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읽다가 이혼할 뻔
엔조 도.다나베 세이아 지음, 박제이.구수영 옮김 / 정은문고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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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은 각각 다른 공간에서 살던 남녀를 하나의 공간으로 합쳐 놓는다. 사람만 결합하는 게 아니다. 남자가 수집한 피겨(figure)는 공동의 공간으로 오고, 여자와 함께 살던 반려동물이 이사 온다. 취미가 같은 사람들의 경우엔 어떨까. 둘 다 작가인 남편 엔조 도와 아내 다나베 세이아는 독서를 좋아하는 부부이다. 결혼하면서 각각 소장하고 있던 책을 모두 공동의 공간으로 가져왔다. 그러나 책은 부부의 갈등을 유발하기도 한다. 서로 완전히 다른 독서 취향이 문제가 된 것이다.

 

 

독서 취향이 전혀 맞지 않는다. 타니스 리의 은빛 연인이란 소설은 내가 정말 좋아하는 작품인데 남편에게 읽으라고 추천해봤지만 표지 일러스트만 보는 등 마는 등하더니 얼렁뚱땅 넘겨버렸다. 용서 못 해! (다나베 세이아, 14쪽 각주)

 

 

아내는 괴담, 도시 전설, 환상 괴기 소설 등을 선호한다. 반면 남편은 순수문학, 과학, 역사, 인문학 등 제목만 봐도 머리가 지끈거리는 분야의 책들을 읽는다. 남편은 괴담, 도시 전설을 잘 믿지 않는다. 아내가 괴담과 도시 전설 등을 모을 때마다 싸늘한 눈빛을 보낸다. 부부는 서로를 이해하기 위한 목적으로 부부 교환 독서를 시작한다. 부부는 번갈아 가며 상대에게 권하고 싶은 책 한 권을 정한다. 상대가 권한 책을 읽고 서평을 쓴다. 책 읽다가 이혼할 뻔(정은문고, 2018)은 책 읽는 부부가 서평을 주고받으면서 부부 싸움 하는 과정을 엮은 책이다. 서평으로 부부 싸움을 하다니. 이 말이 선뜻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책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부부는 책을 읽고, 서평을 쓰면서 부부 싸움을 하고 있다. 이 책의 제사(題詞)는 부부 교환 독서가 지향하는 바를 명확하게 드러내고 있다.

 

 

이 글은 부부가 상대방을 이해하기 위해

서로에게 책을 추천해온 격투의 궤적이다.

 

 

책 읽다가 이혼할 뻔은 부부가 공동으로 집필한 서평집이 아니다. 극과 극으로 나뉘는 독서 취향을 둘러싼 전쟁의 경과를 기록한 책이다. 남편은 무서운 그림을 싫어한다. 남편의 말에 따르면 무서운 표지의 책이 눈에 띄지 않게 딴 곳에 숨기거나 책을 뒤집어 놓는다고 한다. 남편이 스스로 폭로(요샛말로 자폭이라고 한다)한 약점을 파악한 아내는 서평 말미에 남편에게 가벼운 선전포고를 날린다.

 

 

이전 연재에서 남편은 표지가 무서운 책이 싫다고 폭로한 바 있다. 그렇다면 내가 아는 한 가장 무서운 표지의 책을 골라야지. 참고로 현재 남편은 아파서 이불 안에서 끙끙거리고 있다. 이런 상태에서 읽는 쿠조(스티븐 킹의 소설-cyrus )는 또 다른 맛이 있지 않을까. (다나베 세이아, 43)

 

 

부부는 상대의 독서 취향에 볼멘소리하는 전쟁 같은 글쓰기로 서평을 연재하기 시작한다. 특히 서평 본문 밑에 부부가 각주를 달면서 아웅다웅하는 모습이 이 책의 백미. 그러나 어차피 부부싸움은 칼로 물 베기. 부부 교환 독서의 목적은 상대를 이해하기. 부부에게 책은 자신의 분신이다. 부부는 애지중지하게 여기면서 읽은 분신과 같은 책을 서로 바꿔 읽는다면 서로를 더 잘 이해할 거로 믿는다. 릴레이 서평이 거듭될수록 부부는 함께 살면서 알지 못했던 상대의 새로운 면을 조금씩 확인한다. 아내는 친분이 있는 편집장으로부터 처음으로 남편이 닭똥집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녀는 남편에 대해서 제대로 알지 못한 채 살아왔다는 사실에 적잖이 당황스러워한다. 그녀는 복잡한 감정을 서평에 솔직하게 드러낸다.

