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초등학생이었을 때였다. 반 친구들끼리 재미있는 책 한 권을 돌려보던 시절이 있었다. 친구 한 명이 재미있는 만화책을 가져오면 너나 할 것이 서로 보고 싶다고 조른다. 가장 먼저 만화책을 보기 위해서 그 친구에게 뇌물(?)로 과자를 슬쩍 건넨다. 심지어 만화책 한 권 때문에 친구 간의 우정이 파탄 날 때도 있었다. 쉬는 시간이 되면 서로 자신이 먼저 만화책을 봐야 한다면서 실랑이를 벌이는 일이 많았다.

 

만화책 다음으로 가장 많이 인기가 있었던 것은 괴담, 공포 이야기를 모은 책이다. 특히 ‘공포특급’ 시리즈를 많이 읽었다. 공포를 주제로 한 책이 봇물 터지듯 나오기 시작한 때가 1990년대 초중반 무렵이다. 이런 책들은 아이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무서운 이야기 한두 가지 모르면 친구들과의 대화에 낄 수가 없었다. 이때 ‘빨간 마스크’ 괴담이 유행했다. 어디서 주워들은 괴담이 대화의 주제가 되었다. 옛날에 우리 학교가 있던 자리가 공동무덤이었다는 썰부터 시작해서 놀이터에 새벽이 되면 죽은 아이의 귀신이 떠돌아다닌다는 썰까지 근거 없는 괴담을 벌벌 떨면서 들었다.

 

 

 

 

 

 

이틀 전, 헌책방에서 추억의 책을 발견했다. 1992년에 나온 『세계의 요괴도감』(편집부 엮음, 사과나무)이라는 책이다. 이 책도 엄청나게 인기가 많았다. 귀신 이야기에 귀신이 그려진 그림까지 있는 책이었으니 누구도 안 볼 수가 없었다. 친구가 가져온 『세계의 요괴도감』을 읽었던 기억은 나지만, 끝까지 제대로 보지 못했다. 이 책을 읽고 싶은 친구들이 너무 많아서 천천히 읽을 수가 없었다. 수업시간에 몰래 읽어도 소용이 없었다. 고작 십 쪽 읽었을 뿐인데 읽는 순서를 기다리는 친구들이 자꾸 빨리 읽으라고 재촉했다. 그러다가 한 번은 어떤 녀석이 수업시간에 이 책을 몰래 읽다가 선생님에게 발각되고 말았다. 그 녀석 때문에 책은 압수되었고, 아직 책을 읽어보지 못한 친구들은 그 녀석을 원망했다. 그 친구 다음에 읽는 친구는 실망이 클 수밖에. 이 책을 수업시간에 몰래 읽으면 나름 긴장감이 높아진다. 그만큼 귀신 이야기에 몰입할 수 있다. 쉬는 시간에 읽으면 떠드는 아이들의 목소리 때문에 긴장감이 떨어진다. 

 

 

 

 

 

『요괴도감』은 특이한 형태로 만들어졌다. 종이를 가로로 넘기는 책이다. 무엇보다도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은 귀신과 괴물이 그려진 삽화다.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 등 세계의 귀신과 괴물을 소개하고 있다. 삽화가 엉성하지만, 흑백의 조화가 나름 그로테스크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처음 몇 장 정도는 천연색 삽화로 이루어졌고, 나머지는 흑백 삽화로 구성되었다. 책을 읽는 사람들에게 공포감을 주기 위해서 삽화에 흰색보다는 검은색을 주로 많이 사용한 것 같다. 어렸을 때는 이런 삽화가 무섭게 느껴졌는데 오랜 세월이 지난 뒤에 봐서 그런지 눈을 침침하게 만드는 삽화 인쇄가 불편했다. 그리고 예전처럼 책에 대한 호기심과 무서운 느낌을 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리스 신화나 북유럽 신화에 나오는 친숙한 괴물도 있기 때문이다.

 

 

 

 

 

 

 

헨리 퓌슬리  「악몽」  1781년

 

잠자는 여자들의 꿈속에 나타나는 악마 인큐버스(Incubus)를 그린 삽화다. 책은 ‘잉크부스’라고 표기했다. 영문 이름을 소리 나는 대로 적었다. 원래 인큐버스라는 이름에는 ‘위에 올라타다’라는 의미가 있다. 그래서 인큐버스를 잠자는 여자의 가슴 위에 올라타 있는 모습으로 그려졌다. 그런데 『요괴도감』의 삽화가는 잉쿠버스, 아니 인큐버스는 눈 뜬 여자를 공격하는 악마로 그렸다. 여자의 뱃살을 살짝 꼬집는 인큐버스의 자세가 재미있다.

 

 

 

 

 

 

 

 

 

 

 

 

 

 

 

 

『요괴도감』은 그리스 로마 신화와 각종 요괴 이야기를 모은 책을 참고해서 엮은 책이다. 특히 미츠키 시게루의 <세계 요괴 사전>(1985년, 일본 동경당)을 많이 참고했다. 미츠키 시게루는 요괴만화를 그린 거장으로 평가받는 만화가이다. 예전에 투니버스에 방영된 애니메이션 ‘요괴인간 타요마’의 원작자이기도 하다. (원제는 ‘게게게의 기타로’) 요괴 전문가라고 불릴 정도로 요괴도감을 편찬하기도 했는데 『요괴도감』은 원본을 발췌한 내용일 것이다. 지금도 그의 고향에 가면 만화에 나오는 요괴 동상들이 세워져 있는 ‘미츠키 시게루 로드’와 기념관이 있다.  

