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숭이는 영리한 동물입니다.
아프리카 토인들이 이 영리한 원숭이를 생포할 때
가죽으로 만든 자루에 원숭이가 제일 좋아하는 쌀을 넣어
나뭇가지에 단단히 매달아 놓습니다.
가죽 자루의 입구는 좁아서
원숭이의 손이 겨우 들어갈 정도밖에 되지 않습니다.
얼마 동안을 기다리면 원숭이가 찾아와
맛있는 쌀이 담긴 자루 속에 손을 집어넣습니다.
그리곤 쌀을 가득 움켜쥐고는 흐뭇해합니다.
그런데 쌀을 가득 움켜쥔 원숭이는 아무리 기를 써봐도
그 자루 속에서 손을 빼낼 수가 없습니다.
놀란 원숭이는 몸부림치며 울부짖기 시작합니다.
손을 펴서 놓아버리기만 하면 쉽게 손을 빼내 저 푸른 숲 속을
다시 자유롭게 누비며 살 수 있으련만, 슬프게도
원숭이는 한줌의 쌀을 움켜쥔 손을 펴지 못한 채 울부짖다가
결국 토인들에게 생포 당하고 마는 것입니다.
손을 펴라.
놓아라 놓아버려라.
움켜쥔 손을 펴라.
한 번 크게 놓아 버려라.

 

 

(박노해, ‘손을 펴라’)

 


아프리카 원숭이는 한줌의 쌀과 생명을 너무나 허무하게 맞바꿔 버렸다. 생소한 덫이 쌀을 움켜쥔 손을 결박해버리는 바람에 원숭이는 크게 당황하여 쉽게 빠져나오는 방법을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나 원숭이를 노리는 덫은 생각한 것보다 특별하게 생기지 않았다. 오히려 진짜 덫은 원숭이의 마음에 자리 잡은 ‘욕심’이다. 자신이 만든 덫에 걸리고 만 것이다. 한 편의 우화가 연상되는 박노해의 시 ‘손을 펴라’는 욕심을 움켜쥔 채 손을 펴지 못하는 어리석은 인간을 원숭이로 비유했다.

 

 

 

 

 

 

 

 

 

 

 

 

 

 

 

 

우화나 동화 속 원숭이는 꾀가 많은 영리한 동물로 등장하지만, 눈앞의 이익만 집착하는 우매한 모습으로 그려지기도 한다. 가장 대표적인 이야기가 ‘조삼모사’(朝三暮四)다. 중국 춘추시대 송나라에 저공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워낙 오랫동안 원숭이를 길렀으므로 그는 원숭이들의 심리를 꿰뚫고 있었으며 원숭이 또한 그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정도가 되었다.

 

하지만 원숭이들의 숫자가 많았던 데다 식욕까지 워낙 왕성하다 보니 먹이를 대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었다. 저공은 원숭이들의 양식을 줄이기로 했다. 하지만 원숭이들이 불평할 것이 두려워 먼저 원숭이들과 상의하기로 했다. 그는 집안의 모든 원숭이들을 불러 놓고는 말했다. 처음에는 도토리를 아침에 3개, 저녁에 4개로 주기로 제안하자 원숭이들은 그렇게 먹어도 배고프다고 불평했다. 원숭이들의 항의에 저공이 “이제부터 아침에 4개, 저녁에 3개 주겠다”고 대답하자 원숭이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세 개에서 네 개로 늘어났다고 여긴 원숭이들은 그 제서야 뛸 듯이 기쁜 것이다. 실질적으로 달라진 게 없는데 원숭이는 저공의 꾀에 속아 넘어갔다.

 

‘조삼모사’에 나오는 원숭이들은 저공에게 농락당할 뿐만 아니라 그에게 쉽게 길들여지고 마는 수동적인 모습 또한 보인다. 영원히 우리 안에 갇혀서 아침, 저녁으로 저공이 주는 도토리 7개를 먹으면서 살아야 한다. 아침에 4개, 저녁에 3개로 식사하는 것이 자신들이 살아가는데 최상의 조건이라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피터르 브뤼헐  「두 마리 원숭이」  1562년

 

어리석은 원숭이 이미지는 플랑드르 출신 화가 피터르 브뤼헐의 그림에서도 나타난다. 언뜻 보면 두 마리 원숭이를 묘사한 평범한 그림이다. 원숭이들은 좁은 창의 난간 위에 쇠사슬로 묶인 채 지내고 있다. 창밖으로 시야가 탁 트인 항구가 보인다. 오른쪽 원숭이 등 뒤에 속살을 먹고 버린 호두 껍데기가 흩어져 있다.

 

 

 

 

 

 

 

 

 

 

 

 

 

 

 

 

브뤼헐은 쇠사슬에 묶인 원숭이들을 그린 이유가 무엇일까? 어느 부유한 사람이 기르는 애완용 원숭이를 그렸던 것일까? 브뤼헐의 그림은 우화나 속담을 그림으로 묘사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래서 그의 그림 속에 화가가 전달하려는 어떤 특정한 메시지가 숨겨져 있다.

 

원숭이 그림에 관한 해석 중 가장 설득력이 높은 것이 플랑드르 속담을 그렸다는 설명이다. “개암나무 열매 한 개 때문에 재판소에 간다”라는 속담은 별 것 아닌 열매 때문에 죄를 짓고 마는 어리석은 태도를 조롱하고 있다. 속담의 의미를 브뤼헐의 그림에 대입하면 우리는 두 마리 원숭이가 쇠사슬에 묶인 채 살게 된 배경을 상상해볼 수 있다.