 

 

남편을 얼마나 알고 있는지 자신이 없어졌다. 그런 관계라고 생각한 건 나뿐인가. 결혼식 피로연 때 한 편집자의 엔조 씨 하면 닭똥집을 좋아하는 분으로…‥라는 말을 듣고서야 남편이 닭똥집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으니, 어쩌면 남편에 대해 아무것도 모를지도. 이 연재로 부부 사이가 나빠졌다는 것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때때로 남편은 아무 말 없이 기분이 나빠져 있는데, 그것도 분명 원인이 있겠지. 아무튼 되도록 빠른 시일 내 사과해야겠다. 미안해. (다나베 세이아, 87)

 

 

각자 오랜 취향에 익숙했던 두 사람에게 이 작업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공통의 취미를 가진 사람들의 결합은 마이너스보다는 플러스가 많은 법이다. 부부는 상대의 취향을 이해하기보다는 인정한다. 직업이 같고, 취미도 같은 부부도 여느 부부와 다를 것 없이 크고 작은 갈등이 있다. 서로 다른 두 사람이 만나 결혼으로 맺어진 부부는 안 통하는 것이 정상이다. 공통의 취미만으로 서로를 사랑하면서 살아갈 수 없다는 건 결혼을 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하는 부분이다. 너무나도 당연한 이야기지만, 부부는 한 남자와 한 여자의 결합임을 인정하고 서로 존중하는 존재이다. 부부가 인생을 함께 걸어가려면 서로 다름을 받아들여야 한다. 결혼이 가슴에 와 닿지는 않는 비혼주의자에게 부부 생활은 남의 나라 일처럼 느껴진다. 강 건너 불구경하듯이 편하게 이 책을 읽었다. 그렇지만 나는 이 책이 독서라는 공통분모로 하나가 되고 싶은 애서가 부부에게 유용한 책이 될 거로 생각한다. 이 책에 부부가 언급하는 일본 서적 대부분이 국내 독자 입장에선 상당히 낯설다. 부부가 읽는 책 내용을 아는 게 중요한가? 책 읽다가 이혼할 뻔》은 서평집이 아니다. 이 책을 '서평집'이라고 생각하면서 펼치치 마시라. 부부가 책과 서평을 매개로 어떻게 서로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이해하는지 살펴보시라. 이 책 제목을 처음부터 책 읽다가 더 사랑할 뻔이라고 정했으면 어땠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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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깨비 2018-04-01 15: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리보기가 없어서 내용이 많이 궁금했었는데 사이러스님 덕분에 궁금증이 풀렸습니다. 재밌을 것 같아요. 일단 보관함으로 모셨습니다. ㅎㅎ

cyrus 2018-04-01 19:26   좋아요 1 | URL
이 책에 대한 독자들의 평가가 좋지 않아요. 부부가 언급한 책 중에 번역된 것이 많지 않아서 우리나라 독자 입장에서 보면 서평에 공감하기 어려워요. 사서 읽는 것보다는 도서관에 빌려서 읽는 것이 좋습니다. ^^

북프리쿠키 2018-04-01 18:2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사랑하는 사람일수록 고유의 영역을 침범하지 말고 더욱더 존중해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물론 그러한 실천들이 무관심으로 흘러가지 않는다면요.흔히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취향‘조차 닮아야 된다는 건 넌센스고 욕심아닐까요^^

cyrus 2018-04-01 19:27   좋아요 1 | URL
네, 맞습니다. 배우자의 취향을 무시하는 것도 이혼 사유가 될 수 있어요.. ㅎㅎㅎ

AgalmA 2018-04-01 19:2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앤 패디먼 <서재결혼시키기>랑 또 다른 책이네요^^
이곳 다른 분들도 그렇겠지만 책을 그냥 물성으로 보지 않는 터라 같은 책이어도 다른 사람 책은 다른 사람 책이죠! 분명 읽은 책이어도 남의 책으로 보면 정말 낯설어요;;

cyrus 2018-04-01 19:33   좋아요 1 | URL
저도 앤 패디먼의 책이 생각났어요. 가까이 지내는 부부도 서로 추천한 책들을 읽지 않는다고 해요. 예전부터 그래왔지만 저는 상대가 책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제가 읽은 책은 추천하지 않아요. 저도 상대가 추천한 책을 잘 안 읽어요. 결국, 애서가는 본인 알아서 책을 읽는 사람들입니다. ^^

stella.K 2018-04-02 13: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당장)읽게될 것 같지는 않지만 재밌을 것 같네.ㅋ

cyrus 2018-04-02 16:15   좋아요 0 | URL
부부가 소개한 책들이 국내에 번역되지 않은 것이라서 서평 내용에 공감하기 어려울 거예요. ^^;;