 

 

 

 

 

 

 

 

 

 

 

 

 

 

 

 

그밖에 예이츠가 쓴 <켈트 환상 이야기 모음>이라는 책도 참고했는데 『켈트의 여명』(펭귄클래식코리아, 2005년)으로 번역되었다. 예이츠는 1923년에 노벨 문학상을 받은 아일랜드의 시인이다. 그도 켈트족 전설과 신화와 환상적인 민담을 복원할 정도로 초자연적인 이야기에 관심을 가졌다. 시인으로 이름이 알려지기 전에 예이츠는 영국의 낭만주의 화가이자 시인인 윌리엄 블레이크의 작품 주석집을 내기도 했다. 블레이크는 신비적 경향을 주제로 시와 그림을 남긴 낭만주의의 선구자다.

 

 

 

 

 

 

이 책의 인쇄 정보를 보면 펴낸이가 '김충원'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김충원 미술교실’을 세울 정도로 드로잉의 재미를 대중에게 알리기 시작한 그 김충원 교수이다. 1990년대 초반에 김 교수는 출판사 ‘사과나무’를 운영한 적이 있다. 지금 생각해보면, 김 교수가 직접 그린 그림이 있는 아동도서도 아이들이 즐겨 읽었다. 특히 ‘퀴즈탐험 신비의 세계’ 시리즈와 ‘IQ 게임 만화퀴즈’ 시리즈를 좋아했다. 이 책들을 펴낸 진선출판사는 현재까지도 김 교수의 드로잉북 시리즈를 출간하고 있다. 

 

요즘 아이들은 공포 이야기를 모은 책이나 만화를 즐겨 읽을까? 문득 궁금해진다. 이런 책들이 지금도 나오더라도 잘 안 읽을 것 같다. 스마트폰으로 무서운 이야기나 괴담을 접할 수 있으니까. 스마트폰이 나오지 않았던 시절에는 그냥 글자가 적힌 무서운 이야기를 읽으면 무서워서 벌벌 떨 때가 있었다. 책을 다 읽고 난 뒤에도 그 공포의 여운이 남아 있다. 자꾸 그 무서운 이야기가 떠올라서 잠이 오지 않기도 했다. 이것이 바로 이야기가 인간에게 주는 위력이다. 공포 이야기 모음집은 괴기하고 초자연적 현상에 대한 호기심과 공포심을 충분히 자극할 만했다.

 

 

 

 

 

 

그런데 요즘은 귀신보다 더 무서운 것들이 존재하는 세상이다. 요괴들의 세상이 아닌 요괴보다 더 무서운 인간들의 세상이다. 흉측하고도 비인간적인 사건들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난다. 요괴보다 인간이 더 무서운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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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 전에 신형철의 『정확한 사랑의 실험』(마음산책, 2014년)이 나왔을 때 책 표지가 낯익었다. 음산한 기운이 감도는 텅 빈 방.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지만, 방바닥에는 시든 채 흩어진 꽃다발이나 각종 잡동사니가 널브러져 있다. 사진의 제목은 ‘열아홉 번째 사랑의 방’. 프랑스의 사진작가 베르나르 포콩의 ‘사랑의 방’ 연작 시리즈 중 하나이다.

 

 

 

 

 

 

 

 

 

 

 

 

 

 

 

 

 

 

 

 

 

베르나르 포콩은 지나간 시간을 주제로 지적이고 회화적인 사진작품으로 명성을 얻었다. 작가가 자신의 의도대로 장면을 구성해 찍는 ‘메이킹 포토’ 기법을 활용한다. 그의 사진 작품은 10년 전에 이미 우리나라에 전시회를 연 적이 있었고, 전시회를 계기로 사진집 『사랑의 방』(마음산책, 2003년-품절)도 출간되었다. 2001년에 여행작가 앙토넹 포토스키가 쓴 문장을 함께 엮은 사진집 『청춘. 길』도 마음산책 출판사에서 나왔다.

 

 

 

 

 

몇 달 전부터, 거의 매일 밤, 사랑 꿈을 꾼다. 잠에서 깨어나며 나는 내가 늙었다고, 청춘을 둘러싼 마술 영사(映寫)의 원 밖으로 내던져지고, 시간의 온갖 협박에 사로잡혀 있다고 느낀다. (64쪽)

 

 

『사랑의 방』의 발문을 맡은 사진평론가 진동선은 베르나르 포콩을 ‘가장 프랑스적인 사진가’라고 평가한다. 그의 사진에 등장하는 사물들은 우리 삶에 상실되는 대상이다. 한편으로 그들의 부재는 추억을 쫓는 그리움을 불러일으킨다. 특히 사랑이라는 감정은 한순간 우리 삶에 가까이 빛나다가 언젠가는 추억의 재가 되어 사라진다. 아폴리네르의 ‘미라보 다리’에 나오는 시구처럼 사랑은 너무나 쉽게 우리 곁을 떠나가 버린다. 흐르는 물처럼. 그것을 다시 잡을 수도, 그때 그 시절로 되돌릴 수 없다. 세월은 가고 오직 지나간 사랑을 그리워하는 내가 남을 뿐이다.