 

두 마리 원숭이는 길에 떨어진 호두를 발견한다. 그런데 호두는 한 마리 원숭이만 먹을 수 있다. 원숭이들은 호두를 차지하기 위해서 서로 싸운다. 서로 뒤엉키면서 싸우는 사이에 마침 지나가는 사냥꾼이 손쉽게 그들을 포획한다. 새와 조개의 싸움으로 제3자인 어부가 덕을 보는 ‘어부지리’(漁父之利) 고사와 유사하지만, 어쨌든 호두 한 개를 둘러싼 원숭이들의 욕심은 그들에게 덫이 되어 인간에 잡히고 만다. 이제 예전처럼 자유로운 야생 생활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어부지리’ 고사를 따온 그림에 대한 해석은 개인적인 상상으로 꾸민 것이다. 지금도 브뤼헬의 원숭이 그림을 설명할 수 있는 확실한 해석이 나오지 않았다. 그렇지만 우리는 딱 이 그림만 봐도 원숭이들이 자유롭지 못한 상태임을 짐작할 수 있다. 두 마리가 겨우 움직일 수 있는 창의 난간이 감금된 상황을, 이것과 대조적으로 창 밖에 펼쳐진 항구 풍경은 두 마리 원숭이의 과거, 즉 자유로웠던 삶과 세계를 상징한다. 하필이면 하늘 위에 두 마리 새가 훨훨 날아다닌다. 영원히 난간 위에 살아야하는 원숭이를 더욱 비참하게 만든다. 왼쪽 원숭이의 표정은 예전처럼 자유로운 생활로 돌아가지 못한 마음에 자포자기한 심정이 드러나 있다. 오른쪽 원숭이도 마찬가지다. 그는 항구 풍경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 차마 하늘 위로 날아가는 새를 바라보지 못한다. 오히려 회피하는 듯하다.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새가 부럽다. 이제야 자유의 소중함을 깨닫는다. 호두 한 개 때문에 욕심으로 눈이 먼 어리석음을 후회한다.

 

그러나 자유의 의미가 상실되거나 박탈된 존재는 끊임없이 고통 받는 것이 아니다. 저공의 원숭이처럼 현실을 그대로 순응하면서 살아가기도 한다. 자유를 찾기 위한 어떠한 해결책도 생각하지 않은 채 말이다. 오히려 탈출을 시도하다가 위험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탈출한 죄로 예전보다 먹이를 적게 주거나 더 좋지 않은 곳에 살 수도 있다. 최악의 결과는 죽음이다. 그만큼 생존을 위한 탈출 시도는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오랫동안 쇠사슬로 결박된 채 좁은 감옥 생활에 적응하면 어느새 탈출에 대한 생각이 사라진다. 탈출하고 싶고, 살아서 자유로운 삶을 원한다. 그러나 그 방법이 무모하다고 생각한다. 일단 사는 것이 우선이기 때문에 탈출 실패가 초래하는 끔찍한 결과를 원하지 않는다.

 

 

 

 

 

 

 

 

 

 

프란츠 카프카의 단편 '학술원에 드리는 보고'에 나오는 원숭이 ‘빨간 피터’는 철창을 벗어나기 위해 원숭이의 본성을 벗어던진다. 인간이 되기로 결심한다. 처음에 피터는 좁은 철장에 빠져나오기 위해 몸부림쳤지만 탈출이 불가능하게 되자 원숭이의 정체성을 포기한다.  인간이 된다면 자유를 되찾을 수 없더라도, 우리에서는 벗어날 수 있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러기 위해 악수하는 법과 술·담배를 배우고 말하는 법을 배우면 됐다. 간단히 말해 쇼무대에서 인간흉내를 내어 그나마 우리 속에서 탈출할 수 있었던 것. 인간의 언어를 습득함으로써 점점 더 인간의 모습에 가까워진 피터는 서커스단의 일원으로 대성공을 거둔다. 피터는 학술원 회원에게 자신이 그동안 살아온 과정을 보고하는 내내 구원의 길을 모색하는 자신의 모습에 한껏 자부심에 고취되어 있다.  

 

그러나 작품의 이면을 살짝 들여다보면 피터는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그는 여전히 원숭이일 뿐임을 알 수 있다. 그가 목소리를 높이면 높일수록 피터는 여전히 원숭이의 상태에 머물고 있을 뿐이다. 관객 앞에서 묘기를 부리는 공연하는 것은 인간에게 조련당하는 원숭이의 모습에 불과하다. 결론적으로 원숭이 피터는 인간으로 거듭난 행복한 원숭이가 아니라 인간에게 사로잡혀 자유분방한 정체성을 상실한 가련한 원숭이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피터는 ‘하겐벡 증기선의 중간 갑판에 있는 우리 안에’ 갇히게 되는데 여기서 ‘하겐벡’은 그 당시 유명한 동물원을 세운 회사이다. 독일 출신 회사 설립자의 이름을 딴 하겐벡은 육식, 초식동물의 구분 없이 공존하는 파노라마 형태의 동물원을 만들었다. 피터가 제아무리 인간처럼 흉내를 내도 그는 하겐벡 소속의 동물일 뿐이다.

 

피터는 억압적인 현실에 순응하면서 참된 자아를 잃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극복해나가는 탈출구를 스스로 포기했다. 철창의 자물쇠를 물어뜯을 수 있는 이빨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예 시도를 하지 않는다. 인간이 먹이로 가져다주는 호두 껍데기를 원활하게 부수는데 사용한다.

 