페크pek0501 2018-04-02 14: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남편과 저도 책 취향이 달라서 각자 사 보는 편입니다. 가끔 둘 다 읽는 책이 낄 때가 있으면 반갑지요. 책 취향이 같다면 책 값 절약이 될 터인데, 하고 생각한 적 있지만
어찌 보면 서로 다른 게 좋은 것 같아요. 각자 고유의 영역이 있는 게 좋기도 하고
나만의 책, 이란 게 좋기도 하거든요.

cyrus 2018-04-02 16:20   좋아요 1 | URL
독서 취향이 같은 사람끼리 계속 만나면 지루해요. 그리고 책을 고르는 선택의 폭이 좁아져요. 알라딘 서재/북플 활동에 익숙하면 낯선 사람과의 친밀도를 유지하기가 수월해요. ‘좋아요‘와 ‘댓글‘을 서로 주고 받는 사람끼리 친해지기 쉽죠. 그런데 이런 분위기가 늘 좋은 것만 아니에요. 요즘 독서모임을 하면서 독서 편력에 부정적 영향을 주는 온라인 관계의 한계를 느꼈습니다.
 
그르니에 선집 1
장 그르니에 지음, 김화영 옮김 / 민음사 / 199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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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그르니에《섬》(민음사, 1997)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리뷰를 읽는 것보다 마음에 드는 글을 골라서 여러 번 곱씹어 읽는 것이 좋다. 이 책이 도대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모르겠다는 불평 섞인 리뷰를 읽은 적 있다. 물론, 《섬》이 술술 읽히는 책은 아니다. 김화영 교수의 번역은 불친절하다. 이 책에 언급된 프랑스 작가들이 누군지 알려주는 주석이 없고, 간혹 독자가 이해하기 힘든 표현 몇 개 보인다. (특히 알베르 카뮈가 쓴 서문에 ‘지드적인 감동’(5쪽)‘멜빌이 「화요일」 속에서 보여준 순례’(8쪽)의 의미는 무엇일까. 이 단어가 들어간 문장을 이해한 독자는 과연 몇 명일까?) 그러나 책에 명확한 주제가 드러나 있지 않다고 말하는 건 읽는 이의 노력의 문제일 수 있다. 《섬》을 반복해서 읽으면 처음에 읽었을 때 스쳐 지나간 문장들이 눈동자 속으로 들어온다. 그 경험의 과정에서 독자 자신에게 어울릴만한 ‘특별한 주제’를 발견하는 것이다.

 

자기 자신을 되찾기 위한 여행(『행운의 섬들』), 비밀스러운 삶을 갖는 즐거움(『케르겔렌 군도』) 등을 강조한 내용이 이 책의 핵심 주제라고 믿는 독자가 있겠지만, 적어도 그르니에가 특별히 강조하려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이 책의 주제는 글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독자의 마음가짐 속에 있다. 그르니에는 원래의 인식을 뛰어넘어 새롭게 인식하게 만드는 사유 방식을 통해서 자신의 삶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다. 익숙한 대상을 다른 각도에서 보는 것. 이 경험은 새롭게 현실을 지각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이 특별한 경험은 결코 저절로 생기지 않는다. 새롭게 현실을 지각하는 법을 아는 독자들은 그르니에의 《섬》에 쉽게 도달할 수 있다.

 

그르니에는 공(空), 고양이, 비밀스러운 삶, 여행, 인도(India) 등의 소재에 대해 차분한 어조로 풀어낸다. 그가 바라보는 것들은 삶의 진정한 의미를 되새김질하게 해준다. 삶에 대해 의문을 품는 태도는 ‘삶 읽기’의 근원이다. 그렇게 그르니에의 사유는 시작된다.