 

 

 

 

 

가장 찍고 싶은 것이 가장 찍을 수 없는 것이다. 사랑의 얼굴. (44쪽)

 

 

베르나르 포콩은 ‘사랑의 방’ 연작을 통해서 우리가 갈망하는 사랑의 실체를 카메라에 담았다. 그래서 그의 사진과 단상은 다소 관념적이다. 일부 독자는 그의 사진을 보면서 ‘아름답다’라는 느낌을 떠오르지 않을 것이다. 단상은 여러 번 곱씹으면서 읽어야 이해할 수 있다. 역시 이미 지나가 버린 ‘사랑의 실체’를 확인하기는 쉽지만 않다. 특히 나처럼 사랑을 하고 실연을 겪어보지 않은 ‘연애 고자’에게는. 전혀 사랑하는 않는 것보다는 사랑을 하고 실연을 당하는 것이 낫다고 말한 알프레드 테니슨의 명언을 되새겨 본다. 아마도 이 책은 몇 십 년 지난 뒤에 다시 읽어봐야겠다. 그때쯤이면 사랑의 단맛, 쓴맛 다 맛봤을 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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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14-11-10 1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무언가가 지나가고 남은 자리의 사진 같군요. 베르나르 포콩은 미처 몰랐는데 님 덕분에 좋은 사진 또 감상할 기회를 가지네요.

cyrus 2014-11-10 21:12   좋아요 0 | URL
생각날 때마다 다시 읽어보면 좋은 사진집입니다. 제목도 좋고요. 품절이 되어서 아쉽게 생각하는 책입니다.
 

 

 

 

 

 

 

 

 

요즘 헌책방이나 알라딘 중고서점에 가면 황금가지 출판사의 ‘환상문학전집’ 시리즈를 구입한다. 2002년에 환상문학전집 첫 번째 책인 E.T.A. 호프만의 『악마의 묘약』을 시작으로 고딕문학에서 현대 SF까지 총 40여 권 이상의 작품들이 소개되었다. 하지만 초창기에 나온 시리즈 일부는 절판되어 헌책방에서도 구하기가 쉽지 않은 희귀본이라서 온라인 중고서점에 정가보다 엄청 높은 가격으로 책정되고 있다. 정말 그 책을 읽고 싶은 간절한 마음을 이기지 못해 거금을 지르는 결단력을 내리기도 있지만, 이성적으로 생각해보면 고작 책 한 권으로 터무니없는 가격을 지불하는 것은 어리석은 판단이다. 그래서 아주 싼 가격에 책을 구입하게 되면 정말 운이 좋은 것이다. 이런 걸 요즘 유행하는 말로 표현하면 ‘개이득’이다.

 

 

 

 

 

 

 

 

 

 

 

 

 

 

 

 

 

 

(※ 왼쪽은 1998년에 나온 구판) 

 

 

 

환상문학전집 세 번째 작품 에드거 앨런 포의 『아서 고든 핌의 모험』은 올해 구입한 책들 중에서 운이 많이 따라줬다. 두 달 전에 포의 단편 전집을 읽고 있을 때 알라딘 대구점에서 구입했다.

 

『아서 고든 핌의 모험』(줄여서 ‘아서 고든 핌’)은 1838년에 발표한 포의 장편소설이다. 단편소설과 시를 많이 남긴 작가의 이력이 장편소설의 가치를 가리고 있지만, 단편소설에서 보여준 괴이한 공포 분위기와 그 속에서 시시각각 변화하는 인물의 심리 묘사는 장편소설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다.

 

 

 

 

 

 

 

 

 

 

 

 

 

 

 

 

간략한 작가 이력 소개에 보면 『아서 고든 핌』을 포의 유일한 장편소설이라고 썼는데 이는 잘못된 내용이다.*1) 1840년에 포는 『The Journal of Julius Rodman』라는 잡지에 연재되는 모험소설을 썼기 때문이다. 『The Journal of Julius Rodman』은 1792년에 처음으로 로키 산맥을 넘어 미국 서부 황야 지역을 탐험한 Julius Rodman의 일기를 소설로 재구성한 내용이다. 이 작품은 미완성으로 남게 되어 오랫동안 잊히고 있었다가 1947년에 재출간되어 빛을 보게 되었다.

 

 

 

 

 

 

 

 

 

 

 

 

 

 

 

『아서 고든 핌』은 환상소설의 특성을 가미한 모험소설이다. 1830~1840년대 모험소설은 독자들로 하여금 미지의 세계로 향하는 도전 정신을 고취시키는 통속적인 내용이 큰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포의 『아서 고든 핌』은 미지의 세계에 대한 인간의 원초적 공포를 적나라하게 묘사했다. 남극으로 가는 긴 바닷길을 장시간 항해를 하면서 겪게 되는 불의의 재난 사고와 이성이 말살되는 끔찍한 살육 현장은 여행의 긍정적 호기심과 도전 정신에 감춰진 어두운 단면이다. 특히 모든 것을 집어삼키고 파괴하는 거대한 폭풍과 파도 앞에서 두려워하는 핌의 심리는 『아서 고든 핌』발표 3년 후에 나온 단편 ‘소용돌이 속으로 떨어지다’를 예고한다. 이 작품에 포는 무시무시한 소용돌이 파도의 위력을 묘사했다. 

 

여기에 『아서 고든 핌』의 간략한 줄거리를 언급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알라딘 책 소개에 아주 친절하게도 줄거리가 요약되어 있다. 이 책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아서 고든 핌과 나머지 생존한 동료들이 바다 한가운데서 만나는 공포의 난파선이다. 어렸을 때 아동도서에서 많이 나오는 미스터리 에피소드인 ‘유령선’ 이야기가 생각나는 장면이다.

 

그리고 이 소설에서 독자가 가장 몰입하게 되는 장면이 바로 ‘죽음의 제비뽑기’다. 간신히 목숨을 부지한 핌과 동료들은 굶주림을 견디지 못하자 제비뽑기로 ‘음식’이 될 희생자를 정하게 된다. 이 잔인한 장면은 비록 4쪽에 불과하지만 생존의 한계에 부닥치는 상황에서 드러나는 인간의 광기를 강렬하게 보여준다.

