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견문록
김홍신 지음 / 해냄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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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년(丁酉年)이 시작된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달력이 한 장 남았습니다. 올해 가을은 유난히 짧았던 것일까요. 어느새 겨울이 왔습니다. 인생에는 사계절이 있습니다. 유아기는 인생의 봄, 청소년기는 여름, 장년기는 가을, 노년기는 겨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는 인생의 겨울을 맞은 이들이 많습니다. 겨울은 누구에게나 외로운 계절입니다. 생동감 있는 봄과 여름을 접고 소멸로 가는 길목이기에 더욱 그렇습니다. 삶의 황혼기를 맞은 이들에겐 볕이 길지 않음이 절감되는 계절입니다. 그래서 겨울은 삶을 성찰하게 만듭니다. 이 성찰의 계절에 책을 동반자 삼아 독서 삼매경에 빠져 보는 게 어떨까요. 지금부터 소개할 책은 삶을 되돌아보면서 인생의 참된 의미를 일깨워줍니다.

 

인생견문록인생의 의미를 발견하는 저자의 경험과 내적 성찰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 책을 쓴 김홍신 작가는 평범한 일상 속에 감추어진 삶의 의미를 들춰냅니다. 그래서 독자는 작가의 글을 읽으면서 일상 속에 함몰되어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작은 진실과 만나고 반성과 성찰의 기회를 얻을 수 있습니다. 이 책에서 작가는 단절과 고립 속에 놓인 현대인에게 어울려 사는 인생의 의미를 이야기합니다.

 

세상 모든 사람은 인연의 고리로 이어져 알게 모르게 서로 도움을 받으며 삽니다. 혼자서는 살 수 없지요. 그래서 좋은 사람을 만나 서로 즐겁게, 더불어 사는 재미를 누리며 살아가야 합니다. 상대가 있어 마음이 편안해야 하고 아픔은 스스럼없이 나눌 수 있어야 하지요.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는 사람과 사람이 어울리며 살아야 합니다. (73)

 

사람은 외로운 존재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은 너와 나, 이웃과 이웃이 더불어 사는 게 진실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반대로 가고 있습니다. 개인주의가 만든 단절과 고독은 우리의 삶과 세상을 왜곡시키고, 황폐화할 뿐입니다. 자기중심의 삶을 살게 되면 너 없어도 잘 살 수 있다’, ‘너를 넘어서야 내가 잘 살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이원적인 대립으로는 서로 존재할 수 없습니다. 우리 삶은 아름다움을 나누면서 살아야 진정한 삶이 됩니다. 이웃과 사랑을 나누고, 그리움을 나누고, 때로는 슬픔을 나누면서 살아야 따뜻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작가는 사람과 사람이 더불어 사는 것이 행복하게 사는 방법이라고 알립니다. 그래서 그의 글에서는 사람 냄새가 가득합니다. 낯선 곳에서 스치듯 지나 가버린 만남일지라도 그에겐 귀중한 생의 인연으로 자리 잡습니다. 사람과 세상을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은 그토록 여리고 섬세하고 따뜻합니다.

 

사람의 일생은 끊임없는 욕구의 연속입니다. 그러나 적정수준의 욕구를 넘어선 욕망은 자칫 인생을 힘들게 하는 짐이 될 수 있습니다. 작가는 세상에서 가장 무겁고 질긴 것이 자신의 마음이라 말했습니다. 그것은 우리를 짓눌리는 마음의 무게입니다. 그 속에 내가 내려놓지 못한 것들이 있습니다. 식욕, 재물욕, 권력욕 등이 있습니다. 욕심대로 행동하는 사람의 얼굴은 추합니다. 관상은 자질구레한 욕망이 얼굴에 남긴 주홍글씨입니다.

 

관상은 먹고 생각하고 행동한 대로 몸이 변한 결과입니다. 사람들 눈에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이 얼굴이지요. 관상은 타고난 생김새가 아니라 살아온 흔적의 증거입니다. (42)

 

그 많은 욕심과 욕망을 내려놓고 무욕(無慾)의 상태가 되면 한결 마음과 몸이 가벼워집니다. 작가는 자신만의 인생 속도를 유지하면서 인생길을 신나게 걸어보자고 제안합니다. 작가의 글 속에서 다시 한번 살아보자!”라는 소리 없는 울림이 느껴집니다. 김홍신 작가는 노년에도 꿈을 꾸는 사람입니다. 노년에도 꿈꾸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꿈꾸는 자는 절대로 늙지 않습니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아름다운 변화입니다. 어찌 보면 인생견문록평범할 수도 있는 인생론이지만, 우리는 그 책 속에 있는 삶의 교훈을 알면서도 싹 잊어버린 채 살아갑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오로지 성공을 위해 맹목의 질주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혼자서 빨리 달리다가 인생의 종착역 가까이에 다다르면 그 모든 것이 얼마나 허무할까요. 노년이란 죽음을 기다리는 소모적인 시간이 아닙니다.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고 삶의 원숙함을 배울 수 있는 귀중한 여백 같은 시간입니다.

 

     

 

 

IBK기업은행 오프라인 매거진 & 웹진 <아름다운 은퇴> 겨울호에 게재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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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1-24 12: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7-11-24 14:55   좋아요 1 | URL
다음에 만나면 제가 커피를 쏘겠습니다. ^^

2017-11-24 12: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7-11-24 15:01   좋아요 0 | URL
저번에도 같은 질문을 했어요. ㅎㅎㅎ 저 은행원 아니에요. 대학교 행정실에서 일해요. http://blog.aladin.co.kr/haesung/9530671

stella.K 2017-11-24 19:20   좋아요 0 | URL
그랬다니까.ㅎㅎ
근데 그때 네가 어디서 일하는지는 안 알려줬다구.
오늘에야 그 의문이 풀렸네.
그럼 모교...?

cyrus 2017-11-25 12:12   좋아요 0 | URL
네. 운 좋게 그곳에서 일하게 되었습니다. ^^

페크pek0501 2017-11-24 23: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게재될 예정입니다,
와우 멋지군요.
축하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cyrus 2017-11-25 12:14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제 글을 눈여겨 본 알라디너 덕분에 좋은 경험을 하게 됐어요. ^^
 
은유가 된 독자 - 여행자, 은둔자, 책벌레
알베르토 망구엘 지음, 양병찬 옮김 / 행성B(행성비)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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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은 독서에 대한 인상 깊은 명언을 남겨놓았다.