 

 

나는 사물들이 지니고 있는 현실성이란 실로 보잘것없다는 사실에 대하여 생각을 되씹어보기 시작했다. 우리의 삶 가운데 일어나는 여러 사건들은 내부의 가장 깊숙한 곳에 감춰져 있던 것이 차례차례 겉으로 드러나는 일에 지나지 않은 것임을 나를 확신하고 있는 터이니까 말이다. 나는 그냥 살아간다기보다는 왜 사는가에 의문을 품도록 마련된 사람들 중의 하나였다. (『공의 매혹』 28쪽)

 

 

이 알쏭달쏭한 삶 속에서 생각의 꼬리에 꼬리를 물고 도는 작가는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찾으려고 한다. 『고양이 물루』는 작가가 물루라는 이름의 고양이 한 마리를 만나면서 실존의 의미를 찾아내는 과정을 보여주는 글이다. 우리는 고통을 피하려고 한다. 그렇지만 고통은 우리 곁에 찾아온다. 즐거움이 끝난 다음 찾아오는 고통이 있는가 하면, 엎친 데 덮친 것처럼 찾아오는 고통도 있다. 또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는데 불쑥 찾아오는 고통도 있다. 그르니에는 특이하게도 밤에 대한 끝없는 공포에 전율한다.

 

 

황혼녘, 대낮의 그 마지막 힘이 다해 가는 저 고통의 시각이면 나는 내 불안감을 진정시키기 위하여 고양이를 내 곁으로 부르곤 했다. 그 불안감을 뉘에게 털어놓을 수 있으랴?나를 진정시켜 다오」하고 나는 그에게 말하는 것이다.나는 하루에 세 번 무섭다. 해가 저물 때, 내가 잠들려 할 때, 그리고 잠에서 깰 때. 확실하다고 굳게 믿었던 것이 나를 저버리는 세 번…‥. 허공을 향하여 문이 열리는 저 순간들이 나는 무섭다」 (『고양이 물루』 41~42쪽)

 

 

그르니에는 어떻게 고통을 견뎌내고 삶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었을까. 이에 대한 해답은 고양이에게 말을 거는 그의 모습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르니에는 고양이 앞에서 고통을 진솔하게 고백한다. 고통을 받아 절망과 포기에 무너지는 존재는 왜소하게 보인다. 그러나 고통을 직시하는 용기는 인간만이 보여줄 수 있는 모습이다. 그르니에가 고양이에게 말 거는 모습이 우스워 보일 수도 있겠지만, 그의 고백은 진솔하다.

 

이 책 전체를 어느 고독한 남자의 긴 독백이라고 보고 싶다. 그르니에의 글을 읽으면서 고통이 아니라 ‘고통에 대한 태도’가 우리 삶의 방향을 결정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평범한 것들로부터 삶의 진실을 발견하는 그르니에의 사색은 ‘사라지는 것에 대한 의문’이 있기에 가능했다. 왜 사는지 되씹어보면서 살아간다는 건 넓디넓은 세상 속에서 우리의 편협한 시선을 뒤집어 자기 자신을 본다는 것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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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요정 2018-02-21 15: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시 읽어야겠네요. 저도 이 책이 문구들이 참 좋은데 뭔가 불친절하다는 느낌을 받았거든요. 물론 깜냥이 안 되는 것도 있지만, 저의 자세 또한 불량했던 것 같아요~ 명절 잘 보내셨어요?

cyrus 2018-02-21 21:12   좋아요 0 | URL
저는 잘 지냈어요. 꼬마요정님도 연휴 잘 보내셨는지요? ^^

내일 독서모임이 있는데 선정도서가 바로 이 책입니다.. ㅎㅎㅎ

분량이 얇아서 금방 읽을 줄 알았어요. 생각보다 쉬운 글이 아니었어요.
 
문주반생기
양주동 지음 / 최측의농간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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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당 최남선, 춘원 이광수, 벽초 홍명희는 식민지 시대 조선의 ‘3대 천재라 일컬었다. 그들이 천재로 군림하던 시대에 이 세 사람을 능가하는 새로운 천재가 등장했다. 무애 양주동. 어려서부터 익힌 한학에 능통했던 그는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향가 25수 전편을 해석했다. 선생은 생전에 스스로 천재이자 국보임을 내세웠다. 그의 언행을 요샛말로 하면 자뻑(자화자찬을 의미하는 은어)’에 가까운 셈이다. 그렇지만 선생은 자칭 국보라고 불릴 만큼 공부의 깊이나 재능이 비상한 사람이었다.