 

어렸을 때 아동용으로 만들어진 미스터리 모음집을 즐겨 본 사람이라면 『아서 고든 핌』의 ‘죽음의 제비뽑기’ 장면을 떠올리는 실제 사건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1884년에 영국의 미뇨넷 호라는 배가 희망봉 앞바다에서 난파되는 사고가 발생했다. 이때 살아남은 선원은 단 4명. 이들은 작은 구명보트에 탑승한 채 열흘 이상 표류하게 된다. 하루하루 구조를 기다리지만, 점점 식수와 비상식량이 줄어들고 있었다. 구조선을 만나지 못하면 4명의 선원들도 굶어죽게 될 판이었다. 어느 날, 가장 나이가 어린 선원이 병에 걸려 몸이 약해지자 선장인 더들리는 나머지 두 명의 선원들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한다. 바로 제비뽑기를 해서 한 사람을 희생하는 것이다. 하지만 한 명의 선원은 선장의 제안을 거절한다. 배고픔을 달래기 위해 어찌 동료를 죽일 수 있겠는가. 그러나 선장 더들리는 자신의 제안을 동의한 선원과 함께 어린 선원을 살해하고 그의 인육을 먹게 된다. 표류 24일 만에 더들리 선장과 두 명의 선원은 구조되었으나 영국으로 귀국한 후 그들은 계획된 살인이라는 이유로 사형선고를 받게 된다. 그 후에 미뇨넷 호의 생존자들은 특사에 의해 6개월 징역으로 감형되었다.

 

생존자들은 단지 살기 위해서 어쩔 수 없는 극단적인 선택이라고 항변했으나 그 당시로서는 엄청난 파장을 일으킨 사건이었다. 생존을 위해 인육을 먹은 것이 죄가 되는지 논란이 되었다. 하지만 미뇨넷 호 사건이 흥미로운 화제가 된 결정적인 이유는 따로 있었다. 『아서 고든 핌』에 나오는 ‘죽음의 제비뽑기’ 내용과 아주 흡사한 점이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미뇨넷 호에 희생된 어린 선원의 이름이 소설 속에서 희생된 인물의 이름과 같다는 것이다.*2) 약간의 차이점이 있다면 소설은 제비뽑기에 걸린 선원이 살해되었고, 미뇨넷 호 사건의 경우는 제비뽑기 제안이 거부당하자 병이 들어 생존할 가능성이 희박한 선원을 살해했다. 단지 희생자의 이름이 같다는 우연한 사실에 지금까지도 포의 소설과 미뇨넷 호 사건의 연관성에 주목하고 있다. 미뇨넷 호의 생존자들은 여태까지 『아서 고든 핌』을 한 번도 읽어보지 못했으며, 포가 누군지도 몰랐다고 한다.*3)

 

『아서 고든 핌』의 초반부는 갑판 밑 창고에 숨은 핌이 밀실 공포와 악몽에 시달리고, 배가 난파되어 표류되는 상황을 그렸다면, 후반부는 영국 리버풀의 제인 가이 호에 구출되어 살랄 섬이라는 신비스러운 곳에서 겪는 사건을 다루고 있다. 살람 섬에 대한 묘사는 이 소설에서 포의 상상력이 가장 돋보이는 내용이다. 핌은 살랄 섬 해안 부근에 정체불명의 육지 동물의 시체를 발견하고, 여러 가지 빛깔을 띠는 특이한 물을 신기하게 여긴다. 이에 대한 묘사는 문학작품 속 환상적인 장면을 모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상상 동물 이야기』(까치, 1994년-절판)에도 소개되고 있다.

 

 

 

 

우리는 또한 호손 나무처럼 붉은 열매가 달린 관목도 건져 올렸으며, 이상하게 생긴 육지 동물의 시체도 건져 올렸다. 길이는 90센티미터였지만 키는 180센티미터였고, 아주 짧은 네 다리가 있었는데, 발은 산호같이 선명한 진홍빛이었다. 몸은 곧고 순백색의 비단 같은 털에 덮여 있었다. 꼬리는 쥐처럼 서 있었고 45센티미터 정도였다. 머리는 귀를 제외하고는 고양이를 닮았는데, 귀는 마치 개의 귀처럼 꺾여 있었다. 그리고 이빨은 발과 마찬가지로 선명한 진홍빛이었다. (『아서 고든 핌의 모험』 중에서, 175쪽)

 

 

『아서 고든 핌』의 결말은 이야기가 도중에 끊겨버리는 것처럼 급작스럽게 끝나버리고 만다(스포일러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포다운 결말이다. 포는 결말마저도 수수께끼를 남겨두었다. 이러한 방식은 주인공이 미지를 개척하는데 성공하게 된다는 기존의 모험소설 결론과 차별화되는 시도이다. 포가 어떤 수수께끼를 남겨두었는지 확인하고 싶다면 직접 읽어볼 것을 권한다.

 

포의 수수께끼 결말은 수많은 모험소설을 써서 유명해진 쥘 베른(1828~1905)을 매혹시켰다. 포에 의해 사라진『아서 고든 핌』의 결말을 상상하여 ‘빙원의 스핑크스’라는 제목의 속편을 썼다. ‘빙원의 스핑크스’는 황금가지에 나온 『아서 고든 핌』에 수록되었다. 황금가지 판본이 희귀본이 될 수밖에 없는 또 다른 이유는 장편을 주로 쓴 베른의 짧은 이야기라는 점 그리고 다른 책에서 볼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알려지지 않은 작품이다.

 

 

 

 

 

황금가지판『아서 고든 핌』이 다시 서점에 등장할 확률은 희박하지만, 혜원출판사 세계문학전집 21번째 책인 『검은 고양이』에 ‘아서 고든 빔의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수록되어 있다. 왜 ‘핌’ 아닌 ‘빔’이라고 표기했을까? 원어명은 ‘Pym’이기 때문에 ‘핌’이라고 해야 한다.