“지금의 제 이빨로는 이미 일상적인 호두까기에도 조심해야만 합니다만, 그 당시에는 틀림없이 시간이 지날수록 문의 자물쇠를 물어뜯는 데 성공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저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한들 무엇이 얻어졌겠습니까? 제가 머리를 내밀자마자, 사람들은 저를 다시 잡아서 더 고약한 우리 안에 가두었겠지요.” (카프카  '학술원에 드리는 보고' 중에서, 도서출판 솔, 263쪽)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라는 우리나라 속담처럼 피터는 탈출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어려운 현실 속에 살아갈 수 있는 방안이 생기게 마련이다. 우습게도 피터는 탈출할 수 있는 유일한 무기를 사람이 주는 호두를 부수는 용도로 사용했다. 호두 때문에 탈출 시도를 쉽게 체념하고 만다. 그 호두가 피터의 탈출 시도를 방해하는 덫이 되었다. 자물쇠를 물어뜯어보는 시도를 하지도 못한 채 그렇게 피터는 인간 흉내 내는 어리석은 원숭이가 되었다. 피터는 철창 우리 생활을 영원히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절망 속에 갇힌 상태에서 희망의 탈출구를 찾기 위해 서성거리기에는 이미 늦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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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자신의 숨통을 조여 오는 현실로부터 도피하기 위해 은밀한 공간을 만들고 탐닉한다. 반면 예술의 공간은 공유와 공감의 영역을 넘나들며 감성을 표현한다. 공간이라는 이름으로 인간은 이중적 양면성을 내보이는 것이다. 특히 예술가들은 공간 안에서 사적인 자존심을 지키며 대중과의 공감을 꿈꾼다. 화가의 공간은 예술 작품으로서 표현돼 작업의 연장이자, 그 무대가 되기도 한다. 모네는 프랑스 지베르니에 위치한 저택을 구입해서 집과 정원 자체를 작업의 공간으로 여겼다. 앤디 워홀은 월급 화가들을 고용해 ‘그림 공장’을 차렸다. 작업실의 이름도 ‘팩토리’(Factory)로 지었다. 프랜시스 베이컨은 단 한 번도 청소하지 않은 작업실로 유명하다. 베이컨이 세상을 떠난 지금까지도 작업실 바닥에는 온통 쓰레기가 뒹굴고 곳곳에 쓰고 버린 붓과 물감이 어지럽게 널린 상태로 유지되고 있다. 작업실 온 벽면이고 바닥이고 베이컨이 물감을 처발라놓아 놓은 흔적도 남아있다. 

 

화가의 작업실에는 엄청난 작품들이 보관되어 있다. 아직 물감이 채 마르지 않은 완성작뿐만 아니라 그리다 만 미완성의 그림들이 섞여 있다. 발자크의 단편소설 ‘미지의 걸작’에 나오는 화가 프렌호퍼의 작업실처럼 아직 세상에 공개되지 않은 걸작이 잠자고 있다. 프렌호퍼는 최고의 걸작을 남기지 못한 좌절감에 작업실에 잠들고 있는 그림들과 함께 스스로 소멸했다.

 

화가가 세상을 떠나는 순간, 작업실의 수명도 끝이다. 훌륭한 화가의 손에서 태어난 작품은 특별한 관리를 받을 수 있는 미술관로 향해 위대한 아름다움을 빛날 수 있지만, 반대로 무명화가의 작품은 대중의 시선을 받지 못한 채 오랫동안 먼지와 함께 방치될 것이다. 작품이 영원히 오랫동안 보존되고 대중에게 널리 알리기 위해서는 화가 사후의 관리가 더욱 중요하다. 화려한 색채에서 아름다움을 담은 그림도 세월을 이기지 못한다. 허술한 관리 때문에 물감색이 바래지고 심지어 그림 표면이 갈라져 파손될 우려가 있다.

 

 

 

 

 

 

 

 

 

 

 

 

 

 

이 화가도 자신이 죽고 나면 수많은 그림들이 쓸쓸하게 방치되고 망가질까봐 걱정했다. 프랑스 상징주의의 대표적인 화가 귀스타브 모로는 자신의 죽음보다 작품의 소멸에 예민했다. 그는 데생과 미완성 작품까지 포함해서 수많은 작품을 남겼는데 결국 자택을 미술관으로 개조했다. 지금도 그의 작품들은 ‘귀스타브 모로 미술관’에 가면 볼 수 있다. 화가는 죽어서 하나의 거대한 작업실이 되었다.

 

귀스타브 모로는 살로메를 소재로 한 그림들로 유명하다. 살로메는 수많은 화가들이 많이 다루던 인기 있는 소재였는데 아마도 그 중에 가장 유명하고 널리 알려진 이미지가 모로가 그린 살로메일 것이다. 의붓아버지 헤롯 왕 앞에서 요염하게 춤을 주는 장면부터 시작해서 그녀가 그토록 원했던 세례자 요한의 잘린 머리와 대면하는 충격적인 장면까지 다양하게 묘사했다. 모로는 성서에서 보잘 것 없는 여인을 잔인하면서도 매혹적인 팜 파탈로 재탄생시켰다.

 

모로는 미술사에서 절대로 빠지면 안 되는 화가들 중의 한 사람인데 국내에서는 작품세계가 덜 알려져 있다. 모로가 활동하던 19세기 중반 프랑스에서는 인상주의라는 거대한 물결이 휩쓸고 있었다. 세기말 즈음에는 주관적이면서도 내면적인 정서, 현실을 초월하는 관념적인 세계를 표현하려는 상징주의 미술이 태동되었는데 이 때 모로가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우리나라는 인상주의 미술이 워낙에 널리 알려져 있는 탓에 상징주의 미술이 부각되는 위치가 협소하다. 프랑스뿐만 아니라 영국까지 포함하면 상징주의 미술을 소개하면 한 권 분량의 책이 나올 수 있지만, 현재까지는 서양미술사의 한 부분으로만 차지하고 있는 실정이다. 상징주의 미술을 심도 있게 소개한 책이 열화당 미술신서 55번째 시리즈인 에드워드 루시-스미드의 『상징주의 미술』이 유일한데 출간된 지 너무 오래되었고, 현재 절판이다. (알라딘으로 검색해도 서지정보가 나오지 않는다)

 

이렇듯, 상징주의 미술은 우리에게는 무척 낯설고 어렵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그래도 상징주의 미술을 보다 쉽게 이해하려면 프랑스의 비평가 알베르 오리에의 전시논평이 적합하다. 오리에는 상징주의 미술의 의미를 하나의 강령으로 제시했다.

 

 

1. 관념적이어야 한다. 미술작품의 유일한 목적은 관념의 표현이어야 한다.
2. 상징주의적이어야 한다. 미술작품은 이 관념을 형상화해야 한다.
3. 종합적이어야 한다. 미술작품은 이들 형성과 표지(표지)를 일반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방법으로 표현한다.
4. 주관적이어야 한다. 대상은 결코 단순한 대상으로 간주되는 것이 아니라, 주체에 의해 인식된 관념을 나타내는 것으로 간주된다.
5. 장식적이어야 한다. 정확히 말해서 고대 이집트인들이 생각했던 것과 같은 장식화는 종합적이고 상징주의적이며 동시에 관념적인 예술이다. 

