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 살다 내가 라이트노벨을 읽게 될 줄이야. 크툴루 신화 아니었으면 냐루코를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아이소라 만타(あいそら まんた)의 《기어와라! 냐루코 양》(약칭 ‘냐루코 양’)이 정말 재미있어서 애니메이션까지 찾아봤다.
고등학생 시절에 밤 새면서 만화를 본 적이 있었다. 지금은 어린이용 만화 전문 케이블 채널이 되어버렸지만, 옛날 '투니버스' 리즈 시절에 해주던 만화들이 참 재밌었지... (아련) 십 년 전 만화를 푹 빠졌던 그때 그 시절이 생각나서 좋았다. 다만, 잠을 미루면서까지 만화를 보게 되니까, 다음 날 아침을 맞이할 때 피로감이 잔뜩 몰려왔다. 이래서 학창 시절이 좋은 거다.
《기어와라! 냐루코 양》은 아이소라 만타의 데뷔작이다. 그는 이 작품으로 가장 뛰어난 신인 라이트노벨 작가에게 주는 ‘GA문고대상 우수상’의 영광을 안았다. 비록 대상에 오르지 못했으나(이때 대상 수상작은 없었음) 《냐루코 양》은 첫 번째 GA문고대상 수상작으로 기억되기에 충분하다.
크툴루 신화를 소재로 한 작품치고는 상당히 가벼우면서도 지나치게 유쾌하다. 작품의 장르는 코미디다. 작가는 농담으로 《냐루코 양》의 장르를 ‘러브크래프트 코미디’라고 밝혔다. 음울하고, 절망적인 러브크래프트의 소설을 생각하면, 이걸 코미디물로 패러디한 작가의 패기가 대단하게 느껴진다. 《냐루코 양》을 GA문고대상에 응모했을 때 원제가 ‘꿈을 꾸면서 기다리노니(夢見るままに待ちいたり)’였다. 이 말은 크툴루(Cthulhu)를 소환할 때 부르는 주문이다. 러브크래프트의 『크툴루의 부름』(《러브크래프트 전집 1》 수록)에 나와 있다.
Ph'nglui mglw'nafh Cthulhu R'lyeh wgah'nagl fhtagn
(픈글루위 미글와나프 크툴루 리예 와그나글 프타근)
리예에 있는 집에서 죽은 크툴루가 꿈을 꾸며 기다리고 있다.
※ 리예 : 크툴루가 잠들어 있다는 (가상) 도시
신인 작가의 데뷔작이 아무리 뛰어나다고 해도, 독자의 마음을 어떻게든 사로잡으려고 하는 티가 난다. 그래서 조금은 억지스럽고 어설픈 면이 있다. 사실 《냐루코 양》에도 신인 작가로서의 과욕이 넘쳐흐른다. 인물들 간의 대사는 크툴루 신화뿐만 아니라 유명 일본 만화, 영화, (일본)가요 등을 시도 때도 없이 패러디하는데 보는 이를 혼돈 속으로 밀어붙인다. 내가 이 표현을 일부러 과장한 게 아니다. 작가가 패러디한 것을 따로 정리하려면 책 한 권으로 부족할 수 있다. 패러디와 관련된 배경지식 없이 만화를 보게 되면 ‘일본인 출신 덕후’가 아닌 이상 인물이 내뱉는 사소한 말 한마디와 특별한 행동이 패러디라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냐루코 양》을 라이트노벨로 읽든, 만화로 보든 적어도 크툴루 신화는 기본적으로 알고 있어야 한다. 크툴루 신화가 뭔지 모른 채 《냐루코 양》을 보면 산만한 코미디물처럼 느껴질테고, 크툴루 신화를 이해한 뒤에 《냐루코 양》을 보게 되면 ‘러브크래프트 코미디’의 진수를 느낄 수 있다.