 

 

 

 

*1) 한국판 위키피디아의 ‘에드거 앨런 포’ 항목에 나오는 작품 목록에 보면 ‘The Unparalleled Adventures of One Hans Pfall’를 장편소설로 소개하고 있다. 우리말로 옮기면 ‘한스 팔의 환상 여행’이다. 『우울과 몽상』에 수록되어 있다. 그런데 이 작품의 분량은 50쪽도 채 되지 않는다. ‘장편’이라기보다는 ‘중편’에 가깝다고 봐야 한다.

 

*2) 『아서 고든 핌』의 ‘죽음의 제비뽑기’에서 희생된 인물 그리고 미뇨넷 호에 희생된 실제 인물의 이름을 일부러 언급하지 않았다. 만약에 이름을 언급했다면 책을 읽지 않은 독자에게 치명적인 스포일러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3) 이지성의 『꿈꾸는 다락방』1권 서문에 『아서 고든 핌』의 ‘죽음의 제비뽑기’와 미뇨넷 호 사건에 관한 미스터리 에피소드가 언급된다. 저자는 꿈을 글로 기록해서 시각화하면 현실로 이루어진다는 자신의 주장을 전달하기 위한 사례로 이 미스터리 에피소드를 소개하고 있다. 그러면서 “포가 미래의 어떤 사건을 자신의 두 눈으로 직접 바라보듯 생생하게 꿈꾸면서 그것을 글로 적었다”(9쪽)라고 썼다. 자신의 주장을 설득력 있게 전달하기 위해서 흥미로운 이야기를 인용하는 것은 좋으나, 사실인 것처럼 쓴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소설 속 장면과 미뇨넷 호 사건에서 어느 부분 일치한 점은 있지만, 그것은 그저 우연에 불과할 수도 있다. 포라는 인물 자체가 특이한 기행(奇行)에, 시대를 앞서가는 상상력을 구사하는 위대한 작가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포가 마치 미래에 일어날 일을 두 눈으로 목격하고 예언하듯이 소설을 썼다는 저자의 주장은 과장에 가깝다. 그리고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소설 속 희생자와 미뇨넷 호의 희생자의 이름만 같을 뿐이지 살해되는 과정은 다르다. 이지성은 미뇨넷 호의 희생자가 소설의 내용처럼 제비뽑기에 의해 희생되었다고 썼는데 이는 사실과 다른 내용이다. 심지어 소설 제목도 ‘아서 고든 빔’으로 잘못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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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여 년 동안 자살에 관한 연구를 해 온 프랑스의 유명 저널리스트이자 작가인 마르탱 모네스티에의 『자살』(2002년, 새움출판사, 품절)은 인간의 역사와 자살의 모든 양상들을 환기시키고 있다. 감정적 자살, 가미카제의 자살, 희생자살, 저항자살, 모방자살, 집단자살, 종교적인 자살 권고에 이르기까지 여러 종류의 자살을 소개하고 있다. 아마 지금까지 이 분야에 관하여 출간된 모든 저작들을 집대성한 역작일 것이다. 세계 각국의 살인 범죄 사건을 범죄심리학적으로 분석한 콜린 윌슨의 『현대살인백과』(종합출판범우, 2011년, 품절)와 짝을 맞출 수 있는 ‘현대자살백과’이다.

 

 

 

 

 

 

 

 

 

 

 

 

 

 

 

 

 

모네스티에의 책은 1999년 『자살, 도대체 왜들 죽는가』라는 제목으로 첫 선을 보였다. 출판사는 올해 초 카뮈의 대표작 『이방인』 번역 논쟁으로 이름을 알리게 된 ‘새움출판사’다. 그러나 1999년에 출판된 책은 원서 일부를 발췌 번역한 것이었다. 완역본은 총 9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1999년 판에 소개된 내용은 6부에 불과했다. 2002년에 『자살』이라는 새로운 제목과 표지로 완역본이 나왔고, 이듬해 양장본이 나왔다. ‘자살’이라는 책의 제목이 독자 입장에서는 꺼림칙하게 느껴질 법하고, 선뜻 읽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게 된다. 완역본 표지에 있는 그림도 꽤 충격적이면서도 분위기가 으스스하다. 15~16세기 유럽으로 추정되는 그림 속 여인은 젖가슴을 훤히 보일 정도로 옷을 반쯤 벗은 상태에서 자신의 복부에 칼을 찌르고 있는 중이다. 이제 막 목숨을 끊으려는 여인의 표정은 상당히 멜랑콜리하다.

 

 

 

 

 

 

 

 

 

 

 

 

 

 

 

 

최근에 알라딘 중고서점에서 2002년 완역본을 발견했을 때 횡재했다. 2008년에 나온 개정판인 『자살백과』도 품절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막상 책을 사기 위해 카운터로 계산했을 때 점원의 눈치가 신경 쓰였다. 아마도 책의 제목과 표지 때문에 점원은 놀라면서도 이 책을 사는 고객이 조금은 이상하게 보였을 것이다. 자살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책을 읽고 있었을 뿐인데...

 

이 책에 대한 독자서평을 보게 되면 자살에 대한 사례와 유형만 나열되어 있을 뿐, 깊이 있는 분석과 통찰이 부족하다는 평이 대체로 많았다. 다양한 기록에 대한 저널리스트적인 호기심과 수집은 칭찬해줄만 하나, 백과사전 수준의 나열에 그친 ‘자살백과’가 되었다. ‘자살이 과연 나쁜 것인가 ’하는 명제를 철학적으로 파고들려는 시도는 하고 있지만, 몽테스키외, 뒤르켕, 몽테뉴 등 유명 명사들의 말을 단순 인용하는데 그치고 있다.