 

데카르트(Descartes)는 천재란 후천적 노력으로는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천재를 이미 태어날 때부터 선험적으로 알고 있던 지식을 통해 능력이 발휘되는 존재로 보았다. 그러나 양주동 선생처럼 후천적 노력으로 천재가 된 사람들도 있다. 선생의 수필집 문주반생기(최측의농간, 2017)를 선생을 위해서 제목을 다시 짓는다면, 나는 어떻게 천재가 되었는가라고 붙여주고 싶다. 천재성의 바탕에는 포기를 모르는 학구열이 있었다. 소년 시절 선생은 영어를 독학했는데 ‘3인칭이 이해되지 않아 겨울날 아침 20(7km)를 걸어 일본인 교사를 찾아간 일이 있었다. 교사의 설명을 듣고 집으로 돌아온 선생은 ‘3인칭의 뜻을 잊지 않기 위해 메모를 하고, 반복해서 읽었다.

 

문주반생기를 읽어야지 한평생 문학의 숲에서 자유롭게 노닌 문학인의 진득한 진지함에 공감할 수 있다. 이 책의 주인공은 단언 양주동이지만, 그의 삶에 거쳐 간 주변 인물들의 이야기도 흥미진진하다. 선생은 이 책에서 2, 30년대 문인과 문단의 다채로운 풍경을 생생하게 되살려놓는다. 대구에서 항일 운동을 펼친 시인 백기만, 선생의 술 동무 횡보 염상섭, 잊힌 요절 시인 이장희, 선생이 사랑했던 문학소녀로 알려진 강경애 등 그와 함께 문학에 대한 열정을 나눈 문인들의 모습을 만날 수 있다.

 

그동안 문주반생기는 문고본 형태의 발췌본으로 남아 있어서 술을 중심으로 한 문인들의 일화를 담은 회고록 정도로 알려졌다. 사실 문주반생기범인(凡人)’으로서의 독자들이 읽기 힘든 책이다. 한시, 동양고전, 서양문학 등을 인용 · 언급한 문장은 선생의 박람강기한 재능을 보여주고 있으나 독서 몰입을 방해하는 단점이 있다. 요즘 잘 쓰이지 않는 우리말과 한문은 상세한 설명 없이는 도저히 그 뜻을 알 수 없다. 그리하여 최측의농간 출판사는 초판본 문체를 그대로 유지하되 문장 이해를 돕는 1,996개의 각주를 달았다.

 

지금은 조금 가라앉혔지만, 작년 출판계에 초판본 복간 열풍이 불었다. 저렴한 비용으로 원본의 진본성에 다가갈 수 있게 해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으나 눈으로 보는 책의 근본적 한계도 여실히 드러났다. 초판 복각본은 독자가 소유하고 싶은 책일 뿐이다. 독자의 초판본 소유욕이 읽는 욕구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고 보기 어렵다. 최측의농간이 새롭게 편집한 문주반생기초판본 복간작업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고 볼 수 있다. 이 책은 세대 불문하고 '읽는 독자를 위한 초판본이다. 문주반생기편집을 위해 출판사 관계자들은 오랜 세월 걸쳐 옛 판본을 읽었다. 수많은 국어사전, 참고문헌을 활용하며 꼼꼼한 교정을 거친 출판사의 노력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 독자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읽는 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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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7-12-27 16: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었구나. 그런데 좀 어려웠나 보군.
그러니까 나도 좀 주춤해지네.
그냥 너의 리뷰로 만족해야 할 것 같다.

cyrus 2017-12-27 16:18   좋아요 0 | URL
어렵다기 보다는 읽기가 힘들었어요. 선생이 너무 많이 인용을 하셔서... ㅎㅎㅎ

2017-12-27 16: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7-12-27 16:21   좋아요 2 | URL
양주동 선생이 아주 어린 나이에 한문을 떼고(조금 과장된 면이 있을 거라 생각됩니다), 다섯 살 때부터 술의 맛을 알기 시작했을 정도면 조숙한 천재의 기질이 있었을 것입니다. 술을 많이 마시면 기억력이 떨어진다고 하던데, 애주가로 유명한 선생이 문장을 달달 외우는 것을 보면 선천적으로 타고난 천재인 건 확실합니다. ^^;;
 
