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살아가면서 이것만큼은 해보고 싶은데 실컷 하지 못한 것이 한 두 개 정도 있다. 그 중 하나가 만화책을 읽는 것이다. 만화 엄청 좋아한다, 어렸을 때 TV에서 하는 만화영화는 무조건 챙겨봤다. 둘리, 달려라 하니, 머털도사 같은 한국 만화부터 꼬마자동차 붕붕, 세일러문, 포켓몬스터, 명탐정 코난까지 일본 만화도 거의 챙겨보는 편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만화책은 많이 읽은 기억이 없다. 고등학생 때 집 근처에 있는 작은 만화방에 가서 만화책 몇 권 빌려서 야자(야외자율학습) 시간에 몰래 읽긴 했지만, 공부를 완전 소홀히 할 정도로 질리도록 만화책을 읽어본 적이 없다.

 

알라딘 중고샵에 가면 만화책이 잔뜩 꽂혀 있는 서가 근처에 만화책을 보거나 구입하는 학생들을 만난다. 혼자가 아닌 또래 친구들과 같이 읽고 싶은 만화책을 찾아보고 그것에 대해서 얘기를 나눈다. 아마도 중고샵 내부에서 제일 시끌벅적한 곳이 만화책이 꽂혀 있는 서가 근처일 것이다. 가끔 그런 어린 학생들의 모습을 보면 부럽다. 친구들과 같이 어울리면서 만화책을 같이 읽어 본 적이 없다. 한 일 년 아니 한 몇 달이라도 질릴 때까지 만화책을 빌려다 읽고 싶다.

 

어쩌면 나는 만화를 좋아하지 않는지도 모른다. 만화를 열정적으로 좋아하는 수준은 아닌 것 같다. 사실 요즘은 이름난 만화들을 어쩌다 뒤늦게 찾아 읽는 것을 빼고는 만화를 자주 보지 않는다. 아니, 이 말이 과장일지도 모르겠는데, 이름난 만화들을 찾아 읽어야겠다고 생각하는 것 말고는 만화에 별로 목숨을 걸지 않는다. 어렸을 때 많이 보던 만화는 언제 봐도 질리지 않는다. 가끔 TV 채널을 돌리다가 우연히 재밌게 봤던 만화가 하고 있으면 보곤 한다. 만화의 결말을 뻔히 다 알고 있을 정도로 완벽하게 기억하면서도 본다. 어렸을 때 본 만화를 그리워하는 추억은 채널 돌리느라 쉴 틈이 없는 리모컨 컨트롤을 한 템포 쉬게 할 정도로 그 향수는 너무나도 강하다.

 

만화를 본 적은 없지만 그 만화 캐릭터를 기억하는 경우도 있다. 만화 캐릭터를 기억해서 그가 나온 만화작품과 작가에 흥미를 가질 때가 있다. 그 중에 하나가 바로 박수동 화백의 '고인돌'이다.

 

“빠빠라빠빠빠~ 삐삐리 삐삐코~ 빠!삐!코!” 중독성 있는 CM송을 유명한 아이스크림 TV 광고에 나온 고인돌 캐릭터는 16년이 지난 시간 속에서도 변하지 않았다. 1989년에 처음 빠삐코 TV 광고가 제작되었다던데 사람으로 치면 나보다 한 살 어린 동생이다... 비록 1970년대 한창 인기를 끌었던 원작을 접하지 못했지만 이 아이스크림 광고 한 편 덕분에 고인돌 캐릭터를 기억할 수 있었다. 고인돌 캐릭터는 빠삐코뿐만 아니라 스크류바 광고에도 진출했다. 스크류바 광고 CM송도 빠삐코 못지않게 유명하다. “이상하게 생겼네. 롯데 스크류바~ 삐삐 꼬였네, 들쭉날쭉해~.” 지금까지도 슈퍼마켓에 가면 볼 수 있는 장수 아이스크림 제품 광고에 나올 정도로 박수동 화백의 고인돌 캐릭터는 친숙하고 재미있다.

 

그런데 박수동의 『고인돌 왕국』을 만화 원작으로 읽어보지 못한 8090 세대는 이 만화가 아동 독자를 위해서 만든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들에게는 원작의 캐릭터보다 TV 광고 속 고인돌 캐릭터 이미지가 강한 탓이다. 사실 『고인돌 왕국』은 성인만화다. 성인 주간잡지의 대명사였던 ‘선데이 서울’ 연재 만화였다. 1974년부터 1991년까지 17년 동안 총 833회 연재됐다.

 

『고인돌 왕국』은 삐뚤삐뚤 대충 그린 듯한 구불구불한 선화(線畵)체 그림에 에로틱한 분위기로 원시 조상의 유쾌한 일상을 보여주었다. 1970년대 당시만 해도 사회분위기는 만화의 질펀한 성적(性的) 담론을 용납하지 않았으나 만화는 고루했던 분위기를 단숨에 깨버렸다. 야하면서도 이것을 웃음으로 승화시키는 에로티시즘. 만화에 나오는 야한 농담과 성적 비유는 그 당시 독자들에게 많은 찬사를 받았다. ‘미스터 고’를 비롯해 ‘인’, ‘돌’ 이 세 남자 원시인과 고인돌 마을을 이끄는 임금은 여색을 밝힌다. 성적으로 농담하기를 좋아하고, 성적 욕구를 멈출 줄 모르는 전형적인 남성을 대표한다. 여자 원시인 ‘미스 오’, ‘육’, ‘팔’ 역시 성에 대해서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가끔 세 명의 남자 원시인을 꼼짝하게 못할 정도로 기가 센 편이다.

 

박수동의 『고인돌 왕국』은 선사시대 조상들의 유쾌한 일상을 4칸 만화로 만든 조니 하트의  ‘Back to the B.C’(1958년)와 비교하고 필적하곤 한다. 작품의 분위기는 하트의 만화와 많이 닮았다. 그러나 성냥 개피에다 먹물을 찍어 그리는 고인돌 그림체는 자니 하트의 꽉 짜인 듯한 펜 그림과는 사뭇 다르다. 고인돌에서 빼놓을 수 없는 또 하나의 매력은 글씨체다. 허투루 그려 제낀 듯한 그림이지만 꽉 짜인 구도, 그에 걸맞은 휘청휘청 끊어질 듯 흘러내리는 글씨체.

 

 

 

 

 

예전에 남자들의 가슴에 확 불을 지펴서 설레게 만들었던 ‘우리 집에 라면 먹고 갈래?’ 못지않은 『고인돌 왕국』 속 야릇한 의미의 표현은 지금도 봐도 신선하고 재미있다. 일부 표현 중에는 여성의 외모나 신체를 성적으로 희화한 것이 있어서 성희롱에 해당될 수 있는 여지가 있지만, 요즘 성(性)에 대해 개방적인 사회적 분위기를 생각하면 다시 만화가 나온다면 충분히 인기를 끌 수 있을 것이다.

 

만화는 1978년 까치출판사에서 단행본으로 처음 발행됐으며 ‘선데이 서울’ 폐간 이후로 고인돌 캐릭터가 나오는 작품들이 단행본으로 묶어져 줄줄이 출판되었다. 이듬해 『소년 고인돌』이 출간되었고, 90년대 중반까지 다양한 출판사를 통해 고인돌 만화집 단행본이 나왔, 그러나 이제는 절판되었으며 지금은 헌책방에서 고가로 매길 정도로 희귀본이 되었다. 최근에 헌책방에서 구한 우석출판사의 『고인돌 왕국』은 2001년에 출간된 마지막 만화집 단행본이다. 한 권짜리 분량으로 봐서는 ‘선데이 서울’에 연재된 833회의 작품 중 일부만 출판한 것으로 보인다. 우석출판사판에는 소설가 김홍신의 서문, 책 중간에 만화평론가 손상익의 짧은 비평을 읽어볼 수 있다.