 

저자가 아무리 자료 수집이 탁월한 저널리스트라고 해도 사실을 날조한 내용을 진위 여부를 하지 않은 채 소개한 점은 옥에 티다. 저자는 희생적 집단 자살의 사례로 든 ‘칼레의 시민’은 후대에 왜곡, 과장된 내용이다.

 

‘칼레의 시민’은 영국과 프랑스의 백년전쟁 당시 프랑스의 항구 도시 칼레를 구한 영웅들을 말한다. 칼레 시민군은 영국군의 집중 공격에 끝까지 저항하지만 끝내 함락되어 모두가 몰살될 위기에 처한다. 백기를 든 칼레 시장 비엔은 영국 왕의 선처를 호소했다. 칼레의 저항으로 악전고투했던 영국 왕 에드워드 3세는 조건을 내걸었다. 시민을 대표하는 6명이 스스로 나서 처형을 받는다면 나머지 사람들은 살려주겠다는 것. 가혹했다. 의견이 분분했다. 시민들 각자 무슨 생각을 했을지, 어떤 반응을 보였을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에드워드 3세는 칼레의 분열과 자멸을 의도했을 게다. 그러나 칼레 시민은 달랐다. 최고 갑부가 먼저 자원했다. 이어 가장 존경받는 사람이 따라 나섰다. 이런 식으로 6명은 채워졌다. 영국군 진지 앞에 선 그들에게 마침내 교수형 집행 명령이 떨어졌다. 이때 임신 중이던 왕비가 간청했다. 뱃속의 왕자를 위해서라도 저들에게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에드워드 3세는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는 왕비의 뜻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이야기와 달리 칼레 항복에 관한 기록들에 의하면 에드워드 3세는 칼레의 시민 대표를 처형하려는 의도가 없었다고 한다. 칼레 시민 대표는 처형받기 위해서 나섰다기보다는 자신의 잘못을 참회하는 죄인이 광장에서 공개적으로 행진하는 종교 의례와 유사한 행위로 추정한다. 또 이 이야기는 프랑스인의 애국심이 투영되어 민족 정서에 호소하는 미담으로 가공되었고, 민족주의 열기가 고조되던 19세기부터 칼레의 시민들은 민족 영웅으로 부각되었다. 그래서 칼레 시민 대표의 행위를 집단적 자살의 사례로 보기 어렵다.

 

 

 

 

 

 

 

 

 

 

 

 

 

 

 

 

 

책의 완성도를 떨어뜨리는 또 다른 주범은 오탈자의 등장이다. 특히 영문 표기법을 따르지 않은 듯한 인명(人名)의 오탈자는 번역자(두 명의 번역자가 공동 번역했다)의 상식을 의심케 한다. 책을 읽으면서 발견한 오탈자를 소개해본다.

 

아베라르는 종교의 길로 들어가면서 로이즈에게 편지를 써서 그녀와 함께 무덤에 들어가고 싶다는 뜻을 전했다.” (126쪽)

 

중세 유럽을 발칵 뒤집은 유명한 스캔들의 주인공. 철학의 대가이자 성직자였던 아벨라르와 그보다 16살 어린 엘로이즈를 언급하고 있다.

 

“임신 중이던 쟌느 에뷰텔느는 모딜리아니가 죽은 다음 날, 너무나 사랑했던 사람이 죽은 것을 슬퍼하여 5층 창문에서 뛰어내렸다.” (126쪽)

 

이탈리아의 화가 모딜리아니가 병으로 사망하자 그의 아내인 쟌느 에뷔테른(또는 ‘잔 에뷔테른’)가 자살한 사건을 소개했다.

 

타시가 쓴 「연대기」에는 텔 식스트가 어머니의 애무를 거부하고 자살한 것으로 되어있다.” (136쪽)

 

아우구스투스에서 네로까지 네 황제에 걸친 로마의 치세를 정리한 『연대기』의 저자는 ‘타키투스’이다.

 

“전기작가 에토니우스에 의하면 옥타비아누스는 부르터스의 머리를 잘라 로마로 보내 케사르 동상 아래에 던지게 했다고 한다.” (153쪽)

 

‘부르터스’(브루투스), ‘케사르’(카이사르)는 봐줄 수 있다. 그런데 12명의 로마황제의 전기를 쓴 고대 로마의 전기 작가 수에토니우스를 ‘에토니우스’로 표기한 점은 너무 심했다.

 

 

2008년 개정판이라면 2002년 완역본의 오탈자를 바로 잡을 줄 알았건만, 2008년 개정판 100자평에 오역, 오타를 지적한 내용이 있다. 개정판이 아니라 책 표지와 제목만 살짝 바꾼 것뿐이다.

 

 

 

 

 

 

 

 

 

여러 모로 내용과 편집 면에서 아쉬움이 많이 남은 책이지만, 결국 이 책을 읽으면서 딱 하나 얻은 결론은 이렇다. 인간은 여러 가지 이유로 자살한다. 사랑, 부끄러움, 중상모략, 불명예, 이타적인 희생, 명령, 신념, 정치적 위기, 빈곤과 파산, 정신 질환, 부당한 대우, 미신과 주술 등이다. 쉽게 말해서 삶의 모든 관념과 행위가 죽음의 이유가 될 수 있는 셈이다. 그리고 평범함을 거부하는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자살하는 과정은 죽기 위해 온갖 기발한 방법을 시도하는 토끼가 나오는 앤디 라일리의 만화 『자살토끼』(거름, 2004년)를 떠오르게 한다.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는 일련의 자살들은 신념의 표현이라기보다는 헤어날 수 없는우울의 자기 도덕적인 표현에 가까운 것이다. 미셸 푸코의 지적처럼 자살은 ‘상상할 수 있는 최후의 방법’이다. 자살이 전면화한다는 것은 다른 가능성을 상상할 수 있는 길들이 사회 내부적으로 폐쇄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사회가 막다른 골목일 수밖에 없을 때, 그것처럼 우울한 일이 또 있을까. 막다른 골목의 우울이 사람들을 자살로 이끌었다면, 살아 있는 사람들은 그 막다른 골목의 우울을 살아간다. 따라서 우울은 죽은 자와 살아 있는 자 모두의 것이 된다. 자살이 단발적인 사건으로 끝나지 않고, 자살 신드롬으로 이어지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자살에도 문화적인 요인, 달리 말하면 모방과 유행의 측면이 있다. 하지만 적어도 자살만큼은 문화 현상으로 자리 잡지 않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삶의 고유성과 죽음의 숭고함에 대한 세심한 배려를 회복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한 시절이다.

