되어 부족할 것 없는 감옥 생활을 보내게 된 것이다. 그 공로 덕분에 찰리는 모범수로 석방되는 동시에 감옥소장의 추천서 한 장으로 인해 어디든지 안정된 일자리에 취업할 수 있는 보장을 받게 된다. 그러나 감옥 밖의 도시는 찰리에게는 불편함만 가져다 주었다. 찰리의 능력에 맞는 일자리도 없거니와 작업하는 데 조금만 실수해도 쓸모 없는 노동력으로 치부하는 현실은 어디로 튈지도 모르는 자유분방한 성격의 찰리의 숨통을 죌 뿐이었다. 찰리는 각박한 현실보다 감옥소 생활이 더 낫다고 생각해 일부러 가게에 있는 사과를 훔치려 한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범죄자가 되어서 감옥에 들어가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러다가 우연히 빵을 훔치다가 적발된 소녀를 만나게 되어 자신이 빵을 훔친 죄를 뒤집어 씌우게 된다.

 

그 이후로 찰리와 소녀의 운명적인 만남이 시작된다. 우여곡절 끝에 찰리는 백화점 경비로 취직을 하게 되지만 강도가 된 예전의 공장 동료와 함께 백화점에 진열된 술을 마시는 바람에 또다시 실업자 신세가 되고 만다. 무일푼 떠돌이 신세가 된 찰리와 소녀는 화려한 집에서 부부가 나오는 것을 보고 "우리는 언제 저런 집을 장만할 수 있을까?" 하고 한탄한다. 채플린과 소녀가 서로 행복한 미래를 꿈꾸지만 실상은 참담하기 짝이 없다. 개인적으로 이 장면은 애틋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씁쓸했다.

 

두 사람의 모습은 사랑의 행복 그리고 안정된 직장과 집, 이 세 가지의 소원을 꿈꾸지만 정작 현실에서는 이루지 못하는 오늘날 젋은 세대들의 비애를 보는 듯하다. 수많은 실직자들이 늘어나기만 했던 그 당시 경제대공황 시절의 미국이나 신자유주의 경제로 인한 변변한 직장 하나 구하지 못한 채 비정규직 생활로 전전하는 88만원 세대의 모습이다. 이제는 돈이 없어서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하고 마는 '삼포세대'라는 또하나의 불명예스러운 명함을 받게 되었다. 집 장만은 꿈도 꿀 수 없다. 출산을 꺼릴 정도로 보육문제는 젊은 부부에게 엄청난 부담이다. 모두가 이러한 불투명한 사회 속에서 불안함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 그야말로 '좌절의 시대'이다.

 

하지만 찰리는 최악의 상황 속에서도 좌절의 눈물을 흘린다거나 사회에 대해서 큰 불만을 표출하지 않는다. 그는 예전 공장 직원으로 생활하면서 경험하지 못한 삶의 자유를 마음껏 누리고 있다. 그의 행동들이 하나같이 도덕적으로 어긋난 사회적 일탈이지만 그는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미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자유의 행복에 겨운 나머지 그의 얼굴에는 웃음이 가득하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감동 그 자체다. 찰리와 소녀는 하는 일마다 실패하지만 마지막 장면에서 손에 손을 잡고 밝게 웃으며 저 멀리 지평선을 향해 씩씩하게 걸어간다.  "살려고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무슨 소용이 있나요." 흐느껴 우는 소녀에게 채플린은 대답한다.

 

 "그렇지만 죽는다고는 말하지 마!  삶을 포기해선 안돼. 우린 잘 해낼 수 있어!”

 

그리고 특유의 익살스러운 표정이 담긴 '스마일'을 권한다. "슬픔의 흔적은 모두 지워버리고 기쁜 얼굴을 하고 있으렴." 주제가 '스마일'이 화면에 가득 흐르며 영화는 막을 내린다. 비록 그들을 행복하게 해주는 직장과 집을 얻지는 못했지만 찰리는 이미 행복을 발산하게 해주는 희망의 근원을 발견했다. 무일푼이지만 언제나 그의 곁을 지켜주었던 소녀 그리고 웃음이었다.