 

 “맛보아야 할 책과 삼켜야 할 책이 있다.

가끔은 잘 씹어서 소화해야 할 책도 있다.”

 

그의 말에 따르면 독서 방법은 다양하다. 살짝 맛만 볼 책이 있고 씹으면서 음미할 책이 있으며 삼켜서 소화해야 할 책이 있다. 학술서적을 읽는 자세와 소설이나 시를 읽는 모습과 만화책을 보는 태도가 무조건 같을 수는 없다. 베이컨은 책을 음식, 독서를 먹는 행위에 비유했다. 베이컨뿐만 아니라 애서가들은 책을 먹는 것을 독서, 책 사랑하기에 대한 은유와 상징으로 본다. 인간은 종종 은유적 표현을 사용한다. 은유’, ‘비유를 뜻하는 메타포(metaphor)는 겉으로 드러난 문장에 진짜 의미를 숨기는 수사법이다. 독자들의 마음에 와 닿게 이야기를 전하려면 무언가에 빗대는 은유가 필요하다. 그러나 은유는 양날의 검이다. 글쓴이의 참신한 관점을 드러낼 더없는 기회지만, 독자가 주어진 은유에 숨겨진 의미를 찾지 못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인생과 독서를 주제로 한 은유가 된 독자는 은유의 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좋은 책이다.

 

독서는 왜 고독한 여행일까? 애서가는 왜 바깥세상과 단절된 외로운 여정을 즐기는 것일까? 왜 책을 많이 읽으면 책벌레라는 별명을 얻게 되는 것일까? 작은따옴표를 붙인 단어 모두 독서를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일상으로부터 탈출하여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마음은 누구에게나 있다. 하지만 그런 마음을 실제 행동으로 옮기기란 너무나 어렵다. 그 떠남 대신에 여행을 통해 얻은 생각을 담은 책 한 권만으로도 여행을 다녀 온 듯한 느낌을 얻을 때가 있다. 은유가 된 독자는 독자에게 이러한 느낌을 주기에 충분하다. 책을 연 순간부터 마지막 장을 덮을 때까지 똑똑한 여행 가이드 알베르토 망구엘(Alberto Manguel)와 함께 하는 동안 독자는 외롭지 않다.

 

책 속에 독자들이 살고 있다. 단테(Dante)는 자신이 창조한 또 다른 세계, 신곡이라는 텍스트 위를 걷는 여행자. 세상의 경험을 압축한 책은 하나의 세계 그 자체이다. 책을 읽는 것은 세상을 여행하는 일과 같다. 햄릿(Hamlet)상아탑에 갇혀 고뇌하는 인물이다. 원래 상아탑은 독서에 몰입하고 싶은 독자들의 안식처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상아탑의 의미는 달라진다. 오늘날의 상아탑에는 현실을 외면하고 개인 안락에 지나치게 몰두하는 지식인들이 거주하고 있다. 돈 키호테(Don Quixote)와 보바리 부인(Madame Bovary)은 책을 사랑하는 책 바보이자 걸신들린 책벌레. 그들은 서로 다른 환경, 문화, 시간 속에서 살아왔지만 책을 사랑하는 마음만큼은 똑같다. 그들의 열정 속에서 독서 세계가 풍부하게 그려지는 것이다. 망구엘은 여행’, ‘상아탑’, ‘책벌레’, 이 세 가지 은유를 사용해가면서 독서와 글쓰기의 가치를 들려준다.

 

책은 지식 전달이 아닌 삶의 지혜를 보는 안목을 키워 주는 소임을 충실히 한다. 삶 자체가 읽기의 과정이다. 우리 삶은 끊임없이 읽고 해석해야 할 것들의 연속체다. 사람들의 눈빛, 표정, 몸짓을 읽듯이 책의 속뜻을 이해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독서가 언제나 완결된 읽기에 도달할 수 없다. 우리가 평생에 걸쳐서 책을 읽고 글을 쓴다고 해도 세계의 전체적인 모습을 파악하는 것은 쉽지 않다. 시간이 갈수록 세계는 더욱 불확실하고 모호해진다. 세계의 복잡성은 세계를 책 안에 모두 담아내는 일을 애초에 불가능하게 했다. 그러나 인터넷 세계에서는 사람들이 원하는 정보의 범위가 압축되어 있어서 정말로 필요한 정보를 금방 찾을 수 있다. 인터넷이 지배한 이 시대에 느린 여행의 매력을 아는 독서 여행자를 만나기가 어렵다. 망구엘은 전자책이 천천히 여행하는 독서를 누릴 수 있는 기회를 빼앗는다고 생각한다. 그는 천천히, 깊게, 철저히 읽는 방법을 다시 배워야 한다고 말한다. 망구엘이 지향하는 독서는 한 권의 책을 읽다가, 중간에 다시 덮고, 그리고 다시 펴기를 반복하면서 새로운 무엇을 발견하는 경험이다. 따라서 독서란 시작과 끝을 알 수 없는, 무한정 자유로운 여행이다. 애서가를 매혹시키는 것은 책이다. 애서가는 멈추지 않고, ‘세상이라는 책을 향한 관심을 넓힌다. 애서가는 아직 걷고 있는 여행의 끝이, 목표점이 어디인지 찾지 못했어도 자체의 소중함을 누구보다 더 잘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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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7-11-24 00:3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오늘 페이퍼 쓰며 제 독서에 대해 생각해 봤는데, 독서도 내릴 곳에서 두고 갈 배라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인용에 인용을 거듭하며 계보를 좇으며 한평생을 살고 싶진 않더라는. 내 앎을 찾는 것, 그게 제 독서 목표더라는...

cyrus 2017-11-24 11:26   좋아요 1 | URL
지식에도 유효기간이 있듯이 더 이상 내 삶에 도움 되지 않는 지식은 버리는 게 좋아요. ^^
 
닥치는 대로 끌리는 대로 오직 재미있게 이동진 독서법
이동진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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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법(法)은 국가의 강제력을 수반하는 사회 규범 또는 국가 및 공공 기관이 제정한 법률, 명령, 규칙을 뜻한다. ‘법’은 외로운 글자이다. 그래서 ‘법’은 다른 단어의 뒤쪽으로 다가가서 기대는 것을 좋아한다. 그럴 때 법은 쓸모 있는 꼴이름씨(의존명사)가 된다. ‘법’은 다른 글자와 같이 있으면 혼자 썼을 때 이상의 의미를 만들어낸다. 학습법, 요리법, 운동법 그리고 독서법 등 다양한 예문을 만들 수 있다. 이 예문들은 어떤 행위를 원활하게 진행하기 위해 알아야 할 방법 또는 방식을 의미한다. 그런데 우리는 ‘법’의 의미를 단순하게 생각한다. ‘법’을 정해진 이치, 즉 어떤 행위를 할 때 당연히 해야 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아주 틀린 생각이 아니다. 그렇지만 우린 낱말의 의미가 주는 힘에 쉽게 이끌리고, 그것을 맹신한다. 특히 학습법, 요리법, 독서법이 ‘전문가’를 만나면 낱말의 힘은 한 단계 올라간다. 전문가의 ○○법. 이 낱말은 듣는 이로 하여금 믿음의 확신을 하게 만든다.