 

박수동의 <고인돌>은 인간애를 저버리지 않는 따스한 시선이 있어 좋다. 권위도 없고 뽐냄도 없다. 그저 사람답고 동물답고 약간 모자란 듯한 가슴을 느낄 수 있어 예쁘다. (김홍신, 『고인돌 왕국』 서문 중에서)

 

『고인돌 왕국』은 네이버에서 약간의 요금을 내면 볼 수 있다. 허나 젊은 시절, ‘선데이 서울’에 연재된 만화를 즐겨본 기억이 있는 중장년층들에게는 그 때 그 시절의 향수까지 바란다면 욕심일 수 있겠다. 만화는 만화책이 낫다. 종이를 훨훨 넘기면서 보는 것이야말로 진짜 만화책 보는 맛이다. 올해가 『고인돌 왕국』이 ‘선데이 서울’에 처음 연재된 지 40년이 되는 해다. 타이밍이 딱 좋다. 『고인돌 왕국』이 단행본으로 복간되기에 아주 좋은 시기다. 한국만화의 역사에서 기념비적인 작품을 그저 과거의 추억으로 대표되는 유물로 남기에는 너무 아깝다. ‘선데이 서울’ 열혈 남성 독자들을 키득키득거리게 만든 성인만화의 재미를, 나 같은 젊은 친구들도 누려 봤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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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같은 가짜’ 찌라시, 괴담은 바늘구멍만 한 틈으로 파고드는 순간, 사회적 흉기로 돌변한다. 역시나 지난달에 발생한 세월 호 사고 이후 역시나 인터넷과 문자메시지로 괴담은 퍼져나갔다. 그것은 불행한 사고로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유족에게 마음의 상처를 주었다.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퍼지는 괴담은 사람 잡을 정도로 위력이 어마어마하다. 근거 없이 떠돌고 전해지는 루머와 괴담은 인터넷의 익명성으로 인해 뜬소문의 최초 유포자는 잘 드러나지도 않는다. 책임조차 물을 수 없다. 억울한 피해자만 속출할 뿐이다. 루머는 한 사람을 자살이라는 극단적 선택으로 몰아가기도 한다.

 

사람들이 불안하거나 낯선 상황에 직면하면 이성적인 판단을 하기보다는 그 불안을 덜어내려고 하는 행위를 자동으로 하게 된다. 또 문자메시지나 SNS로 괴담을 퍼뜨리는 행위 역시 불안한 생각을 남들과 공유하면서 불안감을 줄여보려는 데에서 비롯된다.

 

위기 때마다 괴담이 퍼지는 사회는 병든 사회다. 대자연의 힘에 의해, 혹은 안보 환경 변화로 한 나라에 큰 재난이 닥쳤을 때 여지없이 또 괴담이 퍼져 나간다면 그 혼란은 누구도 감당할 수 없다. 괴담과 루머에 휘말린 당사자는 극심한 상처를 받지만 ‘아니면 말고’로 끝나는 게 현실이다. 자극적인 사실이 진실이기를 기대하는 심리에 불과하다고 치부해 버리기엔 도를 넘어선다.

 

서로가 서로를 믿지 못하는 불신사회, 이러 사회 속에서 사람들은 항상적 불안감을 안고  산다. 괴담은 이런 불신과 불안을 먹고 자란다. 독자들에게 이야기의 재미를 선사해 준 작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라면 정신 건강에 해로운 나쁜 이야기 ‘괴담’을 싫어했을 것이다. 마르케스의 장편소설 『더러운 시간』은 나쁜 이야기에 휘말리는 사람들과 체제 유지를 위해 이를 악용하는 권력자의 비열한 모습을 통해 괴담이 평화로운 마을 하나를 점점 파괴시키고 과정을 묘사하고 있다.

 

『더러운 시간』은 초기 단편집 『아무도 대령에게 편지하지 않다』와 같은 시기에 출판된 마르케스의 첫 장편소설이다. 1962년에 출간되었는데 무려 32년이나 지나서 국내에 번역 출간됐다. 앞표지에 적힌 카피에서도 알 수 있듯이 『더러운 시간』이 국내에 출간된 1994년은 마르케스와 그의 대표작『백년 동안의 고독』이 국내에 널리 알려진 시기다. 출판사는 『더러운 시간』을 마르케스의 최신작이라고 소개하고 있지만, 마르케스의 약력에 관심을 가진다면 카피의 내용이 뻥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백년 동안의 고독』은 1965년에 집필하기 시작해서 1967년에 출간되었다. 아무래도 『백년 동안의 고독』의 작가 마르케스의 인기를 의식해서 독자의 관심을 끌 수 있는 ‘최신작’이라는 단어를 선택했던 것 같다.

 

배경은 조용한 마을 마꼰도(이 작품에서는 마을의 이름이 잘 언급되지 않는다. 84쪽에 『백년 동안의 고독』의 배경인 마꼰도가 딱 한 번 언급될 뿐이다) 마을에 사는 세사르 몬떼로는 자신의 집 근처에서 클라리넷으로 세레나데를 연주하는 목자를 갑자기 권총으로 사살함으로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몬떼로가 자신의 부인과 목자가 동침을 했다는 소문을 듣고 분노한 나머지 그를 죽이고 만다. 자신의 귀에 들리는 목자의 클라리넷 연주가 자신의 아내를 위한 노래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소문이 사실인지 알 수가 없다. 소문은 소문일 뿐이다. 오히려 목자는 이미 다른 여자가 약혼했고, 목자와 몬떼로의 아내가 동침을 했는지 실제로 목격한 마을 사람들은 단 한 명도 없다. 이 때까지만 해도 마을 사람들은 충동적인 살인 사건으로만 치부했다. 그리고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없는 사건일 뿐이었다.

 

하지만 거짓 소문과 루머의 위력은 몬떼로뿐만 아니라 마을 사람들을 향해 점점 뻗쳐만 간다. 아침만 되면 말도 안 되는 루머가 적힌 전단지가 마을 사람들의 집 문 앞에 붙여져 있다. 괴상한 전단지가 점점 하나씩 문 앞에 붙여질수록 마을 사람들은 점점 더 진실과 거짓 사이에서 혼란스러워 한다. 마을 사람들은 자신 또한 괴 전단지에 연루되어 있을까봐 불안감을 느낀다.

 

 

“전단 같은 것은 신빙성이 없으니 너무 걱정하지 말아라.”
“하지만 사실인지 아닌지도 모르면서 남들이 그렇게 이야기를 하니까 그러려니 하고 믿게 되는 것이 더 무서운 거죠.” (『더러운 시간』중에서, 58~59쪽)

 

 

마을에서는 불신이 더욱 커져만 가는데 시장이라는 사람은 이 문제에 별 관심이 없다. 괴 전단지 사건보다는 마을을 자본화시키는데 관심이 있다. 마을사람들은 이주시킬 정도로 마을에 넓은 도로를 건설하고, 자본(돈)의 힘과 위력을 이미 알고 있는 서커스단이 마을에 들어오면서 시장은 이들과 결탁해서 서커스단원 중에서 미모가 빼어난 여자와 동침하기도 한다. 마르케스의 다른 소설에서도 볼 수 있듯이 이 소설에서도 시장은 자본을 상징하고, 비리와 부정을 일삼는 캐릭터로 등장한다.