 

채플린은 '웃음없이 지내는 날은 무의미한 하루일 뿐이다'는 말을 남겼다. 그의 명언의 의미대로라면 어쩌면 채플린은 [모던 타임즈]를 사회문제를 고발한 어두운 흑백영화로 연출하기가 나름 아쉬웠을 것이다. 원래 마지막 장면은 소녀는 수녀가 되어 찰리와 영영 헤어지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만약에 이렇게 됐다면 [모던 타임즈]는 그야말로 답답하고 희망 없는 시대의 초상화로 기록될 영화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채플린은 지금의 유명한 장면을 채택했다. 어쩌면 영화의 엔딩 장면은 웃음이 사라진 당시 미국인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심어주려는 배려가 아니었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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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2-04-05 11:37   좋아요 0 | URL
이 영화 참 인상 깊게 봤는데.
그래도 이 영화는 산업사회에 대한 조롱이고 페이소스란 생각이 들어.
엔딩이 어떤지 기억에 없지만 이 영화가 희망을 말하고 있다고는 생각지 않아.
그렇지. 인간은 어떤 상황에서도 웃어야 해. 뭐 그런 자조는 아닐까? 암튼...

cyrus 2012-04-06 21:16   좋아요 0 | URL
사실 이 영화, 산업사회 속 노동자들의 실상을
중심으로 보라고 교수님이 보여주셨는데 저는 그냥 이 영화를
극장에서 영화 보듯이 봤어요 ㅋㅋㅋㅋ

꽃도둑 2012-04-05 13:18   좋아요 0 | URL
아 귀여운 찰리... 사랑스러운 사람,,, 그리고 천재!

cyrus 2012-04-06 21:16   좋아요 0 | URL
채플린 영화들을 모아놓은 DVD를 구입하고 싶더라고요, 역시
명불허전이더군요. ^^
 
울지마, 톤즈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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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영종료


 

 

 사람의 눈물은 그저 눈물샘에서 분비되는 단순한 액체가 아니다. 눈물의 성분은 과학적으로 98%가 수분이고 약간의 염분, 단백질, 지방화합물이 함유되어 있다지만, 순수하고 맑은 눈물 한 방울에는 세상에서 가장 큰 사랑이 녹아 있는 경우가 많다. 수많은 감정의 순간들, 북받치는 서러움과 기쁨뿐만 아니라 잊지 못할 추억과 진한 그리움이 담겨 있는 것이 참된 눈물이다.

 아프리카 수단 남쪽의 작은 마을 톤즈, 그 마을 사람들이 쫄리 신부님이라고 불렀던 한 남자. 마흔여덟의 나이로 짧은 생을 마감한 故 이태석 신부님의 죽음을 접하고 흘린 눈물에는 그런 것들이 담겨져 있었다. 남과 북으로 나뉜 수단의 오랜 내전 속에서 눈물샘이 말라버린 마을부족, 원래 강인하고 용맹했던 딩카족에게 눈물은 가장 큰 수치라고 한다. 무슨 일이 있어도 눈물을 보이지 않던 그들이 먼 타국 한국에서 온 한 사람의 따뜻한 사랑 앞에 울고 말았다.

 필자도 그 영화를 보고 그의 아름다운 삶에 감동의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운이 좋게도 이 영화를 학교 수업을 통해서 볼 수 있었다. 그 수업을 듣는 학생이 여학생들을 포함한 20명 남짓 밖에 없었지 필자는 눈물을 흘리는 모습이 부끄러워서 영화를 보는 내내 참아야 했다. 그러다가 오늘 그 우연히도 그 영화를 다시 보게 되었다. 모 영화채널에서 생중계를 방영한 이종격투기 경기를 다 보고나서 리모컨을 돌리다가 다른 영화채널에서 이제 막 시작하고 있는 영화를 본 것이다. 이미 본 영화 속 장면들이었지만 두 눈에 눈물이 핑 돌았다.

 

 

 

 

 

 

 

 

 암 선고를 받은 직후 평온한 얼굴로 노래하는 신부님의 모습, 스승의 마지막 모습이 담긴 영상을 보면서 오열하는 톤즈 아이들의 인터뷰 그리고 앞을 보지 못하는 딩카족의 노인이 신부님의 얼굴이 있는 사진에 입맞춤을 하면서 고인을 추억하는 장면 등은 언제나 봐도 가슴 찡하게 만드는 장면이다.