 

이 책의 제목을 살펴보자. 《닥치는 대로 끌리는 대로 오직 재미있게(약칭 ‘닥끌대오’), 이동진 독서법》. 나는 출판사(또는 저자)가 책 제목을 잘못 정했다고 생각한다. 모순된 제목은 독자의 혼란만 가중한다. 이 책의 저자 이동진은 이 세상에 반드시 끝까지 다 읽어야 하는 책은 없다고 말한다. 저자도 끝까지 못 읽은 책이 있다고 고백한다. 책을 많이 읽었는데도 2% 부족하다고 느끼는 애서가 입장에서는 정말 위안이 되는 말이다. 그의 말을 확인한 애서가들은 완독에 대한 부담을 덜어낼 수 있다.

 

그런데 편안히 독서의 즐거움을 알려준 1, 2부를 읽으면서 마음을 한시름 놓은 애서가들은 또다시 좌절감에 빠진다. 이 책의 3부이자 절정(climax)이라 할 수 있는 ‘목록_이동진 추천도서 500’이다. 이 어마어마한 목록을 눈으로 훑어보면서 독자들은 절정을 느낀다. 말로만 듣던 이동진의 독서 편력에 감탄하게 되고, 최고의 경지에 달한 그의 독서 수준에 탄복한다. 어떤 독자는 독서 목록에 포함된 책 중에 자신이 읽은 것이 있는지 찬찬히 살펴보면서 확인한다. 내가 읽은 책이 이동진도 알고 있으면 뭔가 나 자신이 특별하게 느껴지고 자부심을 가질 것이다. 반면 500권 중에 한 번도 안 읽은 책, 심지어 제목조차 모르는 책이 수두룩하게 나오면 ‘내가 지금까지 살면서 이런 책을 왜 안 읽었을까’ 하면서 탄식의 소리를 낸다.

 

이동진은 독서의 근본적인 목적을 ‘있어 보이기’ 위한 지적 허영심이라고 말했다. 그가 말한 ‘지적 허영심’은 잘난 척하면서 허세를 부리는 행위를 의미한 것이 아니다. 이동진의 ‘지적 허영심’은 책을 읽으면서 자신의 모자란 부분을 메우기 위해 적극적으로 즐기는 행위에 가깝다. 이것은 ‘착한 지적 허영심’이다. 이동진의 도서 목록은 그가 오랜 기간 지식의 결핍과 동행하고,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만들어낸 좋은 결과물이다. ‘있어 보이고’ 싶은 그의 지적 허영심이 충실하게 반영되어 있다. 이동진은 독서뿐만 아니라 지식의 결핍을 즐길 줄 아는 사람이다. 그런데 독자들은 독서목록을 확인하는 순간, 《닥끌대오 독서법》을 읽기 전에 느끼지 못했던 지식의 결핍을 뼈저리게 느낀다. 지식의 결핍을 채우기 위해 이동진이 추천한 책들을 읽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독서에 여러 가지 목적이 있고, 특정한 목적이 무조건 나쁘다고 볼 수 없다. 하지만 추천도서 목록에 얽매이면 ‘목적 독서’로 빠질 우려가 있다. 이동진은 이 책에서 ‘목적 독서’를 경계했다. 독자들은 이동진의 추천도서 몇 권을 꼭 읽어야 할 거창한 목적을 세울 필요가 없다. 왜? 이동진은 책을 읽는 행위에 끝까지 책임지려고 하지 않아도 된다고 강조했다. 즉 독서 행위에 엄격한 ‘의무’를 부여할 이유가 없다. ‘독서법’은 의무적인 느낌이 강하다. 분명 저자는 부담 가지지 말고 재미있게 책을 읽으라고 말하는데(‘닥끌대오’), ‘이동진처럼 책 읽기(독서법)’를 하지 않으면 내가 뒤처지는 느낌을 받는 것이다. 따라서 한마디로 말하면 책 제목 자체가 앞뒤 맞지 않는 ‘모순’이다.

 

책을 읽는 방법을 알려준 저자의 주장에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 이동진은 책을 읽다가 ‘중간 휴식’을 취하는 느린 독서를 권장했다.

 

 

 

저는 책 읽는 중간 중간에 잠시 멈추는 것, 그것도 독서 행위이고, 더 나아가서 그것이 좋은 독서라고 생각합니다. 글을 읽다가 떠오른 생각을 집중하기 위해서, 그것을 넓혀나가기 위해서 또는 스스로 소화하기 위해서 책을 덮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57~58쪽)

 

 

 

 

나도 몇 차례 ‘중간 휴식’을 하면서 책을 읽는다. ‘중간 휴식’은 단순히 책을 덮는 행위가 아니다. 좀 나쁘게 보면 책을 산만하게 읽는다고 할 수 있다. 책을 읽을 때마다 인상 깊은 내용이 나오면 내가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메모지에 짤막하게 기록한다. 어떤 분야의 책을 읽느냐에 따라서 달라지는데, 보통 메모를 위한 중간 휴식을 수십 번 넘게 한다. 이렇다 보니 책에 몰입하는 집중력이 떨어지는 단점이 있다. 하지만 나는 항상 이런 식으로 책을 읽어 왔고, 자연스럽게 몸에 밴 메모 습관 덕분에 지금처럼 리뷰를 쓸 수 있었다.

 

그런데 이동진은 책 속에 중요 문장을 발견하면 밑줄을 긋는 것이 효율적이라고 말했다. 이동진이 부담스러워하는 ‘노트나 메모장을 따로 마련해서 적는 사람’은 비효율적인 독서를 하는 것이다.