 

시장의 성격과 대립하는 인물은 마꼰도에서 유일한 종교인이며 정신적 지주인 앙헬 신부뿐이다. 그는 자본과 대립하고 맞서는 ‘도덕’을 상징한다. 괴전단지 사건으로 인해 분위기가 흉흉해진 마꼰도를 진심으로 걱정하고, 자신이 직접 시장에 찾아가서 사건의 진상을 파악하고 해결하기를 촉구한다. 그러나 시장은 신부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는다. 앙헬 신부는 괴 전단지로 인해 불안에 떠는 마을 사람들의 말 못하는 심정을 들어주면서 전단지의 근원지를 알아내기 위해서 고군분투한다.

 

반면 시장은 전단지 사건을 발판 삼아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려는 계획을 세우는데 그것은 바로 ‘통행금지령’이다. 저녁 8시부터 다음 날 새벽 5시까지 외출을 할 수 없으며 시장의 이름으로 발행되는 외출허가증이 있어야 가능하다. 밤에는 경찰과 협조한 시만 순찰대를 배치시킨다. 통행금지령이 내려진 마꼰도는 그야말로 혼란으로 가득한 고립 상태가 되어버렸다. 보이지 않는 괴 전단지의 공포 그리고 예측할 수 없는 불안감은 더욱 깊어져만 간다. 더 이상 사람들 간에서 화해와 용서는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마꼰도는 길고도 더러운 시간에 힘없이 지배당한다.

 

『더러운 시간』의 결론은 슬프다. 앙헬 신부는 괴 전단지 사건의 진짜 주범이 누군지 알지 못한다. 자신이 믿었던 마을 사람마저 전단지 사건의 주범으로 의심받는 모습에 적잖은 혼란과 괴로움을 느낀다. 그는 평소처럼 교회로 돌아가 기도를 드리면서 차츰 마음의 안정을 되찾게 된다. 여기까지 보면 드디어 마꼰도가 길고 긴 더러운 시간에서 벗어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통행금지령은 계속되고, 여전히 전단지 사건의 주범을 찾기 위한 마을 사람들 간의 총성은 그치지 않는다.

 

『더러운 시간』은 자본과 권력의 유착 관계로 인해 정서적으로 피폐해지는 과정보다는 마을 사람들 전체에 공포를 떨게 만든 유언비어와 소문으로 전통적인 공동체 의식이 와해되는 사회의 모습이 더 눈에 띈다. 개인적으로 『백년 동안의 고독』보다 재미있게 읽었다. 앙헬 신부가 전단지 사건의 범인을 찾아내는 과정이 지루하지 않게 전개되었고, 시장의 권력을 유머스럽게 비꼬는 인물들 간의 대화는 있어서 마꼰도를 배경으로 한 소설임에도 오히려 이야기가 무척 현실감이 있게 느껴진다. 괴 전단지에 불안에 떨고, 서로를 믿지 못하는 마을 사람들 그리고 이를 이용해 자신의 힘을 더욱 확장시켜 마을의 갈등을 더욱 가중시키는 권력자의 비열한 모습. 세월 호 사건 관련 악성 루머가 SNS에서 한창 떠돌아다닐 때 읽어서 그런지 악성 괴담에 두려워하는 사람과 이것을 악용해서 갈등을 조장하는 사람이 존재하는 우리 사회가 자연스럽게 떠오르게 된다.

 

지금 우리나라가 괴담과 루머가 만들어 낸 더러운 시간 속에서 갇혀있다. 과연 이 시간에서 언제 탈출할 수 있을까. 가까스로 끔찍하고 고통스러운 시간에 벗어나도 괴담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우리 인간은 진짜든 가짜든지 간에 이야기의 매력에 쉽게 빠져버리는 습성이 있으니까. 허구와 진실을 구분하기가 어려운 이야기는 사람의 목숨을 위태롭게 만들 정도로 무시무시한 힘을 가지고 있다. 나쁜 이야기가 지배하는 순간, 그 시간은 갈등과 불신에 의해 더렵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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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cene #1  편히 쉬소서. 가보...

 

남미문학의 큰 별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가 세상을 떠난 지 2주가 지났다. 그의 유골은 수천 명의 애도 속에 멕시코시티 예술궁전에 안치되었다. 행사는 멕시코와 마르케스의 고국인 콜롬비아 양국이 공동 주관했다. 노벨문학상을 받았다고는 하지만 소설가 한 사람을 떠나보내려고 대통령 두 명이 모이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그 날 마르케스가 태어난 콜롬비아의 카리브해 작은 마을 아라까따까에서도 따로 장례식이 치러졌다. 아라까따까는 마르케스의 ‘마술적 리얼리즘’을 대표하는 작품 『백년 동안의 고독』의 무대 마꼰도의 영감이 솟아난 곳이다.

 

하지만 이 거국적인 행사에도 불구하고 콜롬비아 정부나 그의 작품을 좋아했던 콜롬비아 국민 입장에서는 ‘마르케스 부재’가 서운했을 것이다. 그의 유골이 콜롬비아가 아닌 30년 넘게 살아온 멕시코에 안장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생전 마르케스를 멕시코로 가게 만든 원인은 아이러니하게도 콜롬비아였다. 마르케스는 1954년 ‘엘 에스뻭따도르’라는 신문의 기자로 취직했는데 이 신문은 이듬해 독재정권의 탄압으로 폐간되고 말았다. 유럽에서 주로 영화기사를 보냈던 그는 50년대 말 쿠바로 가 피델 카스트로와 친분이 생긴 뒤 쿠바국영통신사의 보고타 지국장을 지내기도 했다. 마르케스는 소설가로 활동하면서 쿠바 혁명 이후 카스트로를 일관되게 지지했고 중남미 독재정권 및 이를 지원하는 미국에 반대하는 글을 쓰기도 했다.

 

1960년대 초반부터 영화 제작 등을 위해 멕시코 생활을 했던 그는 콜롬비아 군이 그를 좌익 게릴라들과 엮으려는 것을 눈치 채고 1981년 콜롬비아를 저버리고 멕시코시티로 삶의 터전을 완전히 옮겼다. 콜롬비아는 살았을 동안 마르케스를 내쫓아낸 셈이지만 죽고 난 지금에는 멕시코에 묻힐 화장한 유골의 한줌 재만이라도 돌려주기를 원하고 있다.

 

이렇다보니 콜롬비아에서 마르케스를 추모하고, 기념하는 여러 행사가 열렸다. 멕시코 정부와 함께 공동행사를 주관했으나 콜롬비아 정부는 이와 별도로 수도 보고타의 성당에서 공식 장례식을 열었고 TV로 생중계했다. 콜롬비아 문화부는 해마다 가장 뛰어난 스페인어 단편 소설에 10만 달러의 상금을 수여하는 ‘마르케스 문학상’을 제정하겠다고 밝혔다.

 

지난 주 4월 23일에는 콜롬비아 전국의 도서관과 공원, 대학에서 그의 작품을 릴레이로 읽는 행사도 열었다. 문화부는 그의 소설 1만 2천부를 공공도서관에 배포하기도 했다. 흥미롭게도 그 날 릴레이 읽기 행사를 위해 배포된 마르케스의 소설은 그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백년 동안의 고독』이 아니었다. 그 소설은 바로 작가로서의 마르케스를 본격적으로 알리게 만든 단편소설 『아무도 대령에게 편지하지 않다』였다.

 


 Scene #2  듣보잡 중남미 작가에서 세계적인 작가로

 

 

 

 

 

마르케스의 문학을 오랫동안 접한 독자라면 제목이 긴 단편소설을 알고 있겠지만 ‘『백년 동안의 고독』의 작가 마르케스’라는 영향이 강한 탓에 대부분 독자들에게는 생소한 작품일 것이다.

