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토 준지 컬렉션 9화 두 번째 이야기
혈옥수(血鈺樹)
안자이와 카나는 차가 고장 나는 바람에 사람이 살지 않는 외딴 마을을 헤맨다. 갑자기 아이들이 튀어나와 커플을 공격하고, 카나의 목에는 아이에게 물린 상처가 생긴다. 가까스로 아이들을 피해 달아난 커플은 혼자 사는 청년의 집에 머무른다.
* 이토 준지 《이토 준지 공포박물관 7 : 신음하는 배수관》 (시공사, 2008)
청년은 커플에게 자신이 사랑했던 여자 친구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여자는 청년에게 자살을 암시하는 듯한 발언을 한다. 그녀는 수수께끼의 말을 남겼는데, 자기 몸속에 흐르는 피가 밖으로 빠져나가고 싶어 한다고 말했다. 결국, 그녀는 칼로 목을 그어 자살한다. 청년은 여자의 목에 흐르는 피를 빨고, 목에 난 상처 부위에 ‘혈옥수’가 자라난다. 여자가 말한 대로 몸속의 피는 밖으로 나오면 나무 형태로 변한다. 혈옥수는 체내의 영양분을 먹으면서 점점 자라고, 영양분이 빠져나간 몸은 미라가 된다. 청년은 혈옥수로 남게 된 여자 친구가 영원히 살아간다고 믿는다. 그런데 상처가 난 카나의 목에 혈옥수가 자라기 시작하는데…‥.
* 지그문트 프로이트 《정신분석학의 근본 개념》 (열린책들, 2004)
『혈옥수』는 에로스(Eros)와 타나토스(Thanatos)라는 프로이트의 명제와 공포물의 대명사인 ‘뱀파이어’ 설정을 결합한 이야기다. 프로이트는 『쾌락 원칙을 넘어서』라는 글에서 사랑하는 대상을 파괴하고 생명이 없는 무기질로 환원시키려는 죽음 욕동을 가설로 제시했다. 프로이트에게 삶의 욕동은 에로스로 건강하지만, 죽음 욕동인 타나토스는 위험하다. 에로스는 원천이 사랑이기에 건설적이지만, 타나토스는 원천이 미움이기에 파괴하려 든다. 죽음 욕동은 분노를 표출할 대상을 겨냥한다. 분노가 행동으로 표출될 때 쾌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혈옥수』의 청년은 자신의 고귀한 목적(혈옥수로 가득한 정원을 만들고 즐기는 것), 즉 쾌락을 위해 타자를 죽음의 구렁텅이로 빠뜨린다(흡혈 행위 이후에 사람의 몸에서 자라나는 혈옥수). 물론 이 쾌감은 정당하지 않다. 쾌감의 희생자 대다수는 여성이기 때문이다.
* 박선경 역 《세계 서스펜스 추리여행 1》 (나래북, 2014) - 클라리몽드
* 테오필 고티에 《고티에 환상 단편집》 (지만지, 2013) - 사랑에 빠진 죽은 연인
* [절판] 신주혜 역 《클라리몽드 : 아홉 개의 환상기담》 (작품, 2013) - 클라리몽드
* 이탈로 칼비노 엮음 《세계의 환상소설》 (민음사, 2010) - 죽은 여자의 사랑
* 이규현 역 《이것은 소설이 아니다》 (창비, 2010) - 죽은 여인의 사랑
* 정진영 역 《뱀파이어 걸작선》 (책세상, 2006) - 죽은 연인
‘에로스와 타나토스’라는 정신 분석의 주제는 테오필 고티에의 고딕 로맨스 소설 『클라리몽드』에서도 나온다. 이 단편 소설은 브램 스토커의 《드라큘라》(1897년)보다 훨씬 더 일찍 나온(1836년) 뱀파이어 소설이다. 공포 문학이나 뱀파이어 문학의 역사를 이야기할 때 자주 언급되는 작품이기도 하다. 원제는 ‘La Morte Amoureuse (죽은 연인)’이지만, 이 소설의 여주인공 이름인 ‘클라리몽드(Clarimonde)’로 더 많이 알려졌다.
소설은 나이 든 신부인 로뮈알드가 자신의 젊은 시절을 회상하면서 시작된다. 청년 로뮈알드는 교회에서 기도하던 중 매춘부 클라리몽드를 우연히 보게 된다. 로뮈알드는 그녀에게 첫눈에 반하고, 갑자기 마음속에 솟아오르기 시작한 욕망을 절제하느라 애쓴다. 정식으로 신부가 된 로뮈알드는 장례식을 거행하기 위해 ‘죽은 여인’의 집에 찾아갔는데, 죽은 여인은 바로 자신이 사랑했던 클라리몽드였다. 그는 그녀의 시신을 바라보면서 다시 한번 욕망에 휩싸이게 되고, 클라리몽드의 입술에 키스한다. 신부의 키스에 클라리몽드는 다시 눈을 뜬다. 로뮈알드는 매일 밤 그녀를 만나 밀회를 즐긴다. 그러나 부활한 클라리몽드는 뱀파이어였다. 신부와 뱀파이어의 기이한 사랑은 오래가지 못한다. 로뮈알드의 신부 서품을 도운 세라피옹 신부는 망상에 사로잡힌 로뮈알드를 구해내기 위해 클라리몽드의 무덤을 파헤친다. 클라리몽드의 시신을 확인한 로뮈알드는 자신을 괴롭힌 ‘클라리몽드의 환상’에서 벗어난다.
로뮈알드는 처음에 클라리몽드를 만났을 땐 육체적 쾌락을 다스리는 데 성공한다. 그렇지만 죽은 클라리몽드를 보자마자 그녀에 대한 욕정과 집착은 커지기 시작한다. 클라리몽드는 로뮈알드의 피를 빨면서 끝없이 그를 소유하고자 한다. 세라피옹 신부가 등장하지 않았다면 피가 빨린 로뮈알드는 서서히 죽어 갔을 테고, 그녀는 로뮈알드를 죽여서라도 독점했을 것이다. 클라리몽드 역시 상대에게 과도하게 집착하는 도착 증세를 보인다. 도착이란 대상이 너무 집착하는 나머지 그것을 파괴하고 싶은 욕망이다. 클라리몽드의 흡혈 행위는 도착증에 대한 환유로 읽을 수 있다.
『혈옥수』와 『클라리몽드』, 두 작품 모두 욕망의 환상 속에 뒤틀린 사랑을 보여준다. 사랑은 기본적으로 타자에 대한 존중이다. 타자를 이용하여 쾌락을 누리는 병든 에로스는 타자와 나를 파괴한다. 많은 영화, 노래, 문학, 미술 등 모든 예술은 지칠 줄 모른 채 ‘병든 에로스’를 다루고, 대중은 사랑과 여성을 왜곡한 예술을 소비한다. 이런 예술을 ‘미학’으로 애써 포장하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