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7년 전에 알렉스는 로맨틱 가이의 대명사였다. 〈우리 결혼했어요〉에서 파트너로 나온 신애의 발을 씻겨주고 노래를 불러준 장면에 젊은 여성들은 열광했고 알렉스는 인기 스타로 급부상했다. 그런데 이 장면이 방송의 전파를 타게 되자 알렉스는 인기와 함께 냉소 어린 비난도 들어야 했다. 촉촉한 목소리로 세레나데를 불러주고, 제 여자의 발을 씻겨주는 알렉스 같은 남자 없느냐고 여자의 아우성이 많아졌고, 발 씻겨주면서 노래를 불러달라는 아내의 요구가 많다면서 남편들이 원성을 높이기도 했다. 그야말로 알렉스는 한때 남자들 공공의 적이 되었다. 알렉스는 방송에서 보여준 자신의 로맨틱한 행동들이 다 연출된 것이라는 대중의 반응에 다소 심란했다고 한다. 그리고 연출된 이벤트가 아님을 강조했다. 촬영 후에 신애가 다리를 삐고 말았는데 미안한 마음에 다친 발을 씻겨주었다고 밝혔다.  

 

로맨티스트는 천부적으로 타고나는 걸까. 알렉스를 볼 때마다 드는 생각이다. 알렉스는 여자의 마음을 잘 이해했다. 상대의 마음 읽기는 물론이요, 의미 없이 던지는 무언의 대화까지 이해하려고 했다. 사람이 지닌 가장 강력한 욕구 본능 중 하나가 타인에게 인정받고 싶은 ‘인정 욕구’다. 가장 잘 이해해야 할 대상으로부터 이해받지 못할 때, 사람은 외로워진다. 만약에 이중섭 야마모토 마사코(한국명 이남덕)의 외로움을 몰라주는 괴벽스러운 화가였다면 우린 이중섭과 마사코의 애절한 사랑 편지를 읽지 못했을 것이다.

 

 

 

 

 

 

 

 

 

 

 

 

 

 

 

 

아내에 대한 이중섭의 사랑은 극진했다. 일본 유학 시절에 처음 만났고, 1945년 원산에서 결혼했다. 하지만 한국전쟁의 소용돌이는 둘의 사랑에 비극성을 부여했다. 한국전쟁이 일어난 그해 12월 가족과 함께 월남했던 이중섭은 부산, 제주도 서귀포 등지에서 생활했지만, 생활고 때문에 아내와 두 아들을 일본으로 보냈다. 1953년에 어렵사리 일본으로 건너가 그렇게 그리던 마사코를 만났지만, 두 사람이 함께 보내는 데 주어진 시간은 단 일주일이었다. 훗날을 기약하고 이중섭은 한국으로 돌아와야 했는데 그게 마지막 만남이 될 줄이야. 이중섭은 아내와 가족에 대한 절절한 사랑을 담은 편지를 쓰고 보냈다. 편지 속에는 아내에 대한 사랑,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 잔뜩 배어있다. 삶의 압박과 고통 속에서 살아가는 그였지만 그림에는 다시 만난 가족이 원을 그리며 춤추거나 과일을 먹으며 즐기는 모습을 그려 보냈다.

 

편지글에 자주 등장하는 ‘발가락 군’, ‘아스파라거스 군’은 마사코의 애칭이다. 발가락이 못생겼다고 이중섭이 마사코에게 두 개의 애칭을 붙였다. 이 애칭들은 두 사람이 한창 연애하던 시절부터 생겼다. 부부가 되어서도 이중섭은 연애 시절의 애칭을 그대로 사용했다. 비록 사람들의 눈에는 마사코의 발이 못생겼어도 이중섭의 눈에는 그저 사랑스러운 여인의 발이었다. 그 발에 몇 번이라도 뽀뽀하고 싶다는 말을 편지에 쓸 정도로 발에 대한 남다른 애착이 있었다.

 

 

 

 

 

이중섭  발을 치료하는 남자」 (1941년)

 

 

그런데 이중섭은 왜 마사코의 발을 좋아하게 되었을까. 이중섭과 마사코가 둘이서 거리를 걷던 중, 마사코가 발가락을 다쳤다. 상처가 난 마사코의 발가락에는 출혈이 일어났고, 이중섭은 마사코의 다친 발을 어루만지면서 지혈을 했다. 이때 당시 상황을 잊지 않았던 이중섭은 「발을 치료하는 남자」라는 그림을 엽서 뒷면에 그렸다.

 

이중섭은 마사코의 콤플렉스까지도 사랑한 로맨티스트다. 연애 시절부터 사용하던 애칭이 있어서 그런지 결혼한 부부가 쓰는 편지라기보다는 이제 갓 연애를 처음 시작한 연인 사이의 풋풋한 연애편지 같은 느낌도 난다. 고단하고 궁핍했지만, 그 처연하고 빈 곳을 사랑으로 채우던 가장 ‘따뜻한 시절’에 대한 기억의 모든 것은 오롯이 그림과 엽서에 남아 있다.