 

 

 

 

 

 

 

 

 

 

 

 

 

 

 

하지만 이 작품은 마르케스가 11년이나 고쳐 쓰면서 완성한, 초기 단편작품이다. 1957년에 탈고해서 1961년에 여러 단편소설들을 모은 한 권의 작품집에 정식 출간되었다. 1967년에 출간된 『백년 동안의 고독』보다 먼저 나왔다. 워낙 『백년 동안의 고독』의 인기가 많아서 흔히 마르케스가 『백년 동안의 고독』으로 정식으로 작가 데뷔한 걸로 오해하는 몇 몇 독자도 있을 것이다. 사실 마르케스는 단편소설로 작가의 길을 걷게 되었다. 작가로 전업하기 전에 마르케스는 신문기자 활동을 하면서 신문논평을 쓰곤 했는데 아마도 짧은 분량의 단편과 중편을 쓰는데 유용한 경력이 되었을 것이다. (여기서 마르케스의 작품 약력에 대해서 첨언을 하자면 『백년 동안의 고독』은 그의 두 번째 장편소설이다. 첫 번째 장편소설이자 생애 두 번째 작품은 『더러운 시간』(La mala hara)이다)

 

 

 

 

 

 

『아무도 대령에게 편지하지 않다』가 최초로 우리나라에 소개된 것은 1977년이다. 마르케스가 1982년에 노벨문학상을 받기 전에, 그것도 세계문학전집 출판으로 유명한 민음사에서 처음 출간됐다. 1977년은 안정효 씨의 번역으로 『백년 동안의 고독』(문학사상사)이 나온 해이기도 하다. 그러나 안정효의 번역이 최초『백년 동안의 고독』번역은 아니다. 일 년 전에 육문사라는 출판사에서 『백년 동안의 고독』이 출간되었다. 이때만 해도 마르케스는 생소한 중남미 출신의 작가였다.

 

지금의 마르케스 독서 열풍과 비교하면 이때 마르케스는 국내 독자들에게 좋은 대접을 받지 못했다. 문학사상사의 안정효 역은 1975년 1월부터 월간 문학사상지에 2년에 걸쳐 연재한 것을 책으로 묶은 것이다. 그러나 판매수입은 저조했다. 민음사판과 함께 스테디셀러로 자리 잡은 책의 흑역사라고 해야 될까. 1976년에 이 작품을 먼저 낸 육문사판도 안 팔리는 것도 마찬가지. 육문사판은 초판 3천부를 찍었는데 1천부도 팔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먼지에 파묻힌 마르케스의 작품들은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해인 1982년부터 드디어 빛을 보기 시작했다.『백년 동안의 고독』과 함께 마르케스의 작품들이 서점가를 휩쓸게 되었고, 마르케스는 ‘듣보잡’ 중남미의 작가에서 ‘노벨상’ 수상 작가로 급부상했다.

 

 

 

 

 

 

 

 

 

 

 

 

 

 

 

 

그리고『아무도 대령에게 편지하지 않다』(편의상 줄여서 ‘대령편지’)에 수록된 「마나님의 장례식」은 '마마 그란데의 장례식'이라는 이름으로 민용태 교수의 번역으로 중앙일보사 ‘오늘의 세계문학전집’ 11권에 수록되기도 했다.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한때 절친이었다가 서로 간의 오해로 인해 관계가 틀어져버린 페루 출신의 작가, 2010년 노벨문학상 수상)의 『판탈레온과 특별봉사대』와 함께 출간됐다.

 

민음사 『대령편지』에는 9편의 단편소설이 수록되어 있다. 번역 판본은 확인할 수 없지만, 1962년에 출판된 단편소설집 『마마 그란데의 장례식』에 수록된 작품으로 추정된다. 여기에 수록된 단편소설들은 멕시코로 건너가기 전에 집필한 초기 작품이다. 민음사판에 수록된 작품들은 다음과 같다.

 


* 아무도 대령에게 편지하지 않다
* 화요일의 시에스타
* 그 때 그날
* 날개달린 노인
* 이 마을엔 도둑이 없지
* 발따싸르의 최고의 오후
* 몬띠엘의 미망인
* 토요일 하루 뒤
* 인조(人造) 장미
* 마나님의 장례식 (= 마마 그란데의 장례식)

 

 

민음사판은 홍보업이라는 이름의 역자가 번역한 것인데 약력을 살펴보면 서울대 사대 영문과를 졸업했고, 인하대 사대 교수를 역임했다. 중남미 작가의 글을 영문과 전공자가 번역한 걸로 봐서는 당시 우리나라에 중남미 문학 전공과 전문 번역이 생소했을 것이다. 그래서 번역 문체가 영 매끄럽지 않고, 어색한 문장 구조가 간간이 눈에 띈다.

 

 

 

 

거기에다가 인쇄 형식이 세로쓰기라서 짧은 분량의 중단편임에도 불구하고 집중력을 끌어 모아 읽어내기가 여간 쉽지 않다. 그리고 지금의 책이 펴는 방향과 반대로 된 일본식(세로쓰기 읽기에 적합함)이다. 마르케스의 초기 단편모음집이라는 점에서 본다면 민음사판은 헌책으로서의 가치가 높겠지만 마르케스의 문학적 매력을 음미하면서 읽기 힘든 단점이 있다.

 

중간에 읽다가 포기한 적도 있고, 여러 번 읽었는데도 글의 주제와 내용을 이해하지 못한 작품도 몇 개 있다. ‘대평편지’나 ‘마나님의 장례식’ 같은 경우에는 두세 번 이상 읽었을 정도이다.

 


 Scene #3  대령이 기다리는 편지

 

 

 

 

 

 

 

 

 

 

 

 

 

‘대령편지’는 피터 박스올의 『죽기 전에 읽어야 할 책 1001권』에 소개될 정도로 마르케스 문학을 논할 때 절대로 빠질 수 없는 작품이다. 죽기 전에 읽어야 할 책 정도는 아니지만 마르케스 마니아라면 이 초기작은 꼭 읽어봐야 한다. 이 작품에 대해서 『1001권』은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두 번째 출간작인 이 중편 소설은 폭력과 불의, 고독과 침체에 관한 이야기이다. 때는 막 20세기로 접어든 무렵, 내전에 참가했던 한 대령이 천식을 앓고 있는 아내와 함께 거의 잊히다시피 하여 콜롬비아의 작은 마을에서 배고픈 삶을 살고 있다. 대령의 삶은 언젠가 15년째 받지 못하고 있는 정부의 연금을 받아 가난과 고통에서 헤어날 수 있으리라는 희망으로 점철되어 있다. 그러나 매주 금요일 우체부가 “아무도 대령에게 편지하지 않았다.”라고 말할 때마다 더 나은 삶에 대한 그의 소망은 산산조각이 난다.

 

대령이 겪는 고난의 아이러니—혁명에 참가한 그의 맹목적인 믿음이 오직 그 자신과 그의 농부 아버지를 가난에 빠뜨리고 말았다는—와 그의 핵심적인 투쟁, 즉 죽은 아들이 남긴 마을 품평회에서 상을 딴 투계용 장닭을 팔 것인가 하는 문제가 나란히 놓여 있다. 아들은 금지 서적 유포라는 비밀 활동의 결과 죽고 말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장닭은 상실이 지나간 자리에서 승리를 상징하게 된다. 장닭은 또한 시민들이 굶주림과 희망의 광기 속에서 살아가는, 고독 속의 고통에서 비롯된 침체를 떨치는 또 다른 전쟁터의 가능성을 상징한다. 이 고독이야말로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트레이드마크가 된다.