고마워 영화 - 배혜경의 농밀한 영화읽기 51
배혜경 지음 / 세종출판사(이길안)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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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의 장점은 그 어떤 장르보다도 글 쓰는 주체의 사유와 정서의 무늬가 투명하게 드러나는 매력이다. 엄격한 자기통제와 문학적 수련이 담보되지 않았을 경우, 수필은 어느 순간 지리멸렬한 졸문이 된다. 자신에 대한 치열한 성찰과 타인과의 진지한 대화로 이루어진 탁월한 수필은 그 자체로 매혹적인 문학적 경지라고 할 수 있다. 배혜경의 두 번째 수필집 고마워 영화를 읽으면서 나는 오랜만에 탁월한 글을 읽는 즐거움을 느꼈다. 고마워 영화에는 첫 번째 수필집 앵두를 찾아라(수필세계, 2015)와는 또 다른 작가의 면모와 사유의 흔적, 영화에 대한 생각 등이 흥미롭게 표출되어 있다.

 

영화는 답답한 현실에서 나를 탈출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이다. 낯선 문화, 다양한 삶의 현장을 통해 세상을 배운다. 작가 특유의 소박한 필치로 영화라는 해방구를 통해 내다본 삶의 이야기들이 펼쳐진다. 고마워 영화는 영화감상의 특별한 안목이 보인다든가 대단한 해석이 있는 건 아니다. 그런 이점은 많고 많은 영화비평에서 찾으면 된다. 이 수필집은 똑같은 산과 강을 둘러봤더라도 그 쓰인 문체와 감상에 따라 읽는 맛이 달라지는 기행문처럼 그런 재미로 읽어 볼만한 책이다. 영화에 방점이 찍히는 책이라기보다는 산문이되 다만 그 소재가 영화가 되었을 뿐이다. 그래서 작가의 글들은 읽는 이들에게도 편안함을 준다. 카페에 앉아 내가 본 그 영화는 좋았어.”라고 대화를 나누는 기분이다.

 

작가의 영화 이야기는 우리들이 흔히 보는 그런 소모적이고, 읽고 나면 내 삶의 그 어느 한구석도 위안이 안 되는 그런 글들이 아니다. 그녀는 글을 얼마나 꼼꼼하게 쓰고 다듬었던지 읽는 내가 온몸에 힘을 주면서 읽을 정도였다. 그녀가 서문에서 인용한 영화 대사 삶은 디테일이다라는 말은 독자에게 영화 읽기의 가치를 일깨워준다. 별 볼 일 없는 것 같은 영화 장면까지 살펴보는 작가의 시야는 아마, 그녀의 진지하고 정직한 자기 성찰과 세상에 대한 뿌리칠 수 없는 따뜻한 애정에서 오는 듯하다. 그녀는 <더 리더, 책을 읽어주는 남자><레볼루셔너리 로드>에 연기한 케이트 윈즐릿(Kate Winslet)의 맨발을 주목한다. 작가는 배우의 맨발에서 영화에 잘 드러나지 않은 영화 속 인물의 표정을 읽어낸다.

 

사람은 다른 동물에 비교해 희로애락에 대한 감정 표현이 풍부하다고 한다. 다양한 예술 장르로 나타낼 수 있는 감정의 표현 방법 중에서 문학이 가장 근본적이며, 그것은 모든 사람이 가지고 있는 시심(詩心)에서 비롯된다고 한다. 따라서 시심이 메마르면 인간사회는 그만큼 무미건조해지고 오히려 살벌해지기까지 하다. 우리네 삶에서 시심이 실종되는 순간 감동적인 글은 더 이상 쓸 수 없으리라. <일 포스티노>를 소개한 글인 시인의 의무는 오랫동안 마음속 깊이 잠들어 있던 독자의 시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하다. 이 글은 문정희 시인의 시 가을 우체국으로 시작해서 파블로 네루다(Pablo Neruda)의 시로 끝이 난다. 영화와 문학이 정교하게 이어질 수 있는가 하는 점을 아름답게 보여주고 있는 글이다.