 

 

따로 노트나 메모장을 마련해서 적는 사람도 있는데, 그것도 부담스러운 일이 됩니다. 그냥 읽으면서 바로바로 책을 쓰고 표시하는 게 가장 효율적입니다. (61쪽)

 

 

나처럼 ‘중간 휴식’에 메모장을 마련해서 기록하는 독서 방식은 밑줄 긋는 독서 방식과 비교해보면 비효율적인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밑줄 긋는 독서 방식을 부담스러워하고, 책을 최대한 깨끗하게 유지하면서 읽어야 마음이 안정되는 애서가들도 있다. 이들은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메모하는 습관을 조금씩 개선하면서 자신만의 독서 방식을 만든다. 그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책을 읽는다면 전혀 문제가 없다. 그런 사람들은 자신만의 독서 방식에 단점을 충분히 이해하면서도 책을 즐길 줄 안다. 과연 이런 독서 방식이 ‘비효율적 독서’라고 볼 수 있을까. 책을 읽다가 중간에 메모하는 것도 책을 소화하기 위한 또 다른 방식이다. 양자의 독서 방식을 비교하면서 자신에게 맞는 독서 방식을 일방적으로 옹호하는 저자의 입장에 유감스럽다.

 

난 이 책의 제목과 책의 구성을 볼 때마다 출판사가 ‘이동진’이라는 명사의 이름을 빌려 ‘독서법’ 관련 책을 쓴 것 같은 기분을 지울 수가 없다. 장담하건대, ‘이동진’이 없는 <독서법>은 많이 팔리지 못할 것이다. ‘이동진’이 있어서 이 책은 지금까지 국내에서 나온 <독서법> 중 단시간 내에 두각을 나타낸 독보적인 존재가 되었다. 하지만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이 없다는 말이 있듯이 ‘이동진’을 앞세워 소문난 책에 먹을 것이 많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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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0-30 19: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7-10-31 17:57   좋아요 1 | URL
앞으로는 제목에 ‘독서법’이 들어간 책이 계속 나올 것입니다. 그리고 ‘독서법’ 앞에 저자명이 붙여질 수 있어요. 그런 식으로 책 제목을 지으면 독자 입장에서는 책 속에 뭔가 특별한 내용이 있을 것 같은 느낌을 받아요. ^^;;

syo 2017-10-30 19:5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희한하게 이 책 별로였어요. 특별히 나쁠 것도 없는데, 그냥 아무 것도 아닌 책 같았달까요....

cyrus 2017-10-31 15:19   좋아요 0 | URL
저도요. 처음에 별점을 두 개 줄 것인지, 세 개 줄 건지 고민했어요. 아무리 생각해봐도 별점 세 개는 아니었어요. 추천도서 목록을 제외하곤 책에 특별한 장점을 발견하지 못했어요. ^^;;

책한엄마 2017-10-30 21: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마 이동진이 잠잔다는 책 만들었어도 팔렸을거에요-.-이렇게 이름이 무섭네요.

cyrus 2017-10-31 15:19   좋아요 0 | URL
‘이동진 독서법’이 들어가지 않아도 이 책은 잘 팔렸을 것입니다.. ㅎㅎㅎ


서니데이 2017-10-30 2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람마다 자신에게 잘 맞는 방식이 있을 거예요. 하지만 그런 방식을 찾기 까지는 여러 가지 방법을 참고하면 좋을 수도 있겠지요. 또 잘 맞지 않을 수도 있어요.
cyrus님, 좋은 저녁시간 보내세요.^^

cyrus 2017-10-31 15:23   좋아요 1 | URL
맞아요. 방식에는 장단점이 있기 마련입니다. 방식의 단점을 스스로 보완하면서 동시에 방식의 장점을 잘 이용할 줄 안다면 그게 ‘내게 잘 맞는 방식’이라고 생각해요. ^^

캐모마일 2017-10-30 21: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서평과는 관련 없는 댓글이지만 문득 이런 생각이 듭니다. 저는 독서력이 부족한지 영 형편없는 책 아니면 좋은 점만 보게 되는데요. 내공을 키워서 사이러스님과 몇몇 회원님들처럼 비판적 안목을 길러보고 싶어요. 제대로 품평도 해보구요. 주관적 생각이 뚜렷하게 담겨 있고, 공감과 때로는 다른 의견까지 받아보는 서평을 써 봤으면 좋겠습니다.

cyrus 2017-10-31 15:32   좋아요 1 | URL
책을 비판하는 일은 정말 어려운 일이에요. 솔직히 다수의 의견과 다른 내 의견을 낼 때 조금은 두렵습니다. 어제 이 글을 공개할 때도 그랬어요. 그렇지만 나를 비판하는 다른 의견은 ‘안목을 키우기 위한 사랑의 매’라고 생각해요. 맞을 땐 좀 아프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면 맞길 잘 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양손잡이 2017-10-30 22: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 단락은 책을 빠르고 많이 읽으려고 하지 말고 여유있게 읽으라는 말 아닐까요? 저는 1부는 별로였고 2부는 재밌었습니다.

cyrus 2017-10-31 15:37   좋아요 1 | URL
‘저 단락’이라면 책 57~58쪽에 인용한 문장을 말씀하시는 거죠? 책을 도서관에 반납한 바람에 인용문을 다시 확인하지 못했어요. 양손잡이님의 말씀을 듣고 보니 저 문장이 ‘여유 있게 책을 읽어라’는 의미가 맞을 것입니다. 저도 2부 내용이 좋았어요. ^^

양손잡이 2017-10-31 15:46   좋아요 1 | URL
네 57쪽 인용부분입니다. 독서법 책은 사실 다 거기서 거기인데... 묘하게 끌리는 구석이 있는 것 같아요 ㅎㅎ

나와같다면 2017-10-30 23: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동진님 책은 조선일보 기자시절 썼던 절판된 책도 다 가지고 있는데..