 

『1001권』에서 소개한 내용에서도 알 수 있듯이 마르케스 특유의 고독한 분위기가 ‘대령편지’에 함축적이면서도 아주 짙게 배어 있다. 그리고 『백년 동안의 고독』의 무대 배경 마꼰도와 소설 속 주인공 아르까디오 부엔디아의 아버지 호세 아우렐리아노 부엔디아 대령도 잠깐 언급된다. 『백년 동안의 고독』을 집필하기 전부터 이미 초기작부터 마르케스가 마꼰도를 중심으로 한 이야기를 구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소설 제목처럼 주인공 퇴역 대령은 한 통의 편지를 기다린다. 그것도 무려 60년 동안이나. 매주 금요일 하나뿐인 정장을 차려입고 선착장에 나가 연금 지급에 대한 정부의 소식을 기다리지만 연금에 대한 편지는 결코 오지 않는다. 소설 마지막 부분쯤 “그 편지는 반드시 오게 돼 있어”라고 말하는 그에게 우편배달부는 이렇게 말한다. “반드시 오는 것은 죽음뿐입니다. 대령님.” 고독하고 빈곤한 퇴역 대령의 말년을 더욱 쓸쓸하게 묘사하는 장면이다.

 

그나마 그에게는 자존심이라 할 수 있는 것은 대령 계급장과 장닭(민음사판에서는 수탉) 한 마리뿐이다. 가난에 지친 아내는 대령에게 돈이 되는 장닭을 팔 것으로 종용하고, 하릴없이 편지를 기다리는 남편의 모습에 불평을 늘어놓는다. 혁명의 영웅으로서 자존심이 센 대령 입장에서는 아내를 사랑하는 마음에 그녀를 달래보지만 마음으로는 굴욕적일 수밖에 없다. 그저 아내 눈치를 보는 가난과 고독의 그늘에 갇혀버린 늙은 사내가 되고 말았다.

 

결국 그가 기다리면서 맞이하는 것은 편지 한 통이 아닌 오직 죽음뿐이다. 그러나 여기서 ‘죽음’은 혼이 육체에서 완전히 벗어나 생명활동이 정지되는 현상이 아니다. 완전히 죽지 못한 채, 죽음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죽음 아닌 죽음’이다. 생전 혁명의 영웅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죽어서도 대접을 받지 못하게 되는 실존적인 존재가 상실된 것이다. 아마도 대령은 죽어서도 이승을 떠나지 못할 것이다. 편지를 기다리기 위해서. 그에게 편지 한 통은 연금 이상의 의미를 뛰어넘는다. 그것은 대령으로서의 ‘명예’이자 ‘자존심’이며 무엇보다도 얼마 남지 않은 무기력한 삶을 회복, 재생시킬 수 있는 ‘생명 연장’으로서의 의미가 강하다. 이 편지 한 통만 받으면 거의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대령의 고독은 끝난다.

 

마르케스가 군인의 고독함을 묘사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취재 경험 덕분이다. 그는 신문기자로 활동하면서 6.25 전쟁 관련 기사를 쓰기도 했다. 취재하면서 6.25 참전 콜롬비아 병사들의 고통을 알게 된다. 그들의 경험을 ‘대령편지’에 투영했다. 그래서 대령의 모습은 6.25 전쟁에 참전했으나 명예로운 대접을 받지 못하는 우리나라 퇴역 군인의 쓸쓸한 모습이 연상된다.

 

 

 Scene #4  그 외 초기 단편소설들

 

그 밖에 다른 몇 편의 작품들을 소개하자면 ‘그 때 그날’  콜롬비아의 군사 정권 사회를 통렬하게 비판 의식을 담은 무척 짧은 내용의 소설이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에스꼬바르는 무면허 치과 의사이지만 자신의 일을 묵묵히 수행하고 권력에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는 정의로운 시민이다. 한편은 그의 환자로 등장하는 시장은 군인 출신으로 많은 사람을 고문하고 죽인 폭력적인 권력자의 모습이다. 어금니를 뽑아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에스꼬바르에게 권총으로 한 빵 쏘겠다고 협박을 할 정도로 상당히 강압적인 태도를 보인다.

 

결국 에스꼬바르는 마취를 하지 않고 시장의 어금니를 뽑는다. 그러자 그는 시장에게 뼈 있는 말 한 마디 내뱉는다. “우리 중 스무 명이 죽은 벌을 이제 받을거요.” 마취를 하지 않은 상태에서 이빨을 뽑으면 상당힌 진통이 느껴진다. 여기서 에스꼬바르는 강자의 입장이 된다. 스무 명의 죽음에 대한 대가를 치르기 위해서 마취 없이 이빨을 뽑은 것이다. 평범한 치과 치료 장면에서 통쾌한 권력의 역전 관계를 보여주고 있다.

 

‘화요일의 시에스타’는 아들의 무덤을 찾는 어머니의 고독함을 묘사하고 있다. 그녀의 아들은 어느 마을에서 절도죄로 사살된 도둑이다. 어머니는 아들의 무덤을 찾기 위해 무더운 날씨 속에서 기차를 타고 마을로 찾아갔지만 하필 그 시간이 모든 사람들이 낮잠을 자는 시에스타였다.

 

시에스타로 인해 사람 흔적을 찾아볼 수 없는 황량한 마을 배경은 쓸쓸한 분위기를 더욱 고조시켜 준다. 한편 군사 정권이 지배하는 콜롬비아의 무기력한 사회적 분위기를 상징하기도 한다.

 

 

“거의 2시였다. 그 시각엔 졸림에 눌리어 시가가 낮잠을 자고 있었다. 상점, 관공서, 공립학교는 11시에 문을 닫았고 4시 직전에야 다시 열었다. 4시는 기차가 돌아가는 시간이었다. 정거장 건너편에 있는 술집과 당구장이 달려 있는 호텔과 광장 한쪽에 있는 전신전화국만이 문을 열고 있었다. 바나나 회사를 모델로 한 것이 대부분인 집들은 문을 안쪽에서부터 잠그고 휘장을 내려 놓았다. 어떤 집안에서는 너무나 무더워서 거기 사는 이들은 앞마당에 나와서 점심을 먹었다. 어떤 이들은 편도나무 그늘이 진 담에 의자를 기대놓고 바로 거리에서 낮잠을 잤다.” (마르케스, ‘화요일의 시에스타’ 중에서)

 

 

이 소설 이외에도 마르케스의 다른 작품에서도 유독 등장인물이 낮잠을 자는 장면이 묘사된다. 어린 시절 마르케스가 목격한 시에스타는 작품의 소재 중의 하나인데 자서전에 의하면 낮잠 자는 시간을 부정적으로 생각했다. 낮잠 자는 시간의 마을은 그에게는 ‘황량한 거리에 드러누워 있는 죽은 마을’이었다.

 

 

 

 

 

 

 

 

 

나는 할 일이 없다는 이유로 그렇게 무기력한 낮잠이나 자는 것을 어렸을 때부터 혐오했다. “우리 지금 낮잠 자고 있으니까, 조용히들 해.” 사람들이 잠결에 투덜거렸다. 가게, 관공서, 학교들은 12시에 문을 닫아 오후 3시 조금 못 미처 문을 열었다. 집들의 내부 분위기는 지옥과 천당 사이의 무기력 상태와 같았다. 더위와 졸음을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사람들은 마당에 해먹을 걸어 놓거나 편도 나무 그늘 아래에 걸상들을 놓기도 하고, 길거리에 앉아 잠을 자기도 했다. 역 앞에 있는 호텔과 호텔에 딸린 선술집, 당구장과 교회 뒤 전신국만이 문을 열어 놓았다. (중략) 문 한 짝도 어느 담의 틈새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고, 내게 아무런 감흥도 추억도 주지 못했고 인간의 흔적 하나 느껴지지 않았다. (마르케스 『이야기 하기 위해 살다』중에서, 36~37쪽)

 

 

콜롬비아 사람들에게 시에스타는 무더위를 잊고 달콤한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시간은 아닐 것이다. 군사 정권의 강압적인 정치와 끊임없는 내전의 공포를 잊을 수 있는 시간이다. 그러나 집 주변에 울리는 내전의 총성과 포탄 소리는 집 안에 숨어 있어도 공포감을 주기에 충분했다. 마을 사람들은 제 목숨 살기 위해서 완전히 문을 닫은 채 살아야만 했다. 어린 마르케스는 그렇게 힘없이 위축되고 삶의 기운이라고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시에스타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다.  