 신부님의 헌신적인 삶은 객석에 눈물의 자기장을 형성시키고 자기 반성과 새 삶의 의지를 일깨운다. 의과대학 인턴을 마치고 군의관으로 제대한 이 신부님는 의사로서 평탄한 삶을 포기하고 뒤늦게 사제의 길로 들어선다. 그리고 사제서품을 받자마자 "가장 보잘 것 없는 이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가장 가난한 땅 수단의 톤즈로 달려간다. 톤즈에서 그가 한 일은 한 사람이 한 일인가 싶을 정도로 경이롭다. 적도의 태양아래 손수 모래를 퍼 나르며 병원을 짓고 학교를 세운 사람, 브라스 밴드를 만들어 내전의 상처로 고통 받는 사람들에게 음악을 선물한 사람, 아무도 찾지 않는 나병촌을 방문하고 병원을 제 발로 찾아오지 못하는 사람들을 찾아 나선 사람, 이 모두가 수단의 슈바이처, 그곳에서는 ‘쫄리’라 불리는 이태석 신부님 한사람이었다.

 신부님은 병을 앓는 사람들에게는 희망을 주고 꿈을 잃은 아이들에게는 꿈을 심어줬다. 그의 손에 톤즈 사람들의 상처는 치유되고 얼굴에는 미소가 감돌았다. 그러나 톤즈의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다. 톤즈에 한 움큼 사랑을 퍼나른 신부님은 올해 1월 14일 마흔 여덟의 불꽃 같은 생애를 마감했다. 2008년 10월 휴가차 한국에 들른 그는 덜컥 말기 대장암 판정을 받고 다시 톤즈 땅을 밟지 못했다. 암세포가 이미 온몸에 퍼진 상태였다.  '어떤 일이 있어도 이들과 같이 있겠다'라는 약속을 지키지 못한 채...

 

 

 

 

 

 신부님의 이야기가 우리에게 큰 감동의 울림을 주는 까닭은 그가 베푼 사랑과 헌신이 크고 숭고하기 때문만이 아니다. 오히려 세속의 물질주의와 이기주의에 사로잡혀 있는 부끄러운 자신을 되돌아볼 수 있게 했기 때문이다. 그는 종교를 뛰어넘어 인간이 아무 조건 없이 다른 인간에게 꽃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사람답게 더불어 산다는 것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순수한 가치가 많다는 평범한 진실을 조용하게 그러나 천둥처럼 큰 울림으로 일깨워주었다.

 그가 일찍이 작곡한 ‘묵상’이라는 성가에서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리는 이들, 총부리 앞에서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이들을 왜 당신은 보고만 있냐”고 묻고 있다. 그는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나에게 해 준 것’이라는 성경의 말씀에서 응답을 얻고 이를 실천하기 위하여 헐벗고 병든 사람들의 곁으로 갔다.

 

 

 

 

 

 

 

 신부님은 그들을 도우러 간 게 아니다. 그들과 함께 살기 위해 갔고, 그들의 친구가 되었고, 그들의 사랑이 되었고, 그들의 아버지가 되었다. 의사로서 편안하게 살아갈 수 있었지만 그는 불편하고 좁은 길을 선택했다. 2평 남짓한 공간에서 수단에 영향력을 미치는 사람이 되었고, 수많은 꿈을 이루어나갔고,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과 꿈을 심어주고 현실로 만들어주었다.

 병에 걸렸을 때 진통제를 복용한다고 해서 그 병이 나아지지는 않는다. 톤즈 마을의 가난과 고통은 병의 증상일 뿐, 고질적 원인은 수단과 주변 나라들에 팽배했던 증오와 폭력과 이기심이었다. 故 이태석 신부가 세상을 떠난 후, 톤즈 마을이 다시 절망과 눈물 가운데 방치된 것처럼, 단지 구제 활동을 통해 병의 증상을 고치는 일만으로는 근원적인 해결을 도모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 이태석 신부가 톤즈 마을에서 정말 고귀하고 멋진 씨앗을 뿌렸구나 싶었던 것은, 톤즈 마을의 어린이들에게서, 절망과 눈물 가운데 한 줄기 사랑이 싹터 가고 있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톤즈의 어린이들은 세상을 떠난 이태석 신부에게 마지막 작별 인사로써, 서툰 한국말로 '사랑해 당신을’이라는 곡을 흐느끼며 노래했다.