《냐루코 양》의 여주인공 냐루코(ニャル子)는 니알라토텝(Nyarlathotep)을 모티브로 한 인물이다. 냐루코라는 이름은 니알라토텝의 일본식 발음 ‘냐루라토호테프’에서 유래되었다. 냐루코는 우주에서 활동하는 행성보호기구 소속 요원(우주 수사관)이며 ‘니알라토텝 성인(星人)’이다. 그러니까 냐루코는 니알라토텝이 아니라 ‘니알라토텝의 성질을 가진 외계인’이다. 냐루코의 트레이드 마크인 회색빛 아호게(アホ毛, 우리나라에서는 ‘바보털’로 알려져 있음)는 니알라토텝의 거대하고도 뾰족한 촉수를 떠올린다. 냐루코는 우연히 지구에서 외계조직을 무찌르는 과정에서 야사카 마히로(やさか まひろ)라는 소년에 한 눈에 반해버린다. 지구에 남아서 일을 한다는 핑계로 마히로의 집에 얹혀살면서 마히로에게 직설적으로 애정 공세를 펼친다. 그러나 마히로는 냐루코의 지나친 구애를 부담스러워한다.
《냐루코 양》은 '하렘물'이다. 즉, 남자 주인공 한 명이 여러 명의 여자 인물들에게 둘러싸여 산다는 줄거리로 구성되었다. 마히로의 집에는 냐루코뿐만 아니라 쿠우코(クー子), 하스타 군(ハスター君)도 살고 있다.
쿠우코는 불의 속성을 가진 ‘크투가(cthugha) 성인’이다. 크투가는 러브크래프트의 후계자이자 지금의 크툴루 신화를 창조하는 데 기여한 어거스트 덜레스(August William Derleth)의 작품에 등장하는 존재이다. 크투가는 땅의 지배자 니알라토텝과 천적 관계이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쿠우코는 냐루코를 좋아하는 ‘변태’ 백합(Girl’s Love) 기믹으로 등장한다. 냐루코도 마히로에 접근할 때 섹드립을 날리는 편인데, 쿠우코는 이보다 더 심하다. 하지만 이미 마히로에게 푹 빠진 냐루코는 자신의 천적이나 다름없는 쿠우코의 애정을 단호히 거부한다.
하스타 군은 바람의 지배자 ‘하스터(Hastur) 성인’이다. 하스터는 플레아데스 성단에 위치한 세라에노(Celaen)라는 행성을 지배한다. 그래서 하스타 군의 직업이 작중에서 세라에노 도서관 사서로 소개됐다. 하스타 군은 소녀 같은 귀여운 소년 이미지로 등장하는데, 마히로를 좋아한다. 그를 얼마나 좋아하면, 하스타 군은 자기가 직접 마히로의 아기를 낳고 싶다고 말할 정도다. (도대체 이 녀석의 성 정체성이 뭐냐?)
가장 널리 알려진 하스터의 생김새는 노란 로브(robe, 무릎 아래까지 오는 긴 가운)를 두른 인간의 형태이며 ‘옐로 사인(Yellow sigh)’이라는 이름의 표식을 들고 다닌다. 러브크래프트는 자신의 소설 『어둠 속에서 속삭이는 자』(《러브크래프트 전집 2》 수록)에서 하스터를 처음 언급했지만, 사실 지금의 하스터를 있게 해준 결정적인 작품이 바로 로버트 체임버스(Robert Williams Chambers)의 소설집 《노란 옷의 왕》(우리나라에서는 ‘노란 옷 왕 단편선’이라는 이름으로 번역됐다)이다. 러브크래프트는 체임버스의 소설에서 하스터를 창조하는 데 필요한 영감을 얻었다.
《냐루코 양》를 보다 보면 패러디를 발견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특히 크툴루 신화와 관련된 재미있는 대사와 장면을 발견하면, 웃음이 안 나올 수가 없다. 라이트노벨과 만화를 보기 전에, 《도해 크툴루 신화》(AK커뮤니케이션즈, 2010년)와 《크툴루 신화 대사전》(AK커뮤니케이션즈, 2013년)을 참고하는 것이 좋다. 특히 《크툴루 신화 대사전》은 《냐루코 양》에서 패러디되었거나 인용된 크툴루 신화의 개념이 상세하게 소개되어 있다. 이 책의 전체 제목이 ‘게임 · 애니메이션 · 라이트노벨 마니아들을 위한 크툴루 신화 대사전’이다. 《냐루코 양》을 덕질하기에 유용한 참고서다.
※ 제목의 유래 : 후시미 츠카사(伏見 つかさ)의 라이트노벨 《내 여동생이 이렇게 귀여울 리가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