 

‘날개 달린 노인’은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환상적인 분위기가 나는 작품이다. 천사에 대한 기존의 관념을 뒤집고, 날개 달린 노인이 정말 천사였는지 여부는 미확인 상태로 남겨 놓는다. 결국 노인은 날개를 퍼덕이는데 성공하지만, 그의 모습은 우리가 생각하는 신비스럽고 초자연적 느낌의 천사와 거리가 멀다. 하늘에서 갑자기 내려온 천사라면 신성한 존재로 생각하지만 날개 달린 노인을 발견한 농부 부부는 오히려 서커스단에서 나올법한 신기한 동물처럼 여긴다. 게다가 그를 구경하기 위해서 찾아 온 신부는 꾀죄죄하고 볼품없는 노인의 모습을 보면서 천사가 아니라 사기꾼이라고 생각한다. 노인은 농장 부부의 탐욕을 채우는 돈벌이 수단으로 전락하고 만다. 집에 갇힌 노인을 구경하기 위해서는 사람들은 돈을 내야만 했다.

 

그러나 부부의 사업(?)은 오래가지 못한다. 이야기는 점점 현실과 동떨어질 정도로 전개된다. 카리브해에서 건너온 유랑극단이 거미로 변해버린 여자를 데리고 장사를 하기 시작한 것이다. 재미있게도 거미 여자는 어릴 적 부모 몰래 춤추면서 놀다가 집에 돌아오는 도중에 하늘에서 내린 번개를 맞고 거미로 변해버렸다. 사연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알 수 없지만 이제 사람들의 눈은 날개 달린 노인이 아니라 거미 여자로 향하게 되었다. 그러나 날개 달린 노인 덕분에 모아놓은 돈으로 부부는 발코니에 정원 딸린 이층집을 살 수 있었다. 그 후로 노인은 다시 날아다니기 전까지 쭉 집에서 갇혀 지내야만 했다.

 

노인의 모습은 한때 자본을 끌어들일 정도로 가치가 높았으나 이제는 전혀 쓸모없는 상품을 떠올리게 한다. 즉, 모든 상품을 자본화시키고 인간성이 상실되는 자본주의의 단점을 풍자하고 있다. 이러한 자본주의의 풍경은 외국 자본들의 유입으로 도시화가 이루어지는 콜롬비아의 모습이기도 하다.

 


 Scene #5  마술적 리얼리즘 세계를 들어가기 위한 문

 

 

 

 

 

 

 

 

 

 

 

 

 

 

 

 

 

마르케스가 국내에서 대중적 인지도가 높은 중남미 작가임에도 불구하고 마르케스의 단편소설을 접하기에는 그 출간된 작품의 수가 많지 않다. 절판된 책을 제외하고 현재 그의 이름으로 나온 단편선집으로는 『꿈을 빌려드립니다』가 유일하다. 1995년에 국내에 출간된 또 다른 마르케스의 단편선집인 한나래 출판사의 『이방의 순례자들』은 절판되었다.

 

나머지 마르케스의 단편은 다른 세계적으로 유명한 작가들의 단편을 모은 앤솔러지에서 볼 수 있으며  ‘날개 달린 노인’은 창비세계문학 단편선집 『날 죽이지 말라고 말해줘!』에 ‘거대한 날개 달린 상늙은이’라는 제목으로 수록되어 있다.

 

마르케스의 ‘마술적 리얼리즘’ 입문 독서를 위한 작품으로는 마르케스의 단편소설이 적합하다. 특히 1950년대에 집필한 초기 작품들은 마술적 리얼리즘을 형성하게 만드는 마르케스의 문학적 가능성과 실험성을 엿볼 수 있다. 사실 『백년 동안의 고독』을 처음 읽었을 때만 해도 복잡한 인물에 환상과 사실의 경계가 없는 독특한 이야기의 전개 방식에 혼란을 겪은 적이 있었다. 전혀 준비 운동을 하지 않은 상태에서 거대한 스케일의 작품 속으로 뛰어든 격이다. 장편소설을 읽기 전에 마르케스의 초기작들로 구성된 단편집 『아무도 대령에게 편지하지 않는다』를 읽는다면 마르케스가 세운 마술적 리얼리즘의 세계에서 길을 잃어버리는 일이 없을 것이다.

 

비록 노벨상 때문에 마르케스가 국내에 유명해진 것도 있지만 그의 인기 덕분에 제3세계문학에 대한 관심이 놓아졌고, 그 후로 마르케스의 뒤를 잇는 라틴 아메리카 작가들이 소개되기 시작했다. 마르케스 사망 이후로 그의 문학세계를 되짚어보고 추억하는 의미에서 『아무도 대령에게 편지하지 않는다』가 중남미 문학 전공 번역자의 손에서 다시 태어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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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14-05-03 16: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중앙일보사에서 나온 세계문학전집은 저도 갖고 있는데 제11권에 <판탈레온과 위안부>는 있습니다만 마르께스 단편들 중에 <아무도 대령에게 편지하지 않았다>는 없네요.혹시 몇 년도에 나온 것인지 확인할 수 있을까요?

cyrus 2014-05-03 22:38   좋아요 0 | URL
노자님. 제가 글을 쓰다보니 잘못 쓰고 말았군요. 중앙일보사 세계문학전집 11권에 수록된 마르케스의 작품은 <마마 그란데의 장례식>입니다. 방금 잘못 쓴 내용을 수정했어요. ^^

노이에자이트 2014-05-03 23:35   좋아요 0 | URL
오..역시 제 것과 동일한 책이군요~

레삭매냐 2018-11-18 0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령편지가 이미 예전에 나왔던 책이로군요...

cyrus 2018-11-19 12:01   좋아요 0 | URL
네, 그런데 구판에는 다른 단편들도 함께 수록되었는데 신판에서는 <대령편지>만 있어요.
 

 

 

 

 

 

 

카슨 매컬러스의 『슬픈 카페의 노래』는 지금까지 3종이 번역, 출판되었다. 2005년 열림원에서 故 장영희 교수 번역으로 ‘열림원 이삭줍기’ 시리즈로 나왔다. 올해 초에 새로운 표지로 단장하여(표지 속 인물은 작가 카슨 매컬러스) 개정판이 출간되었다. 그리고 동서문화사 월드북 시리즈(185번)로 나온 것으로 매컬러스의 또 다른 대표작이자 처녀작인 ‘마음은 외로운 사냥꾼’과 함께 수록되어 있다.

 

 

 

 

 

 

 

 

 

 

 

 

 

 

 

그렇다면 나머지 1종은? 문예출판사에서 출간되었는데 정현종 시인이 번역한 것이다. 그러나 문예출판사판은 현재 절판이다. 문예출판사에서 출간된 세계문학 작품들은 옛날 ‘문예 세계문학선’ 표지 디자인과 흡사하다. 흰 색 바탕에 한가운데에 작은 그림을 넣었다. 표지 그림은 반 고흐의 「아를의 밤의 카페」이다. 화려한 불빛이 흘러나오는 고흐의 카페는 작품 속 인물인 아멜리아, 라이언 그리고 마빈의 삼각관계를 형성하기 전 행복했던 카페의 분위기가 연상된다.  과거 ‘문예 세계문학선’ 표지 디자인과 비슷하지만 『슬픈 카페의 노래』는 세계문학선 시리즈에 포함되지 않은 작품 중 하나이다. 