 

좋은 영화를 혼자만 숨겨두고 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낯선 영화를 함께 보며 친구의 우정은 더욱 무르익어가고, 같은 영화를 보았던 낯선 이는 어느덧 친구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고마워 영화는 그런 소박한 행복과 잔잔한 감동을 주는 책이다. 작가는 마음속에 간직해온 영화라는 보물을 끄집어내 공유한다. 이 책을 읽는다면 아름답고 향기로운 삶을 누릴 수 있는 멋진 영화 한 편 보고 싶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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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19 22: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7-12-20 12:08   좋아요 1 | URL
맞습니다. 프레이야님처럼 글을 써보고 싶습니다. ^^

2017-12-20 08: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7-12-20 12:10   좋아요 0 | URL
오히려 제가 프레이야님의 책을 읽으면서 더 잘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책을 너무 좋아해서 책 속에 파묻히다시피 살아갔습니다. 그래서 저 자신의 성격이 꽉 막혔다는 생각을 하곤 했습니다. 프레이야님의 글을 읽으면서 책의 지식을 습득하는 삶보다 사람 간의 정을 느끼는 삶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레삭매냐 2017-12-20 13: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에는 영화를 다룬 책들을 정말 찾아서 볼 정도
로 열정이 있었는데 이젠 영화도 그리고 영화를 다룬
책도 잘 보게 되질 않네요...

cyrus 2017-12-20 16:15   좋아요 0 | URL
예전에 ‘이달의 당선작’ 영화리뷰 부문이 있었을 때가 좋았어요. 그 시기에 깊이 있는 영화리뷰를 쓰는 분들이 많았어요. 영화리뷰 부문이 사라지고 난 뒤에 저도 영화 볼 일이 줄어들고, 영화리뷰를 쓰지 않게 되었어요. ^^;;
 
앵두를 찾아라
배혜경 지음 / 수필세계 / 2015년 1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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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우주지감이라는 이름의 독서모임을 알게 됐다. ‘우주지감우주시 지구 감동의 첫 글자씩 따서 만들어진 이름이다. ‘우주시는 팽창하는 우주, 즉 빅뱅(big bang) 우주론을 설명할 때 사용되는 시간을 의미한다. 한 달에 두 번, 오전과 저녁에 나를 관통하는 책 읽기라는 모임이 진행된다. 내가 참석 가능한 모임은 저녁 모임뿐이다. 이 모임에 참석하기 전에 준비해야 할 것이 있다. 선정도서를 반드시 읽어야 한다. 모임 참석자들은 각자 찻값을 내야 한다. 독서모임에 참석할 때 지켜야 할 점이 있다. 자신의 삶을 왜곡하지 않고 그대로 드러낼 수 있는 자세를 유지하는 것. ‘참석자 준비사항에 포함된 내용이다. 말로만 봐서는 어렵지 않다. 자신을 솔직하게 바라보고, 마음으로 본 내 모습 그대로 말하자는 의미로 볼 수 있다. 그렇지만 를 솔직하게 말하지 못하는 사람은 의외로 많다.

 

우린 남이 어디서 모여 무엇을 하는지 더 궁금해한다. 한병철SNS가 자발적으로 자신을 노출하고 전시하는 거대한 감옥, 디지털 파놉티콘으로 비유했다. 우리는 SNS에서 자신이 누군지 자유롭게 이야기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자신을 드러낼수록 남들에게 노출하려는(전시) 욕망이 강해진다. ‘디지털 파놉티콘에 갇힌 개인은 자신을 최대한 좋게 보이려고 애쓴다. 그렇다 보니 정작 나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보지 못한다.

 

디지털 노출증’, ‘디지털 구경꾼이 많아지는 요즘 시대에 진짜 를 만나는 시간이 필요하다. 시간을 길게 잡고 연습해야 한다. 책을 읽는 시간은 를 만나는 시간, ‘만을 위한 시간이다. 그 소중한 시간에 우린 책을 보며 삶의 자극을 받는다. 독서는 간접 체험을 넓히는 것 이상이다. 책을 공감을 키우는 재료이다. 따라서 독자는 작중 인물이 보고 느끼는 모든 것을 마치 자신이 그 사람인 양 생생하게 경험한다. 그 과정에서 책 속에 있는 진짜 자신의 모습을 확인하게 된다. 그래서 독서의 묘미는 책 속에 서서 자신을 제대로 보는 데 있다. 배혜경의 수필집 앵두를 찾아라는 이러한 독서의 장점을 만끽할 수 있는 책이다.

 

앵두를 찾아라에 수록된 수필들은 서로 다른 모습으로 독자들을 다가온다. 그러나 그 글들은 한결 같다. 일기부터 영화 이야기, 여행기까지 모두 일상의 단상들이 자연스럽게 녹아있어 읽는 이를 편안하게 해준다. 책장을 넘겨주는 여자는 점자도서관에서 낭독 녹음 봉사를 해온 글쓴이의 경험이 반영된 글이다. 이 글에서 글쓴이는 시각장애인들이 편안하게 느낄 수 있는 자신만의 목소리가 어떤 것인지 생각하는 장면이 나온다.