이 책은 이상하게 읽고 싶다는 마음이 가지 않더라구요..

cyrus 2017-10-31 15:38   좋아요 0 | URL
이 책을 중고로 판 사람들이 많을걸요. 이러려고 책을 만든 게 아닐 텐데 말이죠. ^^;;

transient-guest 2017-10-31 01: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밑줄을 긋고 메모하는 것이 공부나 리뷰를 쓰기에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봅니다만, 보통 밑줄을 긋는 것이 전부이고 어떤 책은 그냥 읽습니다. 한 호흡에 읽는 것이 더 나은 경우도 많이 있거든요. 독서의 대가들의 방법은 그냥 한번 보고 참고할 것이 있거나 하면 따라해보지만 사실 큰 의미를 두지는 않습니다. 빨간책방이 인기를 얻으면서 이동진 DJ의 이름을 건 라디오담화정리가 나온 것이 이번 두번째인데, 세번째에는 사야할지 더 고민하게 될 것 같습니다. 그냥 엿보기 정도로 생각하면 맘이 편해요.

cyrus 2017-10-31 15:46   좋아요 0 | URL
저도 독서의 대가들처럼 독서를 흉내 내보고 마음에 드는 건 따라하고, 영 아니다 싶으면 따라하지 않아요. 예전에 한 번 책에 밑줄만 그은 적이 있어요.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 책에 그은 밑줄을 다시 보는 일이 없어요. 책을 읽으면서 기록한 메모들을 한글 파일로 정리해서 네이버 메일함에 저장해요. 과정이 번거롭지만 저는 이 방식이 편해요. 리뷰를 쓸 때 참고할 내용이 있으면 네이버 메일함에 들어갑니다. 거기서 검색하면 메모한 내용이 바로 나옵니다. ^^

얄라알라 2017-10-31 07: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책을 도서관에 계속 대기 걸어 놓아야할 정도로 인기던데, 두 번 대기 걸다가 그냥 안 갔어요. 목록 500은 궁금하네요. 종교학 전공인 저자의 목록에 어떤 책들이 있을까 궁금하기도 하고요

cyrus 2017-10-31 15:48   좋아요 0 | URL
어떤 분의 리뷰를 봤는데요, 추천도서 목록 대형 브로마이드를 찍은 사진이 있었어요. 리뷰 작성자는 그 브로마이드를 가지고 있더군요. 아마도 책을 사면 주는 브로마이드인 것 같아요. ^^

짜라투스트라 2017-10-31 08: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 저도 책을 깨끗하게 쓰는 쪽이라서 동질감을 느끼네요^^

cyrus 2017-10-31 15:50   좋아요 0 | URL
저는 제가 산 책은 깨끗해야 된다는 결벽증이 있어요. ㅎㅎㅎ 책이 조금이라도 구기는 것도 좋아하지 않아요. ^^;;

레삭매냐 2017-10-31 09:1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도 그동안 책 깨끗하게 읽곤 했었는데, 오마이뉴스
에 실린 어느 분의 독서 기사를 보고 포기해 버렸습
니다.

계속 가지고 있을 책에는 낙서와 포스트잇으로 도배를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주거나 팔 책은 깨끗하게 봅니다.

그나저나 개인적으로 타인의 독서 스타일을 다룬 책들
은 자주 보지 않는 편이라서요. 참조는 해도, 딱히 그
네들의 독서를 따라갈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이 좋아하는 장르나 작가의 책을 읽는 것만도 버
겁거든요. 자기 고유의 책읽기 습관이 더 중요한 게
아닐까요.

cyrus 2017-10-31 15:55   좋아요 0 | URL
맞아요. 독서의 목적은 뚜렷하고 확실해야 합니다. 그런데 교육열이 강한 부모들은 자녀가 전문가의 독서 스타일을 따라하는 것을 원합니다. 그러면 자녀가 독서를 좋아하고, 똑똑해질 거라고 생각하는 거죠. 그런 환경 때문에 아이들은 스스로 책을 고르는 기회가 사라지고, 자신만의 독서 스타일이 무엇인지 알지 못합니다.

stella.K 2017-10-31 14: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ㅎㅎ 이동진 넘 미워하지 마라.
그래도 이동진 땜에 이 나라에 책을 읽어 보겠다는 사람이
조금이라도 생겼다면 그것도 좋은 일 아니냐?
너야 이미 독서 고수니까 고수의 입장에서 못 마땅할 수 있다는 거
십분 이해한다.
하지만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고 하잖냐. 그러니 니가 이해하렴.ㅋ

근데 내가 얼마 전 마태우스님 책 <서민 독서> 글 올리면서
이동진 책 한 줄 언급했잖아. 그랬더니 너의 리뷰가 북플에 딱 뜨더라.
내가 굳이 이 책이라고 언급도 안했는데 말야.
알라딘의 빅 데이터 능력 놀라운 것 같아.ㅋ

cyrus 2017-10-31 15:59   좋아요 0 | URL
이동진 씨를 미워하지 않습니다. 이동진 씨는 애서가들의 ‘워너 비’입니다. 저는 이동진 씨가 제대로 된 서평집을 내줬으면 좋겠어요. 먼 미래의 일이라서 확신할 수 없지만, 서평집이 나온다면 이동진 씨의 진가를 확인할 수 있는 좋은 책이 될 수 있을 거예요. 이번에 나온 <독서법>은 저자와 출판사의 성의가 부족한 책이었어요. ^^

호빵 2017-11-05 16: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동진씨는 미워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그가 하는 방식이 제 취향에 반하는 것일때는 좀 멀리하는 방법을 쓰는 중입니다. 책 내용이 괜찮은 것 같네요. 다만 사서 읽기에는 다른 읽고 싶은 책이 많아서... 돈과 시간이 부족한 인간입니다...

cyrus 2017-11-06 10:13   좋아요 1 | URL
이동진씨의 책 독자리뷰와 출판사 책 소개만 봐도 핵심 내용을 파악할 수 있어요. 아무래도 독자들이 관심 있는 것은 500권 도서목록입니다. 그런데 저도 그렇고 누구나 돈과 시간이 부족해서 목록에 있는 책을 다 볼 수가 없어요. ^^
 
영초언니
서명숙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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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둔다. G세대로 빛나거나’ 88만원 세대로 빚내거나’, 그 양극화의 틈새에서 불안한 줄타기를 하는 20. 무언가 잘못된 것 같지만 어쩔 수 없다는 불안에 앞만 보고 달려야 하는 20. 그 한가운데에서 다른 길은 이것밖에 없다는 마지막 믿음으로.(<김예슬 선언> 중에서)

 

 