 

“사랑스러운 당신이 보고 싶소. 어서 당신의 모든 것을 껴안고 싶은 거요. 나는 몸 성히 잘 있소. 당신의 예쁜 발 사진을 빨리 보내주시오.” (《이중섭 편지와 그림들 1916-1956》 중에서, 51쪽)

 

오늘은 부부의 날. 정성스런 손길의 발 마사지는 아내의 피로를 단번에 해결하면서도 그동안의 고마움을 표현할 기회가 될 수 있으니 일석이조다. 더불어 두 사람의 부부 애정지수도 높아질 수 있는 절호의 찬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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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5-05-22 1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이중섭의 그림 중에 저런 그림이 있었구나.
그 역시 자신과 맞딱트린 장면중에 떠오르는 영감을 가지고
그림을 그렸군.

알렉스가 남자들의 공공의 적이 된 적이 있었군.
우결은 내가 안 봐서 그런가 보는 사람이 있을까 싶은데
여전히 하는 걸 보면 인기 프론가 봐.ㅠ


cyrus 2015-05-23 23:20   좋아요 0 | URL
이중섭의 <발을 치료하는 남자>를 맨 처음 봤을 땐 그냥 발을 어루만지는 남자를 그린 그림인 줄 알았어요. 이 그림에 숨은 사연을 알게 되니까 그림이 좋아보였어요. 이중섭 같은 남자라면 멋지지 않습니까? ^^

우결이 지금도 방영하고 있는 걸 보면, 신기해요. 출연진이 바꿀 때마다 우결 인기 다 떨어졌으니 폐지하라고 말이 많았는데 막상 방송하면 시청자들이 좋아하더라고요.

수이 2015-05-24 1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중에 자네는 발 마사지 엄청 잘해줄듯_
참고로 자네 매형은 발 맛사지 대가다. ㅋ

이거 사고 싶다, 괜히 읽었다 킁킁

cyrus 2015-05-24 15:38   좋아요 1 | URL
귀차니즘만 없다면 매일 마시지 할 자신이 있습니다. ㅋㅋㅋ
 

 

 

 

 

 

 

디에고 벨라스케스 『어릿광대 파블로 데 바야돌리드』 (1635년경)

 

“저기에 어릿광대 파블로 데 바야돌리드가 양감을 지닌 채 공간 속에서 서있습니다. 그런데 바닥은 어디에 있고 벽은 어디에 있습니까?” (필립 드 몬테벨로 & 마틴 게이퍼드 《예술이 되는 순간》 중에서, 151쪽)

 

 

 

 

에두아르 마네는 화가가 되기 전에 스페인 프라도 미술관을 드나들면서 대가들의 걸작을 모사했다. 그러다가 그곳에 걸린 벨라스케스의 어릿광대 그림을 발견하게 된다. 마네도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장 필립 드 몬테벨로처럼 그림에 바닥과 벽이 없다는 사실에 놀라웠을 것이다. 훗날 마네는 동료 화가인 팡탱 라투르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벨라스케스를 ‘최고의 대가’라고 극찬했다. 그러면서 원본의 아우라를 이렇게 표현했다. “배경은 사라지고 그 사람을 둘러싼 공기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는 온통 검은색이지만 살아 있는 듯합니다.”

 

 

 

 

 

 

 

『풀밭 위에서의 점심 식사』 (1863년)

 

 

 

 

 

『올랭피아』 (1863년)

 

 

 

 

 

 

『폴리 베르제르의 술집』 (1881~1882년)

 

 

 

이때부터 마네는 벨라스케스를 오마주의 대상으로 정하여 본격적으로 붓을 들기 시작했다. 벨라스케스의 표현 기법에 영감을 얻어 제작한 그림이 바로 1866년 작 『피리 부는 소년』이다. 그런데 『피리 부는 소년』는 마네의 대표작으로 거론되어도 이상할 것이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파리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풀밭 위에서의 점심 식사』(1863년)와 『올랭피아』(1863년) 그리고 마네의 ‘스완 송’이 된 『폴리 베르제르의 술집』(1881~1882년)에 비하면 예술적 가치가 덜 알려진 것 같다.

 

 

 

 

 

 

 

 

 

 

 

 

 

 

 

 

 

『피리 부는 소년』의 첫인상이 단순하다.  『풀밭 위에서의 점심 식사』,  『올랭피아』,  『폴리 베르제르의 술집』과 같은 마네의 유명한 그림들을 먼저 본 사람들은  『피리 부는 소년』에 감흥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그렇지만 이 그림이 처음 공개되었을 때  『풀밭 위에서의 점심 식사』와  『올랭피아』처럼 비평가들로부터 비난의 뭇매를 맞았다. 이로 인해 『피리 부는 소년』은 살롱전에 낙선하고 말았다. 당시 비평가들도 배경이 없는 그림을 이해하지 못했다. “이 그림에 바닥은 어디 있고 벽은 어디에 있습니까?” 마네가 궁지에 몰리게 되자 인상주의 화가들의 든든한 지원자 역할을 해주었던 소설가 에밀 졸라가 나서서 살롱의 비평가들과 맞섰다.