 

 

내 목소리를 누가 들을까 생각해 본다. 목소리와 억양이 듣기에 편안할까, 발음이 불분명한 곳은 없었을까, 가슴으로 감동이 전해질까. 갖가지 장르의 도서를 소리 내어 읽으며 내 앞에 어느 분이 있을지 상상해 본다. 안락의자에 앉거나 침대에 비스듬히 누워 지그시 눈을 감고 책을 듣는 사람들을 그려 본다. (37~38)

 

 

수필은 그냥 생각나는 대로 쓰는 산문이 아니다. 글쓴이의 체험조차 사유와 반성의 대상으로 삼아 독자와 함께 음미할 수 있는 산문이 좋은 수필이다. 글쓴이가 목소리를 알아가는 과정은 자신을 성찰하는 과정과 유사하다. 글쓴이는 자기 성찰을 통해 목소리의 진정성을 확보하려고 노력한다. 개별적인 성찰 노력이 없고, 타인에 대한 관찰에 익숙한 사람은 인내심이 필요한 글쓴이의 체험을 공감하지 못한다. 그렇게 되면 글쓴이의 체험을 통해 배울 수 있는 를 만나는 법을 못 보고 그냥 지나치게 된다.

 

살아온 삶에 대해 성찰하고, 마침내 진짜 를 발견한 글쓴이의 글에는 그런 자신을 끝끝내 보듬어 지키는 마음의 힘에 대한 성찰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섬에서 섬으로는 글쓴이가 섬을 여행하면서 건져 올린 통찰이 돋보인다. 글쓴이가 확인한 섬 여행의 목적은 자신을 위한 의 재발견이다.

 

 

타인의 말에 쉽게 휘둘려 분노의 파도에서 허우적대던 나는 정작 누구에게 화가 났던 것일까. 너로 인해 행복하지 않은 거라고 우기고 싶었던 건 아니었을까. 정말 행복한 자는 행복의 한가운데 있기에 행복하다고 떠들지 않는다. 정말 불행한 자가 불행하다고 떠들지 않는 것처럼. 행복이라는 감정의 층위는 얼마나 얄팍한가. 은근하고 깊이 있는 행복을 유지하려면 좀 더 의미 있는 대상에 즐거운 마음으로 임하는 길밖에. (112~113)

 

 

낯선 곳으로의 여행은 매혹적이다. 그러나 낯선 풍경과 정취를 보고 느끼는 것을 넘어서는 데서 여행은 새로운 의미를 획득한다. 여행은 자아를 발견하고자 하는 은밀한 욕망을 간직한다. 우리가 찾으려는 대상은 낯선 세상일뿐만 아니라 우리 영혼의 진짜 얼굴이다. 글쓴이의 여행에서 낯선 곳의 매혹은 부차적이다. 풍경은 페이드아웃(fade-out)’돼 사라지고, 남는 것은 견고한 자기 성찰이다. 여행은 어디에서 시작하든 결국 자신에게로 돌아온다. “여행은 진정한 자아를 찾아가는 과정이라는 교훈은 틀리지 않는다.

 

앵두를 찾아라억지 감동을 주지 않는다. 글쓴이가 거쳐 온 사색의 결과가 정제된 문장은 독자의 마음에 쉬 와닿는다. 수필집은 지극히 평범한 일상을 소재로 하면서도 결코 평범하게 받아들일 수 없는 지독한 현실감을 부여한다. 누구나 한 번쯤 실제 글쓴이처럼 경험하고 생각한 것 같은 착시 감각, 그 글 속에 벌어지는 사건들이 마치 내가 겪고 있는 것 같은 일체감들이 읽는 이들이 거쳐야 할 통과의례 같다. 진정한 를 만나는 것은 마음의 통과의례를 거쳐야 발현될 수 있다. 삶의 깊이를 응시하는 진정성이야말로 출구 없는 디지털 파놉티콘을 탈출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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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7-12-12 17: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전에 말씀하신 독서모임이군요^^: 마음 맞는 분들과 즐거운 시간 보내시기 바랍니다

cyrus 2017-12-12 18:04   좋아요 1 | URL
이 글은 간접 광고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모임에 가서 좋은 알라디너님들을 알리겠습니다. ^^