고려대 교정 건물에 붙여진 대자보의 주인공은 대학을 과감히 뛰쳐나왔다. “대학을 그만둔다, 아니 거부한다며 당돌하게 말이다. <김예슬 선언>을 읽었을 때 심장이 찔렸다. 고통스러웠다. 아팠던 이유는 대자보 속에 우리 모두의 문제가 보였기 때문이다. 그녀가 그만두고 거부하였던 것은 고작 대학이 아니다. ‘대학이라는 이름 아래 성공과 경쟁만을 강요하는 세상이다. 대학 문제는 우리 모두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일자리 문제와 교육 문제를 관통하는 핵심이다. 김예슬의 외로운 대항은 좋은 직장에 취직하기 위해 연애와 결혼을 포기하는 이십 대들을 슬프게 했다. 그 슬픔은 7년이 흐른 오늘에도 전혀 걷히지 않았다. 슬픔은 남아 있을 뿐 아니라 그 눈물이 피눈물이 되어 우리 발목을 차갑게 감싸고 있다. 7년 전 대학생이었던 이십 대는 이제 삼십 대가 되었다. 누군가는 결혼했고, 누군가는 여전히 취업을 준비하는 백수이고, 누군가는 직장에 취직해 삶에 충실히 하고 있다. 우리가 안고 있었던 고민은 고스란히 후배들에게 넘겨졌다. 영초 언니(문학동네, 2017)를 읽으면 가슴에 답답함을 느꼈던 7년 전 청춘들의 모습이 떠올린다.

 

책의 저자인 서명숙천영초와 함께 데모했던 대학 후배다. 영초 언니는 저자의 젊은 날의 초상이면서도 천영초 한 사람을 위한 자화상이다. 천영초는 70, 80년대 시대의 아픔 속에서 살아온 인물이다. 그녀는 부당한 권력에 당당하게 맞선 운동권의 전설이었다. 그렇지만 오늘날 그녀를 기억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 저자에게 언니를 기억하는 회상하는 것은 가슴 아픈 일이다. 영초 언니는 그 당시 ‘386 운동권 세대가 겪어야 했던 처절한 고통을 보여주는 기록이다. 저자와 천영초는 386 세대가 헤쳐 나온 시대적 운명을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인물들이다. 그런데 나는 왜 지금쯤이면 쉰을 바라보는 그들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오늘날의 청년세대가 생각났을까?

 

386세대는 자유가 억압된 70년대와 민주화에 대한 희망이 차가운 환멸로 돌변한 80년대를 보냈다. 유년기에 유신독재를, 대학 시절엔 전두환 군부독재를 겪으면서 반쪽짜리민주화의 과정을 지켜본 이들이다. 그 시절의 대학은 최루탄과 휴교가 일상이었다. 대학생들은 화염병과 최루탄이 매캐한 거리에 뛰어들었고, 자유를 갈망하는 열정은 빨갱이로 낙인 찍혔다. 386 세대의 부모들은 경찰에 붙들리거나 고문당하는 자식을 볼 때마다 가슴 치는 나날을 보내야 했다. 성동구치소로 향하는 저자가 호송차 창문 넘어 도시의 풍경을 바라보면서 상념에 빠지는 장면이 있다.

 

 

호송차 창문에 얼굴을 바짝 붙이고 바깥 풍경을 내다보았다. 가로수의 새잎들이 연녹색으로 간질간질 움트는 5월의 거리 풍경은 눈물겹도록 사랑스러웠다. 지나는 이들의 얼굴도 다들 행복해 보였다. 난 언제나 저 거리, 저 풍경 속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나중에 돌아가게 된다고 해도 예전처럼 지낼 수 있을까. 창문 하나를 사이에 둔 세상은 피안의 세계처럼 아득했다. (164)

 

 

거리의 중심에서 소리 질렀던 저자는 이제 희망 없는 청춘의 실체를 감지한다. 그녀의 상념은 민주주의라는 공적 가치에 청춘을 바친 바보 같은 세대의 아픈 혼잣말이다. 나아가 희망 없는 청춘을 보냈던 삼십 대 독자들을 슬프게 하는 목소리이기도 하다. 지금의 삼십 대는 십 년 전만 해도 ‘88만 원 세대 또는 삼포 세대 등으로 불렸다. 청년세대를 규정하는 이름이 많지만, 의미가 썩 좋지 않다. 그 단어 속에 취업난과 고용 불안, 치솟는 학비에 시달리며 외로운 생존경쟁을 해내야 하는 이십 대의 차가운 현실이 반영되어 있다. 하지만 그들의 쓸쓸한 외침은 사회 전체를 진동할 합창이 되지 못했다. 기성세대는 울부짖는 청년들을 향해 나약하게 자책하지 말고, 더 노력해라고 닦달했다. 어떤 이는 그들 보고 빨갱이에게 사주받은 미성숙한 세력으로 규정했다. 정당한 분노마저 빨갱이로 몰아가는 작태가 낯설지 않다.

 

청년세대가 겪고 있는 이 세상은 80년대와 한 치도 다르지 않다. 80년대 전두환 정권의 등장은 반쪽짜리민주화로 귀결되었고, 끝까지 살아남은 정치 기득권 세력은 권력과 부를 불공정하게 독점했다. 정치 기득권 세력은 정치와 경제뿐 아니라 사회 곳곳에 암세포처럼 퍼진 적폐 세력이 되었다. 그리고 적폐 세력은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늘 권력 주변에 기생했고, 권력에서 흘러나오는 단물을 마음껏 빨아대면서 자란 악성 종양이 바로 최순실과 그녀의 딸 정유라. 정유라는 청년세대와 다른 삶을 살았다. 잘난 어머니 덕택에 돈을 걱정 없이 썼다. 그래서 그녀가 돈도 실력이야!”라는 말을 할 수 있었다. 그녀의 발언에 가슴 아픈 의문의 1를 당한 청년이 한 둘이 아닐 것이다. 오랫동안 비상식적인 세상으로부터 연패를 당하는 수모를 겪은 청년세대는 광장으로 나가 촛불을 들었다. 빛나는 촛불로 그동안의 긴 연패의 굴욕을 잊는 빛나는 1을 추가했다. 빛나는 1이 없었다면 최순실은 떵떵거리며 살면서 민주주의를 우습게 봤을 거고, 서명숙은 영초 언니를 쓰지 못했다. 지금 상상하기 끔찍하지만, 국정 농단 세력의 정부가 뻔뻔하게 지내고 있었어도 저자는 영초 언니를 썼을 것이다. 민주주의를 위해 삶과 청춘을 바친 사람들을 무시한 적폐 세력들은 저자의 이름을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에 추가했고, 영초 언니를 불온서적으로 지정했을 게 뻔하다.