 

 

 

 

 

『피리 부는 소년』 (1866년)

 

 

“누가 뭐래도 내가 가장 좋아하는 그림은 올해의 낙선작 『피리 부는 소년』이다, 마네의 그림은 꾸밈이 없다. 부분들에 괘념치 않을 뿐 아니라, 인물에 불필요한 덧칠을 하지 않는다.” (에밀 졸라, 《마네 : 이미지가 그리는 진실》 69쪽)

 

 

그림이 단순하게 보여도 한 번 봐도 잊히지 않는다. 관객을 향해 정면으로 지긋이 바라보면서 피리를 부는 소년의 자세가 안정적이다. 안정적인 자세는 관객을 편안하게 만들고, 몰입도를 높여준다. 관객은 피리 부는 소년의 눈을 마주치면서 이제 곧 피리에서 울러 퍼지게 될 멜로디를 들으려고 할 것이다. 한쪽 발에 무게를 둔 완벽한 콘트라포스토의 자세다. 어떤 대상을 아름답게 보이려 애쓰는 것이 ‘꾸밈’이라면 잘 드러날 수 있게 노력하는 것이 ‘보임’이다. 마네는 『피리 부는 소년』을 그리기 위해서 후자를 선택했다. 벨라스케스의 그림을 참고했으며 고대 그리스 조각의 특징인 콘트라포스토 자세를 도입했다. 마네는 근대 모더니즘 회화의 시작을 알린 개방적인 화가로 알려졌다. 비평가들은 마네의 묘사를 시대의 조류를 거스른다고 봤다. 하지만 마네는 고전적 전통을 완전히 단절하지는 않았다. 벨라스케스와 콘트라포스토의 장점을 조합하여 균형 잡힌 신체를 선보였다. 『피리 부는 소년』은 ‘보임’의 결정체다. 마네는 과한 덧칠 없어도 자신의 독창성을 보여주는 데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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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ledgling 2015-05-07 05: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동안 작성한 리뷰들 엮어서 책 한권 내셔도 좋을듯😊 재주가 있으셔요~

cyrus 2015-05-07 17:44   좋아요 0 | URL
그냥 책 읽고 글 쓰는 것이 좋아서 유명 서평가들의 글을 흉내 내려고 애쓰고 있을 뿐입니다. 배운 것도 많지 않아서 글을 잘 읽어보시면 내용이 두루뭉술한 게 많습니다. ㅎㅎㅎ

AgalmA 2015-05-07 06: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신기하네요. 마크 로스코도 마티스의 <붉은 작업실>의 바닥과 벽을 거의 없앤 평면적 공간감을 흠모했었거든요. 저는 그걸 인간의 자유의식이라고 생각합니다 :)

cyrus 2015-05-07 17:47   좋아요 1 | URL
기성 사회가 옳다고 강요하는 것을 뛰어넘을 수 있는 자유의식. 아갈마님의 표현이 마네와 로크스의 예술을 함축하고 있군요. 표현이 정말 좋습니다. ^^
 

 

 

 

 

 

 

 

 

 

 

 

 

 

 

 

 

 

 

 

 

 

 

 

 

 

 

 

 

 

 

고흐는 노곤한 일상에 지친 영혼을 카페에서 위로받았다. 카페는 그에게 생의 활력을 주는 비타민이었으며 미적 감성을 일깨우는 각성제였다. 카페는 문을 여닫는 시간이 따로 없었다. 낮이고 밤이고 원하는 시간에 들락거릴 수 있었다. 어떤 구속도 없었다. 그곳은 법이 없는 공간이었다. 예술가들은 낮이고 밤이고 술을 마셨고 마시는 이유를 설명하지 않았다. 술잔은 끝없이 채워졌다.

 

 

 

 

 

빈센트 반 고흐  「밤의 카페 테라스」 1888년

 

고흐는 삼시세끼를 거르더라도 커피만큼은 꼭 마셨다고 한다. 그가 프랑스 남부의 아를로 화실을 옮긴 후 가장 먼저 구입한 것이 커피를 끓이는 도구인 것만 봐도 그가 얼마나 커피에 의지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술과 더불어 진하디진한 커피는 유약했지만, 열정적인 젊은 예술가에게 힘을 쏟게 하는 에너지원이었다. 아를에 머무는 동안 카페에 관한 그림도 여러 점 남겼다. 검은색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야외 카페의 밤의 풍경을 파랑, 초록, 노랑으로 밝고 화려하게 표현한 「밤의 카페 테라스」가 대표적 작품이다. 지금도 프랑스 아를에 가면 「밤의 카페 테라스」의 배경이 됐던 카페를 찾을 수 있다.

 

 

 

 

 

이 그림 속에 예수와 열두 제자 그리고 십자가를 찾으셨습니까?