 

 

 

“사랑해 당신을 정말로 사랑해, 당신이 내 곁을 떠나간 뒤에

얼마나 눈물을 흘렸는지 모른다오.”

 

 

 

 그들의 맑은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그것은 절망이 아닌 사랑의 눈물이다. 톤즈의 어린이들은 원래 울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故 이태석 신부의 헌신적인 섬김을 통해서 그들 마음에 따뜻한 눈물과 함께 사랑이 싹튼 것이다. 지금까지도 이 신부가 몸소 보여준 인간에 대한 사랑은 사람과 사람들 마음속에 묻어나면서 더 진한 향기로 번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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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12-01-01 18:07   좋아요 0 | URL
cyrus님 2011년 서재의 달인 등극을 축하드립니다.
2012년 흑룡의 해,좋은일만 계시길 바라며 새해 복많이 받으셔요.^^
그리고 신년 새해 용꿈 꾸시라고 용 한마리 선물로 보냅니다
\▲▲/
( ^^ )
<(..)>
<(▶◀)>
<( = )>
<( = )>

━┛┗━

cyrus 2012-01-02 22:03   좋아요 0 | URL
아니에요, 작년 같은 경우에는 학교 생활하느라 서재 활동을 소홀히
했는데 앞으로 더 열심히 해라는 의미에서 준거 같아요, 올해도
학교 생활하느라 더 바쁠거 같은데 말이죠^^;;
그래도 카스피님이 보내주신 흑룡 한 마리 선물 받았으니
올해도 후회 없이 열심히 하는 2012년 됄 수 있도록 해야겠네요.
선물 감사합니다. ^^

2012-01-01 08: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1-02 22: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stella.K 2012-01-01 13:42   좋아요 0 | URL
봤구나. 난 TV 녹화된 거 봤어.
너무 감동이어서 책도 사 봤는데 영상필름만 못한 것 같더라.
급조됐다는 느낌이야.
그 노래 참 그렇지?ㅠ

cyrus 2012-01-02 22:06   좋아요 0 | URL
누님, 저 진짜 영화 보면서 눈물 나올뻔한게 <울지마 톤즈>인거 같아요.
물론 TV로 다시 보니깐 그 때 받은 감동만큼은 아니었지만,
역시 소년들이 부르는 노래 들을 때 가슴이 찡하더라고요.

맥거핀 2012-01-01 15:37   좋아요 0 | URL
저도 예전에 TV에서 이 영화를 본 것 같아요.
2011년의 마지막을 참 따뜻한 영화를 보면서 끝내셨네요.
새해 첫 날부터 좋은 글을 보니 마음이 좋네요.
새해에는 저도 이렇게 좋은 것만 봤으면 싶었는데, cyrus님 덕분에 시작이 좋네요.

cyrus 2012-01-02 22:07   좋아요 0 | URL
올해에도 맥거핀님에게 좋은 일 가득했으면 좋겠어요 ^^

루쉰P 2012-01-02 20:46   좋아요 0 | URL
아! 서재의 달인 정말 축하드리고 새해 복 많이 받으셔요. 사람의 눈을 피해 서재의 숲에 숨어 버린 저를 찾아와 새해 인사도 해 주시고 정말 시루스님은 너무 착해서 대학생 간지 작살!!
항상 쉴 샐 틈 없이 그리고 자신의 삶에 철저한 시루스님을 뵐 때마다 왜이리 뿌뜻한지 아빠 미소가 절로 지어집니다. ^^ 올 한 해 시루스님의 인생에도 제 인생에도 뭔가 광명이 비추지 않을까 하는 근거 없는 낙관을 합니다. ㅋㅋㅋ 대구의 얼짱으로 거듭나실 수도 있어요. 인생은 모르니까요. ㅋㅋㅋ

cyrus 2012-01-02 22:10   좋아요 0 | URL
ㅎㅎ 루쉰님을 포함해서 서재 이웃분들 덕분에 2011년은 정말
좋은 일, 행복한 기억들이 많았어요. 오히려 제가 루쉰님께
고마워해야 될거 같은데요 ^^
 