 

내가 가진 책은 1996년 초판이다. 하지만 오랜 역사를 지녔으며 유명한 세계문학 작품을 가장 먼저 번역 소개한 이력이 있는 문예출판사답게 정현종 번역본은 1972년에 처음 출간되었다. 아마도 카슨 매컬러스의 이 작품을 가장 먼저 번역한 출판사가 문예출판사일 것으로 생각된다.

 

 

 

 

 

 

 

 

 

 

 

 

 

 

다른 번역본이 남아 있어서 정현종 시인의 번역본이 잊힌 감이 있다. 알라딘에 검색하면 표지마저도 나오지 않는다. 이 책에 매컬러스의 다른 단편소설들도 수록되어 있는데 ‘덧없는 생’, ‘사랑의 딜레마’, ‘나무, 바위, 구름’, 3편이다. 1972년판 당시에는 ‘사랑의 딜레마’는 처음에 ‘가정불화’라는 제목으로 소개되었다. ‘덧없는 생’은 ‘체류자’로, ‘사랑의 딜레마’는 ‘가정의 딜레마’라는 바뀐 제목으로 ‘나무, 바위, 구름’과 함께 단편집 『불안감에 시달리는 소년』(열림원)에 수록되어 있다.

 

 

 

 

 

 

 

 

 

 

 

 

 

 

 

매컬러스의 작품에 대해서 간략하게 소개하자면, 그로테스크한 고딕 문학이 특징이다. 그녀의 소설 속 인물들은 비정상적이고, 비현실적인 사건이 전개된다. 그녀는 ‘남부 고딕문학’의 대표작가로 평가받고 있다. 『슬픈 카페의 노래』『마음은 외로운 사냥꾼』이외에도 1946년 작 『고딕 소녀』(The Member of the Wedding)도 있다. 이 작품은 작가가 직접 극화하여 상연되기도 했다. 그리고 1961년 작 『바늘 없는 시계』는 『슬픈 카페의 노래』와 함께 수록되어 나온 적 있으나 출간된 지 오래되어서 시중에 구하기가 쉽지 않은 작품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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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것이라고 하는 것이 남아있다면 모두 ‘사단법인 맑고향기롭게’에 주어 맑고 향기로운 사회를 구현하는 활동에 사용토록 하여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그동안 풀어놓은 말빚을 다음 생으로 가져가지 않으려 하니, 부디 내 이름으로 출판한 모든 출판물을 더 이상 출간하지 말아주십시오.”

 

이 같은 유언을 남기고 법정 스님이 입적한 지 4년이 지났다. 스님 입적 후 맑고향기롭게는 출판사와 스님의 저서를 절판키로 합의했다. 2011년 1월 이후 스님의 책은 일체 유통 판매가 중지되었다. 스님의 입적 소식에 평소 스님이 세상에 전하고자 한 이야기를 다시 듣고 보려한 사람들이 스님의 저서에 몰려들었다. 법정 스님이 세상을 떠난 직후부터 그가 자신의 책들을 절판하라는 유언을 남겼다는 말이 흘러나왔을 때 많은 사람들이 충격을 받았다. 독자들과의 인연을 잘라내려는 싸늘한 칼날에 상처 받은 느낌이었다. 이제 서점에서 법정 스님의 책이 사라질 거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것이다.

 

 

 

 

 

 

 

 

 

 

 

 

 

 

 

 

존경하고 좋아하는 사람이 세상을 떠났을 때 마침 그가 쓴 책들이 있다면 사람들은 그 책을 사러 서점으로 가곤 한다. 전국의 크고 작은 서점들은 고인이 쓴 책들을 모아 특별 코너를 만들고, 사람들은 그곳에서 책을 고르며 추모의 마음을 서로 나누게 된다. 나도 여기에 동참하고 싶었다. 스님의 입적 소식이 들었을 때 서점에 가서 스님의 대표작 『무소유』를 구입하고 싶었지만, 당장 살 수가 없었다. 그 때 군 복무 중이라서 부대 밖으로 나갈 수 없었다. 스님이 입적한 날이 2010년 3월 11일. 병장 3호봉(3개월째)이었는데 2011년 1월까지 스님의 책을 구입할 수 있어서 5월에 전역할 때 구입하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대구에 있는 대형서점이라 할 수 있는 교보문고에서 책을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 땐 책을 못 구해서 크게 아쉬운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스님의 글을 중학생 때부터 도서관에서 빌려 읽어서 참 좋아했지만, 직접 구입해서 읽어본 적은 없었다. 갑자기 스님의 유언 소식을 듣고 책을 찾는데 혈안이 된 내 모습이 씁쓸하게 느껴졌다. 마치 평소에 거들떠보지 않았던 하찮은 물건이 갑자기 사라진다거나 혹은 경제적 가치가 높아질 때 갖고 싶은 일종의 속물근성. 읽기 위해서 책을 사는 것이 아니라 가지기 위해서 책을 사는 것이다. 솔직히 고백하건대 나는 후자의 독자였다. 스님이 강조한 ‘무소유’ 정신을 위배하고 있었다.

 

“우리들의 소유 관념이 때로는 우리들의 눈을 멀게 한다. 그래서 자기의 분수끼리도 돌볼 새 없이 들뜬다. 그러나 우리는 언젠가 한 번은 빈손으로 돌아갈 것이다. 내 이 육신마저 버리고 홀홀히 떠나갈 것이다.” (‘무소유’, 27쪽)

 

육신을 버린 것은 아니지만 스님의 책을 향한 소유 관념을 버림으로써 나는 아무것도 갖지 않은 빈손의 독자가 되었다. 언젠가는 스님의 책, 아니 스님의 글이 다시 독자들이 볼 수 있는 날이 올 거라고 믿으면서.

 

그런데 인간의 역사가 소유사(所有史)인 것처럼 마찬가지 우리 삶도 우리네 몫을 위해 끊임없이 싸우고 하나라도 더 가지려는 소유사인 것은 분명하다. 절판 소식 이후에 온라인 서점이나 헌책방에 가면 스님의 책이 판매되고 있다. 그러나 그 가격이 상식을 넘어선다. 새 책 이나 다름없는 깨끗한 상태의『무소유』의 가격만 해도 10만원을 훌쩍 뛰어넘는다. 그뿐만 아니라 스님이 저자의 이름으로 출판되었다가 절판된 책들도 가격이 높게 책정되어 있다. 인지도 높은 저자가 쓴 책이 절판본이 되면 서점에서 다시는 판매되지 않고, 쉽게 구할 수 없다. 그 가치로 환산한다면 판매자는 가격을 정가보다 높게 책정할 수는 있다. 그러나 일부는 너무 터무니없이 가격을 높게 책정한다. 알라딘 중고샵을 검색하면 싼 가격으로 구입할 수 있으나 대부분 약간의 낙서나 사용한 흔적이 있는 ‘중’ 상태의 품질이다.

 

“이 책이 아무리 무소유를 말해도 이 책만큼은 소유하고 싶다.” (故 김수환 추기경)

 

김 추기경의 말씀처럼 아이러니하게도 가격이 비싸더라도 『무소유』을 포함한 스님의 책들은 소유하고 싶은 게 독자의 마음일 것이다. 나 또한 그렇다. 알라딘 온라인 중고샵에서 정가보다 비싼 가격으로 스님의 책을 구입한 적은 없지만, 작년 말부터 최근까지 스님의 책을 헌책방이나 알라딘 중고샵 매장에 저렴한 가격으로 구입했다.