 

(에드워드 루시-스미드  『상징주의 미술』에서 인용)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오리에의 논평 핵심은 최고의 상징주의 화가를 모로가 아닌 폴 고갱으로 꼽고 있다는 점이다. 논평의 제목이 ‘회화에서의 상징주의-폴 고갱’이다. 논평이 발표된 연도인 1891년에 모로는 왕성하게 작품을 제작하고 있었다. 

 

미술사가의 관점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고갱은 후기 인상주의이든 상징주의 미술이든 어느 한 쪽에 언급되어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그러나 고갱이 활동하기 전부터 이미 상징주의 미술은 태동하기 시작했고, 그 중심에는 모로가 있었다. 모로가 고갱보다 대중의 인지도가 낮더라도 모로의 미술사적 위치를 간과해서는 안 된다.

 

 

 

 

 

 

 

 

 

 

 

 

 

 

 

 

모로를 상징주의 미술의 거장으로 평가했고, 그의 작품세계를 이해했던 사람은 소설가 조리스 카를 위스망스였다. 위스망스는 자신이 등단하는데 도움을 준 에밀 졸라의 자연주의 문학을 거부하고, 심미적이고 신비스러운 측면이 강조되는 상징주의 문학으로 전향했다. 화가에 대한 위스망스의 존경어린 찬사는 자신의 작품 『거꾸로』제5장에서 노골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소설의 주인공 데 제쎙트는 고독한 탐미주의를 실천하기 위해서 선조로부터 물려받은 저택을 자신만의 인공낙원으로 만들어 생활을 한다. 그는 속세에 벗어나 고귀한 예술에 탐닉하는데 그가 제일 좋아하는 화가가 모로였다.

 

“모든 예술가 중에서도 탁월한 재능으로 그를 기나긴 열광과 황홀경에 빠져들게 만드는 한 예술가가 존재하였는데, 그는 바로 귀스타브 모로였다. 데 제쎙트는 이 화가가 그린 두 점의 걸작을 구입하여, 그중 한 작품 앞에서 몇 날 밤이고 몽상에 잠기곤 했다.” (위스망스  『거꾸로』 중에서, 92~93쪽)

 

소설의 제5장 절반은 모로의 그림에 대한 묘사가 장황하게 이어지는데 아마도 여기서 언급되는 모로의 그림 두 점은 「헤롯 왕 앞에서 춤추는 살로메」와   「환영」일 것이다. 데 제쎙트는 살로메가 등장하는 모로의 그림을 세밀하게 바라보는데 그가 원하던 ‘나른하고도 잔혹한 영상’이었다.

 

 

 

 

 

귀스타브 모로  「헤롯 왕 앞에서 춤추는 살로메」  1876년

 

"온갖 향기들이 내뿜는 퇴폐적인 냄새 속에서, 또한 이 교회당의 과열된 분위기 속에서 살로메는 마치 명령을 내리듯 왼팔을 앞으로 쭉 뻗고 있었고 오른팔은 구부려 얼굴 높이로 커다란 연꽃 한 송이를 든 채, 웅크리고 앉은 한 여인이 뜯고 있는 기타의 화음에 맞춰 발끝으로 천천히 나아가고 있었다. (중략) 그녀는 파괴할 수 없는 음탕함을 상징하는 여신, 불멸의 히스테리의 여신, 자신의 살집을 뻣뻣하게 만들고 근육을 단단하게 하는 경직증에 의해 모든 여자 중에서 선택된 저주받은 미의 여신이 되었던 것이다.” (94, 96쪽)

 

 

 

 

 

귀스타브 모로  「환영」  1875년

 

“계속해서 피를 흘리고 있는 듯한 끔찍한 두상은 짙은 보라색의 핏덩어리들이 턱수염의 끝 부분과 머리카락에 엉긴 채로 불타오르고 있었다. 오로지 살로메의 눈에만 보이는 이 두상은 그 음울한 시선으로, 마침내 자신의 원한을 갚은 데 대해 몽상하고 있는 헤로디아도, 야생 동물의 냄새에 적셔지고 방향성 수지로 뒤덮였으며 향과 몰약으로 훈증된 여인의 나신으로 인해 경악하여 무릎에 손을 얹고 약간 몸을 앞으로 수그린 채 여전히 헐떡이고 있는 헤롯 왕도 쳐다보지 않았다. 유화에 그려진 살로메보다는 위엄이 없고 덜 거만하지만 훨씬 더 관능적인 이 무희 앞에서 데 제쎙트는 늙은 왕과 마찬가지로 압도되고 완전히 지쳐서 현기증을 느낄 지경이었다.” (99쪽)

 

위스망스 그리고 데 제쎙트는 모로의 그림에서 무기력한 감각을 일깨워주는 관능적인 아름다움을 발견했다. 그러나 모로의 그림은 ‘무기력한 아름다움’이다. 화려한 장식으로 눈과 마음을 현혹하게 만드는 아편이다. 살로메의 춤사위 속에 황홀경에 빠져 의지력을 마비된 헤롯 왕처럼 모로의 살로메 그림은 감수성이 예민한 사람의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동시에 한순간에 무기력하게 만드는 치명적인 아름다움이 있다.

 

 

 

 

 

귀스타브 모로  「오이디푸스와 스핑크스」  1864년

 

 

모로의 ‘무기력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또 다른 그림은 「오이디푸스와 스핑크스」다. 자신이 내는 수수께끼를 풀지 못하는 나그네를 잡아먹는 괴물 스핑크스를 처단하기 위해서 영웅 오이디푸스가 나섰다. 그런데 모로가 묘사한 스핑크스의 모습이 독특하다. 원래 스핑크스는 사람의 머리와 사자의 몸을 가진 끔찍스럽게 생긴 괴물이다. 그런데 머리는 여성이고, 몸은 아담한 고양이와 같다. 거기에 남자들 사족을 못 쓰게 만드는 가슴이 달려 있다. 여성스러운 스핑크스가 지금 오이디푸스의 가슴 근처까지 접근했다. ‘아침에 다리는 두 개’로 시작되는 그 유명한 수수께끼를 내려는 장면 같지만, 오이디푸스와 스핑스크의 시선이 심상치가 않다. 스핑크스는 두 앞다리를 오이디푸스의 건장한 가슴에 얹고, 자신의 가슴을 그의 시선이 닿을 수 있게 앞으로 쭉 내민다. 예로부터 ‘영웅호색’이라는 말이 있듯이 혈기왕성한 오이디푸스도 스핑크스의 노골적인 유혹적인 자세가 당황했을 것이다. 언제 덮칠지 모르는 스핑스크의 습격을 대비하기 위해서 왼손에 창을 쥐고 있지만, 스핑크스의 유혹에 손과 온 몸은 경직된 듯하다. 메두사의 눈빛을 보면 돌이 되어 굳어버리듯이 스핑크스의 유혹적인 눈빛은 여색에 약하는 남성의 본능을 굳어버리게 만들어 영웅의 의지를 꺾게 만든다. 스핑크스도 살로메 못지않게 남성을 사로잡는 위험하고도 무기력하게 만드는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다.