 

 

최근 「밤의 카페 테라스」에 대한 흥미로운 해석이 세간의 주목을 받고 있다. 미술 연구가 제어드 박스터는 「밤의 카페 테라스」속에 종교적 상징이 숨어 있다고 주장했다. 그의 해석을 따르면 카페 내부 가운데 하얀 옷을 입은 종업원은 예수, 그 옆에 테이블에 앉거나 서 있는 사람은 열두 제자, 카페에서 걸어 나가는 사람은 유다를 상징한다. 노란색은 고흐가 즐겨 사용하는 색상이다. 박스터는 노란색을 천국을 의미하는 색상으로 해석했다. 하얀 옷을 입은 사람 위에는 카페 내부를 밝히는 노란 불빛이 있는데 예수의 후광이라고 주장했다. 또 카페의 창틀에 십자가 형태가 있다는 점도 언급했다. 박스터의 해석대로라면 고흐는 「밤의 카페 테라스」에 ‘최후의 만찬’을 그려 넣은 셈이다.

 

고흐가 그림을 본격적으로 그리기 전에는 목사가 되는 것이 꿈이었다. 목사인 아버지 밑에서 유년기를 보냈기 때문에 종교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삶을 살았다. 고향에 돌아와 선교사로 활동한 적도 있었다.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는 성서에 나오는 문장을 인용할 정도로 종교적 욕구가 강렬했던 고흐의 심정을 확인할 수 있다.

 

테오야, 지난 일요일에 네 형이 처음으로 하느님의 성전에서 설교를 했어. “이 자리에서 내가 평화를 주겠노라.” 라고 쓰여 있는 자리에서.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 복사해서 동봉한다. (중략) 설교단에 서 있을 때, 나는 지하의 어두운 궁륭에서 따사로운 한낮의 빛 속으로 걸어 나오는 기분이었고, 이날 복음을 전하려는 어느 곳이나 갈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 너무나 좋았어. 그렇게 잘하려면 마음속에 복음을 담고 있어야 해. 그래야 그분도 기꺼워할 거야. 하느님이, “빛이 있으라!”고 하시니 빛이 있었잖아. 그분이 말씀하시면 그대로 이루어지고, 명하면 확고히 자리 잡겠지. 우리를 부른 그분은 신실하니까, 그것을 성취할 거야. (1876년 10월 31일에 쓴 고흐의 편지 중에서, 《고흐의 편지 1》 64~65쪽)

 

박스터의 해석은 상당히 신빙성이 높아 보인다. 사실 예전에도 고흐가 그림에 종교적 상징을 그려 넣는다는 미술 연구가의 주장이 나온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인터넷 언론인 허핑턴포스트에서 고흐의 「밤의 카페 테라스」 해석에 관한 기사가 처음으로 소개된 이후로 국내 일간지에서 너도나도 할 것 없이 있는 내용 그대로 전달했다. 그렇지만, 박스터의 해석을 하나의 가정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주장을 뒷받침하는 충분한 증거가 있다고 검증을 제대로 거치지 않았다면 고흐의 그림을 종교적 상징과 결부시켜 보는 가정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면 곤란하다.

 

나는 박스터의 해석에 완전히 동의하지 않는다. 노란색이 천국의 색이라고? 설득력이 떨어지는 주장이다. 시대별 유행과 환경에 따라 색채감정, 색상의 의미는 끊임없이 달라진다. 그래서 색은 인간의 문화사에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그러므로 하나의 색에는 여러 가지 상징과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노란색은 모순의 색이다. 찬란하게 빛나는 황금빛이 연상되는 화려한 아름다움을 지녀서 권력을 상징하면서도 경고, 메마른 황무지, 상황에 따라서는 멸시의 색으로 인식했다. 중세와 르네상스 미술품들은 대체로 황금의 금박이 많이 들어가 있다. 실제로 이 당시에는 그림 가격의 절반 정도를 금박을 입힐 정도로 물감보다 금을 많이 사용했다. 당시 금은 고가의 상품이다. 당연히 금박을 입힌 그림의 가격은 천청부지로 솟아오른다. 그림에 들어간 황금은 감각을 초월하는 기독교 세계에 대한 찬양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풍요를 예찬하는 세속적인 취향도 반영되어 있다. 그러나 중세 사람들은 자신들이 선호했던 노란색은 ‘황금색’이라고 불렀다. 반면에 우리가 생각하는 단순한 노란색은 기독교 윤리에 어긋나는 이단자를 가리키는 색이었다. 독일의 창녀는 노란 머릿수건이나 망토를 착용해야 했고, 예수를 배반한 유다의 옷은 노란색으로 그려졌다. 사실 기독교 전통에서는 노란색을 절대로 사용되어선 안 되는 금기의 색이다. 기독교인들은 유대인이나 이단자를 차별하기 위해 그들에게 무조건 노란색이 들어간 복장이나 모자를 착용하도록 강요했다.