 

 

 

 

 

 

 

 

 

 

 

 

 

 

 

 

 

사실 스님의 책을 다시 한 번 구입하기 시작한 것은 2011년부터였다. 그 때 스님이 번역한 고대의 불교 법전 『숫타니파타』를 반값할인으로 교보문고 매장에서, 『오두막 편지』는 동네에 있는 공공도서관에서 진행된 세일 행사에서 운 좋게도 딱 한 권 남아있는 것을 구입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무소유』마저 구입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지금까지 스님의 책을 구한 것만 해도 정말 나는 운이 좋은 편에 속한다고 본다. 살면서 여복(女福)은 지지리도 없지만, 책복(冊福)만큼은 좋은 것 같다. 재미있게도 이 저자의 책만큼은 꼭 구하고 싶은 마음 혹은 소유욕이 들면 기가 막히게도 그 책이 내 눈앞에서 발견된다.

 

 

 

 

 

 

 

 

 

 

 

 

 

 

법정 스님의 책을 몇 권 더 구할 수 있었던 결정적 계기가 대구에서도 열린 알라딘 중고샵 매장 덕분이었다. 가끔 스님의 책이 하루에 한 권에서 많게는 세 권 정도 고객이 이곳에 팔곤 한다. (이 글을 통해서 대구 중고샵 매장에 스님의 책을 파는 이름, 얼굴 모르는 분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진리의 말씀, 법구경』을 제외하면 나머지는 알라딘 중고샵 매장에서 직접 구한 것이다. 『법구경』은 올해 초에 대구시청 근처 헌책방에서 구했다.

 

 

 

 

 

 

 

 

 

 

 

 

 

 

 

알라딘 중고샵 매장을 남들보다 자주 들리는 편이라서 나름 큰 수확(?)을 거두지만, 여러 권 놓치는 경우도 꽤 많았다. 고객이 금방 판 책, 특히 시중에 구할 수 없는 스님의 책은 매장을 찾는 다른 고객들의 눈에 안 띌 수가 없다. 중고샵 매장에서 판매되는 스님의 책은 대부분 A 서가에 꽂혀 있다. ‘종교’ 분야의 책이 진열되는 B 서가나 에세이의 C 서가에 꽂혀 있다면 고객의 눈에 띌 확률은 적다. 그러나 항상 고객들이 많이 지나다니고, 다른 사람이 방금 매장에서 판 책들을 파는 A 서가에 꽂혀 있으면 모 아니면 도다. 검색해서 책이 판매되는 사실을 알고 나서 당장 매장으로 간다 해도 이미 다른 고객이 벌써 구입한 뒤다. 특히 『무소유』는 세 번의 허탕 끝에 중고샵 매장에서 구한 것이다. 다행히 내가 구입한 『무소유』는 A 서가가 아닌 에세이의 B 서가, 특히 고객의 시선이 많이 닿지 않는 가장 제일 아래에 위치하고 있었다. 운이 좋게도 『무소유』옆에는  『일기일회』도 있었다.

 

 

 

 

 

 

 

 

 

 

 

 

 

 

 

 

 『새들이 떠나간 숲은 적막하다』『버리고 떠나기』『서 있는 사람들』은 대구가 아닌 울산 알라딘 매장에서 구입했다. 지난 2월 말에 4박 5일 여행을 하게 되었는데 여행의 출발지가 울산이었다. 울산 버스터미널에 그 곳에서 4박 5일 여행에 동행하는 지인을 만나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너무 이른 시간에 도착해버리는 바람에 약속시간까지는 시간이 많이 남았다. 그래서 도보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울산 알라딘 매장에서 책을 구입하지 않고(!) 책만 읽기로 결심했다. 그런데 웬걸. A 서가에 법정 스님의 책, 그것도 세 권을 발견했다. 4박 5일 일정을 고려해서 여행 개인 경비를 쓰면 안 된다고 마음으로 다짐했건만,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안 사놓으면 여행가는 내내 후회할 것 같았다. 결국 세 권을 구입했다. 짐이 가득해서 비좁은 큰 배낭에 스님의 책 세 권을 넣은 채 나는 순조롭게 여러 지역을 돌아다녔다. 이상하게 짐은 무겁지 않았다.

 

‘무소유’를 소유한다. 그동안 스님의 책을 구입한 이유는 스님의 글이 좋은 것도 있지만 솔직히 소유욕을 버리지 못한, 이 못된 기질도 한 몫 하고 있다. 지금도 스님의 책을 펼치거나 가끔 책장에 따로 꽂혀 있는 스님의 책들을 보면서 일종의 죄책감이 들기도 한다. 과연 나는 책으로서 갖고 싶은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의도’(?)로 이 책을 갖고 싶은 것인가? 소유하고 난 뒤에서야 소유욕을 경계하는 마음이 든다.

 

지금도 스님의 책은 어디선가 판매되고 있다. 이 정도면 이미 ‘거래’인 동시에 ‘장사’다. 서글픈 아이러니다. 스님은 평생 무소유를 설파했지만, 정작 스님이 떠난 자리는 소유욕으로 넘쳐나고 있으니 말이다. 스님께서는 버리라 하는데 나는 더욱 더 쥐려한다.

 

사랑이니 무소유니 하는 진리를 말하긴 쉽지만 그것을 실천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법정 스님은 한평생 자신에게 칼날처럼 엄격하며, 단순하게 검소하게 살기를 원했고, 모든 것을 버림으로써 소유와 관계의 노예가 되지 않는 자유로움을 얻고자 했다.

 

이 세상 ‘말의 공해’에 일조한 것 같아 조금이나마 말을 거둬들이는 차원에서 절판을 생각했다는 스님, 글과 말의 덧없음을 절판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으로 깨우쳤던 스님. 그러나 중생은 여전히 마지막 길에 자신의 책들을 거두어간 스님이 야속하기만 하다. 『무소유』가 처음으로 중생들 앞에 등장했던 바로 오늘. 다시 한 번 『무소유』를 펼쳐보면서 표지를 쓰다듬어본다.

 

스님은 ‘베풂’보다는 ‘나눔’이란 말을 더 좋아했다. 도움을 주고도 얼굴이나 이름을 알리지 않는 ‘무상보시’ 원칙을 마음속에 새기고 실천하다 조용히 갔다. 마지막까지 자신을 버리고 맑고 향기로운 세상을 기원했다.

 

 

 

 

 

 

 

 

 

 

 

 


 
에리히 프롬은 『소유냐 삶이냐』에서 물질적 소유와 탐욕의 소유양식에서부터 창조하는 기쁨을 나누는 존재양식으로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소유와 탐욕을 조금이나마 벗어날 수 있다면 창조하는 기쁨을 통해 삶의 양식을 나누고 싶다. 스님이 떠나간 지 지금, 이 책들 가지고 맑고 향기로운 사회를 구현하는 활동을 해보려고 한다. 스님이 풀어놓은 말을 많은 사람들이 같이 읽고, 함께 생각하고, 또 영원히 기억하기 위해서 독서의 단상을 쓸 생각이다. 스님이 남긴 좋은 문장을 발췌해서 소개하고, 문장에 대한 여러 가지 생각을 자유롭게 풀어 쓸 것이다. 그리고 만약에 내가 죽을 때까지 스님의 책이 다시 판매되지 않는다면 그 때가지 구입한 책들을 ‘맑고향기롭게’ 재단에 기부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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