 

 

 

 

 

 

 

 

 

 

 

 

 

 

 

 

과거의 장면까지 세밀하게 기억하는 ‘극세사 감수성’, ‘기억으로 그림을 그리는 화가’ 프루스트도 모로의 그림을 선호했다. 프루스트는 모로의 작업을 진정한 내면의 영혼을 지닌 시인의 작업과 동등하게 생각했다. 모로가 표현한 신비로운 세계는 곧 내면의 영혼이 살고 있는 세계이며 그것이 그림으로 우리에게 전달되어 감명을 받는다. 위스망스가 모로의 작품세계를 감각적이고 관능적으로 이해했다면, 프루스트는 내면적인 분위기를 강조했다. 프루스트는 살로메가 나오는 그림보다는 음유시인과 오르페우스가 나오는 그림을 좋아한 것으로 보인다.

 

 

 

 

 

귀스타브 모로  「오르페우스의 머리를 든 여인」  1865년

 

“시인들은 완전히 죽는 것이 아니고 그들의 진정한 영혼, 자신을 있는 그대로 느끼던 유일하며 가장 내면에 있는 영혼은 간직되어 우리에게 전달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시인이 죽었다고 생각하고 그의 묘지를 찾는 것처럼 뤽상부르에 순례여행을 떠난다. 우리는 죽은 오르페우스의 머리를 들고 있는 여인처럼 단순히 <오프페우스의 머리를 든 여인> 앞에 간다. 우리는 오르페우스의 머리에서 우리를 응시하고 있는 그 무엇, 생각의 색채로 가득한 아름다운 그 눈, 바로 귀스타브 모로의 생각을 보게 된다.” (프루스트  ‘모로의 신비세계에 관한 노트’ 중에서, 『독서에 관하여』 163쪽)

 

모로는 신화, 종교, 역사 등 화가들이 일반적으로 많이 다루는 소재를 자신만의 독특한 관점으로 그려냈다. 대상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기보다는 대상에 의한 주관적인 관념과 인식을 묘사하는데 노력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대상을 눈에 보이게 만드는 그림으로 표현한다는 것. 우리가 상징주의 미술을 어렵게 느껴지는 것처럼 모로 또한 관념적인 세계를 그려내는 것이 수월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완성작에 비해 데생과 미완성 습작이 많은 편이다. 살롱에 작품을 출품하기도 했으나 그렇다고 대중의 호응과 명성을 기대하는 세속적인 화가는 아니었다. 제 데쎙트처럼 훗날 미술관이 된 파리의 작업실에 은거하면서 그림을 그리는 데 열중했다. 혹시 모로도 발자크의 『미지의 걸작』에 나오는 화가 프렌호퍼처럼 미지의 걸작을 남기고 싶었던 것일까. 생전에 최고의 걸작이라고 꼽을만한 그림이 많지 않아서 자신이 남긴 그림들의 운명이 걱정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모로의 지나친 걱정과 달리 그도 나름 전성기를 누렸고 어느 정도 성공한 화가의 반열에 오른다. 1892년에 프랑스 국립미술학교인 에콜 데 보자르의 교수로 채용되고, 그의 작업실은 공실적인 국립 미술관이 되었다.

 

모로의 작품을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이라면 너무 관념적으로 치우친 소재와 그리다 만 듯한 색채와 형태에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생전에 살롱에 출품한 그의 작품은 ‘그림을 그리다 말고 휴식을 취하면서 쇼펜하우어를 읽는 한 미술학도가 그린 그림’이라는 쓴소리를 듣기도 했다. 모로가 현실이 아닌 신화나 종교적인 분위기가 느껴지는 상상의 세계를 묘사했기에 비평가들은 쇼펜하우어의 염세주의를 느꼈던 것이다.

 

 

 

 

 

 

 

 

 

 

 

 

 

 

 

 

 

줄리언 반스의 처녀작 『메트로랜드』에서 영국 사람 데이브는 모로의 그림를 ‘자위행위자의 예술’이라고 폄하한다. ‘학문적인 상징주의’에다가 너무 세속적이라고 말한다. 난해한 학문을 연상시키는 상징주의 그림이 미술관에 전시된 사실에 괜히 불평을 늘어놓는다. 그림이 자신의 취향에 맞지 않으면 아무리 뛰어난 걸작이라도 졸작으로 보인다.

 

그러나 ‘자위행위자’라고 비유한 데이브의 표현은 모로의 작품세계를 확실하게 이해하지 못한 무지의 발언으로 보인다. 모로는 작업실에 은거하면서 그림을 그렸고, 상징주의 미술은 ‘예술을 위한 예술’과 깊은 연관성이 있다. 하지만 모로는 데 제쎙트처럼 스스로 환상적 예술에만 탐닉하여 열광하는 ‘예술적 자위’는 하지 않았다. 그리고 자신의 작품세계에만 몰두하고 갇혀버린 답답한 사람은 아니었다.

 

는 제자 양성에 적극적이었는데 놀랍게도 모로가 배출한 유명한 화가는 야수파를 대표하는 앙리 마티스 와 종교화로 유명한 조르주 루오가 있다. 스승과 제자들은 각자 서로가 추구하던 화풍이 달랐지만 특히 루오는 스승으로서의 모로를 무척 존경했다. 모로가 세상을 떠났을 때 무척 슬퍼했으며 모로 미술관의 초대 관장으로 역임하기도 했다.