 

민주 대 반민주 구도가 캠퍼스의 일상적 삶을 좌우하던 현실 속에서 대학을 다닌 386 세대의 이야기들이 지금의 청년들에게는 낯선 무용담으로 느껴진다. 그러나 영초 언니는 어려운 시절을 기어이 극복한 화려한 성공 미담을 부각한 386 세대의 이야기와는 전혀 다른 접근 방식으로 보여준다. 저자는 천영초를 영웅으로 미화하지 않는다. 그녀는 이야기 처음부터 끝까지 관찰자 시점으로 일관한다. 천영초를 포함한 386 세대가 기성 사회에 어렵게 적응하는 모습이 담긴 심리적 풍경(영초 언니 프롤로그 9)’을 지켜보고 서술한다. 천영초와 그의 남편 정문화는 여전히 사회변혁을 열망했으나 그들의 뜨거운 열정을 알아주고 동조하는 사람은 점점 줄어들었다. 운동권의 삶을 살았던 386 세대는 소수를 제외하고는 평생 경제적으로 가난하게 살고 있다. 천영초도 예외가 아니다. 정당 생활을 접은 천영초는 혁명자금을 모으려고 다단계 회사에 들어갔고, 똑똑했던 정문화는 경제 감각이 떨어져 궁핍한 생활을 보냈다. 천영초는 운동권 동지로서의 정문화를 사랑했지만, ‘가정을 책임지는 남편으로서의 정문화를 받아들이지 못했다. 저자는 기성 사회에 대한 경험이나 준비가 미흡한 386 운동권 세대의 씁쓸한 뒷모습까지도 낱낱이 기록했다. 젊은 날에 마땅히 누려야 할 자유와 꿈꿔야 할 미래를 빼앗겼던 386 세대는 삭막했던 청춘의 슬픈 결말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영초언니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건 우리 사회 전체를 확 바꿔놓을 혁명자금이 아니라 당장의 생활비라는 걸 나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언니의 마지막 자존심이랄까, 스스로 믿고 싶어하는 바를 눈앞에서 박살내고 싶지는 않다. (261)

 

 

안타깝게도 삭막했던 청춘은 지금의 청년세대에게 대물림 되고 있다. 오늘도 청년들은 답답한 도서관 건물 안에서 좋은 직장, 좋은 결혼, 좋은 노후 생활을 위해 경주마처럼 달리고 있다. 앞으로 달려가야 할 길을 찾기 위해 혈안이 될수록 절망의 고리를 끊겠다는 의지가 사라진다. 경쟁으로 자신을 몰아넣고 있다. 영초 언니를 다 읽고 나니 여러 가지 걱정이 든다. 세월이 흘러 나 자신 또한 따뜻한 현실이라는 소파에 파묻히면서 제2, 3의 김예슬을 비웃을까 봐. 수십 년 후에 우리가 한때 열광했던 김예슬이 천영초처럼 잊힐까 봐. 쉽게 변하지 않는 세상을 다행이라 여기며 요즘 젊은이들은 그저 뭘 모르는 것들이라 손가락질할까 봐. 알게 모르게 시간이 지나면 청년세대도 기성세대가 된다. 저자가 천영초를 아직 완전히 잊지 못하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 아닌가 싶다. 저자는 물결에 휩쓸려 정신없이 망각해버린, 그럼에도 언제나 의식 한쪽에 찜찜하게 남아 유령처럼 짓누르는 사회적 열망의 냄새를 여전히 맡고 있다. 영초 언니386 세대와 청년세대가 스스로 자신의 삶과 시대를 되돌아보게 해주는 특별한 책이다. 따라서 책 속에 변함없이 젊은 ‘20대의 영초 언니는 절대로 외롭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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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renown 2017-09-01 2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땅에서,얼마나 많은 ‘영초 언니‘ 가 외롭게 살다 갔을까요..

cyrus 2017-09-02 12:12   좋아요 0 | URL
남성의 역사에 파묻힌 언니들의 기록이 많이 알려졌으면 좋겠습니다.

북프리쿠키 2017-09-01 21: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은 꼭 한번 읽어보고 싶네요.
좋은 글 보고 갑니다^^;

cyrus 2017-09-02 12:13   좋아요 0 | URL
이 책, 정말 좋습니다. ^^

2017-09-01 23: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7-09-02 12:15   좋아요 0 | URL
맞습니다. 현재 삶의 질을 과거와 비교해봤자 작은 위안만 얻을 뿐 크게 달라지는 일은 없습니다.
 
엄마의 골목 - 진해 걸어본다 11
김탁환 지음 / 난다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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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일에 작성한 글이 마음에 안 들어서 수정을 했습니다. 그래서 ‘MSG’를 많이 넣어봤습니다. 문체에 변화를 줬습니다. 높임체로 글을 쓰는 일이 편하게 느껴졌습니다.

 

는 뻥이고, 이 글은 ‘IBK 기업은행 아름다운 은퇴’(가을호)에 게재될 예정입니다.

 

 

 

 

 

고향, 말만 들어도 가슴이 설렙니다. 어린 날의 기억들이 새근새근 살아 숨 쉬는 곳. 숨기고 싶은 속내까지 깡그리 드러내고 있는 곳. 지금도 고향에는 추억의 풍경이 고스란히 남아 있을까요? 세월은 가도 옛날은 남습니다. 일상에 파묻혀 살다가 어느 순간 스치는 바람결에 과거의 기억으로 빨려 들어갈 때 있습니다. 추억의 파노라마가 펼쳐지면 고향의 골목길 구석구석, 친구들 얼굴이 눈에 선합니다. 누군가는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시간이 가장 아름다운 시절이라고 했지만, 꼭 그렇지만 않습니다. 두 번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은 과거의 경험으로 괴로운 사람이라면 한 번쯤 이런 생각을 해봤을 겁니다. ‘이 고통스러운 기억을 감쪽같이 잊어버릴 수 없을까? 상처로 남을 기억을 잊고 살기보다, 상처받기 이전의 상태로 되돌아갈 수만 있다면…‥

 

여기 추억을 떠올릴 때마다 아픈 가슴을 쓸어내리는 분이 있습니다. 김탁환 작가의 엄마입니다. 그녀는 올해 일흔다섯입니다. 그녀가 다섯 살이었을 때 일본에서 경남 진해로 건너왔고, 지금까지 줄곧 그 지역에서 살아왔습니다. 엄마는 인생의 절반 동안 가난과 정신적인 핍박을 온몸으로 부둥켜안았고, 삶의 현장에서 의연하게 버티며 자식을 보살폈습니다. 남편과 사별한 뒤 30년을 혼자서 지냈습니다. “엄마는 강하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엄마의 위대한 사랑과 희생을 표현한 말이죠. 그렇지만 작가의 엄마는 추억 앞에만 서면 한없이 약해졌습니다. 엄마에게 추억은 즐거웠던 시간을 떠올리게 하는 포근한 단어가 아니었습니다. 엄마는 추억을 확인할 수 있는 소중한 사진들을 없애기 시작합니다.