 

 

 

 

 

빈센트 반 고흐  「노란 집」  1888년 

 

 

의학자 문국진은 의학의 힘을 빌려 고흐의 노란색에 대해서 색다른 견해를 내놓는다. 고흐가 노란색을 즐겨 사용했고, 유독 그의 그림에 노란색이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이유를 지병으로 앓고 있던 황시증(黃視症)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압생트라는 독한 술을 즐겨 마신 고흐는 이 술의 독성으로 인해 사물이 노랗게 보이는 황시증을 앓았다. 이미 몸이 망가질 대로 망가져 버린 고흐는 노란색을 좋아했다. 고흐에게 노란색은 세상이 알아주지 않는, 그저 칙칙하기만 했던 자신의 그림을 더욱 화려하게 빛내주게 만드는 구원의 색이었다. 하지만 화려한 색상에 지나치게 탐닉할수록 고흐의 건강은 더욱 악화하였다. 고흐는 크롬(Chrom) 성분이 있는 노란색 물감을 자주 사용했는데 당시 시장에 나온 카드뮴 노란색 물감보다 가격이 매우 저렴했다. 궁핍한 생활을 보내는 고흐는 가격이 싼 크롬 물감을 사용해야만 했다. 그런데 당시에 나온 크롬 물감은 카드뮴 물감보다 독성이 많은 물질이었다. 고흐의 크롬 물감 사용이 발작과 환각 증세를 일으키게 만든 원인 중 하나였을 것이다.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유명 경제 전문 일간지의 모 논설위원은 박스터의 해석을 글감으로 삼아 열두제자를 주제로 오늘 자 칼럼을 기고했다. 논설위원은 박스터의 해석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 노란색을 천국의 색이라고 언급하면서 고흐의 종교적 열망을 강조한다. 기독교에 심취했던 고흐의 새로운 면을 대중에게 소개하는 것은 좋으나, 타당성이 떨어지는 해석을 일종의 지식처럼 여겨서 전달해선 안 된다. 흥밋거리에 불과한 엉터리 정보를 인용하기보다는 고흐의 편지를 인용하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 그림에 대한 해석은 자유다. 다만 이현령비현령에 가까운 자의적인 해석은 경계해야 한다. 정밀한 검증을 거치지 않은 그럴듯한 내용의 가정은 쪼가리 지식으로 포장되어 인터넷이라는 공간에서 유포되기 쉽다. 대중은 그걸 침된 지식이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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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양물감 2015-03-10 21: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요. 삼시세끼 굶고 커피마시는 사람. ^^

cyrus 2015-03-11 16:15   좋아요 0 | URL
실험 결과마다 차이가 있는데 하루에 커피 두 세 잔이면 건강에 좋다고 하더군요. 그 대신 삼시세끼 식사를 하고난 뒤에 커피를 마셔야 됩니다. 공복에 커피를 마시면 위장에 부담을 줄 수 있으니까요. ^^

마녀고양이 2015-03-10 23: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제까지 가본 미술전시회 중에 고흐 작품은 정말 발이 떨어지지 않더군요. 실물과 사진이 가장 차이나는 작품들이었고 숨쉬기 어려울 정도의 아름다움이었어요.

노란색, 모순의 색이라는 표현 정말 공감해요. 전 노란색을 참 좋아해요, 그리고 커피도.. 주전자 째로 ^^

cyrus 2015-03-11 16:22   좋아요 0 | URL
맞아요. 2년 전에 한가람미술관에서 열린 고흐 전을 본 적이 있었는데 책에서 보던 것과 느낌이 달랐어요. 그림을 좀 더 가까이 보면서 고흐 특유의 굵은 붓 터치를 확인할 수 있었어요.

저도 노란색이 좋아요. 신맛을 좋아해서 그런지 노란색을 보면 상큼한 레몬 느낌이 들어요. ^^

transient-guest 2015-03-11 01: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새로운 해석(?)에 따라 보니 정말 그렇게 보이네요. 저는 고흐의 후기작들에서 보이는 빛이 일렁이는 듯한 작법을 좋아합니다. 그게 정신분열의 한 증상이라고도 하지만, 저는 그것은 고흐의 눈으로 바라본 세상이 아니었을까 싶네요.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로 불빛을 바라보는 듯한...

cyrus 2015-03-11 16:26   좋아요 0 | URL
guest님, 고흐의 그림을 표현하는 댓글이 무척 인상적입니다. 저는 불꽃이 하늘 위로 치솟아 오르면서 타오르는 것처럼 그려진 사이프러스 나무 그림을 보면 눈물과 고통 속에 가려진 고흐의 강인한 정신이 떠오릅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5-03-11 05: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히려 이 글이 그 신문 칼럼에 쓰여야 하는데 안타깝습니다. ㅎㅎ

cyrus 2015-03-11 16:28   좋아요 0 | URL
이런 글로 신문사에 투고해달라고 보내면 퇴짜 맞을 겁니다. ㅎㅎㅎ

만병통치약 2015-03-11 07: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서 아프거나 어지러우면 하늘이 노래지는군요 ^^

아무개 2015-03-11 08:29   좋아요 0 | URL
아하!

cyrus 2015-03-11 16:28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그 생각을 못했어요. ㅎㅎㅎ