 

모로는 어떤 그림을 보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마음을 유혹하기 위해 악마의 소곤거림이 들릴 수 있고, 또 다른 그림을 보면 어디선가 내면의 목소리가 들릴 것이다. 프루스트는 모로의 그림을 보면서 내면의 목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그렇기에 어떤 화가의 그림을 보려면 널리 알려진 대표작품만 봐서는 안 된다. 그 화가의 예술을 깊이 있게 알려면 데생, 습작에서 잘 알려지지 않은 작품들까지 보면 좋다.

 

혹시 프랑스를 여행하다가 루브르, 오르세 미술관에 가는 것도 좋지만, 미술에 상당한 관심이 있다면 모로 미술관도 한 번 가봄직하다. 프루스트는 모로 미술관은 단순한 화가의 집이 아니라 그의 예술행위가 우리 모두에게 서로 공유되는 특별한 곳이라고 말했다. 소설가답지 않게 예술적인 감식이 뛰어난 프루스트다. 모로 미술관이 어떤 곳인지 참으로 궁금하게 만든다. 프랑스를 여행하는 도중에 내면의 목소리를 듣고 싶다면 모로 미술관에 꼭 들려보시길.(라고 쓰지만, 나도 모로 미술관에 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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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  「안개 낀 바다 위의 나그네」  1818년경

 

 

격랑의 파도를 눈앞에 두고 가파르게 솟은 바위 위에 한 남자가 뒷모습을 보이며 서있다. 가없는 공간 속에서 절대 고독과 대면하고 있는 듯하다. 나그네는 자신의 발 아래 펼쳐진 멋진 광경을 즐기고 있지 않다. 자연은 그동안 사람들이 두려워했던 존재였다. 그러나 이제는 개발하여 이용하는 대상이 되었다. 안개가 자욱하고 파도가 심하게 치고 있지만 나그네의 자세는 마치 발 아래 펼쳐진 세상을 점령이라도 한 듯이 당당하다. 시선을 아래로 향하여 자연을 응시하는 장면은 자연을 바라보는 동양적 관점을 엿볼 수 있는 「고사관수도(古士觀水圖)」와 묘한 대조를 이룬다.

 

 

 

 

 

 

강희안(추정)  「고사관수도」 

 

조선시대 초기에 살았던 강희안이 그린 것으로 알려진 「고사관수도」는 늙은 선비가 숲 속 작은 개울가에 웅크리고 앉아 물끄러미 물속을 바라보며 상념에 젖은 듯한 장면을 묘사 한 것이다. 앞서 「안개 낀 바다 위의 나그네」에서 그림의 전면 중앙에 자리 잡고 당당히 서서 자연을 관찰하는 것에 비하면 한쪽에 웅크린 선비는 참 보잘것없어 보이기까지 한다. 늙은 선비는 바위에 자신의 몸을 기대어 턱을 괴고는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일까?

 

이 그림을 가만히 들려다보고 있으면 마음이 고요해진다. 이마가 벗겨진 선비는 뭐가 그리 좋은지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다. 표정이 바위 밑으로 흘러가는 물처럼 해맑다. 고요한 분위기의 그림은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게 만든다. 故 오주석 선생은 고요하지만 작품 속의 모든 것이 살아있는 그림이라고 말한다. 노자가 말한 바 최고의 선이라는 물과,내면에 사납고 크나큰 의욕을 숨겨놓은 돌의 심오함을 아우르면서 '둔하고 어리석은 듯 물러나 고요하게 지내는 웅숭깊은 하루'를 웅변하고 있다.

 

모든 것이 정지된 듯한 풍경 속에, 선비의 미소만이 은은하게 퍼진다. 세속의 번잡함에서 벗어나, 자연과 벗하며 내면의 평화를 찾은 듯하다. 물은 거듭남을 상징한다. 물로 세수를 하고 탁족을 하듯이 잔잔한 물을 보며 마음의 때를 씻는다. 물은 관조의 수단이다

 

방안의 불빛이 차고 넘치듯, 내면의 충일감이 미소로 번진다. 물아일체의 경지다. 자연과 나는 하나가 된다. 서양에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이 '물아일체'라는 말이다. 서양의 자연관은 인간을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과거에 자연을 두려워하고 숭배했지만 세월이 흘러 과학과 산업이 발전했을 때 자연을 정복하려 했다. 하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은 아주 오랜 옛날부터 자연을 두려움의 대상이거나 정복해야 할 대상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자연 속에 함께 어우러져 있는 것이 사람이기에 결국 사람도 자연이라고 여겼다.

 

자연은 살아있다. 우리가 살아있는 것처럼. 그동안 자연을 수단으로 생각했던 우리는 후회하기 시작했다. 콘크리트 숲을 떠나 자연으로 돌아가기를 원한다. 자연과의 교감을 통한 여유와 정취가 그리워진 탓일까. 오주석 선생의 마음은 지금의 심정을 잘 말해주고 있다. 아마도 선생은 지금 저 그림 속에 살고 계시겠지.

 

“<고사관수도>를 보고 있노라면 그저 나도 저곳에 들어가 있었으면 하는 마음이 든다. 선비가 자아내는 잔잔한 삼매경과 여유와 고요함이 너무 좋아서 그림 속의 인물이 되고만 싶은 것이다.” (『오주석의 옛 그림 읽기의 즐거움 1』 중에서, 5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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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르주 루오  「늙은 왕」  1936년

 

나는 왕이로소이다. 나는 왕이로소이다. 어머님의 가장 어여쁜 아들, 나는 왕이로소이다. 갖아 가난한 농군의 아들로서... 그러나 시왕전(十王殿)에서도 쫓기어난 눈물의 왕이로소이다.

 

(홍사용, ‘나는 왕이로소이다’ 중에서)

 

어떤 의미에서 왕 또는 리더가 된다는 것은 시인 홍사용이 노래한 것처럼 영원으로부터 추방된 인간이 시간 속의 삶이라는 무거운 고통의 짐을 지는 것과 비유할 수도 있다. ‘눈물의 왕’은 설움이 넘치는 모든 땅의 왕이다.