닥터 스트레인지러브 혹은: 나는 어찌하여 근심을 멈추고 폭탄을 사랑하게 되었는가 - Dr. Strangelove or: How I Learned to Stop Worrying and Love the Bomb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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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 주의 
 

 

 

 

  핵전쟁 혹은 강대국들이 어찌하여 근심을 멈추고 폭탄을 사랑하게 되었는가   

 

 

많은 사람은 인류 역사에서 이젠 더 핵전쟁이 일어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누군가가 핵을 발사하면 상대국도 보복 공격을 할 것이고 결국 핵 공격을 한 나라, 받은 나라 할 것 없이 모두 망할 게 불 보듯 뻔하기 때문이다. 바보 중의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섣불리 선제공격을 감행할 지도자는 없을 것이라는 논리다.  하지만 핵전쟁의 위험성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강대국들은 비밀리에 핵무기를 중심으로 한 군비 강화를 추진하고 있다.   

영국의 사상가 버트런드 러셀은 자신의 자서전에서 핵무기의 위험성에 대한 인류의 무지를 비판하고 있는데 군사 강대국들이 핵무기를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 이유를 정확하게 말해주고 있다.   

 

처음에 나는 사람들에게 핵전쟁의 위험성을 일깨우는 일이 그리 어렵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다. 나는 자기 보존 동기는 매우 강력해서 그 동기가 작동되면 대개는 다른 모든 동기를 압도할 것이라는 일반적인 확신에 공감하는 입장이었다.     (중략)       그러나 이것은 착각이었다.  사람들에게는 자기 보존보다 강한 동기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다른 사람들을 앞지르려는 욕망이었다.       

- <나는 무엇을 보았는가>에서 재인용, pp 47~48 -

 

정치 권력자들이 인류의 대종말이라는 근심을 멈추고 무시무시한 폭탄을 사랑할 수 밖에 없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핵무기는 단 한 대라도 보유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전세계의 패권을 한번에 쥘 수 있는 강대국들이 좋아하는 '조커' 이다.  

1963년에 개봉된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닥터 스트레인지 러브 혹은 나는 어찌하여 근심을 멈추고 폭탄을 사랑하게 되었는가' 는 미사일 개발을 둘러싼 미소 냉전 시대를 냉소적으로 풍자하고 있다.   

영화 속 내용과 등장인물들에 대해서 '어떤 인물도 실존했거나 실존한 적이 없다' 라고 영화 오프닝 때부터 자막으로 알리고 있지만 영화가 개봉되기 일 년 전에 실제로 핵미사일 배치 논쟁으로 인한 미국과 소련 간의 국제적 위기가 있었던 역사적 사건을 생각하면 큐브릭이 비판하려고 하는 대상이 어떤 것인지 짐작할 수 있다.    

 

   

쿠바 미사일 위기를 촉발한 흐루시초프 소련 서기장(左)와 케네디 미국 대통령(右)을 

풍자한 만화 

 

1962년 미국은 소련의 중거리탄도미사일의 발사대가 쿠바에 건설 중임을 공중촬영으로 확인하였다. 이에 대하여  미국 대통령 J.F. 케네디는 소련은 서반구에 대하여 핵공격을 가할 수 있는 기지를 쿠바에 건설 중이라고 공포하고, 쿠바에 대하여 해상봉쇄조치를 취하였다. 케네디는 소련의 흐루시초프 서기장에 국제연합의 감시하에 공격용 무기를 철거할 것을 요구하였다.  

전세계의 긴박감 속에서 소련은 미국이 쿠바를 침공하지 않는다는 것을 약속한다면 미사일을 철거하겠다는 뜻을 미국에 전달하고, 그 다음날에는 쿠바의 소련 미사일기지와 터키의 미국 미사일기지의 상호철수를 두 번째로 제안하였다. 이에 대하여 미국은 전자의 소련의 제안을 무시하고, 후자의 제안을 수락할 것을 결정하였다.   결국 흐루시초프는 미사일의 철거를 명령하고 쿠바로 향하던 소련 해군함정을 소련으로 돌림으로써 미소 간의 대립 위기는 사라졌다.  