해피북 2015-03-11 07: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곰곰생각하는발님 말씀에 깊은 공감을!
어떤 미술 책을 읽는것보다 머리에 쏙 들어오네요 ㅎ 이 그림에 예수와 열두제자가 있다는것 고흐가 노란색을 좋아했지만 사용하는 물감성분에 발작과 환각증세가 있었다는것이 인상적 이였어요^~^

cyrus 2015-03-11 16:31   좋아요 0 | URL
평소에 눈여겨봤던 책 내용을 요약한 것뿐인데요. 다시 글을 읽어보니 쓸데없이 길게 썼다는 느낌이 들어요. ^^;;

2015-03-11 09: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3-11 17: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3-12 08: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3-11 10: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3-11 17: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stella.K 2015-03-11 12: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이다. 혹시 영국 bbc 제작이던가?
베네딕트 컴버배치가 고흐로 난왔던 다큐멘터리 본적 있니?
그거 진짜 잘 만들었더라. 컴버배치는 내가 좋아하는 배우라
보는 감동이 남달랐지.
근데 난 고흐가 매독에 걸렸다는 게 궁금해.
왜, 어떻게 걸렸을까? 미스테리야. 저 책들 중 어디에 나와 있을까?

cyrus 2015-03-11 17:42   좋아요 0 | URL
요즘 컴버배치가 대세이긴 하군요. 다큐는 본 적이 없어요. 다큐 제목을 알려주실 수 있어요? 한 번 보고 싶어요.

아마도 고흐가 매독에 걸린 이유가 사창가를 자주 가서 생겼을 겁니다. 고흐와 동시대에 살았던 예술가들도 유곽이나 매음굴을 찾아갔으니까요. 고흐의 연인이었고, <슬픔>이라는 그림 모델인 시엔이라는 여자의 직업이 창녀였어요.

stella.K 2015-03-11 18:38   좋아요 0 | URL
그니까. 나도 그런 생각이 드는데 기독교 신앙을 가졌고
목사까지 되려고 했다면서 성적으론 문란했다는 게 좀
이해가 안가. 너무 내 식의 해석인지는 몰라도.
어쨌든 참 불행한 사람이야.

`반 고흐: 페인티드 위드 워즈`일거야.
4부작으로 되있던가 그랬던 것 같은데 진짜 잘 만들었더라.
영국에선 세익스피어와 컴버배치는 그 무엇과도 안 바꾼다나 뭐라나?
아무튼 그런 말이 있어.
글이 좋아서 특별히 가르쳐 준다.ㅋ
말 나온 김에 나도 다시 봐야겠다.^^

stella.K 2015-03-12 11: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컴버배치가 나온 건 그냥 49분짜리 필름이고,
반 고흐 위대한 유산이란 게 4부작이더군. 참고하도록!
 

 

 

 

 

 

 

 

 

 

 

 

 

 

 

 

 

 

1980년 광주의 5월은 아픔의 달이다. 이제 그 날들은 광주민주화운동으로 기록됐고 망월동 묘역에는 웅장한 추모탑이 들어섰다. 역사는 어떤 형태로든 기록된다. 글, 그림 등의 다양한 메커니즘으로 역사는 남겨져 훗날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게 하는 자료가 된다.

 

미술가들은 너나없이 아름다움을 추구한다. 하지만 현실을 직시하고, 그 사회 인식을 작품에 담기도 한다. 시대가 암울하고 폭압적인데 아름답고 장식적인 그림만 줄곧 그릴 순 없는 법이다. 특히 1980년대 일군의 작가들은 미술을 통해 억눌린 시대에 저항하며 ‘민중미술’이란 아름드리 나무를 키워냈다. 뜨거운 가슴과 투혼으로 암울했던 현실을 ‘현실과 발언’이란 이름으로 권력과 맞섰다.

 

시대에 뒤처진 미술 같지만, 세상이 어지럽다 싶으면 리얼리즘은 늘 미술의 전선 앞으로 다시 나온다. 이해하기 쉬운 미술이기 때문에 대중들에게 효과적으로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어서다. 특히 엄혹한 군사독재 시절 리얼리즘 미술은 이른바 민중미술과 연결되면서 한국 현대미술에서 중요한 구실을 했다. 하지만 오늘날의 리얼리즘 미술은 현실을 오롯이 담지 못하고 있다. 작년 폐막한 광주비엔날레에서 홍성담 화백의 「세월오월」은 끝내 걸리지 못했다. 대통령을 직설적으로 풍자했다는 이유로 주최 측은 그림 전시를 허락하지 않았다. 전시 유보 결정은 현실을 미화하지 않은 민중미술의 정신에 저버리는 것이다.

 

‘현실과 발언’ 동인으로 참가한 신경호 화백은 리얼리즘을 현실주의로 이해한다. 단순히 보이는 것 그대로 사실적으로 그리는 것을 리얼리즘으로 보지 않는다. 한국인의 심성 근원에 내재하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그릴 줄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현실을 함께 아파하고, 그걸 뛰어넘기 위해서 치열하게 사랑하는 삶이야말로 신 화백이 추구하는 리얼리즘이다.