 

 

  마흔네 살에 홀로되신 엄마는 아이들 손이 닿지 않은 책장 제일 구석에 앨범을 올려놓고, 사별한 남편이 그리울 때마다 꺼내 보곤 하였다. 믿기 힘든 대답이 돌아왔다.

  “그것들부터 제일 먼저 없앴지.” (14)

 

 

작가는 엄마와 함께 진해 동네 곳곳을 함께 걷습니다. 그런데 모자는 같으면서 다른 길을 바라보면서 걷고 있었습니다. 작가는 엄마와 함께 걷는 골목에 있고, 엄마는 엄마 본인 마음의 골목에 있었던 거죠. 그래서 작가는 이 두 골목을 하나로 이으려고 합니다. 그것이 바로 엄마만의 동네에서만 볼 수 있는 엄마의 골목입니다. 엄마의 골목은 작가가 엄마의 추억 부스러기들을 씨줄로 엮어 만든 책입니다. ‘엄마의 이야기를 알고 싶은 아들의 진심 어린 마음이 통했을까요. 엄마는 가슴속에 숨겨둔 추억들을 하나씩 떠올리며 아들에게 들려줍니다. ‘추억이라는 매개로 모자가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보면 마음이 흐뭇해집니다. 작가는 엄마와 함께했던 행복한 시간을 기록한 책의 제목을 엄마의 골목으로 정합니다. 엄마의 골목에는 어리고 느리고 어설프게 걸어온 지난날의 엄마 발자국과 그 곁에 나란히 찍힌 자식의 발자국이 겹쳐 있습니다. 모자가 진해 곳곳에 남겨둔 발자국들은 소중한 것을 찾아가는 아름다운 회귀의 흔적입니다.

 

 

 “‘엄마의 골목이 좋아요? ‘어머니의 골목이 좋아요?”

 “엄마의 골목!”

 “왜죠?”

 “더 가까운 느낌이 들어. 어머니는 안방에서 앞마당 정도 거리라면, 엄마는 안방을 벗어나지 않고 한 이불 속에 있는, 그런 기분!” (182)

 

 

옹알이를 시작한 아기가 처음으로 입 밖으로 꺼낸 단어는 무엇일까요? 저는 엄마라고 생각합니다. ‘엄마는 아기가 쉽게 따라 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단어입니다. 아기는 엄마의 품속에서 먹고 자랍니다. 엄마들은 아기가 기억하지 못한 것들을 추억이라는 이름표를 붙여 자신의 품속에 간직합니다. 아기가 어느 정도 자랐을 때 소중한 추억을 들려주기 위해서죠. 다 자란 자식은 자신과 엄마의 이야기를 찾기 위해 엄마 품에 바짝 귀를 갖다 댑니다. 엄마의 품속 깊이 저장된 추억을 듣는 것은 특별한 일입니다. 자세히 듣고 싶으면 엄마를 꼭 안아주세요. 엄마를 편안하게 만들어 드리고 대화를 시작해보세요. 그러면 엄마는 품속에 있던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해 입을 엽니다.

 

숨이 차고 힘들게 세상살이를 하다가 잠깐 멈춰 서게 될 때, 우리는 뒤를 돌아보고 자신을 돌이켜보게 됩니다. 소중한 추억이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속 먼지와 때를 한 겹 닦아내는 기분이 듭니다. 세상살이가 각박해질수록 그리운 추억 찾기에 대한 집착은 더욱더 강해지고 끈끈해집니다. 엄마의 골목이 여러분의 가슴에 따뜻하게 다가갔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의 가슴을 아련하게 덮어주는 안방의 이불 같은 책이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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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7-08-16 14: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 그럼 너 혹시 은행 다니니...? 아무튼 좋은 일이다. 축하한다!^^

cyrus 2017-08-16 15:27   좋아요 0 | URL
원고 청탁을 받아서 기업은행 온라인 웹진에 글을 싣게 되었어요. 제가 은행에서 일했으면 책 읽고 글 쓰는 시간이 없었을 걸요. ^^

곰곰생각하는발 2017-08-16 14: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제 본격적으로 글쟁이 되시는 겁니까 ?

cyrus 2017-08-16 15:30   좋아요 0 | URL
부업입니다. (이름을 밝힐 수 없는) 알라디너 덕분에 은행 온라인웹진에 글을 싣게 되었어요. 계속 쓸 수 있을지 미지수입니다. ^^

양철나무꾼 2017-08-16 18: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이 책을 참 좋게 읽어서, 님의 리뷰가 더 남다른가 봅니다.
좋은 리뷰 잘 읽었습니다.

근데, 더운 대구에서, 휴가는 다녀오셨습니까?^^

cyrus 2017-08-17 12:37   좋아요 0 | URL
휴가는 다음 주에 있습니다. ^^

2017-08-16 21: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7-08-17 12:42   좋아요 0 | URL
제가 뭘 쓰고 있는지 관심 없는 분들이 많을 겁니다. 그래서 저의 책 사랑을 알아주는 몇몇 분들이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페크pek0501 2017-08-17 12: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은행 온라인웹진에 글을 싣게 된 것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그렇게 열심히 쓰시더니... 그런 좋은 결과가 생기는군요.

cyrus 2017-08-17 12:43   좋아요 0 | URL
사람 만나는 일에도 운이 따라야하는 것 같습니다. 사실 운이 좋았습니다. 알라딘 서재에 저보다 글을 잘 쓰는 분들이 많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