 

 


 

 

 

 

 

 

 

 

 

 

 

 

P.s  마르탱 모네스티에는 독특한 주제에 관심이 많은 언론인이다. 그는 자살뿐만 아니라 심지어 ‘똥오줌’에 관한 역사를 집대성하기도 했다. 문학동네에서 『똥오줌의 역사』(2005년, 품절)로 번역, 출간되었다. 우리가 더럽게 생각하는 똥오줌도 역사의 주제가 될 수 있다니. 지저분한 내용이 많겠지만, 실로 흥미로운 책이 아닐 수 없다. 『자살』만큼 독자들을 확 끌어당길 정도로 책 제목이 마음에 들지 않지만, 이 책도 중고샵이나 헌책방에 발견된다면 꼭 구입하리라. 그런데 이 책도 정가보다 비싼 가격으로 책정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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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25년 간 『사이언틱 아메리칸』지의 수학 칼럼 편집 및 퍼즐 제작자로 활동하고, 루이스 캐럴 연구가로 유명한 마틴 가드너는 앨리스 2부작(『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와 『거울 나라의 앨리스』은 어린이들이 읽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책이라고 말했다. 일관성 없는 줄거리와 갑작스런 전환 때문에 독서 의욕을 잃게까지 할 수 있다. 더구나 작가의 해학과 역설을 포착하기 위해서는 작품의 시대적 배경에 대한 지식 또한 필요하다.

 

 

 

 

 

 

 

 

 

 

 

 

 

 

그래서 마틴 가드너는 1960년 ‘주석 달린 앨리스’를 처음 냈고, 1990년 ‘좀 더 주석 달린 앨리스’를 냈다가 2000년 결정판 ‘앨리스’를 출간했다. 이 결정판은 북폴리오에서 번역돼 나왔다. 꼼꼼한 주석뿐만 아니라 존 테니얼의 원본 삽화와 근래에 발견된 그의 연필 스케치 그리고 존 테니얼의 반대로 『거울 나라의 앨리스』 첫 번째 판본에 실렸다가 삭제된 ‘가발을 쓴 말벌’이 수록되어 있다. 마틴 가드너의 『앨리스』 결정판은 앨리스 마니아가 꼭 읽어야 하는 책이었으나 현재 절판되었다.

 

 

 

 

 

 

 

 

 

 

 

 

 

 

 

마틴 가드너는 20대가 돼서야 앨리스 2부작의 매력에 빠져들었다고 한다. 그 후, 『사이언틱 아메리칸』에 수학 퍼즐을 만들기 시작하면서 역시 수학 퍼즐이나 마술을 만드는 것을 좋아했던 루이스 캐럴에게 정신적인 친밀감을 느꼈다. ‘좀 더 주석 달린 앨리스’를 발간한 지 6년 뒤에 가드너는 ‘앨리스’의 작가 루이스 캐럴이 아닌 ‘수학 레크레이션 전문가’ 루이스 캐럴를 소개하는 책을 쓰게 된다. 책 제목은 『The Universe in a Handkerchief

: Lewis Carroll’s Mathematical Recreations, Games, Puzzles, and Word Plays 』. 우리말로 직역하면 ‘손수건 속의 우주’이다.

 

 

 

 

『실비와 브루노, 결말 짓다』에 실린 삽화, 마인 헤어가 뮤리엘 양에게 안과 밖이 없는 손수건을 만드는 방법을 보이고 있다. 어린이들에게 특이하고 재미난 놀이나 게임을 알려주는 캐럴의 모습을 보는 듯하다. (삽화는 마틴 가드너의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 27쪽에 인용함) 

 

 

‘손수건 속의 우주’는 루이스 캐럴의 또 다른 작품 『실비와 브루노』의 속편 『실비와 브루노, 결말 짓다』에서 나오는 안과 밖을 구별할 수 없는 손수건을 의미한다. 작품에 등장하는 마인 헤어라는 교수가 뫼비우스의 띠를 설명하면서 이와 유사한 3차원 단면을 만들었는데 ‘포추나터스의 지갑’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이것으로 전 우주를 담을 수 있다고 한다.

 

 

 

 

 

루이스 캐럴은 앨리스 2부작뿐만 아니라 『실비와 브루노』『실비와 브루노, 결말 짓다』『스나크 사냥』 같은 소설을 남겼다. 이 세 작품은 앨리스 2부작의 명성에 비해 국내에 덜 알려져 있지만, 수수께끼 시, 언어유희, 수학 퍼즐 등을 풍부하게 담고 있는 걸작이다. 생전 캐럴은 『실비와 브루노』가 자신의 역작이라고 생각했으며 지금도 앨리스 2부작과 마찬가지로 캐럴 연구가들로부터 많은 관심을 받는 텍스트이다.