 

 

 

 

 

 

 

 

 

 

 

 

 

 

 

 

여기 그림 속 왕도 지금 슬픔에 빠져 있다. 조르주 루오의 『늙은 왕』은 전혀 왕의 권위나 위엄이 느껴지지 않는 분위기를 연출해 내고 있다. 늙은 왕은 눈물을 흘리지 않고 있지만, 그 역시 견디기 힘든 슬픔의 감정을 추스르지 못할 것이다.

 

루오는 순종과 고통, 죽음과 부활 같은 종교적 주제를 화폭에 담았다. 『늙은 왕』에서도 루오가 평소 다루던 주제가 부각되어 있다. ‘왕관을 쓰려는 자, 그 왕관의 무게를 견뎌라’는 말이 있듯이 왕에게 권력은 견디기 어려운 무거운 짐이 된다. 리더는 고독하다. 더 무겁고 고통스러운 짐을 지고 고난의 길을 홀로 걸어가야 한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진 왕이라도 죽음 앞에서는 무릎을 꿇어야 한다. 왕을 감싸고 있는 깊은 물속 같은 어두운 청록색은 침통한 분위기를 드러낸다. 자신의 턱 밑 가까이 오게 될 죽음의 공포가 두렵고 생각만 할수록 잠이 오지 않는다.

 

‘어머님 몰래 남 모르게 속 깊이 소리 없이 혼자 우는 그것이 버릇이 되었소이다.’ (홍사용, ‘나는 왕이로소이다’ 중에서) 왕은 남모르게 소리 없이 혼자 눈물을 흘릴 것이다. 눈물은 인간이 흘리는 생리적 액체에 불과하지만 인간의 슬픔을 가장 잘 나타내는 침묵의 언어이기도 하다. 신하 앞에서 눈물을 흘린다면 자신이 나약한 왕임을 심어주어 지도자로서의 위엄을 잃을 수 있다.

 

'눈물의 왕‘과 늙은 왕은 절대 권력의 왕이 아닌, 이 세상 모든 슬픔과 고통을 자신의 것으로 껴안은 자다. 그의 삶을 지배하는 슬픔의 원인은 무엇인지 전혀 알 수 없지만, 왕이 아니더라도 인간이라면 누구나 슬픔과 절망을 경험한다. 하지만 눈물을 흘리는 감상적인 지도자는 자칫 스스로의 존엄성을 잃게 만들 수 있다.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냉정한 자세를 가져야 진정한 리더가 될 수 있다. 마하트마 간디가 말했던 것처럼 눈물을 먼저 흘리기 전에 ‘다른 사람들의 눈물을 닦아 주는’ 왕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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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라면 군 입대 하기 전에 무조건 해야 하는 일종의 통과의례(?)가 있었다. 입대를 하는 순간, 평생 가까이서 볼 수 있었던 여자를 오랫동안 볼 수 없다. 한창 혈기왕성한 사내들에게는 군 생활은 감옥이나 다름없다. 그래서 ‘총각 딱지’를 뗀다. 집창촌에 가서 섹스로 욕구를 푼다.

 

집창촌은 ‘총각 딱지’를 떼려는 젊은 사내뿐만 아니라 중년 남자들도 많이 찾는다. 집에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아내를 생각하면 섹스할 맛이 나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섹스를 하고 싶은 마음에 돈을 지불해서라도 집창촌으로 향한다.

 

아내는 사랑해서 섹스를 할 수 있지만, 집창촌의 매춘부는 그저 섹스하기 위한 여자일 뿐이다. 자신의 몸을 팔아 돈을 버는 매춘부는 영혼 없는 섹스를 어떻게 생각할까. 매춘으로 자신의 성욕을 해소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쾌락의 감각은 일시적이다. 남자의 뇌는 자위를 한 후에 성적 흥분 상태가 가라앉으면 이성을 되찾는다고 한다. 이런 것을 요즘 유행하는 말로 ‘현자타임’이라고 한다. 매춘부들도 처음에 돈을 많이 받고, 남자 손님들로 성욕을 풀 수 있어서 좋았겠지만 섹스를 하고 나면 후회감이 밀려올 것이다. 섹스로 인해 점점 더 망가져만 가는 몸. 늙으면 매춘을 할 수 없다. 여생을 어떻게 보내야 할까. 차라리 몸을 파는 직업이 아니라 조금만 더 판단을 잘했더라면 지금보다 더 좋은 직업을 가질 수 있었을 텐데...

 

매춘부도 사람이다. 자신의 몸을 남성들을 위한 ‘상품’으로 만들어 돈을 버는 사람을 개인적으로 좋아하지 않고, 과연 이것을 ‘직업’이라고 표현해도 되는지 모르겠다. 다만, 매춘부라고 해서 섹스에 굶주린 색녀는 아닐 것이다.

 

내가 매춘을 부정적으로 보는 이유는 자신의 몸을 상품화시켜서 돈을 버는 것 그리고 그런
행위 때문에 남자들에게 인간다운 대접을 받지 못하고 멸시받는 것이 싫어서다. 임권택 감독의 영화 <노는 계집, 창>에서 집창촌에 간 중년 손님이 매춘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아서 소란스럽게 난동을 부리는 장면이 있다. 손님의 성적 욕구를 충족시켜주지 못하거나 돈이 터무니 없이 비싸다는 이유로 매춘부는 그들로부터 무시 받고, 여자로서 받아들이기 힘든 험한 말을 많이 들었을 것이다.

 

며칠 전에 페이스북 유머 관련 페이지에서 매춘 행위를 하는 여자의 경험담을 인터넷에 올린 20대 남자의 글을 사진으로 캡처한 것을 본 적이 있다. 사연은 이렇다.

 

자신의 사연을 올린 21살 남자는 영등포에 위치한 여관에서 매춘 행위를 하는 40대 아주머니와 섹스를 했다. 그런데 남자는 비싼 돈에 걸맞지 않은 매춘 행위가 만족스럽지 못했다. 화가 나서 자신보다 20살 많은, 거의 어머니뻘 되는 아주머니를 때리면서 ‘너 같은 창녀는 죽어야 된다’고 심한 욕설을 퍼부었다. 그러자 아주머니는 남자의 멸시에 아무 말도 못한 채 그저 울면서 밖으로 나갔다고 한다.