 

 

 

 

 

신경호 「넋이라도 있고 없고 : 초혼 1980」 1980년

 

 

펄럭이고 있다.
하이얀 만장 한 줄기
스산한 구름 가득한 하늘을 휘저으며 울리고 있다.
펄럭펄럭 몸을 비틀고서는
중천을 팽팽 치달으며
쥐어짜내는 목소리 다하도록 몸부림치고 있다.
비틀렸다가 치켜 오르고
휘어졌는가 하면 넘실대며
펄럭이고 있다.
부딪히고 있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슬픔과 분노의 욱신거림을
천공에 빛바래며 펄럭이고 있다.

 

 

(김시종, ‘흐트러져 펄럭이는’ 중에서, 《광주 시편》 18쪽)

 

 

신 화백은「넋이라도 있고 없고 : 초혼 1980」을 통해 광주 시민들의 넋을 소생함으로써 그들이 말하지 못한 슬픈 사연을 그림으로 대신 전한다. 광주항쟁이라는 이름으로 굳어진 역사 속에서 나오지 않는 무명 희생자들의 넋은 고통의 기억을 잊으려고 억지로 도려낸 상흔이다. 광주의 핏빛 상흔은 그림 속 만장이 되어 펄럭이고 있다. “광주는 진달래로 타오르는 우렁찬 피의 절규이다.” (김시종, ‘바래지는 시간 속’ 중에서, 《광주 시편》 32쪽) 땅속에 매장된 희생자들의 억울한 목소리는 피의 절규가 되어 잊지 말라고 살아남은 자들 앞에서 몸부림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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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5-02-05 18: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난 준가? 서경식의 이책 <TV 책을 보다>에서 다루더군.
재밌었는데 봤니?

나도 이 그림이 참 묘하게 끌리더군. 설명이 그래서 그런지
본질보다 비본질을 다루는 것 같기도 하고. 진짜 혼백이 올 것도 같고.ㅋ

cyrus 2015-02-05 20:33   좋아요 0 | URL
볼려고 했는데 깜박 잊어버려서 못봤어요. KBS 다시보기 되면 봐야겠어요.

저는 신경호 화백이 그린 허공에 대고 짖는 개 그림이 인상적이었어요. ^^

stella.K 2015-02-06 11:29   좋아요 0 | URL
그거 인터넷으로도 볼 수 있어.
당장 www.kbs.co,kr로 들어가서 봐.ㅋㅋ
서경식 교수 인터뷰도 볼 수 있어.^^

cyrus 2015-02-06 14:40   좋아요 0 | URL
무료로 볼 수 있는 거죠? ㅎㅎㅎ
 

 

 

 

 

 

 

 

 

 

 

 

 

 

 

 

 

 

 

 

사드의 《사제와 죽어가는 자의 대화》(워크룸프레스, 2014)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달리 그렇게 외설적인 장면이 나오지 않는다. 사제와 죽어가는 자가 종교, 쾌락, 도덕관 등 종교적․철학적 주제에 관해 대화를 나눈다. 죽어가는 자는 종교적 신념을 전적으로 거부하고, 신체적 쾌락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반종교적이고 쾌락을 삶의 목표로 삼는 모습에서 리베르티나주(Libertinage) 사상의 원형을 발견할 수 있다. 죽어가는 자는 사드가 선호하는 ‘방탕한 자유인’ 리베르탱(Libertin)이다.

 

이 대화에서 승기를 잡는 쪽은 죽어가는 자다. 사제가 리베르티나주에 대해 의문을 품으면 죽어가는 자는 논리적으로 반박한다. 죽기 일보 직전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사제의 질문에 바로바로 응답하는 걸로 봐서 죽음에 대해 두려움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이 짧은 대화는 죽어가는 자가 드디어 죽음이 임박하는 순간에 이르러서야 끝나게 된다. 점점 생명의 기운이 빠지면 말할 힘도 없을 텐데 죽어가는 자는 쾌락의 즐거움을 예찬한다. ‘살아남은 자’인 사제에게 종교를 내려놓고 쾌락을 추구하는 삶을 살아볼 것을 권하기도 한다. 죽어가는 자는 쾌락주의자답게 죽는 순간도 평범하지 않다.

 

 

이제 나의 마지막 순간이 다가오고 있네, 햇살보다 아름다운 여자 여섯 명이 지금 옆방에 있어. 바로 이 순간을 위해서 내가 대기시켜 놓았지. 자네도 동참하게나. 나처럼 여자들이나 품고서, 그 모든 미신의 허망한 궤변을 잊도록 해보게. 위선이 낳은 어리석은 착각들일랑 깡그리 잊어버리라구. (《사제와 죽어가는 자의 대화》 중에서, 36쪽)

 

 

죽어가는 자가 천상의 세계로 향하는 장면은 숭고한 분위기와는 거리가 멀다. 죽어가는 자의 영혼 주변에 거룩한 신과 천사들이 아닌 여자 여섯 명이 다가온다. 죽어서도 천상의 세계에서 여자, 그것도 여섯 명이나 품을 수 있다니. 역시 사드다운 발칙한 상상력이다.