 

 

 

 

 

 

 

 

 

 

 

 

 

 

 

 

마틴 가드너의 『The Universe in a Handkerchief』는 캐럴이 쓴 소설, 편지, 각종 팸플릿에 찾아낸 각종 수학 퍼즐, 수수께끼, 마술 등 흥미로운 내용을 소개한다. 단순히 캐럴의 삶을 조명했다기보다는 그동안 앨리스에 가려진 캐럴의 수학적 재능에 초점을 맞췄다. 그래서 국내에 번역된 책의 제목이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푸른미디어, 2000년, 절판)이다. 국내에 출간 당시, 책 제목을 원제 그대로 옮겨 썼다면, 이 책이 루이스 캐럴에 관한 내용을 다룬 건지 독자는 알 수 없을 것이다. 그 때 『실비와 브루노』가 아직 번역되지 않았으니까. 『실비와 브루노』는 속편과 함께 2011년에 페이퍼하우스에서 최초로 출간되었다. 잘 알려지지 않았던 캐럴의 소설이기에 출간 소수의 캐럴 마니아들로부터 많은 관심을 받았으나 어느새 이 책도 품절되었다.

 

 

 

 

 

 

마틴 가드너의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는 그동안 캐럴의 전기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흥미롭운 내용이 가득하다. 수학 퍼즐뿐만 아니라 그가 어린이들을 위해 만든 단순한 오락에서 암호와 농담이 들어 있는 수수께끼 시와 편지 내용을 소개한다. 앨리스를 즐겨 읽은 독자라면 『거울 나라의 앨리스』의 에필로그에 나오는 시에 캐럴이 암호를 숨겨 놓은 사실을 알 것이다. 각 행의 첫 번째 글자들을 모으면 캐럴이 좋아했고, 앨리스의 실제 모델인 소녀의 이름이 된다. 캐럴은 이와 유사한 형태의 시를 자주 쓰곤 했다. 그리고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미친 모자쟁이가 내는 수수께끼는 답이 없는 걸로 유명하다. “까마귀와 책상이 같은 점이 무엇일까?”

 

 

 

 

 

캐럴은 평생 독신으로 살았는데 내성적인 성격에다가 말더듬이였다. 그러나 그는 아이들을 즐겁게 해주는 능력은 있었다. 손수건과 냅킨으로 다양한 물체를 접을 수 있는 방법을 아이들에게 가르쳤다고 한다. 그가 만든 종이 딱총 접는 법은 종이접기를 꽤 해본 사람들이라면 알만한 단순한 접기 방식이다. 나는 초등학생 때 캐럴이 만든 방법처럼 종이 딱총을 접어본 적이 있었다. 오래 전부터 이런 단순한 종이 접는 법을 캐럴이 알고 있었다는 사실에 놀랍다.

 

 

 

 

 

 

 

 

 

역사상 가장 유명한 수학 퍼즐리스트의 양대 산맥인 샘 로이드(1841~1911)와 헨리 듀드니(1857~1930)를 꼽으며 그들의 계보를 이은 사람이 마틴 가드너이다. 그러나 세 사람 이전에 캐럴은 이미 자신만의 수학 퍼즐을 만들고 있었다. 퍼즐리스트로서의 업적을 절대 잊어선 안 된다.

 

 

 

 

 

 

 

 

 

 

 

 

 

 

 

 

그가 만든(혹은 오래전에 알려진 문제를 그가 문서로 언급한) 문제들 중에 최근에 TV나 영화를 통해 알려져서 유명해진 것이 있다. 정답은 글 제일 밑에 있다.

 

양치기가 양, 늑대, 양배추와 함께 강을 건너야 한다. 양과 늑대를 남겨두면 늑대가 양을 잡아먹고, 양과 양배추를 남겨두면 양이 양배추를 먹는다. 전부 다 무사히 가지고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캐럴의 문제는 양치기, 여우, 거위, 옥수수 자루가 등장한다. 무한도전 스피드 특집에서 엘리베이터 문제로 나왔으며 그 이전인 2007년에 개봉한 스페인 영화 ‘페르마의 밀실’에 먼저 나왔다.

 

 

 

 

 

캐럴은 20대 초반에 미로도 만들었다. 도대체 캐럴의 재능은 어디까지인가? 이 책에 수록된 캐럴의 미로는 상당히 복잡하다. 단 한 사람의 머리로 만들었다는 사실이 믿겨지지 않는다.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는 결정판 『앨리스』에 비해 분량은 얇지만, 난이도 높은 캐럴의 수학 퍼즐과 문제들을 수학을 어려워하는 독자들도 이해할 수 있도록 만든 역자의 노력이 돋보인다. 캐럴에 대한 관심과 전문 연구가 부족한 시기에, 그것도 마틴 가드너의 결정판 『앨리스』보다 먼저 소개되었다는 점에서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는 국내 캐럴 마니아라면 읽을 가치가 높은 책이다. 만화, 영화, 축약본 등 숱한 앨리스 텍스트 때문에 제대로 읽지 않고도 다 안다고 착각하는 독자들에게 진짜 앨리스, 아니 앨리스의 작가 루이스 캐럴을 즐겁게 만날 수 있다. 그런데 앨리스와 캐럴을 다시 만나는 길을 이제 찾기 힘들어졌다. 마틴 가드너의 결정판 『앨리스』,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그리고 『실비와 브루노』까지 서점에 구하기 힘든 책이 되었다.

 

 

 

 

 

 

 

 

 

 

 

 

 

 

 

 

 

그나마 캐럴 마니아에게 유일한 위안이 된다면 캐럴의 『스나크 사냥』(이북코리아, 2013년)은 전자북으로 읽어볼 수 있다는 점이다. 이참에『스나크 사냥』도 단행본으로 나왔으면 좋겠다. 

 

 

 

 

 

 

 

 

 

 

 

☞  양치기, 양, 늑대, 양배추 문제 정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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