전면전이 감돌던 위기일발의 분위기는 단 11일 간이었지만 쿠바 미사일 위기는 제3차세계대전의 시발점이 될 수도 있었던 가장 공포스러운 사건 중 하나였다.   

냉전 이데올로기가 낳은 군비 대립으로 인해 핵전쟁의 위기가 있었지만 큐브릭은 다음 해 자신이 만든 영화 속에서나마 못 다 이룬(?) 핵전쟁과 이로 인한 인류의 멸망을 실현시켰다.   

  

 

  냉전 이데올로기의 광기에 사로잡힌 인간 군상

 

 

핵전쟁만이 공산주의자들을 척결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하는 

지독한 반공주의자  '잭 리퍼 장군'

  

<닥터 스트레인지 러브>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냉전 시대 속에서 '공산주의' 진영을 배척하는 비이성적인 '자유주의' 진영의 정치 및 군사 세력을 상징하고 있다. 

영화 속의 잭 리퍼 장군은 좌익 혐오증 수준을 넘어선 비정상적인 광기에 사로잡힌 무시무시한 인물이다.   그는 미국 땅에 잠입한 소련의 스파이들이 수돗물에 불소을 타 미국인의 영혼을 더럽히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루는 기지 안의 라디오를 모두 없애버리라고 지시한다. ‘빨갱이’ 들은 주로 라디오로 명령을 수신한다는 이유였다.    장군에게는 인류의 평화를 위협하는 적은 '공산주의자' 들이다.  그는 미국이 선제 핵 공격을 하게 되면 평화를 위한 승리로 이끌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한 마디로 결벽증과 피해망상증, 거기에 공격성까지 가미된 '정신병자' 였다.

장군은 드디어 핵무기를 장착한 폭격기 부대에 공격 명령을 내린다. 핵 공격이 인류의 멸망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일까?   고민할 겨를도 없이 핵무기 공격 명령을 너무나 쉽게 내릴 정도로 그의 두뇌는 이미 합리적 판단능력을 상실된 상태였다.     결국 리퍼 장군은 자신의 계획이 뜻대로 실현되지가 않자 스스로 욕실에서 목숨을 끊어버린다.    장군의 자살은 '독일 순수 혈통' 으로 자부한 게르만 족을 규합하여 세계지배를 실현하려고 했던 히틀러의 최후를 연상케 한다. 

대통령이 주재하는 전략상황실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겉으로 보면 영화 속에 등장하는 머킨 머플리 대통령은 지극히 합리적이면서 냉정하게 사태를 해결하고자 노력한다. 그러나 실상 그는 군 장성에게 휘둘리는 나약한 허수아비일 뿐이다.  자신이 승인한 “R” 작전에 의해 이런 상황이 도래하였음을 뒤늦게 알게 된다. 그는 합동참모장인 벅 터지슨의 “기왕에 이리 된 거 대대적인 핵공격을 감행하자”는 주장에 갈등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공산주의를 혐오하는 '호색한' 벅 터지슨 장군 

그러나 영화 속에서는 군 장성이라고 하기에는 우스꽝스러운 행동을 펼치고 있다. 

 

터지슨은 리퍼 사령관의 복사판일 정도로 좌익 혐오증에 사로잡힌 전쟁광이다. 그는 인류의 평화와 자유주의의 수호자를 자처하는 리퍼 사령관과 동일한 사고를 갖고 있다. 그러나 실상 두 장성은 지독한 냉전 이데올로기의 흑백논리와 강박관념에 사로잡힌 군인일 뿐이다. 큐브릭은 이 두 인물을 통해 관료주의와 편협한 사고가 얼마나 위험한지, 얼마나 우스꽝스러운지 잘 보여주고 있다. 

 

    

'Strange' 라는 특이한 이름의 인물답게 스트레인지 박사는 

인류의 파멸에 관심이 없으며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지 않는 궤변만 늘어놓는다.