 

 

 

 

 

 

 

 

 

 

 

 

 

 

 

 

 

그런데 죽음을 초월한 쾌락 예찬은 누군가에게는 숭고한 장면으로 연출되기도 한다. 파블로 피카소의 「초혼」이라는 그림은 1901년에 그려진, 피카소의 초창기 작품이다. 이때 피카소는 주로 어두운 청록색의 색조를 띤 그림들을 많이 그렸는데, 그의 작품 활동 기간을 구분하기 위해서 이 시기를 ‘청색 시대’라고 부른다. 푸른색이 지배한 피카소의 그림들을 보면 무척 우울하고 냉랭한 느낌을 받는다. 청색 시대는 피카소의 무명 시절이었고, 지독한 가난에 시달려야 했던 힘든 시기였다. 피카소가 푸른색의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결정적인 계기는 친구의 죽음에서 비롯된다. 스페인에서 태어나고 자란 피카소는 음주와 음란한 공연을 즐기는 파리 사람들의 자유분방한 삶에 문화적 충격을 받는다. 친구 카를로스 카사헤마스는 파리 생활에 적응하지 못했던 피카소에게 가족이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그는 가끔 피카소의 모델이 되어주기도 했다.

 

하지만 두 사람의 관계는 길지 않았다. 1901년 카사헤마스는 애인에게 버림받은 일로 인해 자살한다. 친구의 죽음은 피카소를 더욱 우울하게 만들었다. 그 이후로 피카소의 캔버스에 푸른색이 눈에 띌 정도로 많아졌다. "나는 카사헤마스의 죽음을 알고부터 푸른색의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라고 피카소 본인이 직접 말할 정도다. 죽은 친구를 애도하기 위해 그리기 시작한 그림이 바로  「초혼」이다.

 

 

 

 

 

피카소   「초혼」(카사헤마스의 장례)  1901년

 

 

「초혼」의 다른 제목은 ‘카사헤마스의 장례’이다. 카사헤마스로 보이는 사람이 하얀 천이 덮인 채 누워있다. 죽은 자 주변에 그의 장례식에 참석하는 사람들이 서 있다. 여기까지가 지상의 세계이다. 이제 바로 위에 있는 천상의 세계로 시선을 돌려보자. 그런데 천사라고 할 수 없는 인물이 그려져 있다. 스타킹만 걸친 벌거벗은 여자 여섯 명이 있다. 그녀들은 누군가를 유혹하기 위해서 야릇한 자세를 취한다. 그렇다. 그녀들이 기다리는 사람들은 천상의 세계로 향하는 카사헤마스의 영혼이다. 거의 벌거벗은 여섯 명의 여자들은 창녀로 볼 수 있다.

 

피카소는 죽은 친구의 장례식을 성스러운 느낌의 종교화처럼 그리지 않았다. 엄숙한 장례식에 창녀가 등장하는 성(性)스러운 그림을 그린 이유가 무엇일까. 죽은 친구를 모욕하기 위해서 그린 것일까. 전혀 그렇지 않다. 피카소는 불행한 죽음으로 먼저 세상을 떠난 친구를 진심으로 슬퍼했고, 무척 안타깝게 여겼다. 카사헤마스는 사랑에 실패한 채 끝내 자살을 선택했다. 영혼이 된 카사헤마스는 지상에서의 육체적 쾌락을 누릴 수 없다. 그래서 피카소는 친구가 천상에서도 마음껏 쾌락을 누릴 수 있도록 천사 대신에 창녀를 그려 넣은 것이다. 친구를 생각하는 화가의 배려인 셈이다.

 

 

 

            

 

 

 

피카소는 기존의 종교화 양식을 답습하면서도 죽은 친구를 영원히 기억하기 위해 자신만의 표현을 시도했다. 그렇다고 이 그림만으로 피카소가 무신론자이거나 리베르탱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 피카소는 쾌락을 원하는 파리 사람들의 삶을 알고 있었을 터. 친구를 위해서 세속적인 그림을 그렸을 뿐이다. 그런데 사드의 글에서 숨을 거두는 죽어가는 자와 피카소의 그림에 나오는 카사헤마스를 하늘에서 기다리는 사람들이 하필이면 신이 아닌 여섯 명의 여성이라는 사실이 신기할 따름이다.

 

여기서 또 하나 재미있는 사실. 《사제와 죽어가는 자의 대화》 결말에서 사제는 죽어가는 자의 말씀을 믿고 여자를 품에 안은 삶을 살게 된다. 아시다시피 피카소는 여성 편력으로 평생 7명의 연인을 뒀고, 두 차례 결혼했다. 피카소는 남성 누드는 거의 그리지 않았다. 그 대신 여성 누드가 많다. 피카소의 여성 누드는 내밀한 쾌락을 찬양하는 예술적 표현이었다. 결국, 쾌락이 두 사람의 삶을 완전히 바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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