 

그 다음에 이어지는 남자의 말은 어이가 없다. ‘빡촌(집창촌의 속어)에서 일하는 여자들은 보통 눈물도 없지 않나요? 독해지지 않나요? 이 아줌마는 울면서 나가더라고요. 창녀도 직업 아닌가요? 서비스업 아닌가요? 그럼 손님한테 잘해야 되는 게 아닌가요? 잘못했으니 욕 먹는 건 당연하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매춘이 정당한 직업이고, 서비스업이라고 해야 될 지 잘 모르겠다. 게다가 40대 아주머니가 나이와 몸을 생각하지 않고 매춘으로 돈을 버는 행위는 좋지 않게 본다. 하지만 매춘, 그러니까 섹스가 만족스럽지 못했다고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아주머니를 함부로 손찌검하고 욕설을 하는 21살 남자도 잘못했다. 많은 사람들이 보는 인터넷에 공개해서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는 태도는 같은 남자로서 부끄럽고 한심하다. 그저 섹스로 욕구를 풀지 못한 화풀이를 매춘을 ‘직업’이라는 이유로 불만을 표출하는 모습은 나잇값 제대로 못한 철없는 행동이다.

 

이 남자는 매춘부를 그저 섹스를 하기 위한 상품으로만 보고 있다. ‘여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매춘부는 눈물도 없고, 독하다고? 도대체 그런 논리는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남자 손님들에게 폭력을 당하고, 욕설을 듣는다면 제 아무리 섹스가 좋아서 매춘을 하는 여자라도 화가 나고, 마음에 상처받기 쉽다. 그것은 인간으로서의 대접을 못 받는 것이다. 그저 섹스를 하고 싶어 안달이 난 남자는 인간이 아니라 동물이다. 그들이 매춘을 혐오하고 무시하는 인식은 이중적인 생각이다.

 

 

 

 

에두아르 마네  「올랭피아」  1863년

 

 

마치 에두아르 마네가 파리의 매춘부을 연상시키는 「올랭피아」를 살롱에 출품했을 때 욕설과 비난의 융단폭격이 쏟아진 것을 연상시키듯 매춘부를 ‘성적 상품’으로 격하시켜 멸시하는 모습은 위선적이다. 살롱의 신사들은 매춘부가 벌거벗은 채 누워 있는 마네의 그림이 격에 떨어진다고 생각했다. 그들이 좋아하는 그림은 고귀한 비너스가 벌거벗은 그림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마네가 활동했던 19세기 파리는 매춘이 성행했다. 마네의 그림에 분노한 신사들 중에 매춘을 안 한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밤이 되면 집창촌에서 자주 보던 매춘부의 누드를 살롱에서 마주하는 순간, 낮 뜨겁고 부끄러운 것이다. 당시에 유행하는 누드화에서 비너스는 ‘아름다운 여성 모델’이고, 「올랭피아」는 그저 여성 모델이 아닌 매춘부였다. 올랭피아는 그림 속 당당하고 아름다운 여자가 될 수 없었다. (「올랭피아」의 모델은 실제로 매춘부가 아니다. 평소 마네의 그림에 모델로 자주 섰으면 화가로 활동한 빅토린 뫼린이라는 이름의 여성이다)

 

매춘부는 ‘여자 아닌 여자’다. 마음이 연약하고 쉽게 눈물을 흘리는 여자임에도 불구하고 세상 그리고 밤만 되면 그녀를 탐하는 남자들은 매춘부를 보통 여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눈물을 흘러서 안 되고, 그저 남자 손님의 정액을 받아야하는 상품일 뿐이다.

 

따지고 보면 그들도 한 집안의 딸이거나 가장이다. 가진 것이라고는 몸밖에 없기 때문에 매춘을 할 뿐이다. 가족의 행복과 안전을 위해서라면 사회에서 손가락질 받아도 이 일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 매춘부들의 말 못하는 마음을 프랑스의 화가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렉은 잘 알고 있었다. 로트렉은 물랑 루즈의 사창가에 수시로 드나들면서 매춘부들의 일상을 숨김없이 표현했다. 마네가 매춘부처럼 누드를 그렸다면, 로트렉은 진짜 매춘부의 누드를 그렸다. 누드뿐만 아니라 그녀들의 일상 하나하나 그림으로 묘사했다.

 

 

 

 

로트렉  「거울 앞에 선 누드 여인」  1897년

 

 

로트렉이 묘사한 매춘부의 모습은 반쯤 벌거벗고 있지만, 그렇게 야하게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그녀들의 얼굴은 생기가 없고 힘없어 보인다. 자신들의 삶이 좋을리가 없다.

 

로트렉의 「거울 앞에 선 누드 여인」 속 매춘부는 너무나 평범한 검은 스타킹을 신은 채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다. 매춘부의 손엔 방금 벗은 듯한 블라우스가 들려져 있다. 손님과 사랑을 나누기 위해 옷을 벗고 거울 앞에 선 이 부분이 여자로서의 세월이 불과 얼마 안 남았음을 암시하고 있는 듯하다. 무엇보다 이 그림의 핵심적 의미는 다른데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림 왼쪽에 그려진 흐트러진 침대가 그것이다. 이는 매춘부가 나이 들면 제 구실을 제대로 할 수 없어 사랑 받지 못함을 상징하고도 남음이 있다. 비록 이 그림은 매춘부를 모델로 했으나 로트렉은 시들어가는 여인의 육체의 덧없음을 그림을 통하여 여실히 드러내려 애썼다.

 

유럽의 일부 국가들처럼 매춘을 정당한 노동행위, 직업으로 인정할 수는 없다 해도 매춘부를 여성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무시하는 것은 옳지 않다. 매춘부도 여자다. 섹스만 하는 장난감이 아니다. 남자의 사랑을 받지 못한 채 살아야하는 여자. 여자 아닌 여자. 그녀도 눈물을 흘릴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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