 

그리고 마지막에 등장하는 나치 출신의 과학자 스트레인지 러브 박사의 등장 또한 빼놓을 수 없는 희극적 요소이다. 그는 소련이 미국의 핵공격에 맞서기 위해 만든 최후의 병기 '둠스데이' 에 대한 개념을 최초로 만든 사람이다. 기계팔과 휠체어에 의지하는 러브 박사는 인류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수 백 미터의 갱도 속에 들어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남자 1명에 여자 10명이라는 비정상적인 가족 구조를 유지하면서 100년 정도 땅 속에 살면 인류는 다시 번성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우스꽝스럽게도 그들이 가장 중요시 하는 것이 남자의 헌신적인 봉사를 위해 성적인 특징이 발달되어 있는 여성만을 엄선해서 선별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치 출신 과학자답게 인류의 번영을 위해서 건전한 유전자를 가진 인류를 증가하는데만 중점을 두고 있는 우생학적 대안을 제안하고 있다.  

  

 

  우리는 다시 만날거예요. 어디서 언제일지도 몰라도...   

 

 

큐브릭이 영화를 통해서 비판하고자해던 것은 냉전 시대의 부조리한 상황일 것이다. 그리고 그 부조리한 상황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좌충우돌하는 권력자들의 우스꽝스런 모습일 것이다. 그는 관료주의와 편협함에 사로잡힌 권력자들을 냉소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핵전쟁이라는 초유의 사태에서도, 인류 공멸의 위기 속에서도 반공사상에 사로잡힌 광기를 조롱하고 있는 것이다.    

 

♫  We' ll meet again, don't know where,  don't know when,   

but I know we' ll meet again, some sunny day.  ♪ 


우리는 다시 만날거예요, 어디서 언제일지도 몰라도. 어느 화창한 날 다시 만날거예요.

 

영화의 엔딩 또한 잊을 수 없는 명장면이다. 핵폭탄이 터지고, 버섯구름이 피어나는 엄혹한 상황에서 울려 퍼지는 감미로운 멜로디. “우리는 다시 만날거예요” 라는 노랫말에서 풍기는 빈정거리는듯한 목소리가 인상적이다.   큐브릭은 영화의 말미에서까지 저주스럽게 냉소적인 메시지를 핵폭발 장면으로 설정하고 있는 것이다.  정신 나간 장군, 미치광이 과학자가 폭탄을 사랑하게 된 대가가 어떤 것이지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이렇게 몇 가지 그럴듯한 단계만 거치면 인류가 한순간에 멸망하는 것도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부디 현실 세계에서는 리퍼 장군 같은 정신병자가 권력을 쥐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  끔찍하고 불운스러운 영화 속 장면들이 '큐브릭' 의 작품이라는 것이 얼마나 다행스럽기만 하다. 

만약에 영화처럼 실제로 핵전쟁이 일어난다면 인류는 과연 어떤 모습으로 다시 만날 것인가?    아니, 다시 만날 수는 있을까?

  

 

* 사진출처: 알라딘 영화검색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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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시스 2011-09-27 18:57   좋아요 0 | URL
스탠리큐브릭 영화 스크린에서 하는 거예요? 저도 예전에 몰아서 본 적 있는데, 특히 그 뭐더라, <아이즈 와이드 셧>이랑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 좋아해요! 이건 못 봤어요. 내용이 이렇구나. 핵전쟁과 냉전.. 장르는 코미디,드라마인데 어쩐지 더 무시무시해요.

cyrus 2011-09-27 20:43   좋아요 0 | URL
아니요. 저는 이 영화 쿡TV로 본거예요. 며칠전에 야무님께서 추천하셔서 보게 되었어요. 내용이 익살스러우면서도 썩 유쾌하지 않았어요.

stella.K 2011-09-27 19:39   좋아요 0 | URL
이거 본다고 해놓고 여태 못 보고 있다.
그런데 난 왜 이 영화를 SF라고 생각하는 걸까?
옛날 영화가 괜찮은 게 많긴 하지.^^

cyrus 2011-09-27 20:46   좋아요 0 | URL
꼭 보세요. 강추합니다^^ 아마도 2001 스페이스오딧세이랑 혼동하신거 같아요. 저도 처음엔 SF영화인줄 알았어요. ㅎㅎ 제가 언급한 영화 마지막 장면이 압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